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6일 토요일

정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영성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곧 정교회의 역사다. 정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였던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당시 그리스도교 중심지였던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의 다섯 개 대관구로 성장하면서 세계 공의회를 통해서 하나의 교회로 현존하였다. 이 세계 공의회에 따라서 교회의 기초가 되는 교의들과 전례가 공식적으로 형성되고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이후 다섯 개의 대관구로 형성되어 내려오던 하나의 교회는 로마 총대주교좌의 수위권 문제와 "필리오케"(Filioque) 교의 논쟁으로 촉발된 비극적 상황 끝에 1054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정교회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으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른 신앙과 전승에 충실했던 동방 정교회는 1054년 비극 이후에도 서방 교회처럼 교파의 분열 없이 하나의 교회를 유지하면서, 고래(古來)부터 있었던 4개 총대주교 관구와 10개의 독립 교회, 6개의 자치 교회 그리고 한국 정교회를 위시한 선교 도상에 있는 여러 지역 교회들이 󰡐하나의 믿음󰡑으로 연결되어 형제적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정교회와 우리 민족의 만남은 약 8백 년 전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 군이 러시아를 지배하고 유럽을 유린하던 중세 시대에 몽골에 파견되었던 로마 교황청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보면, 몽골의 왕실은 비교적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을 후하게 대접했으며 그때 고려의 왕자들과도 접촉케 했으니 당시 볼모로 잡혀가 있던 고려 왕실 왕전(王佺) 등의 귀족 자제와도 화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더 직접적인 관계로 보면 러시아 정교회와의 만남은 260년 전 조선 영조 시대로 소급된다. 청나라 북경 사신 길에 올랐던 이윤신의 문견 사건에는 󰡐큰 코 오랑캐󰡑라는 의미의 대비달자를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곧 코 큰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는 이미 러시아와 청나라가 국교를 맺고 있었던 때이다.

러시아 정교회 10차 선교회의 책임자였던 이아킨프는 조선 사신들과의 깊은 교류로 조선 왕국에 대한 러시아 최초의 논문까지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난 세기에 러시아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 중에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들이 배출되었고 그러한 신앙의 맥이 지난 80여 년 간 공산주의에 의한 우리 민족과 정교회의 신앙 박해 속에서도 끊기지 않고 이어 내려와 현재도 러시아 사할린 등에 다수의 한국인 정교회 신자들이 분포해 있고, 몇 분의 한국계 신부님들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목 활동하고 있다.

19세기 말엽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치열하던 때 조선에는 약 90명의 러시아 군인들을 포함하여 120여 명의 러시아인 그리고 30여 명의 러시아 국적 소지 한국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주일과 축일이면 러시아 공사 관저에 함께 모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 생활을 유지했으나 성사를 집전해 줄 정교회 사제가 조선에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본국에 사제 파견을 요청하여 1900년 1월에 사제가 서울에 왔으며 2월 17일에 첫 성찬 예배를 통하여 한국에 정교회가 세워진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일제시대 때부터 거듭되어 온 고난의 역사는 교회에 많은 문제점들을 남겨 놓았는데 한국 정교회는 전쟁의 상처를 벗어나자마자 선교의 재개뿐만 아니라 교회의 내부적인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고 1980년부터 본격적인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각 지역에 순차적으로 성당이 건립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교회 성직자와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원이 설립되는 등 한국 정교회 선교사에서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 여러 분야에서 성장해 가고 있다. 이에 따라 1995년 세계 총대주교청 시노드에서는 한국 선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한국 정교회 교구 헌장을 승인하였으며 이에 앞선 1993년에 그동안 한국 선교의 확장을 위해 크게 이바지했던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수사 대신부를 주교로 서품하여 현재 한국 정교회 교구장이신 디오니시오스 뉴질랜드의 대주교님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다.

