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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9일 목요일

[이슈 따라잡기] 교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청어람 매거진은 끊이지 않는 목회자 성범죄 현상을 주목하며 결국 교육과 제도의 문제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결국 '한국교회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청으로 연결됩니다. 관련하여 청어람ARMC 초대 간사를 거쳐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며 '여성주의 교회 공동체'를 연구한 안정인의 글을 싣습니다. 이와 관련한 또 다른 관점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주

‘목회자 성범죄’는 왜 끊이지 않는가?

지난 8월 2일 뉴스엔조이에서 라이즈업무브먼트의 이동현 목사가 10대 여고생에게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강요했다는 사실을 밝혀 파문이 일었다.1) 사건의 전말을 다룬 기사가 쏟아졌고, 분노와 비난의 목소리도 거셌다. 인정을 하지 않고 버틸 거라는 예상과 달리, 라이즈업무브먼트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동현 목사는 대표직과 목사직을 사임하는 등 빠르게 대응했다. 이로써 사태는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목회자 성범죄는 왜 이렇게 많이 발생하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년 동안 성직자가 저지른 성범죄 건수는 442건으로 전문직업군 가운데 가장 많다고 한다.2) 성범죄에 관한 친고죄가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고발과 조사 과정에서 발생할 2차 피해를 염려하여 신고 되지 않은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교회는 구성원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결사체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조용히 덮고 교회를 떠나는 일은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이 성적 순결을 외치는 한국교회의 민낯이다. 과연 교회는 이대로 괜찮은가?

‘성차별’이 일상화 된 교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성폭력도 해결해야 할 큰 문제이지만, 사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성차별적인 구조와 문화가 더 문제다. 한국교회 여성들은 남성의 보조자로서 주변적인 위치에만 머물러 있다. 예장합동, 예장고신 등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는 교단이 여전히 존재한다. 기장, 기감, 예장통합 등 여성안수가 가능한 교단에서도 여성목사 청빙을 기피하거나, 유아부나 유치부 등 돌봄 영역에 국한하고 저임금, 파트타임으로만 고용하는 등 임금·지위 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 내 최고결정기구인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 역시 남성들로만 채워진 교회가 대부분이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식사당번, 청소, 전도, 심방, 행사준비 등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간주되는 일에 무보수로 동원되며, 이는 봉사와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이러한 남성 독점적 제도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와 교회가 속해있는 상위조직인 교단의 노회나 총회에서 더욱 심화된다.
교회 내 성 불평등은 의식적인 면에서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여성들이 기저귀 차고 강단에 올라가? 안 돼!”라는 총회장 목사의 소위 ‘기저귀 발언’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월경과 출산을 혐오하는 언설들이 교회에는 가득하다. “하와 때문에 아담이 범죄하고, 밧세바 때문에 다윗이 범죄했다”라고 여성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구절로 입을 틀어막는다. 이런 발언들이 교회 내 설교에서 공공연히 등장하고,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발화된다. 이는 여성들이 주체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위계적인 교회 구조와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한 여성의 역할배제와 제한, 이를 정당화하는 성서해석과 근본주의 신학이 세 꼭짓점을 이루어 한국교회 내 성차별을 고착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듣지도보지도말하지도말라

기독교와 페미니즘은 만날 수 없는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신안군 여교사 성폭력 사건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이 계속되고, 여혐과 남혐 논란, 메갈리아를 둘러싼 찬반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여성혐오범죄와 발언이 과거에도 있어왔고, 현재에도 증폭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 20·30대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고무적이다. 사회과학 책 판매 가뭄 속에서 출판계에서는 “페미니즘 출판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페미니즘 관련 신간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판매량 또한 급증하고 있다.3) 강연장에서도 20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질문하는 등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는 페미니즘의 무풍지대인가? 교회도 이런 페미니즘의 물결에 예외일 수 없다. 한국사회의 어느 영역보다 성평등이 가장 더디게 이루지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하다. 페미니즘이 “성차별주의와 이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Bell Hooks)”이며 ”여성을 중심에 두고, 여성의 경험과 입장을 탐구하며, 여성이 탐구의 주체가 되는 학문(Alway)”을 여성학이라고 정의할 때,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현재를 극복하고 해방적이고 평등한 기독교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많은 여성의 참여와 목소리가 필요하다.강남순 교수가 <페미니즘과 기독교>에서 제시한 대로 “기독교가 차별과 배제의 종교가 아닌 포괄과 평등 그리고 연대성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요청성은 이미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명시된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성, 인종, 계급을 초월하여 인간 개개인을 귀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예수정신과 페미니즘은 만날 수 있다. 아니 만나야만 한다. 교회가 페미니즘을 수용하여 더욱 정의롭고 평등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교회에서 잊힌 기독교 페미니즘을 발견하여 계승하라

