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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9일 월요일

“韓 전술핵 재배치땐 對北억지력 커져 … 北과 비핵화 협상도 가능”

大選서 쟁점 떠올랐던 전술핵

북한 핵위협 고조로 지난 5·9 대선에서 미국 전술핵의 한반도 재배치 문제가 쟁점 중 하나로 떠올랐다. 보수진영의 홍준표 자유한국당·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북핵 위기에 맞서 전술핵 재배치를 찬성하자, 선거에서 승리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진보진영 후보들은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지난 3월 중순 ‘전술핵 재배치 서둘러야 하는 까닭’이라는 제목의 글로 주목을 받았다. 최 부원장은 10일 인터뷰에서도 “전술핵 재배치는 가능하다”며 “미국도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전술핵 재배치를 찬성하는 이유에 대해서 “전술핵이 재배치되면 북한에 대한 억지력이 커진다”면서 “핵무기는 군사 작전적 효용보다 심리적 효용이 크다”고 말했다. 또 “북한이 핵 군축 협상을 하자고 하는데,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 핵을 가지고 있으면 북한이 비핵화하는 조건으로 우리 쪽에 있는 핵을 빼는 협상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한국 내에서 전술핵 재배치 주장은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 2009년 당시 최고위원으로서 “미국 인사들도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는 미국 측 기류를 소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촉발됐다. 정 전 대표는 지난 2011년엔 대정부 질문에서 전술핵 재배치를 거론했다. 한반도 비핵화 입장을 거스르는 전술핵 재배치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난달 공표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이 핵개발을 지속할 경우 미군 전술핵의 한반도 재배치에 찬성한다는 응답자는 56.8%였고 반대는 33.1%였다. 전술핵 재배치가 공개적으로 거론된 지 6년 만에 국민 여론은 찬성 쪽으로 기울어졌다.

최 부원장은 주한미군 전술핵 재배치에 따른 우리의 부담에 대해서 “물론 비용이 들어가는 문제가 있다”며 “핵무기 저장시설이 있어야 되고 관리하기 위한 체제도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운반 체계도 있어야 되고 주한미군 군사력 구조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최 부원장은 “비용에 대해서는 향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부담을 요구하거나 우리가 같이 부담하는 형태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수용 여부와 관련해 “진보 정부는 비핵화를 주장하지만 북한 핵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없다”며 “북한의 핵 능력만 더욱 고도화될 뿐”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연구기관에 따르면 북한이 오는 2020년대까지 보유한 핵무기 숫자를 최소 20기에서 최대 100기로 관측됐다. 최 부원장은 “현재 미군 내부에서도 한국 내 전술핵 재배치에 대해 상당히 지지하는 입장인 것으로 안다”며 “전술핵 재배치는 북핵 문제 해결에 빨리 나서라고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라고 말했다.

2017년 5월 25일 목요일

실사구시 대외정책을 기대하며

새정부 北위협 대응책… 
국제공조 강화가 필수 韓美간 윈윈 찾고 對中관계 개선 모색… 
日과 안보협력 위해선 정파-이념 넘어서야

새 정부가 어려운 대외환경과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 같아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날로 심각해지는 북한의 위협,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미국, 고압적인 중국,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딴지 거는 러시아, 각종 분쟁과 분열의 분위기가 확산되는 국제정세 아래에서 한국은 어디에 위치해야 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가 심각한 고민거리로 다가오고 있다.

새 정부가 최우선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는 북한 위협이다. 이에 대응하여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북한 문제에 관한 국제 공조가 우선적으로 고려•강화되어야 한다. 현재 미국은 북한을 최대의 안보위협으로 간주하고 ‘최대 수준의 압박과 관여’라는 정책으로 북한을 대하고 있고, 중국 역시 일정 부분 동조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한국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과 선택지가 주요 관련국들과 외부요인에 의해 설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감상적 주도권을 확보하고, 독립적인 움직임을 추구할 경우 자율성은 더욱 축소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국제공조를 강화할수록 자율성과 주도권이 확보될 수 있다. 김대중 정부가 대북 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페리 프로세스’로 나타난 한미일 공조가 기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미국과 대북정책 협의를 긴밀히 하여 어떠한 압박을 어느 수준까지 취할 것인지, 어떠한 조건과 상황하에서 대화에 임할 것인지, 대화와 비핵화는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등에 관한 협의와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한미동맹 조정과 발전에 관한 문제들을 협의하고 해결하는 것이 두 번째 중요한 과제다. 최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비용에 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동맹 관리와 운영 문제에 관한 한국과 미국 간 이견과 마찰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국방비 증액,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와 새로운 한미 간 지휘체계, 지역안보 문제에 대한 한국의 참여와 기여 등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또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도 강력히 거론될 것이다. 새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미국과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지를 고민하고 결정하여 서로가 ‘윈윈’하는 거래를 만드는 작업을 하루빨리 추진해야 한다.

한중 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 하는 것도 문제인데, 이것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사드 배치를 계기로 밀월로 보이던 한중 관계는 1992년 수교 이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으나,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중국은 한국에 ‘러브콜’을 할 것이다. 문제는 미국과의 관계와 북한의 위협으로 인해 사드 배치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이 보여준 민낯은 우리의 대중정책이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였다. 새 정부는 성급히 관계 복원을 추구하기보다는 중국의 부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면밀히 짚어보고 우리에게 유리하고 바람직한 구도가 무엇인지를 설정한 이후에 점진적이고 차분하게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느냐 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찾아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위안부 문제와 안보협력을 연계할 것인지 아니면 분리할 것인지, 안보협력을 한다면 어느 수준과 영역까지 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정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와 일본과의 안보협력을 분리 추구해야 한다. 위안부 합의 이행 문제는 지속적으로 협의하되 이를 전제로 안보협력을 논의하는 것에는 득보다 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과의 안보협력을 항상 원하고 적극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아베 신조의 일본은 제 갈 길을 가려고 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일본과의 안보협력은 어디로 튈지 모를 일본을 잡아놓는 방안으로도 고려되어야 한다.

어려운 대외환경과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이 출범하는 정부가 정파적 이익이나 이념적 성향을 넘어선 실사구시적 대외정책을 추구하기 바란다.

2017년 5월 21일 일요일

한국인의 미ㆍ중 인식 - “중국이 미래 경제 이끌고, 정치도 미국과 접전”

한국인 제2의 양극체제 실감
현재는 정치ㆍ경제 모두 美
미래에는 경제 中, 정치 美中 접전

여론계량분석센터 강충구 연구원

한국인은 동북아 내 미ㆍ중간 패권경쟁의 결과를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미국이 앞서고 있지만, 중국이 따라잡을 것으로 봤다. 동북아 맹주를 자처하며 팽창하는 중국과 ‘아시아 회귀’로 이를 봉쇄하려는 미국 사이 패권 다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1월 10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극적으로 타결된 뒤 역내 미ㆍ중간 갈등이 더욱 격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처럼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은 한국인의 미ㆍ중 인식을 조사했다.

한국인은 향후 경제에서는 중국이 미국을 앞지르고, 정치에서는 미ㆍ중간 패권 다툼이 가열될 것으로 봤다. 현재로서는 정치ㆍ경제 모두에서 미국을 패권국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향후 전망에서는 정치ㆍ경제 부문별로 예측이 엇갈렸다. 중국이 성장을 지속하고 있어 향후 경제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예견하는 응답이 과반(67%)을 넘었다. 정치 부문 전망은 미국이 앞으로도 맹주 역할을 할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으나(45%), 중국의 위상이 높아질 것으로 보는 비율(39%)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인, 아직은 미국을 패권국으로 인식
한국인은 중국의 영향력 확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의 패권국으론 미국을 꼽았다. 냉전이후 슈퍼파워를 유지해온 미국을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로 본 것이다. 미국의 패권은 경제(65%)보다 정치(82%)부문에서 뚜렷했다.

이와 달리, 중국을 패권국으로 본 한국인은 경제 25%, 정치 5%에 불과했다. 중국이 고성장으로 미국을 위협하고 있지만, 정치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다. 특히, 정치에서 한국인의 5%만 중국을 패권국으로 인정한 점은 중국으로선 실망스러운 결과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이후 양국 정상이 다섯 차례나 만나 협력관계 강화에 신경을 썼는데도 결과가 그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한국에 미치는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지만, 정치력에 대한 한국인의 평가는 냉정했다.



향후, 중국의 부상을 전망
그러나 미ㆍ중(G2)에 대한 한국인의 미래 전망은 현재와는 크게 다르다. 중국이 앞으로도 경제성장을 지속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22%)에 비해 중국(67%)이 경제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내다봤다. 최근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경제에서 중국의 굴기를 피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중국이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또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으로 경제력 확장에 주력하며 미국과 대립각을 세운 것과도 연관된다.

정치에서 미ㆍ중 경쟁구도에 대한 예측은 더욱 극적이다. 한국인은 ‘현재는’ 중국의 정치력이 미국에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했지만, 미래에는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국에 근접할 것으로 봤다. 정치에서 미국, 중국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본 한국인은 각각 45%, 39%였다. 현재 시점의 평가가 미국 82%, 중국 5%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은 경제에서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정치에서는 중국의 부상으로 미ㆍ중간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 질 것으로 봤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정치력 확장 기대감 높여
한국인은 향후 중국의 경제성장이 정치력 확장을 가속화시킬 것으로 봤다. 그동안 기록적인 경제성장이 중국 사회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왔다면, 미래에는 미국과의 패권경쟁을 심화시킬 것으로 본 것이다. 정치ㆍ경제적 영향력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미ㆍ중을 패권국으로 선택한 응답자(801명)만 분석했다. 그 결과, 향후 중국을 경제 패권국으로 본 한국인은 59%가 중국이 정치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미국이 미래에도 가장 큰 경제력을 행사할 것으로 본 한국인은 11%만 중국이 정치에서 맹주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ㆍ중(G2)의 경제적 영향력에 대한 한국인의 전망이 정치부문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미중관계, 경쟁으로 보는 한국인 증가
한국인은 미중관계를 경쟁으로 정의해 왔다. 북한의 3차 핵실험 직후 미중공조로 양국 관계를 협력으로 보는 한국인이 40%까지 증가했으나, 이를 제외하면 미중관계는 경쟁으로 인식되어 왔다. 최근 동북아 내 미ㆍ중간 갈등이 잦아지면서 양국 관계를 경쟁으로 보는 시각은 더욱 강해졌다.

앞서 중국의 팽창으로 미ㆍ중 대결이 본격화될 것으로 본 한국인의 우려가 미중관계 인식에서도 드러난 것이다. 특히, 올해 11월에는 미중관계를 경쟁으로 보는 한국인이 7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대로 협력관계로 본 비율은 18%로 가장 낮았다. 그만큼 한국인은 동북아 내 미ㆍ중 대결로 고조된 긴장감을 충분히 체감하고 있었다.


2017년 5월 3일 수요일

독일통일-8 (외교전쟁 中)

일단 외교전을 설명하기 전에 베를린장벽 붕괴(1989.11.9) 이후 진행된 각국의 만남과 협상, 그리고 그 와중에 진행되었던 동독 내부의 격변적 상황을 알아보는게 독일통일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이 남북의 통일 과정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통철력도 제공해준다고 본다. 그래서 대강의 사건만 연표로 제시하겠다.

