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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0일 월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편년 서술 시도)

한국 고대사의 문제는 편년 서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대사는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시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구분을 못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케이오스 수준입니다.  이 시대에 대한 적당한 수준의 이미지라도 머리에 그려야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근본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민족이 구성되고 말고 자시고 하기 전에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이고, 호모 사피엔스로 이 땅에 자리잡고 문명을 꽆 피워왔다는 구도조차도 완전 엉터리이지요.

일단 우리 민족(다른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이 속하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이것에 대하여 어떤 의견도 말하지 못합니다.

먼저 시대구분을 해 보겠습니다. 구석기 중에서 초기 구석기 시대는 올도완 석기라고 하는 것으로 이는 호모 에렉투스 또는 그 이전 인류들의 것이죠,  솔직히 인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출현하는 애슐리안 석기류가 있는데, 이는 네안데르탈 인 수준의 석기입니다. 물론 이들오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출현했을 때는 중기 구석기를 물려 받아 시작했지만 아프리카를 떠나자 후기 구석기 시대인이 되었으며, 한반도처럼 멀리까지 온 인류는 신석기인이죠. 즉, 우리 한 반도 땅 나아가 동북아 통 털어서 우리 인류는 신석기부터 시작한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세계적으로는)

그런데 이를 부정하는 집단이 있는데, 이들이 중국과 북한입니다.  이들은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가 아니라 여러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은 북경 원인 (60 만년전) 유골을 금과옥저 떠 받들더니 어느 날, 이들이 중국인의 선조라고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인 이 북경원인은 원래 아프리카 기원하였으나 아시아에서 진화 적응을 하였고. 이들이 계속 중국 땅에 남아 진화하여 스스로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금씩 모양이 다르고 진화하고 있는 수 천개의 유골 화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의견이 맞다고 하면, 우리가 가르치는 역사도 대충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평양 상원이나 제천의 두루봉 동굴,전곡리(애술리안 석기 발견) 같은 것들이 이 이론에 맞춰 대충 설명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이 이론은 국가에서 정한 정책입니다. 이것은 동북공정과 더불어 정치적 이유로 정부에서 밀고 있는 정책이기도 하지요. 중국의 민간 유전학을 전공한 의사가 중국 각지의 수천 명을 표본으로 유전자 추적을 하였습니다.  수 천 명 전원이 호모 사피엔스 시절 아프리카에서 떠날 때 만들어지 유전자 마크가 발견되었습니다. 표본 조사에 응했던 중국인 100%가 호모사피엔스의 아프리카 기원을 입증하고 있지만, 노인네들로 구성된 중국 정부는 꿈쩍 않고 있습니다.

한국은 북한에서 발굴된 유적과 더불어 20 만년전에서 7 만년전에 이르는 구석기 유물을 어떻게 볼 지 모르고 있지요.  공부를 많이 한 남한의 젊은 학자들은 이들을 그냥 호모 에렉투스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수 만년 된 아이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큰 소리친 중원 대학교 고고학 팀은 마지막 확인을 위해서 유골 샘플을 프랑스에 보냈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회신은 아이의 유골은 100 ~ 200 년 밖에 안 된 유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고고학계에서 과거에 발표한 모든 연대 추정은 거의 불신에 들어 갔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우리 조상은 합리적 추론으로 4 만 년전 이전에 여길 도착하기 어렵습니다. 유물들은 믿을 수가 없고요.  엄청난 길이의 발굴 보고서들은 널려 있지만, 편년으로 정리할 수만 있다면 한국 최고의 석학이 될 것입니다.

하여간 그 고고학 자료를 다 믿는다고 해도, 한국의 1 만 년전 이후 유적으로 발견되지만, 그 이전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 전 유적은 몇 만년전으로 그냥 올라갑니다. 가령 12,000 년전 유적조차도 없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은 제주도에서 발굴중인 유적으로 10,000 년전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1 만년전 이전에 한 동안 한반도에는 인간이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지만, 이를 대세로 인정하는 학자도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조상인 될 사람들은 겨우 10,000 년전에 온 사람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가설은 이제 지구 기후와 연결해서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기후와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2016년 9월 17일 토요일

한민족은 누구인가? (2) 언어학적 추적

어족을 추적하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근원을 추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학계에서는 별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는 못하다.  하나의 민족이 그 언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로 갈아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연구가 전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경우 그 사용 언어를 어느날 갈아탔다고 볼만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추정 정도만 알게 되고 굳이 결론을 내지 않더라도 아주 많을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한국어는 교착어로 분류되며, 알타이 어족으로 분류된 적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대략 어족 구분하는 법을 살펴 본다.

먼저 유형적 분류법에 의하면 세계에는 중국어, 타이어 같은 고립어가 있으며, 한국어, 일본어, 몽골어 같은 교착어, 독일어, 프랑스어,러시아 어 같은 굴절어로 크게 3 대 분류가 있다.  교착어는 SOV (주어-목적어-동사) 형 문법 체계를 가지며 현란한 어미 변형으로 상당한 문법체계를 갖춘다.

20 세기 초 핀란드 언어학자인 람스테트가 일본에서 일본어를 연구하다가 거기에 온 조선 유학생의 조선어를 채취하면서 조선어를 연구하고 그 결과 그는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어 족에 속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30 년 대 이후로 우랄어와 알타이어는 연관 관계가 없어져서 우랄 알타이어 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페기되고 한국어 일본어 등은 알타이어 계통일 것으로 오래 동안 믿어져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한국어와 일본어는 알타이어 족에서도 빠지게 되고 불분명한 소속으로 남게 된다.

