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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6일 토요일

정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영성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곧 정교회의 역사다. 정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였던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당시 그리스도교 중심지였던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의 다섯 개 대관구로 성장하면서 세계 공의회를 통해서 하나의 교회로 현존하였다. 이 세계 공의회에 따라서 교회의 기초가 되는 교의들과 전례가 공식적으로 형성되고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이후 다섯 개의 대관구로 형성되어 내려오던 하나의 교회는 로마 총대주교좌의 수위권 문제와 "필리오케"(Filioque) 교의 논쟁으로 촉발된 비극적 상황 끝에 1054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정교회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으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른 신앙과 전승에 충실했던 동방 정교회는 1054년 비극 이후에도 서방 교회처럼 교파의 분열 없이 하나의 교회를 유지하면서, 고래(古來)부터 있었던 4개 총대주교 관구와 10개의 독립 교회, 6개의 자치 교회 그리고 한국 정교회를 위시한 선교 도상에 있는 여러 지역 교회들이 󰡐하나의 믿음󰡑으로 연결되어 형제적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정교회와 우리 민족의 만남은 약 8백 년 전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 군이 러시아를 지배하고 유럽을 유린하던 중세 시대에 몽골에 파견되었던 로마 교황청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보면, 몽골의 왕실은 비교적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을 후하게 대접했으며 그때 고려의 왕자들과도 접촉케 했으니 당시 볼모로 잡혀가 있던 고려 왕실 왕전(王佺) 등의 귀족 자제와도 화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더 직접적인 관계로 보면 러시아 정교회와의 만남은 260년 전 조선 영조 시대로 소급된다. 청나라 북경 사신 길에 올랐던 이윤신의 문견 사건에는 󰡐큰 코 오랑캐󰡑라는 의미의 대비달자를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곧 코 큰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는 이미 러시아와 청나라가 국교를 맺고 있었던 때이다.

러시아 정교회 10차 선교회의 책임자였던 이아킨프는 조선 사신들과의 깊은 교류로 조선 왕국에 대한 러시아 최초의 논문까지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난 세기에 러시아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 중에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이 배출되었고 그러한 신앙의 맥이 지난 80여 년 간 공산주의에 의한 우리 민족과 정교회의 신앙 박해 속에서도 끊기지 않고 이어 내려와 현재도 러시아 사할린 등에 다수의 한국인 정교회 신자들이 분포해 있고, 몇 분의 한국계 신부님들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목 활동하고 있다.

19세기 말엽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치열하던 때 조선에는 약 90명의 러시아 군인들을 포함하여 120여 명의 러시아인 그리고 30여 명의 러시아 국적 소지 한국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주일과 축일이면 러시아 공사 관저에 함께 모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 생활을 유지했으나 성사를 집전해 줄 정교회 사제가 조선에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본국에 사제 파견을 요청하여 1900년 1월에 사제가 서울에 왔으며 2월 17일에 첫 성찬 예배를 통하여 한국에 정교회가 세워진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일제시대 때부터 거듭되어 온 고난의 역사는 교회에 많은 문제점들을 남겨 놓았는데 한국 정교회는 전쟁의 상처를 벗어나자마자 선교의 재개뿐만 아니라 교회의 내부적인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고 1980년부터 본격적인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각 지역에 순차적으로 성당이 건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교회 성직자와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원이 설립되는 등 한국 정교회 선교사에서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 여러 분야에서 성장해 가고 있다. 이에 따라 1995년 세계 총대주교청 시노드에서는 한국 선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한국 정교회 교구 헌장을 승인하였으며 이에 앞선 1993년에 그동안 한국 선교의 확장을 위해 크게 이바지했던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수사 대신부를 주교로 서품하여 현재 한국 정교회 교구장이신 디오니시오스 뉴질랜드의 대주교님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다.

간략하게 역사를 소개한데 이어 아래와 같이 정교회의 전통과 영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신학적 전통

성전(聖傳, Holy Tradition)
하느님 백성의 계속 이어지는 삶을 성전이라고 부른다. 구약에서 나타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계속되는 삶 속에서 표현되고, 이 성전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고 그리스도 교회가 지상에 세워짐으로써 완성되고 승화된다. 메시아가 세상에 오신 때부터 신약 또는 그리스도교의 전통 또는 사도 전통, 교회 전통이라고 부른다. 이 전통에 대해 기록된 주된 부분이 성서의 신약에 있는 문서들이다. 복음서들과 사도 교회의 다른 문서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을 이루며, 후대에 발전된 모든 것들의 주요 원천이요 영감을 준 근원이기도 하다.

이 같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전통(Tradition)이라는 말을 엄밀하게 말하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진"(passed on) 것과 "넘겨진"(given over)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전은 그리스도의 사도 시대부터 오늘까지 교회 안에 넘겨져 전해 오는 것이다. 기록된 문서들이 많이 있지만, 성전이 반드시 기록된 것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저 하나의 커다란 문학 작품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그리고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 전체 교회의 삶과 경험 전부를 가리킨다. 전통은 성령에 의해 영감 받고 인도되는 교회 자신의 삶 바로 그 자체이다.

교회의 성전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서 성서가 가장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교회의 예식에 참여하는 생활과 그에 따르는 기도가 있고, 교리와 공의회에서 승인된 규정들, 교부들의 저술들, 성인들의 삶, 교회법, 그리고 음악이나 건축처럼 창조적이고 영감이 깃든 예술적 표현들과 함께 성화(聖畵) 전통이 있다.

성전의 모든 요소들은 실제적인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 하나도 홀로 생겨난 것은 없다.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분리될 수 없으며, 교회의 전체적 삶과 따로 떨어질 수 없다. 모든 것은 모든 시대와 세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회의 살아 있는 생명 속에서 생생하게 존재한다.

교회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 계속 살아가는 한, 교회의 성전은 계속해서 자라고 발전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공의회들
교회는 역사적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많은 어려운 결정들을 내려야만 했다. 교회는 언제나 첫째는 사도들, 다음으로는 주교들과 같은 임명받은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모든 신자들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의견의 일치를 이끌어냄으로써 어려움을 해결하고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곤 했다. 역사상 교회의 첫 공의회는 비(非) 유다인들인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조건들을 결정하기 위해 사도 시대의 교회 안에서 열렸다(사도 15장 참조).

그때부터 모든 역사를 통하여 교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기 위해 공의회들이 열렸다. 주교들은 사제(presbyters) 또는 원로(elders)라고도 부르는 자기 교구의 신부들(priests)과 교인들을 정기적으로 만났다. 그래서 초대 교회 역사에서는 일정한 지역을 맡고 있는 주교들이 어떤 표준적인 토대 위에서 교회의 역사에서는 모든 주교들이 참석하도록 요청 받는 공의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모든 주교들이 참석할 수 없는 공의회도 있었으며, 따라서 그 공의회들 모두가 성전을 지닌 교회에 자동적으로 승인되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정교회의 역사에서는 오직 일곱 차례의 공의회만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전체 교회의 보편적인 인정을 받아왔다.

이 공의회들을 가리켜 󰡐일곱 차례의 세계 공의회들󰡑(Seven Ecumenical Councils)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은 교의를 정의하였다.

