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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4일 화요일

현존하는 신약성경은 믿을만 한가?

현존하는 신약성경은 믿을만 한가?

현재 신약성경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원본에서 복사된 사본들만 남아있다고 알고 있는데그 사본들이 원래 처음 쓰여진 원본들과 일치한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사실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어떤 반기독교 웹사이트에 보면, “성경의 원본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복사된 것들은 원래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다그래서 신약성경은 믿지 못할 책이다라고 주장하는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이런 잘못된 주장은 고대 문서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무슨 말이냐 하면지금까지 알려진 고대문서들은 거의 모두가 다 원본이 없습니다모두가 다 원본을 베껴 적은 필사본에 의존하고 있습니다그래서 문제는 신약성경의 기록이 다른 고대 문서들의 기록들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더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그리고 신약 성경 필사본끼리 서로 비교해봐서 얼마나 상호 일치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의 신뢰성을 알기 위해서는 고대 희랍 세계에서 전해 내려오는 다른 고대 역사 기록물과 비교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여러분다른 고대 역사 기록물들은 얼마나 풍부한 신뢰성을 갖고 있을까요우리가 고대문서들의 신뢰성을 비교 검토하기 위해서는 그 저작물의 저술 연대최초 필사본의 기록 시기원본과의 시간 간격그리고 현재 보존되고 있는 사본의 갯수 등을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시이저의 갈리아 전쟁(Gallic War)은 B.C. 58년에서 50년 사이에 쓰였는데 아홉 권 또는 열 권의 사본만이 온전히 현존하며가장 오래된 사본이 시이저의 시대보다 900년 후에 복사된 사본입니다. B.C. 59에서 A.D. 17년까지 살았던 리비(Livy)의 로마 역사서들은 20개의 사본이 남아있고 이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에 필사된 것입니다. A.D. 100년경에 쓰여진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역사서 14권은 20개의 사본이 남아있고, B.C. 460년에서 400년까지 생존했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as)의 책은 8편의 원고만 남아있고 최고로 오래된 사본은 A.D. 900년의 것입니다. B.C. 488년에서 428년까지 생존했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따라서투키디데스와 헤로도투스의 저작물들은 약 1,300년 후에 필사된 사본이 현 시대에 남아있습니다여기에 대해서저명한 학자 F. F. 부루스(Bruce)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그들의 역사서들이 원본보다 1,300년 후대의 것이라고 해서 헤로도투스나 투키디데스의 저서들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고전학자들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이렇게 원본과 사본의 시간 차이가 심하게 벌어지는 경우는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보통 일반 역사의 저작물들은 적게는 몇백년에서 많게는 천 몇백년 이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보편적 현상입니다그래도 역사가들은 그 저작물들의 역사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아래의 표를 보면 더욱 자세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자
쓰여진 시기
(원본)
최고(사본
시간 간격
현존 사본 수
시이저(Caesar)
B.C. 100-44
A.D. 900
1000
10
리비(Livy)
B.C.17-A.D. 59


20
플라톤(4부극)
B.C. 427-347
A.D. 900
1200
7
타키투스(연대기)
A.D. 100
A.D. 1100
1000
20(-)
타키투스(소품들)
A.D. 100
A.D. 1000
900
1
플리니 2(역사)
A.D. 61-113
A.D. 850
750
7
투시디드스(역사)
B.C. 460-400
A.D. 900
1300
8
수에토니우스
(시저의 생애)
A.D. 75-160
A.D. 950
800
8
헤로도투스(역사)
B.C. 480-425
A.D. 900
1300
8
호레이스 소포클레스
B.C. 496-406
A.D. 1000
1400
193
루크레티우스
BC. 55또는 53사망

1100
2
카룰루스
B.C. 54
A.D. 1550
1600
3
유리피데스
B.C. 480-406
A.D. 1100
1500
9
데모스테네스
B.C. 383-322
A.D. 1100
1300
200*
아리스토텔레스
B.C. 384-322
A.D. 1100
1400
49^
아리스토텔레스
B.C. 450-385
A.D. 900
1200
10
호머의 일리아드
B.C. 900
B.C.400(일부분)
A.D.100(단편전체)
500
1000
643
신약성경
A.D. 60-90
A.D.130(요한복음 일부분)
A.D.350(신약전체)
40
290
24,000여개
(희랍어 5,664)
(라틴어 10,000)
(기타언어 9,300)
모두 한 사본에서 전해짐
한 작품의 것임
(죠쉬 맥도웰기독교의 역사적 증거들 (서울여운사, 1989), 107-108의 도표 참조)

위의 표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듯이 다른 고대 문서들의 경우 원본과 필사본의 시간차가 엄청납니다또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사본의 수도 너무나 적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전연 다릅니다. 복음서가 대체로 A.D. 60년경에서 90년경 사이에 쓰여 졌다고 보면요한복음의 일부가 기록된 최초의 사본은 130(좀 더 정확히는 100에서 150년 사이)경에 필사된 사본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요한복음이 90년경에 쓰였다면 우리는 불과 몇십년 이내에 필사된 사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또한 복음서의 일부와 사도행전이 포함되어 있는 3세기경의 사본도 있고요바울의 8개 편지 가운데 많은 부분과 히브리서의 일부가 담겨져 있는 200년경의 사본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A.D. 350년에 쓰여진 사본에는 신약성경 전체가 완전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이것은 최초의 원본과 필사된 사본의 시간 간격이 300년 이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합니다이러한 사실은 신약성경이 다른 고대의 문서들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신뢰성을 가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신약성경은 다른 고대 문서들보다도 원본과 필사본의 시간 간격이 엄청나게 짧을 뿐만 아니라손으로 베껴 적은 필사본의 숫자도 실로 엄청납니다희랍어로 된 사본이 5,664라틴어로 된 사본이 약 10,000그리고 그 외 다른 나라의 언어로 쓰여진 사본들이 약 8,000개 정도 됩니다그래서 모두 합쳐서 대략 24,000개 이상의 사본이 현존하고 있습니다이것은 고대의 다른 문서들과 도저히 비교가 안될만한 숫자입니다예를 들어 다른 고대 문서들은 역사의 사막에 흐르는 강의 물줄기가 실오라기같이 가늘다고 한다면신약성경은 그 역사의 강의 물줄기가 한강수처럼 넓고 풍부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부르스(F.F. Bruce) 박사는 세상의 문서들 중에서 신약성경만큼 훌륭한 필사본의 부()를 누리고 있는 고대 문헌이 없다.”고 했습니다사본이 이렇게 풍부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거룩하게 여겼으며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말해 줌과 동시에 신약성경의 신뢰성을 높여줍니다또한풍부한 사본들은 상호 교차 검증을 통해서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까운 내용인가를 찾아내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2016년 9월 29일 목요일