간략하게 역사를 소개한데 이어 아래와 같이 정교회의 전통과 영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신학적 전통

성전(聖傳, Holy Tradition)
하느님 백성의 계속 이어지는 삶을 성전이라고 부른다. 구약에서 나타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계속되는 삶 속에서 표현되고, 이 성전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고 그리스도 교회가 지상에 세워짐으로써 완성되고 승화된다. 메시아가 세상에 오신 때부터 신약 또는 그리스도교의 전통 또는 사도 전통, 교회 전통이라고 부른다. 이 전통에 대해 기록된 주된 부분이 성서의 신약에 있는 문서들이다. 복음서들과 사도 교회의 다른 문서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을 이루며, 후대에 발전된 모든 것들의 주요 원천이요 영감을 준 근원이기도 하다.

이 같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전통(Tradition)이라는 말을 엄밀하게 말하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진"(passed on) 것과 "넘겨진"(given over)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전은 그리스도의 사도 시대부터 오늘까지 교회 안에 넘겨져 전해 오는 것이다. 기록된 문서들이 많이 있지만, 성전이 반드시 기록된 것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저 하나의 커다란 문학 작품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그리고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 전체 교회의 삶과 경험 전부를 가리킨다. 전통은 성령에 의해 영감 받고 인도되는 교회 자신의 삶 바로 그 자체이다.

교회의 성전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서 성서가 가장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교회의 예식에 참여하는 생활과 그에 따르는 기도가 있고, 교리와 공의회에서 승인된 규정들, 교부들의 저술들, 성인들의 삶, 교회법, 그리고 음악이나 건축처럼 창조적이고 영감이 깃든 예술적 표현들과 함께 성화(聖畵) 전통이 있다.

성전의 모든 요소들은 실제적인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 하나도 홀로 생겨난 것은 없다.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분리될 수 없으며, 교회의 전체적 삶과 따로 떨어질 수 없다. 모든 것은 모든 시대와 세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교회의 살아 있는 생명 속에서 생생하게 존재한다.

교회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 계속 살아가는 한, 교회의 성전은 계속해서 자라고 발전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공의회들
교회는 역사적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많은 어려운 결정들을 내려야만 했다. 교회는 언제나 첫째는 사도들, 다음으로는 주교들과 같은 임명받은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모든 신자들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의견의 일치를 이끌어냄으로써 어려움을 해결하고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곤 했다. 역사상 교회의 첫 공의회는 비(非) 유다인들인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조건들을 결정하기 위해 사도 시대의 교회 안에서 열렸다(사도 15장 참조).

그때부터 모든 역사를 통하여 교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기 위해 공의회들이 열렸다. 주교들은 사제(presbyters) 또는 원로(elders)라고도 부르는 자기 교구의 신부들(priests)과 교인들을 정기적으로 만났다. 그래서 초대 교회 역사에서는 일정한 지역을 맡고 있는 주교들이 어떤 표준적인 토대 위에서 교회의 역사에서는 모든 주교들이 참석하도록 요청 받는 공의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모든 주교들이 참석할 수 없는 공의회도 있었으며, 따라서 그 공의회들 모두가 성전을 지닌 교회에 자동적으로 승인되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정교회의 역사에서는 오직 일곱 차례의 공의회만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전체 교회의 보편적인 인정을 받아왔다.

이 공의회들을 가리켜 󰡐일곱 차례의 세계 공의회들󰡑(Seven Ecumenical Councils)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은 교의를 정의하였다.

  •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아들의 신성을 정의하면서 신앙고백(the Creed)의 일곱 개 조항을 완성하였다.
  • 381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에서 성령의 신성을 정의하면서 신앙의 신조 다섯 개 항을 첨부하여 모두 열두 개 조항으로 완성시켰다.
  • 431년 제3차 에페소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를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모님을 󰡐하느님을 낳으신 분󰡑(Theotokos)으로 정의하였다.
  • 451년 제4차 할키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를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정의하였다.
  • 553년 제5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에서 성삼위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다시 확증하였다.
  • 680년 제6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의지와 행위의 실재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분의 참 인간성을 확인하였다.
  • 787년 제7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의 표현인 성화상(icons)의 정당성(正當性)을 확인하였다.

