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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3일 수요일

독일통일-8 (외교전쟁 中)

일단 외교전을 설명하기 전에 베를린장벽 붕괴(1989.11.9) 이후 진행된 각국의 만남과 협상, 그리고 그 와중에 진행되었던 동독 내부의 격변적 상황을 알아보는게 독일통일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이 남북의 통일 과정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통철력도 제공해준다고 본다. 그래서 대강의 사건만 연표로 제시하겠다.

○ [89/11/13] 동독 ‘모드로우’ 총리 취임.
   – 서독에 ‘조약공동체’ 구성을 제의.
○ [89/11/20] 시위 격화. 라이프치히에서 50만 명 시위. 처음으로 ‘독일통일 구호’ 등장
○ [89/11/28] 콜,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목’ 발표
   – “동독에 민주제도 도입해서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물어라”고 요구
○ [89/12/01] 동독, 콜의 ’10개항목’ 수용
   - 동독헌법 개정. 공산당 1당독재 조항 삭제

○ [89/12/07] 동독, 당 간부 및 재야세력으로 구성된 ‘중앙 원탁회의’
   - ”1990.5.6 에 ‘자유선거’를 실시한다”고 합의
○ [89/12/12] 미국 베이커 국무장관 발표
   -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조건으로 독일통일을 지지한다.”
○ [89/12/19] ‘콜-모드로우’ 회동.
   – ‘조약공동체’ 구성에 합의.
   – 콜은 동독에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동독 군중들에게 ‘나의 목표는 통일’이라고 연설

○ [90/01/30] ’모드로우- 고르바초프’ 회동
   – 고르바초프,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표
○ [90/02/01] 모드로우, ’4단계 통일방안’과 통일독일의 ‘중립화’ 계획 발표.
   – ‘콜’은 통일독일의 ‘중립화’에 반대
○ [90/02/05] 동독 제 정당, 선거제휴를 위해 ‘독일연맹’ 결성
   – 독일연맹은 서독 기민당의 후원아래 결성되었으며, 신속한 통일을 공약
○ [90/02/06] 콜, ‘화폐통합’ 제안
○ [90/02/10] ‘콜-고르바초프’ 회동
○ [90/02/13] ‘콜-모드로우’ 회동.
   – 모드로우 : ‘조약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안하면서 100~150억 마르크 지원 요구
   – 콜 : (야당과 언론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모드로우 요청 거절.
   - 그러나 양측은 ‘화폐공동체’ 도입을 위한 협상개시에는 합의

○ [90/02/14] ’2+4회담’ 원칙에 합의
   – ’2+4′는 미,영,프, 소 및 동서독을 의미함
○ [90/02/15] 콜, 다시 한 번 “나의 목표는 가능한한 조속한 통일”이라고 발표
○ [90/02/21] 서독 내무장관-베이커 미국무장관 회동
   - “통일후 다른 영토의 독일편입은 없다”고 약속
○ [90/02/24] ‘콜-부시’ 회동
   – “통일독일의 ‘NATO 잔류’에 합의했다”
○ [90/03/18] 동독 ‘인민의회 선거’ 실시
   – 신속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48.1% 획득하여 승리(공산당 후신 ‘민주사회당’ 대패)
   – ‘바르샤바 조약기구’ 외무부장관들, 독일통일 인정
○ [90/03/20] 서독정부 발표.
   – “통화, 경제, 사회통합을 1990년 여름까지 완료하겠다”
○ [90/03/29] ‘콜-대처’ 회동

○ [90/04/05] 선출된 동독 의원들, 동독 “인민회의” 결성
   - 반공 변호사 ‘로타 드메지어’를 총리로 선출
○ [90/04/06]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 발표.
   – “통일독일의 NATO잔류에 반대한다.”
○ [90/04/20] ‘부시-미테랑’ 회동 및 발표
   - ”미국과 프랑스는 독일통일에 합의했다.”
○ [90/04/29] 동서독 총리 발표.
   – “7/1부로 양국은 화폐, 경제, 사회를 통합한다”
○ [90/04/29] ’드메지어-고르바초프’ 회동
○ [90/05/02] 동서독 정부, ‘화폐통합’에 합의
○ [90/05/05] 제1차 ’2+4 회담’ 개최
○ [90/05/16] 베이커 미국무장관 모스크바 방문, 통일독일의 ‘NATO 가입’ 협의
○ [90/05/30] 미소 정상회담. 통일독일의 ‘NATO 잔류 문제’ 합의 실패
○ [90/06/08] ‘콜-부시’ 회동
○ [90/06/11] ’드메지어-부시’ 회동

○ [90/06/17] 동독의회 안건채택.
   – “동독국가를 해체하고 통일한다”
○ [90/06/20] 동서독 의회 결의.
   – “2+4합의에 따라 오더-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한다”
○ [90/07/01] ‘화폐, 경제, 사회통합조약’ 발효. 동서독간 분계선 폐지
○ [90/07/15] ‘콜-고르바초프’ 회동.
   – 통일독일의 ‘NATO잔류’에 합의
○ [90/08/22] 동독 인민회의 결정.
   – “10월 3일부로 서독으로 통합한다”
○ [90/08/31] 동서독, ’통일조약’ 가서명, 동서독 ‘국무회의’ 인준, 양독 ‘통일조약’에 서명
   – 서독기본법 제23조에 의거, 동독 6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하는 형식
○ [90/09/12] 제4차 ’2+4회담’.'독일문제 최종해결 조약’ 승인

○ [90/09/20] 동서독 의회.
   – ‘통일조약 비준안’ 가결
○ [90/09/24] 동독, ‘바르샤바 조약기구’ 공식 탈퇴
○ [90/10/01] 4대전승국 외무장관 회동 및 서명.
   – “10/3부터 ‘베를린과 전체독일에 대한 전승국의 권한과 책임의 효력을 정지한다”
○ [90/10/03] 독일통일 선포
○ [90/10/12] 독일 외무장관-소련대사. “소련군 기한부 주둔에 관한 조약” 서명
   – “소련군은 1994 말까지 철수한다.”
○ [90/11/14] 독일-폴란드. ’국경조약’ 서명
   – “‘오더-나이세 선’이 양국의 국경선이다.”

이는 하나하나가 대단히 복잡하고 중요한 사건과 협상과 결정이라고 할 정도로 격변의 연속이었다. 하나하나마다 치밀한 준비가 산더미같이 필요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위에서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간단한 ’화폐통합’이란 단어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협상과 준비가 필요했을까?

저런 격변의 연속 속에 각국은 외교전쟁을 했다.

나는 독일통일과 관련하여 각국의 무수한 만남과 전략과 배신과 협력, 그리고 콜이 얼마나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했는지를 기술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당시 각국의 이해관계와 대략적인 전략, 그리고 그 결과만 기술하겠다.

먼저 프랑스.

프랑스는 독일통일을 가장 바라지 않는 나라일 것이다. 과거 100년 동안 독일로부터 세 번이나 침공을 당해(프로이센 전쟁 및 1,2차세계대전) 개피를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베르린장벽 붕괴 후 콜이 “독일인은 자결권을 가졌다”고 선언하자,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은  “고르바초프 입지를 약화시키고 복잡한 영토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며 콜을 비난했다. 콜이 ’10개항목’을 발표하자 또 다시 “경솔한 기습공격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테랑은 1989.12.6. 고르바초프와 만나서는 ”유럽의 안정과 평화는 동서독이 존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의견일치를 보았고, 12.21. 동독 ‘모드로우’ 총리와 만나서는 ”경제발전을 위해 프랑스가 적극 투자하겠다(그러니 서독에 병합되지 마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미테랑은 또한 콜에게 ”대처 영국 총리를 조심하라”고 이간질을 하면서도, ‘대처’에게는 “독일의 부활을 경고”하는 등 2중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다음은 영국.

영국은 통일독일이 유럽통합을 촉진시켜,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영국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에서 큰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을 견제하는 입장이었으니, 속으로는 프랑스보다 독일통일을 더 반대했다.

영국의 기본입장은 ‘가능한 한 독일통일을 늦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를린장벽 붕괴 전후 시기부터 독일통일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한편으로는 독일통일이 급속히 진행된다면 NATO, EC, 헬싱키선언 서명국(35개국) 등 온갖 나라들을 끌어들여 독일통일을 논의하게 만듦으로써,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는 전략도 수립했다.(이는 소련의 전략이기도 했다).

‘대처’는 고르바초프와 만나 “독일통일에는 독일 주변국들의 희망과 이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어느 서방국가도 동독 내정에 개입하거나 동독과 소련의 안보를 위협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심지어 대처는 소련군의 동독 주둔을 원하기도 했다.

2017년 5월 1일 월요일

독일통일-7 (외교전쟁 上)

1989.11.9.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이 때부터 통일을 선언하는 이듬해 10월 3일까지 약 11개월 동안 동서독을 비롯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수반들과 관리들은 각자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가 무수히 만났고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이 6개국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6각 줄다리기’를 했다. 각자 합종연횡을 했고, 교묘한 전략을 썼으며, 겉과 속이 다른 말로 상대를 속였다. 그 와중에 동독에서는 데모와 체제 급변이 진행되었으니, 그야말로 카오스의 연속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잡은 사람이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이었다.
콜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된지 20일도 안된 1989년 11월 28일 “유럽과 독일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10개 항목(이하 ’10개항목’)”이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통일방안’을 발표함으로써 통일의지를 분명히 했다.

콜의 제안은 ‘서독기본법’에 엄연히 살아있는 통일관련 조항에 근거했다. 서독기본법은 통일을 헌법상의 명제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서독의 정치인들은 이전 회에서 밝혔듯이, 독일민족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 등 여러가지 이유로 통일을 입에 담지 않았었다. 그런데 콜이 ’10개항목’을 발표함으로써 통일의 이니시어티브를 쥐었다.

’10개항목’은 동독 ‘모드로우’ 총리의 조약공동체(이게 ‘연방제 통일안’인 것 같다) 제의와 지원요청을 거절하는 형식이었지만, 콜은 통일과 관련해 양독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동독에 ‘민주적인 합법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절대적인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다. 콜은 이렇게 요구했다.

○ 동독에 대한 지원은, ’동독 정치,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전환이 동독에 의하여 확정적으로 수락되고, 불가역적으로 시행되는 경우’에 한정된다.
○ 여기서 불가역적이란 동독 지도부가 동독의 ‘헌법개정’과 새로운 ‘선거법의 제정에  합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 동독은, 무소속은 물론 ‘비사회주의적’ 정당들의 참가가 보장되는 ‘자유·평등·비밀선거’를 실시하라.
○ 동독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해야 하며, 우리가 요구하는 ‘헌법적 조건’은, 무엇보다도 ‘정치범죄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고, 그 결과 ‘모든 정치범을 즉각적으로 석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동독에 민주제도를 도입해서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물어라”는 요구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말이다.

풍전등화의 동독은 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독이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통일에 대해 주민투표를 실시했던 것이고, 그 최종결과가 독일통일인 것이다.

사실 난마처럼 얼킨 주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고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콜’은 회고록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1989년 통일의 길에 나섰을 때만 해도 우리는 마치 늪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무릎까지 물속에 빠져 있었고 시야는 안개에 가로막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은 오직 하나, 그런 상황에서도 어딘가에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독일 ‘슈피겔지’는 이 때의 외교전쟁을 포커게임이나 체스게임에 비유했다. 이 게임의 대표 선수는 각국 정상들이었지만 외교관, 법률가, 정치인, 군인 등 수백 명의 전문가들도 자국의 이익을 위한 외교전에 투입되었다.

이 전쟁에서의 최대 승자는 ‘헬무트 콜’이었다. 그는 미국만이 독일통일을 찬성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콜은 처음부터 미국의 요구조건(통일독일의 NATO 잔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미국을 이용하여 주변국을 설득했다.

나중에 버티다 못한 소련이 “NATO를 탈퇴(중립화)하면 독일통일에 동의하겠다”는 제안까지 했지만 콜은 거부했다. 그는 통일 전 10개월 동안에만 부시와 8번, 미테랑과 10번, 고르바초프와 4번을 만났다.

2017년 4월 25일 화요일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동아시아에 대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와의 인터뷰


■ 영토 야심과 맞물린 중국 민족주의 확산에 한·일 공동 대처해야
■ 북한 핵무기 절대 포기하지 않아… 6자회담 무용지물 될 것
■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은 취지만 좋을 뿐 실체 없어
■ 자본주의 양극화 폐해는 민주주의 정치체제 통해 극복 가능하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동아시아 민족주의가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하며 다자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한일간 관계 회복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는 나라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2008년 이후 공세적 외교 정책으로 전환했다. 중국의 부상을 꼭 위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큰 도전이다. 이해가 걸린 국가들 간에 함께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63)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동아시아에서 날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중국의 부상(浮上)에 역내 국가들이 경각심을 갖고 대처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중국의 남중국해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분쟁은 경제적, 법적 다툼이 아니라 민족주의 발흥에 따른 영토분쟁이라고 규정했다. 그 연장선에서 북한 체제가 취약성을 드러내며 붕괴하더라도 중국의 개입 가능성 때문에 남북 통일이 여의치 않을 거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미래 정치학자이자 역사철학자인 후쿠야마는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한 1989년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목받았다. 1992년에 이 논문을 바탕으로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을 출간했다. 공산권이 몰락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아 출간 동시에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키며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출간됐다. 이후에도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으로 세계적인 논객의 자리를 굳혀왔다. 월간중앙은 5월 6일 서울에서 그를 만나 동북아 민족주의 확산, 한일 간 역사 갈등, 북핵 문제 등 한국의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한국은 얼마 만에 다시 찾은 것인가?

“2년 전에 방문했다. 현재 ‘미국 민주주의 재단(The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NED는 전 세계의 민주주의 운동 확산, 시민사회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한다. 올 11월 서울에서 총회가 열린다. 민주주의운동 확산에 주력하는 이 기관에 대한 이해도 제고와 총회의 취지를 알리고자 방문했다.”

5월 6일 중앙일보-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포럼에서 특별 연사를 맡아 동아시아 다자주의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어떤 다자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나?

“많은 영역에서 다자주의가 필요하다. 경제 부분은 변화가 오고 있다. 중국이 경제분야에서 AIIB(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좋다고 본다. 이는 중국이 추구하는 동아시아 다자주의적 접근 방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안보 분야에서 중국은 전혀 다른 정책을 구사한다. 다자주의가 아닌 양자 관계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중국은 아시아 영토 문제도 경제 문제와 마찬가지로 다자주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동아시아 민족주의 고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적이 있는데?

“한·중·일 모두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시기인데다 서로를 자극하는 바람에 상황은 꼬여만 간다. 일본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아베 일본 총리만 해도 그렇다.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20세기 역사관을 가진 그가 하는 말에 한국과 중국은 반발하고, 또 일본은 계속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식으로 동북아 정세가 악화된다.”

강력한 미·일 동맹 추구, 보수주의적 국가 운영, 과거 역사에 대한 불철저한 반성으로 대변되는 아베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겠나?

“내가 아베였다면 위안부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사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회피함으로써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가 더 불편해졌다. 역대 일본 정부가 밝힌 사죄의 입장을 유지하고 수정하지 않는 게 일본 이익에 부합한다. 최근 체결된 미·일 간 신(新)방위협정 합의는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중요한 성과다. 하지만 아베의 과거 역사에 대한 해석은 동의할 수 없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나?

“중국은 꾸준히 영토 분쟁을 일으켰다. 중국은 2008년 이후 외교 정책이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부상을 꼭 위협으로만 볼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큰 도전이 될 것이란 사실은 확실하다. 중국은 분명히 영토적 야심을 강화할 것이다. 이해가 걸린 나라들이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중국은 계속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중국이 동중국해에서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것처럼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올 수도 있다. 남중국해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분쟁은 그 성격이 법적이거나 경제 자원을 둘러싼 분쟁이 아니다. 경제 관점에서만 보면, 실제 군사작전을 밀어붙일 합리적인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의 급부상과 중국 민주주의의 장래를 점쳐본다면?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 속도는 앞으로 점차 둔화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엄청나게 빨랐지만 그 속도를 유지할 수 없다. 6.5~7%의 성장률로 둔화됐다. 향후 몇 년간은 성장이 더딜 것이다. 중국식 거버넌스는 1978년 이후 매우 인상적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점들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중국식 성장 모델은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법치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기에 성장에 필요한 동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치는 시진핑 체제 아래에서 더 권위적으로 변했고 시민의 공론장인 인터넷의 자유도 줄었다. 이런 체제에서 부패를 척결하는 모습은 좋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다지는 결과만 낳는다. 공산당 지도부가 계속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AIIB가 중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줄까?

“AIIB가 금융 분야에서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의 성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지는 불확실하다. 중국은 자국 내 인프라 역량을 구축하려 하지만 그 성장 속도는 둔화될 것이고 수요 또한 감소할 수도 있다. 이 은행을 설립함으로써 중국 내부가 아닌 중국 밖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으려 들지도 모른다.”

