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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5일 화요일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동아시아에 대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와의 인터뷰


■ 영토 야심과 맞물린 중국 민족주의 확산에 한·일 공동 대처해야
■ 북한 핵무기 절대 포기하지 않아… 6자회담 무용지물 될 것
■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은 취지만 좋을 뿐 실체 없어
■ 자본주의 양극화 폐해는 민주주의 정치체제 통해 극복 가능하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동아시아 민족주의가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하며 다자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한일간 관계 회복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는 나라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2008년 이후 공세적 외교 정책으로 전환했다. 중국의 부상을 꼭 위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큰 도전이다. 이해가 걸린 국가들 간에 함께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63)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동아시아에서 날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중국의 부상(浮上)에 역내 국가들이 경각심을 갖고 대처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중국의 남중국해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분쟁은 경제적, 법적 다툼이 아니라 민족주의 발흥에 따른 영토분쟁이라고 규정했다. 그 연장선에서 북한 체제가 취약성을 드러내며 붕괴하더라도 중국의 개입 가능성 때문에 남북 통일이 여의치 않을 거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미래 정치학자이자 역사철학자인 후쿠야마는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한 1989년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목받았다. 1992년에 이 논문을 바탕으로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을 출간했다. 공산권이 몰락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아 출간 동시에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키며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출간됐다. 이후에도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으로 세계적인 논객의 자리를 굳혀왔다. 월간중앙은 5월 6일 서울에서 그를 만나 동북아 민족주의 확산, 한일 간 역사 갈등, 북핵 문제 등 한국의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한국은 얼마 만에 다시 찾은 것인가?

“2년 전에 방문했다. 현재 ‘미국 민주주의 재단(The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NED는 전 세계의 민주주의 운동 확산, 시민사회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한다. 올 11월 서울에서 총회가 열린다. 민주주의운동 확산에 주력하는 이 기관에 대한 이해도 제고와 총회의 취지를 알리고자 방문했다.”

5월 6일 중앙일보-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포럼에서 특별 연사를 맡아 동아시아 다자주의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어떤 다자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나?

“많은 영역에서 다자주의가 필요하다. 경제 부분은 변화가 오고 있다. 중국이 경제분야에서 AIIB(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좋다고 본다. 이는 중국이 추구하는 동아시아 다자주의적 접근 방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안보 분야에서 중국은 전혀 다른 정책을 구사한다. 다자주의가 아닌 양자 관계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중국은 아시아 영토 문제도 경제 문제와 마찬가지로 다자주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동아시아 민족주의 고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적이 있는데?

“한·중·일 모두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시기인데다 서로를 자극하는 바람에 상황은 꼬여만 간다. 일본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아베 일본 총리만 해도 그렇다.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20세기 역사관을 가진 그가 하는 말에 한국과 중국은 반발하고, 또 일본은 계속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식으로 동북아 정세가 악화된다.”

강력한 미·일 동맹 추구, 보수주의적 국가 운영, 과거 역사에 대한 불철저한 반성으로 대변되는 아베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겠나?

“내가 아베였다면 위안부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사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회피함으로써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가 더 불편해졌다. 역대 일본 정부가 밝힌 사죄의 입장을 유지하고 수정하지 않는 게 일본 이익에 부합한다. 최근 체결된 미·일 간 신(新)방위협정 합의는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중요한 성과다. 하지만 아베의 과거 역사에 대한 해석은 동의할 수 없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나?

“중국은 꾸준히 영토 분쟁을 일으켰다. 중국은 2008년 이후 외교 정책이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부상을 꼭 위협으로만 볼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큰 도전이 될 것이란 사실은 확실하다. 중국은 분명히 영토적 야심을 강화할 것이다. 이해가 걸린 나라들이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중국은 계속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중국이 동중국해에서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것처럼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올 수도 있다. 남중국해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분쟁은 그 성격이 법적이거나 경제 자원을 둘러싼 분쟁이 아니다. 경제 관점에서만 보면, 실제 군사작전을 밀어붙일 합리적인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의 급부상과 중국 민주주의의 장래를 점쳐본다면?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 속도는 앞으로 점차 둔화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엄청나게 빨랐지만 그 속도를 유지할 수 없다. 6.5~7%의 성장률로 둔화됐다. 향후 몇 년간은 성장이 더딜 것이다. 중국식 거버넌스는 1978년 이후 매우 인상적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점들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중국식 성장 모델은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법치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기에 성장에 필요한 동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치는 시진핑 체제 아래에서 더 권위적으로 변했고 시민의 공론장인 인터넷의 자유도 줄었다. 이런 체제에서 부패를 척결하는 모습은 좋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다지는 결과만 낳는다. 공산당 지도부가 계속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AIIB가 중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줄까?

“AIIB가 금융 분야에서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의 성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지는 불확실하다. 중국은 자국 내 인프라 역량을 구축하려 하지만 그 성장 속도는 둔화될 것이고 수요 또한 감소할 수도 있다. 이 은행을 설립함으로써 중국 내부가 아닌 중국 밖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으려 들지도 모른다.”

5월 6일자 <중앙일보> 1면에서는 ‘한국 외교의 활로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전문가(24명), 일반인(1천 명) 설문조사 결과가 실렸다. 전문가들은 또 미·중·일·러 주변 4강과 한국의 정상 중국익을 챙기는 실리 외교를 가장 잘하는 지도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17명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꼽았다. 당신은 누구를 택하겠나?

“지금 언급한 국가 중에 정치적으로 잘하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진핑을 가장 잘하는 지도자로 뽑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교적으로 중국은 너무 공격적이고 동남아의 많은 국가에게 소외감을 안긴다. 일본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 시진핑이 외교를 잘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시진핑의 외교 정책과 통치 스타일을 덩샤오핑, 후진타오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중국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리더들의 외교 전략의 차이를 말하기는 어렵다. 상대적으로 덩샤오핑 때는 저개발 국가였기 때문에 큰 변화가 필요해서 경제개발에 많은 집중을 했다. 후진타오 시절엔 상황이 호전되면서 2008년부터 영토 문제에 손대게 됐다.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영토 분쟁을 이어갈 뿐이라고 본다.”

미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의 성과를 평가한다면?

“처음에 미국이 아시아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정책이 만들어진 취지는 좋았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오바마의 외교 정책에 대한 주요 연설 중 아시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게 그 방증이다. 그는 ‘회귀’라는 것을 이제 TPP협정으로밖에 살리지 못한다고 보고 있고, 그마저도 FTA 비준으로 이어질지도 불투명하다. 아시아로의 회귀는 아직 실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 이후의 리버럴리즘 미래를 어떻게 보나? 공화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게 없을 거라고 하던데?

“누가 선출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정치 체제라는 것이 언제나 의사결정을 방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돼도 의사 결정은 계속 지체될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인구 구성 측면에서 유리하다. 수적으로 보았을 때 민주당 지지자들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 지지층에는 히스패닉 계가 많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는 줄어들고 있다.”

“아직은 자유민주주의 대신할 체제 없어”

IS의 과격행동 등 여전히 <문명의 충돌> 논리가 유효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후쿠야마 교수는 “지하드나 IS와 같은 과격단체는 소수에 불과할 뿐 무슬림 국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고 볼 수 없다”며 고 새뮤엘 헌팅턴 교수의 논리를 비판했다.

1989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역사의 종언>에서 후쿠야마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틀렸고,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는 보다 앞선 사회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26년 동안 이 논제는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에 올랐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목소리가 높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언’의 논제는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의 다른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이 논제가 맞다고 본다. 앞으로 50년 후 유럽·미국·한국이 지금의 민주정부 체제를 유지할지 모르지만 중국의 권위주의, 독재체제는 변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정치체제는 안정적이지 않다. 중국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지속할 수 없는 체제를 갖고 있다. 특히 다른 나라들이 중국 모델을 채택하는 건 더 어렵다.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체제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외에 다른 대안은 여전히 찾기 어렵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금융위기로 논제가 틀렸다는 비판이 거세졌었다.

“그 관점에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자본주의는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한데 미국이나 영국의 금융 규제로 발생한 위기였다. 2008년 금융위기는 잘못된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경제적 양극화 심화가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주장과 논리(토마 피케티 등)가 광범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

“꼭 그렇게 불가피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성공적인 민주주의 국가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치적 수단을 가진다. 복지 국가에는 가난을 구제하는, 임금체계 같은 재분배 시스템이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양극화 문제를 안고는 있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민주주의와 연관돼 있어 이런 자정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경제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한 피케티의 처방, 즉 세제 개혁의 정책적 효용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할 수 있나?

“모든 국가는 부의 재분배를 위해서 부유층에 세금을 매기고 있다. 미국과 같은 경우도 굉장히 심한 누진세가 존재한다. 피케티가 제안하는 부유세 75%는 너무 과하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 돈 벌고자 하는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수니파 급진 세력 ‘이슬람국가(IS)’의 과격성과 IS 한국인 가담 등을 보면 ‘문명의 충돌’이란 고(故)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한 개념 아닌가?

“무슬림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을 보면 헌팅턴 교수의 문명 충돌에 대한 성찰은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중국·일본 등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이들은 서로를 하나의 아시아 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국가로 정체성을 판단하듯 국가는 중요한 단위로 남아 있다. 중동 국가들도 그렇다. 지하드나 IS와 같은 과격단체는 소수에 불과할 뿐 무슬림 국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문화가 충돌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논리다.”

후쿠야마 교수는 미국 정치제도가 총체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쇠퇴의 길을 가고 있다며 지난해 발간한 <정치 질서와 정치의 쇠퇴(Political Order and Political Decay)>에서 기능부전에 빠진 미국 제도를 비판했다. 그는 미국의 분권시스템을 지적하며 “지적인 경직성과 기득권층의 반(反)개혁적 행태로 미국 정치의 자기 수정기능이 정지됐다”라고 진단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 ‘거부권 정치’가 정치 마비시켜

미국의 정치제도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유럽에 견줘 극찬해왔던 모델이다. 어떤 점에서 무너진(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가?

“미국의 헌법은 토크빌이 말했던 것처럼 독재를 예방하는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의 목표가 있다. 하지만 미국 시스템이 ‘견제와 균형’을 벗어나 서로의 발목을 잡는 ‘거부권 정치(vetocracy)’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기 때문에 어떤 긍정적 결과에 도달하는 걸 저해한다. 국가적 난제에 대한 결정이 지연된다는 게 미국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시민의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과 정치제도의 문제들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전반적인 정치의 기능장애 현상이 극에 달했다. 예산, 세금, 이민 부분에서 의회가 결정을 내리는데 힘들게 한다.”

그 문제점을 미국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도 인식하고 있나?

“아주 오래전부터 인식해왔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자기들의 이익에만 집중하기에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정당과 이익단체는 정치자금과 영향력을 포기하려는 의향이 없다. 이슈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당 체제 때문에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익집단들의 양극화는 더 심각하다.”

외부의 충격만이 진정한 개혁을 강제한다고 했다. 외부의 충격이라 함은?

“아예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미국 제도를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지금 그런 합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외부의 충격은 일반적으로 국가 개혁을 위해서는 금융위기나 전쟁 같은 시스템을 흔들 만한 쇼크가 필요한데 지금은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2008 금융위기가 외부의 충격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많은 원인을 가진 복잡한 위기였다. 외부 충격이라 함은, 미국 시장에 유입돼 물가를 상승시킨 유동성이 특히 아시아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금융위기에 대해 외부 충격이 크다는 시각도 있지만, 내부의 요인도 있었다. 미국의 규제당국이 과도하고 위험한 대출을 구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발달과정에서 이런 분권 시스템의 기능 저하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이익집단 내의 파워 엘리트 그룹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부 시스템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첫 번째 책〈정치 질서의 기원〉에서도 중국의 한 왕조, 이슬람 오토만 왕조, 터키나 프랑스의 과거 정권에 대해서 언급했다. 국가의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권의 성격에 따라 시스템이 후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민주주의 체제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질적 평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질적 수준은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높일 수 있는 것인가?

“민주주의 체제를 지속하게 하는 힘은 경제 성장, 교육 기회 증진, 사회 인프라 확충 등의 서비스를 제공할 정치 지배구조를 만들 때 가능하다. 국가의 정부는 이런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역량을 가져야 하는 바, 부패 척결은 민주화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민주화를 어떻게 이루는가는 잘 알지만 부패 척결 역량을 갖추는 데는 서툴다. 미국이 정치 제도의 현대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정착시켰지만 부패 척결은 아직 현대화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도 독재권력을 제압하는 데 초점을 둘 뿐 효율적 국가관리에는 무능을 드러낸다. 내부 이념투쟁에만 지나치게 몰입한 대가라고 본다.”

“북한은 핵 포기 절대 안 해”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좌표를 짚는다면?

“1987년 이후 한국은 실로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정치에서도 경쟁 원리가 활발하게 작동한다. 언론의 자유나 공론의 장도 잘 형성돼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한국은 민주주의는 높은 수준을 구가한다. 한국의 문화가 변천 과정에 있고, (가부장적) 유교 문화가 일본에서보다 더 큰 도전을 받는 상황이다. 민주주의 측면에서 일본보다 한국이 더 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95년에 발간한 <신뢰(TRUST)>에서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원간의 상호신뢰가 낮은 것으로 비판한 바 있다. 지금은 어떻게 보고 있나?

“조금 복잡한 문제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사회의 성격이 바뀌게 됐고 실제 시민사회가 굉장히 발달했다. 예를 들어 미국 같이 한국에서도 교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하고 관계를 맺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인 양극화와 지역 갈등은 사회구성원 간의 상호 신뢰를 저해한다.”

후쿠야마 교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1기 때만 해도 네오콘의 대표주자로 분류됐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거치는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간 이력부터가 그렇다. 자본주의의 승리가 헤겔식 역사 전개를 종식시켰다고 역설한 ‘역사의 종언’이 네오콘들의 사상적 주춧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중동에 민주주의를 확산시켜 한다고 설파했었다.

하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전후해 네오콘 비판론으로 돌아섰다. 부시 행정부의 선제공격론을 비난하면서 네오콘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후쿠야마 교수는 당시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노선을 달리한 이유에 대해 “이라크 전쟁은 큰 실수였고 그 이후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해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네오콘의 대안으로 ‘윌슨주의 국제적 협조 노선’을 제시했던 그는 6자회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하드 파워를 앞세운 네오콘의 대안으로 윌슨주의 국제적 협조 노선을 제시했었다. 소프트 파워는 당면과제 해결에 유용한가?

“소프트 파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다른 국가에 영향력을 미치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다른 국가에 경제 발전과 함께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그 핵심은 군사행동을 외교 정책의 중심에 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소프트 파워를 통해 미국 영향력을 행사하고 민주화와 인권을 촉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북한 관련해 가능한 시나리오는 정권교체”

북핵 문제를 푸는 도구로서의 6자회담에 대해 후쿠야마 교수는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이라며 “북한은 북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데 관심이 없고 중국도 북한을 설득하거나 강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북아의 현존하는 가장 큰 이슈는 여전히 북핵이다. 이 문제를 푸는 도구로서의 6자 회담은 여전히 유효할까?