한국어가 알타이어 족에서 빠지게 되면, 복잡한 일이 생긴다.  몽골어를 비롯해서 만주어 등 북방 계통 사람들이 모두 알타이어 족에 속하는 데, 한국어는 같은 어족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과 적어도 언어학적으로는 연관성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학자들이 어족 분류로 중요하게 보는 요소는 그 문법 요소가 아니라 단어들의 유사성을 따진다.  가령 불이나 물같이 초기부터 생성되었을 법한 단어들은 그 발음들이 약간 달라질 수 있지만 매우 유사해야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인데, 몽골어의 단어들과 한국어의 순 한국어(한자어 파생이 아니라)의 발음 연관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같은 교착어로 분류되지만, 같은 형식의 문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다. 5,000 년전 북유럽에서부터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빗살무늬토기 출토 지역은 또한 알타이어 족의 분포와 매우 비슷하게 되고, 북방계 민족의 이동으로 손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이 알타이어 족 배제가 됨으로써 힘을 잃는 것이다.

언어학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어와 일본어는 바로 옆에 알타이어 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있음에도 그들 언어와 관계없이 매우 독립적으로 또한 자생적으로 우연히 교착어적 특성, 유사 알타이어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어설프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생각해 보았다.

언어는 엄마한테 배운다. 아빠는 씨를 뿌리고 돌아다닐 수도 있다. 청동기를 손에 쥔 남자 정복자들은 마을들을 쳐들어가서 이 민족 종족의 남자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여자들에게는 자신의 씨를 뿌린다.  그리고 잠시 후에 또 다른 마을을 정복하러 다닌다.  아이는 남자의 아이이지만 엄마의 말을 배운다.  아이가 배우는 것은 문법 구조이며, 어쩌다 한 번 씩 들리는 아버지와 소통하기 위해서 단어들을 배운다. 단어를 배우는 것은 쉽지만, 문법을 배우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문법 구조를 오랜 기간 엄마한테 배우고, 가끔 들리는 아버지의 말은 단어만 배운다.   이 가설에 의하면 엄마는 주로 알타이어 족 사람들이지만, 남자들이 누군지 헷갈리게 된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인데, 청동기도 역시 비파형 청동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또한 북방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중국인도 북방계도 아닌 제 3의 종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삼한 지역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북방계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삼한 사람들이 북방에서 온 사람들을 정복 (남자가 여자를)하였는 지 모른다. 역사 유물로 보면 납득이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를 하나의 가설로 남겨 놓고 싶다.

2016년 7월 2일 토요일

한글, 훈민정음은 창조인가 모방인가? (2) 한글 창제의 목적

한글 창제는 사대주의인가 나라 사랑인가?

불행하게도 한글 창제의 목적은 한자 읽기에서 중국 본토 발음을 위한 발음기호적 의미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워낙 한글의 능력이 뛰어나 아에 독자적 글자로 자리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國귁之징語 音이
나라 말씀이
(國귁ㅇ 나라히라
국은 나라이라.)

異잉乎 中듕國귁ㅎ야
중국과 달라
(中ㄷ國귁ㅇ 皇 帝ㄷ 겨신 나라히니 우리나랏 常쌍談땀애 江ㄱ南남이라 ㅎㄴ니라.
중국은 황제가 계신 나라이니 우리 나라에서 늘 하는 말에 강남이라 하느니라.)

與영文문字ㅉ로 不ㅂ相ㅅ流ㅉ通통ㅎㅆ
이 문자로 서로 유통하지 못하므로
(文문字ㅉ와로 서르 ㅅㅁ디 아니ㅎㅆ
문자가 서로  사뭇지(같지) 아니 할쎄)

故고로 愚民민이 有 所송言 ㅎ야
고로 어리석은 백성이 아뢰고자 하는 말이 있을지라도
(이런 젼ㅊ로 어린 百ㅂ姓ㅅ이 니르고져 ㅎ 배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해도)

而 終ㅈ不ㅂ得득伸신其ㄲ情ㅉ者쟝 多당矣ㅇ라
끝내 뜻 펴기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ㅁㅊ내 제 들 시러 펴디 ㅁㅎ 노미 하니라
마침내 자기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느니라)

予영 爲윙此ㅊ憫민然 ㅎ야
내 이에 가여운듯 하여 위하여
(내 이ㄹ 爲윙ㅎ야 어엿비 너겨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新신制ㅈ 二十씹八ㅂ字ㅉㅎ노니
새로 만든 스물 여덟 글자라 하노니
(새로 스믈 여ㄷ 字ㅉㄹ ㅁㄱ노니
새롭게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欲욕使ㅅ人 ㅇ로 易잉習씹ㅎ야 便ㅃ於 日 用ㅇ耳니라
쓰기를 원하는 사람이 쉽게 익히게 하여 편하게 날마다 사용하게 할 뿐이니라
(사ㄹ마다 ㅎㅊ 수 니겨 날로 메 便ㅃ安 ㅋㅎ고져 ㅎㄹ미니라.
사람마다 하게하여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함 이니라.) - 월인석보

한음은 중국 소리라. 두는 머리라. 별(別)은 가리는 것이라. 중국 소리의 잇소리는 치두음과 정치음을 분별함이 있나니 이 소리는 우리나라의 소리보다 얇으니 혀의 끝이 윗니 끝에 닿느니라. ~ - 월인석보



보다시피 의미적으로 한글을 통해 누구나 쉽게 중국 정통 발음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글에 있어서는 중국 한자이지만 한자를 읽는 발음에 있어서는 원나라 때 붕괴되어 뒤죽박죽된 결과 중국 정통 발음이 아니라서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애초부터 한자를 둘러싸고 조선어와 중국어가 다르니 더욱 힘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세워지면서 중국어 정통발음 회복운동이 일어나자 조선도 이런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세종은 요동으로의 중국어 요원 파견교육을 논의 했으며(세종21년12월4일), 강이관과 별재학관을 증설하면서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며 중국어 교육을 독려했다(세종23년8월11일). 명나라 사신 예겸의 방문 때는 통역사 손수산이 운서로 중국어교육 논의를 하고, 정인지와 신숙주는 홍무정운으로 중국어에 대해 담론을 했다(세종32년1월3일).