[이슈 따라잡기] 교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청어람 매거진은 끊이지 않는 목회자 성범죄 현상을 주목하며 결국 교육과 제도의 문제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결국 '한국교회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청으로 연결됩니다. 관련하여 청어람ARMC 초대 간사를 거쳐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며 '여성주의 교회 공동체'를 연구한 안정인의 글을 싣습니다. 이와 관련한 또 다른 관점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주

‘목회자 성범죄’는 왜 끊이지 않는가?

지난 8월 2일 뉴스엔조이에서 라이즈업무브먼트의 이동현 목사가 10대 여고생에게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강요했다는 사실을 밝혀 파문이 일었다.1) 사건의 전말을 다룬 기사가 쏟아졌고, 분노와 비난의 목소리도 거셌다. 인정을 하지 않고 버틸 거라는 예상과 달리, 라이즈업무브먼트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동현 목사는 대표직과 목사직을 사임하는 등 빠르게 대응했다. 이로써 사태는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목회자 성범죄는 왜 이렇게 많이 발생하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년 동안 성직자가 저지른 성범죄 건수는 442건으로 전문직업군 가운데 가장 많다고 한다.2) 성범죄에 관한 친고죄가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고발과 조사 과정에서 발생할 2차 피해를 염려하여 신고 되지 않은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교회는 구성원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결사체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조용히 덮고 교회를 떠나는 일은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이 성적 순결을 외치는 한국교회의 민낯이다. 과연 교회는 이대로 괜찮은가?

‘성차별’이 일상화 된 교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성폭력도 해결해야 할 큰 문제이지만, 사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성차별적인 구조와 문화가 더 문제다. 한국교회 여성들은 남성의 보조자로서 주변적인 위치에만 머물러 있다. 예장합동, 예장고신 등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는 교단이 여전히 존재한다. 기장, 기감, 예장통합 등 여성안수가 가능한 교단에서도 여성목사 청빙을 기피하거나, 유아부나 유치부 등 돌봄 영역에 국한하고 저임금, 파트타임으로만 고용하는 등 임금·지위 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 내 최고결정기구인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 역시 남성들로만 채워진 교회가 대부분이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식사당번, 청소, 전도, 심방, 행사준비 등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간주되는 일에 무보수로 동원되며, 이는 봉사와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이러한 남성 독점적 제도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와 교회가 속해있는 상위조직인 교단의 노회나 총회에서 더욱 심화된다.
교회 내 성 불평등은 의식적인 면에서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여성들이 기저귀 차고 강단에 올라가? 안 돼!”라는 총회장 목사의 소위 ‘기저귀 발언’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월경과 출산을 혐오하는 언설들이 교회에는 가득하다. “하와 때문에 아담이 범죄하고, 밧세바 때문에 다윗이 범죄했다”라고 여성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구절로 입을 틀어막는다. 이런 발언들이 교회 내 설교에서 공공연히 등장하고,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발화된다. 이는 여성들이 주체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위계적인 교회 구조와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한 여성의 역할배제와 제한, 이를 정당화하는 성서해석과 근본주의 신학이 세 꼭짓점을 이루어 한국교회 내 성차별을 고착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듣지도보지도말하지도말라

기독교와 페미니즘은 만날 수 없는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신안군 여교사 성폭력 사건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이 계속되고, 여혐과 남혐 논란, 메갈리아를 둘러싼 찬반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여성혐오범죄와 발언이 과거에도 있어왔고, 현재에도 증폭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 20·30대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고무적이다. 사회과학 책 판매 가뭄 속에서 출판계에서는 “페미니즘 출판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페미니즘 관련 신간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판매량 또한 급증하고 있다.3) 강연장에서도 20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질문하는 등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는 페미니즘의 무풍지대인가? 교회도 이런 페미니즘의 물결에 예외일 수 없다. 한국사회의 어느 영역보다 성평등이 가장 더디게 이루지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하다. 페미니즘이 “성차별주의와 이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Bell Hooks)”이며 ”여성을 중심에 두고, 여성의 경험과 입장을 탐구하며, 여성이 탐구의 주체가 되는 학문(Alway)”을 여성학이라고 정의할 때,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현재를 극복하고 해방적이고 평등한 기독교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많은 여성의 참여와 목소리가 필요하다.강남순 교수가 <페미니즘과 기독교>에서 제시한 대로 “기독교가 차별과 배제의 종교가 아닌 포괄과 평등 그리고 연대성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요청성은 이미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명시된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성, 인종, 계급을 초월하여 인간 개개인을 귀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예수정신과 페미니즘은 만날 수 있다. 아니 만나야만 한다. 교회가 페미니즘을 수용하여 더욱 정의롭고 평등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교회에서 잊힌 기독교 페미니즘을 발견하여 계승하라