그러면 기독교 안에는 페미니즘이 없었는가? 교회 여성들은 수동적이며, 가부장적 기독교를 당연시해왔는가? 개인적으로 성차별적 교회에 대한 고민으로 여성학과 여성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느낀 해방감과 당혹감을 나누고 싶다. 모태신앙으로 교회 안에서 자라고, 기독교 대학에서 공부하고, 기독교 아카데미에서 몇 년간 일을 했던 나는, 성차별적 교회 구조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마지막 학기에 기독교학과에서 여성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여성 억압적이라고 생각했던 구약성서가 시대의 산물이며 그 나름의 여성 해방적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인물로 다말을, 민족의 지도자였던 미리암과 드보라를, 여성연대의 이야기로 룻을 읽으며 새롭게 성서를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상징체계에 도전한 메리 데일리, 여성들의 삶의 자리인 원형 식탁(round table) 모형을 평등하고 열린 새로운 교회상으로 제시한 레티 러셀, 성과 계급이라는 이중적인 억압으로 고통 받는 흑인여성들의 ‘지극히 작은 자’로서 예수 이해 등을 읽으면서 기독교의 개념이 더욱 풍성하고 깊어졌다. 선배들이 고군분투하면서 작업해 놓은 결과물들을 보니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로소 나도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왜 이러한 내용이 30년간 교회 안에 있었던 여성인 ‘나’와는 만나지 못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 교회, 기독교학교, 기독교사회운동을 두루 경험하며 교회 내 여성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나에게 조차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억울했다. 지금도 주위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놀란다. 그만큼 교회 내 성차별적 구조가 공고하다는 반증이며,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신학담론이 교회 여성들에게 소개되고 전달되는 통로인 여성(주의 시각을 가진) 목회자가 드문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신학이 신학계에서 자리 잡기에도 고군분투 하느라 대중운동으로 확산하는데 까지 에너지를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도 해본다.
feminism

교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교회에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그동안 쌓아온 여성신학과 교계 여성운동의4) 성과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각각 떨어져 있는 두 주체를 매개하고 연결할 중간자로서 페미니즘 인식을 가진 목회자의 존재가 중요하며, 이러한 사명을 가진 여성/남성 목회자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신학교 안에서 여성학/여성신학 과목이 필수가 되어야 하고, 노회 차원에서도 목회자 계속교육의 일환으로 도입하기를 제안한다.
특히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교회 구성원들에게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필수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공공기관과 기업체에서는 의무적으로 연 1회, 1시간 이상 받게 되어 있는 교육이다. 성폭력은 위계질서가 강한 곳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성평등 교육은 이러한 위계에 저항하고, 익숙한 위계를 전복할 수 있는 힘과 지식을 가르친다. 교회는 선한 사람들의 집합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며, 교육과 제도가 필요한 공간이다.
그리고 일부 노회에서 존재하는 여성위원회, 양성평등위원회를 각 노회에 설치하여 성/젠더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목회자에게 더 높은 윤리수준을 요구하기는커녕 법으로 실형을 살고 나온 사람도 버젓이 목회를 할 수 있게 하는 교단과 노회에 1차적인 책임이 있다. 교단차원의 파면, 목사직 박탈 등 강력한 징계와 처벌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평신도 여성과 남성 스스로도 교회 내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 내 성평등 교육/젠더감수성 교육 등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좋고, 여성신학/페미니즘 책읽기 소모임 등을 꾸려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발전시킬 수도 있다. 공고한 성차별적 교회를 해체하기 위해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들의 연대와 참여도 필수적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란다. 단언컨대 교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주-

  1.  뉴스앤조이. 2016.08.02. “유명 청소년 단체 목사의 두 얼굴” 
  2.  CBS노컷뉴스. 2016.06.08. “계속되는 목회자 성범죄… 나 몰라라 하는 교단들” 
  3.  한겨례. 2016.08.18. “페미니즘 출판 전쟁!” 
  4.  여성안수운동, 신학교의 여성교수 차별문제에 대한 대응, 교단에 양성평등위원회 설치와 여성할당제 도입 요구,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교재 출판 등 실천적 차원의 여성운동도 있었다. 
출처: http://ichungeoram.com/11026

2016년 9월 11일 일요일

그리스도인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나가주시죠 –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독후의 – ] 그리스도인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나가주시죠