"소방(小邦)이 멀리 해외에 있어서 바른 음을 질정(質定)하려 하여도 스승이 없어 배울 수 없고, 본국의 음은 처음에 쌍기학사(雙冀學士)에게서 배웠는데, 기(冀) 역시 복건주 사람입니다." (정인지)

"복건 땅의 음이 정히 이 나라(조선)와 같으니 이로써 하는 것이 좋겠소." (예겸) - 세종실록, 세종 32년 1월 3일

세종 26년 2월에 명나라 발음기호 정리 서적인 운회를 한글로 풀어 내고, 세종 29년 11월에는 조선 자체 중국어 발음서인 동국정운을 반포했다.

"옛사람이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려 음으로 고르고 종류로 가르며 정절과 회절로 함에 그 법이 심히 자상하매 배우는 이가 그래도 입을 어물거리고 더듬더듬하여 음을 고르고 운을 맞추기에 어두웠다.
훈민정음이 제작된 이후 만고의 소리가 한 소리처럼 되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음을 전하는 중심줄이라.
전하께서 전해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해 각각 고증과 빙거(憑據)를 두어 바른 음에 맞게 하시니, 옛날의 그릇된 습관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동국정운 서문)

(성종 12년에는 동국정운의 치두와 정치 구분이 취약하다는 단점이 지적됐다. "동국정운을 살펴보니, 사(私)와 사(思)는 치두음(齒頭音)이고, 사(師)와 사(獅)는 정치음(正齒音)이여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고, 비(卑)와 비(悲)는 순중음(脣重音)이고, 비(非)와 비(飛)는 순경음(脣輕音)이어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며, 방(芳)자는 전청음(全淸音)이고 방(滂)자는 차청음(次淸音)이지만 역시 혼돈되고 분별되지 않아서 권인의 말과 같습니다." 성종실록, 성종12년12월22일)

동국정운의 효과는 매우 뛰어 났다. 정인지가 훈민정음해례에 밝힌 "지혜로운 자는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라는 호언대로 였다.

최만리 일파는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면 누가 고심노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배우려 하겠습니까?"(세종26년)하고 반발했다. 실제로 세종 28년에는 이과와 이전의 과거시험 과목으로 훈민정음을 추가함으로써 최만리 일파의 우려는 현실화 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조에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 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해 뽑게 하되, 비록 의미와 이치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合字)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 - 세종 28년 12월26일

예조에서 정문에 의거해서 "일찍이 교지를 받들어서 과거에 있어서 동국정운을 쓰게 되었으나, 아직 인쇄 반포되지 않았으니, 청컨대 옛날에 쓰던 예부운(禮部韻)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단종 원년 12월24일

강제적 훈민정음 사용 확대 추진은 계속되지 못했지만 꾸준히 사용이 증가했다. 세종은 이러한 반발 때문인지 동국정운을 각 도와 성균관, 4부학당에 비치하면서 "본국의 인민들이 속된 운을 익혀서 익숙하게 된지가 오래 됐음으로 갑자기 고칠 수 없으니, 억지로 가르치지 말고 배우는 자로 하여금 의사에 따라 하게 하라"고 하교했다.(세종 30년 10월17일)

송사 문서의 개선

행정 사법 체계에 있어서 관리계층의 한자와 당시 글이 없던 민중이 쓰는 언어가 달라서 발생한 폐단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한자로 문서 작업을 하고 하위 관리직 문서 문자로 이두를 사용하고 있지만 심리과정과 판결에 대해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사또의 부조리한 판결이라도 억울해도 그대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판결을 내리는 관리조차도 사건의 곡절을 이해하지 못했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 훈민정음 서문, 정인지

재판 과정에서 이두문자를 통해 한자와 민중을 연결시키고 있었지만 이두의 비효율성은 사건의 핵심에 대한 이해는 커녕 이두문자로 작성한 서류마저 그 뜻을 알기 힘들었기에 개선책으로서 훈민정음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최만리 일파는 상소문에서 이러한 뜻이 부당하다고 했다.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고 있다.(세종26년2월20일)

이 부분에 있어서 최만리 일파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함에도 주장의 본래 목적이 한글의 폐지에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유교이념 충효의 전파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양반 사대부의 가장 마을대표 또는 가르칠 만한 사람들로 하여금 부녀자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고~" -경국대전

성종은 언문삼강행실도, 언문열녀도, 언문효경, 언문내훈 등을 통치이념의 확대를 위해 널리 펴냈다. 기존에는 이두문자를 사용하거나 관리를 현장에 동원해 말로 전달해서 통치이념을 전파 시키는 방식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어려운 한자를 공부할 수 있을만큼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일반인들에게 쉬운 한글을 가르쳐서 한글로 쓴 통치이념 서적들을 읽게 하여 자발적으로 받아 들이도록 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세종 13년에 발간된 삼강행실도는 한자어였지만, 한글 삼강행실도 발간을 둘러싸고도 최만리 일파와 세종간의 설전이 벌어 진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세종)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정창손)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세종) -세종실록, 세종26년2월20일

