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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9일 목요일

[이슈 따라잡기] 교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청어람 매거진은 끊이지 않는 목회자 성범죄 현상을 주목하며 결국 교육과 제도의 문제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결국 '한국교회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청으로 연결됩니다. 관련하여 청어람ARMC 초대 간사를 거쳐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며 '여성주의 교회 공동체'를 연구한 안정인의 글을 싣습니다. 이와 관련한 또 다른 관점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주

‘목회자 성범죄’는 왜 끊이지 않는가?

지난 8월 2일 뉴스엔조이에서 라이즈업무브먼트의 이동현 목사가 10대 여고생에게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강요했다는 사실을 밝혀 파문이 일었다.1) 사건의 전말을 다룬 기사가 쏟아졌고, 분노와 비난의 목소리도 거셌다. 인정을 하지 않고 버틸 거라는 예상과 달리, 라이즈업무브먼트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동현 목사는 대표직과 목사직을 사임하는 등 빠르게 대응했다. 이로써 사태는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목회자 성범죄는 왜 이렇게 많이 발생하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년 동안 성직자가 저지른 성범죄 건수는 442건으로 전문직업군 가운데 가장 많다고 한다.2) 성범죄에 관한 친고죄가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고발과 조사 과정에서 발생할 2차 피해를 염려하여 신고 되지 않은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교회는 구성원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결사체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조용히 덮고 교회를 떠나는 일은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이 성적 순결을 외치는 한국교회의 민낯이다. 과연 교회는 이대로 괜찮은가?

‘성차별’이 일상화 된 교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성폭력도 해결해야 할 큰 문제이지만, 사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성차별적인 구조와 문화가 더 문제다. 한국교회 여성들은 남성의 보조자로서 주변적인 위치에만 머물러 있다. 예장합동, 예장고신 등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는 교단이 여전히 존재한다. 기장, 기감, 예장통합 등 여성안수가 가능한 교단에서도 여성목사 청빙을 기피하거나, 유아부나 유치부 등 돌봄 영역에 국한하고 저임금, 파트타임으로만 고용하는 등 임금·지위 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 내 최고결정기구인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 역시 남성들로만 채워진 교회가 대부분이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식사당번, 청소, 전도, 심방, 행사준비 등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간주되는 일에 무보수로 동원되며, 이는 봉사와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이러한 남성 독점적 제도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와 교회가 속해있는 상위조직인 교단의 노회나 총회에서 더욱 심화된다.
교회 내 성 불평등은 의식적인 면에서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여성들이 기저귀 차고 강단에 올라가? 안 돼!”라는 총회장 목사의 소위 ‘기저귀 발언’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월경과 출산을 혐오하는 언설들이 교회에는 가득하다. “하와 때문에 아담이 범죄하고, 밧세바 때문에 다윗이 범죄했다”라고 여성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구절로 입을 틀어막는다. 이런 발언들이 교회 내 설교에서 공공연히 등장하고,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발화된다. 이는 여성들이 주체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위계적인 교회 구조와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한 여성의 역할배제와 제한, 이를 정당화하는 성서해석과 근본주의 신학이 세 꼭짓점을 이루어 한국교회 내 성차별을 고착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듣지도보지도말하지도말라

기독교와 페미니즘은 만날 수 없는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신안군 여교사 성폭력 사건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이 계속되고, 여혐과 남혐 논란, 메갈리아를 둘러싼 찬반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여성혐오범죄와 발언이 과거에도 있어왔고, 현재에도 증폭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 20·30대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고무적이다. 사회과학 책 판매 가뭄 속에서 출판계에서는 “페미니즘 출판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페미니즘 관련 신간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판매량 또한 급증하고 있다.3) 강연장에서도 20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질문하는 등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는 페미니즘의 무풍지대인가? 교회도 이런 페미니즘의 물결에 예외일 수 없다. 한국사회의 어느 영역보다 성평등이 가장 더디게 이루지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하다. 페미니즘이 “성차별주의와 이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Bell Hooks)”이며 ”여성을 중심에 두고, 여성의 경험과 입장을 탐구하며, 여성이 탐구의 주체가 되는 학문(Alway)”을 여성학이라고 정의할 때,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현재를 극복하고 해방적이고 평등한 기독교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많은 여성의 참여와 목소리가 필요하다.강남순 교수가 <페미니즘과 기독교>에서 제시한 대로 “기독교가 차별과 배제의 종교가 아닌 포괄과 평등 그리고 연대성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요청성은 이미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명시된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성, 인종, 계급을 초월하여 인간 개개인을 귀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예수정신과 페미니즘은 만날 수 있다. 아니 만나야만 한다. 교회가 페미니즘을 수용하여 더욱 정의롭고 평등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교회에서 잊힌 기독교 페미니즘을 발견하여 계승하라

그러면 기독교 안에는 페미니즘이 없었는가? 교회 여성들은 수동적이며, 가부장적 기독교를 당연시해왔는가? 개인적으로 성차별적 교회에 대한 고민으로 여성학과 여성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느낀 해방감과 당혹감을 나누고 싶다. 모태신앙으로 교회 안에서 자라고, 기독교 대학에서 공부하고, 기독교 아카데미에서 몇 년간 일을 했던 나는, 성차별적 교회 구조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마지막 학기에 기독교학과에서 여성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여성 억압적이라고 생각했던 구약성서가 시대의 산물이며 그 나름의 여성 해방적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인물로 다말을, 민족의 지도자였던 미리암과 드보라를, 여성연대의 이야기로 룻을 읽으며 새롭게 성서를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상징체계에 도전한 메리 데일리, 여성들의 삶의 자리인 원형 식탁(round table) 모형을 평등하고 열린 새로운 교회상으로 제시한 레티 러셀, 성과 계급이라는 이중적인 억압으로 고통 받는 흑인여성들의 ‘지극히 작은 자’로서 예수 이해 등을 읽으면서 기독교의 개념이 더욱 풍성하고 깊어졌다. 선배들이 고군분투하면서 작업해 놓은 결과물들을 보니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로소 나도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왜 이러한 내용이 30년간 교회 안에 있었던 여성인 ‘나’와는 만나지 못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 교회, 기독교학교, 기독교사회운동을 두루 경험하며 교회 내 여성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나에게 조차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억울했다. 지금도 주위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놀란다. 그만큼 교회 내 성차별적 구조가 공고하다는 반증이며,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신학담론이 교회 여성들에게 소개되고 전달되는 통로인 여성(주의 시각을 가진) 목회자가 드문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신학이 신학계에서 자리 잡기에도 고군분투 하느라 대중운동으로 확산하는데 까지 에너지를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도 해본다.
feminism

교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교회에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그동안 쌓아온 여성신학과 교계 여성운동의4) 성과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각각 떨어져 있는 두 주체를 매개하고 연결할 중간자로서 페미니즘 인식을 가진 목회자의 존재가 중요하며, 이러한 사명을 가진 여성/남성 목회자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신학교 안에서 여성학/여성신학 과목이 필수가 되어야 하고, 노회 차원에서도 목회자 계속교육의 일환으로 도입하기를 제안한다.
특히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교회 구성원들에게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필수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공공기관과 기업체에서는 의무적으로 연 1회, 1시간 이상 받게 되어 있는 교육이다. 성폭력은 위계질서가 강한 곳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성평등 교육은 이러한 위계에 저항하고, 익숙한 위계를 전복할 수 있는 힘과 지식을 가르친다. 교회는 선한 사람들의 집합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며, 교육과 제도가 필요한 공간이다.
그리고 일부 노회에서 존재하는 여성위원회, 양성평등위원회를 각 노회에 설치하여 성/젠더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목회자에게 더 높은 윤리수준을 요구하기는커녕 법으로 실형을 살고 나온 사람도 버젓이 목회를 할 수 있게 하는 교단과 노회에 1차적인 책임이 있다. 교단차원의 파면, 목사직 박탈 등 강력한 징계와 처벌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평신도 여성과 남성 스스로도 교회 내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 내 성평등 교육/젠더감수성 교육 등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좋고, 여성신학/페미니즘 책읽기 소모임 등을 꾸려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발전시킬 수도 있다. 공고한 성차별적 교회를 해체하기 위해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들의 연대와 참여도 필수적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란다. 단언컨대 교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주-

  1.  뉴스앤조이. 2016.08.02. “유명 청소년 단체 목사의 두 얼굴” 
  2.  CBS노컷뉴스. 2016.06.08. “계속되는 목회자 성범죄… 나 몰라라 하는 교단들” 
  3.  한겨례. 2016.08.18. “페미니즘 출판 전쟁!” 
  4.  여성안수운동, 신학교의 여성교수 차별문제에 대한 대응, 교단에 양성평등위원회 설치와 여성할당제 도입 요구,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교재 출판 등 실천적 차원의 여성운동도 있었다. 
출처: http://ichungeoram.com/11026

2016년 9월 27일 화요일

다시 생각해보는 위안부 문제

언젠가 위안부 얘기를 하겠다고 했었기에 내가 아는 범위에서 쓰고자 한다. 몇 가지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미심쩍어 책도 한 권 사서 읽었다.