세계 공의회들에서 이루어진 교의적(敎義的, dogma) 정의와 교회법들은 성령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잘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것들은 정교회의 교리들을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자원들이다.

일곱 차례의 세계 공의회와 달리 여러 지역 공의회들도 있는데, 그런 공의회들의 결정 또한 세계의 모든 정교회들의 승인을 받았으며, 따라서 정교회의 신앙과 삶을 참되게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지역 공의회들의 결정들은 대부분 도덕적이거나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것들 또한 정교회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교부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교리를 수호하고 설명하였던 신학자와 영적 교사들 같은 성인들이 많이 있다. 이 성인들을 교회의 거룩한 교부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가르침을 교부적(敎父的) 가르침이라고 한다. 교부라는 말은 󰡐아버지󰡑라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어떤 교부들을 변증가들(apologists)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신앙을 비웃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항해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을 수호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저술들을 변증론(apologies)이라고 부른다. 다른 교부들 가운데는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교리의 어떤 부분들은 취하고 또 어떤 부분들은 부정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해치는 이들에 대항하여 올바른 신앙을 수호하였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변질시킴으로써 교회의 본질을 파괴하는 이들을 이단자(異端者)들이라 하고, 그들의 가르침은 이교(異敎) 또는 이론(異論)이라고 한다. 정의를 내리자면, 이교는 선택을 뜻하며, 따라서 이단자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의견에 따라 그리스도교 전통 가운데 어떤 것은 거부하고 어떤 것은 취하면서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선택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완전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교회를 어지럽힌다.

교부들 모두가 잘못된 가르침이나 이단론에 대항했던 수호자들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오로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교사들로서, 더 깊고 완전한 방식으로 신앙의 의미를 발전시키면서 설명했다.

또 어떤 분들은 영적 삶에 대한 교사들로서, 기도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통하여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의 의미와 방법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영적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분들을 󰡐금욕적󰡑 교부들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금욕주의󰡑라는 말이 󰡐영적 수련자들󰡑의 훈련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와는 달리 하느님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는 방법에 대해 열중했던 분들을 󰡐신비적󰡑 교부들이라고 부르며, 그와 같이 경험으로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루는 일을 󰡐신비주의󰡑라고 정의한다.

모든 교부들은 그들이 신학적이거나 사목적인 교부, 또는 금욕적, 신비적 교부 등 어떤 형태로 분류되든지 간에 자신들의 가르침을 바로 자기 자신의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적 경험에서 이끌어냈다.
그들은 이처럼 실재적이며 경험을 통하여 얻은 살아 있는 지식을 바탕 삼아 신학적 가르침과 영적 삶의 방법들을 방어하고 묘사하고 설명하였다. 그들은 빛나는 지성에 덧붙여서 영혼의 순결과 의로운 삶을 함께 엮어 나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그들을 교회의 거룩한 교부들이라고 부른다.
시대가 흐르면서 교회의 보편적 승인과 칭송을 듣는 몇몇 교부들의 작품들은 특별히 중요한데, 그런 것으로는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 리용의 이리네오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 게사리아의 바실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 신학자 그레고리, 요한 크리소스톰,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고백자 막시모, 다마스커스의 요한, 콘스탄티노플의 포티오스, 그레고리 팔라마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안토니오스, 마카리오스, 요한 클리막스, 시리아의 이삭, 에프렘, 신신학자 시메온 등과 같은 금욕적이고 영적인 분들의 저술들이 중요하다.

성인들
교회의 가르침은 진정한 신앙인이라 할 수 있는 성인들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성인들은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1베드 1, 16). 성인들의 삶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확실성과 진리를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참된 선물인 거룩함을 보여 준다.

