지난 달에 이스라엘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아일보가 주최하고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후원하는 에세이 콘테스트에 아주 운 좋게 당선이 된 덕분입니다. 생전 처음인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동아일보에는 제 사진이 실렸고, 저희의 수상 소식은 채널A 뉴스 한 꼭지로도 다뤄졌습니다. 방송에서는 정작 수상자보다는 시상자들의 얼굴이 부각되기는 했지만요.
하지만 가장 '생전 처음'인 경험은 단연 이스라엘과의 인연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창조경제에 대하여 에세이를 쓰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스라엘이 저와 무슨 관련이 있었겠습니까. 무지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겁니다. 심지어 출발하던 날 아침까지도, 제가 이스라엘이라 하면 떠올린 것들은 테러와 교전, 유대교, 성지, 그리고 모사드와 신베트 정도였으니까요. 그만큼 저는 이스라엘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에 다녀온 지금, 이 나라에 대해 제가 떠올린 키워드 중 가장 옅어진 것은 테러와 교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몇가지가 추가되었습니다. 생존, 과학, 더위가 그것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특히 최근에 이스라엘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일지 모르겠습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 희생자가 세자리수에 달하고, 하마스가 휴전 제의를 계속 거부하는 답답한 뉴스들이 전해져오기 때문일겁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머물 때, 이스라엘 정부는 납치된 세 학생들의 소재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귀국할 때쯤에 세 학생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골란 고원에서는 시리아군의 포격으로 이스라엘 청소년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전투가 본격화된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제가 있을 즈음에도 긴장은 최고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텔아비브는 너무나도 평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귀국 후 이스라엘에서 전해져오는 뉴스들에 대해 큰 괴리감을 느낍니다. 물론 시민들의 가슴 한켠에 있을 불안감까지 제가 본 것은 아니지만, 눈으로 보이는 텔아비브는 예상 밖으로 평온했습니다. 심지어 전 중동 세계를 통틀어 가장 긴장이 일상화된 곳이리라고 여겼던 예루살렘도 그러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첫날 밤, 거리를 걷던 우리 일행이 보았던 것은 술에 취한 예루살렘 청년들의 왁자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이스라엘의 일상일 것입니다.
포탄 연기에 가리워져서 우리가 자주 잊곤 하는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은 대단히 번영한 나라입니다. 매일같이 포탄이 떨어질 것 같은데도 이 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은 늘 A권에서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1인당 명목GDP는 우리보다 약 1만 달러가 높은데 성장률도 우리보다 높습니다. 평균수명도 세계 10위권에 듭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면적은 우리나라의 20% 수준이고, 인구는 우리의 15% 정도 수준인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3억의 아랍인, 15억의 무슬림들과 불편한 관계(물론 무슬림 국가, 혹은 아랍 국가 중에도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나라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누려왔습니다. 이스라엘의 탄생 자체를 부정하고, 이스라엘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적대자들과의 투쟁 속에서 말입니다.
사이즈는 좀 다르지만 우리와도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도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지우려는 이들과 싸워왔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제 그 중 모두를 우리의 친구로 만들었고, 다만 북한만이 60년 전과 같은 상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우리와 이스라엘은 아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서 위대한 생존의 투쟁을 벌여왔던 것입니다.
생존의 위기 속에서 번영을 일구어 내다. 얼핏 보면 참으로 역설미가 있는, 그래서 더 이 나라를 위대하게 보이는 말이지만 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인과 관계를 설명한 말인듯 합니다. 본래 개인도 생존의 위기에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그런 개인이 수백만이 모인 집단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아랍인들에게 죽고, 땅을 일구지 않으면 허기와 갈증에 죽는 판인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였을 테지요.
물론 그 정도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생존의 위기 앞에서 집단이 강해지는 것이 보편 법칙이라면, 어째서 멸망하는 국가와 민족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왜 이스라엘만이 유독 이런 번영을 누렸겠습니까? 분명 이스라엘만이 가진 무언가가 있었겠지요. 혹자는 탈무드와 그들 특유의 교육법에서 그 무언가를 찾으려 하고, 또 다른 이들은 해외 유대인들의 엄청난 영향력에서 그것을 찾습니다. 수천년간 박해받았던 경험과 한이 이들을 단련시켰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모두가 정답일 것입니다. 한 나라의 성공 요인을 어찌 감히 하나의 원인으로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 모두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하나라도 없었다면 힘들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지 모릅니다. 다만 그중 가장 크고 무거운 요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단연 건국 초기부터 있었고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국가 생존의 위기이리란 것은 확실합니다.
위에서 이스라엘이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했습니다. 생존의 투쟁을 벌여온 점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듯,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텔아비브는 너무나 평온하고 예루살렘의 밤은 흥청거릴지언정, 그들은 자기들이 처해 있는 생존의 위기를 한시라도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군인의 처우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남녀가 공히 군복무를 치르고, 국가는 그들을 섭섭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일개 병사도 휴대전화를 사용합니다. 휴대전화가 무엇입니까. 통신 수단을 넘어, 우리 시대의 공민증입니다. 장교도, 병사도 그 정도 선에서는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셈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서울의 밤은 예루살렘이나 텔아비브가 감히 비교도 못할 만큼 밝습니다. 하지만 서울 시민들은 북한의 장사포보다는 내가 탄 교통수단에 의해, 혹은 갑자기 땅이 꺼져서 죽을 것을 걱정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군대의 문제는 남자들의 문제가 되고, 그 중에서도 '군대에 있는, 혹은 군대에 아직 가지 않은' 남자들의 문제로 국한되고 맙니다. '강제로 끌려온' 이들은 추석에 생활관에서 자기들끼리 송편을 빚어 먹고, '자발적으로' 군대에 간 이들은 집에서 선물세트를 주고받으며 승진의 원대한 꿈을 꾸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러니 머리를 깎고 훈련소 문턱에 선 장정들의 얼굴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눈이 보이는 것일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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