지적인 작업이자, 감각의 훈련이라는 두 영역이 만나는 충만한 쾌락의 세계, 독서 - 성실하게 까칠한 김영수가 쓰는 성깔있고, 색깔있는 책 이야기.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요람 하조니 지음, 김구원 옮김, 홍성사 펴냄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말이다. 그는 아테네와 예루살렘, 이성과 계시,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상호적대적인 관계로 봤다. 참된 지식은 사도적 교회의 권위적 가르침을 통해서만 제시된다. 믿음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기 마련이다. 세속의 지혜는 무익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해롭다 등. 흔히 ‘반지성주의’로 번역되는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에도 유효해 보인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그의 말은 지난 1800년가량 사라지지 않은 그리스도교의 경향 하나를 간결하게 요약한다.
이성과 계시를 가르는 저 견고한 담을 교회 혼자 쌓아 올린 것은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철학에 맞서 신학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확보하려 했다면,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동일한 일을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 했다. 르네상스 운동 이래 서양 근대의 핵심은 그리스 정신의 복원에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이 계시를 이성에 대비시킨 건, 그리스도교 신앙은 합리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 퇴출 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아테네의 후손을 자처하는 그들은 되물었다. 예루살렘이 도대체 아테네와 무슨 관계인가?
역사는 흔적을 남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감지되는 일종의 분열증을 볼 때 그렇다. 한국 교회 어디서든 테르툴리아누스를 만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우월성을 과시하듯,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은 철학을 비롯한 세속 학문 일반을 쉽게 경시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자들의 법정에서 심문이라도 받듯 불안해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진리와 공적 가치를 세속 학문의 입회하에 변증 하길 원한다. 아테네의 승인을 바란다고 할까. 창조과학은 가장 노골적인 사례다.
이쯤에서 지금 다루는 책의 제목이 <구약성서로 철학하기>이며, 서론과 결론의 소제목이 각각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을 넘어서’와 ‘이성과 계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지적하는 게 좋겠다. 이런 책을 집어들 때, 그리스도인 책 품을 만한 기대란 어떤 것일까? 먼저는 아테네와의 화해. 즉, 성서로도 합리적인 사유가 가능함을 입증할 것. 다음은 여전한 예루살렘의 우위. 그러니까 신앙에는 그래도 합리성을 넘어서는 차원이 있음을 보여줄 것. 요약하자면, 믿음은 합리성을 결여한 맹신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적 행위임을 증명하는 것. 지금까지 나온 언론 서평 대부분은 이 책이 그런 기대를 충족해준다고 말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찝찝한 화해

단정적으로 말해야겠다. 이 책은 그런 기대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아니, 상황을 악화시킨다. 원서의 제목은 The Philosophy of Hebrew Scripture, 즉 ‘히브리 성서의 철학’이다. 한국어판은 이를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로 옮겼다. 둘 사이에는 사소한 듯 보이는 차이가 있는데, 이 책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바로 그 ‘차이’ 안에 있다. 한국어판의 제목은 의도치 않게 무엇인가를 실토한 셈이다.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로 옮겨진 결과 책의 목적은 ‘철학하기’로 고정된다. 저자는 실제로 성서로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나아가 몇몇 대목들, 가령 구약성서적 윤리의 핵심은 법의 절대적 순종이 아니라 반항에 있다는 통찰, 사회계약은 인민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이기에 통치 권력의 적법성은 민주주의적 동의뿐 아니라 모세 율법으로 구체화한 신적 권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 구약성서에는 주체-객체의 구분이 없고 인식하는 이에 의해 ‘해석된 대상’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지적 등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저 ‘철학하기’가 어디까지나 습작이라는 사실이다. 서론과 결론을 빼면 책은 1, 2부로 나뉜다. 소제목은 각각 ‘구약성서 읽어내기’(1부),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다섯 편의 사례 연구’(2부)이다. 1, 2부가 순서대로 각각 ‘구약성서’와 ‘철학하기’를 담당하는 것이다. 이상한 일 아닌가. ‘철학하기’가 책의 목적인데 고작 사례연구에 그치다니. 저자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럴 리가. 이유는 단순하다. 습작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철학하기’는 이 책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반복해 주장한다. 히브리 성서는 신약 성서와 다르다. “히브리 성서는 대체로 계시를 매우 중요하고 유용하게 여겼던 기독교적인 신학 주제들에 대해 무관심하다.”(20) 신약의 핵심 사상들은 “히브리 성서가 다루는 주제들 중 40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20) 히브리 성서를 계시로 읽으면 그것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당 부분 ‘삭제’하게 된다.”(21) 히브리 성서를 오독하는 이유는 “기독교 교리라는 굴절 렌즈를 통해 그것들을 보기 때문이다.”(31) 이성과 계시라는 그리스도교적 이분법의 틀은 “히브리 성서를 해석하는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324)
무엇보다 히브리 성서는 ‘증언’이 아니다. 신약 성서는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음을 ‘증언’하는 책이며, 그래서 ‘계시’다. 그와 달리 히브리 성서는 당시에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다룬다. 어떤 비밀스러운 사실을 증언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신약 성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문제 삼는다. 반면 히브리 성서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관심한다. 즉, 히브리 성서는 이스라엘이 겪은 고난의 의미를 그들의 역사를 통해 해석하는 역사철학이자 바람직한 삶과 공동체의 본질을 가르치는 윤리학 혹은 정치철학에 가깝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 성서는 계시라기보다 일종의 “이성적 저서, 다시 말해 철학책이다.”(51)
이 책의 심장은 2부가 아니다. 옮긴이는 “히브리 성서와 구약 성서는 목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에 구약 성서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을 위해 히브리 성서를 구약 성서로 표기했다”고 밝혔다(18). 하지만 정작 저자인 요람 하조니Yoram Hazony는 바로 저 ‘익숙함’을 문제시한다. 이 책의 목적은 Hebrew Scripture를 Old Testament, 그러니까 ‘옛 언약’을 뜻하는 구약(舊約)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이 책은 히브리 성서 구출기, 일종의 출애굽기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누가 예루살렘인가?