  •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아들의 신성을 정의하면서 신앙고백(the Creed)의 일곱 개 조항을 완성하였다.
  • 381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에서 성령의 신성을 정의하면서 신앙의 신조 다섯 개 항을 첨부하여 모두 열두 개 조항으로 완성시켰다.
  • 431년 제3차 에페소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를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모님을 󰡐하느님을 낳으신 분󰡑(Theotokos)으로 정의하였다.
  • 451년 제4차 할키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를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정의하였다.
  • 553년 제5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에서 성삼위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다시 확증하였다.
  • 680년 제6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의지와 행위의 실재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분의 참 인간성을 확인하였다.
  • 787년 제7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의 표현인 성화상(icons)의 정당성(正當性)을 확인하였다.

세계 공의회들에서 이루어진 교의적(敎義的, dogma) 정의와 교회법들은 성령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잘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것들은 정교회의 교리들을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자원들이다.

일곱 차례의 세계 공의회와 달리 여러 지역 공의회들도 있는데, 그런 공의회들의 결정 또한 세계의 모든 정교회들의 승인을 받았으며, 따라서 정교회의 신앙과 삶을 참되게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지역 공의회들의 결정들은 대부분 도덕적이거나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것들 또한 정교회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교부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교리를 수호하고 설명하였던 신학자와 영적 교사들 같은 성인들이 많이 있다. 이 성인들을 교회의 거룩한 교부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가르침을 교부적(敎父的) 가르침이라고 한다. 교부라는 말은 󰡐아버지󰡑라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어떤 교부들을 변증가들(apologists)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신앙을 비웃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항해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을 수호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저술들을 변증론(apologies)이라고 부른다. 다른 교부들 가운데는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교리의 어떤 부분들은 취하고 또 어떤 부분들은 부정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해치는 이들에 대항하여 올바른 신앙을 수호하였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변질시킴으로써 교회의 본질을 파괴하는 이들을 이단자(異端者)들이라 하고, 그들의 가르침은 이교(異敎) 또는 이론(異論)이라고 한다. 정의를 내리자면, 이교는 선택을 뜻하며, 따라서 이단자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의견에 따라 그리스도교 전통 가운데 어떤 것은 거부하고 어떤 것은 취하면서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선택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완전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교회를 어지럽힌다.

교부들 모두가 잘못된 가르침이나 이단론에 대항했던 수호자들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오로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교사들로서, 더 깊고 완전한 방식으로 신앙의 의미를 발전시키면서 설명했다.

또 어떤 분들은 영적 삶에 대한 교사들로서, 기도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통하여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의미와 방법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영적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분들을 󰡐금욕적󰡑 교부들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금욕주의󰡑라는 말이 󰡐영적 수련자들󰡑의 훈련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와는 달리 하느님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는 방법에 대해 열중했던 분들을 󰡐신비적󰡑 교부들이라고 부르며, 그와 같이 경험으로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루는 일을 󰡐신비주의󰡑라고 정의한다.

모든 교부들은 그들이 신학적이거나 사목적인 교부, 또는 금욕적, 신비적 교부 등 어떤 형태로 분류되든지 간에 자신들의 가르침을 바로 자기 자신의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적 경험에서 이끌어냈다.
그들은 이처럼 실재적이며 경험을 통하여 얻은 살아 있는 지식을 바탕 삼아 신학적 가르침과 영적 삶의 방법들을 방어하고 묘사하고 설명하였다. 그들은 빛나는 지성에 덧붙여서 영혼의 순결과 의로운 삶을 함께 엮어 나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그들을 교회의 거룩한 교부들이라고 부른다.
시대가 흐르면서 교회의 보편적 승인과 칭송을 듣는 몇몇 교부들의 작품들은 특별히 중요한데, 그런 것으로는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 리용의 이리네오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 게사리아의 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 신학자 그레고리, 요한 크리소스톰,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고백자 막시모, 다마스커스의 요한, 콘스탄티노플의 포티오스, 그레고리 팔라마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안토니오스, 마카리오스, 요한 클리막스, 시리아의 이삭, 에프렘, 신신학자 시메온 등과 같은 금욕적이고 영적인 분들의 저술들이 중요하다.

성인들
교회의 가르침은 진정한 신앙인이라 할 수 있는 성인들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성인들은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1베드 1, 16). 성인들의 삶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확실성과 진리를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참된 선물인 거룩함을 보여 준다.

교회 안에는 서로 다른 여러 부류의 성인들이 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매우 특별하게 존경을 받는 교부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의 거룩함에 깃든 특별한 측면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성인으로 분류되는 분들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도들이 있고, 복음을 말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기록하는 복음작가들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아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는 고백자들이 있고, 신앙을 위해 죽는 순교자들도 있다. 수도자들 가운데서 나오는 성인들이 있고, 신자 가운데서 나오는 의인들도 있다.

정교 전통 안에는 성인들의 삶에 관한 자료가 많이 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신앙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 매우 쓸모 있게 이용될 수 있다. 성인들의 삶 속에는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생각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성인들의 삶 속에 있는 건전한 진리의 핵심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따라서 성인들의 삶 속에 담겨진 본질적인 진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마땅히 기울여져야만 한다. 성인들의 삶에 관해 주의 깊게 읽다 보면, 기적적인 사건들 속에 들어 있는 진정으로 참된 것을 거의 언제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성인들의 실제 삶처럼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일어난 성인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들로부터 그리스도교의 현실적인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법들
교회 전체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교리와 교회 기준에 따라 받아들여진 교회법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세계 공의회에서 나온 것, 지역 공의회에서 나온 것,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등이 있다. 󰡐카논󰡑(canon)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규칙(rule), 규범(norm) 또는 판단의 수단(measure of judging)이 아니며, 인간의 법 체계에서 이해되고 기능하는 법들과 쉽게 동일시할 수 없다. 교회법들은 먼저 교의 또는 교리적인 성질의 것들과 실제적이고 윤리적이거나 구조적인 성격을 지닌 것들로 구별된다. 그 다음으로는 변하여 바뀌는 것들과 어떤 경우에도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들로 구별된다.

교의적인 교회법들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조항을 말하고 있는 공의회의 결정들인데,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격에 관한 것 따위가 그러하다. 비록 이 같은 교회법들이 특별히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교회 전통의 성장과 변화 속에서 새롭고 다른 언어로 설명되고 발전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의 교회법들 또한 바뀔 수 없는 것들에 속한다. 도덕에 관련된 교회법은 그 의미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그 행위는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교회의 성사들을 함부로 행하는 것을 금하는 교회법이 바로 이 같은 종류의 것이다.
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교회 규범적이고 영적인 정교 생활의 전체성(wholeness) 속에서 교회법을 받아들인다면, 교회법들은 그 적절한 자리와 목적을 얻게 되며, 교회 안에 계신 하느님의 살아 있는 진리를 찾는 일에 풍부한 샘이 됨을 보여 준다. 교회의 법들을 바라볼 때 핵심이 되는 요소는 기술적인 연구와 영적인 깊이에서 생겨나는 그리스도적 지식과 지혜이다.

교회의 예술
정교회는 음악, 건축, 조각, 자수, 시 등과 같은 교회 예술뿐 아니라 성화상(icon)에 대한 풍부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런 예술적 전통은 창조를 통해 사람과 세상에 보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를 둔 인간의 창조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세상을 매우 사랑하시어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그분 자신이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예술적 표현들과 하느님의 축복, 영감들이 함께 녹아 들어가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환상(vision)의 가장 깊은 진리들을 참되게 표현하는 거룩한 예술적 창조성을 발휘하게 한다.