이 방에서도 위안부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마이크류님이 첫 발제를 했었고, 내가 두 번째 발제를 했었다. 그 때 나를 친일파라고 욕하며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는 여성도 있었고, 친일파 논리를 그대로 사용한다면서 내게 절교를 선언한 사장님까지 있었다. 그래도 난 상관 없다. 내가 쓴 글이 진실(팩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진실이 어떤 가치나 확신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안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가치나 확신의 포로가 되어 그것이 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다. 확신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 건방진 말이지만 위안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위안부 문제는 민감하고 그만큼 성역화되어 있다. 나는 그 성역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위안부는 정신대와 다르다. 위안부는 성노예 생활을 했던 가난하고 무학(無學)의 여성이었지만, 정신대는 공장에서 일했던 교육 받은 여학생들이었다. 위안부는 제법 나이가 들었지만(평균 25세), 정신대는 중학교 재학생이거나 중학교를 갓졸업한 소녀였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위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추론을 포함하여 위안부에 대한 진실과 우리들의 오해를 열거해보겠다.

1. ’위안부소녀상’은 잘못 만들었다. 위안부는 소녀가 아니었다. 당시 위안부들은 지금의 윤락여성들처럼 제법 나이가 들었던 것이다.(예외는 있지만 이를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논지를 흐리게 하므로 앞으로도 예외는 무시하겠다.)

2. 위안부 문제를 좌지우지하는 권력기관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이름도 그래서 잘못 만들어졌다. 참고로 전쟁이 터지면 일손이 부족해지므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한다. 일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 정신대도 사실은 대부분 일본 여학생들이었고 조선인 여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위안부는 불법적이었지만 정신대는 합법적이었다. 위안부도 조선인 여성들만 있었던게 아니었다. 초기에는 주로 일본여성들이었고, 전선이 넓어지면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조선인 여성들의 비중이 커졌다. 위안부와 정신대가 다르다는 것은 이제 ‘정대협’조차 인정하고 있다.

3. 위안부 숫자가 20만명이라는 설도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실 20만명이라면 위안부 문제가 1990년대에 와서야 공론화되었을 리가 없다. 일제시대라고는 하지만 20만명이 끌려가는 동안 사회문제화된 적도 없었고, 또 일제패망 후 20만명이나 귀국했는데도 사회문제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추가] 위안부 할머니로 등록된 숫자가 234명 뿐일 리도 없다(2012년 기준). 정신대 숫자를, 그것도 일본인 정신대까지 포함한 숫자를 위안부 숫자로 둔갑시켜 우리들의 집단기억으로 남은 것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

4. 일본정부는 위안부 모집에 관여하지 않았다. 증거도 없다.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광범위하게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이게 핵심이다. 만약 20만명이나 되는 우리 자매나 딸을 강제로 끌고 갔다면, 그 여성들의 가족들이 아무 저항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을 리도 없다. 우리 조상들이 항의하거나 저항했다는 기록도 정황도 없다. 그러므로 일본정부에게 위안부 배상을 하라는 주장은 잘못이다.

5. 심지어 위안부 모집에 일본군이 개입했다는 증거도 없다.(이 부분은 삭제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개입을 한 것 같습니다.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만.)  물론 위안소가 군부대 내외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나 행정기관에서 위안소를 관리하기는 했다. 예를 들면 위생검진을 한다거나 위안소를 장교용과 사병용으로 구분했던 사례가 그것이다. 때로는 포주가 위안부들을 과도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일본군 부대장이 관리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 역시 대부분의 나라에서 나타났던 현상이다. 6.25 때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매춘여성들도 올라갔었고, 종전 후에도 군부대나 동두천 기지촌 같은 곳은 위생증(맞나?)을 가진 여성들만 매춘에 종사하도록 행정지도까지 했다. 이런 유곽이 자영업이었던 것처럼 일제시대 위안소 역시 기본적으로는 자영업이었다. 위안소 역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업자들과 군(軍)의 현실이 접목되어 나타난 자본주의적 사업이었던 것이다.

6. 시골 여성들을 속여 끌고갔던 사람들은 일본정부나 일본군인이 아니라 조선인 인신매매범이나 조선인 윤락업소 포주였다. 그들이 배움의 기회가 없어 무지하거나 쌀밥을 그리워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골 여성들을 속여서 끌고 갔다. 이건 60, 70년대 우리나라 매춘여성들의 경우와 같다. 지금도 스마트폰과 예쁜 옷 때문에 속아서 매춘여성이 되는 여자들이 많다.

7. 따라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오도 일본정부나 일본군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의 증오는 순진하고 무지하고 가난했던 자기를 속여 지옥으로 끌고갔거나 지옥에서 성노예로 부려먹은 인신매매범 및 윤락업소 포주들을 향해 있다. 물론 일제 공무원이나 일본군이 와서 데리고 갔다는 증언은 있지만, 아마도 그건 인신매매범들의 위장술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위안부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일제가 아니라도 지금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나 매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8.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소설이나 영화에서 일부 다루기는 했지만 전국 규모의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식의 서술은 없었다. 기껏해야 위안부들의 비참했던 생활이나 사랑 이야기였다. 1990년대에 위안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도 일본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위안부에 대한 연구는 일본이 훨씬 광범위하고 깊이있게 다뤘다.

9. 뒤늦게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문제가 되자 일본정부도 책임을 느끼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위안부 배상(보상인가?)에 대한 법을 만들려고 했지만 일본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국회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할 수 없이 일본정부가 꺼낸 카드가 국민들 성금을 모으고 거기에 정부예산을 보탠다는 것이었다. 그게 한일이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묘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일본국민들이 동참해서 만든 기금이 ‘아시아여성기금’이었다.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수상의 사과편지와 함께 위로금을 주는 것을 시도했다.

그런데 강성 일변도의 정대협이 전면에 나서면서 수령거부 운동을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사실 상당수 할머니들이(60명인가? 30명인가?) 위로금과 수상의 사과편지를 받기도 했다. 참고로 2012년 현재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 수는 234명이었다.

10. 정대협이 설치면서 위안부할머니들이 정대협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강성이 아니면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위로금을 받은 할머니들조차 침묵하고 ’수요집회’에 나서야 했다. 게다가 일본대사관이나 외국에 톡 쏘는 눈을 가진 ‘위안부 소녀상’까지 세웠다(정말 치졸한 대응이다).

그러자 ‘언제까지 사과해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인식이 일본인들에게 퍼졌다. 대유행했던 한류가 사라지고 혐한류가 판을 채웠다. 아시아여성기금에 성금냈던 일본인들까지 혐한류로 돌아섰다. 일본은 군국주의자들이 설치는 세상이 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한국에서도 대일적개심이 널리 퍼졌다. 한일이 서로를 증오하는 지금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그 사이에 정대협에서 활동했던 리더들은 장관, 국회의원, 심지어 총리까지 되었다.

결국 누가 이익을 보았고 누가 손해를 보았나? 이게 도대체 정상인가? 참으로 안타깝고 원망스럽다.        

11. 기타 몇 가지 사실 : 위안부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하루에도 수 십명의 군인을 받아야 했고, 죽음의 전투를 앞둔 일본군의 폭력적, 변태적 성행위에 시달리기도 했다. 포주나 일본군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일본군과 막장의 인생이 상호 연민으로 작용하여 일본군과 같이 울고 사랑에 빠진 위안부도 있었다.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일본군 장교의 현지처 같은 생활을 즐기며 함께 말탔던 추억을 그리는 위안부도 있었다.  반면 악착같이 돈을 모은 사람도 있었다. 빌린 돈을 다 갚고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도 남아 있으려는 위안부도 있었다. 이상은 지금도 흔히 있는 윤락녀들의 모습이다.

일본군은 점령지의 여성들을 약탈물로 간주하여 강간을 하고 죽이기도 했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약탈물이 아니었기에 동료 또는 군수품같이 생각하여 적국 여성들처럼 대우받지는 않았다. 일본군이 전투에 나가면 반드시 이기라며 일본군을 응원하는 위안부도 있었다. 아니 많았다.

12.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배상할 일이 아니다. 당시 위안부 모집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그러므로 돈벌이에 눈이 멀어 불법에다가 비도덕적 상행위를 했던 인신매매범이나 포주가 비난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도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바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착취, 즉 페미니즘적 시각 또는 사회안전망 시각에서 접근해야 맞다.

2016년 9월 15일 목요일

싸드 결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권의식, sovereignty 의식이 손상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말 전자파가 유해하다는 이유만으로 이와 같이 시위하는 것인가?

국가안보에 관한 사안임에도 정치권에서도 여야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야당은 너무나 익숙한 모습으로 정부만을 비판한다. 본질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부의 의사결정 및 대응 과정을 둘러싸고 잡히는 꼬투리만 물고 늘어진다. 오로지 현 정부의 실패 부각, 그들의 집권 가능성, 자기 당세 확장, 자신의 차후 당선에 이 사안이 어떻게 작용할 지에만 관심이 있다. 누구도 북한의 핵위협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 국가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걱정하지 않는다. 안보가 정쟁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고, 그들 간의 어떤 쟁점보다 덜 중요해진 지도 한참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일부인사들을 새로운 루머와 정부비판을 확산시키고 있고, 시위를 부추겨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자 획책하고 있다. 언론도 진실 여부를 거르는 역할은 포기한 채 이들의 언행을 충실하게 전달하기에 바쁘다. 사회 지도층 인사나 지식인들은 언제나처럼 냉소적으로 방관하면서 유체이탈식 화법을 구사한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우리 내부의 문제점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스스로에게 침을 뱉는 일이라 그만두고자 한다. 대신 외부의 시각에서 우리를 한번 바라보고자 한다. 그 동안 우리끼리 서로의 주장에 사로잡혀 외부의 시각에서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수출과 한류로 쌓아온 국가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될 것 같은 우려도 있다. 과연,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우리를 어떻게 볼까?


