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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9일 화요일

"이승만 국부론"과 "8.15 건국절"을 이승만 어록으로 격파하다.




대한민국은 건국절을 따로 두지 않는 대신, 3.1절을 그 연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연설에서 드러나는 그의 사상은 "정부 수립" 과 "민족 해방" 이라는 두가지 개념이 있고, 이는 광복절과 삼일절이라는 두가지 형태의 기념일을 제정함으로서 드러나지요. 3.1운동으로 민족적인 합의를 이룬, 민족자결주의에 기반한 민족의 정부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일제에 폭압에 밀려 중국 대륙에 피난하다가, 민족 해방으로 인해 실질적인 정부의 구성을 하였다 라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설립은 1919년에 했는데, 나라가 없어 정부 구실을 못 하다가, 나라가 해방 된 뒤, 실질적인 정부 구성을 하였다는 요지의 주장을 합니다.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박사

즉 정부 수립, 건국절은 이미 그분들이 주장하시는 국부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 이승만 국부론으로 넘어가면, 어느 연설에서도 이승만은 자신이 국가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부분도 없으며, 국가의 창립의 공을 모두 민중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정부수립 자체의 공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백성들에게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부분도 많습니다.

이는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ramer)들이 쓴 저작과는 미묘하게 다른 부분입니다. 연방주의자 논집과, 제퍼슨의 연설, 그리고 워싱턴의 취임 연설(1차)와 고별사에서 나타나는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국가를 설계할까?" 라는 질문을 고민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과는 달리, 이승만 자체는 정부 수립은 나 혼자만이 아닌, 민중들에 의해서 이미 설립되었고, 나는 국민들에 의해서 선출된 민주정부의 대통령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승의식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그의 대부분의 연설은, 민중들의 투쟁과 독립을 위한 열망아래 건설된 정부를 실질적으로 남부에서나마 실현했고, 어떻게 북쪽과 침략자로부터 자유를 수호할까 정도의 말만 되풀이됩니다. 즉 그는 "민주국가와 자유의 수호자"를 자칭했을지언정 "국가의 건설자"를 자처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러한 부분 말고, 여러분들이 다 아는 헌법 전문에서도 건국절과 이승만 국부론이 안 되는 이유를 한 문장에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 헌법 서문

서론은 이쯤 하고, 그가 쓴 연설문들을 차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위에서 쓴 부분을 감안하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부분 맟춤법과, 지금에는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토씨하나 안 빼고 수록했습니다.

우리 국가의 자유를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우리 의병들이 싸우며 보호하라했고 1919년에 만세운동으로 우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중국과 만주에서는 우리 국군의 잔병이 1945년까지 싸워오다가 마지막으로는 공화민주국가(共和民主國家)의 결실이 되여 지나간 4년 동안에 처음으로 민국정부(民國政府)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

제 2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연설 중

30년 전 오늘에 13도 대표인 33인이 비밀히 모여서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민주국의 탄생을 세계에 공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선열들이 용감스럽게 이 일을 행한 환경이 140여 년 전에 미국독립선언을 서명하던 그 때의 형편만 못지않게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는 정신은 어디서나 한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건설하는 민주국은 탄생한 지 아직 1년이 못되었으나 사실은 30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제 30주년 삼일절 연설 중


다행히 UN감시 하에 민국정부가 수립된 것은 우리 민중이 3·1정신을 지켜나오다가 마침내 민주정부를 완전히 수립한 것이니, 실상 32년 전에 우리 3·1운동을 주창한 선열들이 세운 정신적 민주국가를 이번에 사실적으로 완수한 것이오, 우리 민주정부가 성립된 지 얼마 안에 세계 모든 문명국가들의 지지를 받아 오늘 UN군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과 전무한 물질력으로 우리를 도와주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 32주년 삼일절 연설 중


삼십삼년전 오늘인 일구일구년삼월일일에 우리애국지도자 삼십삼대표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이를 세계에 공포한 것임니다. 그때에 공포된 독립의 정신이 실지상으로 출현되여 일구사팔년 팔월에 대한민국 주국이 탄생된 것이니 지금에 우리는 이 독립을 유지하며 공고커 하기 위해서 혈전사수하고 잇는 중이며...(후략)

기미년, 삼월일일에 선포한 우리 독립선언서에 한 구절은 삼십삼년전에 적합한 것이 오늘에 와서도 적합한 것임니다. 이 구절로 내 말을 맛침니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하노라

제 33주년 삼일절 연설 중

그러나 우리 독립은 우리 전민족의 간담(肝膽)과 정신 속에 사라잇섯던 것입니다. 이 독립이 우리 해외에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사라 잇섯던 것입니다.우리 독립은 세계에 가장 오래고 위대한 역사의 일부입니다.우리 한인(韓人)된 자는 이날에 우리가 행한 일과 또 우리가 대표한 국가를 자랑하고저 하는 바입니다.