출처:  http://blog.naver.com/qnwkkr/120062719071

2015년 9월 28일 월요일

미국 사법제도의 12가지 특징

사실규명의 신빙성 높이기위해 영상녹화 조사 실시 바람직
디이비드 존슨 교수 (美 하와이대 교수)- 한국 형사사법개혁의 방향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千璣興)는 지난 17일 대검찰청 후원 아래 대표적 비교법학자인 미국 하와이대 데이비드 존슨 교수를 초청, ‘비교법적 관점에서 본 한국형사사법개혁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공개포럼을 가졌다. 존슨 교수는 수년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우리나라와 가장 유사한 일본 형사사법절차를 심도 있게 연구해 왔기 때문에, 이날 공개포럼은 미국 및 일본 형사사법제도의 장단점을 비교·분석하고 한국 형사사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존슨 교수의 주제발표문을 간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주〉


Ⅰ미국의 12가지 문제점들

미국의 범죄와 형사사법에 대한 12가지 특징들을 설명하려고 한다. 초점은 미국에 맞추어져 있지만, 때때로 일본과 비교해 말하겠다. 물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부분이다.
만약 시간이 허용한다면, 미국과 일본의 사례들을 다른 관점에서도 설명할 것이다.
나는 미국의 12가지 문제들의 목록을 ‘Dirty 12가지 항목’으로 부르겠다. 왜냐하면‘Dirty’란 단어에는 ‘불명예스러운’이라는 의미가 있고, 이러한 문제들은 존중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1. 강력사건의 높은 비율

미국은 선진국들 중에서 강력사건의 비율이 가장 높다. 미국의 재산범죄 비율은 눈에 띌 만큼 높지 않은 반면 살인, 강도의 비율은 다른 민주국가 어디보다도 높다.
미국의 살인사건 비율은 1990년 이래 40퍼센트나 떨어져왔음에도, 일본보다 10배나 높다.

2. 가혹한 처벌

북한을 제외하면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징벌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인구 10만명당 7백30명이라는 미국의 수용자 비율은 영국의 5배, 캐나다의 6배, 독일의 8배, 일본의 12배에 해당한다. 특히 마약 및 재산범죄에 대한 형벌이 다른 나라들보다 심하다.

3. 인종적 불균형과 차별

미국 대부분의 형사사법 단계마다 흑인들이 지나치게 많이 연루되어 있다. 현재 미국 젊은 흑인남성의 약 1/3은 교도소에 있거나 집행유예, 가석방 중에 있고, 워싱턴 DC에서는 그 비율이 약 40퍼센트에 달한다.
이러한 인종적 불균형은 미국사회 및 미국 형사사법시스템의 인종적 차별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사형제도

미국 형사사법의 가혹성을 나타내는 또 다른 지표는 사형을 자주 집행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일반적 기준에서 사형을 여전히 사용하는 2개의 부유한 민주국가의 하나(다른 하나는 일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매년 50건에서 100건 정도의 집행이 이루어졌고(일본은 1건에서 4건), 이 중 약 80퍼센트 정도는 텍사스, 버지니아, 플로리다 등과 같은 남부 주에서 이루어졌다.

5. 사법의 실패

최근 미국의 형사사법은 유죄인 자와 무고한 자를 구별하는 궁극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면 1998년 이후 유죄판결을 받은 1백50명 이상의 죄수들이 DNA 테스트를 통하여 무죄 방면되었다.

잘못된 유죄판결의 정확한 집계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대부분의 형사사건에서 DNA 증거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1백50명보다는 분명히 더 많을 것이다.

또한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사형에 처해지는 피고인들에 관한 사실발견에 있어서 그 중대성이 극히 크기 때문에 공정함과 정확함을 보장하기 위하여 ‘super due process’에 따를 것을 의무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죄 판결도 믿을만하지 않다.

그러한 법적 보장들에도 불구하고 1973년 이후 미국에서 적어도 1백16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사형집행의 길로부터 무죄 방면됐고, 이들은 평균 9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같은 기간동안 미국정부는 9백28명에 대해 사형을 집행했다.

6. 경찰과 검사의 잘못

미국의 경찰과 검사들은 위증이나 위증 교사, 강요, 무죄를 입증할 증거의 은폐, 부패 등 대단히 잘못된 행동들과 연관되어 있다. 최근 뉴욕, LA, 휴스톤, 오클라호마, 시카고, 필라델피아, 보스턴, 그리고 다른 사법관할에서 중대한 법집행기관의 스캔들이 밝혀졌다.

7. 미국의 당사자주의적 시스템

미국의 당사자주의적 시스템에서 돈은 너무나 중요하고, 진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미국의 ‘당사자주의적’ 형사사법시스템은 형사절차를 마치 ‘전투’나 ‘싸움’ 또는 테니스와 같은 ‘스포츠 경기’와 같이 다루어 피의자와 피고인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의를 구현함에 있어 당사자주의적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진실을 발견하는데 저해가 된다는 점이다.

8. 플리바기닝, 배심의 사생아

미국 당사자주의 시스템의 중심에는 배심원 재판이 있다. 배심은 ‘12명의 머리가 한명보다 낫다’라는 가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법적 결정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배심은 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 원칙을 구체화할 수 있다는 점들에도 불구하고, 시행과정에서 이미 많은 결점을 드러낸 제도이다. 예를 들면, 이해관계가 극히 중요한 사형사건들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배심의 결정은 보통 미성숙하고, 오도되고, 인종주의적이다.