외국인들이 본다면?

외국인들이 첫 번째로 궁금해 할 것은 “왜 반대하지?”일 것이다. 북한은 10개 이상의 핵무기를 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탄도미사일에 탑재하여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경량화’하는 데 성공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탑재한 탄도미사일, 즉 ‘핵미사일’로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이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인 사드의 배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난 6월 22일 북한은 무수단 미사일을 1400km 이상의 고고도로 발사하여 400km 거리의 표적을 타격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은 패트리어트(PAC-3)로는 요격할 수 없고, 사드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드는 너무나 중요한 방어수단인데, 그것을 배치하는 것을 반대한다? 외국인 같으면 당장이라도 구매하여 배치하라고 정부를 채근했을텐데, 주한미군이 자신의 사드를 배치하여 방어해 주겠다는 것을 한국 국민들이 반대한다는 것을 외국인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중국이 반대하는 것을 정부가 강행하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반대한다고 대답할 것인가? 미군 것이라서 반대한다고 대답할 것인가? 외국인들은 재차 물을 것이다. 한국은 자주독립국 아니냐고. 국방정책도 중국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느냐고, 한미동맹이 필요없는 것이냐고. 아마 우리 국민 중 누구도 이와 같이 질문하는 외국인들에게 당당하게 답변하지는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외국인들이 궁금해 할 사항은 “성주군민들이 왜 저렇게 격렬한 시위를 하지?”일 것이다. 전자파의 유해성 여부는 과학이라서 따져보면 금방 밝혀질 사항이기 때문이다. 사드 레이더 전파자의 경우 국방부는 100미터만 떨어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전자파 전문가들도 텔레비전에서 전자파가 그렇게 유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전자파의 유해범위가 500미터나 되는 그린파인 레이더의 전자파를 기자들이 방문하여 측정한 결과 30미터 앞에서 허용치의 4.4%에 불과하다고 보도한 바도 있다.

일본에서 배치된 동일한 X-밴드 레이더에서 나오는 전자파는 거의 무시할 수준이라는 자료도 있다. 곧 기자들이 괌(Guam)에 배치된 사드 레이더를 확인하여 보고할 것이다. 성주군민들이 이러한 과학적 자료보다 일부 인사들의 의혹을 더욱 신뢰하는 것을 보면 외국인들은 물을 것이다. 정부가 제공하는 자료의 어떤 요소가 실제와 다른 지를 과학적으로 제기하면 되지 않느냐고. 시위를 하면 전자파가 무해해지고, 시위를 하지 않으면 전자파가 유해해지느냐고.

성주군민들은 외국인들에게 시위하는 분위기라서 시위한다고 대답할 것인가? 지역에 대한 더욱 큰 지원을 바라서 시위한다고 할 것인가? 일부 반정부 인사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시위한다고 할 것인가? 성주군민 중에서 왜 시위하는 지를 당당하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08년 그렇게 처절하게 시위했던 광우병에 관한 모든 사항이 루머로 들어난 전력을 갖고 있는 우리다. 이제 또 그와 유사한 사례를 반복하려는가? 외국인들은 우리의 지성을 어느 정도로 평가할까?

더욱 실감나게 나라로 구분하여 외국인들이 현재 한국에서 사드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한번 유추해보자.


미국 국민들이라면?

미국은 한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고, 2만 8500명의 군대를 한국에 배치하여 동맹공약을 이행하겠다는 결의와 태세를 과시하고 있다.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라는 개념 하에 만약 북한이 한국을 핵무기로 공격할 경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비핵 및 핵무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북한에게 응징보복을 하겠다고 언명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에게는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 지상과제이다. 그렇게 되면 핵무기로 위협하면서 한국을 공격하여 적화통일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7일 만에 남한을 석권하겠다는 “7일 전쟁계획”을 수립하여 훈련까지 실시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주한미군의 주둔을 지속하기 위한 전제조건 중 하나는 그들의 안전, 군대용어로 생존성(survivability)이다. 미군은 물론이고, 모든 군대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노동미사일이나 무수단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여 공격할 경우 아무런 방어책이 없다면 주한미군이 어떻게 한국에 주둔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미군은 북한이 핵실험을 시작하자마자 패트리어트(PAC-3) 요격미사일을 배치하였고, 노동미사일이나 무수단 미사일을 고고도로 발사할 경우 그것이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사드의 배치를 추진한 것이다.

그런데 동맹국인 한국은 주한미군을 보호해줄 수 있는 별도의 방안도 없으면서 사드의 배치를 2년 이상 지체시켰다. 동맹국 군대인 주한미군의 안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은 채 중국이 미국을 향하여 발사하는 대륙간탄도탄(ICBM)을 요격할까봐 걱정하고, 미군이 구매해둔 것을 한국으로 재배치하는 사안인데도 마치 미국이 한국에게 비용을 요구할 것으로 추측하였다. 자신들이 규정에 근거하여 인체에 유해하지 않도록 만들었고, 괌에 배치하여 운영하고 있는 것을 마치 살인무기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우리가 미국 국민이라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중국 국민들이라면?

중국은 한국과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고, 무역거래도 활발하며, 대규모 중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고, 한류의 열풍에 빠져 있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서 북한을 덜 지원하고 있고, 유엔의 경제제재에도 협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은 북한의 비핵화는 물론이고, 통일을 위한 중국의 적극적 지원을 획득하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그러나 중국도 우리와 동일하게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국가이다. 남한과도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좋지만, 북한도 버릴 수 없다. 비록 순수한 방어무기이고, 그들의 ICBM을 요격할 수도 없으며, 레이더의 탐지 범위도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사드가 한국에 배치되는 것보다는 배치되지 않는 것이 편안한 것은 분명하다. 한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으로 불안하다는 사정은 알지만, 그것은 한국의 사정이지 중국이 걱정할 바가 아니다.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끝내지 않으려니까 북한에게 불리한 사드 배치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중국에게는 굳이 한반도 사드 배치를 환영해줄 이유가 없다.

자신들이 국익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에 중국 국민들은 한국도 당연히 위와 같은 중국입장보다는 한국의 국익, 즉 북핵에 대한 자신의 방어를 우선시할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예상과 달리 중국의 입장을 더욱 존중하는 데 매우 놀랐을 것이다. 사드 배치 반대의 이유를 제대로 제시하지도 않았음에도 한국 내에서 다수의 중국 대변자들이 자청하여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해주었고, 2년 이상 논란을 벌여오는 데 대하여 감사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1636년부터 1984년까지 청나라가 조선과 맺은 군신관계 및 사대주의의 영향력이 이와 같이 강하게 남아있다면서 흐뭇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고집을 부리면 미국과의 동맹도 파기시킬 것으로 기대하지 않을까? 한국을 우습게 보지 않을까?


일본 국민들이라면?

일본은 한국과 동일하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북한이 노동미사일과 무수단 미사일을 사용하면 일본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하자마자 탄도미사일 방어(BMD: Ballistic Missile Defense)에 나섰고,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서 비행하자 미국과 함께 최적의 탄도미사일 청사진을 연구하였으며, 2003년 이를 확정하여 그 동안 상당한 노력과 예산을 투자하여 체계적인 BMD를 구축해왔다(한국에서는 MD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세계적으로는 BMD라고 한다).

일본은 다층방어에 의하여 BMD를 구축하고 있는데, 하층방어로 패트리어트(PAC-3) 17개 포대를 주요 도시마다 배치해두었고, 탄도미사일 요격 가능한 SM-3 해상요격미사일이 구비된 이지스함을 4척 운영하고 있다(이를 8척까지 증대시킨다는 계획이다). 즉 북한이 핵미사일을 발사하면 일본은 SM-3로 해상에서 제일 먼저 요격하고, 실패하면 지상의 PAC-3로 요격함으로써 2회의 요격기회를 갖는다는 개념이다. 이것도 불안하여 일본은 사드나 지상용 SM-3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추가로 배치함으로써 3번으로 요격기회를 늘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평시부터 미국과 함께 BMD 작전을 수행하고 있고, SM-3의 사거리와 성능을 더욱 개량한 SM-3 Block II를 미국과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입장에서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드 배치 논란을 보면 놀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동맹관계라면서 미국과의 협력없이 BMD를 추진한다는데 놀랐을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억제 및 승리를 위하여 한미연합사령부까지 보유하고 있으면서 가장 심각한 위협인 핵미사일 대응에 대해서는 미국과 협조하지 않는다?