○ [89/11/13] 동독 ‘모드로우’ 총리 취임.
   – 서독에 ‘조약공동체’ 구성을 제의.
○ [89/11/20] 시위 격화. 라이프치히에서 50만 명 시위. 처음으로 ‘독일통일 구호’ 등장
○ [89/11/28] 콜,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목’ 발표
   – “동독에 민주제도 도입해서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물어라”고 요구
○ [89/12/01] 동독, 콜의 ’10개항목’ 수용
   - 동독헌법 개정. 공산당 1당독재 조항 삭제

○ [89/12/07] 동독, 당 간부 및 재야세력으로 구성된 ‘중앙 원탁회의’
   - ”1990.5.6 에 ‘자유선거’를 실시한다”고 합의
○ [89/12/12] 미국 베이커 국무장관 발표
   -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조건으로 독일통일을 지지한다.”
○ [89/12/19] ‘콜-모드로우’ 회동.
   – ‘조약공동체’ 구성에 합의.
   – 콜은 동독에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동독 군중들에게 ‘나의 목표는 통일’이라고 연설

○ [90/01/30] ’모드로우- 고르바초프’ 회동
   – 고르바초프,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표
○ [90/02/01] 모드로우, ’4단계 통일방안’과 통일독일의 ‘중립화’ 계획 발표.
   – ‘콜’은 통일독일의 ‘중립화’에 반대
○ [90/02/05] 동독 제 정당, 선거제휴를 위해 ‘독일연맹’ 결성
   – 독일연맹은 서독 기민당의 후원아래 결성되었으며, 신속한 통일을 공약
○ [90/02/06] 콜, ‘화폐통합’ 제안
○ [90/02/10] ‘콜-고르바초프’ 회동
○ [90/02/13] ‘콜-모드로우’ 회동.
   – 모드로우 : ‘조약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안하면서 100~150억 마르크 지원 요구
   – 콜 : (야당과 언론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모드로우 요청 거절.
   - 그러나 양측은 ‘화폐공동체’ 도입을 위한 협상개시에는 합의

○ [90/02/14] ’2+4회담’ 원칙에 합의
   – ’2+4′는 미,영,프, 소 및 동서독을 의미함
○ [90/02/15] 콜, 다시 한 번 “나의 목표는 가능한한 조속한 통일”이라고 발표
○ [90/02/21] 서독 내무장관-베이커 미국무장관 회동
   - “통일후 다른 영토의 독일편입은 없다”고 약속
○ [90/02/24] ‘콜-부시’ 회동
   – “통일독일의 ‘NATO 잔류’에 합의했다”
○ [90/03/18] 동독 ‘인민의회 선거’ 실시
   – 신속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48.1% 획득하여 승리(공산당 후신 ‘민주사회당’ 대패)
   – ‘바르샤바 조약기구’ 외무부장관들, 독일통일 인정
○ [90/03/20] 서독정부 발표.
   – “통화, 경제, 사회통합을 1990년 여름까지 완료하겠다”
○ [90/03/29] ‘콜-대처’ 회동

○ [90/04/05] 선출된 동독 의원들, 동독 “인민회의” 결성
   - 반공 변호사 ‘로타 드메지어’를 총리로 선출
○ [90/04/06]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 발표.
   – “통일독일의 NATO잔류에 반대한다.”
○ [90/04/20] ‘부시-미테랑’ 회동 및 발표
   - ”미국과 프랑스는 독일통일에 합의했다.”
○ [90/04/29] 동서독 총리 발표.
   – “7/1부로 양국은 화폐, 경제, 사회를 통합한다”
○ [90/04/29] ’드메지어-고르바초프’ 회동
○ [90/05/02] 동서독 정부, ‘화폐통합’에 합의
○ [90/05/05] 제1차 ’2+4 회담’ 개최
○ [90/05/16] 베이커 미국무장관 모스크바 방문, 통일독일의 ‘NATO 가입’ 협의
○ [90/05/30] 미소 정상회담. 통일독일의 ‘NATO 잔류 문제’ 합의 실패
○ [90/06/08] ‘콜-부시’ 회동
○ [90/06/11] ’드메지어-부시’ 회동

○ [90/06/17] 동독의회 안건채택.
   – “동독국가를 해체하고 통일한다”
○ [90/06/20] 동서독 의회 결의.
   – “2+4합의에 따라 오더-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한다”
○ [90/07/01] ‘화폐, 경제, 사회통합조약’ 발효. 동서독간 분계선 폐지
○ [90/07/15] ‘콜-고르바초프’ 회동.
   – 통일독일의 ‘NATO잔류’에 합의
○ [90/08/22] 동독 인민회의 결정.
   – “10월 3일부로 서독으로 통합한다”
○ [90/08/31] 동서독, ’통일조약’ 가서명, 동서독 ‘국무회의’ 인준, 양독 ‘통일조약’에 서명
   – 서독기본법 제23조에 의거, 동독 6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하는 형식
○ [90/09/12] 제4차 ’2+4회담’.'독일문제 최종해결 조약’ 승인

○ [90/09/20] 동서독 의회.
   – ‘통일조약 비준안’ 가결
○ [90/09/24] 동독, ‘바르샤바 조약기구’ 공식 탈퇴
○ [90/10/01] 4대전승국 외무장관 회동 및 서명.
   – “10/3부터 ‘베를린과 전체독일에 대한 전승국의 권한과 책임의 효력을 정지한다”
○ [90/10/03] 독일통일 선포
○ [90/10/12] 독일 외무장관-소련대사. “소련군 기한부 주둔에 관한 조약” 서명
   – “소련군은 1994 말까지 철수한다.”
○ [90/11/14] 독일-폴란드. ’국경조약’ 서명
   – “‘오더-나이세 선’이 양국의 국경선이다.”

이는 하나하나가 대단히 복잡하고 중요한 사건과 협상과 결정이라고 할 정도로 격변의 연속이었다. 하나하나마다 치밀한 준비가 산더미같이 필요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위에서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간단한 ’화폐통합’이란 단어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협상과 준비가 필요했을까?

저런 격변의 연속 속에 각국은 외교전쟁을 했다.

나는 독일통일과 관련하여 각국의 무수한 만남과 전략과 배신과 협력, 그리고 콜이 얼마나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했는지를 기술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당시 각국의 이해관계와 대략적인 전략, 그리고 그 결과만 기술하겠다.

먼저 프랑스.

프랑스는 독일통일을 가장 바라지 않는 나라일 것이다. 과거 100년 동안 독일로부터 세 번이나 침공을 당해(프로이센 전쟁 및 1,2차세계대전) 개피를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베르린장벽 붕괴 후 콜이 “독일인은 자결권을 가졌다”고 선언하자,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은  “고르바초프 입지를 약화시키고 복잡한 영토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며 콜을 비난했다. 콜이 ’10개항목’을 발표하자 또 다시 “경솔한 기습공격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테랑은 1989.12.6. 고르바초프와 만나서는 ”유럽의 안정과 평화는 동서독이 존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의견일치를 보았고, 12.21. 동독 ‘모드로우’ 총리와 만나서는 ”경제발전을 위해 프랑스가 적극 투자하겠다(그러니 서독에 병합되지 마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미테랑은 또한 콜에게 ”대처 영국 총리를 조심하라”고 이간질을 하면서도, ‘대처’에게는 “독일의 부활을 경고”하는 등 2중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다음은 영국.

영국은 통일독일이 유럽통합을 촉진시켜,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영국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에서 큰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을 견제하는 입장이었으니, 속으로는 프랑스보다 독일통일을 더 반대했다.

영국의 기본입장은 ‘가능한 한 독일통일을 늦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를린장벽 붕괴 전후 시기부터 독일통일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한편으로는 독일통일이 급속히 진행된다면 NATO, EC, 헬싱키선언 서명국(35개국) 등 온갖 나라들을 끌어들여 독일통일을 논의하게 만듦으로써,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는 전략도 수립했다.(이는 소련의 전략이기도 했다).

‘대처’는 고르바초프와 만나 “독일통일에는 독일 주변국들의 희망과 이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어느 서방국가도 동독 내정에 개입하거나 동독과 소련의 안보를 위협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심지어 대처는 소련군의 동독 주둔을 원하기도 했다.

2017년 5월 1일 월요일

독일통일-7 (외교전쟁 上)

1989.11.9.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이 때부터 통일을 선언하는 이듬해 10월 3일까지 약 11개월 동안 동서독을 비롯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수반들과 관리들은 각자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가 무수히 만났고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이 6개국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6각 줄다리기’를 했다. 각자 합종연횡을 했고, 교묘한 전략을 썼으며, 겉과 속이 다른 말로 상대를 속였다. 그 와중에 동독에서는 데모와 체제 급변이 진행되었으니, 그야말로 카오스의 연속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잡은 사람이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이었다.
콜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된지 20일도 안된 1989년 11월 28일 “유럽과 독일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10개 항목(이하 ’10개항목’)”이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통일방안’을 발표함으로써 통일의지를 분명히 했다.

콜의 제안은 ‘서독기본법’에 엄연히 살아있는 통일관련 조항에 근거했다. 서독기본법은 통일을 헌법상의 명제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서독의 정치인들은 이전 회에서 밝혔듯이, 독일민족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 등 여러가지 이유로 통일을 입에 담지 않았었다. 그런데 콜이 ’10개항목’을 발표함으로써 통일의 이니시어티브를 쥐었다.

’10개항목’은 동독 ‘모드로우’ 총리의 조약공동체(이게 ‘연방제 통일안’인 것 같다) 제의와 지원요청을 거절하는 형식이었지만, 콜은 통일과 관련해 양독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동독에 ‘민주적인 합법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절대적인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다. 콜은 이렇게 요구했다.

○ 동독에 대한 지원은, ’동독 정치,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전환이 동독에 의하여 확정적으로 수락되고, 불가역적으로 시행되는 경우’에 한정된다.
○ 여기서 불가역적이란 동독 지도부가 동독의 ‘헌법개정’과 새로운 ‘선거법의 제정에  합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 동독은, 무소속은 물론 ‘비사회주의적’ 정당들의 참가가 보장되는 ‘자유·평등·비밀선거’를 실시하라.
○ 동독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해야 하며, 우리가 요구하는 ‘헌법적 조건’은, 무엇보다도 ‘정치범죄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고, 그 결과 ‘모든 정치범을 즉각적으로 석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동독에 민주제도를 도입해서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물어라”는 요구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말이다.

풍전등화의 동독은 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독이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통일에 대해 주민투표를 실시했던 것이고, 그 최종결과가 독일통일인 것이다.

사실 난마처럼 얼킨 주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고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콜’은 회고록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1989년 통일의 길에 나섰을 때만 해도 우리는 마치 늪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무릎까지 물속에 빠져 있었고 시야는 안개에 가로막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은 오직 하나, 그런 상황에서도 어딘가에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독일 ‘슈피겔지’는 이 때의 외교전쟁을 포커게임이나 체스게임에 비유했다. 이 게임의 대표 선수는 각국 정상들이었지만 외교관, 법률가, 정치인, 군인 등 수백 명의 전문가들도 자국의 이익을 위한 외교전에 투입되었다.

이 전쟁에서의 최대 승자는 ‘헬무트 콜’이었다. 그는 미국만이 독일통일을 찬성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콜은 처음부터 미국의 요구조건(통일독일의 NATO 잔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미국을 이용하여 주변국을 설득했다.

나중에 버티다 못한 소련이 “NATO를 탈퇴(중립화)하면 독일통일에 동의하겠다”는 제안까지 했지만 콜은 거부했다. 그는 통일 전 10개월 동안에만 부시와 8번, 미테랑과 10번, 고르바초프와 4번을 만났다.

2017년 4월 29일 토요일

미북 빅딜설

언젠가 제가 “미북 빅딜설”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학살이가 지금까지 나를 씹고 있지만…).

하지만 국제정치학적 거래에는 성역이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어제의 적이 오늘 친구가 되는게 아주 흔한 현상입니다.

최근 재미있는 설을 들었습니다. 바로 “미북 빅딜설”인데요. 나름 합리성이 있어 보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금 북핵을 둘러싸고 외교전쟁이 한창입니다. 트럼프는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이 문제이긴한데 처리될 것이다. 시진핑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할 것으로 본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그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우선 현재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 상황을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지금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다고 봅니다.

1) 시나리오1 (트럼프의 다중적 양동작전)

트럼프가 다중적인 양동작전을 시전하고 있습니다.