“아니다. (6자회담은)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이다. 북한은 북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데 관심이 없고, 중국도 북한을 설득하거나 강제하지 않을 것이다. 핵은 북한이 가진 유일한 자산이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핵’을 사용한다. 북한은 6자회담으로 한국·미국·국제사회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얻어냈을 뿐이다. 이게 없다면 수출도 못하고 통상도 못하는데 왜 포기를 하겠나?”

전 세계 유일의 분단 지역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 100년 후 한반도의 미래나 변모상에 대해 언급한다면?

“북한 체제는 취약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붕괴하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럴 때 통일 가능성이 생길 것이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이유는 중국의 개입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남과 북이 오랫동안 분단돼 있었다는 점도 순조로운 통일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세계사적 흐름에서 볼 때 통합을 지향하는 남한과 북한의 당국자들이 갖춰야 할 식견과 철학, 원칙이 있다면 어떤 게 있나?

“두 나라의 정치 체제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쉽게 이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고 남한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려볼 수 있는 시나리오는 북한의 정권교체다.”

최근 연이은 중·일, 미·일 정상회담은 한국 외교에 상당한 충격을 줬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러브콜을 받는다고 안주하는 사이, 아베 총리는 미·중 모두와 손을 잡는 모양새다.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평가와 조언을 한다면?

“우선 한국과 일본은 관계 회복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일이 서로 싸운다고 득이 될 게 없고 장기적으로 보면 공동의 이익이 달린 문제도 영향을 받는다. 물론 중국의 도전은 장기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안이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 문제로 감정의 골이 깊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든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는 나라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독일과 폴란드의 예를 봐야 한다. 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는 관계가 아주 불편했지만 양측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교과서 기술에 합의를 봤다. 이 부분을 일본과 주변국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하나의 방안이라고 본다.”

글=박지현 월간중앙 기자
사진=지미연 객원기자

[출처: 중앙일보] 프란시스 후쿠야마 “북한 붕괴시 중국 개입으로 통일 쉽지 않아”

2017년 2월 26일 일요일

독일통일 -2 (동독의 사정)

2가지 중요한 사건의 ‘발생시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본문 뿐 아니라 앞으로 연재될 글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짜(1989.11.9)와 독일통일 날짜(1990.10.3)이다. 양자 간에는 약 11 개월의 차이가 난다.

첫 회가 나간 후, “동독을 북한에 그대로 대입하면 큰 오류를 범할 것”이란 의견이 있었다. 맞는 말씀이다. 그래서 동독과 북한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우선 동독이 북한과 얼마나 차이가 많았는지를 보자.

통일 전 동독은 어떤 상태였을까? 이걸 이해하는게 독일통일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1989.10월 이후 ‘라이프치히’ 등에서의 “대규모 시위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자.

간단히 표현하면, 통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만큼 동독은 안정된 상황이었다. 물론 겉모습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때문에 미래예측에 실패했다.

동독은 사회주의권에서는 가장 잘 살았고 최고의 복지국가였다.
공업력이 세계 10위권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래서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의 최전선이기도 했지만, ‘롤 모델’이기도 했다. 1989년 1인당 GDP가 9,700 불이었고, 그 이전 5년간의 경제성장률은 3.02%로 서독보다 높았다.

(물론 과장되었다. 그런데 이걸 믿고 서독은 통일비용을 적게 예상했다가 낭패했다. 예를 들어 막상 통일해보니, 한 푼도 없다던 외채가 200억 불이나 되어, 매년 총외화수입액 중 62%를 외채이자 갚는데 쓰고 있었다. 동독 내 국유재산을 팔아 통일비용을 조달하려고 했던 계획도, 동독이 빈 깡통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동독이 깡통계좌가 된 이유는, 1980년 이후 야심차게 추진했던 ‘전자 및 화학분야’ 투자의 실패, 그리고 경제성장률보다 훨씬 높게 연평균 7% 씩이나 증가하는 ‘복지지출’ 때문이었다. 이건 장기집권자 ‘호네커’가 서독과의 경쟁을 의식하여 무리한 복지를 시행했기 때문일 것이다(어느 나라든지 복지는 망국병이다).

반면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안정될 수 없었다.

우선 동독에는 조직적인 반체제 세력이 없었다. 통일 후 밝혀진 동독 비밀경찰(슈타지)의 자료에 따르면, 1989.6월 현재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은 160개 조직에 2,500 여명이었고, 그 중 핵심요원은 60여 명에 불과했다.

(반체제 인사는 생기는 족족 서독에 팔았다. 판매단가는 두(頭) 당 5,300만원. 동독은 베를린장벽 붕괴 전까지 34,000 명의 정치범과 그 가족 25만 명을 수출했다. 여담이지만 수출품으로 변신하기 위해 일부러 정치범이 된 동독주민도 있었고, 그와 반대로 동독정부는 일반 형사범을 정치범으로 둔갑시켜 수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끔 소규모 시위가 있었지만, 시위대의 요구사항은 ”여행자유 확대, 평화, 인권, 환경보호” 등으로 체제개혁과는 무관했다.

‘슈타지’ 규모도 대단해서 1,700만 명을 감시하기 위한 ‘슈타지’ 요원의 숫자가 예하 병력까지 포함해서 30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8,000만 명을 감시했던 나치의 게슈타포가 32,000 명이었음을 감안할 것). 주민 62 명 당 1 명 꼴로 슈타지 끄나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독에는 소련군이 38만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은 집권 후부터 “임금인상, 휴가연장, 주택공급, 여행자유 확대” 등의 정책을 펼쳐, 19년 동안이나 안정적으로 집권하고 있었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전인 1989.5월 선거에서는 공산당의 득표율이 98.85 %나 되었다.

외교적으로도 미,영 등 세계 134개국과 수교하고 있을 정도로 동독의 지위는 확고했다. 이런 체제 유지에 대한 자신감이 동독 지도부로 하여금 서독의 ‘햇볓’을 받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동독은 서독과 총 7 차례의 ‘동서독 정상회담’을 했고, 서독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76년 서독과 ‘우편,통신협정’을 체결한 이후, 연간 2 억통의 서신, 3,600만 건의 소포가 교환되었고, 1,500여 회선의 전화가 개통되어, 거의 제한 없는 교류가 이루어졌다.

상호방문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동독인의 서독방문은 연간 100만 명 이상, 88년에는 675만 명이었다. 난민도 많아서 1989년까지 서독에 정착한 동독인은 480만 명이었다(불법탈출로 인해 국경에서 사살된 동독인은 총 197명).

동독인들은 1971년 이후 서독 TV도 마음껏 시청할 수 있었다(공식허용은 1980년). 1985년 기준으로 서독TV 시청가능한 인구 중 94 %가 거의 매일 서독TV를 시청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예상 외로 인권상황도 매우 좋았다.

동독은 1973년 이후 ‘유엔인권협약’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가입하여, 동 규범을 지켜야 했다. CSCE 의정서에는 ‘인권, 기본적 자유, 인적접촉 및 여행자유를 의무화’하고 있으며, 이 부분에 관한 한 ’내정 불간섭 원칙’은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서독정부는 인권, 여행 등에 관한 한 동독에게 양보한 적이 없었다. 아예 서독연방 헌법재판소는 1973년에 “인권문제를 양보하는 어떠한 합의도 해서는 안된다”고 판결해버렸다.)

이런 노력의 결과, 동독정부는 1984~85년 경에는 국경에 설치됐던 ’자동발사 장치’를 완전히, 그리고 지뢰는 상당량 철거했다. 1987년도에는 아예 사형제도까지 폐지했다!

쉽게 말해 동서독 간에는 언론, 방송, 학술, 과학, 기술, 환경, 보건, 문화, 스포츠, 청소년, 종교분야에 걸쳐 폭넓은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고, 동독은 꽤 유연한 체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상의 온건한 동독의 대국민 정책은, 상당부분 서독의 각종 지원(특히 ‘빌리 브란트’ 총리의 ‘뉴동방정책’)에 대한 대가로 이루어진 면이 있어, 종합적으로 볼 때 이런 교류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고 평가된다.

그래서 동독 입장에서는 서독이 소련 다음의 제2교역대상이 되었고, 서독과의 교역이 국민총생산(GNP)의 3%, 대서방 교역의 40~50%를 차지하게 되어, 서독 없으면 동독이 망할 정도가 되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독의 교회다.
통일 직전 동독에는 신구교를 합쳐 8,000여개의 교회와 500여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으며, 동서독간에는 종교 교류가 활발했다. 이렇게 많은 교회에 잠재적인 반체제 세력이 은신하고 있었던 것도 1989년의 대규모적인 시위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독 주민들의 시위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주의 정신’과 ‘민주적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동독주민들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국가들이 갖고 있던 자유주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었고, 1919년~1933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선진적 민주제도를 경험한 바도 있었다.

이상이 베를린장벽 붕괴를 야기한 ‘동독 내부의 사정’이었는데, 북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2016년 9월 27일 화요일

다시 생각해보는 위안부 문제

언젠가 위안부 얘기를 하겠다고 했었기에 내가 아는 범위에서 쓰고자 한다. 몇 가지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미심쩍어 책도 한 권 사서 읽었다.

이 방에서도 위안부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마이크류님이 첫 발제를 했었고, 내가 두 번째 발제를 했었다. 그 때 나를 친일파라고 욕하며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는 여성도 있었고, 친일파 논리를 그대로 사용한다면서 내게 절교를 선언한 사장님까지 있었다. 그래도 난 상관 없다. 내가 쓴 글이 진실(팩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진실이 어떤 가치나 확신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안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가치나 확신의 포로가 되어 그것이 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다. 확신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 건방진 말이지만 위안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위안부 문제는 민감하고 그만큼 성역화되어 있다. 나는 그 성역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위안부는 정신대와 다르다. 위안부는 성노예 생활을 했던 가난하고 무학(無學)의 여성이었지만, 정신대는 공장에서 일했던 교육 받은 여학생들이었다. 위안부는 제법 나이가 들었지만(평균 25세), 정신대는 중학교 재학생이거나 중학교를 갓졸업한 소녀였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위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추론을 포함하여 위안부에 대한 진실과 우리들의 오해를 열거해보겠다.

1. ’위안부소녀상’은 잘못 만들었다. 위안부는 소녀가 아니었다. 당시 위안부들은 지금의 윤락여성들처럼 제법 나이가 들었던 것이다.(예외는 있지만 이를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논지를 흐리게 하므로 앞으로도 예외는 무시하겠다.)

2. 위안부 문제를 좌지우지하는 권력기관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이름도 그래서 잘못 만들어졌다. 참고로 전쟁이 터지면 일손이 부족해지므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한다. 일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 정신대도 사실은 대부분 일본 여학생들이었고 조선인 여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위안부는 불법적이었지만 정신대는 합법적이었다. 위안부도 조선인 여성들만 있었던게 아니었다. 초기에는 주로 일본여성들이었고, 전선이 넓어지면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조선인 여성들의 비중이 커졌다. 위안부와 정신대가 다르다는 것은 이제 ‘정대협’조차 인정하고 있다.

3. 위안부 숫자가 20만명이라는 설도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실 20만명이라면 위안부 문제가 1990년대에 와서야 공론화되었을 리가 없다. 일제시대라고는 하지만 20만명이 끌려가는 동안 사회문제화된 적도 없었고, 또 일제패망 후 20만명이나 귀국했는데도 사회문제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추가] 위안부 할머니로 등록된 숫자가 234명 뿐일 리도 없다(2012년 기준). 정신대 숫자를, 그것도 일본인 정신대까지 포함한 숫자를 위안부 숫자로 둔갑시켜 우리들의 집단기억으로 남은 것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

4. 일본정부는 위안부 모집에 관여하지 않았다. 증거도 없다.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광범위하게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이게 핵심이다. 만약 20만명이나 되는 우리 자매나 딸을 강제로 끌고 갔다면, 그 여성들의 가족들이 아무 저항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을 리도 없다. 우리 조상들이 항의하거나 저항했다는 기록도 정황도 없다. 그러므로 일본정부에게 위안부 배상을 하라는 주장은 잘못이다.

5. 심지어 위안부 모집에 일본군이 개입했다는 증거도 없다.(이 부분은 삭제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개입을 한 것 같습니다.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만.)  물론 위안소가 군부대 내외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나 행정기관에서 위안소를 관리하기는 했다. 예를 들면 위생검진을 한다거나 위안소를 장교용과 사병용으로 구분했던 사례가 그것이다. 때로는 포주가 위안부들을 과도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일본군 부대장이 관리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 역시 대부분의 나라에서 나타났던 현상이다. 6.25 때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매춘여성들도 올라갔었고, 종전 후에도 군부대나 동두천 기지촌 같은 곳은 위생증(맞나?)을 가진 여성들만 매춘에 종사하도록 행정지도까지 했다. 이런 유곽이 자영업이었던 것처럼 일제시대 위안소 역시 기본적으로는 자영업이었다. 위안소 역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업자들과 군(軍)의 현실이 접목되어 나타난 자본주의적 사업이었던 것이다.

6. 시골 여성들을 속여 끌고갔던 사람들은 일본정부나 일본군인이 아니라 조선인 인신매매범이나 조선인 윤락업소 포주였다. 그들이 배움의 기회가 없어 무지하거나 쌀밥을 그리워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골 여성들을 속여서 끌고 갔다. 이건 60, 70년대 우리나라 매춘여성들의 경우와 같다. 지금도 스마트폰과 예쁜 옷 때문에 속아서 매춘여성이 되는 여자들이 많다.

7. 따라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오도 일본정부나 일본군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의 증오는 순진하고 무지하고 가난했던 자기를 속여 지옥으로 끌고갔거나 지옥에서 성노예로 부려먹은 인신매매범 및 윤락업소 포주들을 향해 있다. 물론 일제 공무원이나 일본군이 와서 데리고 갔다는 증언은 있지만, 아마도 그건 인신매매범들의 위장술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위안부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일제가 아니라도 지금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나 매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8.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소설이나 영화에서 일부 다루기는 했지만 전국 규모의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식의 서술은 없었다. 기껏해야 위안부들의 비참했던 생활이나 사랑 이야기였다. 1990년대에 위안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도 일본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위안부에 대한 연구는 일본이 훨씬 광범위하고 깊이있게 다뤘다.

9. 뒤늦게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문제가 되자 일본정부도 책임을 느끼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위안부 배상(보상인가?)에 대한 법을 만들려고 했지만 일본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국회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할 수 없이 일본정부가 꺼낸 카드가 국민들 성금을 모으고 거기에 정부예산을 보탠다는 것이었다. 그게 한일이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묘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일본국민들이 동참해서 만든 기금이 ‘아시아여성기금’이었다.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수상의 사과편지와 함께 위로금을 주는 것을 시도했다.

그런데 강성 일변도의 정대협이 전면에 나서면서 수령거부 운동을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사실 상당수 할머니들이(60명인가? 30명인가?) 위로금과 수상의 사과편지를 받기도 했다. 참고로 2012년 현재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 수는 234명이었다.