성화상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교적 예술 작품이다. 성화상은 색과 선으로 표현하는 복음의 선포요, 교리적 가르침이며, 영적인 영감이다. 전통적인 정교 성화상은 그림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사진으로 복사하는󰡑 방법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성인이나 사건들을 그림으로 나타낸 초상화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거기에 그려진 인물이나 사건의 영원하며 거룩한 실재성과 의미, 그리고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다. 신적인 영감과 은혜로운 자유 속에서 성화상은 그 주제(인물 또는 사건)를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성이 깃든󰡑 것으로, 지상의 것이면서 천상의 것으로, 물질적인 것이면서 영적인 것으로, 󰡐십자가를 지면서󰡑 은총과 빛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것으로 그린다. 이런 방식으로 성화상은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의 외형만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보다 더 깊은 󰡐사실주의󰡑를 표현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정교 성화상들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써,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실제적인 내용과 쓰임을 통해서 뿐 아니라 그림의 형태와 스타일, 방식을 통하여 정교의 가르침과 신앙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전통적인 정교 건축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며, 특별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과 세상과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나눔에 대한 강조 속에서 드러난다. 둥근 지붕을 한 천장, 건물의 형태와 설계, 성화상들의 배치, 제의(祭衣)의 사용 등 이 모든 것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한다. 전통적인 정교회의 건축과 예술 작품들은 창조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다.

2. 영성                                                 
정교회의 영성은 성서와 전통을 근거로 하여 육화하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 주신 삶의 실천을 본받아 사도들과 교부들에 의하여 이룩한 신학과 교리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영성 생활은 우리의 믿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번된 정교회는 영성 󰡐수덕과 신비󰡑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을 간직하여 지키고 있다.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의 탄생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성전(聖傳)이다. 이 성전에 대한 진실하고 공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주요 출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 둘째는 공의회의 기록들, 셋째는 예배에 관한 초기 전례서들, 넷째는 교부들의 저술들이다.

정교회의 영성은 대략 1900년에 걸쳐 발전된 결과이다. 다양한 종족과 문화적 요인들이 함께 어울려 이루어진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통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동질성이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신화(神化, deification)
인간의 삶의 목적은 신화의 경지에 이르러 하느님과 결합하는 것이다. 이는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영과 육의 완전함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직접 교류를 할 수 있었고 그분과 일체가 되어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와 같은 은총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는 잃어버린 태초의 고유함을 다시 찾고자 신화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신화의 길을 보여 주셨다. 우리의 초자연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일치가 되게 하신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하느님과 하나가 됨은 두 가지의 동등하지 않으면서 똑같이 필요한 힘의 상호 작용이 요구된다. 곧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그것이다. 의지(지성이나 감성이 아닌)는 하느님과 결합하는 데에 인간의 주된 요소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맡겨지지 않거나 일치되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밀접한 일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약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이 붙들어 주신다는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아무 힘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안에서 의지와 행위를 올바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은총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화의 경지에 이르러 그리스도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수덕의 삶을 살아야 한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덕을 얻게 되는 삶을 말하는 것인데,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영성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덕의 삶은 수도원이나 세속과 떨어진 일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현실을 망각한 신비적이고 도피적인 믿음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평범한 삶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수덕의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도와 관상
기도는 구원의 길로 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 요소이다. 소리내서 하거나 마음으로 하거나, 공적이거나 사적이거나 교회의 영성에서 행해지는 모든 기도는 큰 도움이 되며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된다. 관상은 기도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하느님의 현존에 인도하는 󰡐단순한 기도󰡑는 여러분을 신성한 대상에 집중시키면서 가능한 한 여러 생각과 감정을 하나로 줄여 아무런 대화나 말이 없는, 완전한 내적 침묵 속에서 여러분이 머물게 한다.

개인의 노력에 따라 관상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생각, 침묵 기도,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상태는 어떤 형태이든 동방 교회의 관상의 한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도의 가장 모범이 되는 것은 󰡐예수 기도󰡑이다. 이 기도에서 예수의 이름은 시작에서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신비 상태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영성 활동은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를 구체화시킨다. 이는 지속적으로 주님을 기억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주님을 그들의 영혼과, 심장과, 의식의 내부에 숨긴다.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분을 구체적으로 의식하기 위한 방법이 예수 기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기도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수도 생활이 관상의 실천과 기도에 특별히 좋은 환경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성 생활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가정과 직장 등 모든 분야에서 관상적 기도와 신비적 은총이 제외되는 곳은 없다. 관상은 사랑을 증진시키고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계명을 지키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거룩한 신비의 성사에 의해 지속되어야 한다.

회개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영적 삶의 시작은 하느님께 귀환하면서 시작된다. 하느님께 귀환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죄와 투쟁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참고 인내해야 한다.

하느님께 귀환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데 바로 회개이다. 회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하느님께 부여받았다. 비록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태초의 아름다움은 상실하였지만, 은총으로 그 형상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바로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잃고 상실했는지를 정확히 알 때에 비로소 회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는 삶에서 단순히 한번으로만 그치면 안 되고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죄의 유혹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끊임없이 하여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느님과의 친교가 지속되어야 한다.

회개에는 󰡐생각의 바뀜󰡑, 󰡐사고의 변화󰡑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행위와 그 죄를 미워하고 나의 생각과 말 그 밖의 모든 그릇된 것을 버려야 한다. 회개는 세례를 받은 후 거듭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은총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성 요한 클리막스가 말하듯이 회개는 󰡐반복되는 세례󰡑이며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에게서 회개의 자세를 찾아볼 수 없다면 그는 은총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영적인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교회에서는 성사를 단순히 󰡐성사󰡑라 하지 않고 󰡐신비의 성사󰡑라고 부른다. 성사는 영성 생활의 본질도 아니며 끝도 아니다. 성사는 은총의 매개체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총의 매개체들은 정교회 신앙 생활에서 정확히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정교회는 성사가 거룩한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외적인 표시와 연결된 실재하는 영적인 은총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면, 교회는 전에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일에서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던 물에서나, 주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셨던 죄 사함의 선포 등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그와 똑같은 은총으로 교회의 신비의 성사 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은총은 신비로운 면을 지니지만 교회는 성사에 대하여 세속적 정의를 내리지 않고 세밀히 기술하지는 않는다. 곧 교회는 신비적 성사에 대하여 엄격하고 엄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피하고 있다.

정교회는 신비로운 성사가 신비로서 남기를 바라고 있으며, 어떤 세속적인 법리나 법칙 또는 사법적인 제도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정교회에서 성사는 단순히 신비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으며, 그러므로 성사는 성령에 의해 거행되는 것이다.

성사에서 우리는 은총을 수여 받는다. 또한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탄의 힘에 대항하고 투쟁하여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정교회는 성사와 함께 존재한다.

모든 정교회의 거룩한 성사는 악의 힘에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성사 생활은 궁극적인 구원과 영성에 이르는 주된 수단이다. 성사 생활에 최종 행선지(목표, 지향점)는 성찬식이다. 예수님께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찬식 없이 완전한 영적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주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정교회 신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성찬식은 사랑 안에서 일치의 끈으로 작용한다.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또한 다른 이들과도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 정교인들이 같은 신앙을 고백하기 전에는 거룩한 성사에 적극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정교회는 기독교가 단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처럼 도덕과 윤리만 강조하는 조직체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부 분파주의적 오류와 무지를 거절한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일치는 실재하는 사실이며, 그 가운데 그리스도와 교회가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강조한다.