사드에 의한 중국의 ICBM 요격이나 중국 군사활동 탐지를 걱정해주는 것을 물론이고, 중국에 의한 경제압력까지 우려하는 데도 놀랐을 것이다. 2006년 일본이 미국의 X-밴드 레이더를 배치할 때도 중국이 반대하였지만, 일본은 일언 지하에 무시하였고, 이후부터 중국은 일본의 BMD에 대해서는 제대로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음에도 중국의 대일본 무역규모는 홍콩, 미국에 이어 3위이다.

일본 국민들은 사드 배치를 둘러싼 전자파와 그를 빌미로 한 시위에 대해서는 너무나 놀랐을 것이다. 왜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고, 과학자들이 검증하도록 하지 않을까? 왜 주민들은 시위부터 하고볼까? 그리고 마음 속으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기억과 한말에 갈갈이 분열되었던 조선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까? 35년 동안에 겪은 조선인들도 그랬었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유사한 상황이 오면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스라엘과 스위스의 국민들이라면?

미국, 중국, 일본 이외에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한국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이스라엘과 스위스의 국민들은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라크가 핵발전소를 건설해 나가자 1981년 세계의 이목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이를 폭격하여 파괴시켜 버렸다. 시리아가 비밀리에 건설하고 있었던 핵발전소도 2007년 동일하게 파괴시켜 버렸다. 지금도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징후가 있을 경우 폭격하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음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다. 1994년 영변 핵발전소를 파괴시키자는 계획을 한국 국민들이 반대하였다고 말하면, 이들은 너무나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이 언젠가는 핵미사일을 만들어 공격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오래전부터 BMD를 구축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드와 유사한 위력을 가지는 애로우(Arrow)라는 요격미사일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2000년부터 배치한 다음에 지속적으로 성능을 향상시키고 있고, 패트리어트(PAC-3)를 미국으로부터 구매하여 2회의 요격을 보장하고 있다. 이것도 불안하여 이스라엘은 데이비즈 슬링(David's Sling)이라는 이름으로 애로우와 패트리어트 사이에서 한번 더 요격하도록 계획하여 금년부터 배치해 나가고 있고, 로켓탄이나 포탄까지 요격할 수 있는 아이언 돔(Iron Dome)도 개발하여 배치하고 있다.

이스라엘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총력을 기울여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고자 노력해야할 상황인 것 같은데, 미군이 배치해주겠다는 사드를 반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한 1/4 정도의 국토에 그와 같은 수많은 무기를 배치하고 있는 이스라엘로서 한국이 전자파 피해가 두려워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드의 5배가 넘은 유해범위를 가진 그린파인 레이더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이스라엘 아닌가?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이고, 어느 국가도 그들을 공격하겠다고 말하지 않지만, 국민개병제를 유지하고 있고, 대규모 민방위대를 조직해 두고 있다. 스위스는 1990년 대에 이미 국민의 100%가 대피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하였고, 대표적인 공공대피소인 소넨베르그 터널은 2만명을 동시에 수용하여 2주간을 견딜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으며, 각 가정별로도 유사시를 대비한 대피소와 필요한 장비들을 준비해두고 있다. 한국 서초동의 트라움 하우스라는 빌라는 이 스위스의 기준을 적용하여 대피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스위스 국민들의 입장에서 북핵 위협에 대한 한국의 무심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드와 같은 방어무기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러한 논란을 어떻게 생각할까? 스위스 국민들이 한국에 왔다면 당장 대피소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을 것이다.

우리가 외국인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지만, 객관성은 가질 필요는 있다. 우리 내부의 갈등에 지나치게 함몰될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보편적 기준으로 우리를 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사드 배치가 아닌 핵대비 토의

현 상황에서 우리가 자문해야할 질문은 사드 배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북한이 핵미사일로 공격한다면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가?”이다.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으나 불안하다면 개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답답한 이야기지만, 현재 상태에서 북한이 핵미사일로 공격한다면 한국은 이로부터 국민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북한의 핵위협으로부터 나 자신, 내 가족, 내 후손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국론을 결집하고,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나가야 한다.

정부부터 북핵 대응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국민들이 안심할만한 대응전략을 수립하여 보고해야 한다. 태세가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하고,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하여 보강해야 한다. 청와대 조직은 물론이고, 국방부, 국가정보원, 외교부, 국민안전처 등도 업무의 우선순위와 조직도 북핵 대응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관련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하여 북한의 비핵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여의치 않을 상황에 대비하여 필요한 조치를 식별하여 구현해 나가야 한다.

정치인, 예를 들면 국회의원들의 대오각성과 변신이 필요하다. 국가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그 어려운 국회의원에 도전하여 성공하였다면, 현재의 언행이 국가를 위한 일인지 아니면 자신의 영달만을 위한 것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국민들의 상당수는 그들이 당리당략에 함몰되어 있고,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국가안보도 희생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에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두고 당에 따라 의견을 달리했던 과거 역사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삼권분립’을 명분으로 국회의 권한을 주장 및 행사하고자 한다면, 국정에 관한 3분의 1의 권리에 수반되는 3분의 1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무조건 정부만을 비판하고, 오히려 국민들의 갈등을 조장해서는 곤란하다.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민중의 지팡이’로서 사실 여부를 따져서 보도했는지 아니면 일부 인사가 제기한 루머를 전달하는데 급급했는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결정하지 않으면 무책임하다고, 결정하면 졸속 결정이라고 어떻게든 비판할 꼬투리를 잡고자 노력하지 않았는지? 정부가 공개하지 않으면 불통이라고 하고, 공개하면 국가기밀을 노출시켰다면서 결국은 모든 것을 정부의 책임으로 몰아가지 않았는지? 일부 인사가 의도적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지는 않았는지? 특종이라는 유혹에 국익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지 않았는지? 작은 글재주로 표시나지 않게 오히려 의혹과 불신을 키워오지 않았는지?

그러나 반성과 분발이 가장 필요한 국민들의 집단은 지식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과학적 평가로 정확한 사실을 규정해주면 루머가 발생할 수 없을 것인데, 그들은 계속 방관과 3자적 관점만 지속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광우병, 천안함 폭침 원인과 같이 명백히 과학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그들은 수수방관함으로써 루머가 나라를 휩쓸도록 하였다. 사드의 전자파도 너무나 명백한 과학적 사항이지만, 적극적으로 나서는 과학자들은 소수이다.

오히려 어떤 지식인들은 일부 인사들의 루머를 추종하거나 퍼트리고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처럼 나라를 바로 이끌어야할 집단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필요하다면 국민들에게 듣기 싫은 말도 해야할 것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주(周)나라의 고사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듯이, 아무리 고고한 지식인이라고 국가라는 공동체에 의존하여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배운 지식으로라도 그 공동체에 보답해야하는 것 아닌가?


>질문과 부탁

아직도 나라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인사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까지 주장한 의혹 중에서 한 가지라도 맞은 것이 있는가? 도대체 왜 이러는가? 정말 스스로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 주변의 몇몇이 아닌 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가? 광우병 사태나 천안함 폭침 때 본 재미를 재현하고자 하는가? 여러분들의 자식과 손자들에게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을 자랑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사진을 찍고 앨범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자식과 손자를 지킬 수 있는 복안을 갖고 있는가?

성주군민들에게 간곡하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필자도 고향이 그 근처라서 성주에 배치된다는 결정을 들었을 때 기뻤습니다. 우리 고향도 보호될 것이고, 우리 일가친척도 더욱 안전해질 것이라면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내 고향에서는 언제나 나보다는 가정, 가정보다는 동네, 동네보다는 지역, 지역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성주군민들은 당연히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주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기대와 너무나 달라서 실망이 큽니다. 자초지종도 듣기 전에 반대하고, 아주 오랫동안 시위해온 사람들처럼 익숙하게 시위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낯설었습니다. 정말 전자파가 유해해서 시위하나요, 아니면 지역적 이익을 더 챙기기 위해서 시위하나요? 후자라면 법도에 맞는 건가요? 성주의 서당에서 여러분들을 가르치시던 어르신들이 보시면 호통을 치지 않을까요? 제발 양반의 고을, 성주를 되돌려 주세요.

성주가 반대한다기에 나는 아직도 형수와 내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고향의 군수에게 전화할 생각까지 하였다. 대신 배치를 자청해달라고. 레이더는 절대로 유해하지 않고, 오히려 북한의 핵미사일로 지역주민들이 보호받을 것이라고. 북핵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이 되어 투자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조금 지나 북핵 위협이 더욱 심각해지면 서로가 사드를 배치해달라고 할 것이라고.