제 35주년 삼일절 연설 중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3월 1일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민국이 정신적으로 탄생한 날입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우리가 존경하며 기념하는 33 선렬들이 서울 명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 경찰을 불러와서 잡아가라 한 것입니다.

제 38주년 삼일절 연설 중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 날 우리가 다 같이 모여서 공동히 할 일은 그때 우리의 정형이 어떠하였던 것과 또 우리의 33선렬들이 죽기로 결심하고 이 운동을 시작해서 경향에서 일시에 일어나서 피를 흘리고 싸운 것과 또 한편으로는 임시정부를 공포한 열렬한 역사를 우리가 다 기념해서 그 정신을 이르켜야 되는 것입니다.

 제 40주년 삼일절 연설 중

1919년(기미년)에 우리 13도를 대표한 33인이 우리나라 운명 개조하기 위하여 1776년에 미국 독립을 선언한 미국 창립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 한국을 독립민주국으로 공포한 것입니다. 이 민주정부가 서울서 건설되어 임시로 중국에 가있다가 3년 전 오늘에 우리 반도남방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 정부는 대부분 미국과 UN 각국의 도움으로 태생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한국 천지에 자유가 탄생한 이날을 경축하는 우리로는 이 역사를 이즐 수 없는 것입니다.

제 6주년 광복절 연설 중

즉,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기에 건국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삼일절을 국가가 기뻐하는 국경일로서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국부론을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창립의 주체가 국민, 민중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오, 8.15 건국절을 주장함은, 3.1운동 당시에 "조선인민"의 마음속에 이미 건국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역사가 보여주는 절대권력의 위험한 유혹

중국은 2000년 이상 절대권력자들이 통치한 왕조국가였다. 절대권력을 손에 쥐려는 야심가들 간의 싸움과 그 주변을 맴돌며 권력을 탐하는 소인배들 사이의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상가에게 왕조체제는 비판을 넘어 항쟁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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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어느 날,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이었다. 호남성 형양(衡陽) 연화봉(蓮花峰) 아래 가시덤불 속에서 40대쯤 돼 보이는 중년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머리는 산발해 검불 같고 옷은 다 해어져 못 봐줄 지경이었다. 얼굴은 누렇게 뜬 것이 마치 한센병 환자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더니 은밀히 속몽암(續夢庵) 쪽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더할 나위 없이 한적한 속몽암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벌써 훤하게 밝은 뒤였다. 그는 등에서 자그마한 보따리와 우산을 내려놓은 다음 돌의자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보따리에서 큰 붓을 꺼내 먹을 듬뿍 찍어서는 바위에 글을 썼다.

‘육경(六經)은 나를 눈뜨게 했으나, 하늘은 일곱 자 이 몸을 버리는구나!’

“제왕은 다 도적들”