우선 시진핑을 압박하여 “북핵을 해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칼빈슨호를 몰고 들어오며 노골적으로 북폭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시진핑과의 회담 도중에 시리아에 수십 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날린 사실을 알려주자 시진핑은 10초간 할 말을 못하고 멍때리다가 통역에게 다시 통역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편 남한에서는 미국 특수부대가 참수작전 훈련도 하고, 미국 유명 TV 메인앵커가 용산기지에서 방송도 했다고 합니다.  이미 김정은을 인권침해범으로 올리기도 해서 국제적으로 수배령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건 확인 필요).

트럼프는 동시에 3가지 압박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즉 시진핑에게는 “북핵을 해결하라”고 압박하고, 김정은에게는 “북폭이나 참수작전을 각오해라”고 위협하며, 마지막으로는 국제적 현상수배범이 되니 “너는 도망갈 곳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시나리오2 (시진핑의 김정은 압박)

다음 수순은 시진핑의 김정은 압박입니다. 다음 전당대회에도 연임해야 하는 시진핑으로서는,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든지 중국산 수입품에 보복을 하면 시진핑의 연임은 물건너 갑니다. 시진핑은 실권하면 끔찍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빅딜을 성사시키면 시진핑은 그야말로 북한까지 잃게 됩니다.(이건 시나리오4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시진핑으로서는 트럼프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당 기관지나 다름 없는 중국언론이 공동성명이나 공동기자회견도 없이 끝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치 성공한 것처럼 보도하는 것도 시진핑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시진핑은 벌써 베이징-평양 간 항공노선을 폐쇄했습니다. 이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대북 송유관을 끊을겁니다. 이게 성공하면 김정은은 핵을 폐기하게 되고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납니다.

하지만 이게 실패하면 트럼프는 다음 수순으로 김정은에게 시나리오3나 시나리오4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는 북폭 또는 레짐 체인지이고, 다른 하나는 미북 간 빅딜입니다.

3) 시나리오3 (트럼프의 북폭 또는 레짐 체인지)

북폭 또는 레짐 체인지 움직임은 지금 여러 언론에서 주로 보도하고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그래서 서두에서 설명한 미국의 움직임도 그런 정황인데, 이건 김정은에게 북폭 또는 레짐 체인지를 각오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김정은은 막다른 골목에 갖혔습니다. 하지만 고양이 앞의 쥐도 마지막에는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그래서 협상의 귀재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제안을 남겨두었습니다. 그것이 시나리오4 즉 미북 간 빅딜입니다.

4) 시나리오4 (미북 빅딜)

이건 김정은이 핵폐기를 하면 섭섭치 않게 그 대가를 주겠다는 트럼프의 제안입니다. 그 대가란 바로 김정은 체제에 대한 미국의 보장입니다.

말하자면 미북수교를 하고, 미군이 평양에 1개 대대 정도 주둔하고 청진항 등에 미군함이 기항함으로써 김정은 체제를 보장해주겠다는 거죠. 물론 김정은 체제보장이란 외교적인 즉 국제정치적인 보장만을 의미합니다.

평양에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외침을 방지해 주고(마치 통일독일에 미군이 주둔하는 이유처럼), 김정은도 국제인권침해 현상범 리스트에서도 해제시켜 주겠다는 말입니다. 정규재 기자가 그런 주장을 하던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시진핑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거의 유일한 동맹국인 북한이 미국 편에 붙고 미군이 코 앞으로 바짝 다가오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정은이 선택해 버리면 시진핑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위험을 잘 알고 있는 시진핑은 시나리오2를 밀어부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됐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시나리오2나 시나리오3가 최후의 시나리오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건 김정은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김정은도 이 시나리오를 노리고 벼랑끝 전략을 펼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시나리오4를 너무 무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제한의 무대인 국제정치에서 이런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미북수교”와 “미국의 침공방지 약속”에 목을 매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제 기억에 주성하 기자도 “북한 지도층은 중국을 믿지 않으며, 그들이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이유가 미국으로부터 더 큰 대가를 얻기 위함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으로부터의 대가 중 체제보장보다 더 큰 대가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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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시나리오4가 실현된다면 그게 우리에게 이득일까요, 아니면 손해일까요? 제 생각에는 현상황에 한해서는 적어도 남한 사람들에게는 이득일 것 같습니다. 중국으로서는 악몽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북한주민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김정은을 제거하지 않는 한 계속 노예로 남아있어야 하는 악몽이 실현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 경우 우리는 우리 힘으로 북한주민들을 움직이던가 아니면 암살작전을 펴서 김정은을 제거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게 됩니다. 그걸 우리 리더가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북한주민을 위해서라도 시나리오3로 가서 통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니까요.

2017년 4월 25일 화요일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동아시아에 대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와의 인터뷰


■ 영토 야심과 맞물린 중국 민족주의 확산에 한·일 공동 대처해야
■ 북한 핵무기 절대 포기하지 않아… 6자회담 무용지물 될 것
■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은 취지만 좋을 뿐 실체 없어
■ 자본주의 양극화 폐해는 민주주의 정치체제 통해 극복 가능하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동아시아 민족주의가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하며 다자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한일간 관계 회복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는 나라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2008년 이후 공세적 외교 정책으로 전환했다. 중국의 부상을 꼭 위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큰 도전이다. 이해가 걸린 국가들 간에 함께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63)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동아시아에서 날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중국의 부상(浮上)에 역내 국가들이 경각심을 갖고 대처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중국의 남중국해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분쟁은 경제적, 법적 다툼이 아니라 민족주의 발흥에 따른 영토분쟁이라고 규정했다. 그 연장선에서 북한 체제가 취약성을 드러내며 붕괴하더라도 중국의 개입 가능성 때문에 남북 통일이 여의치 않을 거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미래 정치학자이자 역사철학자인 후쿠야마는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한 1989년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목받았다. 1992년에 이 논문을 바탕으로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을 출간했다. 공산권이 몰락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아 출간 동시에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키며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출간됐다. 이후에도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으로 세계적인 논객의 자리를 굳혀왔다. 월간중앙은 5월 6일 서울에서 그를 만나 동북아 민족주의 확산, 한일 간 역사 갈등, 북핵 문제 등 한국의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한국은 얼마 만에 다시 찾은 것인가?

“2년 전에 방문했다. 현재 ‘미국 민주주의 재단(The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NED는 전 세계의 민주주의 운동 확산, 시민사회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한다. 올 11월 서울에서 총회가 열린다. 민주주의운동 확산에 주력하는 이 기관에 대한 이해도 제고와 총회의 취지를 알리고자 방문했다.”

5월 6일 중앙일보-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포럼에서 특별 연사를 맡아 동아시아 다자주의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어떤 다자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나?

“많은 영역에서 다자주의가 필요하다. 경제 부분은 변화가 오고 있다. 중국이 경제분야에서 AIIB(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좋다고 본다. 이는 중국이 추구하는 동아시아 다자주의적 접근 방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안보 분야에서 중국은 전혀 다른 정책을 구사한다. 다자주의가 아닌 양자 관계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중국은 아시아 영토 문제도 경제 문제와 마찬가지로 다자주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동아시아 민족주의 고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적이 있는데?

“한·중·일 모두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시기인데다 서로를 자극하는 바람에 상황은 꼬여만 간다. 일본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아베 일본 총리만 해도 그렇다.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20세기 역사관을 가진 그가 하는 말에 한국과 중국은 반발하고, 또 일본은 계속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식으로 동북아 정세가 악화된다.”

강력한 미·일 동맹 추구, 보수주의적 국가 운영, 과거 역사에 대한 불철저한 반성으로 대변되는 아베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겠나?

“내가 아베였다면 위안부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사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회피함으로써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가 더 불편해졌다. 역대 일본 정부가 밝힌 사죄의 입장을 유지하고 수정하지 않는 게 일본 이익에 부합한다. 최근 체결된 미·일 간 신(新)방위협정 합의는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중요한 성과다. 하지만 아베의 과거 역사에 대한 해석은 동의할 수 없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나?

“중국은 꾸준히 영토 분쟁을 일으켰다. 중국은 2008년 이후 외교 정책이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부상을 꼭 위협으로만 볼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큰 도전이 될 것이란 사실은 확실하다. 중국은 분명히 영토적 야심을 강화할 것이다. 이해가 걸린 나라들이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중국은 계속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중국이 동중국해에서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것처럼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올 수도 있다. 남중국해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분쟁은 그 성격이 법적이거나 경제 자원을 둘러싼 분쟁이 아니다. 경제 관점에서만 보면, 실제 군사작전을 밀어붙일 합리적인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의 급부상과 중국 민주주의의 장래를 점쳐본다면?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 속도는 앞으로 점차 둔화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엄청나게 빨랐지만 그 속도를 유지할 수 없다. 6.5~7%의 성장률로 둔화됐다. 향후 몇 년간은 성장이 더딜 것이다. 중국식 거버넌스는 1978년 이후 매우 인상적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점들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중국식 성장 모델은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법치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기에 성장에 필요한 동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치는 시진핑 체제 아래에서 더 권위적으로 변했고 시민의 공론장인 인터넷의 자유도 줄었다. 이런 체제에서 부패를 척결하는 모습은 좋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다지는 결과만 낳는다. 공산당 지도부가 계속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AIIB가 중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줄까?

“AIIB가 금융 분야에서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의 성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지는 불확실하다. 중국은 자국 내 인프라 역량을 구축하려 하지만 그 성장 속도는 둔화될 것이고 수요 또한 감소할 수도 있다. 이 은행을 설립함으로써 중국 내부가 아닌 중국 밖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으려 들지도 모른다.”

5월 6일자 <중앙일보> 1면에서는 ‘한국 외교의 활로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전문가(24명), 일반인(1천 명) 설문조사 결과가 실렸다. 전문가들은 또 미·중·일·러 주변 4강과 한국의 정상 중국익을 챙기는 실리 외교를 가장 잘하는 지도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17명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꼽았다. 당신은 누구를 택하겠나?

“지금 언급한 국가 중에 정치적으로 잘하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진핑을 가장 잘하는 지도자로 뽑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교적으로 중국은 너무 공격적이고 동남아의 많은 국가에게 소외감을 안긴다. 일본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 시진핑이 외교를 잘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시진핑의 외교 정책과 통치 스타일을 덩샤오핑, 후진타오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중국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리더들의 외교 전략의 차이를 말하기는 어렵다. 상대적으로 덩샤오핑 때는 저개발 국가였기 때문에 큰 변화가 필요해서 경제개발에 많은 집중을 했다. 후진타오 시절엔 상황이 호전되면서 2008년부터 영토 문제에 손대게 됐다.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영토 분쟁을 이어갈 뿐이라고 본다.”

미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의 성과를 평가한다면?

“처음에 미국이 아시아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정책이 만들어진 취지는 좋았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오바마의 외교 정책에 대한 주요 연설 중 아시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게 그 방증이다. 그는 ‘회귀’라는 것을 이제 TPP협정으로밖에 살리지 못한다고 보고 있고, 그마저도 FTA 비준으로 이어질지도 불투명하다. 아시아로의 회귀는 아직 실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 이후의 리버럴리즘 미래를 어떻게 보나? 공화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게 없을 거라고 하던데?

“누가 선출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정치 체제라는 것이 언제나 의사결정을 방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돼도 의사 결정은 계속 지체될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인구 구성 측면에서 유리하다. 수적으로 보았을 때 민주당 지지자들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 지지층에는 히스패닉 계가 많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는 줄어들고 있다.”

“아직은 자유민주주의 대신할 체제 없어”

IS의 과격행동 등 여전히 <문명의 충돌> 논리가 유효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후쿠야마 교수는 “지하드나 IS와 같은 과격단체는 소수에 불과할 뿐 무슬림 국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고 볼 수 없다”며 고 새뮤엘 헌팅턴 교수의 논리를 비판했다.