교회 안에는 서로 다른 여러 부류의 성인들이 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매우 특별하게 존경을 받는 교부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의 거룩함에 깃든 특별한 측면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성인으로 분류되는 분들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도들이 있고, 복음을 말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기록하는 복음작가들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아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는 고백자들이 있고, 신앙을 위해 죽는 순교자들도 있다. 수도자들 가운데서 나오는 성인들이 있고, 신자 가운데서 나오는 의인들도 있다.

정교 전통 안에는 성인들의 삶에 관한 자료가 많이 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신앙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 매우 쓸모 있게 이용될 수 있다. 성인들의 삶 속에는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생각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성인들의 삶 속에 있는 건전한 진리의 핵심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따라서 성인들의 삶 속에 담겨진 본질적인 진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마땅히 기울여져야만 한다. 성인들의 삶에 관해 주의 깊게 읽다 보면, 기적적인 사건들 속에 들어 있는 진정으로 참된 것을 거의 언제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성인들의 실제 삶처럼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일어난 성인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들로부터 그리스도교의 현실적인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법들
교회 전체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교리와 교회 기준에 따라 받아들여진 교회법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세계 공의회에서 나온 것, 지역 공의회에서 나온 것,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등이 있다. 󰡐카논󰡑(canon)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규칙(rule), 규범(norm) 또는 판단의 수단(measure of judging)이 아니며, 인간의 법 체계에서 이해되고 기능하는 법들과 쉽게 동일시할 수 없다. 교회법들은 먼저 교의 또는 교리적인 성질의 것들과 실제적이고 윤리적이거나 구조적인 성격을 지닌 것들로 구별된다. 그 다음으로는 변하여 바뀌는 것들과 어떤 경우에도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들로 구별된다.

교의적인 교회법들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조항을 말하고 있는 공의회의 결정들인데,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격에 관한 것 따위가 그러하다. 비록 이 같은 교회법들이 특별히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교회 전통의 성장과 변화 속에서 새롭고 다른 언어로 설명되고 발전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의 교회법들 또한 바뀔 수 없는 것들에 속한다. 도덕에 관련된 교회법은 그 의미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그 행위는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교회의 성사들을 함부로 행하는 것을 금하는 교회법이 바로 이 같은 종류의 것이다.
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교회 규범적이고 영적인 정교 생활의 전체성(wholeness) 속에서 교회법을 받아들인다면, 교회법들은 그 적절한 자리와 목적을 얻게 되며, 교회 안에 계신 하느님의 살아 있는 진리를 찾는 일에 풍부한 샘이 됨을 보여 준다. 교회의 법들을 바라볼 때 핵심이 되는 요소는 기술적인 연구와 영적인 깊이에서 생겨나는 그리스도적 지식과 지혜이다.

교회의 예술
정교회는 음악, 건축, 조각, 자수, 시 등과 같은 교회 예술뿐 아니라 성화상(icon)에 대한 풍부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런 예술적 전통은 창조를 통해 사람과 세상에 보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를 둔 인간의 창조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세상을 매우 사랑하시어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그분 자신이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예술적 표현들과 하느님의 축복, 영감들이 함께 녹아 들어가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환상(vision)의 가장 깊은 진리들을 참되게 표현하는 거룩한 예술적 창조성을 발휘하게 한다.

성화상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교적 예술 작품이다. 성화상은 색과 선으로 표현하는 복음의 선포요, 교리적 가르침이며, 영적인 영감이다. 전통적인 정교 성화상은 그림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사진으로 복사하는󰡑 방법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성인이나 사건들을 그림으로 나타낸 초상화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거기에 그려진 인물이나 사건의 영원하며 거룩한 실재성과 의미, 그리고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다. 신적인 영감과 은혜로운 자유 속에서 성화상은 그 주제(인물 또는 사건)를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성이 깃든󰡑 것으로, 지상의 것이면서 천상의 것으로, 물질적인 것이면서 영적인 것으로, 󰡐십자가를 지면서󰡑 은총과 빛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것으로 그린다. 이런 방식으로 성화상은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의 외형만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보다 더 깊은 󰡐사실주의󰡑를 표현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정교 성화상들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써,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실제적인 내용과 쓰임을 통해서 뿐 아니라 그림의 형태와 스타일, 방식을 통하여 정교의 가르침과 신앙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전통적인 정교 건축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며, 특별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과 세상과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나눔에 대한 강조 속에서 드러난다. 둥근 지붕을 한 천장, 건물의 형태와 설계, 성화상들의 배치, 제의(祭衣)의 사용 등 이 모든 것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한다. 전통적인 정교회의 건축과 예술 작품들은 창조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다.