그러면 기독교 안에는 페미니즘이 없었는가? 교회 여성들은 수동적이며, 가부장적 기독교를 당연시해왔는가? 개인적으로 성차별적 교회에 대한 고민으로 여성학과 여성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느낀 해방감과 당혹감을 나누고 싶다. 모태신앙으로 교회 안에서 자라고, 기독교 대학에서 공부하고, 기독교 아카데미에서 몇 년간 일을 했던 나는, 성차별적 교회 구조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마지막 학기에 기독교학과에서 여성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여성 억압적이라고 생각했던 구약성서가 시대의 산물이며 그 나름의 여성 해방적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인물로 다말을, 민족의 지도자였던 미리암과 드보라를, 여성연대의 이야기로 룻을 읽으며 새롭게 성서를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상징체계에 도전한 메리 데일리, 여성들의 삶의 자리인 원형 식탁(round table) 모형을 평등하고 열린 새로운 교회상으로 제시한 레티 러셀, 성과 계급이라는 이중적인 억압으로 고통 받는 흑인여성들의 ‘지극히 작은 자’로서 예수 이해 등을 읽으면서 기독교의 개념이 더욱 풍성하고 깊어졌다. 선배들이 고군분투하면서 작업해 놓은 결과물들을 보니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로소 나도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왜 이러한 내용이 30년간 교회 안에 있었던 여성인 ‘나’와는 만나지 못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 교회, 기독교학교, 기독교사회운동을 두루 경험하며 교회 내 여성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나에게 조차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억울했다. 지금도 주위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놀란다. 그만큼 교회 내 성차별적 구조가 공고하다는 반증이며,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신학담론이 교회 여성들에게 소개되고 전달되는 통로인 여성(주의 시각을 가진) 목회자가 드문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신학이 신학계에서 자리 잡기에도 고군분투 하느라 대중운동으로 확산하는데 까지 에너지를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측도 해본다.
feminism

교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교회에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그동안 쌓아온 여성신학과 교계 여성운동의4) 성과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각각 떨어져 있는 두 주체를 매개하고 연결할 중간자로서 페미니즘 인식을 가진 목회자의 존재가 중요하며, 이러한 사명을 가진 여성/남성 목회자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신학교 안에서 여성학/여성신학 과목이 필수가 되어야 하고, 노회 차원에서도 목회자 계속교육의 일환으로 도입하기를 제안한다.
특히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교회 구성원들에게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필수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공공기관과 기업체에서는 의무적으로 연 1회, 1시간 이상 받게 되어 있는 교육이다. 성폭력은 위계질서가 강한 곳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성평등 교육은 이러한 위계에 저항하고, 익숙한 위계를 전복할 수 있는 힘과 지식을 가르친다. 교회는 선한 사람들의 집합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며, 교육과 제도가 필요한 공간이다.
그리고 일부 노회에서 존재하는 여성위원회, 양성평등위원회를 각 노회에 설치하여 성/젠더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목회자에게 더 높은 윤리수준을 요구하기는커녕 법으로 실형을 살고 나온 사람도 버젓이 목회를 할 수 있게 하는 교단과 노회에 1차적인 책임이 있다. 교단차원의 파면, 목사직 박탈 등 강력한 징계와 처벌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평신도 여성과 남성 스스로도 교회 내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 내 성평등 교육/젠더감수성 교육 등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좋고, 여성신학/페미니즘 책읽기 소모임 등을 꾸려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발전시킬 수도 있다. 공고한 성차별적 교회를 해체하기 위해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들의 연대와 참여도 필수적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란다. 단언컨대 교회에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주-

  1.  뉴스앤조이. 2016.08.02. “유명 청소년 단체 목사의 두 얼굴” 
  2.  CBS노컷뉴스. 2016.06.08. “계속되는 목회자 성범죄… 나 몰라라 하는 교단들” 
  3.  한겨례. 2016.08.18. “페미니즘 출판 전쟁!” 
  4.  여성안수운동, 신학교의 여성교수 차별문제에 대한 대응, 교단에 양성평등위원회 설치와 여성할당제 도입 요구,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교재 출판 등 실천적 차원의 여성운동도 있었다. 
출처: http://ichungeoram.com/11026

2016년 9월 11일 일요일

그리스도인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나가주시죠 –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독후의 – ] 그리스도인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나가주시죠

지적인 작업이자, 감각의 훈련이라는 두 영역이 만나는 충만한 쾌락의 세계, 독서 - 성실하게 까칠한 김영수가 쓰는 성깔있고, 색깔있는 책 이야기.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요람 하조니 지음, 김구원 옮김, 홍성사 펴냄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말이다. 그는 아테네와 예루살렘, 이성과 계시,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상호적대적인 관계로 봤다. 참된 지식은 사도적 교회의 권위적 가르침을 통해서만 제시된다. 믿음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기 마련이다. 세속의 지혜는 무익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해롭다 등. 흔히 ‘반지성주의’로 번역되는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에도 유효해 보인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그의 말은 지난 1800년가량 사라지지 않은 그리스도교의 경향 하나를 간결하게 요약한다.
이성과 계시를 가르는 저 견고한 담을 교회 혼자 쌓아 올린 것은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철학에 맞서 신학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확보하려 했다면,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동일한 일을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 했다. 르네상스 운동 이래 서양 근대의 핵심은 그리스 정신의 복원에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이 계시를 이성에 대비시킨 건, 그리스도교 신앙은 합리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 퇴출 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아테네의 후손을 자처하는 그들은 되물었다. 예루살렘이 도대체 아테네와 무슨 관계인가?
역사는 흔적을 남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감지되는 일종의 분열증을 볼 때 그렇다. 한국 교회 어디서든 테르툴리아누스를 만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우월성을 과시하듯,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은 철학을 비롯한 세속 학문 일반을 쉽게 경시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자들의 법정에서 심문이라도 받듯 불안해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진리와 공적 가치를 세속 학문의 입회하에 변증 하길 원한다. 아테네의 승인을 바란다고 할까. 창조과학은 가장 노골적인 사례다.
이쯤에서 지금 다루는 책의 제목이 <구약성서로 철학하기>이며, 서론과 결론의 소제목이 각각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을 넘어서’와 ‘이성과 계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지적하는 게 좋겠다. 이런 책을 집어들 때, 그리스도인 책 품을 만한 기대란 어떤 것일까? 먼저는 아테네와의 화해. 즉, 성서로도 합리적인 사유가 가능함을 입증할 것. 다음은 여전한 예루살렘의 우위. 그러니까 신앙에는 그래도 합리성을 넘어서는 차원이 있음을 보여줄 것. 요약하자면, 믿음은 합리성을 결여한 맹신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적 행위임을 증명하는 것. 지금까지 나온 언론 서평 대부분은 이 책이 그런 기대를 충족해준다고 말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찝찝한 화해