1989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역사의 종언>에서 후쿠야마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틀렸고,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는 보다 앞선 사회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26년 동안 이 논제는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에 올랐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목소리가 높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언’의 논제는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의 다른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이 논제가 맞다고 본다. 앞으로 50년 후 유럽·미국·한국이 지금의 민주정부 체제를 유지할지 모르지만 중국의 권위주의, 독재체제는 변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정치체제는 안정적이지 않다. 중국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지속할 수 없는 체제를 갖고 있다. 특히 다른 나라들이 중국 모델을 채택하는 건 더 어렵다.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체제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외에 다른 대안은 여전히 찾기 어렵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금융위기로 논제가 틀렸다는 비판이 거세졌었다.

“그 관점에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자본주의는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한데 미국이나 영국의 금융 규제로 발생한 위기였다. 2008년 금융위기는 잘못된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경제적 양극화 심화가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주장과 논리(토마 피케티 등)가 광범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

“꼭 그렇게 불가피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성공적인 민주주의 국가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치적 수단을 가진다. 복지 국가에는 가난을 구제하는, 임금체계 같은 재분배 시스템이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양극화 문제를 안고는 있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민주주의와 연관돼 있어 이런 자정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경제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한 피케티의 처방, 즉 세제 개혁의 정책적 효용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할 수 있나?

“모든 국가는 부의 재분배를 위해서 부유층에 세금을 매기고 있다. 미국과 같은 경우도 굉장히 심한 누진세가 존재한다. 피케티가 제안하는 부유세 75%는 너무 과하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 돈 벌고자 하는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수니파 급진 세력 ‘이슬람국가(IS)’의 과격성과 IS 한국인 가담 등을 보면 ‘문명의 충돌’이란 고(故)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한 개념 아닌가?

“무슬림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을 보면 헌팅턴 교수의 문명 충돌에 대한 성찰은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중국·일본 등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이들은 서로를 하나의 아시아 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국가로 정체성을 판단하듯 국가는 중요한 단위로 남아 있다. 중동 국가들도 그렇다. 지하드나 IS와 같은 과격단체는 소수에 불과할 뿐 무슬림 국가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문화가 충돌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논리다.”

후쿠야마 교수는 미국 정치제도가 총체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쇠퇴의 길을 가고 있다며 지난해 발간한 <정치 질서와 정치의 쇠퇴(Political Order and Political Decay)>에서 기능부전에 빠진 미국 제도를 비판했다. 그는 미국의 분권시스템을 지적하며 “지적인 경직성과 기득권층의 반(反)개혁적 행태로 미국 정치의 자기 수정기능이 정지됐다”라고 진단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 ‘거부권 정치’가 정치 마비시켜

미국의 정치제도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유럽에 견줘 극찬해왔던 모델이다. 어떤 점에서 무너진(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가?

“미국의 헌법은 토크빌이 말했던 것처럼 독재를 예방하는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의 목표가 있다. 하지만 미국 시스템이 ‘견제와 균형’을 벗어나 서로의 발목을 잡는 ‘거부권 정치(vetocracy)’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기 때문에 어떤 긍정적 결과에 도달하는 걸 저해한다. 국가적 난제에 대한 결정이 지연된다는 게 미국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시민의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과 정치제도의 문제들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전반적인 정치의 기능장애 현상이 극에 달했다. 예산, 세금, 이민 부분에서 의회가 결정을 내리는데 힘들게 한다.”

그 문제점을 미국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도 인식하고 있나?

“아주 오래전부터 인식해왔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자기들의 이익에만 집중하기에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정당과 이익단체는 정치자금과 영향력을 포기하려는 의향이 없다. 이슈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당 체제 때문에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익집단들의 양극화는 더 심각하다.”

외부의 충격만이 진정한 개혁을 강제한다고 했다. 외부의 충격이라 함은?

“아예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미국 제도를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지금 그런 합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외부의 충격은 일반적으로 국가 개혁을 위해서는 금융위기나 전쟁 같은 시스템을 흔들 만한 쇼크가 필요한데 지금은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2008 금융위기가 외부의 충격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많은 원인을 가진 복잡한 위기였다. 외부 충격이라 함은, 미국 시장에 유입돼 물가를 상승시킨 유동성이 특히 아시아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금융위기에 대해 외부 충격이 크다는 시각도 있지만, 내부의 요인도 있었다. 미국의 규제당국이 과도하고 위험한 대출을 구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발달과정에서 이런 분권 시스템의 기능 저하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이익집단 내의 파워 엘리트 그룹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부 시스템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첫 번째 책〈정치 질서의 기원〉에서도 중국의 한 왕조, 이슬람 오토만 왕조, 터키나 프랑스의 과거 정권에 대해서 언급했다. 국가의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권의 성격에 따라 시스템이 후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민주주의 체제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질적 평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질적 수준은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높일 수 있는 것인가?

“민주주의 체제를 지속하게 하는 힘은 경제 성장, 교육 기회 증진, 사회 인프라 확충 등의 서비스를 제공할 정치 지배구조를 만들 때 가능하다. 국가의 정부는 이런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역량을 가져야 하는 바, 부패 척결은 민주화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민주화를 어떻게 이루는가는 잘 알지만 부패 척결 역량을 갖추는 데는 서툴다. 미국이 정치 제도의 현대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정착시켰지만 부패 척결은 아직 현대화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도 독재권력을 제압하는 데 초점을 둘 뿐 효율적 국가관리에는 무능을 드러낸다. 내부 이념투쟁에만 지나치게 몰입한 대가라고 본다.”

“북한은 핵 포기 절대 안 해”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좌표를 짚는다면?

“1987년 이후 한국은 실로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정치에서도 경쟁 원리가 활발하게 작동한다. 언론의 자유나 공론의 장도 잘 형성돼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한국은 민주주의는 높은 수준을 구가한다. 한국의 문화가 변천 과정에 있고, (가부장적) 유교 문화가 일본에서보다 더 큰 도전을 받는 상황이다. 민주주의 측면에서 일본보다 한국이 더 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95년에 발간한 <신뢰(TRUST)>에서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원간의 상호신뢰가 낮은 것으로 비판한 바 있다. 지금은 어떻게 보고 있나?

“조금 복잡한 문제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사회의 성격이 바뀌게 됐고 실제 시민사회가 굉장히 발달했다. 예를 들어 미국 같이 한국에서도 교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하고 관계를 맺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인 양극화와 지역 갈등은 사회구성원 간의 상호 신뢰를 저해한다.”

후쿠야마 교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1기 때만 해도 네오콘의 대표주자로 분류됐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거치는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간 이력부터가 그렇다. 자본주의의 승리가 헤겔식 역사 전개를 종식시켰다고 역설한 ‘역사의 종언’이 네오콘들의 사상적 주춧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중동에 민주주의를 확산시켜 한다고 설파했었다.

하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전후해 네오콘 비판론으로 돌아섰다. 부시 행정부의 선제공격론을 비난하면서 네오콘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후쿠야마 교수는 당시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노선을 달리한 이유에 대해 “이라크 전쟁은 큰 실수였고 그 이후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해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네오콘의 대안으로 ‘윌슨주의 국제적 협조 노선’을 제시했던 그는 6자회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하드 파워를 앞세운 네오콘의 대안으로 윌슨주의 국제적 협조 노선을 제시했었다. 소프트 파워는 당면과제 해결에 유용한가?

“소프트 파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다른 국가에 영향력을 미치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다른 국가에 경제 발전과 함께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그 핵심은 군사행동을 외교 정책의 중심에 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소프트 파워를 통해 미국 영향력을 행사하고 민주화와 인권을 촉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북한 관련해 가능한 시나리오는 정권교체”

북핵 문제를 푸는 도구로서의 6자회담에 대해 후쿠야마 교수는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이라며 “북한은 북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데 관심이 없고 중국도 북한을 설득하거나 강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북아의 현존하는 가장 큰 이슈는 여전히 북핵이다. 이 문제를 푸는 도구로서의 6자 회담은 여전히 유효할까?

“아니다. (6자회담은)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이다. 북한은 북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데 관심이 없고, 중국도 북한을 설득하거나 강제하지 않을 것이다. 핵은 북한이 가진 유일한 자산이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핵’을 사용한다. 북한은 6자회담으로 한국·미국·국제사회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얻어냈을 뿐이다. 이게 없다면 수출도 못하고 통상도 못하는데 왜 포기를 하겠나?”

전 세계 유일의 분단 지역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 100년 후 한반도의 미래나 변모상에 대해 언급한다면?

“북한 체제는 취약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붕괴하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럴 때 통일 가능성이 생길 것이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이유는 중국의 개입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남과 북이 오랫동안 분단돼 있었다는 점도 순조로운 통일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세계사적 흐름에서 볼 때 통합을 지향하는 남한과 북한의 당국자들이 갖춰야 할 식견과 철학, 원칙이 있다면 어떤 게 있나?

“두 나라의 정치 체제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쉽게 이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고 남한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려볼 수 있는 시나리오는 북한의 정권교체다.”

최근 연이은 중·일, 미·일 정상회담은 한국 외교에 상당한 충격을 줬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러브콜을 받는다고 안주하는 사이, 아베 총리는 미·중 모두와 손을 잡는 모양새다.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평가와 조언을 한다면?

“우선 한국과 일본은 관계 회복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일이 서로 싸운다고 득이 될 게 없고 장기적으로 보면 공동의 이익이 달린 문제도 영향을 받는다. 물론 중국의 도전은 장기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안이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 문제로 감정의 골이 깊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든 중국의 부상으로 도전받는 나라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독일과 폴란드의 예를 봐야 한다. 전쟁으로 인해 두 나라는 관계가 아주 불편했지만 양측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교과서 기술에 합의를 봤다. 이 부분을 일본과 주변국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하나의 방안이라고 본다.”

글=박지현 월간중앙 기자
사진=지미연 객원기자

[출처: 중앙일보] 프란시스 후쿠야마 “북한 붕괴시 중국 개입으로 통일 쉽지 않아”

2017년 4월 21일 금요일

독일통일-6 (인권 기반 교류)

동서독 간의 교류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부분 얘기했으므로 몇 가지 중요한 분야만 추가한다.

서독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서독기본법’의 3대 명제는 “자유, 평화, 통일”이었다.(여기서 자유란 동서독 주민들의 자유 즉 ‘인권’을 뜻함). 이 3대 명제 중에 ‘자유’가 ‘통일’보다 우선이라는 점에서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 중에 무엇이 우선인지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동독과의 교류를 통해 ’평화’를 확보하는 문제가 과연 동독주민들의 ‘자유’보다 우선인가 하는 점은 정권마다 달랐다. 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대북관계에서 항상 갈등요인이 된다. 쉽게 말해 휴전선 평화유지냐 북한주민 자유냐 하는 문제다.

사민당의 ‘신동방정책’은 ’자유’보다는 ’평화’를 중시하는 정책이었다. 그래도 ’평화’를 이유로 ‘자유’의 중요성이 경시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정신은 전술했듯이 “인권을 저해하는 어떠한 합의도 해서는 안된다”는 최고법원 판결에서도 나타난다. 이게 통일정책을 추진하는 우리 입장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서독은 1)동서독 주민간의 이주, 왕래, 가족상봉, 2)국경탈출자에 대한 사살 중지 및 탈출기도자에 대한 형량 경감, 3) 정치범 박해 금지, 4)동서독 주민간의 정보교환 확대 등 동독주민들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 목표를 달성하는데는 일관성이 있었다.

그런 정신에서 ’정치범 거래’가 성사되었고, ‘중앙기록보존소’가 설치, 운영되었으며, ‘탈출민 수용 정책’이 펼쳐졌다. 그럼 정치범 거래 내역부터 보자.

서독은 1962년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시까지, 동독 정치범 34,000명과 그 가족 25만 명을 구입하였다. 거래의 대가는 앞서 얘기했듯이 정치범 1인당 10만 마르크(5,300만원)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정치범 거래에 대해서는 ‘철저한 비밀’을 유지했고, 관련 예산도 ‘비공개 항목’이었으며, 정치인과 언론도 이를 ‘흥미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치범 거래의 득실에 대해서는 통일후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검토결과 ”동서독 주민간의 유대와 정신적,사회학적 결합에 기여한 점, 동독주민들로 하여금 미래의 희망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점, 다수의 지식인과 기능인들이 동독을 탈출하여 동독의 붕괴에 기여한 점” 등이 이득으로 판명되었다.