나가면서
초대 교회는 굳은 믿음에 뿌리를 둔 공동체 사회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덕을 실천하며, 주일에 성찬 예배를 거행하고 사도들이 가르친 신앙고백과 공동기도를 바치면서 사랑으로 서로 도와 주고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하였다. 이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곧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교제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이 되는 일치였다. 그래서 한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보편적인 교회가 온전히 함께하는 것이다(마태 18, 20 참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이고(에페 4, 4 참조) 그리스도는 갈라지지 않는다(1고린 1, 13 참조). 만일 누군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일탈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열과 갈라짐은 범죄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흩어져 있는 자녀들을 모으고 그들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는 구원의 방주이다.

이제 한국 정교회는 오랜 기간의 고난과 어려움을 거친 후에 이 땅에서 교회의 기틀을 다지고. 그 토대 위에 정교회가 온전히 보존해 온 복음과 초대 교회의 정신, 모든 민족 고유의 문화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하는 정교회의 선교적 유산, 그리고 정교회의 바른 전승을 통해 교회의 참 모습을 드러내고 정교회 영성 생활의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우리 민족에게 증거해 갈 것을 기대한다.

한의종 / 정교회 성모희보성당 신부

2014년 8월 15일 금요일

복음의 기쁨을 향한 기대 – 교황의 한국 방문


비 내리는 남도 땅. 비에 갇혀 빗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긴다. 휴가 차 이십 여 년 만에 다시 들른 남도 기행 일정을 다듬으며, 천주교 교황 한국 방문 생중계를 본다. 여러 생각이 겹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 훌륭한 분이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줄 안다. 게다가 그의 시선이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향할 때, 그의 입이 권세 부리는 자를 향해 비판을 토로할 때, 그것이 복음의 정신에 따른 언행일 때, 그는 참된 권위를 얻는다. 참된 권위에 따른 권력은 ‘함께하며 보호하는 권력’이다.

한편, 그의 한국 방문(사목적 방문)에 관한 사람의 기대는 참 크다. 한국 사회의 상황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언행에 따라, 세계 최대 종교 지도자, 그것도 중앙집권적 조직의 지도자가 던지는 발언은 여러모로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탓이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 그리고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 교황의 관심과 발언에 기대하는 바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그는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정치적 ‘힘’에 대한 기대의 방향은 대체로 동상이몽이다. 정부는 교황을 국빈 이상의 예우를 갖춰 환대한다. 교황은 바티칸 시국의 원수이니 국빈 자격을 받을 만하다. 이번 방문이 ‘사목적 방문’이라 하더라도 국빈 자격을 잃지 않는다. 정부는 오히려 국빈이 다른 목적으로 온다고 해서, 통상적인 국빈 예우 이상으로 대접할 여유까지 얻은 듯하다. 대통령 박씨가 서울공항까지 영접을 나간 것이 그 예이다. 공교롭게도, 80년 이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을 방문하러 공항까지 나간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이다. (이들의 집권 시절에만 교황이 한국에 방문했다.) 이 영접에는 독재의 피가 흐르는가?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참으로 인간적인 희망과 기대를 품는다. 교황이 지난 1년 반 동안 보여준 행보에서 나온 기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세월호의 비극과 관련하여 ‘교황이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으면 한다’고 기대한다. 이 기대는 이해할 만하고 정말 그래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그 기대가 그의 대중적 인기와 그가 지닌 권력에 기대는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가 그런 기대에 따라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교황이 세월호 가족이 단식하는 곳에 그저 찾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상징적인 영향력이 될 것이다.

이미 교황의 한국 방문 일정에 관하여 여러 염려가 천주교 내부에서도 나왔다. 장애인 방문을 위한 단체에 관한 뒷이야기가 있고, ‘태아 동산’ 방문이라는 천주교 교리의 상징적 시위도 마련됐다. 그가 검소하게 작은 한국산 차를 탄다지만, 나머지 일정은 대체로 헬리콥터로 이동한다고 한다. (추고: 이 계획을 뒤로 미루고 실제로는 KTX로 이동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정작 기대와 희망과 염려가 겹치는 부분은, 교황 방문으로 한국 천주교와 천주교인들이 실제로 어떤 도전과 변화를 가질까 하는 점이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천주교의 성장은 놀랍다. 그러나 천주교 예수회 박문수 신부님의 지적대로, 천주교가 성장하면서 천주교 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 천주교가 하나의 ‘중산층 이상 계층을 위한 문화적 상징 권력’으로 작동하려 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처지와 활동은 이래저래 위축되는 현실이다. ‘부와 권력을 지닌 어떤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을 사제로도 바라보지 않는다고 듣는다.

여전히 교황 방한의 초점은 어떤 권력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향한 하느님의 우선적 선택”을 확인하는 사건이어야 한다. 불편부당한 하느님이 아니라, 약한 자를 편드는 ’하느님의 당파성’을 확인하고 이에 기반을 두어서라야 참다운 화해와 평화가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이 점에서 형제교회의 보잘것없는 사제로서, 그리스도교 신앙 안의 한 작은 형제로서, 그리고 불의와 불신이 분열이 가득한 가련한 한국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교황의 한국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고 축하한다. 그가 보여줄 복음적인 도전을 기대한다. 거기서 우리 모두 나누는 “복음의 기쁨”을 기대한다.

2014년 6월 18일 수요일

[정교회] 정교회의 시작




제 1장 정교회의 시작

마을의 땅아래 깊숙히 예배당이 있고, 그 입구는 조심스럽게 위장되어 있었다. 이곳은 사제가 은밀히 그 마을을 방문 하였을 때, 성만찬(Liturgy)과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다. 수상한자가 나타나면 이를 알려주기 위해 밖에 남아 있는 파수군을 제외하고, 마을 사람들은 일단 자신들이 경찰의 감시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으면, 전체주민들이 이 예배당에 모였다. 다른때에는 예배가 이동하면서 행해졌다.

부활절 예배는 공식적 국가 기관의 한 방에서 드려졌다. 출입은 내가 나와 나의 작은 딸을 위하여 얻은 특별한 통로로만 가능했다. 약 30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늙은 사제는 내가 결코 잊을수 없는 예배를 집례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를 부드럽게 찬송하였지만, 기쁨으로 충만하였다....내가 이 카타쿰 교회의 예배에서 느꼈던 기쁨은 오늘날 까지도 나에게 살아갈 힘을 제공해 주고 있다.

위의 인용문들은  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러시아에서의 교회의 삶에 관한 두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만약 약간의 변화들이 있어났다면, 그 변화들은 네로나 디오클레티안의 통치 아래에서의 기독교인의 예배에 관한 묘사들로 쉽게 생각될 수 있다. 그 변화들은 19세기에 기독교의 역사가 충만한 집단을 통해 어떻게 전달 되었는가 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조부모들 보다 훨씬 더 초대교회와 가까이에 서 있다. 기독교는 유력한 비기독교사회 속에서 실존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종교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한번 이러한 경향이 도래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 초기에 국가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러나라에서 교회와 국가의 전통적인 동맹은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a religio illicta이다, 즉 정부에 의해 금지되고 박해받는 종교이다. 오늘날 박해는 더 이상 과거의 사실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따른 3백년 보다 1918년과 1948년 사이의 30년 동안 더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특별히 동방정교회의 회원들은 그들 가운데 다수가 아주 최근까지 반-기독교 공산주의 정부의 통치 아래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잘알고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일로 부터 콘스탄틴의 회심에 이르는 기독교 역사의 처음 기간은 오늘날의 동방정교회인들과 특별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2-4)  그래서 기독교회의 역사는 오순절 기간중 예루살렘에서 사도들 위에 성령이 강림함으로, 첫번째 성령강림주일을 시작하였다. 같은날 성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삼천명의 남녀가 세례를 받았고, 예루살렘에서 처음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오래지 않아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들은 성 스테판의 죽음후에 일어난 박해로 흩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제자를 삼으라.’(마 28:19)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은 어디를 가나, 먼저 유대인에게, 또한 곧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러한 사도적 여행에 관한 몇개의 이야기가 성 누가에 의해 사도행전에 기록되었다. 다른 이야기들은 교회의 전통속에 보존되었다. 놀라웁게 짧은 시간안에 작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로마제국의 모든 주요 지역들과 심지어 로마의 국경선을 넘어서 있는 장소들에서도 자라났다.