10. 정대협이 설치면서 위안부할머니들이 정대협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강성이 아니면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위로금을 받은 할머니들조차 침묵하고 ’수요집회’에 나서야 했다. 게다가 일본대사관이나 외국에 톡 쏘는 눈을 가진 ‘위안부 소녀상’까지 세웠다(정말 치졸한 대응이다).

그러자 ‘언제까지 사과해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인식이 일본인들에게 퍼졌다. 대유행했던 한류가 사라지고 혐한류가 판을 채웠다. 아시아여성기금에 성금냈던 일본인들까지 혐한류로 돌아섰다. 일본은 군국주의자들이 설치는 세상이 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한국에서도 대일적개심이 널리 퍼졌다. 한일이 서로를 증오하는 지금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그 사이에 정대협에서 활동했던 리더들은 장관, 국회의원, 심지어 총리까지 되었다.

결국 누가 이익을 보았고 누가 손해를 보았나? 이게 도대체 정상인가? 참으로 안타깝고 원망스럽다.        

11. 기타 몇 가지 사실 : 위안부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하루에도 수 십명의 군인을 받아야 했고, 죽음의 전투를 앞둔 일본군의 폭력적, 변태적 성행위에 시달리기도 했다. 포주나 일본군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일본군과 막장의 인생이 상호 연민으로 작용하여 일본군과 같이 울고 사랑에 빠진 위안부도 있었다.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일본군 장교의 현지처 같은 생활을 즐기며 함께 말탔던 추억을 그리는 위안부도 있었다.  반면 악착같이 돈을 모은 사람도 있었다. 빌린 돈을 다 갚고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도 남아 있으려는 위안부도 있었다. 이상은 지금도 흔히 있는 윤락녀들의 모습이다.

일본군은 점령지의 여성들을 약탈물로 간주하여 강간을 하고 죽이기도 했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약탈물이 아니었기에 동료 또는 군수품같이 생각하여 적국 여성들처럼 대우받지는 않았다. 일본군이 전투에 나가면 반드시 이기라며 일본군을 응원하는 위안부도 있었다. 아니 많았다.

12.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배상할 일이 아니다. 당시 위안부 모집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그러므로 돈벌이에 눈이 멀어 불법에다가 비도덕적 상행위를 했던 인신매매범이나 포주가 비난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도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바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착취, 즉 페미니즘적 시각 또는 사회안전망 시각에서 접근해야 맞다.

2016년 9월 19일 월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1) 북한은 고구려 후손이 아니다

북한 사람들을 고구려 후손이라고 하셨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소제 북한은 고구려 후손인가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북한은 현재 명칭이지요.  그 전으로 올라가면 조선의 북부 지방입니다. 북한은 이상한 이름 양강도 자강도를 만들어 놓았지만, 실제는 자강도는 평북이고 양강도는 함북입니다.

함경도 사투리를 보면 그 맥은 강원도에 이어집니다.  강원도 사투리를 더 강하게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면 됩니다.  강원도 사투리는 경북 지방으로 가면서 약간 달라지지면 맥은 연결됩니다.  결국 경상도 - 강원도 – 함경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예전에 하나로 수렴된다고 유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유추되는 원점은 경상도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면 평안도는 어떨까요?  이것은 사투리로 찾아가기에는 조금 힘든 면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를 과거로 추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선은 고려의 후손입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국경선이 북쪽으로 조금 더 확장됩니다. 육진을 개척할 때 그 지역들(고려의 국경선에서 압록강 두만강 까지)는 중국인들의 영토가 아니라 후에 만주 족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진 족들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여진족들이 사는 땅에 고려나 조선인들이 들어가서 농토를 만들어 어울려 살았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영토를 확장한 것이 지금의 국경선임은 우리가 이미 배워서 알고 있죠.  그러면 겨우 서경(평양)까지 영토를 삼고 있던 고려는 바로 통일신라의 후손이며, 통일 신라의 후손이 거의 지금 한국인의 싱크로율 99% 인 것입니다.  약간의 여진족과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면 삼국 시대에서 신라가 통일하였을 때, 백제인은 전원이 통일 신라로 복속되었지만 고구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구려는 원래 국민의 구성이 복잡합니다.  집권 세력은 부여 족이라고 할 수 있고, 동쪽에 부여나 동예나 옥저 출신들이 있었지만, 그 외에 말갈, 거란, 여진 족의 조상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망했을 때, 기록에 의하면 겨우 10 만 명의 유민이 신라로 들어 왔을 뿐입니다. 고구려 주민의 다수는 그대로 남아 발해 건국에 이바지합니다.  나중에 발해가 망했을 때, 발해 유민의 거의 대부분은 고려에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일본에는 고구려 유민이 20 만명 건너감)

즉, 고구려를 근간으로 하는 민족 중 한국민족과 관련이 있는 부여, 동예, 옥저 출신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지금의 한국민으로 후손을 거의 남기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통일 신라의 후손들이 올라가서 퍼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성의 분포를 보면 그것은 자명합니다. 북한 통계는 확실히 나와 있지 않지만, 김이박최정의 구성 비는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보입니다. 한국인의 분포는 이미 조선 시대에 국가 전체로 동질적(Homogenious) 이었습니다. 거기에 약간 여진족의 후손들이 섞인 상태입니다.

알고 보면 사는 땅의 위치에 관계 없이 북한이나 서쪽 지방이나 우리는 모두 통일 신라 인의 후손입니다.

2016년 9월 17일 토요일

한민족은 누구인가? (2) 언어학적 추적

어족을 추적하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근원을 추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학계에서는 별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는 못하다.  하나의 민족이 그 언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로 갈아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연구가 전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경우 그 사용 언어를 어느날 갈아탔다고 볼만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추정 정도만 알게 되고 굳이 결론을 내지 않더라도 아주 많을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한국어는 교착어로 분류되며, 알타이 어족으로 분류된 적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대략 어족 구분하는 법을 살펴 본다.

먼저 유형적 분류법에 의하면 세계에는 중국어, 타이어 같은 고립어가 있으며, 한국어, 일본어, 몽골어 같은 교착어, 독일어, 프랑스어,러시아 어 같은 굴절어로 크게 3 대 분류가 있다.  교착어는 SOV (주어-목적어-동사) 형 문법 체계를 가지며 현란한 어미 변형으로 상당한 문법체계를 갖춘다.

20 세기 초 핀란드 언어학자인 람스테트가 일본에서 일본어를 연구하다가 거기에 온 조선 유학생의 조선어를 채취하면서 조선어를 연구하고 그 결과 그는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어 족에 속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30 년 대 이후로 우랄어와 알타이어는 연관 관계가 없어져서 우랄 알타이어 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페기되고 한국어 일본어 등은 알타이어 계통일 것으로 오래 동안 믿어져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국어와 일본어는 알타이어 족에서도 빠지게 되고 불분명한 소속으로 남게 된다.

한국어가 알타이어 족에서 빠지게 되면, 복잡한 일이 생긴다.  몽골어를 비롯해서 만주어 등 북방 계통 사람들이 모두 알타이어 족에 속하는 데, 한국어는 같은 어족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과 적어도 언어학적으로는 연관성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학자들이 어족 분류로 중요하게 보는 요소는 그 문법 요소가 아니라 단어들의 유사성을 따진다.  가령 불이나 물같이 초기부터 생성되었을 법한 단어들은 그 발음들이 약간 달라질 수 있지만 매우 유사해야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인데, 몽골어의 단어들과 한국어의 순 한국어(한자어 파생이 아니라)의 발음 연관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같은 교착어로 분류되지만, 같은 형식의 문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다. 5,000 년전 북유럽에서부터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빗살무늬토기 출토 지역은 또한 알타이어 족의 분포와 매우 비슷하게 되고, 북방계 민족의 이동으로 손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이 알타이어 족 배제가 됨으로써 힘을 잃는 것이다.

언어학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어와 일본어는 바로 옆에 알타이어 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있음에도 그들 언어와 관계없이 매우 독립적으로 또한 자생적으로 우연히 교착어적 특성, 유사 알타이어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어설프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생각해 보았다.

언어는 엄마한테 배운다. 아빠는 씨를 뿌리고 돌아다닐 수도 있다. 청동기를 손에 쥔 남자 정복자들은 마을들을 쳐들어가서 이 민족 종족의 남자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여자들에게는 자신의 씨를 뿌린다.  그리고 잠시 후에 또 다른 마을을 정복하러 다닌다.  아이는 남자의 아이이지만 엄마의 말을 배운다.  아이가 배우는 것은 문법 구조이며, 어쩌다 한 번 씩 들리는 아버지와 소통하기 위해서 단어들을 배운다. 단어를 배우는 것은 쉽지만, 문법을 배우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문법 구조를 오랜 기간 엄마한테 배우고, 가끔 들리는 아버지의 말은 단어만 배운다.   이 가설에 의하면 엄마는 주로 알타이어 족 사람들이지만, 남자들이 누군지 헷갈리게 된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인데, 청동기도 역시 비파형 청동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또한 북방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중국인도 북방계도 아닌 제 3의 종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삼한 지역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북방계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삼한 사람들이 북방에서 온 사람들을 정복 (남자가 여자를)하였는 지 모른다. 역사 유물로 보면 납득이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를 하나의 가설로 남겨 놓고 싶다.

2016년 4월 25일 월요일

국회의원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요즘 한국은 선거를 앞두고 거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가있습니다. 4월 13일에 선거하는데, 이번은 국회의원 선거입니다. 내년엔 또 대통령 선거를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총선이라고 하고, 대통령 선거는 대선이라고 합니다. 제가 북에 살 때는 북쪽 사람들도 남쪽의 대통령 선거 결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신문에 나오는 아주 작은 단서를 갖고 이번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 예상을 했었지요.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선 그저 그런 것을 하겠거니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시간엔 남쪽의 선거 제도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북한은 인민과 당, 수령의 삼위일체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건 사실상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적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제도인 한국은 삼위일체와는 정 반대로 삼권분립이라는 원칙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삼권 분립이란 국가 권력을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으로 나누고, 서로 상호 견제 시켜 국가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채택된 제도입니다.

삼권분립의 원칙은 1787년 미합중국 헌법에 처음 명시됐는데, 오늘날에 와서 민주주의 국가들 대부분이 헌법에 그 원칙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나눠놓아야 독재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입법권이란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인데, 이 권한을 한국에선 국회가 갖고 있습니다. 국민이 선거하는 국회의원 300명이 법을 만들거나 폐기하죠. 행정권이란 정부를 이끌어 가는 권한인데, 이걸 대통령이 총괄합니다.

사법권이란 한마디로 법을 집행하는 검찰, 재판소 등을 말합니다. 사법권을 독립시켜야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법을 어기면 처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법 분야에서 일하려면 법조인이 돼야 하는데, 이건 지금까지 사법시험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소수에게 주어지던 권한이었습니다.

1970년대엔 전국적으로 100명도 안되는 사람에게만 법관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2000년대 들어와서 한 해에 1000명의 법조인이 탄생했습니다.

그래도 공부만 잘하면 법조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가난한 집 자식이라도 법관을 꿈꿀 수 있었습니다.

행정권을 가진 대통령은 보통 국회의원을 거쳐 정당의 수장이 된 사람이 선거에 나와 당선됩니다. 국회의원 되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정당 대표가 되기는 더 어렵고, 대통령까지 되려면 말 그대로 하늘의 점지를 받아야겠죠.

남쪽의 국회의원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하고 동급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혀 다릅니다.

북한 대의원은 국가에서 사실상 임명하는 것으로 선거란 것을 치르긴 하지만, 사실상 후보가 한 명밖에 없는 형식뿐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국회의원 300명은 인구가 20만~30만 단위로 나눠놓은 선거구에서 여러 당 후보가 경쟁해서 뽑힙니다. 그 경쟁하는 것을 선거운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당에서 임명한 후보가 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에서도 그 지역구 후보가 되기 위해 당내 경선이란 것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선거 몇 달 전부터 정말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이런 소식이 신문을 계속 장식합니다. 선거에서 지면 반발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가 왜 떨어졌냐면서 당을 탈퇴해서 무소속으로 나갑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4년에 한번 국회의원의 30~40%가 새 사람으로 바뀝니다. 누구는 한번만 하지만, 누구는 대여섯 번씩 합니다.

4년짜리 의원 다섯 번을 하면 20년이나 국회의원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국회의원이 되면 계속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사람들도 쭉 늘어섰으니 지키려는 자와 밀어내려는 자의 싸움이 치열하겠죠. 북에 사시더라도, 국회의원이 뭔지 몰라도, 국회의원 계속 하겠다고 버틴다는 소리는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권력인데, 당연히 손에서 놓기 싫겠죠.

게다가 국회의원이 되면 특혜가 엄청 많습니다. 사실 북한 주민들은 남쪽 국회의원이 어느 정도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지 그게 매우 궁금할 것입니다.

국회의원은 장관 아래 직위인 차관, 북한으로 말하면 부부장 정도의 대우를 해줍니다. 차도 나오고 운전사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부부장과 같이 대우해주는 것은 아니고, 의원 한 명 한 명이 걸어 다니는 입법기관이기 때문에 장관을 불러다 호통을 칠 수 있습니다.

의원 연봉은 12만 딸라 정도 됩니다. 그런데 보통 국회의원 정도 되면 돈이 많아서 돈 벌기 위해서 의원이 되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 외 9명의 보좌관을 둘 수 있고, 이들 임금까지 포함하면 해마다 의원 한 명에게 50~60만 달러의 돈이 듭니다. 그밖에도 국회의원은 200가지에 가까운 특혜를 받는 답니다.

이렇게 큰 권력과 특혜를 가지고 있으니 한번 되면 놓기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그러다보니 국회의원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돼야 하는데, 특혜를 잃지 않겠다고, 또는 새로 가지겠다고 줄을 서는 현상이 많습니다.

북한에서 노동신문이랑 보면 맨날 한국 국회 싸움 비난하던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걸 보고 남조선 정치판이 개판이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래도 저는 그런 개판이 김정은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북한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서로 다투기라도 해야 국민들이 그걸 보면서 뭐가 잘못됐는지 알기라도 하지 김정은처럼 혼자 제멋대로 결정하면 나라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방향조차 알 수 없죠.

제일 중요한 차이는 남쪽은 선거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 의원은 교체되지만, 북한은 김정은의 눈 밖에 난 간부가 밀려나죠. 그러니 간부들이 인민의 눈치 따위 신경이나 쓰이겠습니까.

북한도 하루 빨리 인민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사람을 뽑는 그런 사회가 돼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18467

2016년 4월 19일 화요일

"이승만 국부론"과 "8.15 건국절"을 이승만 어록으로 격파하다.