또 사형사건이 아닌 사건에 있어서 배심원의 결정은 무능하고, 편향되고, 법을 무시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배심재판은 한 줌의 형사사건들보다 더 많은 사건들에 이용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고, 복잡하며, 장시간이 소요되는 제도이다.

만약 한국이 미국 형태의 배심제도 도입을 고려한다면 배심의 가장 열악한 부산물인 플리바기닝을 함께 수입하길 원하는지부터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9. 첫 번째 수단으로서의 체포

미국에서 체포는 대부분의 형사사건이 시작하는 방식이다. 경찰, 검사, 피고인 측 변호사와 판사들은 혐의자가 체포되기 전까지 사건의 조사가 개시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체포에 심각하게 의존하는 것은 미국의 사법제도가 정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다.

10. 높은 무죄 비율

미국의 무죄율은 높다. 1980년대에는 26개 주의 배심재판의 평균 무죄율은 27%였고, 그 비율은 지금까지 비슷하게 남아있다. 일본에서는 대조적으로 유죄율이 99% 이상이다. 물론, 미국에서는 쟁점이 있는 사건들만이 법정으로 가는 반면, 일본에서는 모든 사건들이 법정으로 가기 때문에 이런 단순한 비교는 잘못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일본 무죄율이 쟁점이 있는 사건에서만 계산되었더라도, 일본의 무죄율은 미국 배심재판의 무죄율 평균보다 8, 9배 정도 낮다.

11. 민주주의와 형사처벌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주목할만한 민주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민주국가에서 형사사법체계를 구축함에 있어 시민들의 선택이 어떠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 곳곳에서 시민이 주도권을 갖고 다수결을 행하는 ‘직접 민주주의’는 선고결과와 형사사법의 작용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간단히 말하면 지나치게 민주적인 경우 지나치게 많은 처벌 또는 지나치게 부족한 처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미국 최악의 형사법인 캘리포니아의 ‘3-Strikes’ 법률 하에서 일어난 일이며, 또한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명백하다.
간단히 말해서 처벌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민주주의가 많이 실현되었다는 것이 반드시 더 많은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2. 조사와 자백

한국의 형사사법절차는 일본의 형사사법절차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어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조사와 자백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형사절차는 지나치게 자백에 의존하여 어떤 경우에는 자백을 얻기 위해 조사자가 플리바기닝 등과 같은 뻔뻔스럽게 불법적인 전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피고인이 증거로 사용하는데 동의하지 않거나 피고인의 변호인이 자백을 받는 조사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한, 자백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한국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권고하였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몇 번 읽은 일이 있다. 이것은 조사과정에서 유도한 자백을 증거로 사용하는 미국법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대담한 제안이다.

Ⅱ 사법개혁을 위한 7가지 제언

나는 주제발표를 마무리하면서 한국 사법개혁에 대하여 7가지의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일부 또는 7가지 전부가 잘못된 내용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1. 한국 형사사법에서 잘못된 유죄심증을 줄이고 사실 규명의 신빙성을 개선하기 위하여 바로 실시할 수 있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영상녹화조사를 실시하는 것이다. 검찰 스스로 영상녹화조사제도의 도입을 추진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하나의 방안은, 목격자가 모든 혐의자를 동시에 지켜보게 하지 말고 목격자가 개개의 혐의자를 순차적으로 찬찬히 볼 수 있도록 하는 ’목격자 순차라인(eye-witness line-ups)‘을 하라는 것이다.

2. 한국의 형사실체법에서의 ‘도덕적인 편견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 조국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간통의 형사범죄화, 존속살해에 대한 가중처벌, 그리고 부부간에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고 강간피해자가 당시 최대한의 반항을 해야만 강간죄가 인정되는 등의 강간죄에서의 성적편견이 그것이다.

3. 형사사법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오류를 시정하는 것만큼 한국 형사사법의 우수한 부분들을 유지·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문명이라는 것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형사사법에서 변화가 필수적이라는 점에는 일견 동의한다. 동시에 변화가 항상 진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지적하고자 한다.

4. 형사사법의 참여자이자 변화의 대상인 경찰도 형사사법개혁의 장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 사법개혁에서 경찰은 대부분 논의에서 배제되었는데 결국 많은 중요 문제들이 검증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나는 일본과 미국에서 그런 것처럼 한국 형사사법체계에 있어서도 경찰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5. 배심제도는 훌륭한 이상적 제도이지만, 실제 시행되는 모습과 연계하여 볼 때 썩 매력적인 제도는 아니다.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사건일수록 변호사와 법원은 플리바기닝과 같이 재판을 거치지 않는 간이절차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결론은 형사재판체계를 바꾸더라도 너무 복잡하게 바꾸지는 말라는 것이다.

6. 한국에서 부정부패는 중요한 문제인데 연구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법 집행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 많이 미흡하다. 부정부패를 주로 사법제도에 의하여 제어하려는 접근방식은 실효성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부정부패에 대한 가장 실효성 있는 전략은 도덕적, 법적인 접근보다는 사회구조 전반을 개선하는 것이다.

7. 마지막으로 미국은 어떤 면에서 사법정의를 위해 따라 해서는 안 될 나쁜 선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한국이 미국의 제도를 계수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미국의 바람직한 부분뿐만 아니라 잘못된 부분도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오늘 발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여러분이 간과하고 있는 미국제도의 잘못된 점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2014년 8월 12일 화요일

언어, 그리고 Minimalist Program




'언어란 무엇인가?'