5월 6일자 <중앙일보> 1면에서는 ‘한국 외교의 활로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전문가(24명), 일반인(1천 명) 설문조사 결과가 실렸다. 전문가들은 또 미·중·일·러 주변 4강과 한국의 정상 중국익을 챙기는 실리 외교를 가장 잘하는 지도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17명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꼽았다. 당신은 누구를 택하겠나?

“지금 언급한 국가 중에 정치적으로 잘하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진핑을 가장 잘하는 지도자로 뽑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교적으로 중국은 너무 공격적이고 동남아의 많은 국가에게 소외감을 안긴다. 일본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 시진핑이 외교를 잘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시진핑의 외교 정책과 통치 스타일을 덩샤오핑, 후진타오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중국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리더들의 외교 전략의 차이를 말하기는 어렵다. 상대적으로 덩샤오핑 때는 저개발 국가였기 때문에 큰 변화가 필요해서 경제개발에 많은 집중을 했다. 후진타오 시절엔 상황이 호전되면서 2008년부터 영토 문제에 손대게 됐다.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영토 분쟁을 이어갈 뿐이라고 본다.”

미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의 성과를 평가한다면?

“처음에 미국이 아시아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정책이 만들어진 취지는 좋았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오바마의 외교 정책에 대한 주요 연설 중 아시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게 그 방증이다. 그는 ‘회귀’라는 것을 이제 TPP협정으로밖에 살리지 못한다고 보고 있고, 그마저도 FTA 비준으로 이어질지도 불투명하다. 아시아로의 회귀는 아직 실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 이후의 리버럴리즘 미래를 어떻게 보나? 공화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게 없을 거라고 하던데?

“누가 선출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정치 체제라는 것이 언제나 의사결정을 방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돼도 의사 결정은 계속 지체될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인구 구성 측면에서 유리하다. 수적으로 보았을 때 민주당 지지자들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 지지층에는 히스패닉 계가 많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는 줄어들고 있다.”

“아직은 자유민주주의 대신할 체제 없어”

IS의 과격행동 등 여전히 <문명의 충돌> 논리가 유효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후쿠야마 교수는 “지하드나 IS와 같은 과격단체는 소수에 불과할 뿐 무슬림 국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고 볼 수 없다”며 고 새뮤엘 헌팅턴 교수의 논리를 비판했다.

1989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역사의 종언>에서 후쿠야마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틀렸고,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는 보다 앞선 사회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26년 동안 이 논제는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에 올랐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목소리가 높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언’의 논제는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의 다른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이 논제가 맞다고 본다. 앞으로 50년 후 유럽·미국·한국이 지금의 민주정부 체제를 유지할지 모르지만 중국의 권위주의, 독재체제는 변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정치체제는 안정적이지 않다. 중국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지속할 수 없는 체제를 갖고 있다. 특히 다른 나라들이 중국 모델을 채택하는 건 더 어렵다.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체제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외에 다른 대안은 여전히 찾기 어렵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금융위기로 논제가 틀렸다는 비판이 거세졌었다.

“그 관점에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자본주의는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한데 미국이나 영국의 금융 규제로 발생한 위기였다. 2008년 금융위기는 잘못된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경제적 양극화 심화가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주장과 논리(토마 피케티 등)가 광범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

“꼭 그렇게 불가피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성공적인 민주주의 국가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치적 수단을 가진다. 복지 국가에는 가난을 구제하는, 임금체계 같은 재분배 시스템이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양극화 문제를 안고는 있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민주주의와 연관돼 있어 이런 자정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경제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한 피케티의 처방, 즉 세제 개혁의 정책적 효용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할 수 있나?

“모든 국가는 부의 재분배를 위해서 부유층에 세금을 매기고 있다. 미국과 같은 경우도 굉장히 심한 누진세가 존재한다. 피케티가 제안하는 부유세 75%는 너무 과하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 돈 벌고자 하는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수니파 급진 세력 ‘이슬람국가(IS)’의 과격성과 IS 한국인 가담 등을 보면 ‘문명의 충돌’이란 고(故)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한 개념 아닌가?

“무슬림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을 보면 헌팅턴 교수의 문명 충돌에 대한 성찰은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중국·일본 등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이들은 서로를 하나의 아시아 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국가로 정체성을 판단하듯 국가는 중요한 단위로 남아 있다. 중동 국가들도 그렇다. 지하드나 IS와 같은 과격단체는 소수에 불과할 뿐 무슬림 국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문화가 충돌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논리다.”

후쿠야마 교수는 미국 정치제도가 총체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쇠퇴의 길을 가고 있다며 지난해 발간한 <정치 질서와 정치의 쇠퇴(Political Order and Political Decay)>에서 기능부전에 빠진 미국 제도를 비판했다. 그는 미국의 분권시스템을 지적하며 “지적인 경직성과 기득권층의 반(反)개혁적 행태로 미국 정치의 자기 수정기능이 정지됐다”라고 진단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 ‘거부권 정치’가 정치 마비시켜

미국의 정치제도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유럽에 견줘 극찬해왔던 모델이다. 어떤 점에서 무너진(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가?

“미국의 헌법은 토크빌이 말했던 것처럼 독재를 예방하는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의 목표가 있다. 하지만 미국 시스템이 ‘견제와 균형’을 벗어나 서로의 발목을 잡는 ‘거부권 정치(vetocracy)’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기 때문에 어떤 긍정적 결과에 도달하는 걸 저해한다. 국가적 난제에 대한 결정이 지연된다는 게 미국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시민의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과 정치제도의 문제들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전반적인 정치의 기능장애 현상이 극에 달했다. 예산, 세금, 이민 부분에서 의회가 결정을 내리는데 힘들게 한다.”

그 문제점을 미국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도 인식하고 있나?

“아주 오래전부터 인식해왔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자기들의 이익에만 집중하기에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정당과 이익단체는 정치자금과 영향력을 포기하려는 의향이 없다. 이슈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당 체제 때문에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익집단들의 양극화는 더 심각하다.”

외부의 충격만이 진정한 개혁을 강제한다고 했다. 외부의 충격이라 함은?

“아예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미국 제도를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지금 그런 합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외부의 충격은 일반적으로 국가 개혁을 위해서는 금융위기나 전쟁 같은 시스템을 흔들 만한 쇼크가 필요한데 지금은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2008 금융위기가 외부의 충격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많은 원인을 가진 복잡한 위기였다. 외부 충격이라 함은, 미국 시장에 유입돼 물가를 상승시킨 유동성이 특히 아시아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금융위기에 대해 외부 충격이 크다는 시각도 있지만, 내부의 요인도 있었다. 미국의 규제당국이 과도하고 위험한 대출을 구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발달과정에서 이런 분권 시스템의 기능 저하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이익집단 내의 파워 엘리트 그룹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부 시스템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첫 번째 책〈정치 질서의 기원〉에서도 중국의 한 왕조, 이슬람 오토만 왕조, 터키나 프랑스의 과거 정권에 대해서 언급했다. 국가의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권의 성격에 따라 시스템이 후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민주주의 체제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질적 평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질적 수준은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높일 수 있는 것인가?

“민주주의 체제를 지속하게 하는 힘은 경제 성장, 교육 기회 증진, 사회 인프라 확충 등의 서비스를 제공할 정치 지배구조를 만들 때 가능하다. 국가의 정부는 이런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역량을 가져야 하는 바, 부패 척결은 민주화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민주화를 어떻게 이루는가는 잘 알지만 부패 척결 역량을 갖추는 데는 서툴다. 미국이 정치 제도의 현대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정착시켰지만 부패 척결은 아직 현대화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도 독재권력을 제압하는 데 초점을 둘 뿐 효율적 국가관리에는 무능을 드러낸다. 내부 이념투쟁에만 지나치게 몰입한 대가라고 본다.”

“북한은 핵 포기 절대 안 해”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좌표를 짚는다면?

“1987년 이후 한국은 실로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정치에서도 경쟁 원리가 활발하게 작동한다. 언론의 자유나 공론의 장도 잘 형성돼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한국은 민주주의는 높은 수준을 구가한다. 한국의 문화가 변천 과정에 있고, (가부장적) 유교 문화가 일본에서보다 더 큰 도전을 받는 상황이다. 민주주의 측면에서 일본보다 한국이 더 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95년에 발간한 <신뢰(TRUST)>에서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원간의 상호신뢰가 낮은 것으로 비판한 바 있다. 지금은 어떻게 보고 있나?

“조금 복잡한 문제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사회의 성격이 바뀌게 됐고 실제 시민사회가 굉장히 발달했다. 예를 들어 미국 같이 한국에서도 교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하고 관계를 맺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인 양극화와 지역 갈등은 사회구성원 간의 상호 신뢰를 저해한다.”

후쿠야마 교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1기 때만 해도 네오콘의 대표주자로 분류됐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거치는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간 이력부터가 그렇다. 자본주의의 승리가 헤겔식 역사 전개를 종식시켰다고 역설한 ‘역사의 종언’이 네오콘들의 사상적 주춧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중동에 민주주의를 확산시켜 한다고 설파했었다.

하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전후해 네오콘 비판론으로 돌아섰다. 부시 행정부의 선제공격론을 비난하면서 네오콘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후쿠야마 교수는 당시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노선을 달리한 이유에 대해 “이라크 전쟁은 큰 실수였고 그 이후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해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네오콘의 대안으로 ‘윌슨주의 국제적 협조 노선’을 제시했던 그는 6자회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하드 파워를 앞세운 네오콘의 대안으로 윌슨주의 국제적 협조 노선을 제시했었다. 소프트 파워는 당면과제 해결에 유용한가?

“소프트 파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다른 국가에 영향력을 미치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다른 국가에 경제 발전과 함께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그 핵심은 군사행동을 외교 정책의 중심에 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소프트 파워를 통해 미국 영향력을 행사하고 민주화와 인권을 촉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북한 관련해 가능한 시나리오는 정권교체”

북핵 문제를 푸는 도구로서의 6자회담에 대해 후쿠야마 교수는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이라며 “북한은 북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데 관심이 없고 중국도 북한을 설득하거나 강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북아의 현존하는 가장 큰 이슈는 여전히 북핵이다. 이 문제를 푸는 도구로서의 6자 회담은 여전히 유효할까?

“아니다. (6자회담은)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이다. 북한은 북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데 관심이 없고, 중국도 북한을 설득하거나 강제하지 않을 것이다. 핵은 북한이 가진 유일한 자산이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핵’을 사용한다. 북한은 6자회담으로 한국·미국·국제사회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얻어냈을 뿐이다. 이게 없다면 수출도 못하고 통상도 못하는데 왜 포기를 하겠나?”

전 세계 유일의 분단 지역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 100년 후 한반도의 미래나 변모상에 대해 언급한다면?

“북한 체제는 취약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붕괴하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럴 때 통일 가능성이 생길 것이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이유는 중국의 개입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남과 북이 오랫동안 분단돼 있었다는 점도 순조로운 통일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세계사적 흐름에서 볼 때 통합을 지향하는 남한과 북한의 당국자들이 갖춰야 할 식견과 철학, 원칙이 있다면 어떤 게 있나?

“두 나라의 정치 체제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쉽게 이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고 남한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려볼 수 있는 시나리오는 북한의 정권교체다.”

최근 연이은 중·일, 미·일 정상회담은 한국 외교에 상당한 충격을 줬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러브콜을 받는다고 안주하는 사이, 아베 총리는 미·중 모두와 손을 잡는 모양새다.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평가와 조언을 한다면?

“우선 한국과 일본은 관계 회복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일이 서로 싸운다고 득이 될 게 없고 장기적으로 보면 공동의 이익이 달린 문제도 영향을 받는다. 물론 중국의 도전은 장기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안이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 문제로 감정의 골이 깊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든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는 나라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독일과 폴란드의 예를 봐야 한다. 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는 관계가 아주 불편했지만 양측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교과서 기술에 합의를 봤다. 이 부분을 일본과 주변국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하나의 방안이라고 본다.”

글=박지현 월간중앙 기자
사진=지미연 객원기자

[출처: 중앙일보] 프란시스 후쿠야마 “북한 붕괴시 중국 개입으로 통일 쉽지 않아”

2017년 4월 17일 월요일

전술핵 재배치 서둘러야 하는 까닭

오랜 시간을 끌 것 같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가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와 김정남 피살 사건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금까지 ‘주류에서 벗어난 의견’까지 포함한 여러 가지 정책 방안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와는 확연히 다른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성격을 확실히 말해주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전술핵 재배치다. 지금까지 금기시되어 왔던 전술핵 재배치를 미국이 고려한다는 것은 북한의 도전이 그만큼 심각하므로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강력한 군사력에 기초한 대북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술핵 재배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전술핵을 배치하면 1991년 남북비핵화공동선언을 파기하는 것이고,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것이며, 핵전쟁의 가능성이 증가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먼저 1991년 남북비핵화공동선언은 북한의 핵개발로 인해 사문화된 지 오래다. 우리가 아무리 비핵화공동선언을 준수한다고 해서 우리의 선의에 보답하여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전술핵을 재배치한다고 하여 과연 핵전쟁의 가능성이 증가할까? 한반도에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가져옴으로써 오히려 전쟁과 도발의 가능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

전술핵 재배치가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기보다는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여 실질적인 비핵화로의 진전을 가져올 수 있다. 북한은 비핵화의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한미 연합 군사연습 중지, 한미동맹 파기, 북-미 평화협정 체결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다. 협상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북한 스스로 요구 조건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전술핵 재배치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한반도에 재배치된 미국의 전술핵 철수와 북한의 비핵화를 맞바꾸는 협상을 하면 된다. 핵군축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상징적 수준의 전술핵 배치만으로는 안 된다. 최소한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수에 버금가는 수준의 전술핵이 있어야 한다.

미국 내에서도 전술핵 배치에 대해 반대하는 이가 많다. ‘핵 없는 세상(nuclear free world)’을 주장했던 오바마 정부 시절 확장억지와 관련된 한미 간 협의에서 미국은 핵무기 문제는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핵무기에 관한 논의를 회피해 왔다. 확장억지와 관련해 미국은 첨단 재래식 무기에 의존한 ‘역외억지(off-shore deterrence)’를 강조하고, 핵무기는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억지를 위한 것이므로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극단적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다. 또한 핵무기의 배치와 사용 여부를 모호하게 유지함으로써 상대방을 교란하는 ‘핵 모호성(nuclear ambiguity)’을 유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이러한 논리는 북한이 핵을 사용하더라도 미국은 핵이 아닌 재래식 무기에 의존한 보복만을 할 것이라는 북한의 오판을 불러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미국의 대(對)한국 안보방위 공약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한다.

북한이 핵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핵 사용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미군이 가지고 있는 전략폭격기, 첨단 전투기, 핵잠수함 같은 전략 자산의 전개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전략 자산들이 핵탄두를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북한으로 하여금 확실히 알게 함으로써 대북억지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전술핵 재배치를 통해 우리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효과적으로 북한의 군사적 모험을 억지할 수 있다.

전술핵 재배치는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다. 기술적 문제도 수반되고 전략•전술의 변화도 요구되며, 재정적 부담도 발생한다. 그런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군사적 모험을 억지하고 비핵화로 나오도록 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 기간 동안 이 대안은 미국 정부에 의해 거부돼 왔다. 연속된 북한의 도발과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 재검토는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 불가 입장이 바뀌도록 하는 좋은 기회이므로 실기해서는 안 된다.

http://www.asaninst.org/contents/%EC%A0%84%EC%88%A0%ED%95%B5-%EC%9E%AC%EB%B0%B0%EC%B9%98-%EC%84%9C%EB%91%98%EB%9F%AC%EC%95%BC-%ED%95%98%EB%8A%94-%EA%B9%8C%EB%8B%AD/

2017년 4월 13일 목요일

[이슈브리핑] 향후 5년의 대북정책을 위한 제언

논문의 전문은 해당 링크를 참조 바랍니다.

http://www.eai.or.kr/data/bbs/kor_report/201703209434960.pdf


[편집자 주]

EAI는 2017년을 맞아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주요 이슈를 진단하고 바람직한 한국 외교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시고 라운드테이블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 일환으로 남북관계 및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본고는 남북관계 세션에서 논의된 사항을 바탕으로 서울대학교 김병연 교수가 대표집필 하였습니다. 북한문제는 언제나 한국의 외교안보적 고려에서 가장 우선순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 이후 남북관계는, 부침을 거듭하였지만 여전히 긴장과 갈등 상황을 호전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으로부터의 무력 위협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국제사회의 제재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으며, 경색된 남북관계를 타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적 방편도 구사하기 힘든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더구나 동북아의 안보 상황은 더더욱 어려워지고 역내 갈등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관리하고, 나아가 악화된 남북관계를 전환시키기 위한 방책은 한 순간에 마련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북한과 주변 정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정책을 마련하고 일관되게 추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북정책이 국내정치나 정쟁에 이용되지 않도록 탈정치화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제도화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외적인 합의와 공감 속에서 일관된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북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김정은 체제는 단기적으로는 안정돼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불안정한 체제이다...... 장성택과 백수십명의 고위급을 처형한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북한의 엘리트 그룹의 충성을 강제하는 데 효과적이다. 따라서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김정은이 권력의 정점이 되어 대내외 핵심 정책을 관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북한 체제가 중장기적으로 불안정한 중요한 이유는 북한 경제의 시장화(marketization)에 있다...... 사회주의 국가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밑으로부터의 시장화”는 김정은에게는 잠재적 위협이다.