대한민국은 건국절을 따로 두지 않는 대신, 3.1절을 그 연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연설에서 드러나는 그의 사상은 "정부 수립" 과 "민족 해방" 이라는 두가지 개념이 있고, 이는 광복절과 삼일절이라는 두가지 형태의 기념일을 제정함으로서 드러나지요. 3.1운동으로 민족적인 합의를 이룬, 민족자결주의에 기반한 민족의 정부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일제에 폭압에 밀려 중국 대륙에 피난하다가, 민족 해방으로 인해 실질적인 정부의 구성을 하였다 라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설립은 1919년에 했는데, 나라가 없어 정부 구실을 못 하다가, 나라가 해방 된 뒤, 실질적인 정부 구성을 하였다는 요지의 주장을 합니다.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박사

즉 정부 수립, 건국절은 이미 그분들이 주장하시는 국부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 이승만 국부론으로 넘어가면, 어느 연설에서도 이승만은 자신이 국가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부분도 없으며, 국가의 창립의 공을 모두 민중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정부수립 자체의 공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백성들에게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부분도 많습니다.

이는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ramer)들이 쓴 저작과는 미묘하게 다른 부분입니다. 연방주의자 논집과, 제퍼슨의 연설, 그리고 워싱턴의 취임 연설(1차)와 고별사에서 나타나는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국가를 설계할까?" 라는 질문을 고민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과는 달리, 이승만 자체는 정부 수립은 나 혼자만이 아닌, 민중들에 의해서 이미 설립되었고, 나는 국민들에 의해서 선출된 민주정부의 대통령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승의식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그의 대부분의 연설은, 민중들의 투쟁과 독립을 위한 열망아래 건설된 정부를 실질적으로 남부에서나마 실현했고, 어떻게 북쪽과 침략자로부터 자유를 수호할까 정도의 말만 되풀이됩니다. 즉 그는 "민주국가와 자유의 수호자"를 자칭했을지언정 "국가의 건설자"를 자처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러한 부분 말고, 여러분들이 다 아는 헌법 전문에서도 건국절과 이승만 국부론이 안 되는 이유를 한 문장에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 헌법 서문

서론은 이쯤 하고, 그가 쓴 연설문들을 차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위에서 쓴 부분을 감안하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부분 맟춤법과, 지금에는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토씨하나 안 빼고 수록했습니다.

우리 국가의 자유를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우리 의병들이 싸우며 보호하라했고 1919년에 만세운동으로 우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중국과 만주에서는 우리 국군의 잔병이 1945년까지 싸워오다가 마지막으로는 공화민주국가(共和民主國家)의 결실이 되여 지나간 4년 동안에 처음으로 민국정부(民國政府)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

제 2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연설 중

30년 전 오늘에 13도 대표인 33인이 비밀히 모여서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민주국의 탄생을 세계에 공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선열들이 용감스럽게 이 일을 행한 환경이 140여 년 전에 미국독립선언을 서명하던 그 때의 형편만 못지않게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는 정신은 어디서나 한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건설하는 민주국은 탄생한 지 아직 1년이 못되었으나 사실은 30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제 30주년 삼일절 연설 중


다행히 UN감시 하에 민국정부가 수립된 것은 우리 민중이 3·1정신을 지켜나오다가 마침내 민주정부를 완전히 수립한 것이니, 실상 32년 전에 우리 3·1운동을 주창한 선열들이 세운 정신적 민주국가를 이번에 사실적으로 완수한 것이오, 우리 민주정부가 성립된 지 얼마 안에 세계 모든 문명국가들의 지지를 받아 오늘 UN군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과 전무한 물질력으로 우리를 도와주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 32주년 삼일절 연설 중


삼십삼년전 오늘인 일구일구년삼월일일에 우리애국지도자 삼십삼대표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이를 세계에 공포한 것임니다. 그때에 공포된 독립의 정신이 실지상으로 출현되여 일구사팔년 팔월에 대한민국 주국이 탄생된 것이니 지금에 우리는 이 독립을 유지하며 공고커 하기 위해서 혈전사수하고 잇는 중이며...(후략)

기미년, 삼월일일에 선포한 우리 독립선언서에 한 구절은 삼십삼년전에 적합한 것이 오늘에 와서도 적합한 것임니다. 이 구절로 내 말을 맛침니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하노라

제 33주년 삼일절 연설 중

그러나 우리 독립은 우리 전민족의 간담(肝膽)과 정신 속에 사라잇섯던 것입니다. 이 독립이 우리 해외에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사라 잇섯던 것입니다.우리 독립은 세계에 가장 오래고 위대한 역사의 일부입니다.우리 한인(韓人)된 자는 이날에 우리가 행한 일과 또 우리가 대표한 국가를 자랑하고저 하는 바입니다.

제 35주년 삼일절 연설 중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3월 1일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민국이 정신적으로 탄생한 날입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우리가 존경하며 기념하는 33 선렬들이 서울 명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 경찰을 불러와서 잡아가라 한 것입니다.

제 38주년 삼일절 연설 중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 날 우리가 다 같이 모여서 공동히 할 일은 그때 우리의 정형이 어떠하였던 것과 또 우리의 33선렬들이 죽기로 결심하고 이 운동을 시작해서 경향에서 일시에 일어나서 피를 흘리고 싸운 것과 또 한편으로는 임시정부를 공포한 열렬한 역사를 우리가 다 기념해서 그 정신을 이르켜야 되는 것입니다.

 제 40주년 삼일절 연설 중

1919년(기미년)에 우리 13도를 대표한 33인이 우리나라 운명 개조하기 위하여 1776년에 미국 독립을 선언한 미국 창립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 한국을 독립민주국으로 공포한 것입니다. 이 민주정부가 서울서 건설되어 임시로 중국에 가있다가 3년 전 오늘에 우리 반도남방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 정부는 대부분 미국과 UN 각국의 도움으로 태생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한국 천지에 자유가 탄생한 이날을 경축하는 우리로는 이 역사를 이즐 수 없는 것입니다.

제 6주년 광복절 연설 중

즉,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기에 건국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삼일절을 국가가 기뻐하는 국경일로서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국부론을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창립의 주체가 국민, 민중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오, 8.15 건국절을 주장함은, 3.1운동 당시에 "조선인민"의 마음속에 이미 건국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016년 4월 15일 금요일

전작권없으면 한국 핵무장해도 무용지물



핵무장론의 자충수 전시작전통제권

2014년 10월 23일(현지시각) 한민구 국방부 장관(오른쪽)이 미국 워싱턴 국방부 청사에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재연기를 명시한 양해각서(MOU)에 서명한 뒤 척 헤이글 미 국방부 장관에게 건네고 있다. 사진 제공· 국방부

‘로켓군(火箭軍).’ 중국 인민해방군이 1월 1일 공개한 핵·미사일 전담 부대의 새 이름이다.

1964년 10월 첫 핵실험을 실시한 중국은 이듬해 5월 탄두를 소형화해 항공기에서 투하하는 폭발실험을 진행했고, 66년 6월 6일 기존 육·해·공군과는 별개의 핵전력 전담 부대를 창설해 ‘제2포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외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도록 지은 이 이름이 근 50년 만에 변경된 것이다.

1949년 첫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은 59년 ‘전략로켓군’을 창설해 핵과 미사일전력을 맡겼다.

2006년 1차 핵실험을 실시한 북한 역시 2012년 ‘전략로켓군’ 창설을 공개했고, 2년 뒤 ‘전략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세계 최초·최대 핵 보유국인 미국은 1946년 창설한 전략공군사령부(SAC)를 거쳐 지금은 전략사령부(STRATCOM)에서 핵전력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주요 체계를 운용한다.

이렇듯 역사상 핵전력 보유에 성공한 모든 국가는 예외 없이 첫 핵실험 후 수년 이내 별도의 전략부대를 만들었다.

뒤집어 말해 이러한 군사적 운용체계를 갖춘 뒤에야 비로소 사전적 의미의 ‘작전배치’를 완료할 수 있었고, 핵무장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무도 몰래 산간벽지에 숨겨놓았다 갑자기 꺼내 쏘아 올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군사지휘구조 속에서 명확한 명령체계를 완비해야 국제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변수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갈 수 없는 게 확실하다면, 주변국 누구도 신경 쓸 리 없다.

‘인식(perception)의 싸움’

이렇게 놓고 보면 명확한 사실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핵무장과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사이의 절대적인 상관관계다. 한국이 핵무장을 선언할 경우 이어질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등 다양한 난관에 대한 논의는 일단 차치하기로 하자.

미국이 이를 용인해가며 한미동맹을 유지할 개연성이 극히 낮다는 사실 역시 무시해보자. 어렵사리 핵실험과 미사일 탑재, 전력화를 진행한 뒤 이를 운용할 부대를 ‘전략미사일사령부’라는 이름으로 창설했다고까지 가정해보자.

그리고 발생한 북한과의 전면전. 평양을 향해 진격해 들어가는 한미연합군의 공세에 몰린 북한 김정은이 핵미사일 발사단추를 눌러 서울이 폭격됐다.

수십만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이미 데프콘(DEFCON)3을 훌쩍 넘어선 상황에서 전작권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넘어가 있다. 한국군 핵무기를 관장하는 사령부 역시 이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개전 후 연합사령관은 한미 양국 대통령의 통수권 지휘를 받아 전략적 결정을 수행한다. 핵무기의 사용은 그 핵심 중 핵심이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핵무장에 성공한다 해도, 실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의 동의 없이 이를 사용할 방법은 없다.

국제정치는 본질적으로 ‘인식(perception)의 싸움’이다. 한국의 핵무장이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에게 유효한 변수가 되려면, 한국이 자신의 결정에 따라 핵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

그러나 전작권이 미국에 있는 현 상황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할 리 없다. 억제든 강압이든 공포의 균형이든, 핵무기의 효과에 대한 모든 의미도 유명무실해진다.

이렇듯 한국군의 전시작전 지휘체계가 지금처럼 유지된다는 전제 아래서, 한국의 독자 핵무장과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핵 삼원체제(triad)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교한 핵 운용체계와 비교하면, 독자 핵무장의 위력은 주변국에 오히려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다. 김정은이 핵우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한국 핵무기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전환 논의, 영원히 불가능해질 수도

진짜 본론은 지금부터다. 한국의 핵무장 주장이 커질수록 이에 반응할 유일한 나라가 있다. 바로 미국이다. 앞서의 논란을 뒤집어보면 이는 워싱턴 인사들에게 전작권을 한국에 돌려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이후 한국이 독자 핵무장을 추진할 경우 미국으로서는 통제할 방법이 사라지기 때문.

추후 전작권 전환 논의가 다시 본격화된다면 미국으로서는 2016년 한국에서 일었던 핵무장 논쟁과 집권여당 원내대표의 국회 연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맹이 유지되는 한 전작권 전환은 영원히 불가능해지는 지름길이 열리는 셈이다.

실제로 워싱턴 인사들은 2013년 전작권 전환 연기 합의와 관련해 “한국의 독자 행동을 통제할 수단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는 논리로 설명해왔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당시 전면전을 우려해 개입을 꺼렸던 미국은, 이후 남북의 우발충돌을 경계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가져갈 테면 가져가라”며 전작권 논의에 ‘쿨’한 태도를 보이던 워싱턴 분위기가 10여 년 만에 바뀐 배경이다. 핵무장 논의는 이러한 기류에 쐐기를 박을 공산이 크다.

아이러니한 부분은, 최근 핵무장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이들이 대부분 전작권 전환 논의에서 가장 격렬히 반대해온 당사자들이라는 점이다. 2월 15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평화핵’을 주장한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가 대표적인 경우. 핵무장 논의를 공공연히 거론해온 일부 언론과 단체 역시 다르지 않다.

이들이 핵무장을 거론하기 시작한 시점이 전작권 전환 연기보다 앞서 있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기본적인 논리구조가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2월 6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F-22 등 미군 전략 자산이 신속하게 한반도에 투입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일각에서는 워싱턴이 한국 내부의 핵무장론을 의식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이 ‘선을 넘지 않도록’ 동맹에 제공하는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케 해주는 것이라는 해석에는 분명 설득력이 있다.

일각에서 핵무장론 역시 ‘미국의 적극적인 자세를 유도하는 레버리지로서 효과가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근거다. 이를테면 ‘떡 하나 더 받으려는 아이의 울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맹점이 숨어 있다. 정말로 핵을 원하는 나라는 사전에 이를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1970년대부터 미국의 양해 아래 핵연료 재처리 능력을 보유해왔고 40t 이상의 재처리 플루토늄을 상시적으로 보관하고 있지만, 핵무장이라는 말만큼은 절대 금기시하는 일본이 대표적인 경우다.

일본 정부는 67년 ‘비핵 3원칙’을 선언한 이래 핵의 군사적 이용을 금지하는 국내법을 제정했고, 94년 1차 북핵 위기 직후 ‘핵 옵션을 검토했으나 가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비밀문서를 언론에 흘리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순수성’을 강조해왔다.

민족주의는 양날의 칼이다. 상대를 위협하기에 더없이 좋은 카드지만 자신도 다치기 십상이다. 핵무장이라는 극단의 민족주의와 동맹이라는 집단안보 메커니즘이 양립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국제정치의 냉정하기 짝이 없는 논리를 감안하면, 잠깐의 인기나 정서에 취해 함부로 이 칼을 꺼내 드는 건 위험천만한 행동에 불과하다.

그 칼날이 결국 겨누는 것은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권이기 때문이다. 핵무장을 말하지 않는 이들은 바보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미군 전술핵 재배치, 한다면 어떻게?

▼ B61-3 탄두 오산공군기지 인근 배치가 최대치

1980년대 미국 의회 자료에 따르면, 당시 주한미군이 운용했던 전술핵전력의 총규모는 핵폭탄 60개와 9인치 대포용 탄두 40개, 155mm 대포용 탄두 30개, 핵 지뢰 21개 수준이었다.

미 육군이 경기 의정부 근처 도봉산 탄약창에 전진배치용 핵무기 저장소를 유지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기억할 것은 핵을 대포로 쏜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지금은 당시의 전술핵전력 대부분이 폐기됐다는 사실.

예컨대 2000년대 이후 미군이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전술핵탄두인 B61-3은 0.3kt부터 170kt까지 다양한 파괴력 옵션을 가졌으나 주로 B-52와 F-15E 같은 항공기에 장착한다.

2007년까지 200기가 작전배치돼 있었고 186기의 재고가 있었다는 사실이 미국 측 자료로 확인되는 만큼, 한반도에 들여올 여유분도 충분한 셈이다.

이렇게 보면 현실적으로 가장 개연성 높은 전술핵 재반입 시나리오는 2014년부터 F-15E 전력이 순환배치되고 있는 오산공군기지 인근에 B61-3 탄두를 상시배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의 조밀한 방공망을 감안할 때 미군이 실제로 이 탄두를 사용할 개연성이 높지 않다는 것.