반면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점, 몸값이 동독 집권층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되었다는 점, 몸값 때문에 정치범이 양산되었다는 점” 등이 손해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독일통일에 기여했다고 결론지어졌다.

다음은 중앙기록보존소.

‘중앙기록보존소’는 우리나라의 ‘북한인권센터’와 유사하다. 즉 “동독주민들의 인권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통일 후 법치국가적 질서 확립을 위해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근거가 필요하며, 통일에 대비하여 가해자들의 폭력을 자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 하에 설치되었다.

‘중앙기록보존소’는 기민당 집권 때인 1961. 11월, ’나치만행기록소’ 등을 모델로 하여 국경지역인 ‘잘츠기터’에 설치되었다.(한 때 사민당과 동독정부가 집요하게 폐지를 요구했지만 계속 유지됨). 운영인력은 총 7명이었다.(검사2, 주법무성 공무원 1, 계약직 공무원 4).

동독의 인권침해 관련 정보는 주로 석방된 동독 정치범, 탈출한 동독군, 동독발행 각종 간행물, 서독 친지에게 보낸 동독주민들의 서신 및 통화, 동독 방문 서독인, 동독으로부터의 이주자, 정보기관 등을 이용하여 수집되었다.

중앙기록보존소는 설치 후 통일 때까지 30여 년간, 인권침해 관련 인사 약 80,000 명을 기록했다. 이 중 10,000 명은 통일 후 형사소추가 가능한 피의자들이었고, 나머지 70,000 명은 증인 및 피해자들이었다. 동독 판검사 6,500 명도 등재되었다.

이 기록은 통일 후, 동독 내 ‘사법제도 정착’과 판검사 및 공직자 임용시 심사 자료, 피해자들에 대한 ‘복권 및 보상 심사자료’, 범죄행위 가담자에 대한 ‘형사처벌 근거 자료’ 등으로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통일 후 평가에 의하면, 형사사건의 경우는 처벌 대상감만을, 민사사건의 경우는 정치적 박해로 재산이 몰수된 사건만을 기록했기 때문에, 좀 더 광범위한 기록을 유지했어야 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다음은 탈출민 수용 정책.

1949 ~ 1990.6월 까지 총 52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했다.(특히 1989.5월 ~ 1990.6월까지 격변의 시기에는 1년만에 62만여 명이 서독으로 넘어 옴).

서독정부는 ”1939.12.31 현재 독일 영토에 거주하던 독일인은 서독 국적자로 인정한다”는 ‘서독기본법’에 근거하여, 분단 이후 탈출한 동독인들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였고, 동독 탈출민들에게 여러가지 지원을 했다.

이 블로그에서는 탈북자에 대한 지원과 관련해서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서독의 선례가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서는 지원금을 위주로 살펴보자.

탈출한 동독인들은 우선 ‘베를린’과 ‘기센’에 소재한 ‘긴급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 후 각 주정부 대표와의 협의를 거쳐 각 주로 배분되어, 주에 있는 ‘임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사회로 나갔다. 따라서 각종 지원도 ‘긴급수용소’와 ‘임시수용소’에 있을 때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긴급수용소’에 있는 동안에는, 1인당 200 마르크의 연방정부 보조금이 지급되었고, 주정부 보조금이 가장에게는 30 마르크, 가족에게는 15마르크가, 용돈은 가장에게는 15 마르크, 가족에게는 10 마르크가 지원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숙식비, 건강진단비, 종교단체 제공 의류, 각 주에 있는 ’임시수용소’까지의 교통권 및 이삿짐 운송비 등이 지원되었다.

지방정부가 관리하는 ’임시수용소’에 있는 동안에는, 주택알선 또는 주택입주 우선권과 최고 1만 마르크까지의 저리융자, 학자금, 의료, 연금, 실업, 산재보험, 실업수당 및 생계비 보조금 등이 지원되었다. 하지만 이런건 모두 최소생계유지에 필요한 정도에 국한되어, 탈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노력으로 직장을 구하게끔 유도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4인가족이 수령하는 현금지원액은 총 920 마르크 (약 55만원. 통독당시 환율 1마르크 = 600원) 정도였다.

이 역시 통일 후 철저한 분석이 있었는데, 동독 이주민을 제한 없이 수용하고 정착을 지원한 것은 “동독주민의 인권개선과 통일여건 조성, 서독사회에 대한 고급인력 공급역할까지 하여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다음은 경제교류(대동독 경제지원).

경제교류는 무역, 용역거래, 공공부문의 이전지출, 금융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연간 교류규모는 75억 불에 달했고, 1975 ~ 1988까지 서독에서 동독으로 흘러 들어간 공식, 비공식 지원액은 연간 23억 불에 달했다.

참고로 비공식 지원이란, 예를 들면 “서독인의 동독 방문시 동독화폐로의 의무환전, 서독교회의 동독교회 지원, 정치범 석방대가 지원” 등이 있다.

경제교류도 몇 가지 원칙 하에 했다. 앞서 ’지원 3원칙’ 등을 말했지만 구체적인 절차와 관련해서는 ”수지균형을 맞춘다, 허가와 공고절차를 거친다, 원산지가 독일인 상품만 거래한다, 지불은 중앙은행 간의 청산계좌로 한다(뒷돈 거래 차단 목적)” 등이 적용되었다.

경제교류 역시 통일 후 철저한 득실계산을 했는데, “민족의 결속을 유지하고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을 완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2017년 4월 19일 수요일

‘일본좋다’ 한국인, 4년 이래 최고…어릴수록 호의적

한·일 국민의 상대국에 대한 인식이 우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일본 싱크탱크 ‘언론(言論)NPO’는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4회 한·일 국민 상호 인식 조사’의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가운데 일본이 ‘좋다’고 답한 비율은 21.3%로 작년(15.7%)보다 36% 늘었다. 한국이 ‘좋다’는 일본인도 작년 23.8%에서 올해 29.1%로 늘었다. 현재의 한·일 관계가 ‘나쁘다’고 답한 비율은 일본 50.9%, 한국 62.3%로 지난 4년간 조사 가운데 가장 낮았다.

인식이 좋아진 이유에 대해 이숙종 EAI 원장은 “작년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은 한·일 양국 정부가 11월 양국 정상회담,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 등 관계 개선에 노력한 것이 국민 정서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AI와 언론NPO는 “악화 일로를 걷던 상호 인식에 제동이 걸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일 모두 어릴수록 상대국을 더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19~29세의 30.7%가 일본이 ‘좋다’고 답한 반면 60세 이상은 13.8%에 불과했다. 일본도 한국이 ‘좋다’는 비율이 20세 미만 43.4%, 20~29세 33.3%인 반면 60세 이상은 22.7%에 그쳤다.

2017년 4월 17일 월요일

전술핵 재배치 서둘러야 하는 까닭

오랜 시간을 끌 것 같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가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와 김정남 피살 사건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금까지 ‘주류에서 벗어난 의견’까지 포함한 여러 가지 정책 방안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와는 확연히 다른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성격을 확실히 말해주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전술핵 재배치다. 지금까지 금기시되어 왔던 전술핵 재배치를 미국이 고려한다는 것은 북한의 도전이 그만큼 심각하므로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강력한 군사력에 기초한 대북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술핵 재배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전술핵을 배치하면 1991년 남북비핵화공동선언을 파기하는 것이고,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것이며, 핵전쟁의 가능성이 증가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먼저 1991년 남북비핵화공동선언은 북한의 핵개발로 인해 사문화된 지 오래다. 우리가 아무리 비핵화공동선언을 준수한다고 해서 우리의 선의에 보답하여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전술핵을 재배치한다고 하여 과연 핵전쟁의 가능성이 증가할까? 한반도에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가져옴으로써 오히려 전쟁과 도발의 가능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

전술핵 재배치가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기보다는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여 실질적인 비핵화로의 진전을 가져올 수 있다. 북한은 비핵화의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한미 연합 군사연습 중지, 한미동맹 파기, 북-미 평화협정 체결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다. 협상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북한 스스로 요구 조건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전술핵 재배치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한반도에 재배치된 미국의 전술핵 철수와 북한의 비핵화를 맞바꾸는 협상을 하면 된다. 핵군축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상징적 수준의 전술핵 배치만으로는 안 된다. 최소한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수에 버금가는 수준의 전술핵이 있어야 한다.

미국 내에서도 전술핵 배치에 대해 반대하는 이가 많다. ‘핵 없는 세상(nuclear free world)’을 주장했던 오바마 정부 시절 확장억지와 관련된 한미 간 협의에서 미국은 핵무기 문제는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핵무기에 관한 논의를 회피해 왔다. 확장억지와 관련해 미국은 첨단 재래식 무기에 의존한 ‘역외억지(off-shore deterrence)’를 강조하고, 핵무기는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억지를 위한 것이므로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극단적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다. 또한 핵무기의 배치와 사용 여부를 모호하게 유지함으로써 상대방을 교란하는 ‘핵 모호성(nuclear ambiguity)’을 유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이러한 논리는 북한이 핵을 사용하더라도 미국은 핵이 아닌 재래식 무기에 의존한 보복만을 할 것이라는 북한의 오판을 불러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미국의 대(對)한국 안보방위 공약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한다.

북한이 핵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핵 사용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미군이 가지고 있는 전략폭격기, 첨단 전투기, 핵잠수함 같은 전략 자산의 전개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전략 자산들이 핵탄두를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북한으로 하여금 확실히 알게 함으로써 대북억지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전술핵 재배치를 통해 우리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효과적으로 북한의 군사적 모험을 억지할 수 있다.

전술핵 재배치는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다. 기술적 문제도 수반되고 전략•전술의 변화도 요구되며, 재정적 부담도 발생한다. 그런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군사적 모험을 억지하고 비핵화로 나오도록 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 기간 동안 이 대안은 미국 정부에 의해 거부돼 왔다. 연속된 북한의 도발과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 재검토는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 불가 입장이 바뀌도록 하는 좋은 기회이므로 실기해서는 안 된다.

http://www.asaninst.org/contents/%EC%A0%84%EC%88%A0%ED%95%B5-%EC%9E%AC%EB%B0%B0%EC%B9%98-%EC%84%9C%EB%91%98%EB%9F%AC%EC%95%BC-%ED%95%98%EB%8A%94-%EA%B9%8C%EB%8B%AD/

2017년 4월 13일 목요일

[이슈브리핑] 향후 5년의 대북정책을 위한 제언

논문의 전문은 해당 링크를 참조 바랍니다.

http://www.eai.or.kr/data/bbs/kor_report/201703209434960.pdf


[편집자 주]

EAI는 2017년을 맞아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주요 이슈를 진단하고 바람직한 한국 외교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시고 라운드테이블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 일환으로 남북관계 및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본고는 남북관계 세션에서 논의된 사항을 바탕으로 서울대학교 김병연 교수가 대표집필 하였습니다. 북한문제는 언제나 한국의 외교안보적 고려에서 가장 우선순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 이후 남북관계는, 부침을 거듭하였지만 여전히 긴장과 갈등 상황을 호전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으로부터의 무력 위협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국제사회의 제재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으며, 경색된 남북관계를 타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적 방편도 구사하기 힘든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더구나 동북아의 안보 상황은 더더욱 어려워지고 역내 갈등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관리하고, 나아가 악화된 남북관계를 전환시키기 위한 방책은 한 순간에 마련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북한과 주변 정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정책을 마련하고 일관되게 추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북정책이 국내정치나 정쟁에 이용되지 않도록 탈정치화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제도화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외적인 합의와 공감 속에서 일관된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북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김정은 체제는 단기적으로는 안정돼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불안정한 체제이다...... 장성택과 백수십명의 고위급을 처형한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북한의 엘리트 그룹의 충성을 강제하는 데 효과적이다. 따라서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김정은이 권력의 정점이 되어 대내외 핵심 정책을 관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북한 체제가 중장기적으로 불안정한 중요한 이유는 북한 경제의 시장화(marketization)에 있다...... 사회주의 국가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밑으로부터의 시장화”는 김정은에게는 잠재적 위협이다.