이 남자가 바로 후세에 ‘위기의 사상가’로 일컬어지는 명말 청초의 애국지사 왕부지(王夫之·1619~1692)다. 멸망한 명의 잔여 세력이 세운 남명(南明) 정권에 가담한 그는 명을 멸망시킨 청에 대항해 투쟁했으나 잇달아 좌절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인적이 드문 이곳에 정착, 낮에는 숨고 밤에만 움직이는 고달픈 피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를 다 써내려간 왕부지는 바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지러운 전세 속에서 부모 형제와 처자식들이 잇따라 세상을 등졌다. 왕부지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역사의 전환점 앞에서 놀라고 비관하고 실망했으며 의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명 왕조의 철저한 복멸(覆滅)을 두 눈으로 지켜봤고, 가족의 파멸이라는 무한대의 고통을 경험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국면을 되돌릴 힘은 없었다. 그는 조용한 곳에 은거해 칼 대신 붓으로 명 왕조 멸망의 교훈을 살펴보고 사상, 문화, 교육의 영역에서 항청(抗淸) 투쟁을 계속하려고 마음먹었다. 보따리를 얹은 돌의자에 다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명 왕조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의 부패, 정부의 무능함에 있었다. 그런 부패와 무능의 배경에는 교육의 결함이 자리잡고 있었고, 근본적으로는 권력을 멋대로 휘두른 절대권력자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국가교육의 큰 줄기는 천하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통치자들이 장악해야지, 못된 소인배나 썩은 당파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왕부지 이후 중국에서는 절대권력을 쥔 왕조체제를 비판하는 사상가들이 속속 출현했다. 왕부지보다 10년 정도 늦게 태어난 당견(唐甄·1630~1704)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잠서(潛書)’에서 “진(秦) 이래 제왕은 모조리 다 도적들이었다”라고 쓰고 이런 주석을 달았다.

한 사람을 죽이고 옷감이며 양식을 빼앗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 그렇다면 천하 사람을 모조리 죽여 그 재물과 부를 차지하는 자를 도적이라 부르지 않고 뭐라 부를까.

도륙, 약탈, 음탕, 쾌락…

진나라 이전 하(夏)-상(商)-주(周)로 이어진 3대 국군(國君)은 어느 정도 추대의 성격이 있었다. 진 이후 황제라는 칭호가 등장하고, 황제의 강산(江山)은 싸워서, 또 대규모 약탈을 통해서 얻기에 이르렀으니 황제가 도적이 아니면 무엇인가라는 문제 제기였다. 그리고 이런 글이 덧붙었다.

천하가 평정되고 싸움은 없지만 전쟁에서 죽은 백성과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이 열에 대여섯이다. 해골을 거두지도 못했고, 곡소리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곤룡포를 입고 가마를 타고 대전에 앉아 축하의 인사를 받는다. 높은 궁궐, 넓은 정원에 처첩들은 귀해지고 자식들은 살이 찐다.

황종희(黃宗羲·1610~1695)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서 전제 황제는 천하에 큰 피해를 주는 존재라고 했다. 이어 강산을 빼앗는 이 ‘강도’들의 열악한 심리 상태를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천하를 미처 얻지 못했을 때는 천하 사람을 도륙하고 아들딸들을 찢어놓아 저 한 사람의 산업으로 삼으면서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진실로 자손을 위한 창업이다’라고 말한다. 강산을 얻고 나면 천하의 골수를 벗기고 자녀를 이별시켜 저 혼자만의 음탕과 쾌락을 받들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것은 내 산업의 배당금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황제는 도적만 못하다. 도적은 훔치고 죽이면서 늘 죄책감을 어느 정도 갖는다. 더러 부득이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황제는 천하의 백성을 죽이고 쥐어짜고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또 그렇게 해놓고도 태연자약이다. 이런 상태가 한 해, 두 해 계속되면 황제 된 자는 갈수록 교만해져 아무런 구속도 없고 법도 하늘도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

오랜 세월 억압당해온 백성들은 마지못해 억압을 견디다보니 노예 근성이 생겨 무슨 일이든 겁을 먹어 소심해지고, 구차하게 편안함만 추구하고, 진취적인 생각은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호 영향과 악순환이 2000년 넘게 지속됐으니 백성의 우매함, 빈곤함, 낙후의 진정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비판은 명 왕조가 이민족 만주족에게 멸망당하는 위기 속에서 비롯됐다.

王侯將相이 따로 있나

사마천은 3000년 중국 통사 ‘사기(史記)’를 효율적으로 저술하기 위해 ‘기전체(紀傳體)’라는 서술 체계를 창안했다. 주로 제왕들의 기록인 본기(本紀), 연표에 해당하는 표(表), 국가의 제도와 문물을 전문적으로 다룬 서(書), 제왕들을 보좌해 천하대세의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을 주로 다룬 세가(世家), 수많은 보통사람에 대한 기록인 열전(列傳)이 그것이다. 기전체는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을 따서 만들어낸 단어다.