한반도에서 전술핵이 철수된 1991년 이후 북한 지역에 대한 전술핵 보복 공격 임무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시모어존슨 기지에 주둔 중이던 제4전투비행단으로 이관됐지만, 98년 실시된 비행훈련 결과를 다룬 문서는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대신 미군 측이 주로 검토해온 시나리오는 태평양에 배치된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에서 전술핵탄두가 탑재된 트라이던트 D5 미사일을 발사하는 방식. 명령 후 13분 이내 발사가 가능하고 요격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결국 앞서 본 대로 오산공군기지에 전술핵탄두를 배치한다 해도 이는 ‘우리 땅에도 핵이 있다’는 심리적 안도감을 동맹국에 제공하는 정치적 목적이 전부일 뿐, 실제로는 잠수함 전력을 작전계획의 주축으로 둘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군당국 관계자들은 미국 측이 수용할 수 있는 전술핵 재배치 시나리오로 전략핵잠수함이 한반도 인근 해상에서 상시적으로 순찰 기동하는 방안을 꼽는다.

대(對)중국 압박 수위를 높이는 이중효과를 노릴 수 있는 데다, 작전배치 탄두 수를 늘릴 필요가 없으므로 ‘핵 없는 세계’를 공언해온 오바마 행정부로서도 거부감이 적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미군 핵잠수함은 태평양 멀리서도 똑같이 북한을 향해 미사일을 날릴 수 있으므로 가까이 기동한다 한들 군사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더욱이 위치 확인이 불가능한 잠수함의 특성상 워싱턴이 그 같은 원칙만 천명해놓은 채 실제로는 다른 해역으로 돌려도 파악하기 어렵다.

한 당국자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 측이 립서비스 차원에서 꺼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카드”라고 말했다.

별다른 군사적 효용도 없이 위치가 노출되는 해외 지상기지에 핵탄두를 보관하는 아이디어 자체를 미국 측이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핵무장론의 자충수 전시작전통제권
미군 전략사령부가 운용하는 대표적인 핵탄두 B61 모형.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영문판

황일도 기자 · 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출처 주간동아 1026호


2016년 3월 24일 목요일

허생전 패러디 (1) 역생전(歷生傳 )

역생은 역사갤러리( 역갤 )에서 놀았다. 곧장 디시인사이트( dcinside )에 접속하면, 디시 창에 갤러리들이 떠있고, 갤러리들 중에 역갤이 있었는데, 역갤의 찌질성은 개념본좌도 평정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역생은 역사갤러리에서 토론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학위논문을 대신 써줘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약이 올라서 질투 섞인 소리로 말했다.

“ 당신은 평생 학위를 따지 않으니, 역사는 연구해 무엇 합니까? ”

역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 나는 아직 넷질을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

“ 그럼 유물발굴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

“ 유물발굴은 개발한답시고 유적터를 밀어버렸는 걸 어떻게 하겠소? ”

“ 그럼 논문 출판이라도 못 하시나요? ”

“ 논문 출판은 수익이 없다고 출판사에서 받아주지 않는 걸 어떻게 하겠소? ”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 밤낮으로 넷질만 읽더니 기껏 ‘ 어떻게 하겠소? ’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유물발굴도 못 한다. 논문 출판도 못 한다면, 현 정부 찬양이라도 못 하시나요? ”

역생은 보던 컴을 꺼놓고 일어나면서,

“ 아깝다. 내가 당초 넷질만으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인걸……. ”

하니 뻥 문 밖으로 쫓아 버렸다.

역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태평로( 太平路 )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 누가 재벌 중에서 제일 골이 비었소? ”

이건희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역생이 곧 이건희의 집을 찾아갔다. 역생은 이건희를 대하여 길게 ㅂㄱ하고 말했다.

“ 내가 연구자금이 부족해서 지원을 좀 받아 보려고 하니, 1억 원을 뀌어 주시기 바랍니다. ”

이건희는

“ 그러시오. ”

하고 당장 1억 원을 내주었다. 역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이건희 기업의 자제와 측근들이 역생을 보니 백수였다. 체구는 말라 빠져 비실비실하고, 구두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찌그러진 안경에 허름한 외투를 걸치고, 몸에서 책곰팡이 냄새가 났다. 역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 저이를 아시나요? ”

“ 모르지. ”

“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1억 원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

이건희가 말하는 것이었다.

“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연구자금을 지원받으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연구를 대단히 선전하고, 성공을 보장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면서도 말을 통신어체를 쓰고, 눈을 퀘엥하게 뜨며, 얼굴에 초췌한 기색이 궁상스런 것으로 보아, 인터넷만 있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연구가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갚으면 장기적출을 해버리면 되는데, 이왕 1억 원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을 하겠느냐? ”

역생은 1억 원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여의도로 내려갔다. 여의도는 정치가, 재벌, 언론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요, 서울의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돈을 뿌려 5공화국은 대륙에 있었으며 광주운동은 광동성 광주에서 일어났다고 책을 찍어댔다. 역생이 독자들의 인기를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대륙5공설이나 대륙전두환을 운운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역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도 출판을 거부한 사람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교정본을 사 가게 되었다. 역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책 한 권으로 전국의 역사열풍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

그는 다시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의 목록을 가지고 교보문고에 건너가서 역사책들을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 몇 달 지나면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고 아름다운 역사를 사서 보지 못할 것이다. ”

역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 가서 과연 책들 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역생은 늙은 까레이스끼를 만나 말을 물었다.

“ 나라 밖에 혹시 크고 아름다운 땅이 없던가? ”

“ 있습지요. 사업상 비행기를 타고 북쪽으로 줄곧 3시간 동안을 날아가서 어떤 빈땅에 닿았습지요. 아마 고기로는 사백력이라고 기록되었을 겁니다. 겨울의 기후는 엄청나게 혹독하여 어떤 물건도 절로 얼어 붙고, 순록들이 떼지어 놀며, 북극곰들이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습니다. ”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 걸세. ”

라고 말하니, 까레이스끼가 미쳤냐며 거절을 했다.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동북쪽으로 가서 그 땅에 이르렀다. 역생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기뻐하여 말했다.

“ 땅이 만 리도 넘으니 무엇을 못해 보겠는가? 토지가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하니, 크게 개발을 할 수 있겠구나. ”

“ 텅 빈 땅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개발을 한단 말씀이오? ”

까레이의 말이었다.

“ 크고 아름답다면 빠들이 절로 모인다네. 빠들이 없을까 두렵지, 빠들이 있어야 부려먹을 것이 아니겠나? ”

이 때, 인터넷에 크고 아름다운 역사에 집착하여 자국을 부풀리거나 멸시 비방하고 심지어 일제의 식민지배를 찬양하기까지 하는 찌질이( 至疾夷 )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각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궐기하여 규탄을 벌였으나 좀처럼 근절되지 않았다. 그들도 감히 나가 넷질을 못 해서 괴롭고 곤란한 판이었다. 역생이 그들의 채팅방을 찾아가서 방장을 달래었다.

“ 천 명이 사이트에 쳐들어 가서 찌질거리면 뻘글 하나에 얼마씩 수입이 있지요? "

“ 땡전 한푼도 없지요. ”

“ 한국이 그리도 싫소? ”

“ 싫소. ”

“ 정말로 싫소? ”

찌질이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 영토도 작고 역사도 보잘것없는 이따위 나라가 무엇을 해준게 있다고 좋단 말이오? ”

“ 정말 그렇다면, 왜 다른 나라로 떠나서, 귀화를 신청하고, 그 나라 국민이 되어 떳떳히 밝은 사회로 나아가지 않는가? 그럼 찌질이 소리도 안 듣고 살면서, 막강한 나라의 인민이 되어 있을 것이요, 웹서핑을 해도 고발당할까 걱정을 않고 길이 인터넷을 즐길수 있을 텐데. ”

“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돈이 없어 못 할 뿐이지요. ”

역생은 웃으며 말했다.

“ 인터넷을 하면서 어찌 돈을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수 있소. 내일 광화문에 나와 보오. 붉은 깃발을 단 것이 모두 돈을 실은 차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

역생이 찌질이와 언약하고 내려가자, 찌질이들은 모두 그를 미친 놈이라고 찌질거렸다.

이튿날, 찌질이들이 광화문에 나가 보았더니, 과연 역생이 30억 원의 돈을 싣고 온 것이었다. 모두들 하악( 賀樂 )대며 역생 앞에 줄이어 절했다.

“ 항가항가 오직 완소본좌님의 명령을 따르겠3 ”

" 너희들, 힘껏 찌질거려보거라. "

이에, 찌질이들이 다투어 돈을 짊어지고 각 사이트들로 들어가 뻘글을 써제꼈으나, 백 찌질이가 한 사이트도 논파시키지 못하고 귀화를 신청하려고 해도 동족을 배반한 자는 필요없다며 받아주질 않았다.

“ ㅄ들, 돈을 줘도 한 사이트도 논파 못 시키면서 무슨 찌질짓을 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개념( 槪念 )을 차리려고 해도, 이름이 매국노의 장부에 올랐으니, 갈 곳이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 사람이 백만 원씩 가지고 가서 가재도구 전부, 짐 한 보따리를 싸서 오너라. ”

역생의 말에 찌질이는 모두 하악대며 흩어져 갔다.

역생은 몸소 이천 명을 몇년 동안 일시킬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찌질이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드디어 다들 배에 싣고 그 빈 땅으로 들어갔다. 역생이 찌질이를 몽땅 쓸어 가서 나라 안에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수용소를 짓고, 음식 찌꺼기를 넣어 꿀꿀이죽을 만들었다. 동토가 단단하기 때문에 채굴이 안 되어서, 하루나 삼일만 걸러도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간신히 굶어죽지 않을 양식을 생산해 두어, 나머지 사람은 모두 기차에 싣고 우랄산맥( Ural Mts )으로 떠나가서 곡식을 요청했다. 우랄이라는 곳은 삼십만여 호나 되는 크고 아름다운 대지의 끝자락이다. 그 지방이 한참 풍년이 들어서 구휼해줘 쌀 백여 섬을 얻게 되었다.

역생이 탄식하면서,

“ 이제 나의 조그만 낚시가 끝났구나 . ”

하고, 이에 찌질이 이천 명을 모아 놓고 말했다.

“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이 땅에 들어올 때엔 먼저 부( 富 )하게 한 연후에 따로 인문학과를 세우고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새로 강의하려 하였더니라. 그런데 땅만 크지 소득이 없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이 땅을 개간하고 발전시켜 크고 아름다운 대제국을 이룩할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올 생각을 말거라. ”

다른 배들을 모조리 불사르면서,

“ 가지 않으면 오는 이도 없으렷다. ”

하고 역사책 50만 권을 바다 가운데 던지며,

“ 바다가 마르면 주워 갈 사람이 있겠지. 백만 권은 베스트셀러라도 우리 나라에도 용납할 곳이 없거늘, 하물며 이런 역사책들이랴! ”

했다. 그리고 크고 아름다운 역사를 추종하는 자들을 골라 모조리 몽창 배에서 떨구면서,

“ 국가에 화근을 없애야 되지. ”

했다.

역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원조없는 기타 학문을 지원했다. 그러더니 돈이 십만 원이 남았다.

“ 이건 이건희에게 갚을 것이다. ”

역생이 가서 이건희를 보고

“ 나를 알아보시겠소? ”

하고 묻자, 이건희는 놀라 말했다.

“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연구를 실패 보지 않았소? ”

역생이 웃으며,

“ 재물을 들이붓고서도 연구를 이루지도 못하고 성공한다고 떠벌리는 짓은 황구라나 할 말이오. 1억 원으로 어찌 진리를 탐구할 수 있겠소? ”

하고, 십만 원을 이건희에게 내놓았다.

“ 내가 하루 아침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넷질을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1억 원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

이건희는 대경해서 일어나 왜 1억 원 줬는데 십만 원밖에 안 주냐고 따졌다. 역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렸다.

이건희는 해커로 그의 뒤를 추적했다. 역생이 네이버 밑으로 가서 조그만 블로그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탐지되었다. 한 블로거 방문객이 블로그 밑에서 댓글다는 것을 보고 이건희가 댓글을 썼었다.

“ 저 허접한 블로그가 누구의 블로그요 ”

“ 역 본좌 댁입지요. 가난한 형편에 역사사이트 서핑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에 쫓겨나 5 년이 지나도록 업데이트 않으시고, 시방 부인이 혼자 사는데, 집을 나간 날로 채팅으로 ㅋㅋㅋ하지요. ”

이건희는 비로소 그의 성이 역씨라는 것을 알고, 두고 보자며 돌아갔다.

이튿날, 이건희는 용업업자들을 데리고 그 집을 찾아가서 나머지 돈도 내놓으라 했으나, 역생은 주지 않고 뻗대었다.

“ 내가 목숨을 건지고 싶었다면 1억 원을 빌리고 십만 원만 주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연구비나 떨어지지 않고 출판비나 대도록 하여 주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왜 재물 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

이건희는 역생을 여러 가지로 협박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건희는 그 때부터 역생의 집에 양식이나 연구비가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역생은 그것을 ㄳ히 받아들였으나, 혹 새로운 연구소재를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

하였고, 혹 역사를 아는 사람과 함께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침을 튀겨가며 토론해댔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의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이건희가 5 년 동안에 어떻게 역사책을 팔아서 그렇게 돈을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역생이 대답하기를,

“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역사교육의 기초가 빈약하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득세해서, 역사를 진리 탐구가 아니라 무슨 자존심 세우는 도구쯤으로 여기지요. 무릇, 허무맹탕한 학설은 소수라서 학계 풍조( 風潮 )를 일으킬 수 없지만, 그것을 밖로 내보내면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지라 또한 뭇 사람들을 혹하게 할 수 있겠지요. 이성이 부족하면 굴리기가 쉬운 까닭에, 한 학설에서 실패를 보더라도 다른 아홉 가지 어거지나 생떼, 민족감정에 호소해서 재미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보통 이( 利 )를 취하는 방법으로 조그만 정치꾼들이 하는 짓 아니오? 대개 그 학설이 먹혀들면 족히 한 가지 학풍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크고 아름다운 역사, 최초 최고의 역사, 무능하고 나약한 역사 등 전부, 마치 줄줄이 낚시로 낚아 내듯 할 수 있지요. 역사는 변천한다는 사실을 슬그머니 묻어버리고, 역사에는 영욕이 있다는 사실을 슬그머니 묻어버리고,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슬그머니 묻어버리면, 그러한 깨달음이 한 곳에 묻혀 있는 동안 모든 역사관들이 황폐해질 것인데, 이는 인민을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후세에 당국자들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

“ 처음에 내가 선뜻 1억 원을 뀌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

역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1억 원을 지닌 골 빈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 나의 낚시가 족히 1억 원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람을 낚는 낚시꾼은 그야말로 본좌이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능히 나의 낚시에 낚여 주는 사람은 골 빈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더 크게 낚시가 되게 하는 것은 골 빈 힘을 업은 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았겠소? 이미 1억 원을 빌린 다음에는 나의 낚시에 의지해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대물 낚시광이었던 것이고, 만약 나의 떡밥이 부실했었다면 월척은 낚을 수 없었겠지요. ”

이건희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 방금 학자들이 국회청문회에서 잘못된 역사교육의 치욕을 씻어 보자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학자가 개폼을 잡으며 간지를 보일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

“ 어허, 자고로 매도 당한 역사학자가 한둘이었겠소? 우선, 두계( 斗溪 ) 이병도( 李丙燾 ) 같은 분은 한국사학계에 거두로 남을 만한 인물이었건만 친일매국식민사대모화강단사학이라 아직까지 욕을 쳐먹고 있으며, 한암당( 寒闇堂 ) 이유립( 李裕岦 ) 같은 분은 사서를 창조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종국에는 뽀록나고 있지 않습니까? 강단이나 재야들은 가히 알 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역사학계를 좀 아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역사학계를 진흥시킬 만하였으되 뱃속에 꿀걱해버리고 돌아온 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

이건희는 욕설을 퍼붓고 돌아갔다.