일견, 너무 장황한 질문, 해서, 구체성이 결여된 그런 질문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 마치,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들처럼, 거대 담론이 요구되는 그런 큰 질문, 혹은, 뜬구름 잡는 소리로까지 여겨질 수 있을 것인데, 어쨌든 저 질문에 대한 대답/관점에 따라 추구하는 언어학의 종류(?)가 판이해질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이니, 그 끝은 장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작은 일단 해보자:

What is language?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을까? -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근데, 이와 같은 대답은, 언어학 비전공자들, 즉, 대다수의 대중들뿐만 아니라, 현직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 혹은, '언어'에 대한 '정의'다. 근데, 저와 같은 '대답의 형식'과 물었던 '질문의 형식'을 비교해 보면, 재밌는 차이가 발견된다:

Q: What is language?
A: Language is a tool for communication.

'재밌다' 함은, 대답에 등장하는 'for' 라는 전치사 때문이다 - 그도 그럴듯이, 원래의 질문은, 언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즉, what is language for? 가 아니라, 그냥 언어란 '무엇인가(what is it)' 다. 하지만, 그 대답에는 (원래 질문에는 없었던) '위함(=for)'이란 게 첨가돼 있다.

위와 같이 '위함'이 들어가는 대답들을 일러, (언어에 대한) '기능적(functional)' 정의라 부른다, 왜냐면, X 의 '기능'으로써, X '그 자체'를 정의하고 있기 때문. 근데, 언어란 것을 저와 같이 정의해 놓으면,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 그렇다면 언어는, 그런 의사소통의 효율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돼 왔을 것인데, 또 그렇다면, 언어의 모습이 이 모양 이 꼬라지(?)인 이유 또한, '의사 소통 효율의 극대화/최적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의사 소통 (효율의 극대화/최적화)'란 '목적'이 언어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이요, 바꿔 말해, 언어의 모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의사 소통 효율의 극대화/최적화'란 것인데, 이와 같은 '기능적/목적론적(teleological)' 관점은 사회 언어학을 비롯한 제 응용 언어학 분야에서 지배적인 관점이라 하겠다.

근데, 사태가 위와 같이 간단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마무리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짐작할 수 있듯이, 언어학에서도, 여느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에 대한) 다양한 다른 관점들이 존재하고 또 서로 경쟁하기도 하는데, 그 중에 하나, 지금까지 언급했던 관점과 어쩌면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다른 관점 하나를 소개하도록 하자:




종종 '형식론적(formal)' 관점이라고도 불리는 이 다른 관점은, '무엇인가(= What is X)' 라는 질문과 '무엇을 위한 것인가(=What is X for)'라는 질문은 서로 구분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인간의) 언어는, '위함 혹은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의될 수 있으며, 또 '그 자체'로 정의하는 것이 언어의 '핵심 특성들(core properties)'을 밝히는 데 훨씬 유의미한 관점이라 주장한다.

우선, 기능론적 관점에 대한 형식론적 관점의 반론부터 살펴보자 - 앞서 살펴 보았듯이, 기능론적 관점에서 언어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수단'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능론적 정의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첫째, 의사 소통이 언어의 기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유일무이'한 기능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우리가 언어를 통해 하는 일, 하고자 하는 일이 '오직 의사 소통'이 아니란 말인데, 그도 그럴듯이 언어는, 타인과의 의사 교류가 아닌, 혼자 생각을 하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물론, '혼자 생각하는 것' 또한 일종의 '의사 소통'으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그건 기능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의사 소통(communication)'과는 사뭇 다른 의미다. 따라서, '혼자 생각하는 것'도 의사 소통의 한 유형으로 간주하려면, 기능론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communication 을 수정하거나, 더욱 명확히 해야 할 부담을 떠안게 된다.

둘째, 의사 소통은, (굳이) 언어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 우리 인간은, 언어가 아닌 다른 방법/도구들을 사용해서도 의사 소통을 하고 있다는 말 - 예를 들어, 우리가 입는 옷, 표정, 헤어 스타일, 이 모두가 어떤 모종의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고, 또 실제로 사용하고 있다.

셋째, 언어를 통한 의사 소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언어란 놈이 의사 소통에 과연 적합한 도구이기나 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언어에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언어에 만연한) '중의성(ambiguity)' - 한 문장이, 또는 한 단어가 여러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이 중의성은, 의사 소통에 도움을 준다기 보다, 오히려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때가 빈번하다. 말인 즉, 기능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언어는 의사 소통에 그다지 최적화 돼 있지도 않고, 되려 의사 소통을 방해하거나, 의사 소통에 지장을 주는 사례까지 빈번하다는 것이다 (말이 잘못 이해되어 생기는 오해들이 얼마나 많고, 또 얼만큼 빈번한지를 생각해 보면 되겠다). 따라서, 언어의 모습을 결정하는데 있어, '의사 소통' 이란 요인이 결정적인 혹은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한다/할 것이다는 주장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요인 즉, 언어의 유일무이한 기능이 의사 소통이 아니요, 또한, 의사 소통란 것이 언어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니, 언어의 '핵심' 특성이 의사 소통(의 효율/최적화)에 기인한다는 기능론자의 관점에는 여러가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기능/용도/목적'이 곧 그 물체의 '정체/존재 이유'일 경우도 많지만, 아닌 사례들도 많이 있다. 아울러, 어떤 물체가 여러 기능을 가진다면, 그 여러 기능들 중에 어떤 것이 과연 '중심/핵심' 기능인지, 그 경계가 모호할 경우도 허다하다:

인간의 '손'을 예로 들어보자 - 손의 '핵심' 기능/용도는 과연 무엇인가? 손은, 물건을 집을 때도 사용하지만, 코를 후비는데도 사용한다. 어디 그 뿐인가? (F**k you 라며) 경멸을 표현하는데도 사용된다. 따라서, 생각해 보면, 손의 기능은 수없이 많다 - 그럼, 그 수많은 기능들과 쓰임새 중에 과연 어떤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는가? 이것이 '핵심'이라면, 그것(만)이 핵심이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일견, 기능론적 관점은, 흔히 회자되는 지적 설계론의 논리와 닮은 구석이 있다 (단지, '비유'일 뿐이다). 주위를 둘러 보면, 거의 모든 물체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 진 것, 즉, '설계(design)' 된 것이다 - 시계, 컴퓨터, 안경, 연필, ... 그렇다면, '인간'(을 비롯한 여타 동.식물들)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지적 설계론자들의 논리다.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 보면, 거의 모든 물체들이 저마다의 특수한 '기능/용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언어' 역시, '의사 소통'이라는 기능/용도를 통해 설명하는 게 사뭇 당연한 일, 상당히 '직관적인' 관점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시계의 탄생 배경과 인간이란 생명체의 탄생 배경이 다르듯이, '언어'(의 핵심 특성) 역시 그것의 기능과 용도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의사 소통의 용도로 자주 사용된다 할지라도 (Note: '그다지' 상관 없다지, '아예 무관'하다가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이 출발하는 것이, 언어에 대한 또 다른 관점, '형식론적(formal)' 관점이라 불리는 것인데,'언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대략 아래와 같다:

언어란, 인간이란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생물학적 특성, 즉, 인간이란 동물이 보유한 하나의 인지 능력/체계(Cognitive Faculty/Capacity/System)이다.

앞서 언급했던 기능론적 정의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위와 같은 형식론적 정의에는 '위함/목적'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즉, What is X 라는 질문에 대해 'X is FOR Y' 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X "IS" Z' 라 답한다는 것이다.

이에, 위와 같은 정의/관점에 기반해서 언어(능력) 연구를 수행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로 다양할 수 있다 - 생물학적 특성이라 하니, 유전자, 혹은 (언어능력의) 진화와 관련된 이슈들을 중점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도 있고(Biolinguistics), 인지 체계라 하니, 뇌 신경망 연구를 통해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Neurolinguistics). 그리고 또 가능한 접근법은, 언어 능력과 관련된 인지 체계가 '어떤 원리들'에 기반해서 작동하는 것인지, 그 원리들을 밝히고자 하는 이론적 연구들인데, 그러한 연구가 바로, 나를 비롯한 소위 Minimalist 라 불리는 언어학자들의 전공/관심 분야라 하겠다.

이에, Minimalist 들은, 언어 능력이 기반하는 원리들에 대한 이론을 지난 50 여년에 걸쳐 수정.발전시켜 왔으며, 그 이론을 일러 오늘에 부르는 이름이 바로 Minimalist Program(MP)다.
출처:언어, 그리고 Minimalist Program

2014년 8월 7일 목요일

[언어] 국어학계의 쇄국


한반도용 진화 이론이 따로 있고, 캐나다용 진화 이론이 또 따로 있다면 어떤가? 일본의 중력 현상을 설명하는 중력 이론이 따로 있고, 호주의 중력을 설명하는 중력 이론이 또 따로 있다면, 그건 또 어떤가? 즉, 서로 다른 체계에 기반한, 한반도용 물리학이 따로 있고, 프랑스용 물리학이 따로 있다면 어떠한가? 어떠하긴 뭘 어떠해?! 말도 안되는 소리지 - 물리학이면 다 같은 물리학이지, 한반도용 중력 이론이 뭔 말이당가요?!

그럼 이건 어떤가? - 한국어를 위한 국어학이 따로 있고, 영어를 위한 영어학이 따로 있다. 위의 진화/중력 이론들과는 달리, 왠지 그럴듯하게, 혹은,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언어학을 모르는 것이고, 그렇다고 대답하는 이가 언어학 전공자라면, 언어학을 뭔가 잘못 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아니 ... 그거랑 그거랑은 다른 것 아닌가요? 지구상엔 서로 다른 언어들이 많잖아요, 그니깐, 서로 다른 언어학들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요? 흠 ... 그럼, 지구상엔 생명체가 하나뿐이라서 공통된 진화 이론이 있는건가? 모르긴 몰라도, 언어의 갯수보단 생명체의 종류가 훨씬 더 많지 않나?

물론, 한국어는 국어학 이론으로, 영어는 영어학 이론으로, 이렇게 각기 다른 이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하나의 이론으로도 그것을 할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은 이론일 것이다. 그럼, 문제는, 그런 이론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런 이론이 (실제로) 있는가 하는 것인데.  

생물학의 보편성이란 것이, '모든 동물은 코구멍이 두 개, 모든 식물은 잎이 있다' 식의 표면적/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DNA 를 일컫듯이, 언어학에서 말하는 '언어 보편적'인 것 또한, '모든 언어에는 전치사가 있다' 식의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원리'들을 일컫는데, 그런 보편 원리들을 추구하는 '이론'을 일러 Universal Grammar (UG) 라 부르고, 그 UG 의 최신(?) 틀을 일러 Minimalist Program (MP) 라 부른다. 해서, 위에서 던졌던 질문, '그런 이론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런 이론이 있는지' 에 대한 답은 Yes 가 되며, 따라서, UG/MP 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어를 위한) '국어학', (영어를 위한) '영어학'이라는 말과 개념은, 한반도 전용 중력 이론, 독일 전용 중력 이론과 진배없는 어불성설이 된다.