단정적으로 말해야겠다. 이 책은 그런 기대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아니, 상황을 악화시킨다. 원서의 제목은 The Philosophy of Hebrew Scripture, 즉 ‘히브리 성서의 철학’이다. 한국어판은 이를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로 옮겼다. 둘 사이에는 사소한 듯 보이는 차이가 있는데, 이 책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바로 그 ‘차이’ 안에 있다. 한국어판의 제목은 의도치 않게 무엇인가를 실토한 셈이다.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로 옮겨진 결과 책의 목적은 ‘철학하기’로 고정된다. 저자는 실제로 성서로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나아가 몇몇 대목들, 가령 구약성서적 윤리의 핵심은 법의 절대적 순종이 아니라 반항에 있다는 통찰, 사회계약은 인민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이기에 통치 권력의 적법성은 민주주의적 동의뿐 아니라 모세 율법으로 구체화한 신적 권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 구약성서에는 주체-객체의 구분이 없고 인식하는 이에 의해 ‘해석된 대상’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지적 등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저 ‘철학하기’가 어디까지나 습작이라는 사실이다. 서론과 결론을 빼면 책은 1, 2부로 나뉜다. 소제목은 각각 ‘구약성서 읽어내기’(1부),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다섯 편의 사례 연구’(2부)이다. 1, 2부가 순서대로 각각 ‘구약성서’와 ‘철학하기’를 담당하는 것이다. 이상한 일 아닌가. ‘철학하기’가 책의 목적인데 고작 사례연구에 그치다니. 저자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럴 리가. 이유는 단순하다. 습작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철학하기’는 이 책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반복해 주장한다. 히브리 성서는 신약 성서와 다르다. “히브리 성서는 대체로 계시를 매우 중요하고 유용하게 여겼던 기독교적인 신학 주제들에 대해 무관심하다.”(20) 신약의 핵심 사상들은 “히브리 성서가 다루는 주제들 중 40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20) 히브리 성서를 계시로 읽으면 그것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당 부분 ‘삭제’하게 된다.”(21) 히브리 성서를 오독하는 이유는 “기독교 교리라는 굴절 렌즈를 통해 그것들을 보기 때문이다.”(31) 이성과 계시라는 그리스도교적 이분법의 틀은 “히브리 성서를 해석하는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324)
무엇보다 히브리 성서는 ‘증언’이 아니다. 신약 성서는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음을 ‘증언’하는 책이며, 그래서 ‘계시’다. 그와 달리 히브리 성서는 당시에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다룬다. 어떤 비밀스러운 사실을 증언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신약 성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문제 삼는다. 반면 히브리 성서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관심한다. 즉, 히브리 성서는 이스라엘이 겪은 고난의 의미를 그들의 역사를 통해 해석하는 역사철학이자 바람직한 삶과 공동체의 본질을 가르치는 윤리학 혹은 정치철학에 가깝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 성서는 계시라기보다 일종의 “이성적 저서, 다시 말해 철학책이다.”(51)
이 책의 심장은 2부가 아니다. 옮긴이는 “히브리 성서와 구약 성서는 목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에 구약 성서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을 위해 히브리 성서를 구약 성서로 표기했다”고 밝혔다(18). 하지만 정작 저자인 요람 하조니Yoram Hazony는 바로 저 ‘익숙함’을 문제시한다. 이 책의 목적은 Hebrew Scripture를 Old Testament, 그러니까 ‘옛 언약’을 뜻하는 구약(舊約)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이 책은 히브리 성서 구출기, 일종의 출애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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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루살렘인가?

저자는 지금 그리스도교 성서의 합리성을 변증 하려 하는가. 그리스도교 성서로도 얼마든지 인문학적 사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은 히브리 성서를 신약 성서와 계시라는 해석학적 틀에서 해방하는 데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철학은 그 수단에 가깝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카르타고 출신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고 아래 인용문을 읽자. 이 책의 결론이자 후속 작업의 방향을 제시한 문장이다.
“예루살렘은 아테네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카르타고와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 이제 예루살렘과 카르타고를 분명히 구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예루살렘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아테네나 로마와 같은 도시들과도 제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322)
저자는 이성과 계시를 양 끝점으로 하는 이분법적 선분 위로 올라간다. 그리곤 히브리 성서를 밀어 의도적으로 이성 옆에 붙인다. 그래야 계시와 멀어지기 때문이다. 의도는 분명하다. 히브리 성서는 차라리 철학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계시, 즉 신약성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예루살렘과 아테네의 화해를 말한다. 다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뒤에는 예루살렘과 카르타고의 불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쥐어짜서 질문 하나만 남기자. 아마도 이럴 테다. 카르타고가 도대체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그때에 비로소 아테네와 로마와 같은 도시들과도 제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저자의 궁극적인 목적이 저 선분 안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오히려 선분 바깥으로의 탈주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적인 것’도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아닌, 독자적 사상체계로서 ‘유대적인 것’의 확립. 하조니의 목적은 아마도 거기에 있다. 그 작업을 단걸음에 할 수 없기에, 히브리 성서를 신약 성서와 먼저 떨어뜨릴 뿐이다. 아직은 ‘습작’인 철학하기가 본격화되면, 아테네 역시 절교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하조니가 설립한 샬렘 출판사는 서양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고전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 중이다(C. S. 루이스와 라인홀드 니버의 책도 번역되었다).

카르타고와 예루살렘은 무슨 관계인가?

아테네와의 화해를 기대하며 책을 폈지만, 정작 예루살렘에서 카르타고로 쫓겨나게 생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반지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교부 신학의 다양성을 재검토하는 일? 신약 성서와 신학 전통 속에서 ‘이성’, ‘계시’, ‘증언’ 개념을 꼼꼼히 다시 살피는 일?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의 관계에 관한 신학의 역사를 되짚는 일? 무엇이든 좋지만 꼼꼼하고 정직한 독서가 우선이다. 좋은 책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모험으로 내몬다. 좋은 독자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 책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좋은 책과 좋은 독자가 만날 때, 한 권의 책은 사건이 된다. 이 책이 그럴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하는 것, 이것으로 출판사와 역자는 할 일을 다 했다. 남은 건 독자의 몫이다. 불편한 부분을 도려내고 읽고 싶은 대로 책을 읽는 것, 그래서 책이 제기하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는 것, 그것 역시 반지성주의다.