저자는 지금 그리스도교 성서의 합리성을 변증 하려 하는가. 그리스도교 성서로도 얼마든지 인문학적 사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은 히브리 성서를 신약 성서와 계시라는 해석학적 틀에서 해방하는 데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철학은 그 수단에 가깝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카르타고 출신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고 아래 인용문을 읽자. 이 책의 결론이자 후속 작업의 방향을 제시한 문장이다.
“예루살렘은 아테네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카르타고와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 이제 예루살렘과 카르타고를 분명히 구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예루살렘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아테네나 로마와 같은 도시들과도 제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322)
저자는 이성과 계시를 양 끝점으로 하는 이분법적 선분 위로 올라간다. 그리곤 히브리 성서를 밀어 의도적으로 이성 옆에 붙인다. 그래야 계시와 멀어지기 때문이다. 의도는 분명하다. 히브리 성서는 차라리 철학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계시, 즉 신약성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예루살렘과 아테네의 화해를 말한다. 다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뒤에는 예루살렘과 카르타고의 불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쥐어짜서 질문 하나만 남기자. 아마도 이럴 테다. 카르타고가 도대체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그때에 비로소 아테네와 로마와 같은 도시들과도 제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저자의 궁극적인 목적이 저 선분 안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오히려 선분 바깥으로의 탈주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적인 것’도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아닌, 독자적 사상체계로서 ‘유대적인 것’의 확립. 하조니의 목적은 아마도 거기에 있다. 그 작업을 단걸음에 할 수 없기에, 히브리 성서를 신약 성서와 먼저 떨어뜨릴 뿐이다. 아직은 ‘습작’인 철학하기가 본격화되면, 아테네 역시 절교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하조니가 설립한 샬렘 출판사는 서양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고전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 중이다(C. S. 루이스와 라인홀드 니버의 책도 번역되었다).

카르타고와 예루살렘은 무슨 관계인가?

아테네와의 화해를 기대하며 책을 폈지만, 정작 예루살렘에서 카르타고로 쫓겨나게 생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반지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교부 신학의 다양성을 재검토하는 일? 신약 성서와 신학 전통 속에서 ‘이성’, ‘계시’, ‘증언’ 개념을 꼼꼼히 다시 살피는 일?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의 관계에 관한 신학의 역사를 되짚는 일? 무엇이든 좋지만 꼼꼼하고 정직한 독서가 우선이다. 좋은 책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모험으로 내몬다. 좋은 독자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 책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좋은 책과 좋은 독자가 만날 때, 한 권의 책은 사건이 된다. 이 책이 그럴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하는 것, 이것으로 출판사와 역자는 할 일을 다 했다. 남은 건 독자의 몫이다. 불편한 부분을 도려내고 읽고 싶은 대로 책을 읽는 것, 그래서 책이 제기하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는 것, 그것 역시 반지성주의다.

2016년 7월 10일 일요일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동안 미국사회에서 과학 對 종교라고 하는 폭 넒은 주제 아래 논의 되었던 것들을 정리해 보면 두가지 중요 과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난 수십년간은 "과학이 과연 진화론이 창세기의 창조기사와는 상치되는 것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비난을 견디어 낼 수 있을것인가?" 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다. 지난 수년동안에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또는 I.D.라고도 함)이 대두되면서 창조론은 새로운 각광을 받아 왔다. I.D.란 진화과정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부분들 보다도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과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려고 시도 한 것으로 지난 12월 연방재판소가 학교에서 가르치기에는 부적절한 의사(疑似pseudoscience)과학이라는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혜성처럼 언론매체의 각광을 받아 왔었다. 그리고 미국 과학계는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같이 가르쳐야 한다는 보수적인 크리스쳔들의 주장에 무척 시달려 왔든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상황이 바뀌면서 공수(攻守)의 역활이 비뀌었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화두는 " 종교가 과연 과학의 발전을 견디어 낼 것인가?"하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간의 이러한 논쟁은 물론 다윈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지적설계론에 반발하는 과학자들과 인간경험의 본질을 지도로 그려내고 수치로 측정하며 한발 나아가 아에 바꾸어 놓을수 있는 능력까지도 그들의 과학적인 훈련(discipline)을 통해서 향상시킬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과학자들에 의하여 反 종교적인 입장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뇌촬영 사진들이 정신(영혼)은 분비선이나 연골등과는 독립되어 있다고 보는 종교적인 개념들에 도전하면서 의지나 감정의 생리적인 위치를 선명하게 그것도 칼러까지 곁들여 보여주고 있다. 뇌 화학자들은 환상을 보는 성자(聖者)들과 심지어는 예수의 어떤 황홀경의 상태에 영향을 끼쳣을 수 있는 어떤 내적 불균형상태를 추적하고 있다. 이전의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진화론적 심리학 분야에서는 신(神)이 개입되지 않은 이타심과 심지어는 신과는 관계가 없는 종교심에 대한 이론까지도 만들어 내고 있다. 우주론에 대한 다양한 가설등은 우리가 사는 우주는 한 무리의 우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수 있으며 운좋게도 환경이 갑자기 좋아져서 신의 섭리 없이도 생명체가 갑자기 생겨났을수도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만약 그 가능성이 1억분지 1이라고 하드라도 300억의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는가?)