2. 영성                                                 
정교회의 영성은 성서와 전통을 근거로 하여 육화하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 주신 삶의 실천을 본받아 사도들과 교부들에 의하여 이룩한 신학과 교리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영성 생활은 우리의 믿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번된 정교회는 영성 󰡐수덕과 신비󰡑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을 간직하여 지키고 있다.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의 탄생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성전(聖傳)이다. 이 성전에 대한 진실하고 공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주요 출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 둘째는 공의회의 기록들, 셋째는 예배에 관한 초기 전례서들, 넷째는 교부들의 저술들이다.

정교회의 영성은 대략 1900년에 걸쳐 발전된 결과이다. 다양한 종족과 문화적 요인들이 함께 어울려 이루어진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통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동질성이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신화(神化, deification)
인간의 삶의 목적은 신화의 경지에 이르러 하느님과 결합하는 것이다. 이는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영과 육의 완전함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직접 교류를 할 수 있었고 그분과 일체가 되어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와 같은 은총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는 잃어버린 태초의 고유함을 다시 찾고자 신화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신화의 길을 보여 주셨다. 우리의 초자연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일치가 되게 하신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하느님과 하나가 됨은 두 가지의 동등하지 않으면서 똑같이 필요한 힘의 상호 작용이 요구된다. 곧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그것이다. 의지(지성이나 감성이 아닌)는 하느님과 결합하는 데에 인간의 주된 요소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맡겨지지 않거나 일치되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밀접한 일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약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이 붙들어 주신다는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아무 힘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안에서 의지와 행위를 올바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은총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화의 경지에 이르러 그리스도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수덕의 삶을 살아야 한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덕을 얻게 되는 삶을 말하는 것인데,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영성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덕의 삶은 수도원이나 세속과 떨어진 일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현실을 망각한 신비적이고 도피적인 믿음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평범한 삶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수덕의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도와 관상
기도는 구원의 길로 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 요소이다. 소리내서 하거나 마음으로 하거나, 공적이거나 사적이거나 교회의 영성에서 행해지는 모든 기도는 큰 도움이 되며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된다. 관상은 기도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하느님의 현존에 인도하는 󰡐단순한 기도󰡑는 여러분을 신성한 대상에 집중시키면서 가능한 한 여러 생각과 감정을 하나로 줄여 아무런 대화나 말이 없는, 완전한 내적 침묵 속에서 여러분이 머물게 한다.

개인의 노력에 따라 관상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생각, 침묵 기도,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상태는 어떤 형태이든 동방 교회의 관상의 한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도의 가장 모범이 되는 것은 󰡐예수 기도󰡑이다. 이 기도에서 예수의 이름은 시작에서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신비 상태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영성 활동은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를 구체화시킨다. 이는 지속적으로 주님을 기억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주님을 그들의 영혼과, 심장과, 의식의 내부에 숨긴다.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분을 구체적으로 의식하기 위한 방법이 예수 기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기도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수도 생활이 관상의 실천과 기도에 특별히 좋은 환경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성 생활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가정과 직장 등 모든 분야에서 관상적 기도와 신비적 은총이 제외되는 곳은 없다. 관상은 사랑을 증진시키고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계명을 지키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거룩한 신비의 성사에 의해 지속되어야 한다.

회개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영적 삶의 시작은 하느님께 귀환하면서 시작된다. 하느님께 귀환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죄와 투쟁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참고 인내해야 한다.