2016년 7월 10일 일요일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과학과 종교간의 대화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동안 미국사회에서 과학 對 종교라고 하는 폭 넒은 주제 아래 논의 되었던 것들을 정리해 보면 두가지 중요 과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난 수십년간은 "과학이 과연 진화론이 창세기의 창조기사와는 상치되는 것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비난을 견디어 낼 수 있을것인가?" 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다. 지난 수년동안에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또는 I.D.라고도 함)이 대두되면서 창조론은 새로운 각광을 받아 왔다. I.D.란 진화과정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부분들 보다도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과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려고 시도 한 것으로 지난 12월 연방재판소가 학교에서 가르치기에는 부적절한 의사(疑似pseudoscience)과학이라는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혜성처럼 언론매체의 각광을 받아 왔었다. 그리고 미국 과학계는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같이 가르쳐야 한다는 보수적인 크리스쳔들의 주장에 무척 시달려 왔든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상황이 바뀌면서 공수(攻守)의 역활이 비뀌었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화두는 " 종교가 과연 과학의 발전을 견디어 낼 것인가?"하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간의 이러한 논쟁은 물론 다윈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지적설계론에 반발하는 과학자들과 인간경험의 본질을 지도로 그려내고 수치로 측정하며 한발 나아가 아에 바꾸어 놓을수 있는 능력까지도 그들의 과학적인 훈련(discipline)을 통해서 향상시킬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과학자들에 의하여 反 종교적인 입장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뇌촬영 사진들이 정신(영혼)은 분비선이나 연골등과는 독립되어 있다고 보는 종교적인 개념들에 도전하면서 의지나 감정의 생리적인 위치를 선명하게 그것도 칼러까지 곁들여 보여주고 있다. 뇌 화학자들은 환상을 보는 성자(聖者)들과 심지어는 예수의 어떤 황홀경의 상태에 영향을 끼쳣을 수 있는 어떤 내적 불균형상태를 추적하고 있다. 이전의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진화론적 심리학 분야에서는 신(神)이 개입되지 않은 이타심과 심지어는 신과는 관계가 없는 종교심에 대한 이론까지도 만들어 내고 있다. 우주론에 대한 다양한 가설등은 우리가 사는 우주는 한 무리의 우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수 있으며 운좋게도 환경이 갑자기 좋아져서 신의 섭리 없이도 생명체가 갑자기 생겨났을수도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만약 그 가능성이 1억분지 1이라고 하드라도 300억의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는가?)

로마캐토릭의 Christoph Schonborn추기경은 신앙에 도전하는 이들을 '과학(지상)주의' 또는 '진화론'의 열렬한 추종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학이 하나의 세계관과 하나의 시금석으로 종교를 대치할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험관을 흔드는 사람들이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극우파들이 행사했던 부시행정부의 과학정책에 대한 영향이나 9/11에서 표출된 테로리스트들의 극단적인 신앙과 '지적설계론자'들의 주제넘은 주장에 그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멸감을 느끼고 '전례없는 분노'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과학과 종교는 서로 보완하기 보다는 서로 대치되어 왔다고 주장하며 Yale대학의 심리학자 Paul Bloom은 '종교와 과학은 항상 충돌할것이다"고 말할만큼 격화되어 가고 있다.

요즈음 서점에는 신과 과학과의 사생결단의 싸움에서 과학의 승리를 선포하고 신앙 가운데 내재하는 진실성마저도 무시해 버리려는 과학자들의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The God Delution(하나님 망상)이란 책을 출판한 Richard Dawkins를 들 수 있다. 지금 5주째 New York Times 베스트셀러(11월 현재 8위)에 올라있는 이 책은 제목 자체가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들어내고 있다. 신앙이라는 것을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저자는 다윈의 이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의 이번 저서는 최근 출판된 일련의 무신론자들의 저서들 가운데 하나일뿐이다. 2004년에는 Sam Harris라는 신경과학 전공의 대학원생이 쓴 The End of Faith(신앙의 종식)라는 책이 출판(40만부 인쇄)되었으며 그 후속편으로 쓴 96페이지짜리 Letter to a Christian Nation(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이란 소책자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 14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봄에는 Tufts대학 철학교수인 Daniel Dennett가 쓴 Breaking the Spell:Religion as a Natural Phenomenon(魔力 깨부스기-자연현상으로서의 종교)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베스트셀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공공분야에서 많은 논란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에게 정면으로 반대하여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반대론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사실상 과학에는 별 관심이 없는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의 성경에 대한 입장은 확고부동하여 양자간에 거리를 좁힐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TIME지에 의하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우리는 양쪽 입장을 다 원한다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장족의 발전에 박수갈채를 보내면서도 안식일에는 과학도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MRI와 기적을 동시에 원한다. 우리는 입장 차이가 본질적으로 너무 적대적이어서 토론에서 아무런 결론을 얻을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줄기세포와 같은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Dawkins와 같은 거장과 균형을 맞추기위해 종교적인 확신을 가지면서 과학계에서도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어서 과학과 신은 조화를 이루며 사실은 과학도 하나님의 것(도구)이라고 권위있게 주장할수 있는 과학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과학자들중 한 사람으로 Stanford대학의 생리학자인 Joan Roughgarden교수를 들수 있다. 그는 최근 Evolution and Christian Faith(진화론과 가독교 신앙)란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녀는 진화생태학의 개념을 성경의 구절들을 곁들여 설명하면서 크리스쳔의 입장에서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다. 전형적인 종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곤충학자 Edward O. Wilson은 The Creation:An Appeal to Save Life on Earth(창조-지구위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한 호소)란 책을 썼는데 그는 신을 믿건 안 믿건 자연을 보존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과학과 신앙의 공동의 광장을 강조하는데 누구보다도 유명한 학자는 Francis Collins라 하겠다.

Collins가 유전학에 바친 공헌은 Dawkins보다 더 지대한 것이다. 1993년이래 국립 인간제놈연구소의 소장으로 2,400여명의 과학자들을 지휘하여 3억개의 생리화학 문자로 되어 있는 생리학 청사진을 만들었으며 그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당시 Clinton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그들의 공로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Collins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제놈연구와 그것을 의료분야에 활용하는 방법을 탐구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는 27세에 무신론자에서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고 지금은 젊은 복음주의 과학자들에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不可知해지는 과학분야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개진할것이냐에 대한 조언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활용하는 분명한 크리스쳔이다. 그는 지난 여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The Language of God: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하나님의 언어-과학자가 제시하는 신앙의 증거들)란 책을 출판하였다.