로마캐토릭의 Christoph Schonborn추기경은 신앙에 도전하는 이들을 '과학(지상)주의' 또는 '진화론'의 열렬한 추종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학이 하나의 세계관과 하나의 시금석으로 종교를 대치할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험관을 흔드는 사람들이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극우파들이 행사했던 부시행정부의 과학정책에 대한 영향이나 9/11에서 표출된 테로리스트들의 극단적인 신앙과 '지적설계론자'들의 주제넘은 주장에 그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멸감을 느끼고 '전례없는 분노'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과학과 종교는 서로 보완하기 보다는 서로 대치되어 왔다고 주장하며 Yale대학의 심리학자 Paul Bloom은 '종교와 과학은 항상 충돌할것이다"고 말할만큼 격화되어 가고 있다.

요즈음 서점에는 신과 과학과의 사생결단의 싸움에서 과학의 승리를 선포하고 신앙 가운데 내재하는 진실성마저도 무시해 버리려는 과학자들의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The God Delution(하나님 망상)이란 책을 출판한 Richard Dawkins를 들 수 있다. 지금 5주째 New York Times 베스트셀러(11월 현재 8위)에 올라있는 이 책은 제목 자체가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들어내고 있다. 신앙이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저자는 다윈의 이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의 이번 저서는 최근 출판된 일련의 무신론자들의 저서들 가운데 하나일뿐이다. 2004년에는 Sam Harris라는 신경과학 전공의 대학원생이 쓴 The End of Faith(신앙의 종식)라는 책이 출판(40만부 인쇄)되었으며 그 후속편으로 쓴 96페이지짜리 Letter to a Christian Nation(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이란 소책자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 14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봄에는 Tufts대학 철학교수인 Daniel Dennett가 쓴 Breaking the Spell:Religion as a Natural Phenomenon(魔力 깨부스기-자연현상으로서의 종교)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베스트셀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공공분야에서 많은 논란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에게 정면으로 반대하여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반대론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사실상 과학에는 별 관심이 없는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의 성경에 대한 입장은 확고부동하여 양자간에 거리를 좁힐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TIME지에 의하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우리는 양쪽 입장을 다 원한다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장족의 발전에 박수갈채를 보내면서도 안식일에는 과학도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MRI와 기적을 동시에 원한다. 우리는 입장 차이가 본질적으로 너무 적대적이어서 토론에서 아무런 결론을 얻을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줄기세포와 같은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Dawkins와 같은 거장과 균형을 맞추기위해 종교적인 확신을 가지면서 과학계에서도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어서 과학과 신은 조화를 이루며 사실은 과학도 하나님의 것(도구)이라고 권위있게 주장할수 있는 과학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과학자들중 한 사람으로 Stanford대학의 생리학자인 Joan Roughgarden교수를 들수 있다. 그는 최근 Evolution and Christian Faith(진화론과 가독교 신앙)란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녀는 진화생태학의 개념을 성경의 구절들을 곁들여 설명하면서 크리스쳔의 입장에서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다. 전형적인 종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곤충학자 Edward O. Wilson은 The Creation:An Appeal to Save Life on Earth(창조-지구위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한 호소)란 책을 썼는데 그는 신을 믿건 안 믿건 자연을 보존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과학과 신앙의 공동의 광장을 강조하는데 누구보다도 유명한 학자는 Francis Collins라 하겠다.

Collins가 유전학에 바친 공헌은 Dawkins보다 더 지대한 것이다. 1993년이래 국립 인간제놈연구소의 소장으로 2,400여명의 과학자들을 지휘하여 3억개의 생리화학 문자로 되어 있는 생리학 청사진을 만들었으며 그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당시 Clinton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그들의 공로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Collins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제놈연구와 그것을 의료분야에 활용하는 방법을 탐구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는 27세에 무신론자에서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고 지금은 젊은 복음주의 과학자들에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不可知해지는 과학분야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개진할것이냐에 대한 조언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활용하는 분명한 크리스쳔이다. 그는 지난 여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The Language of God: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하나님의 언어-과학자가 제시하는 신앙의 증거들)란 책을 출판하였다.