이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여행한 제국은 특별히 동부에 있는 제국 도시들이었다. 이것은 원시 교회의 행정적 구조를 결정하였다. 기본적 단위는 각 도시에 있는 공동체였으며, 그들 자신의 감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감독을 돕기 위해서 장로들, 사제들 그리고 집사들이 있었다. 도시주변 사람들은 도시의 교회에 의존하였다. 감독, 사제 그리고 집사의 삼중적 교역직을 지닌 이러한 패턴은 이미 1세기 말경 일부의 장소들에서 확립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안디옥의 감독 성, 이그나티우스가 A.D.107년경 순교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고 있을 때에 기록한 7개의 편지에서 볼수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특별히 감독과 성만찬(Eucharist)라는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회를 계층질서적이고 성례전적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개교회 내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위치에서 주재한다.’ ‘감독없이는 어느누구도 교회와 관계된 그 어떤 일도 할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보편 교회가 존재하듯이, 감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불멸의 약인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감독의 기본적이고 구별되는 직무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를 각지역의 지체가 크고 좀더 포괄적인 전체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하나의 세계적인 조직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보지 않았다. 그에게 지역공동체는 교회이다. 그는 교회를 성만찬 속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받고 주의 만찬을 기념할때, 오로지 그것의 참된 본성을 실현하는 성만찬적 사회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만찬은 감독을 중심으로 모인 각각의 특수한 공동체안에서 지역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지역적 성만찬에 단지 그의 한부분이 아니라 전체적 그리스도가 현존한다. 그러므로 주일마다 성만찬을 거행할때 각 지역공동체는 완전한 상태의 교회이다.
이그나티우스의 가르침은 동방전통에서 영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방정교회는 아직도 교회를 성만찬적 사회로 생각한다. 교회의 외적인 조직은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내적이고 성례전적인 삶보다는 이차적이다. 그리고 동방정교회는 아직도 교회의 구조에서 지역 공동체의 기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감독이 그의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교회의 중앙에서 예배의 초기에 서 있을때, 지역공동체내에서 감독을 일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의 사상은 동방정교회의 성만찬(Pontifical Liturgy) 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독특한 생동감을 일으킬것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 이외에 또한 교회의 광범위한 일치가 있다. 이 두번째 측면은 또 다른 순교자 감독인 카르타고의 성, 키프리안(258년 사망)의 저술들에 나타나 있다. 키프리안은 모든 감독들이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각자는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감독직은 단일한 전체성(a single whole)이며, 이 단일한 전체성 속에서 각 감독은 충만한 소유권을 향유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것의 번식력이 증대함에 따라 다수의 교회로 멀리 광범위하게 퍼져 나갈지라도, 단일한 전체성이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단지 하나의 교회가 있다.; 많은 감독들이 있지만 단지 하나의 감독직이 있다.

교회의 처음 3세기는 키프리안과 이그나티우스와 같이 그들의 삶을 순교로 마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박해는 종종 지역적 특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지속성에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당국자들이 오랜기간동안 기독교에 커다란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항상 이 위협이 현실이 될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순교사상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영적 전망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지녔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뿐 아니라, 다른 작은 그리스도들의 피 위에 설립된 것으로 보았다. 교회가 확립되고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는 이후의 세기들 속에서도 순교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순교의 사상은 다른 형태를 취하였다. 예를들면 수도사적 삶은 종종 그리스 작가들에 의해 순교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접근은 또한 서방에서도 발견되어 진다. 예를들면 한 켙트족 본문은 -7세기 한 아일랜드인의 설교- 순교의 길을 심미적 삶과 비교하였다.

이제 한 사람에게 하나의 십자가로 여겨지는 세 종류의 순교가 있다. 흰색의 순교,녹색의 순교 그리고 붉은 색의 순교이다. 흰색의 순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녹색의 순교는 순교자가 금식과 노동으로 자신을 그의 악한 열정으로부터 자유케 하거나 혹은 형벌과 회개속에서 고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붉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나 죽음을 견디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동방정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많은 기간동안 붉은 순교의 가능성은 꽤 거리가 멀었고, 녹색과 흰순교의 형태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시대에 동방정교회와 다른 기독교인들이 다시 한번 피의 순교를 경험하도록 불려졌을 때, 또한 몇번 경험하였다.

키프리안이 강조했던 것처럼,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감독들이 그들의 공통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공의회에서 함께 만나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방정교회는 항상 교회의 삶에 있어서 공의회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동방정교회는 공의회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선택한 주요한 기구라 믿으며, 보편 교회를 본질적으로 협의회(conciliar)적 교회로 생각한다. (사실 러시아에서 형용사인 소보르니(soborny)는 ‘보편적(가톨릭)’과 ‘협의회’(conciliar)의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편 이에 상응하는 명사 소보르(sobor)는 ‘교회’와 ‘공의회’(council) 양자를 의미한다.) 교회내에서 독재나 개인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조화와 만장일치가 존재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유롭지만 고립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 믿음, 그리고 성만찬적 교제 속에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에서 조화와 자유로운 만장일치의 사상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참된 공의회에서 한회원이 자의적으로 그의 뜻을 나머지 회원들에게 강요할수 없으나, 다른회원들과의 대화 와 그들 모두가 자유롭게 ‘공동의 마음’을 만들어 내는 방식속에서 그의 뜻을 강요할수 있다. 공의회는 교회의 본질적 본성의 살아있는 구현체이다.

교회사에서 첫번째 공의회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들이 참석한 그 공의회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어느정도 모세의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그들이 마침내 그들의 결정에 도달하였을때, 사도들은 다른 상황들에서는 주제넘을 것으로 보이는 말투로 말하였다. ‘이것은 성령과 우리에게 올바르게 보인다...’(행 15:28) 이후의 공의회들은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위험을 무릎쓰고 말하였다. 소외된 개인은 ‘이것은 성령과 나에게 올바르게 보인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로 모일때, 교회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그들중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함께 주장할수 있었다.

전체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였던 예루살렘 공의회는 하나의 예외적인 모임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때까지 필적할만한 모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프리안 시대까지 로마제국의 특별한 시민지역내에 있는 감독들이 참석하는 지역 공의회들은 흔하게 개최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지역공의회는 통상 지방의 수도에서, 메트로폴리탄이란 이름이 주어지는 그 수도의 감독의 주재 아래 모였다. 제 3세기가 지남에 따라 공의회들은 규모가 확장되었고, 하나가 아니라 여러 시민지역으로부터 온 감독들을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모임들이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같은 제국의 주요한 도시들에서 모이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대도시들의 감독들은 지방적 메트로폴리탄들보다 더 큰 중요성을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동안 이 커다란 교구들의 정확한 지위에 관하여 어떠한 결정도 없었다.