TIME지는 Richard Dawkins와 Francis Collins의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대화내용을 계재하였다. 과학에는 문외한으로서 현대의 두 첨단 과학자들의 대화를 번역한다는 것은 능력밖이라고 생각하여 약하고 그들의 결론부분만 소개하면

Collins:지난 4반세기가 넘게 과학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살아 오는 동안 저는 Richard Dawkins 교수가 주장하는 자연세계에 대한 모든 결론들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아무런 갈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것은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과학이 대답을 제공할 수 없는 것들-어떻게?라는 질문 대신 왜냐?하는 의문에 대해서-이 있을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왜?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많은 대답들은 영(靈;spiritual)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과학자로서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 보아야 나의 능력으로 절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Dawkins: Francis Collins교수께서 대화중 가끔 저를 마음이 꽉 막힌 사람으로 시사하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의 마음은 저도 감히 꿈 꿀수 없고 교수님도 상상할 수 없으며 어는 누구도 감히 생각해 볼 수 없는 훌륭한 것들이 미래에 가능하리라고 하는데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래에 얼마나 경이로운 발견들이 이루어 지든지간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특정한 역사적인 종교 가운데서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에는 회의적입니다. 대화를 시작하여 우주의 기원과 물리적 상수(常數)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을때 저는 설득논리로 하나의 초자연적인 지적 설계자에 대해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그것은(지적설계자이론) 가치가 있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논박할수 있는 여지가 많은 이론이지만 그럼에도 존중할 가치가 있는 웅대하고 거대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올림피아 신전의 여러신들이나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예수이야기는 그렇게 웅대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것들은 지엽적인것 이라고 생각됩니다. 신(神)이 존재한다면그는 어떤 종교의 신학자가 이미 설명한 그 어떤것 보다도 훨씬 더 크고 더 불가해(不可解)한 분일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교계나 학계-에서는 신과 과학에 대한 논란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창조과학이나 젊은 지구 이론을 가지고 성서의 무오성이나 교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진화론이나 현대첨단 과학의 이론을 저주받을 마귀의 이론아라고 매도하고 있지나 않는지? 신앙을 가졌다는 과학자들은 아에 과학자로서의 자격 미달자고 간주하거나 과학에서 신의 자리는 없다며 자신의 신앙생활과 힉문하는 것은 아예 별개의 것으로 생각지는 않는지? 많은 크리스쳔 과학자들이 최근 과학계의 도전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 들이고 그 의미를 음미하고 있는지?

TIME지에 실린 Richard Dawkins와 Francis Collins의 대담을 읽으며 떠오른 의문들이다.

(정리 김상신)

2014년 12월 12일 금요일

종교인들이 무신론자에게 물어서는 안되는 바보같은 질문들


1. 어디서 도덕심을 충족시키는가?
종교인들이 쉽게 착각하는 것중에 "종교가 없으면 양심도 팔아 먹을 사람" 으로 잘못 알고 있는것이 대표적이며, 종교가 없다거나 믿는 신이 없다고 해서 도덕적이지 않다는 건 종교에서 그렇게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세뇌되었기 때문일 뿐이고, 무신론자는 유치원 - 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배운대로 도덕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알아서 잘 산다.

2. 아무것도 믿지 않으니 인생이 정말 공허할 것 같은데?
아니다. 당연하지만 대다수의 종교인들 조차도 믿음이나 신앙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무신론자가 신앙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목표가 없거나 할짓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친구, 꿈, 도덕, 친절함, 지식, 사랑, 가족, 음악 그리고 좋아하는 모든 것들.. 종교인과 달리 우리는 어떤 하나에만 목숨 걸고 빠순이 혹은 빠돌이 짓을 하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

3. 왜 신에게 화가 나있는가?
신에게 화가 나다니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일까? 없는 신에게 어떻게 화를 내지? 하지만 종교에 대해 불만이 있는 거라면 그렇다. 무신론자는 애초에 존재증명이 가능하지도 않은 신이라는 존재에게 불만이 없다. 마치 우리가 유니콘에게 화가 나있거나 증오하지 않듯이. 다만 참지 못하는 것은 그의 팬덤들의 꼬장부리는 행위. 쉽게 말해 "빠"가 "까"를 만든다.

4. 당신은 신의 존재를 반증할 수 없는데?
객관적인 과학에는 반증가능성이 필수불가결하게 따라 붙는다. 반증 가능성이야말로 과학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무기인 점을 모르나보다. 굳이 과학적인 부분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이 문제는 논리적으로 쉽게 논파 당한다. 어떤 특수한 존재를 증거도 없이도 믿을 수 있다면 그 특수한 존재는 증거 없이도 얼마든지 부인될 수 있다. 특수한 주장에는 특수한 증거가 필요하다. 증명할 수 없으며 더더욱 반증할 수도 없는 것은 궤변, 말장난에 불과하다.

5. 만약 당신이 틀렸다면?
만약 무신론자인 내가 틀렸다면?? 틀리면 틀린 것이다. 무신론자가 틀렸다고 해서 아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던 듯이 아주 잘 돌아갈 것이다. 근데 "종교인이 틀렸다면?" 이라는 생각은 안해봤는가?

6. 그냥 조금 믿어보기만 하면 돼!
마찬가지로 무신론자들도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 "신께서 날 무신론자로 만드셨는데 감히 누구시길래 그의 지혜를 의심하는지?"

7. 그냥 마음을 열어보는 건 어떤가?
미안하지만 무신론자들의 마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그냥 일반적인 사람들과 별 다를바 없는 같은 "인간"이다. 폐쇄적인 마인드라고 생각했다면 오해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문제점이 발견되고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면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정보를 갱신시켜서 그것을 받아들인다. 비록 스스로가 만든 과학 가설이나 이론단계까지 이른 것일지라도 틀리고 새롭게 더 고쳐진 정보가 나오면 당연히 폐기하고 새로운 정보로 갈아탄다.