TIME지는 Richard Dawkins와 Francis Collins의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대화내용을 계재하였다. 과학에는 문외한으로서 현대의 두 첨단 과학자들의 대화를 번역한다는 것은 능력밖이라고 생각하여 약하고 그들의 결론부분만 소개하면

Collins:지난 4반세기가 넘게 과학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살아 오는 동안 저는 Richard Dawkins 교수가 주장하는 자연세계에 대한 모든 결론들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아무런 갈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것은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과학이 대답을 제공할 수 없는 것들-어떻게?라는 질문 대신 왜냐?하는 의문에 대해서-이 있을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왜?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많은 대답들은 영(靈;spiritual)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과학자로서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 보아야 나의 능력으로 절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Dawkins: Francis Collins교수께서 대화중 가끔 저를 마음이 꽉 막힌 사람으로 시사하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의 마음은 저도 감히 꿈 꿀수 없고 교수님도 상상할 수 없으며 어는 누구도 감히 생각해 볼 수 없는 훌륭한 것들이 미래에 가능하리라고 하는데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래에 얼마나 경이로운 발견들이 이루어 지든지간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특정한 역사적인 종교 가운데서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에는 회의적입니다. 대화를 시작하여 우주의 기원과 물리적 상수(常數)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을때 저는 설득논리로 하나의 초자연적인 지적 설계자에 대해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그것은(지적설계자이론) 가치가 있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논박할수 있는 여지가 많은 이론이지만 그럼에도 존중할 가치가 있는 웅대하고 거대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올림피아 신전의 여러신들이나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예수이야기는 그렇게 웅대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것들은 지엽적인것 이라고 생각됩니다. 신(神)이 존재한다면그는 어떤 종교의 신학자가 이미 설명한 그 어떤것 보다도 훨씬 더 크고 더 불가해(不可解)한 분일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교계나 학계-에서는 신과 과학에 대한 논란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창조과학이나 젊은 지구 이론을 가지고 성서의 무오성이나 교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진화론이나 현대첨단 과학의 이론을 저주받을 마귀의 이론아라고 매도하고 있지나 않는지? 신앙을 가졌다는 과학자들은 아에 과학자로서의 자격 미달자고 간주하거나 과학에서 신의 자리는 없다며 자신의 신앙생활과 힉문하는 것은 아예 별개의 것으로 생각지는 않는지? 많은 크리스쳔 과학자들이 최근 과학계의 도전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 들이고 그 의미를 음미하고 있는지?

TIME지에 실린 Richard Dawkins와 Francis Collins의 대담을 읽으며 떠오른 의문들이다.

(정리 김상신)

2016년 5월 6일 금요일

“냉철한 열정” –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

서구 주류 교회에 ‘자유주의’라는 딱지, 그것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형성된 신학의 한 흐름을 덧씌워서 비방하는 동시에, 그 쇠퇴의 다른 여러 요인을 슬그머니 감추는 일들이 편만한데, 그 감춰진 실상과 요인을 조금 들춰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속화의 최대 수혜자는 보수 근본주의 종교’들’이다.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교단)는 자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리버럴, 혹은 진보적이라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은 삿된 세속화의 유혹에 넘어가서 ‘정통’ 신앙을 버린 이들일까? 이 주류 교회는 어디서나 그렇게 맥을 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오늘 유에스 투데이와 뉴욕 타임즈에 나란히 등장한 칼럼은 이런 고민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유에스투데이에 실린 올리버 토마스의 글 “(미국의 주류) 개신교는 몰락했는가?”는 미국 주류 교회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었던 공헌과 그 쇠퇴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여전히 그 공헌이 지닌 가치의 중요성을 옹호한다.

과거 미국의 개신교 주류 교회는 건국 초기부터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남달랐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이 이 주류 교단 출신이었다(가장 많은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교단은 성공회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치인들과 소위 ‘사회 지도층’을 통한 교회의 영향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주류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직접 발언하고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의 여파들은 이미 전에 쓴 글에서 적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을 겪은 주류 교회들이 쇠퇴를 경험했을지라도, 이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젊은 세대들과 함께 하는 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류 교회들이 그동안 사회 정의라는 면에서 인종 차별 문제, 여성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그리고 지구적인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적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한 세대를 넘어서야 그 청중을 얻는 셈이다. 게다가 이 주류 교회의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신학은 “하느님의 신비에 비추면 모든 신학은 잠정적”이라는 주장으로 젊은 세대와 함께 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누룩이 되라 부르셨으니, 그에 마땅한 실천에 교회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뉴욕 타임즈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일관된 관심, 특히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이 가난에 대한 세속 ‘리버럴’과 신앙인들의 태도와 참여를 비교한다. 리버럴들이 아무리 좋은 가치를 말하더라도, 현재 미국 사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 문제에 관련하여 돈을 내고 몸으로 뛰는 이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이라기보다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세계적인 원조 단체인 월드 비전(World Vision)을 예로 들어, 여느 세속 원조 단체보다도 인력과 재정, 활동 영역이 크다고 말한다. (참고로 월드 비전은 한국 전쟁과 관련되어 생긴 원조 단체로, 이전에 ‘선명회’로 불렸으나, 명칭으로 겪은 오해 때문에 결국 이름을 바꿨다.) 특히 그는 세계 곳곳의 빈곤 상황에 “교회는 어디에 있었나?” 라고 물으며 반성했던 월드 비전 미국 대표의 입을 빌려, 미국 리버럴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세속 리버럴들의 조소와 비판 대상인 신앙인들, 그리고 종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훨씬 열정적으로 세계의 빈곤과 비참에 응답하여 투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젠 체하는 리버럴은 이런 종교/신앙인에게서 배울 일이다.