이건희는 본래 정치인 이명박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명박이 당시 대통령이 되어서 이건희에게 대변인이나 어용학자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이건희가 역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통령은 깜짝 놀라면서,

“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

하고 묻는 것이었다.

“ 본인은 그놈과 상종해서 3 년이 지나도록 정말로 얼굴이 두꺼워졌습니다. ”

“ 그인 폐인( 廢人 )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

밤에 이 대통령은 비서들도 다 물리치고 이건희만 데리고 걸어서 역생을 찾아갔다. 이건희는 이 대통령을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역생을 보고 이 대통령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역생은 못 들은 체하고,

“ 당신 갖고 온 인터넷 접속비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역갤질을 하는 것이었다. 이건희는 이 대통령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역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이 방에 들어와도 역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이 대통령은 몸둘 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몽한연합론을 논하며 크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뜻을 설명하자, 역생은 손가락을 이 대통령의 입술에 대며 막았다.

“ 시간은 없는데 인터넷 접속이 느려져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직위에 있느냐? ”

“ 대통령이오. ”

“ 그렇다면 너는 신임받는 대한민국 국민의 수반이로군. 내가 김구선생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내각에 부쳐 먼저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이루게 할 수 있겠느냐 ”

이 대통령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 2천만 거지떼들을 받아들여서 뭣합니까? 제이( 第二 )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

했다.

“ 나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계책 따위의 것은 모른다. ”

하고 역생은 외면하다가, 이 대통령의 간청을 못 이겨 말을 이었다.

“ 중국교포들이 한국은 옛 조상의 고국이라고 하여, 그 자손들이 많이 우리 나라로 일자리를 찾아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으니, 너는 정부에 청하여 중국교포들과 국민의 화합을 꾀하고 재미교포에게만 굽신거리는 정책을 바꾸게 할 수 있겠느냐? ”

이 대통령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 돈도 없는 반짱깨나 다름없는 것들이 뭐에 대단합니까? ”

했다.

“ ......북한동포도 못받아들이겠다, 중국교포도 못받아들이겠다 같은 민족도 포용치 못하면서 도대체 무슨 크고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

“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

“ 무릇, 역사에서 영토진출을 하려면 먼저 그땅의 동조자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나라를 치려면 먼저 내부가 안정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중공 정부가 드디어 대륙의 주인이 되어서 여러가지 문제가 누적돼가고 있는 판에, 한국이 최근 저네들과 우호를 통하게 되어 저들과 우리가 교류하는 터이다. 진실로 당( 唐 )나라, 원( 元 )나라 때처럼 우리 자제들이 유학 가서 거주까지 하도록 허용해 줄 것과, 문화의 출입을 금하지 말도록 할 것을 간청하면, 저들도 반드시 자기네에게 친근하려 함을 보고 기뻐 승낙할 것이다. 정부가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를바없는 위험한 국수주의적 역사왜곡에 경도되지 말고 건전한 역사교육을 함양함과 동시에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는 한편, 저 땅의 중국교포들과 결탁하여 천기를 기다린다면 혼란을 틈타 한 번 천하를 뒤집고 고토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미( 美 )나라 대국에서 구해서 외교적 지지를 얻은 다음, 연길의 교포들을 거느리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하나가 된다면 잘 되면 고토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못 되어도 국가는 올바른 역사관의 정신을 잃지 않을 것이다. ”

이 대통령은 힘없이 말했다.

“ 국민들이 하루 속히 모두 크고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는데, 누가 어느 세월에 중국이 혼란에 빠지기를 기다리겠습니까? ”

역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한국인이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한반도 땅에서 태어나면서도 대륙에 환장하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언제나 대륙을 꿈꾸니 그것이야말로 소중화주의( 小中華主義 )의 변용이고, 정복과 점령으로 크고 아름다운 위대한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다를바 없는 짓인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민족의 기상이라 한단 말인가?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설치다 망신을 당하고 히틀러는 고토를 회복하겠다고 날뛰다가 국가와 민족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이제 민족의 영광을 위해 고토를 회복하겠다 하면서, 그까짓 작은 이익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찝차를 몰고 총을 쏘고 삽질을 하고 막노동을 하며 심모원려한 계획을 세워야 할 판국에 딴에 노력조차 안하겠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크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라 하겠는가? 크고 아름다운 나라이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나의 완전한 사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채찍을 찾아서 조교시키려 했다. 이 대통령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블로그로 접속해 보았더니, 블로그는 텅 비어 있고, 친일매국식민사대모화강단사학, 화교, 짱깨, 왜놈, 매국노 등의 악플만 잔뜩 달려있었다.

2015년 9월 11일 금요일

북한 시절 경험했던 ‘나의 평양 과외 체험기’

인터뷰 날짜 : 2012년 11월
장소 : 북한개혁방송 사무실
증언자 : 김청솔(가명/함경북도 청진시 거주)
탈북일자 : 2011년 7월
출처 북한개혁방송 : 홈페이지 바로가기

나는 2008년 청진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평양을 오가며 공부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약 3년 6개월 정도 평양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2005년 10월, 처음 평양에 가게 되었을 때가 중학교 6학년 나이인 17살이었다. 그때는 대학 입학을 위한 공부(과외) 때문에 평양을 가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공개적으로 대입 공부 때문에 평양에 간다고 할 수가 없어서 당시에는 엄마 친구 딸로 위장해서 가게 되었다. 엄마 친구를 따라 평양에 도착했는데, 그 집 세대주가 김책공대 직원이었다. 그를 통해 (과외)선생을 소개받았고, 그 집에서 하숙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 “요새 대학 가려면 지방에서 공부하면 절대로 안 돼”

북한에서는 일반중학교 3학년 때 1고등중학교 시험을 친다. 나는 1고등중학교 시험에 떨어졌는데 그 이유가 나이가 많아서였다. 당시 청진만 특별하게 그런 규정이 있었다. 그때는 1고등중학교를 못 가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방황도 했고 다시는 공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4학년을 보내고 나니까 남는 것이 없었다.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2005년 3월에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도저히 공부할 수가 없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일하고 청소하고 집에 온다. 집에 오면 힘들어서 공부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를 관두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2005년 4월, 해운대학을 졸업한 학생에게 처음 과외를 받았는데, 그는 8월에 군대에 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우리 집으로 찾아와 과외를 해주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모두 수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1고등중학교 교재를 가지고 공부했는데, 해운대학 출신 과외 선생이 1고등중학교 교재를 못 풀더라(1고등중학교 교재는 일반 중학교 교재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다른 과외 선생을 구했다. 새로 구한 선생은 도 1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산대학을 나온 후 은행 직원으로 있는 사람이었는데, 수재인 것은 알겠는데 가르칠 줄은 몰랐다. 수학 문제를 모르겠다고 하면 내가 이해하게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풀이한 것을 보고 하라는 식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 과외 하는데 5만원(15달러) 정도 주었다. 나로서는 시간은 가는데 실력이 늘지 않으니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원산경제대학을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평양에 있는 대학에 가라고 했다. 그러던 중에 우리 엄마가 평양에 있는 친구가 생각이 나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우리가 청진에 살고 있다고 하니까 잘 산다고 생각했는지 대학을 가려면 지방에서 공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며 요새는 다 (평양에) 올라와서 대학을 직접 체험해야지만 붙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2005년 10월 평양으로 가게 된 것이다.

나처럼 대학 입학을 위해 지방에서 평양으로 공부하러 오는 사람이 몇백 명은 될 것이다. 일반중학교는 100명 중 1명 정도, 1고등중학교는 100명 중 2명 정도는 될 것이다. 나 역시도 평양에서 공부할 때 나 같은 학생들을 꽤 많이 보았다.

■ 평양서 하숙하며 과외 시작, 한 달에 100달러 소비

엄마 친구 집은 3칸짜리 집으로 사는 수준이나 환경은 깨끗했다. 한 달에 30달러씩 숙식비를 내고 살았는데 평양에서도 비싼 편에 속한다. 당시 평양에서 하숙한다면 평균 20달러 정도선이었다. 그런데 내가 머물던 집은 먹는 것도 괜찮았고 과외 선생도 소개해주어서 30달러를 달라고 했다. 하숙비에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이 포함되고 기타 간식은 내 돈으로 사 먹었다.

나처럼 공부하러 올라온 사람들은 대체로 생활이 비슷하다. 대게 평양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돈 있고 잘 사는 사람들이다. 하숙비가 20~30달러 정도인데, 그것을 제외하고 돈 쓰는 것을 보면 꽤나 돈이 있는 아이들만 올라오는구나 생각했다.

당시 평양에서 과외공부를 하면서 소비한 액수가 80~100달러는 될 것이다. 30달러는 하숙비를 냈고, 20달러는 과외비에 사용했다. 나머지 30달러는 먹을 것을 사서먹거나 참고서, 책을 사는 데 사용했다. 집에 있다면 간식이나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지만 남의 집에 있으니까 배가 더 고팠던 것 같다.

책이나 참고서, 연필 등을 사는데 만도 한 달에 10달러씩 나갔다. 장마당이나 책방에 가면 대학 입학 참고서가 있다.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시험 문제가 그 범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만 보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장마당에 나온 책 중에 중고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았다. 내가 본 것은 다 새것이었다. 그 책을 합법적으로 내놓고 팔지 못하기 때문에, 학습장 매장에 가서 “참고서 없어요?”하고 물어봐야 했다. 참고서는 한 권에 만원 아래였던 것 같다. 책뿐만 아니라 필기도구, 학습장(노트)도 비싼 편이다.

■ 김책공대 박사원생 기숙사로 찾아가 수학, 물리, 영어 등 배워

대체로 대학교수들은 과외를 잘 안 하고 대학생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박사원생들이 주로 했다. 내가 과외받던 선생도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김책공대 기숙사로 매일 과외를 받으러 다녔다. 박사원들에게 과외받는 것이 어쨌든 비법이기 때문에 김책공대 건물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로 찾아가야 했는데, 내가 수업받던 곳은 여자 박사원생들만 이용하는 기숙사로 5층에 따로 몰아 있었다. 10명 정도가 같이 생활하는데 깨끗한 편이었다.

북한에서 박사원들은 논문을 쓰면 할 일이 없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은 남포 사람으로 논문을 내고 배치만 기다리고 있어서 남는 시간에 과외를 한 것이다. 24세 여자 선생님으로 그녀에게 수학, 물리, 영어, 화학을 과외받았다.

나를 가르친 선생은 석사과정이었지만 북한에서는 다 박사과정이라고 말한다. 거의 8달 동안 매일 가서 배웠는데, 나는 시간이 무한대였기 때문에 오라고 할 때 갔고, 한번 가면 보통 2시간씩 수업을 받았다. 토요일, 일요일도 매일 공부하러 간다고, 했지만 선생이 일이 있거나 명절에는 가지 않았다. 과외비로 20달러를 줬는데, 그녀는 나 말고도 3명 정도 과외를 했기 때문에 부수입이 좋은 편이었다.

박사과정은 3년이다. 박사과정을 하는 이유는 평양에 거주하기 위해서다. 학사 학위를 받아서 평양에 있는 연구소에 배치를 받으면 평양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에 박사과정을 하는 것이다. 내가 과외를 받던 당시 박사원생 여자 10명 모두 지방 사람이었다. 평양 출신 중에도 박사원(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있기야 하겠지만 20~30명 중 1명꼴이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공부 아니면 안 되는 수재들이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박사원을 다닐 이유가 없다.

■ 배식용 500원짜리 빵 팔아 용돈 쓰는 박사원생도 있어

박사원생들은 기숙사에서 스스로 식사를 해결한다. 기숙사는 전기가 잘 들어오는 편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 켜놓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수돗물은 공동위생실에서 받아서 사용했다.

그렇지만 박사원 학생들의 생활상은 악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방이 작다. 5평 남짓한 곳에서 두 명이 함께 밥도 해먹고 공부도 하고 잠도 자야 한다. 방이란 것이 아무것도 없고 방만 있는 식이다. 방이 작아 침대도 하나 놔두고 사용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물 한 번 쓰려고 하면 위생실에서 길어다 사용해야 하고 버릴 때도 가져다 버려야 한다.

김책공대 대학생들 사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잘 사는 집 아이들은 나처럼 하숙하거나 아니면 동거 식으로 집만 빌리고 나머지는 자기가 해서 먹는다고 한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기숙사 생활을 버틸 수가 없다. 돈이 없는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사는데 김책공대와 종합대학은 매일 빵을 준다. 그 빵이 500원인가 하는데, 적은 돈임에도 그것을 먹지 않고 팔아서 용돈 쓰는 학생도 있었다.

2005년에 100달러면 20~30만원 정도였다. 20달러면 5~6만원 정도인데, 박사원생들은 대체로 10만원 이하로 사용한다고 보면 된다. 박사원생들이 기본적으로 생활하려면 30달러만 있으면 되겠지만, 옷도 사 입으려면 50달러는 있어야 한다. 대학생활도 잘 사는 아이들은 괜찮지만, 지방에서 공부 잘해서 오거나 돈이 없는 아이들, 농장에서 운 좋게 폰트(자금)를 받아서 온 학생들은 힘들 수밖에 없다.

나를 가르친 과외 선생은 엄한 편이어서 별다른 대화는 없었는데, 어떤 선생들은 아이들이 공부 안 해 와도 상관 안 하는 사람도 있고, 학생들이 성적이 떨어지거나 하면 속상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평양에서 8개월간 과외공부를 하다가 2006년 6월 다시 청진으로 내려왔다. 왜냐면 대학시험을 치려면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추천을 받으려면 다시 학교에 들어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반중학교에서 대학시험 추천을 받으려면 715최우등상을 받아야 한다.

715최우등상은 김정일이 7월 15일 졸업했는데, 그때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해서 만들어진 상이다. 715최우등상 시험은 11월에 실시하는데, 이 상을 받아야만 대학 추천을 해주었다. 715우등상을 받자면 미리 들어가 명단도 넣어야 하므로 9월에 입학할 예정으로 청진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동창생들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다. 친구들은 91년생이지만 나는 90년생이다. 운이 나빴던 것이, 당시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대학시험을 칠 수 없다는 규정이 생겼다. 때문에 공부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고 중학교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청진에는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손풍금 치는 사람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손풍금과 피아노는 주법이 다르다. 2004년 중학교 2학년 때인가, 평양사람이 와서 말하는 것이 내가 치는 피아노 주법이 틀렸다고 하더라.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피아노를 배우러 평양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는 학생한테 배웠는데 주법 고친다면서 8개월 동안 음계훈련만 했다.