허나, 국어학계, 즉, 주시경, 최현배로 대표되는, 소위 '전통' 국문법의 맥을 잇(는다 하)는 이들 가운데는,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 UG/MP 를 배격/거부하는 이들도 제법 있다. 그 이유인 즉, UG/MP 는, (한국어에는 맞지 않는) 서구 언어에 기반한 '외래' 이론이요, 따라서, 영문과에서나 하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비유컨대, 상대성 이론은 독일 태생 물리학자의 이론이니, 한국 고유의 물리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고, 따라서, 거부/배격하는 꼴과 매한가지니,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라 했다 - 학문의 쇄국 정책인가?    

무릇 학자라면, UG/MP 의 존재를 두고 두 가지 방법을 취할 수 있다. 그 첫째는, MP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한국어 현상을 보여 MP 를 비판하는 것이요, 더 나은 두 번째 방법은, (MP 가 그러하듯이) 한국어를 너머 다른 언어들에도 공히 적용될 수 있는, 그런 보편적 원리에 기반한 다른 이론 틀을 선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이론 틀의 설명력은, 최소한 MP 만큼이거나, 더 뛰어나야 할 것이다. 이에, 전자에 해당하는 시도들은 제법 있는 걸로 안다. 하지만, 후자에 대한 노력은, 현재까지도 그 존재를 찾아보기 힘들다 - 그들이 말하는 '전통 국문법/국어학'이란, 그 시작부터 현상의 서술을 목표로 하는 '기술(descriptive) 작업'이었고, 지금 현재까지도 그러한 '기술' 수준에서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으며, 또, 나아 가고자 하는 의지의 싹 조차도 찾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겐 나아갈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 왜냐면, 애초에 '기술'이 '목표'니까)

국어학에 몸담은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위와 같은 인식과 풍조가 국어학계에 만연하고, 또 그와 같은 학문의 쇄국이 후학에게 대물림 되는 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언어학 선수의 등장은 둘째치고, 국어학의 미래 또한 지금과 마찬가지로 줄곧 어두울 것이라 사료된다.

* 위와 같은 언어학 쇄국, 그리고 기술 언어학(Descriptive Linguistics) 중심 경향은 중국 언어학계에도 만연하다. 겉으로 보기에 '언어학'이라는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실은 근본적인 목표가 서로 다른 두 언어학, 즉, 기술 언어학과 설명 언어학을 하고 있는 셈이다.

Mentalese// 출처:국어학계의 쇄국(http://mprogram.egloos.com/5835914)

2014년 7월 28일 월요일

[언어] 언어학과의 제 2 외국어 요구 조항


(한국 대학의 각종 어문학과 박사 과정도 비슷하지만) 미국 대학의 언어학과 박사 과정을 보면, 대개 '제 2 외국어'와 관련된 요구 조항을 두고 있다 - 학교에 따라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대개의 경우, '제 2 외국어'란, 영어와 자신의 모국어를 제외한 제 3 의 언어를 뜻한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면, 한국어와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 예를 들어, 일본어나 중국어 실력을 검증 받아야 하는데, 그 검증 방법 역시 학교별로 조금씩 차이가 난다:

외국어와 관련된 시험을 쳐서 통과하거나,
요구되는 기간 이상 해당 외국어 관련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거나,
해당 외국어로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실력을 보이거나.

근데, 이 '외국어' 관련 요구 조항은, 근래에 들어 새로이 추가된 그런 조항이 아니라, 실은, 예전의 언어학과 규정에서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구시대의) 유물? 혹은 잔재? 뭐, 그와 같은 조항인데, 그도 그럴듯이, 불과 4-50 년 전만 하더라도, 언어학자들의 주된 업무는, 말 그대로 각종 '언어들(languages)'를 연구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을 기록/분석하는 현장 조사가 그들의 주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국어에 대한 (적당한) 지식/구사력이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었고, 따라서, 제 2 외국어라는 요구 조항이 등장한 것.

하지만, 내 블로그에서도 여러차례 말했듯이, 현대 언어학의 주 관심사는, '현장 조사'를 필요로 하는 '언어들(languages)'가 아니라, 인간이 지닌 '언어 능력(Language Faculty)', 즉, 우리 '밖'의 언어들이 아니라, 우리 '안'의 인지체계에 있다. 물론, 현장 조사를 통해 언어를 기록/분석하는 그런 연구가 사라진 건 아니요, 그런 연구가 무가치하단 말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the point is, 언어 능력을 연구하는 박사생들 역시, 위와 같은 제 2 외국어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도록, 그렇게 제도화 돼 있다는 게 문제란 것이다.

언어학과 내에는 보통 여러 분야의 언어학자들이 공존한다 - '언어 능력'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전통적인 틀 안에서 '언어 자료들'을 기록/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쪽에서 불필요하니 없애자고 하더라도, 다른 한 쪽이 꼭 필요하다며 (극구) 반대를 한다면, 함부로 없애기 힘든 게 바로 외국어 관련 조항이다. 해서, 근자에는 아래와 같은 절충안을 두는 학과들도 많이 있다:

해당 외국어와 관련해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할 것.

즉, 해당 외국어를 주제로 하는 페이퍼를 쓰면, 외국어 관련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 현대 언어학의 주 관심사가 '언어' 분석이 아닌 이상, 제 2 외국어 관련 요구 조항은 폐지하는 게 맞다. 학과 내부 사정상 그게 힘들다면, 현장 조사를 전공으로 하는, 따라서, 어느 정도의 외국어 실력이 요구되는, 그런 박사생들에게만 부과되도록 수정은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