2016년 9월 11일 일요일

그리스도인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나가주시죠 –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독후의 – ] 그리스도인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나가주시죠

지적인 작업이자, 감각의 훈련이라는 두 영역이 만나는 충만한 쾌락의 세계, 독서 - 성실하게 까칠한 김영수가 쓰는 성깔있고, 색깔있는 책 이야기.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요람 하조니 지음, 김구원 옮김, 홍성사 펴냄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말이다. 그는 아테네와 예루살렘, 이성과 계시,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상호적대적인 관계로 봤다. 참된 지식은 사도적 교회의 권위적 가르침을 통해서만 제시된다. 믿음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기 마련이다. 세속의 지혜는 무익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해롭다 등. 흔히 ‘반지성주의’로 번역되는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에도 유효해 보인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그의 말은 지난 1800년가량 사라지지 않은 그리스도교의 경향 하나를 간결하게 요약한다.
이성과 계시를 가르는 저 견고한 담을 교회 혼자 쌓아 올린 것은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철학에 맞서 신학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확보하려 했다면,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동일한 일을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 했다. 르네상스 운동 이래 서양 근대의 핵심은 그리스 정신의 복원에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이 계시를 이성에 대비시킨 건, 그리스도교 신앙은 합리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 퇴출 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아테네의 후손을 자처하는 그들은 되물었다. 예루살렘이 도대체 아테네와 무슨 관계인가?
역사는 흔적을 남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감지되는 일종의 분열증을 볼 때 그렇다. 한국 교회 어디서든 테르툴리아누스를 만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우월성을 과시하듯,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은 철학을 비롯한 세속 학문 일반을 쉽게 경시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자들의 법정에서 심문이라도 받듯 불안해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진리와 공적 가치를 세속 학문의 입회하에 변증 하길 원한다. 아테네의 승인을 바란다고 할까. 창조과학은 가장 노골적인 사례다.
이쯤에서 지금 다루는 책의 제목이 <구약성서로 철학하기>이며, 서론과 결론의 소제목이 각각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을 넘어서’와 ‘이성과 계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지적하는 게 좋겠다. 이런 책을 집어들 때, 그리스도인 책 품을 만한 기대란 어떤 것일까? 먼저는 아테네와의 화해. 즉, 성서로도 합리적인 사유가 가능함을 입증할 것. 다음은 여전한 예루살렘의 우위. 그러니까 신앙에는 그래도 합리성을 넘어서는 차원이 있음을 보여줄 것. 요약하자면, 믿음은 합리성을 결여한 맹신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적 행위임을 증명하는 것. 지금까지 나온 언론 서평 대부분은 이 책이 그런 기대를 충족해준다고 말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찝찝한 화해

단정적으로 말해야겠다. 이 책은 그런 기대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아니, 상황을 악화시킨다. 원서의 제목은 The Philosophy of Hebrew Scripture, 즉 ‘히브리 성서의 철학’이다. 한국어판은 이를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로 옮겼다. 둘 사이에는 사소한 듯 보이는 차이가 있는데, 이 책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바로 그 ‘차이’ 안에 있다. 한국어판의 제목은 의도치 않게 무엇인가를 실토한 셈이다.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로 옮겨진 결과 책의 목적은 ‘철학하기’로 고정된다. 저자는 실제로 성서로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나아가 몇몇 대목들, 가령 구약성서적 윤리의 핵심은 법의 절대적 순종이 아니라 반항에 있다는 통찰, 사회계약은 인민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이기에 통치 권력의 적법성은 민주주의적 동의뿐 아니라 모세 율법으로 구체화한 신적 권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 구약성서에는 주체-객체의 구분이 없고 인식하는 이에 의해 ‘해석된 대상’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지적 등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저 ‘철학하기’가 어디까지나 습작이라는 사실이다. 서론과 결론을 빼면 책은 1, 2부로 나뉜다. 소제목은 각각 ‘구약성서 읽어내기’(1부),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다섯 편의 사례 연구’(2부)이다. 1, 2부가 순서대로 각각 ‘구약성서’와 ‘철학하기’를 담당하는 것이다. 이상한 일 아닌가. ‘철학하기’가 책의 목적인데 고작 사례연구에 그치다니. 저자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럴 리가. 이유는 단순하다. 습작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철학하기’는 이 책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반복해 주장한다. 히브리 성서는 신약 성서와 다르다. “히브리 성서는 대체로 계시를 매우 중요하고 유용하게 여겼던 기독교적인 신학 주제들에 대해 무관심하다.”(20) 신약의 핵심 사상들은 “히브리 성서가 다루는 주제들 중 40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20) 히브리 성서를 계시로 읽으면 그것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당 부분 ‘삭제’하게 된다.”(21) 히브리 성서를 오독하는 이유는 “기독교 교리라는 굴절 렌즈를 통해 그것들을 보기 때문이다.”(31) 이성과 계시라는 그리스도교적 이분법의 틀은 “히브리 성서를 해석하는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324)
무엇보다 히브리 성서는 ‘증언’이 아니다. 신약 성서는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음을 ‘증언’하는 책이며, 그래서 ‘계시’다. 그와 달리 히브리 성서는 당시에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다룬다. 어떤 비밀스러운 사실을 증언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신약 성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문제 삼는다. 반면 히브리 성서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관심한다. 즉, 히브리 성서는 이스라엘이 겪은 고난의 의미를 그들의 역사를 통해 해석하는 역사철학이자 바람직한 삶과 공동체의 본질을 가르치는 윤리학 혹은 정치철학에 가깝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 성서는 계시라기보다 일종의 “이성적 저서, 다시 말해 철학책이다.”(51)
이 책의 심장은 2부가 아니다. 옮긴이는 “히브리 성서와 구약 성서는 목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에 구약 성서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을 위해 히브리 성서를 구약 성서로 표기했다”고 밝혔다(18). 하지만 정작 저자인 요람 하조니Yoram Hazony는 바로 저 ‘익숙함’을 문제시한다. 이 책의 목적은 Hebrew Scripture를 Old Testament, 그러니까 ‘옛 언약’을 뜻하는 구약(舊約)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이 책은 히브리 성서 구출기, 일종의 출애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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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루살렘인가?

저자는 지금 그리스도교 성서의 합리성을 변증 하려 하는가. 그리스도교 성서로도 얼마든지 인문학적 사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은 히브리 성서를 신약 성서와 계시라는 해석학적 틀에서 해방하는 데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철학은 그 수단에 가깝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카르타고 출신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고 아래 인용문을 읽자. 이 책의 결론이자 후속 작업의 방향을 제시한 문장이다.
“예루살렘은 아테네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카르타고와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 이제 예루살렘과 카르타고를 분명히 구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예루살렘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아테네나 로마와 같은 도시들과도 제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322)
저자는 이성과 계시를 양 끝점으로 하는 이분법적 선분 위로 올라간다. 그리곤 히브리 성서를 밀어 의도적으로 이성 옆에 붙인다. 그래야 계시와 멀어지기 때문이다. 의도는 분명하다. 히브리 성서는 차라리 철학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계시, 즉 신약성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예루살렘과 아테네의 화해를 말한다. 다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뒤에는 예루살렘과 카르타고의 불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쥐어짜서 질문 하나만 남기자. 아마도 이럴 테다. 카르타고가 도대체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그때에 비로소 아테네와 로마와 같은 도시들과도 제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저자의 궁극적인 목적이 저 선분 안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오히려 선분 바깥으로의 탈주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적인 것’도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아닌, 독자적 사상체계로서 ‘유대적인 것’의 확립. 하조니의 목적은 아마도 거기에 있다. 그 작업을 단걸음에 할 수 없기에, 히브리 성서를 신약 성서와 먼저 떨어뜨릴 뿐이다. 아직은 ‘습작’인 철학하기가 본격화되면, 아테네 역시 절교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하조니가 설립한 샬렘 출판사는 서양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고전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 중이다(C. S. 루이스와 라인홀드 니버의 책도 번역되었다).

카르타고와 예루살렘은 무슨 관계인가?

아테네와의 화해를 기대하며 책을 폈지만, 정작 예루살렘에서 카르타고로 쫓겨나게 생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반지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교부 신학의 다양성을 재검토하는 일? 신약 성서와 신학 전통 속에서 ‘이성’, ‘계시’, ‘증언’ 개념을 꼼꼼히 다시 살피는 일?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의 관계에 관한 신학의 역사를 되짚는 일? 무엇이든 좋지만 꼼꼼하고 정직한 독서가 우선이다. 좋은 책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모험으로 내몬다. 좋은 독자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 책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좋은 책과 좋은 독자가 만날 때, 한 권의 책은 사건이 된다. 이 책이 그럴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하는 것, 이것으로 출판사와 역자는 할 일을 다 했다. 남은 건 독자의 몫이다. 불편한 부분을 도려내고 읽고 싶은 대로 책을 읽는 것, 그래서 책이 제기하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는 것, 그것 역시 반지성주의다.