2006년 8월에 대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청진에 왔는데, 시험을 못 친다고 하니까 좀 쉬자 하고 있던 와중에 다시 피아노를 쳐봤다. 그런데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 엄마 친구가 청진에 음악대학을 졸업한 할아버지가 있다고 해서 그 할아버지한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분은 작곡학부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피아노가 서툴고 몇 달 동안 배우니까 기술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 혼자 평양에서 하숙하며 공부한 경험도 있고 또 역시 모든 것은 평양에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2008년 2월, 다시 평양으로 올라왔다.

2007년 평양으로 올라올 때는 숭암으로 전학 가는 것처럼 전학증을 떼었다. 그리고는 전학증을 부치지 않으니까 청진에서는 나를 보지 못하고 숭암에서는 나를 받지 못하니까 내 거처에 대해 관여할 그 무엇이 없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 평양에서 피아노를 배운 것이다.

평양에 올라와 처음에는 엄마 친구 누나네 집에 있었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김원균명칭음악대학 교수한테서 피아노 수업을 두 달 동안(2008년 4월까지) 받았다. 당시에도 30달러씩 내고 하숙을 했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은 2005년에 생긴 것으로, 원래는 ‘김정일음악대학’이라고 간판까지 붙였는데, 김정일이 싫어해서 그랬는지 김원균명칭음악대학으로 바뀌었다.

평양음악무용대학이 있었는데, 이것이 음악대학과 무용대학으로 분리되면서 음악대학은 김원균명칭음악대학이라고 이름 짓고 동대원구역 문수거리에 건물을 새로 지어 만들었다. 무용대학은 본래 음악대학이 있던 자리에서 이름만 평양무용학원으로 바뀌었다. ‘김원균’은 김일성 또는 김정일 찬가를 지은 사람으로 알고 있다.

나를 가르친 사람은 30대 후반 여자 교수로, 피아노를 배울 때는 음악대학에 들어가서 배웠다. 내가 청진에서 피아노 배울 때 과외를 해준 할아버지 선생의 친척이 김원균명칭음악대학 학장이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편지를 써주었다. 이 편지를 가지고 가면 학장이 반가워할 것이고 선생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배우라고 했다.

그래서 편지를 들고 찾아갔는데 학장이 나 같은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그 편지만 주고 결론 없이 나온 상태였다. 다음날 학장을 찾아갔는데 학장이 없었다. 그래서 학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했는데, 어떤 여자가 있길래 그 여자한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음악대학 음악당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었다. 이야기가 잘 되어서 그녀를 통해 과외 선생도 소개받고 음악대학을 드나들 수가 있었다.

원래 김원균명칭음악대학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그녀는 아침 일찍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나를 데리고 들어갔고 나올 때도 같이 나오곤 했다. 그런 것도 모두 보위대하고 짜고 하는 것이다. 당시 그녀에게 한번에 15달러 이상 줬는데, 처음부터 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힘들다며 돈을 달라고 할 때마다 줬고 옷도 달라면 줬다.

그렇게 두 달 정도 과외를 받았는데 당시 내가 음악당에서 피아노를 치면 교수가 와서 봐주는 식이었다. 음악당에는 피아노 전공이 아닌 방에도 피아노가 있었다. 그 방에서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점심 도시락을 싸가며 두 달 동안 피아노를 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문이 났고 그 일로 나를 봐주던 교수가 문제가 될 뻔하여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다.

나를 가르쳤던 교수는 잘 가르치는 편이었고 나 말고 다른 사람 과외 하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교수들이 대학에서는 가르치지 못하지만 퇴근해서 외부에서는 많이 가르친다. 음악대학 교수들도 2~3개씩 과외를 하므로 먹고사는 것은 괜찮다.

북한에서 피아노 과외를 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좀 사는 집에 속한다. 만약에 피아노는 있는데 과외는 안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왜 그러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북한에서 유통되는 피아노는 주로 러시아제와 일본제다. 러시아제는 700~1,200달러, 일본제는 1,800~8,000달러까지 했고 중국산이나 한국산은 없었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 있는 피아노는 일본 ‘야마하’ 피아노였다.

■ 북한 고위층 피아노 과외 선호, 과외비 30∼50달러선

김원균명칭음악대학 교수들은 과외를 많이 한다기보다, 적게 하면서 돈 많이 버는 과외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일단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김원균명칭음악대학으로 갈라지면서 수재 양성 기관으로 급이 높아졌고 특히 피아노는 북한에서는 알아주는 악기다.

예술학원이나 음악당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김정일 현지지도를 동행한 사람들의 손자나 손녀, 무역회사 사장 딸 등 최고위층만 다닌다. 내가 만난 아이들 중 굉장히 높은 간부집 손녀가 있었는데, 예술학원에 다니면서 자기 과목 선생한테 따로 과외도 받았다. 대체로 과외비가 30~50달러로 정해져 있는데, 이들은 선생한테 고맙다며 더 대우해서 쳐주기도 하고 혹은 집을 전부 꾸며준다거나 하므로 교수들도 고위층 과외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 직원들이나 연주자들 생활 수준을 이야기하면 한심하다. 최고 대학이지만 기관에서 주는 것 하나 없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 있는 사람 중에 60~70%는 힘들다고 봐야 한다. 잘 사는 사람들은 교사(과외)해서 잘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당 연주자들 중에 소해금 연주자가 있다. 그런데 소해금 같은 것은 아무도 개인 교습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 부모들이 간부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런 악기 연주자들은 힘들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은 밥을 싸오지 않고 300원짜리 국수가 있는데 그것을 먹는다. 먹어 보지는 못했지만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떻게 맛이 없으면 저렇게까지 없을 수 있나?” “한 달만 먹으면 허약해진다”고들 한다.

악기도 고위층 자제들이 찾는 악기를 전공하면 과외를 많이 해서 잘 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들다. 만약에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돈이 많은 것이다. 과외로 버는 것이 아니더라도 돈이 있는 사람만이 피아노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했고 또 시집도 잘 간다. 또 이런 사람들은 버는 것이 많으니까 옷도 잘 입고 다니고 비싼 물건만 산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뒤처지는 것이 싫으니까 버는 족족 옷 사 입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남는 것도 없고 먹지도 못한다.

대체로 예체능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무역부문 사장 또는 간부집 자제들이다. 평범하게 사는 집 자녀들도 있지만 그런 아이들은 피아노를 전공하기 어렵다. 해금이나 손풍금 정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돈은 없지만, 실력은 뛰어난 사람들이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거나 돈이 많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실력이 있으면 과외를 하겠지만 돈 있는 아이들은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다.

2007년 4월까지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배우다 소문이 나서 그만두고, 그 해 5월부터 12월까지 평양예술학원 피아노 선생 집에 있었다. 그곳에서 지내다가 2009년 3월에(북한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해 청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4월에 평양으로 올라왔다.

평양예술학원 선생 집에 한 달 정도 있었는데, 그녀가 임시 중이어서 많이 예민해 있었다. 그래서 더 머무를 수가 없어 평양의 사촌 언니네 집에다가 800달러짜리 러시아제 피아노를 사다 놓고 평양교향악단 피아노 연주자에게 1주일에 2~3회씩, 2009년 2월까지 과외 수업을 받았다. 평양교향악단 단원은 사촌 언니가 소개해주었는데, 평양교향악단이라고 하면 북한에서는 최고로 쳐준다.

원래 지방 사람이 오면 숙박등록을 해야 하고, 또 피아노를 치면 옆집에서 항의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사촌언니가 인민반장과 잘 상의해서 처리했다. 돈을 얼마나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평양교향악단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창광유치원, 예술학원, 음악대학 피아노 전공을 거쳐서 국립교향악단 연주자가 된 사람들이다. 내가 음악대학에 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예술학원 졸업장이 있어야만 시험을 칠 수가 있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은 31세 여성으로 그때 당시 7~8년 경력을 가지고 각종 행사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과외비로 30달러를 지급했다. 평양교향악단 피아노 연주자들은 대부분 과외를 한다. 바이올린도 과외를 하지만 피아노만큼은 아니다. 악기 중에 과외를 제일 많이 하는 것은 피아노, 손풍금(아코디언), 바이올린 정도다. 다른 악기들은 과외를 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악기 과외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대체로 공부하면서 악기를 더 한다든가 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정도 경제력이 되고 악기가 집에 있으면 80%는 과외를 받는다. 그런데 인기 있는 악기가 아닌 다른 악기들은 전문성을 띄거나 학교에서 음악소조를 하면서 배우기 때문에 과외를 할 필요가 없다. 학교에서도 전과(전공)가 있고 부과(부전공)가 있는데, 만약에 성악을 한다면 전과가 성악이고 부과로 피아노를 하는 식이다. 부과로는 피아노나 손풍금 정도는 해야 한다.

처음 피아노를 배우려고 한 것은 그저 시간이 있어서였는데, 하다 보니까 흥미가 생겼고 그래서 대학도 안 가고 배웠다. 그런데 중국을 오가는 친척이나 사람들을 통해서 중국에서 피아노 배우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청진에서 한 달 동안 피아노를 배웠을 때 과외비가 인민폐 100원(15달러)이었는데, 중국에서는 한 시간에 인민폐 200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북한에서 공부도 할 수 없고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살 바에는 차라리 중국에 가서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피아노만 잘해도 중국에서 피아노 가르치며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 라디오를 듣게 되었고 탈북자들이 한국에 정착해서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에 가면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하고 싶었던 경영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 좋은 대학 가려면 1만 달러 필요, 그것도 운 따라야

평양 시내에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사람들은 100% 과외를 받는다. 평양에서 과외를 받지 않고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지역 대학도 50%는 과외를 받아야 갈 수 있다. 1고등중학교에 다녀도 졸업하기 6개월 전부터는 모두 과외를 받는다. 과외비용은 20~50달러이고 대체로 저녁 시간에 과외가 이루어진다. 선생이 방문하거나 학생이 찾아가는 식이다.

평양 시내 일반중학교 한 학급 학생 수가 40~50명 정도 된다. 그들 중에 2명이 대학 갔다고 하면 잘 가는 것이다. 1고등중학교의 경우에는 40명 중 20명 정도가 대학을 가는데, 만약에 과외를 하지 않고 뇌물로 대학을 간다면 1만 달러 정도는 필요하다.

물론 대학입학 시험을 쳐야지 대학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점수가 낙제 수준이라면 학장이나 그 주변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으면 가기 어렵다. 만약에 나에게 돈이 있다면 대학 학장에게 다가갈 수 있는 주변인들을 찾을 것이다. 주변에 운전사나 다른 사람들에게 줄을 놔서 부탁하는 것이다. 학장이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없서 학장 밑에 관리하는 여러 사람에게 청탁하는 것이다.

제일 좋은 대학에 가려면 1만 달러는 필요할 것인데 좋은 대학이라도 학과마다 차이가 있다. 김책공대는 1만 달러 내고도 못 들어가는 학생도 있고 500달러만으로도 들어가는 학생이 있는 등 운에 달렸다. 과외를 받는 이유는 돈을 적게 들여서 대학에 가기 위함이다. 대학 합격 점수 안에 들기 위해서 대학 시험을 잘 아는 박사 선생이나 교수들한테 붙는 것이다.

평양에서 가장 일러주는 대학은 김책공대다. 예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최고로 쳤는데 최근 들어서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몇 년 전 김정일이 김책공대를 몇 번 방문한 일이 있었다. 김정일이 김책공대를 인재양성 기지라고 치켜세우니까 가고 싶은 대학 1위가 김책공대가 되어버렸다.

북한에서는 보도할 때 어느 사람이 나와서 “이 기계는 어쩌고저쩌고”하며 설명하는 것이 많다. 그런데 그 설명하는 사람에 대해 ‘김책공대 졸업’이라고 자막 처리를 해주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어디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김책공대라고 말한다. 만약에 외국어대학 졸업생과 김책공대 졸업생이 있다면 김책공대 졸업생을 더 쳐주는 분위기다. 만약에 외국어대학 졸업생과 김책공대 졸업생이 있다면 김책공대 졸업생을 더 쳐주는 분위기다.

김책공대나,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대학이 인기가 있고 상업대학은 내림세다. 상업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면 지방에서는 좋은데 평양에서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가기는 어려운 반면 졸업하고 나서는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이다.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학과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법학부와 김책공대 공업경영학부, 정보학과, 재료학부다.

2006년 12월에 평양에 올라갔을 때 그 이듬해 2월에 대학 시험이 있었다. 내가 하숙하던 집에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아이가 있었는데, 당시 김책공대를 시험 봐서 붙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커닝을 해서 합격했다. 시중에 나가면 커닝 자료를 따로 판다. 그런데 커닝 자료만 사면 누구나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혁명시험 시간에 A방 시험감독이 누구인지 간부들은 알 수가 있다. 그러면 그 간부에게 뇌물을 주어 감독으로 들어가는 선생한테 “수험번호 00번 학생 좀 봐주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학생은 대놓고 보고 써도 선생들이 아무 제지를 하지 않는다. 2007년까지만 해도 커닝 하는 것이 굉장했다. 공부 못하던 아이가 시험 보면 1등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커닝 하면 무조건 시험장에서 내보낸다고 해서 커닝 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부정하게 시험을 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할 것이다. 시험지를 바꾸거나 하지는 않지만, 점수를 바꿀 수도 있고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불가능한 것이 없다.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학생들은 공부할 시간이 없다. 기본으로 공부해야 할 것이 전공 외에도 영어, 컴퓨터 등이 있는데 노작 발췌(김일성 또는 김정일의 연설이나 발언을 학습하는 것) 점수가 높게 나와야지 대학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것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한번 하려고 하면 새벽 5시까지 해도 다 못한다. 다른 사람 시켜서 하기도 하지만 글씨체가 비슷해야 하니까 대체로 자기가 직접 한다.

■ 평양시 빈부격차 심해, 중구역은 분위기부터 달라

평양은 빈부격차가 대단히 심하다. 평양 시내 여자들 옷차림을 보면 굉장히 잘 입는다. 내가 평양에서 지냈던 곳은 만경대구역이었는데 중구역에 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만경대구역에서는 10명 중 1명이 옷 잘 입는 사람이라면, 중구역에서는 10명 중 9명이 옷을 잘 입고 다녔다.

평양사람들은 못 먹고 못 써도 입는 것은 잘 입고 다니려는 경향이 강하다. 청진 사람들도 옷을 잘 입는다. 내가 한국에서 입고 다니던 옷보다 더 예쁜 것을 입고 다녔다. 그런 것 보면 잘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옷 입는 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평양 시내 아파트라도 수돗물이 잘 나오는 편이 아니어서 아침이나 저녁에 40분 정도 시간물 나오는 것을 매일매일 받아서 사용했다. 전기는 하루에 5시간 정도 들어왔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전지를 켜놓고 있을 때도 가끔 있었다. 아파트는 중앙난방 시설이 다 되어 있었지만 사용할 수가 없어 구멍탄(연탄)을 이용했다. 평양에서 남한 TV를 본 적은 없었지만, 남한 DVD나 대북라디오를 들었다.