공의회들의 이러한 계속적인 팽창은 3세기에도 그것의 논리적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아직은 (사도적 공의회로부터 떠나) 단지 작거나 좀더 큰 정도의 지역적 공의회들이 있었으며, 전체 기독교 세계로 부터 감독들을 형성하고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보편적’공의회는 없었다. 312년에 교회의 외적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의 군대와 더불어 프랑스를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을때,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태양 앞에 있는 십자가 빛을 보았다. 십자가와 함께 거기에 비문이 있었다. 이 표시 속에서 정복하라(In this sign conquer). 이 환상의 결과 콘스탄틴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첫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날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의 연속은 교회사의 첫번째 주요한 시기를 끝내고, 비잔틴 기독교 제국의 창조로 움직이게 하였다.








2014년 6월 10일 화요일

[종교] 도덕이 신 없이 만들어져도, 신이 없다는 결정적 증거가 될수 없는 이유.




신이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신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르쳤나 "도덕"을 가르쳤는가. 많은 회의론자들은 이 부분에서 신이 인간의 도덕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도 가르핀다. 난 이 부분에서도 회의론자들에게 양보할수 있다고본다. 내가 교회를 비판하는 이유도, 교회가 자신의 도덕관념을 신을 이용하여 교묘히 사회에 강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의 "독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기독교의 교의를 가린다는 역설로부터 시작한다. 성경이 텍스트가 19금이든 그것이 설화에 불과하던, 그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그 성경이 주장하는 핵심, 그리고 그 신앙고백에서 그 구원이 나온다. 도덕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신약에서 구약에서 선포된 율법이 보완되거나 지킬 필요가 없어지는 것을 볼수 있다.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고, 오리고기와 닭발을 먹는다. 심지어 내가 먹는 오야코동역시 성경에서는 금지된거다. 엄연히보면. 그러나 그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문화적 측면이다.

내가 좋아하는 손가락 ok사인은 그리스에서는 fu*k *ou라고 한다. 그럼 내가 "Okay"라는 뜻으로 그리스인에게 그 사인을 날리면, 그 그리스인은 내 머리에 당장이라도 칼을 겨누려 할 것이다. 그럼 난 "지인에게 "라가"라고 하지 말라는 예수의 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럼 나는 죄인인가?

결국 이 문제는 회의론자들이 교회의 도덕(사회교리적 부분)을 물어늘어트린다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절대적 핵심은 구원이며, 도덕률은 문화와 민족에 따라, 구분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전하라고 하셨다. 신이 준 도덕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양심이라는 것이 있을뿐. 양심을 우리에게 주시어서 우리 도덕률을 구성하게 하신 것일수도 있다. 즉 신이 도덕을 가리키 건 바로 그 문화를 통해서 생성된 "양심"일 것이다.

성경이 영감을 받아 그 문화에 맞게 쓰여졌듯이 말이다. 자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가톨릭 교회가 왜 도덕률과 교리가 변화하고 변동되는지 알아보자. 즉 이 부분은 "교리"와 "교의"를 착각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이 부분에서 회의론자들과 자유사상가들은 공부가 필요한것 같다. 기독교의 보이는 부분만 보고 공격할 것이 아닌, 이러한 사회교리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바로 "양심"을 중요시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형식적인 도덕을 요구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 의거하여, 가톨릭 교회, 즉 정교회와 (특히)천주교회는 최대한 이 사회적 도덕률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은 우리에게 사회를 주셨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도덕률을 만들게 하셨고, 교회는 최대한 자신들의 전통과 사도들의 전승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 뿐이며, 이 역시 언제든지 변동될수 있는 교리다. 하지만 이 것이, 과연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의 구원관을 방해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톨릭교회는 충분히 오류를 저지르며, 특히 정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정하고 넘어가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사회 교리의 출발점이자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개신교가 사회교리를 무시한다는 것에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로마 총대주교 프란치스코가 "무신론자도 양심에 맟추어 살면 구원받을수 있다"라고 발언한 것은 이 부분에서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다.

바티칸 공의회가 바로 "복음"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수도 있는것이다.

2014년 6월 3일 화요일

[정교회 교리/칼럼] 이단 식별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단 문제는 그 분별의 기준과 방법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쓰여서 사람을 괴롭힙니다.이단이라는 말은 원래 "선택"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하이레시스"에서 나왔습니다. 더 풀어보면 자기 멋대로 선택해서 진리라고 주장하는 가르침과 행동을 일컽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특히나 이단 논쟁이 많고 실제로 이단의 행태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는 한국 교회의 업보입니다. 늘 자신만을 정통이라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하는 일이야말로, 실은 교회 역사에서 나타난 이단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면 대경실색할 것입니다.

정교회의 전통은 다른 사람의 주장과 신앙 행태를 함부로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를 정통이라 주장하며, 구원은 오직 천주교회만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천주교와 다른 점입니다. 정교회는 국제 기독교 총회 가입교단입니다. 정교회는 개신교에 대해서 그들이 비록 전통이 없는 곳이라 할 지라도, 그들이 일치되지 않았다 할 지언정 "교회"가 아니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은 타 교단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며, 그러므로 정교회는 타 교단과 충분히 교류할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정교회는 일치되지 않은 교단이 "교회"인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일치되지 않았다"와 "교회가 아니다" 라는 결론이 다른 것입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위치에서, 그들의 일치를 바라며, "오케스트라"와 같은 협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바로, 자신만이 유일한 교회라며 ,WCC에 참여하지 않는 천주교회와 원칙적으로 다른 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론 이외에도, 성서는 우리에게 이단 식별의 기준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단은 "탐욕을 채우려고 감언이설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합니다 베드로 2:3) 그러니 정통이든 아니든, 해당 교단이 이런 형태를 벌이면 그들은 이단이라고 의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단은 어리석을 논쟁을 하고 족보를 캐거나 말다툼을  하거나 족보를 가지고 싸우는 이들(디도 3:9) 입니다. 사소한 일을 트집잡아 서로 갈라지고 교단을 만듭니다. 장로회 교단만도 서로 갈라진 교파가 250개가 넘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태가 이단의 온상이 되어 "구원파"라는 이단의 종류도 나왔지요.

이단의 구별은 분명합니다. 자신들만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 특별한 가르침을 가지고 선전하는 교단으로, 이들은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집단의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유일무이한 지도자를 세우는 특성이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들과는 멀리하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2014년 6월 1일 일요일

기독교가 과학 발전을 촉진했다고?

옛날에 태양이 우리 은하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서 가만히 있다고 생각했다.만약 코페르니쿠스의 말이 옳다면 태양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한 여호수아의 명령이 민망해진다.

그 때, 야훼께서 아모리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치시던 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야훼께 외쳤다. "해야,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멈추어라." 그러자 원수들에게 복수하기를 마칠 때까지 해가 머물렀고 달이 멈추어 섰다. 이 사실은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해는 중천에 멈추어 하루를 꼬박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여호수아 10:12~13, 공동번역개정판)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수아 10:12~13, 개역개정판)



도자기로 만든 개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챈들러는 농담을 한 것이지만 태양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여호수아는 진지했다.