2016년 7월 10일 일요일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동안 미국사회에서 과학 對 종교라고 하는 폭 넒은 주제 아래 논의 되었던 것들을 정리해 보면 두가지 중요 과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난 수십년간은 "과학이 과연 진화론이 창세기의 창조기사와는 상치되는 것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비난을 견디어 낼 수 있을것인가?" 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다. 지난 수년동안에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또는 I.D.라고도 함)이 대두되면서 창조론은 새로운 각광을 받아 왔다. I.D.란 진화과정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부분들 보다도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과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려고 시도 한 것으로 지난 12월 연방재판소가 학교에서 가르치기에는 부적절한 의사(疑似pseudoscience)과학이라는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혜성처럼 언론매체의 각광을 받아 왔었다. 그리고 미국 과학계는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같이 가르쳐야 한다는 보수적인 크리스쳔들의 주장에 무척 시달려 왔든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상황이 바뀌면서 공수(攻守)의 역활이 비뀌었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화두는 " 종교가 과연 과학의 발전을 견디어 낼 것인가?"하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간의 이러한 논쟁은 물론 다윈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지적설계론에 반발하는 과학자들과 인간경험의 본질을 지도로 그려내고 수치로 측정하며 한발 나아가 아에 바꾸어 놓을수 있는 능력까지도 그들의 과학적인 훈련(discipline)을 통해서 향상시킬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과학자들에 의하여 反 종교적인 입장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뇌촬영 사진들이 정신(영혼)은 분비선이나 연골등과는 독립되어 있다고 보는 종교적인 개념들에 도전하면서 의지나 감정의 생리적인 위치를 선명하게 그것도 칼러까지 곁들여 보여주고 있다. 뇌 화학자들은 환상을 보는 성자(聖者)들과 심지어는 예수의 어떤 황홀경의 상태에 영향을 끼쳣을 수 있는 어떤 내적 불균형상태를 추적하고 있다. 이전의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진화론적 심리학 분야에서는 신(神)이 개입되지 않은 이타심과 심지어는 신과는 관계가 없는 종교심에 대한 이론까지도 만들어 내고 있다. 우주론에 대한 다양한 가설등은 우리가 사는 우주는 한 무리의 우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수 있으며 운좋게도 환경이 갑자기 좋아져서 신의 섭리 없이도 생명체가 갑자기 생겨났을수도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만약 그 가능성이 1억분지 1이라고 하드라도 300억의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는가?)

로마캐토릭의 Christoph Schonborn추기경은 신앙에 도전하는 이들을 '과학(지상)주의' 또는 '진화론'의 열렬한 추종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학이 하나의 세계관과 하나의 시금석으로 종교를 대치할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험관을 흔드는 사람들이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극우파들이 행사했던 부시행정부의 과학정책에 대한 영향이나 9/11에서 표출된 테로리스트들의 극단적인 신앙과 '지적설계론자'들의 주제넘은 주장에 그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멸감을 느끼고 '전례없는 분노'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과학과 종교는 서로 보완하기 보다는 서로 대치되어 왔다고 주장하며 Yale대학의 심리학자 Paul Bloom은 '종교와 과학은 항상 충돌할것이다"고 말할만큼 격화되어 가고 있다.

요즈음 서점에는 신과 과학과의 사생결단의 싸움에서 과학의 승리를 선포하고 신앙 가운데 내재하는 진실성마저도 무시해 버리려는 과학자들의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The God Delution(하나님 망상)이란 책을 출판한 Richard Dawkins를 들 수 있다. 지금 5주째 New York Times 베스트셀러(11월 현재 8위)에 올라있는 이 책은 제목 자체가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들어내고 있다. 신앙이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저자는 다윈의 이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의 이번 저서는 최근 출판된 일련의 무신론자들의 저서들 가운데 하나일뿐이다. 2004년에는 Sam Harris라는 신경과학 전공의 대학원생이 쓴 The End of Faith(신앙의 종식)라는 책이 출판(40만부 인쇄)되었으며 그 후속편으로 쓴 96페이지짜리 Letter to a Christian Nation(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이란 소책자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 14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봄에는 Tufts대학 철학교수인 Daniel Dennett가 쓴 Breaking the Spell:Religion as a Natural Phenomenon(魔力 깨부스기-자연현상으로서의 종교)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베스트셀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공공분야에서 많은 논란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에게 정면으로 반대하여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반대론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사실상 과학에는 별 관심이 없는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의 성경에 대한 입장은 확고부동하여 양자간에 거리를 좁힐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TIME지에 의하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우리는 양쪽 입장을 다 원한다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장족의 발전에 박수갈채를 보내면서도 안식일에는 과학도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MRI와 기적을 동시에 원한다. 우리는 입장 차이가 본질적으로 너무 적대적이어서 토론에서 아무런 결론을 얻을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줄기세포와 같은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Dawkins와 같은 거장과 균형을 맞추기위해 종교적인 확신을 가지면서 과학계에서도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어서 과학과 신은 조화를 이루며 사실은 과학도 하나님의 것(도구)이라고 권위있게 주장할수 있는 과학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과학자들중 한 사람으로 Stanford대학의 생리학자인 Joan Roughgarden교수를 들수 있다. 그는 최근 Evolution and Christian Faith(진화론과 가독교 신앙)란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녀는 진화생태학의 개념을 성경의 구절들을 곁들여 설명하면서 크리스쳔의 입장에서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다. 전형적인 종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곤충학자 Edward O. Wilson은 The Creation:An Appeal to Save Life on Earth(창조-지구위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한 호소)란 책을 썼는데 그는 신을 믿건 안 믿건 자연을 보존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과학과 신앙의 공동의 광장을 강조하는데 누구보다도 유명한 학자는 Francis Collins라 하겠다.

Collins가 유전학에 바친 공헌은 Dawkins보다 더 지대한 것이다. 1993년이래 국립 인간제놈연구소의 소장으로 2,400여명의 과학자들을 지휘하여 3억개의 생리화학 문자로 되어 있는 생리학 청사진을 만들었으며 그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당시 Clinton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그들의 공로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Collins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제놈연구와 그것을 의료분야에 활용하는 방법을 탐구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는 27세에 무신론자에서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고 지금은 젊은 복음주의 과학자들에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不可知해지는 과학분야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개진할것이냐에 대한 조언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활용하는 분명한 크리스쳔이다. 그는 지난 여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The Language of God: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하나님의 언어-과학자가 제시하는 신앙의 증거들)란 책을 출판하였다.

TIME지는 Richard Dawkins와 Francis Collins의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대화내용을 계재하였다. 과학에는 문외한으로서 현대의 두 첨단 과학자들의 대화를 번역한다는 것은 능력밖이라고 생각하여 약하고 그들의 결론부분만 소개하면

Collins:지난 4반세기가 넘게 과학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살아 오는 동안 저는 Richard Dawkins 교수가 주장하는 자연세계에 대한 모든 결론들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아무런 갈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것은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과학이 대답을 제공할 수 없는 것들-어떻게?라는 질문 대신 왜냐?하는 의문에 대해서-이 있을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왜?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많은 대답들은 영(靈;spiritual)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과학자로서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 보아야 나의 능력으로 절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Dawkins: Francis Collins교수께서 대화중 가끔 저를 마음이 꽉 막힌 사람으로 시사하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의 마음은 저도 감히 꿈 꿀수 없고 교수님도 상상할 수 없으며 어는 누구도 감히 생각해 볼 수 없는 훌륭한 것들이 미래에 가능하리라고 하는데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래에 얼마나 경이로운 발견들이 이루어 지든지간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특정한 역사적인 종교 가운데서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에는 회의적입니다. 대화를 시작하여 우주의 기원과 물리적 상수(常數)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을때 저는 설득논리로 하나의 초자연적인 지적 설계자에 대해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그것은(지적설계자이론) 가치가 있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논박할수 있는 여지가 많은 이론이지만 그럼에도 존중할 가치가 있는 웅대하고 거대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올림피아 신전의 여러신들이나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예수이야기는 그렇게 웅대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것들은 지엽적인것 이라고 생각됩니다. 신(神)이 존재한다면그는 어떤 종교의 신학자가 이미 설명한 그 어떤것 보다도 훨씬 더 크고 더 불가해(不可解)한 분일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교계나 학계-에서는 신과 과학에 대한 논란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창조과학이나 젊은 지구 이론을 가지고 성서의 무오성이나 교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진화론이나 현대첨단 과학의 이론을 저주받을 마귀의 이론아라고 매도하고 있지나 않는지? 신앙을 가졌다는 과학자들은 아에 과학자로서의 자격 미달자고 간주하거나 과학에서 신의 자리는 없다며 자신의 신앙생활과 힉문하는 것은 아예 별개의 것으로 생각지는 않는지? 많은 크리스쳔 과학자들이 최근 과학계의 도전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 들이고 그 의미를 음미하고 있는지?

TIME지에 실린 Richard Dawkins와 Francis Collins의 대담을 읽으며 떠오른 의문들이다.

(정리 김상신)

2016년 4월 19일 화요일

"이승만 국부론"과 "8.15 건국절"을 이승만 어록으로 격파하다.




대한민국은 건국절을 따로 두지 않는 대신, 3.1절을 그 연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연설에서 드러나는 그의 사상은 "정부 수립" 과 "민족 해방" 이라는 두가지 개념이 있고, 이는 광복절과 삼일절이라는 두가지 형태의 기념일을 제정함으로서 드러나지요. 3.1운동으로 민족적인 합의를 이룬, 민족자결주의에 기반한 민족의 정부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일제에 폭압에 밀려 중국 대륙에 피난하다가, 민족 해방으로 인해 실질적인 정부의 구성을 하였다 라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설립은 1919년에 했는데, 나라가 없어 정부 구실을 못 하다가, 나라가 해방 된 뒤, 실질적인 정부 구성을 하였다는 요지의 주장을 합니다.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박사

즉 정부 수립, 건국절은 이미 그분들이 주장하시는 국부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 이승만 국부론으로 넘어가면, 어느 연설에서도 이승만은 자신이 국가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부분도 없으며, 국가의 창립의 공을 모두 민중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정부수립 자체의 공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백성들에게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부분도 많습니다.