북한에게 있어 남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북한 핵문제가 미국과 중국이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되었고 이를 제어하는 힘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일단 미국을 대상으로 단번 승부를 걸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북한에 대한 외부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당분간 북한은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대북정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북정책의 정치화이다.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가 절반씩으로 나뉜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대북정책의 실효성보다 여론이나 표를 결집하기 위해 대북정책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이는 대북정책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동시에 그 다음 정부도 이전 정부와 다른 대북정책을 내세우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혹자는 “보수는 북한 붕괴의 꿈에, 진보는 햇볕의 꿈”에 살고 있다고 한다. 북한 정권이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쉽게 북한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는 보수, 남북이 협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김정은의 마음을 돌려야 하고 돌릴 수 있다고 믿는 진보가 있다면 이는 모두 몽상과 이념의 가냘픈 줄에 걸터앉아 있는 셈이다. 이 몽상과 이념은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향후 5년을 위한 정책 제언
1. 대북정책의 탈정치화를 선언하고 이를 제도화해야 한다.
2. 단기적으로는 제재에 집중하는 동시에 대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3.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의 시장화와 무역 개방도를 제고함으로써 북한이 스스로의 메커니즘에 의해 변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4. 미국과 중국에게 우리의 대북정책을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5. 국민들에게 북한의 실재와 북한 문제의 복잡성을 설명해야 한다.

2017년 4월 11일 화요일

[차이나 브리핑] 중국의 경제적 불평등과 그 정치적 함의


경제성장의 그늘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성장이라는 차원에서 거둔 눈부신 성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의 GDP 규모가 머지않아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낙관적 예측 하에, 중국위협론과 G2라는 명칭이 일반화 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부작용들 또한 동반하였는데,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경제적 불평등이다. 성장과 효율을 강조하고, 부유해질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지자는 ‘선부론’을 내세우면서 중국이 성공적으로 추진해온 시장화는 다양한 차원의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했다. 시장개혁이 서서히 사회주의적 평등주의를 와해시키면서 중국은 개발도상국들 중 가장 평등한 사회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로 빠르게 이동하게 된 것이다. 현재 중국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도농격차, 지역 간 격차, 그리고 지역 내 빈부격차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도농 및 지역 간 불평등

도농 간의 경제적 격차는 마오쩌둥 정권 하에서 호구제를 토대로 이미 구조화되어 있었으나, 개혁개방이 가져온 경제 시장화와 함께 더욱 심화되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2009년에 도시와 농촌의 일인당 평균수입은 3.3 대 1로 최고치에 이르렀다. 이후 2013년까지 농촌의 복지 확충과 수입 증가를 통해 이 비율은 다소 감소하였으나, 여전히 3대 1 정도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Unicef 2015).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 중국은 지방정부에 재정자율권을 부과함으로써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동인을 제공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지역 간, 특히 지리적 이점을 지닌 해안도시와 척박한 서부 내륙지방 간의 경제적 격차가 매우 커졌는데, 1987년에서 2004년 사이 해안지역 도시 거주민들의 수입은 3배 증가하였다(Wu 2014). 성 또는 도시별 GDP만 놓고 보자면 2010년의 중국은 핀란드(상하이시)와 볼리비아(칭하이성)가 한나라에 함께 존재하는 것과 같았다(The Economist 2011). 지역별 일인당 GDP를 살펴보면, 2015년의 중국 내에는 일인당 GDP가 17,000달러 이상인 베이징, 톈진 등의 도시들과 5,000달러 이하인 구이저우성, 간쑤성, 윈난성 등이 공존하고 있다.

지니계수의 증가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지니계수(0이 완전평등, 1이 최대한의 불평등)는 꾸준히 증가하는데, 90년대 초에 이미 일반적으로 심각한 수준의 불평등으로 간주되는 0.4를 넘어섰다. 2013년 중국 국가통계국은 12년만에 처음으로 지니계수를 공식 발표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중국의 지니계수는 2008년 0.491로 피크를 이룬 후 2011년에 0.477, 2012년에 0.474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실제의 지니계수는 이보다 높을 것이라는 예측이 다수이다. 실제로 텍사스 A&M대학과 청두의 서남재경대학이 2013년에 함께 진행한 조사(China Household Finance Survey)는 2010년에 중 지니계수가 0.61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 . 2013년 현재 중국은 2백 7십만의 백만장자와 251명의 억만장자를 보유하고 있지만, 유엔 보고에 따르면 인구의13%가 여전히 하루에 미화1.25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Reuters 2013). 2012년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 전체 부 중에서 상위 10% 부자가 통제하는 부의 비율이 1995년에는 30.8%였으나 2002년에 41.4%로 증가하며, 2011년에 이르면 심지어 86.7%에 달하게 된다(The Economist 2012).

비교적 관점

이러한 경제불평등 수준은 타국가들과 비교하더라도 심각하다. 중국 당국의 공식발표에 근거하더라도, 2012년 중국의 지니계수는 자유시장과 경쟁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인 미국의 수준보다 높다. 미시건대학과 북경대학 학자가 공동으로 진행하여2014년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1980년대 이래로 중국의 수입불평등은 미국보다 훨씬 가파르게 증가하였는데, 이들은 1980년의 0.3이던 중국의 지니계수가 2012년에는 0.55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80년대 이래 불평등 수준이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지니계수가 0.45 수준에 이른 미국을 크게 앞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양국의 불평등 정도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같은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불평등 정도는 같은 발전수준의 국가들의 평균마저 훨씬 넘어서고 있다(Xie and hou 2014). 상기 언급한 0.55 또는 0.61이라는 지니계수가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면, 중국은 지구 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몇 개의 국가들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다.

경제불평등의 정치적 함의

물론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중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이 여전히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 정도가 빠르게 심화되고 있다는 점은 중국 공산당의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다. 특히 현재의 불평등 수준은 ‘사회주의’ 중국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은 물론이고, 유사한 발전수준의 국가들과 비교해서도 심각하다는 점에서, 더더욱 정치적•이념적으로 합리화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단위(单位)와 같은 사회주의적 제도들이 해체된 후 아직 제도적 사회보장이 미약한 상황 하에 자본주의적 경쟁과 생존의 논리가 팽배해지면서, 경제적•사회적 약자의 곤란과 박탈감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중국의 화려한 경제적 성공의 이면에는 불평등이라는 짙은 그늘이 감추어져 있다. 전체 경제의 파이가 계속 커지고 다수의 삶이 적어도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믿음이 있는 상황에서는 무마되던 대중의 불만이, 경제성장의 속도가 둔화되고 파이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는 보다 가시화될 수도 있다. 경제적 성공이 정치적 위기를 낳는 ‘성공의 위기’가 중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중국을 관찰한다면, 그 미래를 단순히 낙관할 수만은 없다


정주연
 http://www.eai.or.kr/type_k/panelView.asp?bytag=p&catcode=+&code=kor_report&idx=15139&page=1
2017-03-06 

2017년 4월 9일 일요일

2016 한일 국민 상호인식 조사

제4회 한일 국민 상호인식조사 주요 결과

조사개요

한국의 민간싱크탱크인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일본의 공인NPO인 言論NPO는 한일 양국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호인식조사를 2016년 6월부터 7월까지 실시했다. 본 조사의 목적은 한일 양국 국민의 상대국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현황 및 그 변화를 지속적으로 파악하여 양국 국민 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식의 차이를 해소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있다. 본 조사 결과는 9월2일에 개최되는 한일 민간대화인 '한일미래대화'에서 발표하고 논의하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한국 측의 여론 조사는, 전국의 19세 이상 남녀를 대상으로 6월 16일부터 7 월 5일까지 조사원에 의해 면대면 면접 방식에 의해 실시되었다. 유효 회수 표본수는 1,010명으로, 응답자의 성별은 남성이 49.5%, 여성이 50.5%이다. 응답자의 최종 학력은 초졸 이하가 7.5%, 중졸 10.2%, 고졸 37.5%, 대학 재학?중퇴(전문대 포함)가 12.1%, 대졸 31.8%, 대학원 졸이 0.8%이다. 나이는 20세 미만이 1.8%, 20세부터 29세까지 16.1%, 30세부터 39세까지 17.8%, 40세부터 49세까지 20.9%, 50세부터 59세까지 20.0%, 60세 이상이 23.4%이다. 일본 측의 여론 조사는 일본의 18세 이상 남녀를 대상으로 6월 18일부터 7월 3일까지 방문 유치회수법에 의해 실시되었다.

유효 회수 표본수는 1,000명이다. 응답자의 성별은 남성이 48.8%, 여성이 51.2%이고 최종 학력은 중졸이 8.0%, 고졸 47.0%, 단기/전문고졸 19.9%, 대졸 22.3%, 대학원 졸이 1.5%이다. 응답자의 나이는 20세 미만이 3.0%, 20세부터 29세까지 11.7%, 30세부터 39세까지 15.1%, 40세부터 49세까지 16.9%, 50세부터 59세까지 14.4%, 60세 이상이 38.9%이다.이번 조사결과는 부정적 상호인식의 벽은 높지만, 변화의 모멘텀이 발견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장 특징적인 결과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한일 양국민의 부정 적 상호인식에 제동이 걸리고 개선의 조짐이 조사 항목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의 화두가 "관계정상화"에 집중될 정도 로 최근 3-4년 간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3년 6개월 동안 정상회담도 열리 지 않았다. 이처럼 경색된 한일관계는 국민여론에 반영되어, 2015년 조사된 한일 국 민상호인식조사는 최악의 양국 국민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2015년 11월 한일정 상회담 개최, 이어 12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무장관회담 타결 등 정부 간 관계개선의 노력이 양 국민의 상호인식에 어떻게 반영됐는지에 이번 조사는 주 목했다.

1. 한일국민 간 상호 인식 개선 조짐: 최악의 한일 국민감정에 제동 걸려 조사 항목 곳곳에서 부정 인식 감소, 긍정 인식 증가

상대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감소, 긍정적 인식도 소폭 증가


한일 국민의 긍정적 상호인식이 부정적 상호인식보다 높았던 적은 없다. 다만 최 근 몇 년간 악화되었던 상대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줄어들고 긍정적 인식이 소폭 이나마 증가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일본에 대한 인상을 '좋지 않다', '대체로 좋 지 않다'라고 응답한 한국인은 작년(72.5%)보다 줄어 61.0%로 나타났다. 한국에 대 한 인상을 '좋지 않다', '대체로 좋지 않다'라고 응답한 일본인도 작년(52.4%)보다 줄 어 44.6%를 기록했다. 한일 국민 모두 상대국에 대한 긍정적 인식도 소폭 증가했다. 일본에 대한 인상을 '좋다', '대체로 좋다'고 응답한 한국인은 작년 15.7%에서 다소 늘어나 21.3%를 기록했고, 일본 역시 작년 23.8%에서 29.1%로 늘어났다. 상대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전히 양국 모두 과반이거나 과반에 육박하지만, 증가하던 부정적 인식의 상호국민감정에는 제동이 걸려 추세에 변화가 발견됐다.

상대국 사회정치체제의 부정적 성격에 대한 인식도 감소

상대국 사회/정치체제의 성격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감소됐다. 현재 일본의 사회/ 정치체제의 성격을 군국주의, 패권주의, 국가주의 등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한 국인이 다수지만, 부정적 인식은 작년에 비해 줄어들고 평화주의 등으로 답한 긍정 적 인식은 늘어났다. 복수응답 문항에서 ‘군국주의’로 답한 한국인은 작년 56.9%에 서 49.6%로, ‘패권주의’라고 답한 한국인은 작년 34.3%에서 24.7%로 각각 줄어들었 다. 일본을 ‘평화주의’로 인식하고 있는 한국인은 8.5%에 불과하지만, 작년 4.2%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일본인의 한국 사회/정치체제의 성격에 대한 인식 도 개선됐다. ‘민족주의’로 답한 일본인은 작년 55.7%에서 48.1%로, ‘국가주의’로 답 한 일본인은 작년 38.6%에서 30.2%로 각각 감소했다. 한국을 ‘민주주의’, ‘평화주의’ 로 인식하고 있는 일본인은 작년 14.0%, 6.6%에서 각각 23.0%, 9.9%로 늘어났다. 상대국가에 대한 인식의 개선은 상대국 사회/정치체제의 성격에 대한 인식에도 긍정적으로 반영됐다.