Chandler: Hey look, are we gonna have to bring this out every time Ross comes over?
Joey: He paid a lot of money for it.
Chandler: I'm gonna hold him a different way. Look I don't understand, if you hated it so much, why did you buy it in the first place?
Joey: Well, I had a whole ceramic zoo thing goin' over there but now, without the other ones, it just looks tacky.
Chandler: Yeah with things like this more is always better. So is he housetrained or is he gonna leave little bathroom tiles all over the place? Stay. Good, STAY! Good fake dog(가만히 있어, 좋아, 가만히 있어, 잘했어 가짜 개야).
(<Friends>, Season 2, Episode 19: The One Where Eddie Won't Go)



실제로 루터가 여호수아를 언급하면서 코페르니쿠스를 비판했다고 한다.

The sharpest point of conflict between Copernicus' theory and the Bible concerned the story of the Battle of Gibeon in the Book of Joshua where the Hebrew forces were winning but whose opponents were likely to escape once night fell. This is averted by Joshua's prayers causing the sun and the moon to stand still. Martin Luther once made a remark about Copernicus, although without mentioning his name. According to Anthony Lauterbach, while eating with Martin Luther the topic of Copernicus arose during dinner on 4 June 1539 (in the same year as professor George Joachim Rheticus of the local University had been granted leave to visit him). Luther is said to have remarked "So it goes now. Whoever wants to be clever must agree with nothing others esteem. He must do something of his own. This is what that fellow does who wishes to turn the whole of astronomy upside down. Even in these things that are thrown into disorder I believe the Holy Scriptures, for Joshua commanded the sun to stand still and not the earth."
http://en.wikipedia.org/wiki/Nicolaus_Copernicus

그리고 교회 당국은 지동설을 철회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갈릴레오를 협박했으며 갈릴레오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지동설을 철회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성경의 창조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다윈이 『종의 기원』의 출간을 미룬 데에는 이런 사정도 한 몫 한 것 같다.

하느님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이렇게 닷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느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창세기 1:20~28, 공동번역개정판)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0~28, 개역개정판)

21세기에 천문학과 물리학에 시비를 거는 기독교인은 사실상 없지만 여전히 수많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진화 생물학에 시비를 걸고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종교와 과학은 교권이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종교에서는 도덕의 교권(당위의 교권, 정당화)만 다루고 과학에서는 과학의 교권(사실의 교권, 설명)만 다루기 때문에 둘은 사이 좋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책에는 도덕적 명령도 있지만 사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창세기에는 신이 생물을 어떻게 창조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기적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는 도덕적 설교도 했지만 기적도 행했다.

따라서 성경은 현대의 윤리와도 충돌할 수 있으며 현대 과학과도 충돌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일부 기독교인들은 양쪽 면에서 충돌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동성애가 망측하다고 이야기한 성경 말씀을 따르려는 기독교인들과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 반대하는 진보파가 충돌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과 진화 생물학자들이 충돌하고 있다.

여자와 한자리에 들듯이 남자와 한자리에 든 남자가 있으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
(레위기 20:13, 공동번역개정판)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13, 개역개정판)


도덕의 교권의 문제만 따지고 과학의 교권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는 종교는 굴드의 머리 속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처럼 진화론에 약간은 양보하려는 기독교인도 꽤 있지만 영혼 즉 정신까지 진화의 산물이라고 보고 진화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진화 심리학에까지 양보하려는 기독교인은 훨씬 드물다.

인간의 몸이 그 이전에 존재했던 생명체에서 생겨났다 하더라도(If the human body take its origin from pre-existent living matter), 영혼은 하느님이 직접 창조하셨다. ...... 결과적으로, 영혼이 생명체의 힘에서 출현한다고 또는 생명체의 부수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는 – 이것은 진화론을 부추기는 철학과 부합한다 - 진화론은 인간에 대한 진리와 양립하지 못한다. 또한 개인의 존엄을 뒷받침할 수도 없다.
(『빈 서판』, 332쪽, page 186, 교황이 1996년에 했던 연설)


21세기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현대의 윤리와 현대 과학을 거의 다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꽤 많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신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점점 더 많이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리가 종교의 핵심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의 종교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현대의 윤리와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셈이다.

자유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은 위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들처럼 매우 명료한 언어로 쓰인 구절도 “그냥 비유일 뿐이다”, “그냥 상징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있다.

“여자와 한자리에 들듯이 남자와 한자리에 든 남자가 있으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와 같은 구절이 그냥 비유이거나 상징일 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예수의 존재나 기적도 비유나 상징일 뿐이라서 예수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예수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기적을 행한 적이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몽땅 상징으로 해석하면 이미 종교라고 보기 힘들어 보인다.



나는 종교가 과학의 발전을 조금이라도 가로막아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의 본질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의 경전은 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완벽해야 한다. “신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어도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모시는 체계화된 종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기독교 성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사실의 문제 즉 과학의 교권에 속하는 문제도 많이 다룬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당시의 세계관이 과학적으로 볼 때 완벽할 리가 없기 때문에 온갖 오류가 들어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경전 속의 오류를 하나씩 까발리면 독실한 종교인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따라서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의심을 금지하고 있다. 아래와 비슷한 구절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나온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의심을 품은 사람은 마음이 헷갈려 행동이 불안정합니다.
(야고보의 편지 1:6~8, 공동번역개정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6~8, 개역개정판)

신의 말씀이라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리가 종교의 핵심이라면 “의심 금지”가 따라다니기 쉽다. “이 경전이 신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와 같은 의심이 퍼진다면 종교가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의심과 비판이야말로 과학 정신의 정수다. 따라서 의심을 금지하는 종교의 정신과 의심을 장려하는 과학의 정신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과학에서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논리와 실증이 뒷받침하는 만큼만 믿으라고 가르친다. 과학은 그런 식으로 발전한다. 반면 예수의 기적이나 신의 기적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도록 가르친다면 기독교가 유지되기 힘들어진다.



종교가 과학 발전을 촉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기독교가 유럽의 근대 과학의 발전을 촉진했다고 주장한다.

19세기까지 유럽의 지식인들은 사실상 모두가 다 기독교인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근대 과학은 기독교인들의 노력 덕분에 발전했다. 하지만 “기독교인 덕분에”와 “기독교 덕분에”를 구분해야 한다.

뉴턴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수학과 물리학에서 그런 대단한 성과를 이룰 수 없었을까? 오히려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성경 연구에 엄청난 시간을 바쳤으며 그런 시간 낭비 때문에 과학 연구에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

진화 심리학자들은 호기심이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이 종교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오히려 호기심을 억누를 때가 많다. 뉴턴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호기심이 있었을 것이며 천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호기심, 천재성, 지위에 대한 욕망 등이 뉴턴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으로 이어진 것 같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지위에 대한 욕망도 자연 선택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유일신이 창조한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 통일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통일성은 바로 법칙성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과학이 발전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굳이 유일신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법칙성이 있으며, 돌멩이는 항상 아래로 떨어진다는 법칙성이 있으며, 해는 맨날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법칙성이 있으며, 인간이 200년 안에 죽는다는 법칙성이 있다는 점은 평범한 사람들도 다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과연 과학 발전에 대단한 기여를 한 천재들이 세상에 법칙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유일신이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에...”라는 생각이 필요했을까?