이는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ramer)들이 쓴 저작과는 미묘하게 다른 부분입니다. 연방주의자 논집과, 제퍼슨의 연설, 그리고 워싱턴의 취임 연설(1차)와 고별사에서 나타나는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국가를 설계할까?" 라는 질문을 고민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과는 달리, 이승만 자체는 정부 수립은 나 혼자만이 아닌, 민중들에 의해서 이미 설립되었고, 나는 국민들에 의해서 선출된 민주정부의 대통령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승의식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그의 대부분의 연설은, 민중들의 투쟁과 독립을 위한 열망아래 건설된 정부를 실질적으로 남부에서나마 실현했고, 어떻게 북쪽과 침략자로부터 자유를 수호할까 정도의 말만 되풀이됩니다. 즉 그는 "민주국가와 자유의 수호자"를 자칭했을지언정 "국가의 건설자"를 자처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러한 부분 말고, 여러분들이 다 아는 헌법 전문에서도 건국절과 이승만 국부론이 안 되는 이유를 한 문장에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 헌법 서문

서론은 이쯤 하고, 그가 쓴 연설문들을 차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위에서 쓴 부분을 감안하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부분 맟춤법과, 지금에는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토씨하나 안 빼고 수록했습니다.

우리 국가의 자유를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우리 의병들이 싸우며 보호하라했고 1919년에 만세운동으로 우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중국과 만주에서는 우리 국군의 잔병이 1945년까지 싸워오다가 마지막으로는 공화민주국가(共和民主國家)의 결실이 되여 지나간 4년 동안에 처음으로 민국정부(民國政府)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

제 2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연설 중

30년 전 오늘에 13도 대표인 33인이 비밀히 모여서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민주국의 탄생을 세계에 공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선열들이 용감스럽게 이 일을 행한 환경이 140여 년 전에 미국독립선언을 서명하던 그 때의 형편만 못지않게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는 정신은 어디서나 한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건설하는 민주국은 탄생한 지 아직 1년이 못되었으나 사실은 30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제 30주년 삼일절 연설 중


다행히 UN감시 하에 민국정부가 수립된 것은 우리 민중이 3·1정신을 지켜나오다가 마침내 민주정부를 완전히 수립한 것이니, 실상 32년 전에 우리 3·1운동을 주창한 선열들이 세운 정신적 민주국가를 이번에 사실적으로 완수한 것이오, 우리 민주정부가 성립된 지 얼마 안에 세계 모든 문명국가들의 지지를 받아 오늘 UN군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과 전무한 물질력으로 우리를 도와주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 32주년 삼일절 연설 중


삼십삼년전 오늘인 일구일구년삼월일일에 우리애국지도자 삼십삼대표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이를 세계에 공포한 것임니다. 그때에 공포된 독립의 정신이 실지상으로 출현되여 일구사팔년 팔월에 대한민국 주국이 탄생된 것이니 지금에 우리는 이 독립을 유지하며 공고커 하기 위해서 혈전사수하고 잇는 중이며...(후략)

기미년, 삼월일일에 선포한 우리 독립선언서에 한 구절은 삼십삼년전에 적합한 것이 오늘에 와서도 적합한 것임니다. 이 구절로 내 말을 맛침니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하노라

제 33주년 삼일절 연설 중

그러나 우리 독립은 우리 전민족의 간담(肝膽)과 정신 속에 사라잇섯던 것입니다. 이 독립이 우리 해외에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사라 잇섯던 것입니다.우리 독립은 세계에 가장 오래고 위대한 역사의 일부입니다.우리 한인(韓人)된 자는 이날에 우리가 행한 일과 또 우리가 대표한 국가를 자랑하고저 하는 바입니다.

제 35주년 삼일절 연설 중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3월 1일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민국이 정신적으로 탄생한 날입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우리가 존경하며 기념하는 33 선렬들이 서울 명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 경찰을 불러와서 잡아가라 한 것입니다.

제 38주년 삼일절 연설 중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 날 우리가 다 같이 모여서 공동히 할 일은 그때 우리의 정형이 어떠하였던 것과 또 우리의 33선렬들이 죽기로 결심하고 이 운동을 시작해서 경향에서 일시에 일어나서 피를 흘리고 싸운 것과 또 한편으로는 임시정부를 공포한 열렬한 역사를 우리가 다 기념해서 그 정신을 이르켜야 되는 것입니다.

 제 40주년 삼일절 연설 중

1919년(기미년)에 우리 13도를 대표한 33인이 우리나라 운명 개조하기 위하여 1776년에 미국 독립을 선언한 미국 창립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 한국을 독립민주국으로 공포한 것입니다. 이 민주정부가 서울서 건설되어 임시로 중국에 가있다가 3년 전 오늘에 우리 반도남방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 정부는 대부분 미국과 UN 각국의 도움으로 태생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한국 천지에 자유가 탄생한 이날을 경축하는 우리로는 이 역사를 이즐 수 없는 것입니다.

제 6주년 광복절 연설 중

즉,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기에 건국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삼일절을 국가가 기뻐하는 국경일로서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국부론을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창립의 주체가 국민, 민중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오, 8.15 건국절을 주장함은, 3.1운동 당시에 "조선인민"의 마음속에 이미 건국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016년 3월 31일 목요일

논문을 읽는법, 그리고 읽었다는 것의 의미

논문을 읽었다는 것은 최소한 그 전체 의미를 이해했고, 그게 무슨 말인지를 알았다는 뜻입니다. 창조설자들의 경우, 과학자들과는 달리 논문을 읽지 않고, 대충 부분만을 가져온 후에 읽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스켑티즈의 글에서 그들이 이렇게 논문을 읽지 않고 하는 이상한 주장의 예 하나를 다루었습니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게도, 논문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논문에 대해 물어보면 됩니다. 이렇게 되었을때 입닫고 가만 있거나, 내용과 관련없는 틀린소리를 하면 논문을 안 읽은 것입니다.

저널클럽이나 랩 미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논문 읽었다고 말하고 내용 이해 못하면 그 저널클럽의 거짓말쟁이는 바로 그 사람이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논문 안 읽었으니 내용을 설명해달라고 말하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요. 그래서 저널클럽 갈때는 반드시 논문을 읽어보고 가거나, 아니면 안 읽었다고 고백을 하고 알려는 자세가 있는 사람들만을 초대합니다. 사실상은 그래도 예의상 스킴이라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부분의 신문기사나 다른정보들은 논문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실수하는 기자들도 수두룩하고, 이른바 악마의 편집을 사용해서 인터뷰를 과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진짜 과학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면 논문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제가 배운, 쉽게 논문 읽는 법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다음 순서로 읽으면 빨리 이해할 수 있다고 저희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 물론 이것은 제가 읽는 방법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이 방법이 통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다양한 방법들을 존중합니다.

1.Abstract(초록)을 읽는다.

어느 논문이든 기본이지만 Abstract(초록)은 논문의 개략적인 내용을 나타냅니다. 물론 논문에 따라 초록이 모든 내용을 함축하는 경우도 있고, 너무 뼈대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으며, 뭔가 잘못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쓰여진 초록의 경우 내용을 함축해서 정리해 놓았기에 사실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이라면 초록만으로 대략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이거나, 초록이 잘 쓰여지지 않은 경우, 제한적인 길이만이 허용될 경우, 초록만으로는 전체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즉, 여기까지 읽는 것으론 논문을 읽었다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분야의 다른 사람의 방법론을 연구하거나, 시간이 부족할 경우에 많은 논문의 초록만을 대략 스킴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이를 논문을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창조설자들의 경우 여기까지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논문이 링크된 다른 기사를 보는 방식을 취하는 황당한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Figure과 Figure legend를 읽는다.

일단 그림은 사람들이 글보다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많습니다. 즉, Figure을 이해하고, 그 Figure 내용을 분석해보다보면 대략의 뼈대가 완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로 메인 데이터와 실험 과정에 관련된 Figure이 많으므로 대략적으로 논문이 무슨 실험을 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부터 사람마다 갈리는 경향이 있는데, 글이 편하신 분들은 3으로 바로 넘어가시는 것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단지 Figure만을 보고 내용을 대부분 유추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지만, 같은 분야에 있을 경우에는 대체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논문을 읽었다고 말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상대의 방법론을 이해할 때나, 결정적인 데이터를 보고자 할때에는 여기까지만 읽는 사람도 있으며, 저널 클럽에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 때 일부 대학원생들이 여기까지 읽는 경우도 있…(으나 그랬다가 대부분 털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3.Introduction부터 Result (Method는 제외)까지 스킴한다.

이제 메인 논문을 읽을 차례입니다. 하나하나 단어에 집착하면 전체 내용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빠르게 한번 스킴하면서 대략적인 내용을 봅시다. 위에서 맞춘 뼈대와 비교하면서, 만약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경우 표시해둡시다. 스킴은 속독이며, 시간이 없을 때 빠르게 논문을 읽는 방법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대체로 저널클럽에 오는 사람들은 논문 전체를 스킴하고 오는 경우가 많으며, 같은 분야이거나 훈련이 많이 되어 있을 경우에 스킴만으로 전체 내용을 어느정도는 이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틀릴 수 있으므로 정독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4. Result를 읽는다.