북한에게 있어 남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북한 핵문제가 미국과 중국이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되었고 이를 제어하는 힘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일단 미국을 대상으로 단번 승부를 걸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북한에 대한 외부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당분간 북한은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대북정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북정책의 정치화이다.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가 절반씩으로 나뉜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대북정책의 실효성보다 여론이나 표를 결집하기 위해 대북정책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이는 대북정책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동시에 그 다음 정부도 이전 정부와 다른 대북정책을 내세우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혹자는 “보수는 북한 붕괴의 꿈에, 진보는 햇볕의 꿈”에 살고 있다고 한다. 북한 정권이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쉽게 북한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는 보수, 남북이 협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김정은의 마음을 돌려야 하고 돌릴 수 있다고 믿는 진보가 있다면 이는 모두 몽상과 이념의 가냘픈 줄에 걸터앉아 있는 셈이다. 이 몽상과 이념은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향후 5년을 위한 정책 제언
1. 대북정책의 탈정치화를 선언하고 이를 제도화해야 한다.
2. 단기적으로는 제재에 집중하는 동시에 대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3.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의 시장화와 무역 개방도를 제고함으로써 북한이 스스로의 메커니즘에 의해 변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4. 미국과 중국에게 우리의 대북정책을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5. 국민들에게 북한의 실재와 북한 문제의 복잡성을 설명해야 한다.

2017년 3월 24일 금요일

변화를 꿈꾸는 북한 주민의 편지

글은 북한 체제를 바꾸고 싶지만 탈북을 선택하기엔 여러 모로 사정이 여의치 않는 북한 주민이 직접 써서 보내온 글입니다.

남쪽이나 외부 사람들이 보기엔 이색적일 수 있지만 글 내용 그대로 살려 게재합니다.

이 분이 보여준 용기를 평가하지는 못할 망정, 자기의 잣대로 훈계하고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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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시작한다>

이십여년전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로 하여 북조선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많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외부세계에서 그리고 우리 지도부에서 그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거대한 전변에 대처할줄 몰랐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것이다.

직장에 나가 무얼 해얄지 자신이 지금 무얼 하는지조차 의식못하고 있다가 조용히 굶어죽은 사람도 많다.

80년대 후반기 90년대초부터 북조선의 경제는 뚜렷한 하강선을 그었다. 그것은 그저 하강이 아니라 자유락하와 근사하였다.

날마다 과장된 보고서와 비현실적인 계획안들이 쏟아져나올 뿐이였다. 일명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주민들은 차차 현실에 적응되여갔다.

여기서 분명한것은 새로운 생존의 방식이 정부의 정책이나 법령 포고 등에 의하여 수립된것이 아니라는점이다. 지역적인간의 자연진화라고 보는것이 옳을 듯싶다.

사람들은 이전 제도와 질서에서 많은 허점들을 발견하였고 가장 최적의 방식을 찾아나갔다.
여기서 더욱 분명한것은 그 선택이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가 아닌점이다. 현실에 가장 최적인 쪽으로 자연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외부의 변화와 함께 내부에서 일어난 적응의 과정이라고 설명할수도 있겠지만 인의적으로 완전페쇄된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에서 외부의 영향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현재 외국에 와있거나 그전에 와본적있는 북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있지만 외부세계에서는 우리나라의 현 상황의 원인을 정권구조에 있다고 일치하게 말하고있다. 세습독재정치를 끝장내야만 한다고.

인간은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건 거의 비슷한 인체구조를 가졌다. 때문에 사고능력도 거의 비슷하다고 보는것이 옳다.

우리가 번역되지 않은 외국영화를 보면서 긴장감이나 기쁨과 슬픔, 인도주의적인 고상한 감정 등을 언어의 도움없이도 느낄수 있는것은 지적능력의 주요지수인 문화적소양의 공통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비슷한 사고능력을 가졌다는것은 곧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것이다.

그런데 우리 북조선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외부의 예측에 어긋나게 현재까지 자기들의 정권과 제도를 유지해가고있다.

외계의 표현을 빈다면 세뇌당한 북사람들은 리성적인 사고와 판단, 행동의 능력을 상실해선가. 아니면 너무 서서히 진행되여가고있어 모두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것인가?

1994년 7월 8일 이후 평양시 어느 거리에 삐라가 나붙은 일이 있었는데 주요내용은 세습독재를 끝장내고 민주주의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것이였다.

이후에도 이비슷한 사건들이 여러번 있었지만 결과는 주인공들의 비참한 종말로 끝났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내놓고 동감하는 사람은 없었다.

객관적인 평을 든다면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철저히 억제당하고있기때문일것이다.

현재 북조선에서는 정상적으로는 리해하기 힘든 매우 이상한 일들이 펼쳐지고있다.

조선예술영화 “심장에 남는 사람”에서 인민배우 유원준은 이렇게 말한다.

공장이 계획을 못하는데 어느집에서 밥 굶었단 소리도 없지 뉘집 아이가 학교에서 쫓겨났단 일도 없지 이게 이상한 일이 아닌가고.

북조선의 경제생활을 한마디로 보여주고있다. 즉 여기서는 기성의 경제법칙과는 다른 신비한 법칙이 지배하고있다.

오늘날 우리는 전혀 반대의 현실에 살고있다. 직장에 결근없이 출근하는데 먹을건 없고 생활비는 술 한병값밖에 안된다(물론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불법적인 수입에 의거생존한다.)

세금이 없다지만 각종 명목의 세부담이 사람들을 괴롭힌다. 가정을 유지할 능력이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없다는것을 외부세계사람들은 어떻게 리해할것인가.

외부세계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현 상황이 독재자와 그 정권에 있다고 보고 제재를 비롯한 각종 수단을 리용하여 그에 압박을 가하고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압박이 고스란히 그들이 동정하여마지 않는 때문에 자유와 권리를 찾아주고싶어하는(?) 북조선주민들에게 가해진다는데 있다.

그들은 또한 이렇게 호소한다. 불의를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고. 또 그럴만한 충분한 리유가 있다고.

그런데 왜 우리는 꼼짝안하고있는것일가.

이것이 현재 우리의 진화과정이다. 인간은 끝없이 진화한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래일도 그럴것이다.

혹시 우리는 현대사에 전례가 없는 신비한 국가에 살면서 특이한 진화의 길을 걷고있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가 겪고있는 이 모든 사태는 우리자신이 만들어낸것이다.

독재자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적당한 시기와 맞춤한 환경과 열광적인 추종자만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들속에서 생겨날수 있다.

오늘날 우리 간부들속에서 저런 아첨쟁이들이 문제야 는 사회 불안정의 원인을 가장 무난하게 떠밀수 있는 대명사로 되였다면 일반주민들이 흔히 말하는 가운데 간부들이 문제야 는 자신과 그리고 감히 비난할수 없는 수령의 과오를 가장 무난하게 덮어둘수 있는 방책이 되고있다.

왜 항상 비판적인 문제는 타인에게만 제기되는걸가. 문제는 사실 보다먼저 자신에게 있는게 아닐가.

우리는 객관의 목소리에 감히 맞장구는 고사하고 귀기울일수도 없게 되였는지 모른다. 오늘의 상황은 우리 자신이 창조한것이니까.

그리고 이 변태적인 진화가 본모습을 드러내며 극한으로 다가갈수록 깊은 생각에 절로 빠져들었는지 모른다. 다음번 진화의 길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하기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보단 남을 타매하기가 훨씬 쉬운법이다. 차라리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기보단 전혀 새로운 자신을 찾는것이 낫지 않을가.

우리는 정말 경이적인 기적우에서 어쩌면 남보다 훨씬 현명해졌는지 모른다. 남보다 먼저 평화와 번영이 함께 해야 한다는것을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는것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질문하는것이다. 만일 나(너)라면 어떻게 했을가?

어떤 계급과 시대의 결함을 꼬집어내여 온갖 불행의 화근으로 몰아 부시기 위해 단결하고 투쟁하던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것은 인간의 진화사에서 어느 시기를 대표하고있으며 성과와 함께 그에 못지 않은 많은 교훈들을 남기였다.

이제 또 혁명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심중해야 한다. 꼭 희생만이 신을 감동시킬수 있는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만물을 지배할수 있게 되였는가. 그것은 인간이 우선 자기를 지배할줄 알았기때문이다. 자기 의지를 조정하고 자신의 진화에 대해 영향을 발휘할 능력은 인간 누구에나 있다.

이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력사에 사로잡힐것이 아니라 새로운 력사를 창조하는 기쁨을 맛보아야 하잖을가?

나부터.

나부터 시작한다. 많은 개념들을 정리하고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많은 비판속에 자기를 내던져 많은 사람들과 논쟁하면서 나의 진화를 가장 최적에로 이끌어갈것이다.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29913

2017년 2월 26일 일요일

독일통일 -2 (동독의 사정)

2가지 중요한 사건의 ‘발생시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본문 뿐 아니라 앞으로 연재될 글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짜(1989.11.9)와 독일통일 날짜(1990.10.3)이다. 양자 간에는 약 11 개월의 차이가 난다.

첫 회가 나간 후, “동독을 북한에 그대로 대입하면 큰 오류를 범할 것”이란 의견이 있었다. 맞는 말씀이다. 그래서 동독과 북한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우선 동독이 북한과 얼마나 차이가 많았는지를 보자.

통일 전 동독은 어떤 상태였을까? 이걸 이해하는게 독일통일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1989.10월 이후 ‘라이프치히’ 등에서의 “대규모 시위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자.

간단히 표현하면, 통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만큼 동독은 안정된 상황이었다. 물론 겉모습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때문에 미래예측에 실패했다.

동독은 사회주의권에서는 가장 잘 살았고 최고의 복지국가였다.
공업력이 세계 10위권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래서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의 최전선이기도 했지만, ‘롤 모델’이기도 했다. 1989년 1인당 GDP가 9,700 불이었고, 그 이전 5년간의 경제성장률은 3.02%로 서독보다 높았다.

(물론 과장되었다. 그런데 이걸 믿고 서독은 통일비용을 적게 예상했다가 낭패했다. 예를 들어 막상 통일해보니, 한 푼도 없다던 외채가 200억 불이나 되어, 매년 총외화수입액 중 62%를 외채이자 갚는데 쓰고 있었다. 동독 내 국유재산을 팔아 통일비용을 조달하려고 했던 계획도, 동독이 빈 깡통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동독이 깡통계좌가 된 이유는, 1980년 이후 야심차게 추진했던 ‘전자 및 화학분야’ 투자의 실패, 그리고 경제성장률보다 훨씬 높게 연평균 7% 씩이나 증가하는 ‘복지지출’ 때문이었다. 이건 장기집권자 ‘호네커’가 서독과의 경쟁을 의식하여 무리한 복지를 시행했기 때문일 것이다(어느 나라든지 복지는 망국병이다).

반면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안정될 수 없었다.

우선 동독에는 조직적인 반체제 세력이 없었다. 통일 후 밝혀진 동독 비밀경찰(슈타지)의 자료에 따르면, 1989.6월 현재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은 160개 조직에 2,500 여명이었고, 그 중 핵심요원은 60여 명에 불과했다.

(반체제 인사는 생기는 족족 서독에 팔았다. 판매단가는 두(頭) 당 5,300만원. 동독은 베를린장벽 붕괴 전까지 34,000 명의 정치범과 그 가족 25만 명을 수출했다. 여담이지만 수출품으로 변신하기 위해 일부러 정치범이 된 동독주민도 있었고, 그와 반대로 동독정부는 일반 형사범을 정치범으로 둔갑시켜 수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끔 소규모 시위가 있었지만, 시위대의 요구사항은 ”여행자유 확대, 평화, 인권, 환경보호” 등으로 체제개혁과는 무관했다.

‘슈타지’ 규모도 대단해서 1,700만 명을 감시하기 위한 ‘슈타지’ 요원의 숫자가 예하 병력까지 포함해서 30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8,000만 명을 감시했던 나치의 게슈타포가 32,000 명이었음을 감안할 것). 주민 62 명 당 1 명 꼴로 슈타지 끄나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독에는 소련군이 38만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은 집권 후부터 “임금인상, 휴가연장, 주택공급, 여행자유 확대” 등의 정책을 펼쳐, 19년 동안이나 안정적으로 집권하고 있었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전인 1989.5월 선거에서는 공산당의 득표율이 98.85 %나 되었다.

외교적으로도 미,영 등 세계 134개국과 수교하고 있을 정도로 동독의 지위는 확고했다. 이런 체제 유지에 대한 자신감이 동독 지도부로 하여금 서독의 ‘햇볓’을 받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동독은 서독과 총 7 차례의 ‘동서독 정상회담’을 했고, 서독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76년 서독과 ‘우편,통신협정’을 체결한 이후, 연간 2 억통의 서신, 3,600만 건의 소포가 교환되었고, 1,500여 회선의 전화가 개통되어, 거의 제한 없는 교류가 이루어졌다.

상호방문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동독인의 서독방문은 연간 100만 명 이상, 88년에는 675만 명이었다. 난민도 많아서 1989년까지 서독에 정착한 동독인은 480만 명이었다(불법탈출로 인해 국경에서 사살된 동독인은 총 197명).

동독인들은 1971년 이후 서독 TV도 마음껏 시청할 수 있었다(공식허용은 1980년). 1985년 기준으로 서독TV 시청가능한 인구 중 94 %가 거의 매일 서독TV를 시청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예상 외로 인권상황도 매우 좋았다.

동독은 1973년 이후 ‘유엔인권협약’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가입하여, 동 규범을 지켜야 했다. CSCE 의정서에는 ‘인권, 기본적 자유, 인적접촉 및 여행자유를 의무화’하고 있으며, 이 부분에 관한 한 ’내정 불간섭 원칙’은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서독정부는 인권, 여행 등에 관한 한 동독에게 양보한 적이 없었다. 아예 서독연방 헌법재판소는 1973년에 “인권문제를 양보하는 어떠한 합의도 해서는 안된다”고 판결해버렸다.)

이런 노력의 결과, 동독정부는 1984~85년 경에는 국경에 설치됐던 ’자동발사 장치’를 완전히, 그리고 지뢰는 상당량 철거했다. 1987년도에는 아예 사형제도까지 폐지했다!

쉽게 말해 동서독 간에는 언론, 방송, 학술, 과학, 기술, 환경, 보건, 문화, 스포츠, 청소년, 종교분야에 걸쳐 폭넓은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고, 동독은 꽤 유연한 체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상의 온건한 동독의 대국민 정책은, 상당부분 서독의 각종 지원(특히 ‘빌리 브란트’ 총리의 ‘뉴동방정책’)에 대한 대가로 이루어진 면이 있어, 종합적으로 볼 때 이런 교류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고 평가된다.

그래서 동독 입장에서는 서독이 소련 다음의 제2교역대상이 되었고, 서독과의 교역이 국민총생산(GNP)의 3%, 대서방 교역의 40~50%를 차지하게 되어, 서독 없으면 동독이 망할 정도가 되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독의 교회다.
통일 직전 동독에는 신구교를 합쳐 8,000여개의 교회와 500여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으며, 동서독간에는 종교 교류가 활발했다. 이렇게 많은 교회에 잠재적인 반체제 세력이 은신하고 있었던 것도 1989년의 대규모적인 시위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독 주민들의 시위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주의 정신’과 ‘민주적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동독주민들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국가들이 갖고 있던 자유주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었고, 1919년~1933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선진적 민주제도를 경험한 바도 있었다.

이상이 베를린장벽 붕괴를 야기한 ‘동독 내부의 사정’이었는데, 북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2월 24일 금요일

독일통일-1 (통일의 일등공신)

한 10년쯤 전에 ‘서울대행정대학원 통일정책연구팀’이 발간한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남과 북은 한 민족이 아니다’라는 도발적인 말로 시작되는 그 책은 독일통일과 그 부작용을 강조한 책이었다.

그 책의 주장을 간단히 표현하면 ‘민족이라는 허상에 몰두하여 급속하게 하는 통일은 재앙이다’는 것이다. 그 책은 그런 증거을 상당히 많이 제시했다.

나는 그 책의 주장에 설득되기도 했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책은 지식인 특유의 비판적 시각 - 부작용만을 과장하는 형편 없는 책이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 책의 저자들은, 경부고속도로, 인천공항, KTX 터널, 4대강에 반대했거나 천안함, 광우뻥 루머에 일조한 지식인들처럼, 뭐든지 삐딱한 반대만 하는 사이비에 불과했다.

그 후 여러가지 글과 책을 읽으면서, 나는 독일통일이 그 책이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로 ‘대단히 성공한 역작’이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통일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통일이다. 전혀 피를 흘리지 않았고, 강대국들의 동의 하에 매우 단기간에, 매우 스무스하게 진행되었으며, 통일 후 독일은 더욱 강대, 부강해졌기 때문이다. 동독주민들도, 서독주민들도 행복해 한다. 역사상 어느 통일도 이처럼 완벽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다!