수백 년 전 유럽 지식인들은 유클리드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온갖 과학을 익혔다. 물론 그런 지식에는 법칙성이라는 생각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유일신이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에...”라는 생각이 법칙성의 존재를 깨닫도록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었단 말인가? 이것은 마치 맨날 역기와 아령으로 겁나게 열심히 운동하는 보디빌더에게 밥 먹을 때 숟가락을 드는 것이 근육 키우기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20세기가 되면서 일류 과학자들은 종교에서 점점 벗어나게 된다. 과학 부문 노벨상 수상자들 중에는 종교인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상 모든 과학자들이 종교인이었던 이전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일류 과학자들의 집단이 종교를 버렸다고 해서 과학 발전이 지체되었다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있나? 현대 사회에서 종교인 과학자에 비해 비종교인 과학자의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있나?

중세 유럽과 근세 유럽에서 기독교인들이 대학도 세우고, 과학 연구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했다는 증거가 있나? 과학 연구를 촉진하는 요인은 호기심, 지위에 대한 욕망, 기술에 응용하려는 욕망 등이다. 이런 요인에 종교가 기여했다는 증거가 있나?

옛날 사람들도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호기심이 있었고, 지위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기술에 과학을 응용해서 편히 살거나 전쟁에서 이기려는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과학을 발전시켰을 뿐이다. 가끔 기독교가 과학 연구를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기독교인 덕분에”와 “기독교 덕분에”를 구분해야 한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과학 연구를 촉진하고, 기존 이론에 대한 의심을 조장하고, 비판 문화를 촉진하고, 기술 발전을 응원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기독교 덕분에”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냥 신을 믿기만 하면 다 보살펴 준다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이 기술 발전을 촉진할 것 같은가?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마태오의 복음서 6:25~34, 공동번역개정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25~34, 개역개정판)

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종교] 기독교 종파에 무지한 사람들을 위하여: 보편 교회


기독교.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



종파에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자면, 보편 교회란 로마 가톨릭 교회(13억)+ 동방 정교회(4억)+ 성공회(약 9000만)으로 집계하며, 신도수는 거의 정확하다. (개신교와 달리 냉담자는 신도 집계수에서 제외된다) 

1. 보편 교회는 하나의 믿을 교리를 중심으로, 성경과 성스러운 전통을 기준으로 이성과 신앙에 판단하여, 교도권의 권위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 즉, 본질은 같으나 형식 문화, 시대 상황에 따라 형식과 행동, 정치적인 행동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이야기는 무신론자의 입장에선 어이없을수도 있겠지만 초대 교회로부터의 입장이 맞다. 즉 보속과, 죄의 기준, 성경 해석의 시대적 재해석등은 믿을 교리를 침해하지 않는이상 언제든지 교회의 교도권과 사도전승에 의결하여 시대에 맟추어나간다. (가톨릭 교리법전 참조)

2. 보편 교회는 모든 신자들에게 유신 진화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바티칸 문건 "진리는 진리를 거스를수 없다" 참조.) 예비 신자에게도 진화론의 정당성을 가르치고 있음(로마 가톨릭 예비신자교육서 참조) 정교회는 유신 진화론을 교구의 선택사항으로 달리 가르치며, 창조론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음. 다만 정교회는 유신 진화론 보다는 과학과 종교는 서로 입장이 다르며, 성경을 창조과학 및 지적설계처럼 현실에 억지로 짜맟추어 이해하는건 교리적으로 위험하다고 가르치고 창조론의 중요한 목적은 "창조"를 이해하는 것 이라 가르침. 그 후에 유신 진화론은 성경적이며, 인정할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성공회 역시 진화론을 인정하고, 교육서에도 그 내용을 사용한다. 다만 이건 대한 성공회에서는 잘 모른다.

3. 보편 교회는 모든 신자들에게 종말론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가톨릭 예비신자교육서 참조) 즉 프리메이슨이나 휴거드립에는 빠져선 안될 것을 당부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와같이 모든 신자들에게 당부하고 있으며, 그 중 독자적이게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창조론과 종말론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임. 다만 교회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페이크이고, 성직자가 이런걸 믿으면 면직처분까지 갈수도 있음.

대충 교회권에 대해서는 이정도로 설명하면 되겠고, 적어도 신을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비이성적인 신을 믿으면서 위안을 얻는다 한다. 그렇다. 신은 비이성적이다. 신을 믿는것도 비이성적이다. 존재하는 증거가 없으니깐. 그래서 우리는 막연히 믿는다. 신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는건 "심증"인 것이고,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보편교회는 타 인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권유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전도의 행위는 시대 기준에 맟추어 변화할수 있으나, 현재의 보편교회는 이러한 속성 때문에, 보편 교회가 저질렀던 오만함을 뉘우치며, 이미 시노드나 여러 지역공의회에서는 이러한 포교를 하지 않기로 함. 교황도 이에 대해서 문건을 발표한 바 있음. 즉 지금같은 글로벌,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가톨릭만이 유일 진리하고 주장하는건 옳지 않다라고 선언. 정교회는 원래부터 이슬람교에게 맞던 처지라 당하고 살던 종교중 하니임. 고로 애초에 포교를 할수가 없었음. 러시아는 애초에 종교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 결과는 토착종교가 기독교화되는 결과를 맞이하고, 이러한 토착화는 니콘의 동방종교개혁을 불러옴. 국교는 러시아 정교가 맞았지만, 국가적으로 강요하진 않는다.

현대 보편교회,(개혁교회 사이드를 제외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고, 문화와 그 시대적 양심을 죄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며, 밖으로는 사회 봉사와 실현하고, 안으로는 종교활동을 하는것을 목적으로 하는게 보편교회이다. 교회가 시대를 이끈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보다. 점점 피페해지는 시대에 지친 낙오자들이나 짐이 무거운 사람들이 스스로 회복을 찾아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게 보편 교회의 정신이다.

기독교는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며, 실제로 개혁교회와 보편교회는 서로 인정하지 않고, 타 종교 또는 갈라진 형제 등의 애매한 문구로 돌려서 말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보편교회를 종종 적그리스도, 음녀등의 자극적인 문구로 비판하는 반면, 보편교회는 갈라져 나간 형제들(가톨릭), 타 종교(정교회), 사도성이 인정되지 않는 교회(성공회) 등으로 개혁교회를 호칭한다.

어제 올린글이 다소 자극적임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서 심심한 사과를 드리며, 상대방이 신을 믿지 않듯이, 나도 그 사람이 신을 믿던지 안 믿던지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는것을 드러내는것은 틀린말이 아니다. 다만, 특정 종교의 신론을 언급하면서, 특정 종파만의 교리를 문제삼아, 신이 없다는 것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론은 우리 보편교회와 개혁교회가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는 속성이고, 개혁교회가 현대사회와 배치된다 해서, 그것이 신론의 부정으로 넘어가는건 분명한 오류이다.

전 세계 기독교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보편교회 신자들까지 매도하는 것은 아무래도 큰 문제가 있다. 애초에 다수는 거기가 아니고 이쪽이라고.

다만 내 블로그나 학업을 이유로 닫아버린 내 이글루스까지 쳐들어와 어디서 퍼온 자료들을 올려대며, 종교를 믿는 사람을 거짓말쟁이와 사기꾼으로 매도한다시피 한다는 것, 상대방의 영성을 함부로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그것에 분노한 것이다. 즉 과학적 입장 또는 현대 개혁교회의 잘못을 가지고 형이상학적인 "신론"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무시하는것, 그것은 신학적인 썰을 가지고, 과학을 깎아내리는 창조론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는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