현재 한일관계에 대한 평가 및 전망도 개선

한일관계에 대한 양국 국민의 평가도 개선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한일관계에 대해 ‘나쁘다’로 보는 일본인은 여전히 과반이 넘는 50.9%지만, 2014년 73.8%, 2015년 65.4%와 비교하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 경우에도 '나쁘다' 는 응답은 62.3%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2014년 77.8%, 2015년 78.2%과 비교 할 때 15% 포인트 이상 크게 개선되었다.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났다. 향후 한일 관계가 현재의 한일관계와 ' 변함없을 것‘으로 보는 한국인은 52.1% (지난해 45.9%), 일본인은 49.0% (지난해 41.4%)로 가장 많다. 그러나 ’좋아질 것‘('대체로 좋아질 것' 포함)이라는 응답을 보 면 한국인은 23.3% (지난해 19.0%), 일본인은 22.7% (지난해 21.9%)로 각각 지난해 보다 다소 증가했다. 또한 '나빠질 것'('대체로 나빠질 것'포함)이라고 보는 사람도, 일본인은 9.9% (지난해 12.1%), 한국인은 18.5% (지난해 28.4%)로 작년에 비해 크 게 감소했다. 한일관계가 ’현재와 변함없을 것‘으로 전망한 사람들을 빼면, 양국 모 두 ’좋아질 것‘으로 보는 사람이 ’나빠질 것‘으로 보는 사람을 상회했다. 양국 모두 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작년과 큰 변화는 없지만, 한일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양국 국민들의 인식도 여전 히 높다. 한일관계가 ‘중요하다’고 답한 한국인은 86.9%, 일본인은 62.7%였다. 양국 국민 대다수가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일 양국 국민의 상대국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나쁜 편이지만 개선되는 추세이다.

일본에 대한 인상을 '좋지 않다'고 응답한 한국인은 61.0%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지난해 72.5%에 비하면 11%p 이상 대폭 개선됐다. '좋다'고 응답한 사람도 지난해 15.7%에서 21.3%로 증가하고 있어 감정 악화에는 제동이 걸렸다.

반면, 한국에 대한 인상을 '좋지 않다'('대체로 좋지 않다' 포함, 이하동일)고 응답한 일본인은 44.6%로 나타났다. 본 조사에 의하면 2013년 37.3%, 2014년 54.4%, 2015년 52.4%로 악화되고 있었지만, 올해는 50% 이하로 떨어지면서 개선되었다. '좋다'('대체로 좋다' 포함, 이하 동일)고 응답한 사람도 29.1%로 2014년(20.5%), 2015년(23.8%)보다 개선되었다


긍정적 •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이유

양 국민 모두에게 '역사'와 '영토'문제가 상대국 인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정치 지도자의 언행에 대한 부정적 인상이 미친 영향은 양국 모두 감소하고 있다.

한국인이 일본에 부정적인 인상을 갖는 이유는 '한국을 침략한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76.3%로 지난해(74.0%)와 마찬가지로 가장 많았다. '영토 문제'도 70.1%(지난해 69.3%)로 높은 응답을 보여, 이 두 가지 이유가 예년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 1년간 큰 변화를 보인 것은 부정적인 인상을 갖는 이유로써 '일본 정치 지도자의 언행때문'이라는 응답이 지난해 24.7%에서 올해는 14.6%로 10%p 감소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치 지도자의 언행에 대한 평가가 개선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일본인은 명분과 본심이 다르기 때문에'라는 응답이 지난해 16.7%에서 올해 24.2%로 증가했다.

2017년 4월 7일 금요일

가장 중요한 나라?...韓 "중국" vs 日 "미국"

우리나라와 일본 국민 각각 1,000명에게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나라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한국 국민은 중국을, 일본 국민은 미국을 가장 많이 선택했습니다.

한일 양국 국민의 상대국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나쁜 편이었지만 개선되는 추세로 나타났습니다.

한일 국민의 상호인식조사 결과를 김상익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동아시아연구원과 일본 겐론 NPO가 최근 실시한 한일 국민 상호인식조사에서 우리 국민은 미래에 가장 중요한 나라로 동맹국 미국이 아닌 중국을 1위로 꼽았습니다.

중국 다음 7%포인트 차로 미국이 2위였습니다.

일본국민은 미국을 가장 중요한 나라로, 중국을 2위로 선택했지만 그 폭은 상당히 컸습니다.

일본에 대한 인상을 좋지 않다고 답한 한국인은 61%로 여전히 높았지만 지난해보다 10%포인트 이상 줄었고,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고 응답한 일본인도 지난해 52%에서 5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좋은 인상을 가지는 이유에는 일본인은 단연 한국 드라마와 음악 등 문화 때문이라고 답했고 한국인은 일본인의 친절과 성실한 국민성을 꼽았습니다.

지난해보다 다소 줄기는 했지만 한국인의 절반은 일본을 군국주의 국가로, 일본인의 절반은 한국을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가로 인식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한일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에서는 한국에서는 86.9%, 일본에서는 62.7%를 기록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대한 평가에서는 일본은 절반 가까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한국인은 40% 정도가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답해 긍정적인 평가에 앞섰습니다.

상대국 정상에 대한 인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일본인의 인상은 1년 전보다 개선됐지만 아베 총리에 대한 한국인의 인상은 지난해와 비슷하게 80%에 육박했습니다.

10년 후 한반도의 모습에 대해 한일 양국은 현 상황이 유지될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많았지만 남북의 대립 격화를 예상한 시각도 1년 전보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7년 3월 22일 수요일

사드(THAAD): 불가피한 선택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도입이 결정되면서 국내외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선 예상했던 대로 중국의 반발이 거세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이번 결정 이전에도 수 차례 사드 도입을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혀왔고 중국 인민해방군 부 참모장은 지난 6월 싱가포르의 샹그릴라 대화에서 사드의 도입을 “과도한 (excessive)” 조치라고 주장하였다. 이번 결정 직후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사드 배치는 한반도의 방어 수요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라면서 결정을 비판하였다. 국내의사드 반대론자들도 중국의 반발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번 결정이 중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킨다고 비판 한다. 반대론자들은 사드를 도입하게 되면 한중관계가 경색되고 심지어는 중국이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하거나 북한의 확실한 후견국으로 돌아설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국내의 사드 도입 반대론자들이 사드가 중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사드가 실제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키는데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이 사드의 한국 배치가 ‘과도’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사드가 중국의 핵전력을 무력화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드의 배치는 과연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막는 데는 효과가 없는 것인가? 사드는 과연 중국의 핵전력을 위협하는 것인가?

사드 반대론자들은 북한이 만약 한국을 공격한다면 스커드와 노동 등 중-단거리 미사일을 주력으로 삼아 공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중-장거리 미사일을 요격하는 사드는 불필요하고 북한의 위협에 비하면 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미사일 방어체제의 원리와 최근 북한의 무수단 발사 성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미사일 방어체제란 단 하나의 완벽한 요격 수단에 의지하기 보다는 다수의 요격 수단을 다층 (layered) 으로 구성하여 방어 성공률을 최대한 끌어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국은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의 일환으로 패트리엇 PAC-2를 이미 실전 배치하였고, 곧 PAC-3도 도입, 배치할 예정이다. 그 후에는 자체 개발 중인 L-SAM 을 배치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 세 종류의 미사일 방어체제를 다 갖춘다 해도 여전히 상대적으로 저고도인 25km~60km에서만 적의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존에 배치되었거나 개발중인 미사일 방어체제들은 스커드와 노동 같은 단거리 미사일만 요격할 수 있을 뿐 수백 킬로미터의 고고도에서 마하 10-15 이상의 속도로 낙하하는 KN-08 ICBM(대륙간 탄도탄)이나 무수단 (북한명 화성-10호) IRBM (중거리 탄도탄: Intermediate Range Ballistic Missile)의 요격은 어렵다.

북한은 무수단을 이미 실전 배치하였다. 지난달에는 무수단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 실험하였다. 한국은 현재 무수단에 대한 방어 수단이 전무한 상태이다. 더구나 이번 무수단 실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드 도입이 얼마나 시급한지 알 수 있다. 북한은 최근 실험에서 미사일 발사에는 여간 해서 사용하지 않는 고각도로 무수단 발사를 시도해서 성공했다. 이처럼 고각도로 발사실험을 한 것은 사정거리를 400km 내로 극단적으로 줄이고 탄두 재진입 속도를 극대화하여 ICBM으로 개발된 무수단 탄도미사일을 한국을 공격하는데도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아야 한다.  요격고도가 100km가 넘는 사드 없이는 한국은 무수단과 KN-08등의 위협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된다. 사드의 장거리 레이다 없이는 무수단과 KN-08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사드를 도입할 때 한국은 비로소 북한의 다양한 미사일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다층적 미사일 방어 체제를 갖추게 된다.  사드 도입이 시급한 이유다.


중국의 입장

중국이 사드 도입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사드의 한국 배치가 중국의 핵전력을 무력화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은 특히 사드 시스템의 고성능 감시체계인 X-band 레이더로 인해 중국 내 전략 자산이 노출 된다고 한다. 그러나 사드로 인한 자국의 핵전력 약화를 우려하는 중국의 주장은 공개된 정보만으로도 쉽게 반박될 수 있다. 우선, 중국 전략미사일 대부분은 X-band 레이더의 유효거리 밖인 중국 남부와 서부에 배치되어 있다. 게다가 중국을 감시할 수 있는 장거리 레이더망은  사드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인 KAMD가 언젠가는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한국은 사정거리가 900km에 육박하는 이스라엘제 슈퍼그린파인 (Super Green Pine)을 도입해 놓은 상태이다. 슈퍼그린파인 레이더의 경우 현재 이스라엘이 사정거리를 더 늘리는 업그레이드를 준비 중이다. 한국은 사드 없이도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의 핵전력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중국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사드의 배치 결정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중국은 사드의 한국 배치가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 구축의 일환이라고 의심한다. 미국이 북핵을 이용해 자국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도 물론 북한의 핵무장이 외교 안보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북핵으로 인해 동아시아 지역에 핵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일본이 핵무장을 할 가능성에 대해 중국은 우려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과 중국은 북핵 문제에 대해 상당부분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의 핵에 대처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미국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강력한 대북제재를 통해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의 대북제재 2270과 미국 단독의 2차제재 강화, 김정은의 인권유린으로 인한 제재대상자 지정 등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중국은 정권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북한 정권 압박을 통한 핵문제 해결이라는 어려운 선택보다는 대중 경제의존도가 높은 한국을 영향권 안에 두어 한반도 전체를 “안정화”하려는 쉬운 길을 택해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국에 많은 공을 들여 왔다. 한국경제의 대중 의존도가 커지고 한중관계가 발전하여 박 대통령이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게 되자 중국은 한국이 미국과의 안보관계에 대해 재설정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지나친 기대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만약 사드를 거부했다면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경쟁 중인 중국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안보적 성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은 결국 중국의 이러한 한반도 전략이 실패하였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한국과의 관계 증진에 많은 공을 들인 시진핑의 친한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책임소재를 외부로 돌리고 내부 단속을 위해 한국에 대한 일정한 보복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사드를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한국의 군사적 대응으로 보지 않고 미국과의 대결 구도의 틀 속에서 확대해석 하려는 이유다.