물론 독일은 통일 후 한때 헤매기는 했었다. 하지만 통일이라는 거대한 과업에서 그 정도는 새발의 피다. 그런데도 한국에는 독일통일의 부작용이 굉장히 과장되어 퍼졌다. 그런 인식 때문에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라는 책이 나왔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집단인식의 오류에 빠졌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동안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 정치인과 독일 학자들이, 독일통일 당시 독일통일을 반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당시 독일통일 주역들은 통일과정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너무 바빠 한국에 내방할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 햇볓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 붕괴 = 남한 재앙’이라는 관념을 심어주었던 사람들의 이미지 조작 때문이다.

나는 여러 번 말했듯이 책임 없이 마음껏 떠들 수 있는 “기자, 교수, 시민단체” (나는 이들을 ‘무책임3총사’라고 부른다)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책임을 느끼는 공무원들의 더듬거리는 말을 더욱 믿는다. 공무원들은 커다란 조직의 의견을 모아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할 줄 안다.

마침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이라는 독일통일 관련 최고의(?) 책을 읽었다.

저자 염돈재 박사는 공무원 출신이다. 국정원 해외담당인 1차장 출신에, 노태우 정부 때는 북방정책을 입안했으며(북방정책은 노태우의 큰 업적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숨가쁘게 통일이 진행 중인 1990.8월부터 3년간 주독일대사관 공사로 근무했던 전문가다.

직업과 전공의 특성상 그는 독일 현지에서 많은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런 흔적은 이 책 곳곳에 녹아있고, 저자의 직업, 경험, 통찰력, 성실함에 힘입어 그 내용과 주장에 신뢰가 갔다.

그의 책은 또한 중요한 주제별로 독일통일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천천히 관심 있는 주제별로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통일에 대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오늘은 일단 독일통일의 가장 큰 공로자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만 소개한다. 누가 가장 큰 공로자인가? 우선 후보들을 보자.

1.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 동유럽의 개혁개방을 선도. 동유럽 주민봉기시 무력진압의 근거였던 ‘브레즈네프 독트린’ 포기 및 무력진압 반대의사 표명. 2차대전 4대 전승국의 일원으로 독일통일 승인.

2. 동독주민 : 촛불혁명으로 동독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자유선거 때는 동독을 버리고 서독과의 통일을 선택.

3.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 신동방정책 추진. 동서독 관계 정상화 및 교류협력 증진하여 동서독간의 이질화 방지에 기여.

4.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 동독주민 시위 초반부터 독일통일 가능성을 예견하고 ‘헬무트 콜’ 서독총리의 통일정책 적극 지지. 영국, 소련, 프랑스 등 2차대전 4대 전승국에게 독일통일을 승인하도록 압박하여 성공시킴.

5.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 : 통일 가능성이 거의 예견되지 않았던 동독주민 시위 초반부터 ‘통일의 기회’라고 판단, 신속 정확한 정책과 외교를 적극적 선제적으로 시행, 동독주민들의 환심을 사고 4대강국의 동의를 얻어 독일통일로 연결.

저자는 단연 ‘헬무트 콜’이 1등공신이라는 의견이다. 이제 독일통일의 과정을 하나 하나 살펴보자.

2016년 10월 16일 일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피부색으로 보는)

일단 사람들을 혈통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하면, 그것은 형질 인류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분야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형질 인류학적 관점에서 모색해 보겠습니다.  형질 인류학적으로 본다고 하면, 두개골의 장단 비율을 조사하거나 팔다리 길이, 몸통의 형태, 눈의 깊이, 코의 높이 등등을 따져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장두형 두개골은 아프리카 인들의 경우에 아주 심하고, 그리고 백인들이 그 다음입니다.  한국인 단두형으로 분류됩니다. 팔다리가 짧고 몸통이 둥그런 형태는 아주 추운 지방에서 적응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형질 인류학으로는 뭔가 찾을 듯하지만 그 이상 별로 나온 것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중에서 피부색에 관한 연구는 뭔가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조금 소개해야 될 것 같습니다.

“스킨”이라는 책을 쓴 니나 자블론스키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인종들을 피부색으로 (순전히 학구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녀에 의하면 피부 색은 자외선을 방어하기 위한 멜라니 색소때문인데, 자외선을 너무 많이 막아 버리면 비타민 D 결핍으로 오히려 구루 병에 걸립니다.  자외선은 장파와 단파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파 자외선은 피부 중 표피 밑의 진피 부분에서 손상을 가하게 됩니다. 손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 거기에서 암을 유발시키죠.  호주 백인들은 그들의 강렬한 햇빛으로 결국 35 %가 피부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입니다.  강렬한 자외선으로 피부가 손상을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천연 자외선 차단제를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은 멜라닌 색소입니다.

그런데 피부에서는 또 다른 작용도 하게 되는 데, 비타민 D 합성입니다.  비타민 D를 포함한 식품이라는 것은 제한적이어서 그런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문화권에서는 자외선이 피부에 닿으면서 비타민 D가 합성되는 것입니다. 이 자외선은 단파이긴 하지만 멜라닌 색소는 자외선 자체를 막아 버릴 수 있지요.  비타민 D가 결핍이 되면 구루 병에 걸리게 됩니다.  위도가 높은 지역, 햇빛이 별로 없는 지역은 햇빛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멜라닌 색소를 거의 잃게 됩니다.  그래서 백인이 되는 겁니다. 햇빛이 강렬한 지역에 살게 되면 멜라닌 색소가 강력하게 만들어져 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피부 색은 타협점을 찾는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한 곳에 오래 살면 그 위도에 관련한 햇빛 노출에 알맞은 양의 멜라니 색소를 분비하도록 진화합니다.  백인들에게는 두 종류가 있는데, 아예 멜라닌 색소가 없어서 햇빛을 받으면 빨갛게 익었다가 다시 하얗게 되는 사람들이 있고요, 약간의 멜라닌 색소가 있어서 햇빛을 받으면 약간 검게 타는(태닝)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인이나 북 유럽인들이 청백형 백인이지요.  반면에 일반적으로 라틴 계(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백인들은 태닝이 잘 되는 약간 갈색이 감도는 백인들입니다. 그들이 사는 위도를 보면 48~50 도 정도가 경계선인 듯 합니다. 이탈리아만 하더라도 로마의 위도는 42 도입니다.

백인마다 약간 더 갈색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약간 연갈색 피부를 갖고 있다가 피부가 그을리면 더 검게 타는 사람도 있지요. 그리고 아주 짙은 피부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완전 까만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한국인을 분류하면 의외로 태닝이 되는 백인으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의외입니다.  학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인종적으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종적으로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코카소이드, 몽골로이드, 니글로이드 입니다.  그러나 이 구분은 피부 색을 기준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니글로이드들도 옅은 갈색이 있으며 (니제르, 이디오피아 등), 알고 보면 코카소이드 중에서도 흑인에 가까운 사람도 있습니다. (주로 인도에) 동북아 인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옅은 갈색 백인으로 구분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

자블론스키는 자신의 남편(나사에 근무)의 도움을 받아 전 세계 인종들의 피부색과 위도의 관련성을 연구했습니다. 한국은 위도 상 유럽이 아니라 튀니지, 이집트, 이라크 와 비슷한 위도이며, 피부 색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엄밀히 코카소이드 (백인) 이지요.

연갈 색 인들은 동남아 사람들을 보면 되는데, 여기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그 북쪽인 미얀마 사람들보다 더 하얗습니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쯤 되면 거의 적도 선상에서 왔다갔다 하는 나라들입니다.  ’스킨’의 저자 자블론스키에 의하면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완전 흑인어야 하죠. 태국이나 이런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그 지역의 자외선 지수를 생각해 보면 매우 하얀 편에 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조금 더 있는데, 마야 역시 비슷합니다.  맥시코 유카탄 반도의 마야 인들은 23 도 정도의 위도에 살고 있지만, 그 정도 위도에 사는 다른 인종에 비해서 하얗습니다.  마야는 유카탄 반도에 정착한지 3000 년이 되지 않았지요. 아직 까맣게 되기 이전인 셈입니다.  말레이사아도 이런 논리가 적용될까요?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도시가 아닌 정글 속에는 원시 부족으로 살아가는 원주민들 중에는 완전 까만 사람들이 있는데, 아프리카에서 온 종족으로 믿어졌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완전 흑인처럼 검은 피부를 가진 원시 종족이 말레이시아의 원주민들이었던 것이죠.  말레이시아에 오래 살면 완전 까만 흑인으로 진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까만 흑인들은 아닙니다. DNA를 정밀 분석해 보니 말레이시아에 사는 99% 사람은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중국 남부 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이었지요.  동남아에 사는 사람들의 거의 전부는 불과 1 만년전에서 최근까지 계속 중국 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원주민은 없어졌거나 중국 도래인들에 의해 멸종된 것이지요.  이 지역은 화교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분란이 많지만 그 전부터 살던 사람들도 수 천년전에는 화교였던 셈입니다.

즉, 현재 사는 동남아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시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역사는 1 만 년도 되지 않습니다.  극소수 동남아 원주민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등의 내륙에서 진화한 사람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동남아로 간 사람들은 원래 중국 남부 지역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기는 어쩐 일로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만주나 시베리아로도 한반도로도 일본으로도 퍼져 나가고, 동남아로 간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단 가설이지만 현재까지의 모든 조사를 통해서 가장 잘 맞는 가설이지요.

즉 한국인을 포함한 동북아 인들이 현재 동남아 사람들과 근연성이 있다고 해서 동남아를 통해서 온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를 벗어나서 동남아 루트를 개척한 사람들은 동남아에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외 지역을 확산된 사람들이 다시 재 점령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 중의 일단입니다.

2016년 10월 14일 금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10,000 BC)

몇 년전에 10,000 BC 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원래 영화 제목은 심상치 않는 대단한 것이었으나 영화 내용은 그냥 만화 수준에 불과해서 실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10,000 BC 는 정말 대단 한 것이었습니다.

전편에서 보인 지구 기온 표를 보면 12,000 년전부터 따뜻해지다가 10,000 년전 부터는 엄청 더운 날이 지속되죠. 인류는 그 전 6 만년동안 동물 수준이나 그 보다 쫌 나은 생활을 하다 갑자기 문명이 폭발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시 신석기 사람들은 바닷가나 강가에만 살았고, 침수되자 갑자기 다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없어지고 극소수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번성하는 듯 보입니다.

수위가 100 ~ 200 미터 올라가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수위가 서서히 올라갔을까요?  1 년에 10 센티 씩 한 1000 년간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수위가 올라갔을까요?  그런 일은 오히려 희박한 일입니다. 수위는 순식간에 쓰나미처럼 몰려와서 한번에 몇 미터를 올린 적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수시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만8000 년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빙하 시대 중에서 가장 추운 시기라고 생각되지만 빙하시대가 끝나는 1만 5000 년 전은 가장 따뜻한 시기입니다.  지금보다 더 따뜻해졌지요.  북반구의 빙상들이 녹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북반구에는 거대한 빙상이 2 개 쯤 있었습니다. 하나는 시베리아 빙상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북미 빙상이지요.  이중에서 북미 빙상은 북극부터 미국 중부까지 걸치는 빙상인데, 두께가 수 킬로미터나 되고 면적은 수 백만 평방킬로미터나 되어 있었지요. 1 만 5 천년전 날씨가 더워졌는데, 이 빙상들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이 빙상이 어떻게 녹았을까요? 이미 상당히 녹아 있는데, 빙상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빙상의 마지막 외곽은 Ice Dam 형식으로 막혀있었지만 빙상 가운데 하부는 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물을 가둔 댐이 어느 날 터졌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이 담수가 단 3 일 만에 거의 모두 태평양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이 물의 양이 전 세계의 바다의 수위를 몇 미터 또는 10 미터 이상 높일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다 수위는 차츰 올라간 것이 아니라 쓰나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죠. 이 쓰나미는 태평양을 건너서 아시아에 닥쳤을 겁니다. 그 높이는 아마 수 백미터에 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1 만 5 천년전 에서 1 만 년 전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때 순식간에 서해 바다가 생겼을 지도 모릅니다.  단 하루만에 바닷가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멸종했을 겁니다.

이는 동남아시아 중국 해안 한국, 일본에 닥친 일일 겁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멸종했을 겁니다. 극소수만 피했거나 내륙에 있는 그보다 더 극소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았을 겁니다. 높은 고도였던 내륙이 해안가를 바로 변했을 겁니다.  이 사건이 10,000 년전에서 약간 더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북미 빙상만 녹은 것은 아니죠.  시베리아 빙상도 녹아서 스칸디나비아 북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만, 이 동네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바이칼 호수도 이 때 생겼습니다. 바이칼 호수는 시베리아 빙상이 녹으면서 생깁니다.  바이칼 호수는 우리와 약간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극소수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도래합니다.  날씨가 온화하다 못해 엄청나게 더워진 것이었습니다.  인류는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문명화의 길을 걸어 갑니다. 한반도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2016년 10월 12일 수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지형과 기후 변화)

역사는 놀랍게도 질병에 의해서 또는 기후에 의해서 바뀐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관점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그러므로 지질학자와 기후 학자들의 이야기도 좀 들어 보아야 할 것같습니다.

일단 역사적 사실만 보더라도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령 예를 왕건과 견훤이 나주 근처 영산강에서 치열한 수상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산강을 가 보면 나룻배 정도 이상 띄울 수 없음을 알게 되죠. 수 백년전만 하더라도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를 나주에 보내는 것은 나룻배가 아닌 제법 큰 배였는데, 가는 동안 홍오가 썩는 바람에 삭힌 홍어가 만들어졌다는 홍어 기원 설이 있지요.  분명 수 백년전 또는 수 천년전에 영산강의 수심은 지금보다 깊었습니다.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잡이 그림은 그것이 바다에서 일어난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태화강 상류(나 다름없는)의 개울같은 모습의 반구대는 실제 포구에서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반구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수십킬로나 걸어가서 바다에서 고래 사냥을 하던 것일까요? 가장 멋진 추론은 반구대 앞의 태화강이 바다가 들어오는 길고 긴 포구였다는 것이죠. 이 길고 긴 포구로 들어 온 재수 없는 덩치 큰 고래가 180 도 회전을 할 수 없는 곳까지 들어 와서 꼼짝 못할 때 카누같은 배를 타고 들어가서 잡은 것입니다. 반구대 고래 잡이는 아마 6000 ~ 7000 년 전일 겁니다.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탄소 동위원소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산소 동위 원소를 잠시 거론해 보겠습니다.  산소는 8 번 원소이므로 양성자가 8개이죠. 따라서 일반 산소는 중성자도 8 개라서 산소의 무게는 16이 됩니다.  그런데 아주 극미량의 산소 중에는 중성자가 10개 짜리가 있는데, 이런 무거운 산소는 일정하게 존재한다고 봅니다. 산소는 수소와 결합해서 물이 됩니다. 물 속에도 일정한 비율로 산소-18 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기 온도에 따라서 산소-16 짜리의 증발율과 산소-18짜리의 증발율이 다릅니다.  증발된 수증기는 구름이 되어 비나 눈이 되어 내립니다.  비나 눈 속에 있는 물의 산소-18의 비율을 알면 대기 온도가 높았느지 낮았는지 알 수 있지요.

그린랜드에 가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빙상이 깔려있는데, 상태가 좋은 것은 수백만년 동안의 눈이 쌓여 있는 것입니다.  수십년전 부터 과학자들은 보링 기계로 원통형 시편을 채취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린랜드도 사계절이 있어서 눈이 쌓인 얼음층이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이테만 세면 몇 년전인 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시편 수천개로 과거 지구의 평균 기온을 추적했습니다.

결과는 다음 그림과 같습니다.




그림을 잘 보면 12000 년 전에는 엄청나게 춥거나 급격한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쪽에 보면 Liitle Ice Age 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소 빙하기라고 부르며 대략 서기1300 년~ 1900 년 사이를 말합니다. 즉, 소 빙하기는 600 년간 지속되어 1900 년 쯤에서 끝나가고 있어서 지구 온난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온도 2~3 도 올라간다고 해도 과거 수천년전 온도 정도도 되지 않을 정도이지요.  지구 온난화를 주장하는 사라들은 정식 학자들이 아니죠. 정치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림을 잠깐 설명 드리면, 15000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났습니다.  북극의 엄청난 얼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바다 위의 수위는 엄청나게 올라갑니다.  그런데 빙하기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지구의 대기 온도는 급전직하 떨어집니다. 떨어진 온도 수준은 빙히기와 다를 바가 없지요.  이 시기를 Younger Dryas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빙하가 녹으면서 전 세계 바다 위에 우리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유빙이 떠 다니고 상상을 초월하는 빙하 녹은 물이 바다에 유입되면서 대기 온도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다 수위는 계속 올라갑니다.  12000 년 전 이제 바다 유빙들이 정리되고 온도가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10000 년전 부터 지구 온도는 안정적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에 비하면 대략 5도가 더 높습니다. 아시다 시피 인류는 10,000 년전부터 문명이 폭발합니다.