흥미롭게도, 토마스와 크리스토프는 각각 구약의 예언자의 입을 빈다. 정의의 예언자 미가(Micah)와 새로운 기운과 생명의 예언자 에제키엘(Ezekiel)이다. 특히 이 예언자들은 사회의 어떤 도덕규범의 준수 여부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이들을 위한 정의를 하느님의 뜻이라 대언( 代言:prophecy)했던 이들이다.

옥이 티라고 할까? 크리스토프의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의도는 알겠지만 좀 더 섬세했으면 했다. 그가 비판하는 ‘리버럴’은 ‘세속 리버럴’을 주로 지칭한다. 그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라는 말은 넓게 ‘종교인/신앙인’을 지칭해도 문제가 없는 말이다. 내가 너무 민감한 지 모르겠으나, 이런 용법 때문에 자칫, 그리스도교 내의 리버럴과 복음주의 보수파의 비교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위에 든 토마스의 글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리버럴’한 주류 교회의 사회 참여와 원조를 통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다. 또 복음주의 보수파가 늘 이런 참여에 활동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원조 활동마저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보이거나 투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도 있다. 게다가 [월드 비전]이 꼭 복음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전달하면서 ‘신앙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쨌든 크리스토프는 “세속 리버럴이 속물근성을 포기하고, 복음주의자들이 거룩한 사람입네 하는 태도를 포기한다면, 인류 사회 공동의 적인 문맹과 인신매매, 출산 사망 등을 줄여나가는데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아니 인간성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의 진보든 보수든 함께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 자신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이 주장은 갈등과 문제의 여러 속내를 너무 쉽게 덮어버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세계가 당면한 현안, 특히 가난 속에서 위기에 놓은 생명의 문제를 좀 더 부각시켜 실제로 도움을 주자는 몸부림으로 들린다.

사실 그리스도교 주류(한국이 아닌)의 리버럴/진보 진영은 이를 “공동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설득하고 실천해왔다. 이에 반대하는 신자들을 잃으면서도 말이다. 그동안 ‘번영 신학’으로 몸집을 불린 교회들이 어떤 위기감에서든 사명감에서든 새롭게 이러한 노력에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례로, 메가 처치의 대명사인 캘리포니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아프리카 HIV/AIDS 해결을 위한 원조 기금을 만들어 활동하겠노라 나선 것도 그렇다. 이미 음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과 그 노력이 이처럼 언론에 미끼를 물리는 대규모 투자에 다시 가려진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라도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다시 서구 주류 교회의 운명을 생각한다. 아니, 비주류에, 소수자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리버럴/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리버럴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세속 사회라는 필터 속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과 그 실체를 이뤄내며 문화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앙적 열정도 걸러져 버렸는지 모른다. 반면, 보수/근본주의 종교/신앙은 표면적으로 세속화를 적대시했지만, 그 핵심인 소비주의/상업주의와 결탁하면서, 사회적 책임 없는 욕망으로 맹목적인 열정만을 키워왔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와 한국 소수자 교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순간, 내게는 두 명의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던진 금언이 떠오른다. 1960년대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대주교는 당시 교회 일치 대화의 맥락에서, “성공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사라지기를 원하는 교회이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라짐을 위한 선교 사명을 다하겠노라”라고 다짐했다. 주류 교회의 쇠퇴는 이런 점에서 인류를 위한 공동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사라지더라도 좋다는 매우 예언자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1980년대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신앙인이 갖춰야 할 태도를 “열정있는 냉철함”(Passionate Coolness)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안팎의 리버럴/진보와 고민하는 보수주의자/복음주의자(근본주의가 아닌)에게 다시 적용한다면 “냉철한 열정”이 아닐까 한다. 그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 전략을 위한 냉철한 연구와 판단, 그리고 이를 위해 투신하는 열정이, 서구 주류 교회의 경험, 우리 사회의 작은 교회의 경험, 그리고 뜻을 찾아 고민하는 모든 신앙인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http://viamedia.or.kr/category/news/page/5

2016년 5월 4일 수요일

“여성 혐오의 승리에 길을 잃은 신앙인들”