사마천은 제후나 공신들의 기록인 세가 편에 특별한 두 사람을 포함시켰다. 춘추시대 유가 사상가로서 고대 문화를 집대성한 공자(孔子)와 진섭(陳涉)이란 인물이다. 평민 출신으로서 제후나 공신 반열에 오르지 못한 공자를 세가에 편입시킨 의도는 그의 문화적 업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유가사상이 훗날 국가의 배타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수용되면서 공자의 세가 편입을 둘러싼 시비는 그다지 없었다. 사실 사마천은 본기나 세가에 꼭 제왕과 제후만 들어가야 한다는 원칙은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본기에 항우도 넣고, 심지어 여태후(유방의 부인)까지 포함시켰다.

문제는 진섭이었다. 진섭이 누구인가. 신분상으로는 평민보다 못한 농민이고, 정치적으로는 최초의 통일왕조 진(秦)나라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농민 봉기군을 일으킨 인물이다. 진 왕조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역적이다.

진섭의 봉기는 진 왕조가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사마천은 진섭의 농민 봉기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사마천은 ‘진섭세가’를 지은 동기에 대해 이렇게 썼다.

걸(桀)과 주(紂)가 왕도를 잃자 탕(湯)왕과 무(武)왕이 일어났고, 주 왕실이 왕도를 잃자 ‘춘추’가 지어졌다. 진이 바른 정치를 잃자 진섭이 들고일어났다. 제후들도 따라서 난을 일으키니 바람과 구름이 몰아치듯 마침내 진을 멸망시켰다. 천하의 봉기는 진섭의 난으로부터 발단됐으므로 제18 ‘진섭세가’를 지었다.

사마천은 진섭의 봉기를 탕과 무왕의 역성(易姓)혁명에 비유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고, 그래서 당당히 세가에 편입시킨 것이다. 백성들을 위하지 못하는 정권이나 왕조는 무너져야 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사마천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더란 말이냐”는 진섭의 외침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누구든 부당한 권력에 대한 견제와 항거는 정당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21세기 제왕적 권력체제

‘좌전(左傳)’은 진나라 통일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책이다. 당시에는 훗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왕조체제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미 수백 년 전에 옛사람들은 훗날 벌어질 일을 우려한 것일까. ‘좌전’ 양공 14년 조항에 보면 진(晉)의 악사 사광(師曠)이 이런 말을 한다.

하늘이 백성을 사랑하시니 어찌 한 사람이 온 백성의 머리에 올라타고 마음대로 나쁜 짓을 하게 하겠는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왕조체제에서 제왕의 수중에 있는 최종결정권, 최고권력은 그것이 주는 유혹의 힘이 너무 컸다. 왕궁 밖에서는 야심가들이 제왕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왕궁 안에서는 소인배들이 제왕 주변을 맴돌며 호시탐탐 권력을 탐했다. 다른 점이라면 야심가들의 쟁탈 방식은 목숨을 건 적나라한 싸움이고, 궁중 소인배들의 쟁탈 방식은 음모와 간계를 동반한 암투라는 것이다.

야심가들의 목표는 제왕 자리고, 궁중 소인배들의 목표는 제왕의 실권 즉, ‘최종결정권’이다. 그러니 소인배는 제왕이, 제왕은 소인배가 필요했다. 어떤 때는 소인배가 제왕을 우롱했고, 어떤 때는 제왕이 소인배들을 우롱했다. 하지만 정작 우롱당한 것은 수많은 백성이다.

일각에서는 지금 우리의 권력체제를 ‘제왕적 권력체제’라고 일컫기도 한다. 부끄러운 말이다. 우리 정치가 아직 제왕적 권력체제를 청산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엄연히 국민이 직접 자기 손으로 최고권력자를 뽑는 민주제도 아래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권력자를 정점으로 하는 그 내부의 행태 또한 왕조체제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는 점이다. 권력자가 집권 후기로 접어들어 레임덕이 심하게 오거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는 이 체제를 견제할 마땅한 수단과 방법이 없다.

권력자가 지닌 바로 그 최종결정권에 빌붙어 최후의 순간까지 맹목적으로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소인배들이 권력자를 극력 옹호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 권력자를 따라다니며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에 패거리 정치문화가 뿌리 깊게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9족을 다 죽여도 못해?”

물론 옛 절대왕조 체제의 권력자 주변에 소인배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정한 권력에 맞서 분연히 목숨을 내던진 이도 적지 않다.