우리 한 반도는 어땠을까요?  불행히도 한중일 과학자들은 서양 과학자들에 비하여 게을러터져서 많은 규명이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충 거론되는 추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반도라고할 것도 없습니다. 홍적세라고 하는 것은 빙하기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수십만년 동안일어난 일이죠.  아주 극심한 때에는 동해가 호수였다는 것입니다. 가장 해수면이 낮을 때에는 지금보다 100 ~ 200 미터 정도 더 낮았습니다.  서해보다는 수심이 80 미터 정도이죠. 다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은 적어도 15000 년 전 정도라면 이 그림과 그리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15000 년 전에는 한반도라는 것도 없는 그냥 대륙일 뿐이며 일본도 대륙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거대 호수인 동해를 둘러싸고 있지요. 사람들은 지역구분이라는 것을 하고 있을 수도 없으며 바다에 의한 고립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신석기 유물은 어디에서 발견이 되었을까요? 거의다 (거의 100%) 패총입니다. 바닷가를 끼고 있습니다.  시대는 1 만년전에서 그 안 쪽입니다. 1 만 년전 보다 더 벗어나는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 이전의 바닷가는 이미 바다 속에 잠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전편에서 왜 1 만년전 에서 3 만년전 사이의 신석기 (또는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이행되는 시점)의 윰물이 없어졌을까하는 의문에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석기 유물은 반드시 강가나 해안가입니다.  내륙에 인간의 발자취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 서해 바다 한 가운데, 남해 다도해 바다 속에 뻘 속에 엄청난 토기들이 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석기 유물이 10,000 년 전 이전의 것이 없는 것은 동남아 한국 일본에 보이는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 전으로 가면 아주 간간히 3만 5 천년전 또는 그 이전의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살던 지역이 바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사라진 것들이죠.

그러다가 10,000 년전 부터 세상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2016년 10월 10일 월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편년 서술 시도)

한국 고대사의 문제는 편년 서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대사는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시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구분을 못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케이오스 수준입니다.  이 시대에 대한 적당한 수준의 이미지라도 머리에 그려야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근본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민족이 구성되고 말고 자시고 하기 전에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이고, 호모 사피엔스로 이 땅에 자리잡고 문명을 꽆 피워왔다는 구도조차도 완전 엉터리이지요.

일단 우리 민족(다른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이 속하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이것에 대하여 어떤 의견도 말하지 못합니다.

먼저 시대구분을 해 보겠습니다. 구석기 중에서 초기 구석기 시대는 올도완 석기라고 하는 것으로 이는 호모 에렉투스 또는 그 이전 인류들의 것이죠,  솔직히 인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출현하는 애슐리안 석기류가 있는데, 이는 네안데르탈 인 수준의 석기입니다. 물론 이들오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출현했을 때는 중기 구석기를 물려 받아 시작했지만 아프리카를 떠나자 후기 구석기 시대인이 되었으며, 한반도처럼 멀리까지 온 인류는 신석기인이죠. 즉, 우리 한 반도 땅 나아가 동북아 통 털어서 우리 인류는 신석기부터 시작한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세계적으로는)

그런데 이를 부정하는 집단이 있는데, 이들이 중국과 북한입니다.  이들은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가 아니라 여러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은 북경 원인 (60 만년전) 유골을 금과옥저 떠 받들더니 어느 날, 이들이 중국인의 선조라고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인 이 북경원인은 원래 아프리카 기원하였으나 아시아에서 진화 적응을 하였고. 이들이 계속 중국 땅에 남아 진화하여 스스로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금씩 모양이 다르고 진화하고 있는 수 천개의 유골 화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의견이 맞다고 하면, 우리가 가르치는 역사도 대충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평양 상원이나 제천의 두루봉 동굴,전곡리(애술리안 석기 발견) 같은 것들이 이 이론에 맞춰 대충 설명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이 이론은 국가에서 정한 정책입니다. 이것은 동북공정과 더불어 정치적 이유로 정부에서 밀고 있는 정책이기도 하지요. 중국의 민간 유전학을 전공한 의사가 중국 각지의 수천 명을 표본으로 유전자 추적을 하였습니다.  수 천 명 전원이 호모 사피엔스 시절 아프리카에서 떠날 때 만들어지 유전자 마크가 발견되었습니다. 표본 조사에 응했던 중국인 100%가 호모사피엔스의 아프리카 기원을 입증하고 있지만, 노인네들로 구성된 중국 정부는 꿈쩍 않고 있습니다.

한국은 북한에서 발굴된 유적과 더불어 20 만년전에서 7 만년전에 이르는 구석기 유물을 어떻게 볼 지 모르고 있지요.  공부를 많이 한 남한의 젊은 학자들은 이들을 그냥 호모 에렉투스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수 만년 된 아이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큰 소리친 중원 대학교 고고학 팀은 마지막 확인을 위해서 유골 샘플을 프랑스에 보냈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회신은 아이의 유골은 100 ~ 200 년 밖에 안 된 유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고고학계에서 과거에 발표한 모든 연대 추정은 거의 불신에 들어 갔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우리 조상은 합리적 추론으로 4 만 년전 이전에 여길 도착하기 어렵습니다. 유물들은 믿을 수가 없고요.  엄청난 길이의 발굴 보고서들은 널려 있지만, 편년으로 정리할 수만 있다면 한국 최고의 석학이 될 것입니다.

하여간 그 고고학 자료를 다 믿는다고 해도, 한국의 1 만 년전 이후 유적으로 발견되지만, 그 이전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 전 유적은 몇 만년전으로 그냥 올라갑니다. 가령 12,000 년전 유적조차도 없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은 제주도에서 발굴중인 유적으로 10,000 년전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1 만년전 이전에 한 동안 한반도에는 인간이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지만, 이를 대세로 인정하는 학자도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조상인 될 사람들은 겨우 10,000 년전에 온 사람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가설은 이제 지구 기후와 연결해서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기후와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mt DNA 추적으로)

우리의 세포는 동물 세포입니다.  동물 세포를 단면으로 보면 가운데에 핵이 하나 있고, 그 핵에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설계도인 유전자가 염색체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포핵이 아니라 세포질을 보면 벌레같이 생긴 것들이 수 백 개에서 수 천 개쯤 분포하는데, 이들을 미토콘드리아라고 합니다. 이 미토콘드리아는 쉽게 말해서 연료를 태워서 열과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기관입니다. 혈액을 통해서 공급되는 산소와 영양분을 받으면 바로 이 미토콘드리아가 ATP를 생성하고 연료를 태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열과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이 미토콘드리아는 놀랍게도 자체 DNA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미트콘드리아가 자체 DNA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몸이 아니라는 뜻 일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분야이므로 이 소개는 일단 건녀 뛰겠습니다. 그러면 미토콘드리아 설계도는 세포 핵 속의 염색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 세포 결합에 의해서 후대로 전해지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수정란이후로 계속 세포 분열하면서 생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맨 처음에는 단 하나짜리 수정란 세포였습니다. 수정란 세포가 뭔가요?  정자의 핵이 난자에 들어가서 정자의 핵과 난자의 핵이 결합한 핵을 가진 난자가 바로 수정란인 것입니다. 수정란이라는 세포의 세포의 질에 이미 미토콘드리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미토콘드리아는 엄마의 것이죠. 아빠의 몸에도 미토콘드리아가 있지만 그 미토콘드리아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나의 몸의 세포 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엄마의 미토콘드리아가 계속 증식해 오고 있는 중인 것이죠.  그래서 미토콘드리아를 분석하면 그 사람의 모계로만 죽 추적이 가능합니다.

변이라는 것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지구 상에서 변이가 일정 비율로 일어나는 이유는 자연 방사능때문이라는 설이 유럭한데, 이 정도의 파괴력으로는 변이 율이 많이 느립니다. 그런데 미토콘드리아는 변이율이 아주 놓습니다.  그 이유는 미토콘드리아가 산소를 다루기 때문인데, 산소를 다루다 몇 개의 산소가 탈출하면 이를 활성 산소라고 부릅니다. 탈영해서 돌아다니는 활성 산소는 우리의 몸의 조직을 파괴하기 때문에 해로운데, 미토콘드리아가 이 위험물질을 다루기때문에 변이율이 매우 높아집니다.  가령 엄마와 외할머니 그의 엄마, 한 3~4 대 정도 올라가도 몇 개의 염기서열의 변이가 발견될 정도입니다.  Y 염색체 변이와는 비교 불가입니다.

미토콘드리아는 mt DNA라고 부르는데, mtDNA를 추적하면 매우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인류 이동을 설명하는데 훨씬 신뢰성이 높습니다.

가령 5000 년 전 쯤 한반도 남자들이 배를 타고 일본에 가서 노략질을 하고 거기 살던 조몬인 여자들에게 씨만 뿌렸다면, mtDNA 상으로는 조몬인 유전자만 검출될 일입니다. 그리고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일본인 (야오이인)들의 유전자에서 mtDNA가 한반도 사람과 동일한 것이 나오기 때문에 5000 년 전에 남자들이 해적질하러 간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이주한 것이다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죠.

아주 다양한 mtDNA 표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과 남자들처럼 값싸게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는 여자들의기 때문에 이는 가족, 씨족, 부족의 이동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mtDNA 친연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일본, 한국,북방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신기하게 빗살무늬 토기 경로와 좀 비슷합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Y 염색체 경로와 반대 성향이 짙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자 사람들, 가족 들, 기존 구성 사회는 북방계 사람들이며, 일부 거친 남자들 (동남아 계열)이 많은 씨를 뿌리고 다녔다는 좀 이상한 결론이 내려질 수 있습니다.

Y 염색체와 mtDNA 분석은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같지만 실은 숙제만 더 만들어 내고 있지요.

유전자 분석으로 우리가 반드시 거기에 끼워 놓아야 하는 것은 편년입니다.  그런데 현재 살아남은 사람들의 유전자로만 분석을 하기때문에 편년 서술이 불가능해집니다. 즉 언제 그랬다는 거야 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루트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것은 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인류의 이동에서 관찰해 보려 합니다.

2016년 10월 6일 목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Y 염색체 추적)

사람들은 아주 예전에는 각기 조상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떨어진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 조상의 후손이 아니면 그것은 종이 다른 동물을 보듯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전 세계 어느 지역의 과거의 기록도 조상은 하늘의 후손이거나 동물의 알로 태어났거나 옥수수로 만들어졌지. 그 조상이 디른 동네에서 살다가 이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의 인식체계는 묘한 부분이 있어서 사람들은 인류가 진화의 결과이며 아프리카 같은 먼 곳에서 이동하여 왔음을 알면서도, 인식체계 상 이질적인 인간에 대해서 살의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적대적일 수 있다.

우리 조상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디선가 왔을 것이다.  그것을 추적하는데 DNA 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DNA로 추적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대략 다시 한번 그 원리를 삺펴 보면 이렇다.

사람의 유전자라고 하는 것은 염색체라고 하는 곳에 들어 있는데, 염색체는 모든 세포의 핵 속에 들어 있다. 핵 속에는 무거운 단백질이나 탄수화물같은 것이 아니라 싸구려 핵산이 들어 있었는데, 여기에 특정한 잉크를 발라 놓으면 그 모습이 드러난 존재가 있었다.  염색하면 보인다고 해서 염색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염색체들을 연구한 결과 그것들이 유전자들임이 밝혀 진 것이다.  염색체는 디옥시 리보 핵산 (DNA) 라고 한다.  인간의 경우 염색체를 분리해 보면 23 개로 분리 해 낼 수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23 개 염색체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냥 가장 큰 것부터 1,2,3,….  이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염색체는 23 번이 아니다.  마지막 염색체는 특별히 성 염색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모두 알겠지만, 각 염색체는 두 개의 쌍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엄마에게서 또 하나는 아빠에게서 온 것이다. 그레서 사실은 46 개의 염색체가 있는 것이다.  1~22 까지 염색체 쌍은 그 쌍이 같은 것이지만, 유독 23 번 째 염색체를 이루는 쌍은 둘이 다를 때가 있다. 그 쌍이 같은 사람은 여자이고 그 쌍이 다르면 남자이다. 이후 쌍을 이루는 것을 X,Y 로 명명했다. 아버지 어머니로 부터 하나씩 받을 때 XX가 되면 여자가 되고 XY가 되면 남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므로 이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남자의 경우) 아버지에게서 받은 Y 염색체는 어머니에게 온 그 어떤 유전자들과도 섞이지 않고 그대로 있다. Y 염색체의 정체는 완벽하게 아버지의 것과 똑같다. 그대로 복사해서 아들로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Y 염색체 하나에도 사실은 수 천만개의 염기 서열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번 복사하다 보면 복사본이 약간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는 데 우리는 이를 변이라고 부른다. 이 변이는 아주 서서히 아주 작은 부분 일어난다. 그 미세한 차이를 파악하면 친연성을 알 수 있다. 거기서 한 번 더 일어나면 거리도 알 수 있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시간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된다.

Y 염색체의 변이 형태를 각 국민들 별로 채취해서 분포도를 만들어 보면, 대개 이런 결론이 나온다. 아프리카에서 7 만 년전 정도에 근원이 수렴되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건너서 중동으로 갔다가 인도로 가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있으며, 인도에서 계속 동남아 루트를 타고 해안을 타고 간 사람들이 있다.

이 Y 염색체 변이에 의한 추적의 결과로 해석하면 인도 북북 어디에선가 사람들은 백인도 나오고, 북 아시아인도 출현한다.  북 아시아 인은 북 동쪽을 향해서 진행하다 베링 평원(당시는 평원이었다)을 넘어 간다.

동남아 루트로 해안을 장악한 일단의 사람들은 한국 일본 캄차카 까지 도착하고 다시 내륙으로 들어간다.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북 아시아 인은 동남아로 올라 오는 남 아시아 인처럼 같은 몽골로이드이나 이 둘의 유전자는 매우 거리가 멀다.  북 아시아 인은 유럽인에서 보이는 마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마크를 가진 사람들은 동 아시아 사람들 중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Y 염색체 추적으로 보면 한국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동남아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다.

보통 Y 염색체 표지의 분포를 이용해서 인류의 이동을 추측하는 것은 신뢰성이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첫 째.
Y 염색체는 변이가 제한 적이고 너무 느려서 많은 부분이 건너 뛰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하나이며,둘 째는 남자의 속성상 가족이나 부족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남자 혼자서 여행갔다고 눌러 앉아서 씨를 뿌리는 경우에 마치 그 부족이 이동한 것과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자.  로마 시대 흑인 검투사가 백인 여자와 아이를 만들었다. 그는 흑인이었지만 그 후손은 계속 백인들과만 결혼해서 지금은 완전 백인이 되었지만, 그 Y 염색체는 흑인의 그것인 상태.

또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한 백인이 난파를 당해서 홀로 아프리카 부족 속에 남아 거기서 여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살았다. 그런데 딸만 낳았거나 해서 Y 염색체가 전달되지 못한 경우,  Y 염색체 상으로는 놓치는 것이 많다. 그래서 학자들은 미토콘드리아 추적을 생각해 냈다

2016년 10월 4일 화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유전적 탐구 1)

20 세기 후반에 들면서 유전자를 통해서 뭔가를 알아내는 기술들이 소개된 이후로 인류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쩌면 역사학은 인류학의 하위 개념일도 모르게 된 것이다.

민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제 당연히 유전학을 빼 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유전자로 추적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Y 염색체 추적이 그 하나이고, 미토콘드리아 (mt DNA)추적이 그 하나이다.  그런데 이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유전에 관한 몇가지 지적 게임을 하고자 한다.  유전에 대한 상식을 넓혀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세대라고 하면 30 년이라고 영어 시간에 배웠다.  (대개 영어 시간에 generation 이라는 단어를 배울 때 선생님이 이야기 해 준다.) 그러나 인류학적으로는 25 년을 1 세대로 본다. 특별한 근거는 없다. 유전학자들은 통상 25 년을 1 세대라고 한다.

이제 재미있는 퀴즈가 시작된다.  나는 부모로 부터 유전자를 반반씩 받았다. 아버지의 50%, 어머니의 50% 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50%를 받고, 할머니로부터 50%를 받았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25%, 할머니로부터 25%, 외할아버지로부터 25%,외할머니로부터 25%를 받았다. 조부모로부터 나는 3 대이다.  그러므로 나의 3 대조 조상은 4 명이다. 나를 만든 4 명의 3 대조가 있다. 3 대조이지만 50 년이다. 1 세대는 25 년이니까.  4 대조 조상은 몇 명인가?  그 두 배인 8 명이 된다. 나의 조상은 2의 승수로 늘어난다.  그러면 1000 년 전 나의 조상은 몇 명인가?  이게 퀴즈다.

1000 년은 정학히 40 세대가 된다.  1000 년 전 조상은 나의 41 대조가 된다.  2 의 40 승은 얼마인가? 계산해 보면 1 조명이 조금 넘을 것이다.  나의 조상은 1,000 년 전에 1 조명이 되는 것이다.  지금 지구인의 숫자가 70 억인데, 1000 년전 인구가 1 조명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이게 왜 그런지 이해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1000 년전 세계 인구는 1 조 명은 커녕 1 억 명도 되지 않았다.  위의 퀴즈를 계산할 때 모든 조상은 중복이 없다는 가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공동 조상을 가진 사람이 중복으로 포함 되면 그 때마다 경우의 수는 반으로 준다. 하여간 41 대조 할 아버지의 피는 나의 몸 속에 1조분의1 밖에 들어 있지 않다. 2000 년 전이라면 1조분의 1의 다시 1 조분의 1 이다.