2009년 10월 천주교 교황청에서 성공회를 탈퇴한 보수파 인사들을 위한 특별 조치가 발표된 바 있다. 문제의 핵심은 성공회의 여성 성직이었다. 세계 성공회 안에서도 뒤늦게 영국 성공회가 1992년에 여성 사제직을 인정하고, 여성 주교직의 걸림돌도 제거한(2014년 이후 가능) 마당에, 성공회 내 보수 인사들이 탈퇴 이후를 교황청과 논의하면서 나온 조치였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직후에 로마에서 있는 교회 일치에 대한 강연에서 성공회의 여성 성직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2010년 교황의 영국 방문과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시복식과 더불어, 탈퇴한 성공회 성직자들에 대한 조치는 더욱 탄력을 받았고, 지난 11월에는 영국 성공회의 몇몇 주교들(은퇴 주교 포함)이 천주교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셋이 천주교에서 부제와 사제로 동시에 재서품을 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영 가디언지는 이례적으로 사설에 이 문제를 다루면서, 천주교의 조치와 이 사건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여성 혐오”가 교회 권력 사이에서 힘을 얻는 동안에 정작 신자들을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고 경고한다.

사설을 아래에 옮긴다.

“여성 혐오의 승리에 길을 잃은 신앙인들”

지난 9월 교황 베네딕트의 영국 방문 끝에 그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앞에 펼친 기세와 호의는 영국 천주교에 도전을 가져다 주었다. 거리낌 없는 (여성 성직) 반대자들이었던 전직 성공회 주교들을 부제서품과 사제서품을 단번에 연결해서 재빨리 천주교 사제로 서품한 일은 대부분 사람들이 원하는 우선 과제는 아니었다.

영국 천주교를 이끄는 빈센트 니콜스 대주교는 개인적으로 불편하게 생각하던 일을 어제 행사에서 최선을 다해 잘 처리했다. 모양을 냈을 지언정, 이는 천주교가 성공회에 대해 사람 빼내기에 집중했다는 사건이다. 이로써 종교개혁 이후에 잃은 점수를 천주교는 만회했는지 모른다.

여성 성직에 반대하면서 성공회를 탈퇴한 사람들을 위한 천주교의 특별 자치 교구는 천주교 내부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양 교회의 긴장을 야기할 뿐이다. 그리하여 다시한번 그 관심은 그리스도교의 다른 교단들 사이의 논쟁에 쏠리게 될 것이며, 종교를 실제 세상과는 관계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할 것이다.

가난의 문제, 기후 변화, 자연 재해 등 우리 지구가 직면한 모든 도전들을 염려하는 판국에, 종교 기간들이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로 언쟁하면서 소진하는 모습은 빈정거림의 대상이다

이제 종교 만이 여전히 여성을 이등 시민으로 다룬다. 천주교가 자신과 더불어 제도적인 여성 혐오를 나누면서 성공회를 탈퇴한 한 줌의 변절자들을 모집하는 일이 계속 잘 될 것이라 믿는다면, 이는 오산이다.

이 와중에, 교회가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들, 즉 사회 정의를 위한 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일들은 다시한번 무대 밖으로 밀려난다. 이런 교회 권력의 정치 게임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대부분의 영국 천주교 신자들은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다른 종교의 신앙인들이나 무종교인들, 그리고 좀 더 깨어있으며 관대한 이들은 분노를 가지고 점차 그들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영 가디언, 2011년 1월 16일치 http://goo.gl/yb9tA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창간사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매진 마당으로 인사드립니다. 상상마당이라고 하셔도 좋구요. 딱딱한 마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마 새로운 독자분들께서 이 글을 보실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일이 일어날지는 장담할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많고, 또 많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상국가 프로젝트가 시작한지 우리는 13년째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장해가고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것입니다.

허물없이 지내온 우리 친구들. 같이 새로운 발자취를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함깨였으며 앞으로도 함께일 것입니다. 이 블로그를 열면서 우리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가상세계에서 이 세월을 지냈지만. 우리가 이 세월을 돌아봤을 때, 이것은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고, 우리 삶의 증거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것을 믿으며, 이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이것이 우리에게 하는 말임을 믿으면서 나아갑시다. 우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네이버에서 카페를 시작할때, "한국말 잘하는 한국사람들이 우리를 마구마구 못살게 굴면 어떻하지?" 등의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둘러싸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서서히 지내고 보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하나의 세력으로 하나의 사회실험설을 꿋꿋히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가상국가를 위해 수많은 지식들을 공부했습니다. 국가는 사회의 결정체임을 믿고, 우리가 정치와 사회를 실험하고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완벽한 사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13년째 가상국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순수한 가상국가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 형, 정광현으로부터 시작한 이래로 13년째, 우리는 우리가 배운 교훈으로 이 언론을 차리고, 우리가 배운것을 기반으로 서로 협력하는 언론이 되려고 합니다. 다른 언론과는 규모상에서 밀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전문적이지도 않고, 그냥 아마추어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마추어이지만, 앞으로 이것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하나의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 길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엔 어둠이 도사리고 있고,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서로 믿고 나아갑시다.

 2013년 12월 22일 정 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