여기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들사이에 논란이 좀 있는데 저는 이 방법을 선호합니다. 그들 실험이 무엇인지 대충 알았으니, 결과를 읽는 것입니다. 이부분이 논문의 핵심이 되는 데이터에 해당하므로, 꼼꼼히 읽고, 위에서 표시한 부분들을 확인해서 연결된 Figure도 보면서 제대로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부분이 가장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부분입니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적어둡시다. 앞의 2와 3에서 읽은 것들과 잘 연결되는지 보는 것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즐거운 시간이 바로 Result를 정독할 때입니다.(이건 개인적 취향)

5. Method를 제외한 논문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이제부터가 진짜 논문 읽기입니다. 앞에서 스킴하면서 표시해둔 부분과 Result를 읽으면서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을 다 정리해가면서 읽습니다. 4에서 Result를 읽긴 했지만, 다시 읽어보면서 자기가 읽은 내용이 맞는지 확인합시다. 때때로 아무리 정독을 해도 대체 Result가 왜 이렇게 나온건지 이해가 안될 때가 있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궁금증은 해소되게 됩니다. 이때에 이들의 Biological Question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고, 비슷한 분야를 연구할 경우 비판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가 논문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포인트입니다. 보통 대부분의 논문은 여기까지 읽으면 대부분의 논문의 내용을 매우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6. Method를 읽고, 아직도 확실치 않은 부분의 Reference를 찾아본다.

사실 Method를 다 읽지 않는다 해도 이정도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정도는 이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Method를 읽으면서 그 방법의 디테일을 컨펌하고, 앞에서 잘못 이해했던 것들을 발견해서 그 섹션을 다시 읽어봅시다. 이부분은 자기의 분야에서 좀더 상대의 방법론을 이해하고 싶고, 상대의 protocol을 일부 도입하고 싶을 때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비니다. 마지막으로 Introduction이나 Discussion에 나온 이전의 연구나 이후 연구에 대한 Reference논문을 찾아 1부터 6까지 반복한다면, 이 분야에 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게 됩니다. 논문을 읽을 때 즐거운 부분은 바로 이렇게 Reference를 찾아가면서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발전해왔나 보는 부분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대략 논문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논문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처음으로 논문을 읽거나 자기 분야가 아닌 분야 논문을 읽을때, 매우 편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기 분야 논문의 경우 대략적인 스킴만으로도 어느정도 이애할 수 있게 됩니다.

논문을 처음 읽을때는 시간이 오래(저는 거의 24시간이 걸렸습니다.)걸리고, 찾아볼 것도 많지만, 읽다보면 나름 빨리 읽는 요령이 생기게 되고, 이전에 쌓은 지식들이 이해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창조설자에게 이것을 알려준다고 해도 그들은 1도 안 하거나 1을 해놓고 자기가 논문의 내용을 다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며, 오류투성이인 신문기사를 끌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창조설자들에게 이거 알려줘봤자 걔넨 안 읽습니다.


출처: http://skepties.net/p/2542저자:  Neurosum

2016년 3월 29일 화요일

누구나 쉽게 빠질 수 있는 양비론의 함정

때때로 사람들은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 뭐 두가지의 의견을 다 들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창조설이나 지구 온난화 부정과 같은 비과학적 주장을 과학과 같은 위치에 두고 보려는 경향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비론이 생기는 원인은?

과학계에서 수많은 논쟁들이 있을때, 편견을 갖지 않고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맞는 말이며, 양쪽의 주장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뉴런 이론(Santiago Ramon y Cajal의 이론)과 신경망 이론(Camilo Golgi의 이론)의 경우 과학계에서 상당한 논쟁이 있었고, 결국 뉴런이 발견되면서 뉴런 이론쪽으로 대부분의 주장은 기울었습니다. 다만, 후의 신경세포들의 시넵스 연구를 통해 신경망이론도 단지 뉴런이론과 대립하는 것이 아닌, 또다른 의미로 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논쟁을 진행하는 것은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있는 과학자들이며, 서로의 발견에 대한 수많은 논문들을 통해 진행이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과학의 가장 기본중 기본은 치우침이나 편견 없이 열린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그것은 그 주장들이 어느정도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때이고, 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최소한 논문을 써서 피어리뷰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고, 상대가 가져오는 데이터를 신뢰하면서 상호간에 논쟁을 주고 받는 것이 과학의 방식이죠. 반면에, 이미 이런 과정을 통해 과학계에서 이미 결론이 났거나, 더이상 논쟁중이지 않은 사안들, 예를 들자면 진화라던가, 기후변화와 같은 것들은 이런 수많은 논쟁과정과 검증을 통과한 상태로서 사실상 이미 결론이 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를 뒤집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까지 저기에 관한 모든 논문을 읽고, 그 결과를 뒤집을만한 논문을 내야 하겠죠.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이런 과학계의 방식을 이해한다면 과학계의 입장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 상황인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만큼 전문가들이 논쟁하고, 서로 비판해서 얻어낸 결과니까요. 물론 어떤면에서, 일반인들이 과학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tool같은 것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한 교육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이해를 하지 못하고 한 방향에 입장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모른다”라는 점을 전제하고, 이런 모든 발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겠죠. 그러므로 이 분야 전문가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어떤 연구를 했는지를 신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양비론은 이를 거부하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 생각 가운데에는 “내가 전문가보다 많이 알 수도 있어!”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베이스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유사과학을 같은 높이에 놓고 “양쪽”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의사의 처방과 지하철 약장수의 만병통치약을 같은 위치에 놓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상 여기서 두개의 “입장”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으며, 전문가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현재 진화나 기후변화에 대해서 과학계의 생각이 두개로 쪼개지거나 대립되거나 하지 않고, 95~98%의 과학자는 이점에 동의합니다. 이는 과학계의 입장을 분명히 나타내줍니다. 그 “과학계의 입장”이라는 것 자체가, 그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서로 비판해가며 이른 현재의 합의이기에 의미가 있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합의를 이루기까지의 전문적 토론을 논문이라는 방식을 통해 계속 진행해야 하는데, 그정도 수준이 되지도 않는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다가갑니다. 이들의 최초 소스는 대부분 뉴스 기사나 유투브 등의 그다지 믿을만한 소스가 되지 못하는 것들 뿐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이런 것들에 대한 의문이 있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논문부터 써야 하고, 그만큼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논의로 끌어올려야 할텐데, 지금 대중을 대상으로만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사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양비론의 경우 이런 믿을 수 있는 소스와 믿을 수 없는 소스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서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물론 과학 자체에서는 모든 주장에서 열린 마음을 갖고, 편견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이것은 자신이 그것을 판단할 자격이 있을 때의 문제입니다. 아침 축구회에 가끔 나가는 아저씨가 전문 축구 감독에게 전술이 문제가 있다고 훈수를 두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비슷합니다. 제가 박사과정을 통해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은 “모르는 것”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 지식을 갖지 않았다면, 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므로 95-97%의 과학자들이, 그리고 과학계가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는지를 NCSE 혹은 실제 리뷰 논문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스켑티즈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기에 이를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본인의 힘으로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알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추천합니다.

(1) 모든 주장에 대한 원본 소스를 찾아보십시오. 실제 연구 논문이 있다면 그것을 읽어봐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자기네들 주장일 수밖에 없거든요.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유투브가 첫 소스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학술 논문의 경우 다양한 상호 비판을 통해 출판되므로 그 내용은 기사나 유투브에 비해 몇십배는 믿을만 합니다. 애초에 대부분의 기사들은 논문의 일부분을 토대로 해서 기자들이 쓰는 경우가 많아서 많은 경우 실수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유투브 영상이나 기사에 나오는, 과학계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전공을 찾아보십시오. 대부분의 경우 생물학, 혹은 기상학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그들도 이 분야에 대한 비전문가라는 것이고, 그들의 PhD 역시 이 발언에 대하서는 전혀 전문성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한 그들이 쓴 논문들이 최근까지 얼마나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최근에 쓴 논문이 정말 그들의 발언과 일치하는지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도 없이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아무런 전문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3) 내 머릿속에 이해된다고 해서 그게 맞는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창조설자들이나 온난화 부정하는 자들은 정말 알아듣기 쉽게 축소시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만들어서 혼란을 주고, 그 혼란을 틈타서 그들의 거짓말을 전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내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라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유투브와 같은 곳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과학자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이건 뭔가 잘못됬다”따위의 소리를 할때, 생각해보십시오. 과학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당신보다 이 분야에 관해 전문가이고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단순한 의심같은건 하루에 수십번 해보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그들이 아는 것을 전부 알기 위해선 그 분야 PhD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과학계에 대한 음모론은 말 그대로 “전부” 거짓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5) 만약 잘 구분이 안된다면, 왜 이 사람들은 과학계에 가서 이야기를 안 하고 대중에게 와서 이야기하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과학자들은 과학자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전문적 용어에 대한 이해가 있기에 대화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Camilo Golgi와 Ramon y Cajal은 사제지간이기도 했고, 그랬음에도 끊임없이 논쟁했습니다. 과학계에서 정말 옳다고 생각되면 먼저 과학계에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러지는 못하고 대중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의심해보시기 바랍니다.

양비론에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판단능력이 떨어졌다는 신호이자, 스스로 점검해봐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보화 시대에 넘쳐나는 쓰레기 정보들 때문에 누구나 이런 혼란에 빠질 수 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혼란속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출처: http://skepties.net/p/2602
저자: neuros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