나는 거의 1,000 년전에 어떤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모든 유전자를 다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사람은 근친교배 산물이 된다.)

또 다른 퀴즈를 하나 생각해 보자.

고립된 어떤 마을에 8 쌍의 남녀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여 매 쌍마다 아이를 두 명씩만 낳는다. 그 자녀들은 계속 그 마을의 자녀들 중에 배우자를 찾는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성을 물려 받는다. 아버지가 8 명이므로 처음에 8 개의 성이 있다. 이들이 계속 결혼하면서 세월이 흘러간다. 성은 몇 개나 남아 있을까?

편의상 8 명의 성은 A,B,C,D,E,F,G,H 라고 하자.

아이가 두 명 씩 태어나지만 아들이 태어날 확률은 50% 이다.  어떤 집은 아들 아들만 낳고 어떤 집은 딸 딸만 낳는다.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합이 일어난다.  아들-아들 인 집이 2 가정, 아들-딸인 집이 2 가정, 딸-아들인 집이 2 가정, 그리고 딸-딸 인집이 2 가정이다. 이 순서대로 A,B,C,D,E,F,G,H 라고 하면, G와 H 성을 가진 사람은 딸 딸을 낳은 것이다. 이들 딸들은 성이 각 각 G,H 이지만 그 딸들은 결혼한 이후로 그녀들의 성을 물려줄 수 없기 때문에 3 대 째 내려 가면 8 명의 성 중 2 개는 사라진다. 그러나 평균 수명과 동일한 조건이 유지되어 계속 8 가정은 존재한다. 성은 다음과 같이 남는다. A,A,B,B,C,D,E,F 이다 .  아들을 둘씩 낳았던 A,B의 후손의 성씨는 두 배로 불어 나 있다. 여기에서는 경우의수가 존재하는데, 복잡한 계산을 생략하고 결론만 낸다면 불과 몇 백년이 지나면 하나의 성만 남는다는 사실이다.  즉 수렴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이 뭐 어떻다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유전적으로 조상들을 추적할 때 여러가지 원리적 이해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2016년 9월 15일 목요일

싸드 결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권의식, sovereignty 의식이 손상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말 전자파가 유해하다는 이유만으로 이와 같이 시위하는 것인가?

국가안보에 관한 사안임에도 정치권에서도 여야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야당은 너무나 익숙한 모습으로 정부만을 비판한다. 본질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부의 의사결정 및 대응 과정을 둘러싸고 잡히는 꼬투리만 물고 늘어진다. 오로지 현 정부의 실패 부각, 그들의 집권 가능성, 자기 당세 확장, 자신의 차후 당선에 이 사안이 어떻게 작용할 지에만 관심이 있다. 누구도 북한의 핵위협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 국가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걱정하지 않는다. 안보가 정쟁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고, 그들 간의 어떤 쟁점보다 덜 중요해진 지도 한참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일부인사들을 새로운 루머와 정부비판을 확산시키고 있고, 시위를 부추겨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자 획책하고 있다. 언론도 진실 여부를 거르는 역할은 포기한 채 이들의 언행을 충실하게 전달하기에 바쁘다. 사회 지도층 인사나 지식인들은 언제나처럼 냉소적으로 방관하면서 유체이탈식 화법을 구사한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우리 내부의 문제점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스스로에게 침을 뱉는 일이라 그만두고자 한다. 대신 외부의 시각에서 우리를 한번 바라보고자 한다. 그 동안 우리끼리 서로의 주장에 사로잡혀 외부의 시각에서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수출과 한류로 쌓아온 국가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될 것 같은 우려도 있다. 과연,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우리를 어떻게 볼까?


외국인들이 본다면?

외국인들이 첫 번째로 궁금해 할 것은 “왜 반대하지?”일 것이다. 북한은 10개 이상의 핵무기를 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탄도미사일에 탑재하여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경량화’하는 데 성공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탑재한 탄도미사일, 즉 ‘핵미사일’로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이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인 사드의 배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난 6월 22일 북한은 무수단 미사일을 1400km 이상의 고고도로 발사하여 400km 거리의 표적을 타격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은 패트리어트(PAC-3)로는 요격할 수 없고, 사드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드는 너무나 중요한 방어수단인데, 그것을 배치하는 것을 반대한다? 외국인 같으면 당장이라도 구매하여 배치하라고 정부를 채근했을텐데, 주한미군이 자신의 사드를 배치하여 방어해 주겠다는 것을 한국 국민들이 반대한다는 것을 외국인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중국이 반대하는 것을 정부가 강행하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반대한다고 대답할 것인가? 미군 것이라서 반대한다고 대답할 것인가? 외국인들은 재차 물을 것이다. 한국은 자주독립국 아니냐고. 국방정책도 중국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느냐고, 한미동맹이 필요없는 것이냐고. 아마 우리 국민 중 누구도 이와 같이 질문하는 외국인들에게 당당하게 답변하지는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외국인들이 궁금해 할 사항은 “성주군민들이 왜 저렇게 격렬한 시위를 하지?”일 것이다. 전자파의 유해성 여부는 과학이라서 따져보면 금방 밝혀질 사항이기 때문이다. 사드 레이더 전파자의 경우 국방부는 100미터만 떨어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전자파 전문가들도 텔레비전에서 전자파가 그렇게 유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전자파의 유해범위가 500미터나 되는 그린파인 레이더의 전자파를 기자들이 방문하여 측정한 결과 30미터 앞에서 허용치의 4.4%에 불과하다고 보도한 바도 있다.

일본에서 배치된 동일한 X-밴드 레이더에서 나오는 전자파는 거의 무시할 수준이라는 자료도 있다. 곧 기자들이 괌(Guam)에 배치된 사드 레이더를 확인하여 보고할 것이다. 성주군민들이 이러한 과학적 자료보다 일부 인사들의 의혹을 더욱 신뢰하는 것을 보면 외국인들은 물을 것이다. 정부가 제공하는 자료의 어떤 요소가 실제와 다른 지를 과학적으로 제기하면 되지 않느냐고. 시위를 하면 전자파가 무해해지고, 시위를 하지 않으면 전자파가 유해해지느냐고.

성주군민들은 외국인들에게 시위하는 분위기라서 시위한다고 대답할 것인가? 지역에 대한 더욱 큰 지원을 바라서 시위한다고 할 것인가? 일부 반정부 인사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시위한다고 할 것인가? 성주군민 중에서 왜 시위하는 지를 당당하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08년 그렇게 처절하게 시위했던 광우병에 관한 모든 사항이 루머로 들어난 전력을 갖고 있는 우리다. 이제 또 그와 유사한 사례를 반복하려는가? 외국인들은 우리의 지성을 어느 정도로 평가할까?

더욱 실감나게 나라로 구분하여 외국인들이 현재 한국에서 사드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한번 유추해보자.


미국 국민들이라면?

미국은 한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고, 2만 8500명의 군대를 한국에 배치하여 동맹공약을 이행하겠다는 결의와 태세를 과시하고 있다.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라는 개념 하에 만약 북한이 한국을 핵무기로 공격할 경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비핵 및 핵무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북한에게 응징보복을 하겠다고 언명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에게는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 지상과제이다. 그렇게 되면 핵무기로 위협하면서 한국을 공격하여 적화통일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7일 만에 남한을 석권하겠다는 “7일 전쟁계획”을 수립하여 훈련까지 실시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주한미군의 주둔을 지속하기 위한 전제조건 중 하나는 그들의 안전, 군대용어로 생존성(survivability)이다. 미군은 물론이고, 모든 군대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노동미사일이나 무수단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여 공격할 경우 아무런 방어책이 없다면 주한미군이 어떻게 한국에 주둔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미군은 북한이 핵실험을 시작하자마자 패트리어트(PAC-3) 요격미사일을 배치하였고, 노동미사일이나 무수단 미사일을 고고도로 발사할 경우 그것이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사드의 배치를 추진한 것이다.

그런데 동맹국인 한국은 주한미군을 보호해줄 수 있는 별도의 방안도 없으면서 사드의 배치를 2년 이상 지체시켰다. 동맹국 군대인 주한미군의 안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은 채 중국이 미국을 향하여 발사하는 대륙간탄도탄(ICBM)을 요격할까봐 걱정하고, 미군이 구매해둔 것을 한국으로 재배치하는 사안인데도 마치 미국이 한국에게 비용을 요구할 것으로 추측하였다. 자신들이 규정에 근거하여 인체에 유해하지 않도록 만들었고, 괌에 배치하여 운영하고 있는 것을 마치 살인무기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우리가 미국 국민이라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중국 국민들이라면?

중국은 한국과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고, 무역거래도 활발하며, 대규모 중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고, 한류의 열풍에 빠져 있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서 북한을 덜 지원하고 있고, 유엔의 경제제재에도 협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은 북한의 비핵화는 물론이고, 통일을 위한 중국의 적극적 지원을 획득하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그러나 중국도 우리와 동일하게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국가이다. 남한과도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좋지만, 북한도 버릴 수 없다. 비록 순수한 방어무기이고, 그들의 ICBM을 요격할 수도 없으며, 레이더의 탐지 범위도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사드가 한국에 배치되는 것보다는 배치되지 않는 것이 편안한 것은 분명하다. 한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으로 불안하다는 사정은 알지만, 그것은 한국의 사정이지 중국이 걱정할 바가 아니다.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끝내지 않으려니까 북한에게 불리한 사드 배치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중국에게는 굳이 한반도 사드 배치를 환영해줄 이유가 없다.

자신들이 국익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에 중국 국민들은 한국도 당연히 위와 같은 중국입장보다는 한국의 국익, 즉 북핵에 대한 자신의 방어를 우선시할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예상과 달리 중국의 입장을 더욱 존중하는 데 매우 놀랐을 것이다. 사드 배치 반대의 이유를 제대로 제시하지도 않았음에도 한국 내에서 다수의 중국 대변자들이 자청하여 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해주었고, 2년 이상 논란을 벌여오는 데 대하여 감사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1636년부터 1984년까지 청나라가 조선과 맺은 군신관계 및 사대주의의 영향력이 이와 같이 강하게 남아있다면서 흐뭇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고집을 부리면 미국과의 동맹도 파기시킬 것으로 기대하지 않을까? 한국을 우습게 보지 않을까?


일본 국민들이라면?

일본은 한국과 동일하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북한이 노동미사일과 무수단 미사일을 사용하면 일본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하자마자 탄도미사일 방어(BMD: Ballistic Missile Defense)에 나섰고,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서 비행하자 미국과 함께 최적의 탄도미사일 청사진을 연구하였으며, 2003년 이를 확정하여 그 동안 상당한 노력과 예산을 투자하여 체계적인 BMD를 구축해왔다(한국에서는 MD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세계적으로는 BMD라고 한다).

일본은 다층방어에 의하여 BMD를 구축하고 있는데, 하층방어로 패트리어트(PAC-3) 17개 포대를 주요 도시마다 배치해두었고, 탄도미사일 요격 가능한 SM-3 해상요격미사일이 구비된 이지스함을 4척 운영하고 있다(이를 8척까지 증대시킨다는 계획이다). 즉 북한이 핵미사일을 발사하면 일본은 SM-3로 해상에서 제일 먼저 요격하고, 실패하면 지상의 PAC-3로 요격함으로써 2회의 요격기회를 갖는다는 개념이다. 이것도 불안하여 일본은 사드나 지상용 SM-3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추가로 배치함으로써 3번으로 요격기회를 늘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평시부터 미국과 함께 BMD 작전을 수행하고 있고, SM-3의 사거리와 성능을 더욱 개량한 SM-3 Block II를 미국과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입장에서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드 배치 논란을 보면 놀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동맹관계라면서 미국과의 협력없이 BMD를 추진한다는데 놀랐을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억제 및 승리를 위하여 한미연합사령부까지 보유하고 있으면서 가장 심각한 위협인 핵미사일 대응에 대해서는 미국과 협조하지 않는다?

사드에 의한 중국의 ICBM 요격이나 중국 군사활동 탐지를 걱정해주는 것을 물론이고, 중국에 의한 경제압력까지 우려하는 데도 놀랐을 것이다. 2006년 일본이 미국의 X-밴드 레이더를 배치할 때도 중국이 반대하였지만, 일본은 일언 지하에 무시하였고, 이후부터 중국은 일본의 BMD에 대해서는 제대로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음에도 중국의 대일본 무역규모는 홍콩, 미국에 이어 3위이다.

일본 국민들은 사드 배치를 둘러싼 전자파와 그를 빌미로 한 시위에 대해서는 너무나 놀랐을 것이다. 왜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고, 과학자들이 검증하도록 하지 않을까? 왜 주민들은 시위부터 하고볼까? 그리고 마음 속으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기억과 한말에 갈갈이 분열되었던 조선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까? 35년 동안에 겪은 조선인들도 그랬었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유사한 상황이 오면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스라엘과 스위스의 국민들이라면?

미국, 중국, 일본 이외에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한국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이스라엘과 스위스의 국민들은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라크가 핵발전소를 건설해 나가자 1981년 세계의 이목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이를 폭격하여 파괴시켜 버렸다. 시리아가 비밀리에 건설하고 있었던 핵발전소도 2007년 동일하게 파괴시켜 버렸다. 지금도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징후가 있을 경우 폭격하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음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다. 1994년 영변 핵발전소를 파괴시키자는 계획을 한국 국민들이 반대하였다고 말하면, 이들은 너무나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이 언젠가는 핵미사일을 만들어 공격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오래전부터 BMD를 구축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드와 유사한 위력을 가지는 애로우(Arrow)라는 요격미사일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2000년부터 배치한 다음에 지속적으로 성능을 향상시키고 있고, 패트리어트(PAC-3)를 미국으로부터 구매하여 2회의 요격을 보장하고 있다. 이것도 불안하여 이스라엘은 데이비즈 슬링(David's Sling)이라는 이름으로 애로우와 패트리어트 사이에서 한번 더 요격하도록 계획하여 금년부터 배치해 나가고 있고, 로켓탄이나 포탄까지 요격할 수 있는 아이언 돔(Iron Dome)도 개발하여 배치하고 있다.

이스라엘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총력을 기울여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고자 노력해야할 상황인 것 같은데, 미군이 배치해주겠다는 사드를 반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한 1/4 정도의 국토에 그와 같은 수많은 무기를 배치하고 있는 이스라엘로서 한국이 전자파 피해가 두려워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드의 5배가 넘은 유해범위를 가진 그린파인 레이더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이스라엘 아닌가?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이고, 어느 국가도 그들을 공격하겠다고 말하지 않지만, 국민개병제를 유지하고 있고, 대규모 민방위대를 조직해 두고 있다. 스위스는 1990년 대에 이미 국민의 100%가 대피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하였고, 대표적인 공공대피소인 소넨베르그 터널은 2만명을 동시에 수용하여 2주간을 견딜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으며, 각 가정별로도 유사시를 대비한 대피소와 필요한 장비들을 준비해두고 있다. 한국 서초동의 트라움 하우스라는 빌라는 이 스위스의 기준을 적용하여 대피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스위스 국민들의 입장에서 북핵 위협에 대한 한국의 무심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드와 같은 방어무기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러한 논란을 어떻게 생각할까? 스위스 국민들이 한국에 왔다면 당장 대피소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을 것이다.

우리가 외국인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지만, 객관성은 가질 필요는 있다. 우리 내부의 갈등에 지나치게 함몰될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보편적 기준으로 우리를 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사드 배치가 아닌 핵대비 토의

현 상황에서 우리가 자문해야할 질문은 사드 배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북한이 핵미사일로 공격한다면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가?”이다.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으나 불안하다면 개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답답한 이야기지만, 현재 상태에서 북한이 핵미사일로 공격한다면 한국은 이로부터 국민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북한의 핵위협으로부터 나 자신, 내 가족, 내 후손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국론을 결집하고,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나가야 한다.

정부부터 북핵 대응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국민들이 안심할만한 대응전략을 수립하여 보고해야 한다. 태세가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하고,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하여 보강해야 한다. 청와대 조직은 물론이고, 국방부, 국가정보원, 외교부, 국민안전처 등도 업무의 우선순위와 조직도 북핵 대응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관련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하여 북한의 비핵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여의치 않을 상황에 대비하여 필요한 조치를 식별하여 구현해 나가야 한다.