8. 당신은 인생에서 종교적이던 적이 없지 않은가?
이건 상당히 틀린 일종의 "어림짐작" 에 불과하다. 실제로 종교적인 가정에서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나서 종교에 한번 미쳐보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벗어나고 싶어도 가족이나 주변의 눈치 때문에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면 상당히 많이있다. 이는 단지 기독교 국가나 이슬람국가만의 문제가 아닌 전세계적인 문제이고, 앞으로도 상당히 오랜기간 존재할지도 모르는 사안이다. 오히려 신앙이 없이 살기를 원하는 자세를 존중하지 않으려는 종교인들의 강압때문에 반종교적인 자세를 가지는 경향이 오히려 더 강해진다. 자유를 억누르면 뛰쳐 나가버리고 싶은 것이 인간 본성이기에.

9. 유년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그래서 무신론자인가?
종교인들이 가끔 묻는 질문중에 하나다. 종교적 집안에서 학대를 받아 무신론자가 된건 아닌지 역시 "어림짐작"만 한다. 그래도 답변 해주자면 내가 아는 모든 무신론자들의 유년 시절은 문제가 없었으며 주변인들과 별 다를바가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저 사람처럼 살아온 것이고 인간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10. 종교 경전(※예 : 성경)은 읽어봤는가?
물론 당신이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혹은 "신은 위대하지 않다. -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유명한 무신론자들이 자필한 무신론 저서를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토라, 바이블, 꾸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것? 장담하는데 당신이 가진 이성의 눈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면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보길 바란다. 그 행위가 당신을 무엇보다도 빠르게 무신론자로 만들것이다. 읽고도 무신론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성이 마비되었거나 그렇게 믿고싶어하는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이 종교인들보다 종교를 더 잘아는 것은 이상한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정보가 있기 때문에 애시당초 믿지 않는 것이다. 구태여 집어서 성경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경전들도 취미 삼아 읽는 무신론자들도 있다.

11. 널 위해 기도할게.
당신이 한 말은 "널 위해 기도하겠다" 겠지만, 정작 무신론자들이 듣고 이해 한 말은 "널 위해서 내 자신과 대화 해볼게" 이다. 당신이 시간낭비를 하겠다면 굳이 막지는 않겠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살 권리를 법치아래 보장받고 살고 있기에.

12. 당신들은 악마 숭배자가 아닌가?
악마도 존재 증명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존재이며 신화, 미신적인 존재이므로 신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를 무신론자에서 변형해 무악마론자라고 부르고 싶은대로 불러도 좋다. 아이러니하고도 웃긴 것은 "무신론자를 악마숭배자가 아니냐"라고 이렇게 질문을 사람들은 악마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무신론자들인 우리는 악마가 있는지에 대해 신경도 안쓰며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13. 불가지론자 아닌가?
객관적으로 보면 무신론자는 100%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당신 말대로 특수한 존재할 수는 있을지는 모른다. 이 생각은 과학이 패러다임 교체를 준비하고 열린 가능성을 두는것과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요리를 하다가 가스레인지가 폭발할 확률을 우려해 두려워 배를 쫄쫄 굶는 것과 유사하지만 오히려 당신이 믿는 신이 존재할 확률은 이 가스레인지 폭발 확률에 비교하면 거의 없을 정도로 낮다. 혹시나 잘 몰라서 설명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불가지론적 무신론"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유추해보면 있을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며,

"순수 불가지론"은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는데, 확률은 50 대 50 이라는 것이 다르다.

무신론이 종교라는 주장은 총알(신앙)을 넣지 않는 총(종교)에서 총알이 발사된다는 것과 같은 논리이며, 대머리도 헤어 컬러이며, 배터리가 없는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겠다는 말과 같으며, 꺼진 텔레비전도 채널이라는 소리와 동일하다.

15. 왜 그리도 화가 나있는가?
있다고 믿지도 않는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들에게 딱히 화가 나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부이단으로 치부하기에는 실제적으로 그보다 훨씬 많은 종교인들이 미친짓을 하고 있으며, 당사자는 싫다는데 신이라는 명목하에 강요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 하라고 하면 너무나도 간단히 "종교박해"로 몰고 가는데 이것은 명백한 이중잣대이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논리다.

16. 믿는다고 손해볼 것은 없는데 왜 안 믿는가?
무신론자가 믿어도 손해볼 것은 없는 것은 당연히 안다. 그러나 반대로 무신론자 입장에서는 안 믿어도 손해볼 것은 마찬가지로 없다. 그리고 이 논리는 파스칼의 내기라는 논리로 겁쟁이들이 주로 선택하는 보험심리에 불과한 헛된 희망이다. 만약 어느 신자가 야훼를 평생 믿기로 가정했고 만약에 사후세계에 갔다고 치자, 그런데 야훼가 아닌 아누비스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면, 그가 줄곧 믿어온 "무조건 야훼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사탄이다." 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는 쉽게 무너진다. 야훼가 다른 그리스의 신들이나 여타 신화보다 더 그럴싸 해 보이는 것은 주변에서 더 많이, 그리고 더 쉽게 접하기 때문이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대중 매체속에서 반복적으로 세뇌 되었기 때문이다.

17. 당신이 죽으면 당신의 영혼은 무사 할 것 같은가?
당신이 있다고 믿는 영혼은 당신의 뇌에서 나온 개념에 불과하다. 당신은 실제적으로는 뇌가 비추고 있는 홀로그램을 믿는 것이다. 즉, 현실이 아닌 믿음을 믿는 것이다. 영혼의 존재 또한 증명이 불가능하며 있다고 보고된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혹시나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자가 있다면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자연현상 검증자인 제임스 랜디에게 검증 받기를 추천한다.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행위를 하는지 만천하에 까발려 질 것이다.