■ 대북 라디오에서 나오는 탈북자 이야기에 신뢰감 갖게 돼

평양에 있을 때 대북라디오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기간에 화폐교환을 했는데, 화폐교환 실정도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평일에는 남남북녀라는 소설도 했고 탈북자 수기도 나왔다. 토요일에는 소설이나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보도가 끝나면 북한 정치에 대해서 알아보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가장 흥미가 있었던 것은 탈북자들이 직접 나와서 읽는 것이었다.

내가 청진에 있을 때 많은 중국인들이 청진을 오가곤 했다. 그때 중국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한국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와서 그런지 남한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100% 신뢰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80%는 옳다고 생각했다.

물론 재미가 있으니까 많이 듣게 되었는데, 거짓말일 수 있다고 생각해도 몇 달 동안 듣다 보면 믿음이 생기게 된다.

라디오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탈북자들 말 중에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나는 원래 조직 생활을 싫어한다. 생활총화 할 때도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이야기에 많이 유혹을 느꼈다.

북한에서는 남한으로 갔다고 하면 반역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라디오를 통해서 말하는 탈북자들은 진짜 자유를 말했고, 그 자유를 당신들보다 앞서서 체험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것인지 모를 것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2015년 5월 17일 일요일

국가론의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 건국의 특징과 의의 (2) 대한민국의 특징


국가론의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의 특징
국가는 ‘사랑’과 같이 느끼기는 쉽지만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근 대국가를 개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의 정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적 절하다고 생각된다.

베버는 국가가 추구하는 목적이 아니라 국가에 고유한 수단, 즉 물리적 폭력 행사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를 정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일정 영토 내부에 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공동체”로 정의된다

그의 개념적 정의는 물리력 행사를 통해 통치를 담당하는 국가기구와 통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이념적 명분이 국가의 중요한 측면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근대국가가 일정한 영토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수 국가의 존재와 주권의 상호인정 을 통해 국제정치체제가 형성되어 국가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록 베버의 정의가 근대국가 형성 이후 결과론적 분석이라는 한계점을 안고 있 3 지만 근대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단초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에 대한 관념은 특정 사회가 겪은 역사적 경험에 따라서 커다란 차이가 난다. 한국 과 같이 일제 식민지 강압통치를 겪고 건국 이후에도 오랜 권위주의적 정치 질서를 경험한 사회에서는 국가를 지배기구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우리 민족이 근대국 가를 본격적으로 체험하기 시작한 것은 억압적 일본 식민지 국가를 통해서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가진 일제 식민지 국가는 해방 후 한국 국가 형성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의 국가에 대한 관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건국 이후 전쟁 과 권위주의적 지배질서의 경험으로 인하여 지배기구로서의 국가 관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근대국가를 지배기구라는 제도적 측면에 국한해서 이해할 경우 그 특징이 제대로 포 착될 수 없다.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의 결사체로서 근대국가는 어떠한 이론적 근거 하에서 그 정당성을 획득하는지 국제정치적 연관성은 어떤 것인지를 지배기구적 측면과 동시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베버가 말하는 ‘물리적 폭력’은 언어의 폭력과 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경찰과 군대 등을 통해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실질적 공권력을 의미한다.

조직폭력배들도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정당성이 결여된 불법적인 것이다. 나아가 중세 시대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개인들 사이의 결투는 근대국가에서는 불법화되고 있다. 서구의 근대국가 형성은 중앙집권적 권력이 압도적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하여 사적 폭력을 제압해 나가는 기나긴 과정이었다. 한국의 경우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남한에 진주한 미국이 대한민국의 건국 때까지 치안과 안보를 대신 담당해 주었다. 건국 이후 미처 충분한 경찰력과 군사력을 갖추 지 못한 상태에서 여순반란 사건 등이 발생함으로써 신생 한국은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했 다.

미국은 이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를 예정보다 6개월 연장하는 조치를 취했다. 미군 철수 이후 북한의 전면적 남침으로 인하여 신생 한국은 건국 이후 최대의 국 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건국 초기의 한국이 국내적 안정과 대 외적 안보를 확보하는 데 얼마나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는지는 보여준다. 이런 불안정한 상 황은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있지만 북한 지역까지 는 실효적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은 대한민국을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한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 결의안 제195호에서도 그 한계점이 분명하게 인정되고 있다.

유엔은 1948년 5월 10일 선거에 의한 대한민국의 건국을 인정하면서도 유엔한국임시위원 단의 감시 하에 선거가 실시된 남한 지역에서 한국을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 다. 우리의 영토 주장과 실효적 지배의 지역적 범위에 괴리감이 생김으로써 대한민국은 통 일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1991년 한국과 함께 북한이 주권국가들이 회원국 으로 있는 유엔의 회원국이 됨으로써 한국 헌법의 영토 조항과 배치되는 상황이 국제법적으 로 발생했다. 그렇지만 동독과 서독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독일은 통일 이전에 모두 유엔 회원국으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두개의 주권국가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 실이 통일의 장애요인이 되지는 못했다.

북한이 시도한 것처럼 이 문제를 전쟁을 통해서 풀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평화적 방법을 통해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한국은 근대국가로서 영토적 완결성을 갖추어야 할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영토적 통일의 미완성에도 불구하고 건국과 함께 입헌체제의 구축을 통해서 주권 재민의 원칙 하에서 통치의 대내적 정당성이 확보되었다. 베버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정 4 당성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공권력은 조폭의 폭력과 다를 바 없다.

근대국가의 건설 과정은 전국민적 차원에서 권위의 행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국민 형성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국민형성을 뒷받침하는 이념이 민족주의(nationalism)이다.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 사회에서 대외적 저항의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nationalism을 ‘민족주의’로 번역하고 그 이념을 바탕으로 한 국가를 ‘근대민족국가’라고 흔히 부른다. 그렇지만 프랑스대혁명에서 보는 것처럼 원래 민족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국민 형성을 실현하기 위한 대 내적 정치명분으로 발전된 개념이었다.

 Nation 혹은 nationalism은 그 대 내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경우 ‘국민’ 혹은 ‘국민주의’로 이해하고 근대국가를 ‘근대국민국 가’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근대국가 형성과 발전의 이념적 명분으로서 등장한 민족주의는 원래부 터 대내적 측면과 대외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의 경우 근대국가의 이념적 근거가 되는 민족주의를 논함에 있어서 대외적 저항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집단적 자유가 개인적 자유보다 우선시되고 심지어 이 양자를 마치 상호배타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국가를 잃 어버린 식민지적 상황 하에서 독립을 위해 민족과 집단을 먼저 내세우는 사고는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D'Entr`eves 1967, 179). 그러나 원래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등장한 민족주 의는 개인적 자유와 평등 사상과 상호친화적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입장에 설 때 민족은 근대국가의 인적 구성요소로서 국민으로 전환될 수 있고, 이들에 대해 정당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이르기까지 ‘백성’과 ‘신민’으로서 통치 의 객체로만 존재하고 있던 우리 ‘민족’이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가진 ‘국민’으로 전환되었 음을 의미한다.

근대국가 하에서 주권재민 원리의 주체가 되는 ‘국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사회성에 기초한 자연발생적 인간 집단 혹은 언어, 인종, 역사를 공유하는 문화적 민족 개념과는 다르다. 역사적으로 어떤 민족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저절 로 민족주의 관념이 생겨나고 국민이 형성되어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한말 이후 근대국가 형성에 실패한 우리의 역사는 이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경우 근대국가적 의미에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3․1운동을 기점으로 보아야 할 것 이다. 그 이전의 ‘민족적 저항’과 달리 3․1운동은 그야말로 ‘민족주의적 저항’이었다는 점은 그 이후 등장한 일련의 임시정부들이 주권재민의 원리를 제창하고 있다 는 사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이념적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건국과 함께 주권재민의 원리를 구현한 제헌헌법은 전문에서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경우 이미 국가라는 외벽이 존재한 상태에서 민족주의 이념을 통하여 신분 제를 철폐하고 국민 형성을 통해서 자유와 평등을 구현한 정치체제를 만들어 나갔다. 이와 달리 한국은 국가의 외벽을 세우는 건국 작업과 동시병행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정착시켜나가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정 당국은 해방 직후 남한은 일제 지배 이전의 왕조국가가 부활되지도 않았고 새로운 근대국가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주권이 일시 정지된 과도기적 상황에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 정하지 않았고 미군정이 임시적으로 주권적 기관임을 자임했다. 미군정은 남한 내 일본인의 재산을 접수하여 미래의 한국 정부를 대신하여 관리하는 국제법상 전례가 없는 역할을 떠맡 았다. 사실 미국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유럽의 경우에 있어서도 자국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 를 통해 인정받지 않는 한 어떤 망명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한국의 5 자유민주주의체제 도입 과정에 미군정이 끼친 영향력은 부정할 없다. 그러나 그것을 미국에 의한 일방적 강제 주입 과정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미 이승만을 비롯한 건국의 주역 들은 독립운동 당시부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굳게 믿고 있었 다. 이 점은 3․1운동 이후 필라델피아 ‘한인총대표회’에서 채택된 선언문에서 분명하게 드러 나고 있다. 건국과 자유민주주의 이념 채택 과정은 미국과 한국 지도 자 사이에 체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 이다. \

필자: 김영호(성신여대)

2015년 5월 11일 월요일

국가론의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 건국의 특징과 의의 (1) 서론

인류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정치적 결사체의 종류는 도시국가, 제국, 절대주의국가, 근대국민국가 등 수없이 많다. 건국 60주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은 근대국민국가로서 탄생했다.

구한말 국민국가 형성에 실패하고 일제에 의해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 민족에게 근대국가는억압과 착취의 기구였고 동시에 일제의 예속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열
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과 존재 그 자체가 너무나도 당연시되고 있지만 60년전 건국 당시에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근대국가 건설에 실패한 수없이 많은 유럽의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1945년 해방 이후 3년만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건국은 결코선험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건국은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정
치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다.

모든 경우 건국은 시공을 떠난 무중력상태 하에서가 아니라 특정의 역사적 시점과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다. 구체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은3․1운동 이후 민족주의적 의식을 갖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자유와 재산권을 보장하는 민주공화주의적 통치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민족사에서 최초로 국민이 국가권력의 현실적 명분체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건국 과정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자연법적 견해에 입각한 사회계약론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건국은 인간, 특히 지도자들의 정치적 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소 냉전 대결이라고하는 양극적 질서가 대한민국 건국의 배경적 조건을 구성했을지 모르지만 건국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건국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의 주역들이북한과 남한 내의 건국 반대 세력의 영향을 물리치고 이룩해낸 의지적이고 고도의 정치적행위의 결과였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국가론의 관점에서 건국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성과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해방과 분단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짐으로써 상대적으로 건국에 대한 연구는 등한시되었기 때문이다. 분단을 강조하는 이론적 경향은 민족이라는 문화적 기준으로 해방 3년사를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족적, 문화적측면에서 민족이 분단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남북한에는 엄연히 근대국가적 성격을 갖는 두개의 국가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민족의분단이라는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의 국가론적 논의는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대한한국이 분단국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그 ‘불구성’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에 의하면 분단상태가 지속되는 한 대한민국은 근대국가적 의미에서 미완성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건국 60년사는 대한민국이 비록 분단국가로 탄생했지만 나름대로 자체의 완결성을 갖춘 근대국가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분단국가를 강조하는 이론적 경향은 통일을 우선시하는 통일지상주의적 역사인식과 연결되어 대한민국 건국은 통일의 걸림돌이고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건국은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통일국가 실현을 위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폄하되었기 때문에 건국 그자체가 국가론의 관점에서 본격적 연구의 대상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건국 60주년을 맞이하여 이상과 같은 지성사적 한계점을 극복하고 해방과 분단이 아니라 건국을 논의의 중심에놓기 위해서는 국가론의 관점에 선 건국의 재조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이 글의 목적은 국가론의 관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의의를 재조명하는 데 있다. 더욱구체적으로 이 글은 근대국민국가 일반론의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형성 과정과 특징 및 그이념적 근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원래 근대국가는 유럽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탄생한 ‘유럽형’ 국가로서 유럽의 팽창과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감으로써 보편화되었다. 근대국민국가는 일정한 영토 내 주민에 대해서 최고의 권력인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결사체이다. 대한민국이라는 ‘한국형’ 근대국가는 구한말 유럽형 근대국가 모델의 전파와 수용 과정, 일제 식민지 시기와 해방후 미군정기를 거쳐서 한반도에 정착되면서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유럽형’ 근대국가의 성립과 팽창 과정이 ‘특수의 보편화’ 과정을 의미한다면 대한민국 건국은 ‘보편의 특수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글은 막스 베버의 근대국가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서 근대국가로서 대한민국의 형성 과정과 그 특징을 설명한다. 여기서 근대국가 건설을 추동하는 이념인 한국 민족주의는 3․1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해방 이후 건국의 주역들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남한에 새로운 정치질서가 부여되는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이 글은 구한말 이후 우리 민족사적 관점에서 건국이 어떠한 의의를 갖고 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그 가장 중요한 의의는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구한말 이후 민족의 선각자들에 의해 추진되어온 근대국가 건설 노력이 구체적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데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역사인식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론적 관점에서 건국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필자: 김영호(성신여대)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창간사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매진 마당으로 인사드립니다. 상상마당이라고 하셔도 좋구요. 딱딱한 마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마 새로운 독자분들께서 이 글을 보실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일이 일어날지는 장담할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많고, 또 많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상국가 프로젝트가 시작한지 우리는 13년째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장해가고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것입니다.

허물없이 지내온 우리 친구들. 같이 새로운 발자취를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함깨였으며 앞으로도 함께일 것입니다. 이 블로그를 열면서 우리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가상세계에서 이 세월을 지냈지만. 우리가 이 세월을 돌아봤을 때, 이것은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고, 우리 삶의 증거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것을 믿으며, 이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이것이 우리에게 하는 말임을 믿으면서 나아갑시다. 우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네이버에서 카페를 시작할때, "한국말 잘하는 한국사람들이 우리를 마구마구 못살게 굴면 어떻하지?" 등의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둘러싸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서서히 지내고 보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하나의 세력으로 하나의 사회실험설을 꿋꿋히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가상국가를 위해 수많은 지식들을 공부했습니다. 국가는 사회의 결정체임을 믿고, 우리가 정치와 사회를 실험하고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완벽한 사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13년째 가상국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순수한 가상국가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 형, 정광현으로부터 시작한 이래로 13년째, 우리는 우리가 배운 교훈으로 이 언론을 차리고, 우리가 배운것을 기반으로 서로 협력하는 언론이 되려고 합니다. 다른 언론과는 규모상에서 밀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전문적이지도 않고, 그냥 아마추어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마추어이지만, 앞으로 이것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하나의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 길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엔 어둠이 도사리고 있고,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서로 믿고 나아갑시다.

 2013년 12월 22일 정 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