정치인, 예를 들면 국회의원들의 대오각성과 변신이 필요하다. 국가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그 어려운 국회의원에 도전하여 성공하였다면, 현재의 언행이 국가를 위한 일인지 아니면 자신의 영달만을 위한 것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국민들의 상당수는 그들이 당리당략에 함몰되어 있고,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국가안보도 희생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전에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두고 당에 따라 의견을 달리했던 과거 역사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삼권분립’을 명분으로 국회의 권한을 주장 및 행사하고자 한다면, 국정에 관한 3분의 1의 권리에 수반되는 3분의 1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무조건 정부만을 비판하고, 오히려 국민들의 갈등을 조장해서는 곤란하다.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민중의 지팡이’로서 사실 여부를 따져서 보도했는지 아니면 일부 인사가 제기한 루머를 전달하는데 급급했는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결정하지 않으면 무책임하다고, 결정하면 졸속 결정이라고 어떻게든 비판할 꼬투리를 잡고자 노력하지 않았는지? 정부가 공개하지 않으면 불통이라고 하고, 공개하면 국가기밀을 노출시켰다면서 결국은 모든 것을 정부의 책임으로 몰아가지 않았는지? 일부 인사가 의도적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지는 않았는지? 특종이라는 유혹에 국익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지 않았는지? 작은 글재주로 표시나지 않게 오히려 의혹과 불신을 키워오지 않았는지?

그러나 반성과 분발이 가장 필요한 국민들의 집단은 지식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과학적 평가로 정확한 사실을 규정해주면 루머가 발생할 수 없을 것인데, 그들은 계속 방관과 3자적 관점만 지속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광우병, 천안함 폭침 원인과 같이 명백히 과학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그들은 수수방관함으로써 루머가 나라를 휩쓸도록 하였다. 사드의 전자파도 너무나 명백한 과학적 사항이지만, 적극적으로 나서는 과학자들은 소수이다.

오히려 어떤 지식인들은 일부 인사들의 루머를 추종하거나 퍼트리고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처럼 나라를 바로 이끌어야할 집단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필요하다면 국민들에게 듣기 싫은 말도 해야할 것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주(周)나라의 고사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듯이, 아무리 고고한 지식인이라고 국가라는 공동체에 의존하여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배운 지식으로라도 그 공동체에 보답해야하는 것 아닌가?


>질문과 부탁

아직도 나라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인사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까지 주장한 의혹 중에서 한 가지라도 맞은 것이 있는가? 도대체 왜 이러는가? 정말 스스로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 주변의 몇몇이 아닌 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가? 광우병 사태나 천안함 폭침 때 본 재미를 재현하고자 하는가? 여러분들의 자식과 손자들에게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을 자랑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사진을 찍고 앨범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자식과 손자를 지킬 수 있는 복안을 갖고 있는가?

성주군민들에게 간곡하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필자도 고향이 그 근처라서 성주에 배치된다는 결정을 들었을 때 기뻤습니다. 우리 고향도 보호될 것이고, 우리 일가친척도 더욱 안전해질 것이라면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내 고향에서는 언제나 나보다는 가정, 가정보다는 동네, 동네보다는 지역, 지역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성주군민들은 당연히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주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기대와 너무나 달라서 실망이 큽니다. 자초지종도 듣기 전에 반대하고, 아주 오랫동안 시위해온 사람들처럼 익숙하게 시위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낯설었습니다. 정말 전자파가 유해해서 시위하나요, 아니면 지역적 이익을 더 챙기기 위해서 시위하나요? 후자라면 법도에 맞는 건가요? 성주의 서당에서 여러분들을 가르치시던 어르신들이 보시면 호통을 치지 않을까요? 제발 양반의 고을, 성주를 되돌려 주세요.

성주가 반대한다기에 나는 아직도 형수와 내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고향의 군수에게 전화할 생각까지 하였다. 대신 배치를 자청해달라고. 레이더는 절대로 유해하지 않고, 오히려 북한의 핵미사일로 지역주민들이 보호받을 것이라고. 북핵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이 되어 투자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조금 지나 북핵 위협이 더욱 심각해지면 서로가 사드를 배치해달라고 할 것이라고.


2016년 9월 13일 화요일

북한의 붕괴와 세력균형






국제정치 현실주의 학자들은 평화가 세력균형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국제평화가 집단안보 체제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고 희망한다. 양쪽의 주장은 이론으로서도 아직 학자들에게 인용되고 있지만, 현실에서도 아직까지 적용되고 있는 선택의 툴이다. 한국이 1991년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이라크 전에 참전한 것은 다분히 현실주의적인 선택이었고, 유엔 평화유지군에 참전하는 것은 자유주의적인 선택이다.

 북한이 붕괴하는 과정이나 혹은 붕괴 후의 한반도 주변의 국제적인 역학구도에 대한 분석이나 처방도 이 두 가지 관점,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또 한가지 보완적으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한반도 내외의 소위 ‘소프트 파워 혹은 스마트 파워’를 중요한 동인으로 생각하는 구성주의적 관점이 때로 유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은 지금까지 연구해왔던 산물들을 잘 활용하여 작금의 한반도 주변의 역사적 대변동을 잘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다시는 구한말에 벌어졌던 행태를 반복하여 주변 강국에 먹히는 혹은 지배적인 구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행착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22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최근에 북한 엘리트층조차 무너지고 있고, 북한의 주요 인사들까지 탈북과 외국으로의 망명이 이어지는 등 심각한 균열 조짐을 보이면서 체제 동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틀 전 미국의 국제전략연구소(CSIS)는 미국 의회 요청에 따라서 국방부 위임을 받아 작성한 ‘국방전략 검토 보고서’에서 “김정은이 국가 생존을 위한 필연적 개방과 이 개방이 정권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고 하면서 “북한 지도부는 개혁 능력이 없으며 외부 세계와 시장 거래를 트고 정보를 유입하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을 깎아 내리고 체제 붕괴를 야기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보고서는 “엄격한 정치체제와 자유로운 사회는 조화가 불가능하다”며 “언제 체제 붕괴가 촉발될지 알 수 없지만 현 체제는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보고서는 또 “북한 정권의 붕괴는 즉각적으로 거대한 안보 도전 상황을 조성할 것”이라며 미국이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도 지난 8월 11일 신용전망보고서에서 “북한 정권이 65년 이상 유지됐지만, 내부에서의 경제적, 정치적 압박이 갑작스러운 정권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는 한국에 있어서 거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무디스는 한국에서 지정학적 돌발 위험이 현실화될 경우 직접적 군사대치보다는 북한 내부의 정권붕괴로 인해 한국의 금융시스템에 직접적 압박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북한의 정권붕괴는 한반도에서 무질서한 통일과정을 불러와 한국의 신용도를 짓누를 것이라고 무디스는 전망한다.

무디스는 또 “북한의 ‘수소탄’ 실험과 이에 따른 한국의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로 긴장이 고조되고 지정학적 위험이 높아졌다”면서 북한의 경제개혁은 권력을 분산시키고, 북한의 이념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정권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국제전략연구소에서의 정치적 관점에서의 분석이나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의 경제적 관점에서의 분석 모두가 조만간에 북한의 붕괴를 예측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도 뭔가 구체적으로 북한의 붕괴에 대하여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북한의 핵무기를 경계하는 것은 핵무기 보유 그 자체가 아니라 북한 정권이 급격하게 붕괴될 경우, 그 붕괴과정이나 붕괴 후의 핵무기 관리에 대한 우려 때문일 수도 있다. 미 외교협회(CFR) 박성태 연구원은 외교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 기고를 통해 ‘북한이 그들의 목표대로 안전하고 실행가능한 핵억지력을 개발할 경우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무기 보유국이 될 것’이라며 ‘이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비(非)이성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정권이 사전 예고 없이 불시에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북한이 갑작스러운 내부 붕괴에 직면할 수 있는 유일한 핵무기국이라는 점에서 정상적인 핵보유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 김정은이 붕괴의 혼란 상황에서 과연 핵무기를 확실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북한 지도부가 이 같은 상황에서 한미의 움직임을 포함해 정확한 주변상황에 대한 파악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핵무기 사용 셈법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들은 북한 정권의 붕괴 과정에서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주요 변수들이다.

세상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변하고 있다. 산술급수적 증가에 익숙해온 사람들이 도저히 적응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지난 여름에 미국 시카고 미시간 호수 근처에서 지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 호주에 있는 딸에게 카카오톡으로 연락하니 내 위치를 확인하여 1분도 안되어 시카고의 우버 택시가 내게로 달려왔다. 한 20년 전에 대통령이나 큰 재벌들이 누릴 수 있었던 서비스를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고 누구나 쉽게 누리고 있다. 한국에서 지난 5,000년 동안 소로 끌어 농사짓던 일을 불과 50년만에 스위치 하나로 트랙터가 농사짓는 시대로 바꿔 버렸다. 앞으로 50년 뒤에 또 세상이 어떻게 변할 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해 가는데도 남북간의 증오심이나 이념경쟁의 딜레마는 한치도 변하지 않고 있다. 신 자유주의 국제정치 학자 조지프 나이도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아랍과 이스라엘의 증오심이나 갈등이 어째서 투키디데스가 적었던 펠로폰네시아 전쟁 당시의 도시국가간의 갈등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고 있는 국가간의 증오심과 반목갈등의 일관성에서 어떤 논리를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국가간의 분쟁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어떤 일관된 법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투키디데스와 같은 국제정치 현실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세력균형의 법칙이나 전쟁이냐, 협상이냐의 선택의 법칙이 아직도 지구상에서 한치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또 붕괴 후 한반도에 세력공백이 생겨날 경우 벌어지게 될 한반도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국들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세력균형의 법칙이나 혹은 그 해결책이 전쟁이냐, 정치적 협상이냐의 선택의 법칙에 묶여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북한의 붕괴과정에서 유엔이 어떤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유엔이 그 동안 북한핵과 북한의 인권문제를 관리해온 전철을 통해 감안해볼 때 그 희망이 매우 낮아 보인다. 결국 전통적인 현실주의 학자들의 주장대로 군사력과 같은 하드파워 혹은 신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경제력이나 정보력, 문화력 혹은 상호 의존성(interdependence)과 같은 소프트파워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싸드 논쟁에서 보듯이 싸드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군사적 효과가 문제가 아니라 싸드의 결정을 통한 상호 의존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지난 8월 2일 발표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충돌과 협력’ 보고서에 보면 북한이 심각한 경제 쇠퇴와 정치•군부 엘리트의 균열, 그리고 외부 압력에 의해서 향후 25년 안에 붕괴하거나 붕괴직전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국방부와 국토안보부에 정책연구과제로 제출된 이 보고서는 북한 정권의 붕괴가 중단기적으로 역내 긴장고조와 불안정, 군사적 충돌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경쟁적으로 북한의 권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개입하면서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북한 정권의 내부 불안정과 붕괴로 촉발될 수 있는 미중 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미국이 장차 이 지역에서 직면할 주요 안보 위협 중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미국과 중국, 한국이 북한 붕괴 시나리오에 따라 비공식적으로라도 대응 방안을 서로 협의해 나가야 한다고 권고한다.

북한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중국은 어떤 행태를 보일 것인가. 일부 전문가들의 말대로 중국군이 북한내 친중인사들의 요청으로 국군보다 먼저 북한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인가? 만일 그렇게 한반도의 절반이 중국의 영향하에 놓이게 된다면,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은 현재보다 수십배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질 것이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이 ‘김정일=국가’이기 때문에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체제이고, 그것은 ‘외세(外勢)가 개입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라고 말한다. 북한땅에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전략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외세는 사실상 중국뿐이다. 북한 붕괴 후 최악의 시나리오는 친중(親中) 정권이 들어서 중국군이 진입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친중 성향의 새 정권이 국가위기 사태를 선포하고 ‘상호우호협력조약’ 등을 근거로 중국 정부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 중국은 합법적으로 북한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중국 인민대 국제정치학자인 스인홍(時殷弘) 교수는 “북한땅은 중국의 전략적 완충지대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북한 급변 사태가 한•미 연합세력의 주도로 정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북한의 붕괴 과정에서 북한 정권 내 친중, 친미 세력 간에 내전이 발생하고 중국군과 한•미 연합군이 각자 북한 영토를 점령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북한이 붕괴하는 과정이나 붕괴후의 한반도의 상황에서 단지 한국만이 아니라 주변 강국들이 그들의 국가이익을 관철하기 위하여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결국 북한 붕괴 이후 한반도의 상황은 현실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강대국을 비롯한 그 외 주요 행위자들의 세력균형에 의하여 새로운 평화의 방법이 모색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신 자유주의자들이 설명하고 있는 다차원의 경제, 사회, 환경적인 상호의존성에 의해서 새로운 판도가 결정될지도 모른다. 현실주의자들은 국력과 국가 생존에 대한 위협을 강조하면서 군사력을 가장 중요시하고 주로 국가를 주요 행위자로 보는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군사력만이 아니라 또 국가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동기나 문화적인 동기, 환경적인 동기나 사회적인 공동가치와 같은 것들이 국가를 초월하여 뚜렷한 세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이제 분명 국력이나 군사력의 세력균형이 아니라 뭔가 그 이상의 도덕적인 의지들에 의하여 국제질서가 잡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 자유주의자들은 권력뿐만 아니라 상호의존성을 권력의 원천으로 보고 ‘비대칭적인 상호의존’의 개념을 새로운 권력으로 분석한다. ‘비대칭적인 상호의존’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 어느 쪽이 더 서로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는가가 권력의 서열이라는 것이다. 신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를 접촉, 연결하는 다양한 채널이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국가간의 관계뿐 아니라 초국가적이고 초정부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으며 이러한 접촉을 국가가 독점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인터넷이나 SNS와 같은 채널은 결코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세력임에 분명하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만일 한나라의 국력이나 군사력만을 생각한다면 한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과 같은 균형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은 필요한 만큼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신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이야기하는 정보력, 문화력 그리고 민주적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소위 ‘상호의존 세력’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붕괴과정을 마치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장대라도 들고 이건 우리 집 담장 안의 감이라고 외쳐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http://www.military.co.kr/bbs/zboard.php?id=board_kim&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05

2016년 9월 9일 금요일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G2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

어떤 현상이 발생하면 그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냥 현상만 나열한다면 별 의미가 없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사안에 대하여 깊은 지식이 없고 분석능력도 떨어지면 원인 분석을 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 머리도 나쁘다면 분석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럼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국력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지 생각해 보자.

1. 중국은 스스로를 대국이라고 지칭하면서 다른 국가들에게 자신을 대국으로 대접해 달라고 징징대는 등 세련되지 못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하여 미국은 스스로도 대국이라고 생각하고 대국 처럼 행동하지만 겉으로는 ‘국제사회에서의 지도적 위치’ 또는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국가’ 등으로 세련되게 돌려 표현하면서 포장을 잘하고 있다.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는 국제사회에서 지도적 지위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2. 중국은 경제적으로 G2라는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피를 흘리지도 않았고 또 흘리고 있지도 않다. 미국은 국세사회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의 엄청난 전쟁을 치루어야 했으며 지금도 아프카니스탄 등지에서 자국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있다. 제국이란 위치는 공짜로 달성되지 않는다. 그 만큼의 피가 필요하다.

3. 기존의 미국 중심의 질서에서 국제사회는 어느 정도 미국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안정적인 국제관계 형성이 가능하나 중국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는 예측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중국 정부는 내부 의사결정 구조가 불투명 하고 국가의 기본 정책이 형성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향후 행동에 대한 불가측성이 높다. 이런 불가측성은 국제 사회가 중국을 불안하게 생각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일례로 이번에 영국에서 문제가 된 원자력 발전소 수주건은 BOT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중국측에서 콘소시움을 구성하고 기채까지 직접 담당하여 공사를 진행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런데, 중국 측 원청회사에서 아마도 원자력 발전소 설계 기술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어 핵무기 설계 등 다양한 원자력 관련 설계 기술을 갖고 있는 회사를 설계기술 보강 차원에서 중국측 콘소시움에 참여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내부적인 판단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콘소시움 참여자 구성에 변화가 있을 경우 발주처에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국제적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정도 사안은 사전 양해하에 큰 무리 없이 진행이 된다. 이에 대하여 영국이 보인 태도는 사안에 중요도에 비하여 개인적으로 지나차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민감한 반응은 상대국이 중국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외 안보/국방 정책과 관련해서 가장 중국의 바보 같은 정책은 구단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대륙국가로 바다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구단선과 같이 국방에는 별로 도움이 안되고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켜 중국을 예측 불가능하고 호전적인 국가라는 인식만 심어주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바다에 육상 방어선과 같은 개념으로 구단선을 그었는데, 바다는 그 자체가 통로이기 때문에 선방어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단선과 같은 방어 개념은 중국의 국제적 고립을 초래할 뿐 국방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중국은 아직 충분한 국내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으며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미국과 같이 수입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가 형성되기 불충분하다. 이 의미는 중국의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것으로 경제적으로도 리더의 위치에 자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중과의 무역과 관련해서도 한국이 수치상 출초의 상태이나 한국의 수출품은 대분분 중간재이며 소비재에 한정하여 무역 규모를 비교할 경우 중국이 $1백억 정도 출초인 상황이다. 즉, 소비재 무역은 중국이 이익을 보고 있는 것이다.