명나라 3대 황제 주체,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는 흔히 조선시대 수양대군(세조)과 비교되는 제왕이다. 그도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를 내몰고 황제 자리를 찬탈했다.

그의 찬탈에 방효유(方孝孺)라는 학자가 극렬하게 저항하다 무려 ‘9족’이 죽는 끔찍한 보복을 당했다. 당시 도성이 파괴될 때 궁중에 큰불이 났다. 황제 건문제(建文帝)가 화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방효유는 상복을 입고 통곡하면서 대전으로 들어갔다. 방효유는 주체에게 왜 쿠데타를 일으켰냐고 물었다.

주체 : 주공(周公)을 본받아 성왕(成王, 건문제를 주나라 성왕에 비유)을 보좌하려 했다.

방효유 : 그 성왕은 어디 계시오?

주체 : 안타깝게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죽었지.

방효유 : 그럼 왜 성왕의 아들을 세우지 않는 거요?

주체 : 나라는 연장자에게 의지해야지.

방효유 : 그럼 성왕의 동생은 뒀다 뭐 하려고요?

방효유의 마지막 추궁에 주체는 더는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주체는 보좌에서 내려와 “이건 우리 주씨 집안일이니 선생이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잖소?”라며 달래보려 했다. 그러고는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 다음 “천하에 알리는 조서는 선생이 쓰지 않으면 안 되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붓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주체를 향해 “목이 떨어져도 조서는 쓸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 말에 주체는 안색이 변하면서 “9족을 다 죽여도?”라고 위협했다. 방효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10족을 다 죽인다 해도 할 수 없소이다”라고 응수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주체는 방효유의 9족을 몰살했을 뿐 아니라 그의 문생들과 친구들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 일에 연루돼 죽은 사람만 873명에 달하고, 군대로 끌려간 사람은 1000명이 넘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주공에 자신을 비유하고 나선 주체의 이런 논리를 조선의 세조가 그대로 베꼈고, 사육신이 이를 비난했다.

방효유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분연히 나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았으나 주체는 결코 승리자가 아니었다. 주체는 방효유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의도를 분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결국 ‘역신 찬탈’이라는 오명을 역사에 영원히 남기게 됐다.

왕조체제에도 이런 지성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체제 자체가 아니라 지도자란 말인가. 아니면 그 지도자를 뽑는 백성들이 문제란 말인가. 또 한 사람의 ‘위기의 사상가’ 고염무(顧炎武·1613~1682)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 나라의 흥망은 백성들 책임이다.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창간사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매진 마당으로 인사드립니다. 상상마당이라고 하셔도 좋구요. 딱딱한 마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마 새로운 독자분들께서 이 글을 보실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일이 일어날지는 장담할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많고, 또 많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상국가 프로젝트가 시작한지 우리는 13년째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장해가고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것입니다.

허물없이 지내온 우리 친구들. 같이 새로운 발자취를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함깨였으며 앞으로도 함께일 것입니다. 이 블로그를 열면서 우리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가상세계에서 이 세월을 지냈지만. 우리가 이 세월을 돌아봤을 때, 이것은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고, 우리 삶의 증거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것을 믿으며, 이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이것이 우리에게 하는 말임을 믿으면서 나아갑시다. 우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네이버에서 카페를 시작할때, "한국말 잘하는 한국사람들이 우리를 마구마구 못살게 굴면 어떻하지?" 등의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둘러싸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서서히 지내고 보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하나의 세력으로 하나의 사회실험설을 꿋꿋히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가상국가를 위해 수많은 지식들을 공부했습니다. 국가는 사회의 결정체임을 믿고, 우리가 정치와 사회를 실험하고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완벽한 사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13년째 가상국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순수한 가상국가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 형, 정광현으로부터 시작한 이래로 13년째, 우리는 우리가 배운 교훈으로 이 언론을 차리고, 우리가 배운것을 기반으로 서로 협력하는 언론이 되려고 합니다. 다른 언론과는 규모상에서 밀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전문적이지도 않고, 그냥 아마추어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마추어이지만, 앞으로 이것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하나의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 길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엔 어둠이 도사리고 있고,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서로 믿고 나아갑시다.

 2013년 12월 22일 정 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