하느님께 귀환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데 바로 회개이다. 회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하느님께 부여받았다. 비록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태초의 아름다움은 상실하였지만, 은총으로 그 형상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바로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잃고 상실했는지를 정확히 알 때에 비로소 회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는 삶에서 단순히 한번으로만 그치면 안 되고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죄의 유혹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끊임없이 하여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느님과의 친교가 지속되어야 한다.

회개에는 󰡐생각의 바뀜󰡑, 󰡐사고의 변화󰡑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행위와 그 죄를 미워하고 나의 생각과 말 그 밖의 모든 그릇된 것을 버려야 한다. 회개는 세례를 받은 후 거듭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은총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성 요한 클리막스가 말하듯이 회개는 󰡐반복되는 세례󰡑이며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에게서 회개의 자세를 찾아볼 수 없다면 그는 은총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영적인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교회에서는 성사를 단순히 󰡐성사󰡑라 하지 않고 󰡐신비의 성사󰡑라고 부른다. 성사는 영성 생활의 본질도 아니며 끝도 아니다. 성사는 은총의 매개체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총의 매개체들은 정교회 신앙 생활에서 정확히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정교회는 성사가 거룩한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외적인 표시와 연결된 실재하는 영적인 은총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면, 교회는 전에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일에서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던 물에서나, 주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셨던 죄 사함의 선포 등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그와 똑같은 은총으로 교회의 신비의 성사 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은총은 신비로운 면을 지니지만 교회는 성사에 대하여 세속적 정의를 내리지 않고 세밀히 기술하지는 않는다. 곧 교회는 신비적 성사에 대하여 엄격하고 엄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피하고 있다.

정교회는 신비로운 성사가 신비로서 남기를 바라고 있으며, 어떤 세속적인 법리나 법칙 또는 사법적인 제도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정교회에서 성사는 단순히 신비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으며, 그러므로 성사는 성령에 의해 거행되는 것이다.

성사에서 우리는 은총을 수여 받는다. 또한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탄의 힘에 대항하고 투쟁하여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정교회는 성사와 함께 존재한다.

모든 정교회의 거룩한 성사는 악의 힘에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성사 생활은 궁극적인 구원과 영성에 이르는 주된 수단이다. 성사 생활에 최종 행선지(목표, 지향점)는 성찬식이다. 예수님께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찬식 없이 완전한 영적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주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정교회 신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성찬식은 사랑 안에서 일치의 끈으로 작용한다.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또한 다른 이들과도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 정교인들이 같은 신앙을 고백하기 전에는 거룩한 성사에 적극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정교회는 기독교가 단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처럼 도덕과 윤리만 강조하는 조직체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부 분파주의적 오류와 무지를 거절한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일치는 실재하는 사실이며, 그 가운데 그리스도와 교회가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강조한다.

나가면서
초대 교회는 굳은 믿음에 뿌리를 둔 공동체 사회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덕을 실천하며, 주일에 성찬 예배를 거행하고 사도들이 가르친 신앙고백과 공동기도를 바치면서 사랑으로 서로 도와 주고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하였다. 이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곧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교제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이 되는 일치였다. 그래서 한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보편적인 교회가 온전히 함께하는 것이다(마태 18, 20 참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이고(에페 4, 4 참조) 그리스도는 갈라지지 않는다(1고린 1, 13 참조). 만일 누군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일탈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열과 갈라짐은 범죄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흩어져 있는 자녀들을 모으고 그들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는 구원의 방주이다.

이제 한국 정교회는 오랜 기간의 고난과 어려움을 거친 후에 이 땅에서 교회의 기틀을 다지고. 그 토대 위에 정교회가 온전히 보존해 온 복음과 초대 교회의 정신, 모든 민족 고유의 문화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하는 정교회의 선교적 유산, 그리고 정교회의 바른 전승을 통해 교회의 참 모습을 드러내고 정교회 영성 생활의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우리 민족에게 증거해 갈 것을 기대한다.

한의종 / 정교회 성모희보성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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