5. 중국 국민들의 매우 낮은 민도와 문화수준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형성하게 만든다. 중국인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모든 중국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히나 중년 이상의 중국인들은 학교 생활을 제대로 해보지 못해서인지 행동이 매우 거칠다고 무례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중국은 엄청난 경쟁 사회로 기다리면 자신의 차례가 돌아온다는 경험을 축적하지 못하였다. 그 이외에도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경험해본 중년이상의 중국인들은 남에 대한 신뢰도가 거의 바닥인 수준이다. 이런 경험들은 결국 중국인들에게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매우 사치스러운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을 위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문화를 만들어 내었고 그 문화가 세대를 거듭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중국인 엄마가 파리 길거리 한복판에서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아이가 응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6. 시진핑은 지금까지의 중국 공산당 내부 관례에서 벗어나 장기집권을 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 국가들과의 국제적 마찰은 중국 내부의 긴장감을 높여서 시진핑 자신이 장기 집권을 도모하는데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국제적 긴장감을 중국 스스로 높여가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불심감어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7. 위의 3번과 6번에 서술한 내용과 관련된 것인데, 중국은 지금 기존 국제 질서에 대하여 매우 거칠은 방법으로 현상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경제 규모가 G2 수준으로 성장한 것에 대한 자신감이 반영되는 것 같은데, 기존의 국제 관례를 깡그리 무시하고 수백년전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중화질서로 회기하려는 시도를 계속한다면 지속적인 국제적 마찰은 불가피 하다.

8. 현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의 힘으로 중국은 커다란 경제적 충격을 회피하고 있다. 기업 부채는 매우 위험한 수준에 달하였다. 과거 한국에서 IMF 관리 사태 직전의 기업부채 수준을 이미 오래전에 넘어 섰으며, 중국의 총부채 비율은 254%로 미국의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당시의 부채비율인 239%를 넘었섰다. 미국은 기축통화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부채비율에 이르기까지 파국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지만 결국은 금융시장이 붕괴하고 말았다. 그런데, 중국은 강력한 정부의 힘으로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다. 중국 경제가 붕괴하면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이 오기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들은 중국 경제가 붕괴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는 중국의 경제 운용에 대하여 매우 불신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이 시도하고 있는 현상 변경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기존의 국제질서를 수용하면서 아주 천천히 세련된 방법으로 하나씩 바꾸어 가는 길이 있다. 이 것은 과거 등소평이 후계자들에게 당부한 방법이다. 아니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번에 바꾸어 버리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현재 중국의 지도부는 첫번째 방법을 택하는 것에는 너무 답답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으며, 두번째 방법을 시도할 용기가 없는 것 같다. 이런 지도부의 입장으로 인하여 중국은 위험한 국가라는 국제적 인식만 확산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중국 한자식 표현으로는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중국이 G2로 대접을 받는 날은 아직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2016년 9월 3일 토요일

깡패와 집안호랑이

중국 대사가 제1야당 대표를 찾아가 협박했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혀 몇 가지 조사를 해봤다. 주로 싸드로 검색했다.

[창완취안 국방부장(장관)-한중국방장관 회담]
- 미국의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한중관계가 크게 훼손될 것이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장관) - 로이터통신 기자회견]
- 싸드배치는 한국이 ‘항장무검(項莊舞劍)’ 춤을 추는 꼴이다.
※ 참고 : ‘항장무검(항장의 칼춤)’은 항우의 책사 범증의 계략에 따라, 항우의 사촌 항장이 ‘홍문의 연회’에서 칼춤을 추며 유방을 암살하려고 했던 고사에서 나온 말. 다시 말해 항우(미국)의 사주에 따라 항장(한국)이 유방(중국)을 살해하기 위해 칼춤을 추고 있다는 뜻. 건방지기 짝이 없는 비유다.

[추궈홍 중국대사-김종인 만나서]
- 한국의 싸드 배치를 분명히 반대한다. 싸드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목표로 한 것이다. 싸드 배치가 한중관계를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다.
-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깨뜨리고 냉전식 대결과 군비경쟁을 초래해 긴장을 고조시키고 불안을 고조시키는 악순환이 닥치더라도 한국에 안전이 보장되는지는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시진핑]
- 북한의 4차핵실험 후 박근혜의 핫라인 전화를 1개월 동안이나 받지 않았다.
- 북한이 광명성 로켓을 발사할 것 같자 시진핑이 전화했는데, 밤이 늦어 박근혜는 다음 날 받겠다는 여유를 부려 복수했다고 한다.

[CCTV]
- 미국 사드 배치 한국 국방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환구시보 - 인민일보 외교전문 자매지]
- 한국은 오랫동안 미국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그것은 보호인 동시에 납치돼 있는 것이다.
- 한국은 한미의 이익이 불일치하는 순간에도 종종 미국을 맹종해 북한에 대해 과도하게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위협한다
- 미국이 중국에 이것저것 요구하면서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정세의 ‘엉덩이나 닦으라’고 한다. 한국은 미국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
- 한반도에 ‘물고기가 죽고 어망도 터지는’(전쟁) 상황이 오면 미국, 일본보다 더 두려워하게 될 나라는 한국이란 사실을 한국은 알아야 한다.
- 사드가 배치되면 인민해방군은 이를 전략적 고려와 전술계획의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 (공격대상이 될 것이다)
- 중국은 종합적 실력과 방어 능력, 안보의지를 제고해 다른 국가가 중국의 입장을 존중하게 해야 한다.
- 사드 배치는 중국의 안보이익을 위협하는 것으로 한국은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 사드가 배치되면 중국은 해방군을 동북지역에 배치해서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 전쟁을 원치 않으나 그런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상대해 줄 수 있다. 중국이 다리가 잠기면 누군가는 허리까지, 심지어 목까지 잠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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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협박을 보면 기가 막힌다. 저게 어디 21세기 호혜평등의 국가관계라고 할 수 있나? 저건 속국이나 식민지 국가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중국이 아직도 한국을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나는 고려나 조선이, 특히 조선이 중국을 사대했고, 중국은 고려나 조선을 속국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조선은 중국에게 조공을 바쳤고 중국은 조선왕을 책봉했음을 인정하다. 명나라에 간 사신은 관료를 만나기 위해 한겨울에 몇 시간씩 밖에서 기다려야 했고, 심지어 수문장에게 내쫓기지 않으려고 섬돌을 부여잡고 아등바등 버틴 일도 있었음을 나는 인정한다.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왕은 백관들과 함께 ‘중국을 숭모’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운 ‘은혜를 환영’하는 영은문(迎恩門)에 나가, 4배하고 꿇어앉아 황제의 칙서를 받았으며, 중국사신의 과도한 공물 요구를 경감받기 위해 중국황실에 로비도 했음도 인정한다. 세종대왕이 명나라 사신 앞에서 엎드리고 절하고 춤추고 만세도 불렀음을 인정한다.

조선 말 원세개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고종을 폐위시키고자 했으며, 고종이 임명한 외교관들의 부임을 중단시켰고, 10년 이상 조선왕실과 양반들과 조선의 외교를 좌지우지했음을 인정한다. 사실상 원세개는 조선총독이었고 사실상 조선은 중국의 식민지였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이고 대한민국은 조선이 아니다. 과거는 과거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솔직히 중국 자체도 역사의 반을 외세의 지배 하에서 살지 않았나?

더 중요한 것은 현재다. 현재의 모습을 보라. 도대체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국가들이 중국에서 배울게  뭐가 있나? 자유, 평등, 인권, 법치 등 우리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중국적인 것이 하나라도 있나? 그런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시스템에 중국적인 것은 하나라도 있나? 아니 중국은 그런 가치나 시스템을 추구는 하고 있나?

미안한 말이지만 내 눈에 중국은 미개하고 무식한 깡패로 밖에 안 보인다. 지식 수준도 그렇고 민도 역시 그렇다. 중국은 아직까지 1당독재국가이고 공산주의국가이며 민주주의는 없다. 군대나 법원조차 공산당의 하부조직인 나라가 중국이다. 탈북자들을 체포하여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나라가 중국이고, 티벳과 신강의 시위를 무차별로 살상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국경 밖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와 영토분쟁을 하고 있는 세계 유일국가가 중국이다.

그런 전근대적 가치관과 시스템을 운영하면서도, 중국은 아직도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고 자신의 전근대적 가치와 시스템을 주변국에 강요하며, 한국을 태생적으로 천한 졸부에 중국의 속국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위에 기술한 언행이 나올 수 없다.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라도 그렇다. 할아버지가 노비로 살았으면 나도 노비인가? 그게 중국의 가치관인가? 한국은 이미 봉건적 사상과 신분제를 완전히 극복하고 근대적 가치를 5천만 국민 모두가 가지고 있는 국가다. 자신은 지지리도 못살고 깡패짓만 하면서 조상 자랑만 하다가는 정신병자로 취급받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니 중국은 착각하지 마라. 우리는 옛날의 우리가 아니다. 더 배우고 더 익히고 더 개화되어야 할 나라는 우리가 아니라 중국 너희다.

전술한 중국의 언행을 보라. 저게 어디 국가라는 단위가 할 언행인가? 세상에 어느 국가가 이웃 국가에게 저런 깡패 언어를 쓰나? 세상에 일개 대사 한 놈이 제1야당 대표를 찾아가 저렇게 협박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

(그 대사놈을 쫒아내지도 못하고 묵묵부답했던 야당대표도 한심하다. 내 눈에 그 대사놈은 원세개로, 야당대표는 원세개 앞에서 쩔쩔 맸던 조선 대신으로 보인다. 원래 그런 정신나간 숭중모화주의자들은 언제나 있다. 그런 자들이 자기 나라 장관들 불러 호통은 가장 잘 친다. 그걸 우리는 집안호랑이라 부른다.)

2016년 9월 1일 목요일

유령의 도시

표제는 현역 북한 작가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반디’라는 필명을 가진 그 소설가는 7편의 단편을 묶어 ‘고발’이라는 제목으로 남한에서 단편소설집을 냈다. 반디가 몰래 반출시킨 7편의 소설은 하나 하나가 기가 막힌다. 뭐랄까 답답함, 분노, 막막함 뭐 이런 것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반디는 북한에 현존하는 반체제 작가다.

7편이 모두 한 가지 주제, 즉 북한을 이 지경으로 만든 김일성과 김정일과 마르크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북한체제를 무너뜨려야만 한다는 주제라는 공통점이 있으므로, ‘고발’은 옴니버스 소설이다. 이런 소설을 반출시켜 남한에서 출간했으므로 어쩌면 반디는 정체가 발각되어 이미 처형되었는지도 모른다. 웬지 그런 생각이 들어 읽으면서도 내내 우울했다.

이 책을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내가 비로소 북한의 내면을 들여다 봤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북한 내부의 환경과 인민들의 사고방식이 구체성을 지닌채 다가온다. 나나 우리가 지금까지 북한을 피상적으로만 봤었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먼저 ‘유령의 도시’라는 단편소설에 대한 독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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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민들이 3개월 동안 정신없이 준비했던 국경절 행사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행사 후에는 강한 총화사업(평가 및 비판)이 예정되어 있다. 외국의 눈도 있으니 김일성 광장 주변의 아파트는 모두 일정한 색깔과 모양의 커튼을 쳐야 한다. 김일성 광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한경희가 사는 아파트도 그래야 한다.

한경희는 아들을 안고 광장의 시민궐기대회에 참가한다. 그 때 남편을 닮아 태생적으로 약골인 세 살배기 아들이 광장에 있는 털보숭이 마르크스의 초상화를 보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울다가 곧 입에 거품을 물고 경기를 일으킨다. 그후 아들은 초상화만 보면 눈이 허옇게 뒤집어진다. 아파트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일성 광장의 마르크스 초상화가 창문에 비치면 그대로 거품을 물고 심지어 광장에 있는 김일성 초상화가 비쳐도 그렇게 된다.

할 수 없이 한경희는 창문에 덧커튼을 쳐서 어린 아들의 시선을 차단한다. 그러자 밖에서 보면 한경희의 아파트만 유별나게 보이게 되고, 가두 당비서는 덧커튼을 걷으라고 한경희를 닦달한다. 한경희가 아들의 증세를 얘기하며 거부하자 당비서는 덧커튼은 간첩들의 접선 암호 아니냐며 더욱 압박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지 않느냐’며 한경희는 아들이 김일성 초상화에 경기를 일으키는 현상을 해명해보지만, 오히려 그 사실이 더욱 그녀를 곤경에 몰아 넣는다. 소심하고 허약한 남편이 보위부장에게 불려가 된통 홍역을 치른 것이다. 남편은 ‘아들이 자신을 닮아 약골로 태어났다’는 핑계를 대지만, 보위부장은 ‘유전되는 것은 체질만이 아니다. 정신도 유전된다’며 비판한다. 부부의 정신상태가 불온하니 그렇게 된 것이라는 뜻이다.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한경희가 친 덧커튼을 걷어버리고 한경희와 부부싸움을 한다.

행사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행사 당일에도 그칠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난 평양사람들은 제일 먼저 하늘을 본다. 국경절 행사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인지가 제1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 하늘을 쳐다보지 않은 평양 사람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었으리라! 이날을 쫓아 목에서 겨불내(겨 타는 냄새)가 나게 달려온 지난 3개월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른 아침에 비가 그치자 평양 시민들은 일제히 집을 나선다.

“6시 경에 비가 멎었다. 병영에서, 학교에서, 공장에서, 방안에서 100만의 행사 참가자들이 일시에 왁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은 변덕스러웠다. 다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분도 채 못되어 하늘은 또다시 만용을 부렸다. 이번에는 비가 뿌려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늘을 뒤엎어 놓을 기세로 무더기로 내리 쏟아졌다. 사람들이 꽉 들어찬 지하도들과 공공건물들의 채양 밑과 아파트 복도, 현관들, 지하철 입구와 버스 정류소 대기장들 밖에서 삽시에 물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망호루(맨홀)들이 넘쳐났다.”

모두가 하늘을 쳐다본다. 8시, 9시…. 그런데 비는 행사시각 45분 전에야 ‘어디 행사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거짓말같이 멎는다.

시내에 산재한 100만 명이 45분 안에 광장에 모인다면 완전히 개인 맑은 하늘 아래서 행사가 산뜻하게 진행될 수 있다. 양각도와 모란봉 사이에 걸린 무지개가 허공에 ‘정시 행사 불가능’이라고 써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행사는 진행될 수 있을까? ‘3개월여에 걸쳐 준비한 북조선 국경절 행사 폭우에 밀려 뒷걸음!’이라는 전파를 어느 서방나라 기자가 본사로 날린다.

“하지만 그건 이 도시를 모르는 사람들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시민들에게 알린다. 행사는 정시에 진행한다. 각 단체들과 행사 참가자들은 자기들의 집결장소에 무조건 도착하라!’는 3방송(유선방송) 소리가 온 도시의 고막을 찌른다.”

작가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산탄마냥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지하도들과 공공건물들의 채양 밑과 아파트 복도, 현관들, 지하철역 입구와 버스 정류소 대기장들에서… (중략)… 3방송은 연신 ‘무조건 도착’을 촉구했지만 광장은 아직 텅 빈 채였다. 벽시계 분침은 벌써 10시 35분 전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30분전, 25분 전….

그런데 기적이 나타났다. 광장에 하나, 둘, 두부모 같은 대열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무조건’이라는 그 말이 도시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미치는 마술 쇠꼬챙이가 되어 두룸두룸 사람들을 꿰어다가 광장에 척척 내려놓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10시 5분 전에는 온 광장이 울긋불긋한 두부모들로 꽉 들어찼고, 1백화점 양쪽 도로부터 소년궁전 앞과 창전 네거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대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게 되었다.”

주석단에 간부들이 등장하고 3방송은 이렇게 방송한다.

“시민들에게 알린다. 우리는 금방 세인을 전율케 하는 놀라운 기적을 창조하였다. 9시 55분 현재 100만 군중이 대기장소에 모두 집결하였다. 폭우가 금방 멎은 최악의 45분 간에 우리의 100만 군중은…”

앓는 아이 때문에 행사 참가자 명단에서 빠져 아파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한경희는 “심장이 후두두” 떨렸고 전율을 느꼈고 무서움도 느꼈다. 다시 한경희의 느낌을 묘사한 작가의 표현을 보자.

“죽음의 계단을 넘는 일이라 해도 그렇게는 움직이지 못하리라! 불과 45분 안에 도시에 널려 있던 100만의 군중이 광장에 모여들다니! 무슨 힘이, 그 어떠한 무서운 힘이 이 도시로 하여금 이런 불가사의한 사변을 낳게 하고 있는 것일까?”

행사 후 “사상투쟁의 분위기에서” 전국에 걸친 행사총화가 연 1주일 동안 철저하게 진행된다. 가장 큰 처벌은 가차없고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추방이었다. 추방당하는 사람들은 이삿짐을 제 손으로 쌀 필요도 없었다. 기차 시간에 꼭 맞추어 이삿짐이 번개같이 싸지고, 추방자들은 트럭 짐칸에 실려 기차역으로 가야 했다.

북행 열차가 출발하기 한 두 시간 전인 밤 11시에 한경희네 살림살이도 그렇게 트럭에 실렸다. 한경희네가 받은 판결은 다음과 같았다.

“… 가정 혁명화에 등한하고 자녀 교양을 잘못했던 것으로 하여 행사에 해를 주는 일을 저질렀을뿐더러, 공산주의 시조 마르크스의 초상화를 비속화하고, 수령님의 초상화를 솥뚜껑에 비기는 등 당의 유일사상 체계를 세우는 사업에서 중한 과오를 범한 것으로 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