18. 내 앞에서 종교 좀 그만 까면 안되는가?
먼저 종교 이야기를 꺼내서 그 열띤토론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게 누군지 생각해보라. 종교이야기로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같은 소속에 있는 다른 종교인이 나쁜짓을 하면 마찬가지로 비판 혹은 비난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종교는 정치, 역사, 사회, 성별 문제만큼이나 민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라는 어떤 신성시되는 단체라고 해서 특별하게 까임방지권이 있다는 생각은 당장에 버리는 것이 좋다. 이 신성함의 기준은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거나 남이 믿는 신성하다고 해서 까면 안된다는 생각이야말로 비판을 거절하게 두는 것이며, "눈, 코, 입을 닫고 피해를 주더라도 방치하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라는 의견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종교] 기독교 종파에 무지한 사람들을 위하여: 보편 교회


기독교.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



종파에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자면, 보편 교회란 로마 가톨릭 교회(13억)+ 동방 정교회(4억)+ 성공회(약 9000만)으로 집계하며, 신도수는 거의 정확하다. (개신교와 달리 냉담자는 신도 집계수에서 제외된다) 

1. 보편 교회는 하나의 믿을 교리를 중심으로, 성경과 성스러운 전통을 기준으로 이성과 신앙에 판단하여, 교도권의 권위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 즉, 본질은 같으나 형식 문화, 시대 상황에 따라 형식과 행동, 정치적인 행동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이야기는 무신론자의 입장에선 어이없을수도 있겠지만 초대 교회로부터의 입장이 맞다. 즉 보속과, 죄의 기준, 성경 해석의 시대적 재해석등은 믿을 교리를 침해하지 않는이상 언제든지 교회의 교도권과 사도전승에 의결하여 시대에 맟추어나간다. (가톨릭 교리법전 참조)

2. 보편 교회는 모든 신자들에게 유신 진화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바티칸 문건 "진리는 진리를 거스를수 없다" 참조.) 예비 신자에게도 진화론의 정당성을 가르치고 있음(로마 가톨릭 예비신자교육서 참조) 정교회는 유신 진화론을 교구의 선택사항으로 달리 가르치며, 창조론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음. 다만 정교회는 유신 진화론 보다는 과학과 종교는 서로 입장이 다르며, 성경을 창조과학 및 지적설계처럼 현실에 억지로 짜맟추어 이해하는건 교리적으로 위험하다고 가르치고 창조론의 중요한 목적은 "창조"를 이해하는 것 이라 가르침. 그 후에 유신 진화론은 성경적이며, 인정할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성공회 역시 진화론을 인정하고, 교육서에도 그 내용을 사용한다. 다만 이건 대한 성공회에서는 잘 모른다.

3. 보편 교회는 모든 신자들에게 종말론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가톨릭 예비신자교육서 참조) 즉 프리메이슨이나 휴거드립에는 빠져선 안될 것을 당부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와같이 모든 신자들에게 당부하고 있으며, 그 중 독자적이게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창조론과 종말론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임. 다만 교회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페이크이고, 성직자가 이런걸 믿으면 면직처분까지 갈수도 있음.

대충 교회권에 대해서는 이정도로 설명하면 되겠고, 적어도 신을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비이성적인 신을 믿으면서 위안을 얻는다 한다. 그렇다. 신은 비이성적이다. 신을 믿는것도 비이성적이다. 존재하는 증거가 없으니깐. 그래서 우리는 막연히 믿는다. 신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는건 "심증"인 것이고,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보편교회는 타 인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권유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전도의 행위는 시대 기준에 맟추어 변화할수 있으나, 현재의 보편교회는 이러한 속성 때문에, 보편 교회가 저질렀던 오만함을 뉘우치며, 이미 시노드나 여러 지역공의회에서는 이러한 포교를 하지 않기로 함. 교황도 이에 대해서 문건을 발표한 바 있음. 즉 지금같은 글로벌,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가톨릭만이 유일 진리하고 주장하는건 옳지 않다라고 선언. 정교회는 원래부터 이슬람교에게 맞던 처지라 당하고 살던 종교중 하니임. 고로 애초에 포교를 할수가 없었음. 러시아는 애초에 종교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 결과는 토착종교가 기독교화되는 결과를 맞이하고, 이러한 토착화는 니콘의 동방종교개혁을 불러옴. 국교는 러시아 정교가 맞았지만, 국가적으로 강요하진 않는다.

현대 보편교회,(개혁교회 사이드를 제외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고, 문화와 그 시대적 양심을 죄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며, 밖으로는 사회 봉사와 실현하고, 안으로는 종교활동을 하는것을 목적으로 하는게 보편교회이다. 교회가 시대를 이끈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보다. 점점 피페해지는 시대에 지친 낙오자들이나 짐이 무거운 사람들이 스스로 회복을 찾아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게 보편 교회의 정신이다.

기독교는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며, 실제로 개혁교회와 보편교회는 서로 인정하지 않고, 타 종교 또는 갈라진 형제 등의 애매한 문구로 돌려서 말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보편교회를 종종 적그리스도, 음녀등의 자극적인 문구로 비판하는 반면, 보편교회는 갈라져 나간 형제들(가톨릭), 타 종교(정교회), 사도성이 인정되지 않는 교회(성공회) 등으로 개혁교회를 호칭한다.

어제 올린글이 다소 자극적임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서 심심한 사과를 드리며, 상대방이 신을 믿지 않듯이, 나도 그 사람이 신을 믿던지 안 믿던지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는것을 드러내는것은 틀린말이 아니다. 다만, 특정 종교의 신론을 언급하면서, 특정 종파만의 교리를 문제삼아, 신이 없다는 것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론은 우리 보편교회와 개혁교회가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는 속성이고, 개혁교회가 현대사회와 배치된다 해서, 그것이 신론의 부정으로 넘어가는건 분명한 오류이다.

전 세계 기독교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보편교회 신자들까지 매도하는 것은 아무래도 큰 문제가 있다. 애초에 다수는 거기가 아니고 이쪽이라고.

다만 내 블로그나 학업을 이유로 닫아버린 내 이글루스까지 쳐들어와 어디서 퍼온 자료들을 올려대며, 종교를 믿는 사람을 거짓말쟁이와 사기꾼으로 매도한다시피 한다는 것, 상대방의 영성을 함부로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그것에 분노한 것이다. 즉 과학적 입장 또는 현대 개혁교회의 잘못을 가지고 형이상학적인 "신론"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무시하는것, 그것은 신학적인 썰을 가지고, 과학을 깎아내리는 창조론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는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