중국의 반발

중국의 반발에 관련한 가장 큰 우려는 사드 도입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이 북한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 즉 중국이 북한의 “확실한 후견국가”로 부상하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내 신냉전 구도의 정착이며, 아마도 북한이 내심 가장 바라는 결과다. 중국은 이미 북한정권이 경제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지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중국에게 바라는 가장 큰 지원은 무엇일까? 아마도 북한의 핵무장 용인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개발은 북중 관계에서 가장 큰 마찰 요인이며,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반대한다고 여러 번 공개적으로 천명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사드 배치는 과연 중국의 대북 압박 이완이나 심지어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어질까?

답은 “아니다”이다. 북핵과 사드는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이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별개의 문제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중국이 북핵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동아시아 지역 내 핵도미노 가능성 때문이지 한중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중국이 이 둘을 현 시점에서 연관시킬 가능성은 낮으며, 북핵을 용인하는 전략적 실수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사드 관련해서 어떠한 조치를 취할 것인가? 일단 북핵은 북핵대로 유엔안보리 차원에서 제재하면서 기타 부분에서 북한과 협력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 있다. 다만 김정은이 사드 국면을 활용해 새로운 북중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중국 지도부가 김정은을 불신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대대적 경제원조는 김정은의 병진정책을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중국은 대북지원을 늘리는데는 상당히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한국에 실질적 피해를 주기 보다는 한국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 내 반한 현상은 뚜렷해 질 것이며 비관세 장벽을 적극 활용해 한국 기업들의 활동을 방해할 것이다. 한중관계 발전의 대표적 결실로 평가되어온 한류와 관광업이 일차적 표적이 될 것이며, 중국 내 한국기업의 신규투자 등이 불허될 가능성도 높다.

다만 중국의 대응이 적정 수준을 넘을 경우 중국 자신이 입을 피해 또한 상당할 수 밖에 없다. 3-4년 전과는 달리 현재 중국은 최대한 경제에 대한 외부충격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대대적 경제보복 조치를 내리는 것은 힘들다. 이는 한국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국이 우려하고 있는 무역 보복 조치는 실현될 경우 중국의 WTO 회원자격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사드 배치 때문에 한국을 지나치게 압박하여 한국이 중국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드 배치 이후

한국의 사드 배치는 북한이 핵으로 인해 확보할 수 있는 이득보다 비용이 더 크도록 하여 북한 스스로 대화에 나오게 하는 압박정책의 일환이다. 북한이 한반도에서 군비경쟁을 촉발한다면 그 군비경쟁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이 사드를 반대하는 이유가 군사적 측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에 알맞은 대응을 해야 한다. 중국은 미국이 대중 포위망을 한반도에까지 구축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서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배치가 한국이 중국에 적대적인 자세로 전환한 것이 아닌, 북한의 급신장하는 탄도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한시적인 조치, 즉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이라는 것을 중국측에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이 추진하는 AIIB 와 RCEP에도 적극 참여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번 사드 도입을 통해 중국에게 한국은 경제적 이익 보다 안보를 선택한다는 분명한 메세지를 보낸 것은 큰 소득이다. 중국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경제를 지렛대로 한국을 중국 쪽으로 끌어들이는 더 쉬운 선택을 했다. 이번 사드 배치를 통해 한국은 안보주권을 행사하고 중국에게 올바른 선택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사드 문제로 한중관계에 균열이 생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한중관계는 서로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를 바탕으로 하였다. 중국은 한국이 경제적 의존 때문에 안보 이익을 소홀히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한국은 중국이 한중관계를 위해 대북제재에 동참한다는 착각을 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한 한중간의 반응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양국은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제 한중 양국은 현실을 직시하며 공동 위협에 대한 이해를 같이 해야 할 때다. 그래야만 한중관계가 진정한 파트너쉽으로 거듭날 수 있다.

출처: http://www.asaninst.org/contents/%EC%82%AC%EB%93%9Cthaad-%EB%B6%88%EA%B0%80%ED%94%BC%ED%95%9C-%EC%84%A0%ED%83%9D/

2017년 3월 20일 월요일

미·중·러의 새 판짜기 속 한국의 선택은?

2017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주변정세를 살펴보면 희망과 기대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앞선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우리 주변국들의 관계가 새로운 판짜기에 들어가면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우리의 입지는 축소되고 강대국 관계의 하부구조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예의주시할 변화는 미국-중국-러시아 3자 관계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세계유일초강대국 미국의 패권을 견제하는 전략적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태지역에서는 남중국해문제, 유럽에서는 크림반도 및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이런 대결 구도는 더욱 고착화되어 왔다. 그러나 트럼프 후보가 당선되면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내외 비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당선자는 선거 기간 중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해 왔고, 초대 국무장관에 사업상 러시아와 많은 교류를 가져온 렉스 틸러슨 엑슨 모빌 최고경영자를 내정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러시아 정책이 대립과 갈등보다는 대화와 협력에 중점이 두어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나아가 미국 대 중국-러시아 대결구도를 흔들어 중국의 도전을 차단·견제하고자 하는 새로운 전략적 포석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국내문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대외환경이 필요한데, 가장 시급한 것이 유럽과 중동지역의 안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를 거두는 “신의 한 수”로 보인다.

러시아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필요로 한다. 유럽과 미국 사이를 갈라 놓을 수 있다면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을 막고 구동구권에 대한 러시아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또한 중동문제에 관한 지분과 영향을 인정받고 진출을 확보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중국의 과도한 부상과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견제함과 동시에 동아시아지역으로의 진출도 모색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러시아 관계가 대결에서 협력의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과는 달리 트럼프 행정부하에서의 미국과 중국관계는 협력과 경쟁에서 갈등과 마찰로 전환되고 있다. 트럼프 당선자가 중국과의 통상문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강경한 입장을 취해 왔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관계는 통상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고, 마찰 빈도는 증가하나 강도는 약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트럼프 당선자는 통상문제를 넘어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고 절대 양보불가라고 여기는 “하나의 중국원칙(One China Policy)”을 서슴없이 건드리는 행보를 취하며 중국을 자극했다. 350척의 전함(잠수함 포함)을 가진 “위대한 미국 해군”을 건설하겠다는 것도 중국의 대양 진출을 막고 미국 우의의 해양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신형대국관계를 추구하는 중국은 예상치 못한 트럼프라는 강력한 견제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집권 2기 맞이하여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줘야 하는 시진핑 주석으로서는 이러한 도전에 순응할 수 없다. 중국도 나름대로의 판짜기에 나설 것이다. 강한 상대보다는 약한 상대를 찾아 공략할 것이고, 일차적 대상이 한국과 태국, 필리핀과 같은 일부 동남아 국가들이다.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는 미중 대결구도 속에서 “러브콜”이 아닌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트럼프 당선으로부터 시작된 강대국들의 새 판짜기게임에서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고 번영의 제공하는 것은 한미동맹이다. 또한 한미동맹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전략적 지렛대이고 중국의 협조와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자산이다. 따라서 지금은 한미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변환기에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안보구도에 대한 한미간 공통의 인식과 이를 만들어가기 위한 로드맵이 필요하다. 북핵문제라든지, 통상문제와 같은 현안에 관한 협의와 협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강대국들의 새판짜기 게임에서 우리의 국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긴밀한 협의를 통해 한미관계의 지향점을 설정하고 한미동맹의 부가가치를 증가시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여 새로운 판짜리에 참여하는 한편, 북한 문제에 관한 러시아의 긍정적인 역할을 확보하는 것도 적극 추진하여 중국의 과도한 영향력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2017년 3월 18일 토요일

대중 경제의존도, 과장돼 있다

2012년 발표된 통계자료에 따르면 중국은 GDP(국민총생산량)에서 일본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총 무역량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추월해 1위 자리에 올랐다. 조만간 GDP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은 2012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수출의 24.2%, 수입의 16.8%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이 됐다. 대중(對中) 교역규모가 확대되면서 대중 무역수지 흑자는 물론 비중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특성을 감안할 때 중국과의 교역규모가 크다는 건 중국이 그만큼 중요한 시장임을 시사한다.

이 통계만 놓고 보면 중국이 한국 경제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좌파진영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외교관계에서 미국보다 중국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수차례 제기된 바 있다.

대중(對中) 교역의 실상, 대부분이 가공무역

그러나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와 관련해서 실상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과 중국의 무역량이 다른 국가들과의 그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가공무역이다. 중국의 인건비가 한국보다 저렴해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생산기지를 건설, 반제품 또는 원자재를 중국으로 수출해서 조립한 후 미국, 유럽 등 제3국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즉 최종 목적지는 중국이 아닌 미국 등 서방국가가 되는 것이다.

반면 중국 내수시장을 겨냥한 수출비중은 적은 편이다. 정부가 지난 2011년 3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대중수출 중 제3국으로 수출하는 가공무역의 비중은 75%이고 중국 내수시장을 겨냥한 대중수출은 25%에 불과했다.

이를 감안하면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기록하는 수백억 달러의 무역흑자에는 상당부분 거품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매긴 무역 평가 결과 한국의 실질적인 대중 무역흑자는 대폭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WTO(세계무역기구)는 지난 1월 주요 교역국의 무역을 부가가치(value-added) 기준으로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 기획재정부는 “OECD와 WTO가 글로벌 공급망의 분화로 총수출액과 총수입액에만 의존하는 기존 총교역량 방식의 무역통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해 최종재 생산에 사용된 중간재의 생산국과 부가가치를 추적함으로써 상품들이 어느 정도의 부가가치를 내는지 분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국의 대 중국 수출은 2009년 기준으로 총 교역량 방식을 적용할 경우 전체 수출의 27%를 차지하지만 부가가치 기준을 적용할 경우에는 19%로 감소했고 일본은 한국의 두 번째 수입국가에 올랐다. 또한 부가가치 기준에 따르면 대 중국 무역흑자는 약 450억 달러 정도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재부는 “지난 2009년을 기준으로 할 때 대 중국 무역수지 흑자는 569억 달러였지만 부가가치 기준으로 하면 104억 달러에 불과하다”며 “한국산 제품의 상당부분이 중국에서 가공을 거쳐 미국, 일본, 독일 등 제3국으로 수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한국의 중국에 대한 실질적인 경제의존도가 단순 무역량에 비해 훨씬 낮음을 의미한다. 또한 한국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중국에서 타국으로 대거 이전할 경우 대중 교역 규모는 자연스럽게 급감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중국의 내수시장은 현재까지는 GDP 규모에 비해 적은 수준이다. 세계은행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 기준으로 중국 민간소비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5%로 미국(72%), 일본(60%)에 비해 한참 낮았다. 그 규모도 2조5000억 달러로 일본의 71%, 미국의 24%에 불과했다.

이 같은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민일보는 지난해 사설에서 “중국의 무역흑자는 사실상 미국 기업들이 모두 가져가고 있다”며 “지금처럼 자국 내 모순을 중국에 전가하면 국제무역의 발전을 저해하고 쌍방 모두 손해를 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표면상으로는 중국이 무역흑자를 보고 있지만 대부분 가공무역이고 실제 수출 주체는 외자기업들이어서 중국이 이익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인민일보는 “지난해 중국의 수출에서 외자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52.4%에 달하고 그 중 미국 기업의 비중은 60%나 된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대미 무역에서 낸 흑자 대부분을 미국이 다시 가져간다”는 주장이다. 이어 “중국은 양질의 저렴한 상품을 수출해 미국인들의 소비 능력과 생활 수준을 높여줬다”며 “이는 미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중국 인건비 상승에 투자기업들 대거 철수 

그동안 국내 기업들이 가공무역을 위해 중국에 대거 진출한 이유는 중국의 인건비가 한국에 비해 저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최근 이 경쟁력마저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생산성을 고려한 중국의 1인당 평균 인건비가 앞으로 8~9년 안에 한국의 인건비를 추월할 전망이다. 또 2008~2010년 중국에 진출해 사업하고 있는 국내 22개 제조업종 가운데 식료품 의복 등 10개 업종은 평균 3년에 한 번꼴로 적자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는 2021~2022년께 중국과 한국의 근로자가 1달러어치 제품을 생산할 때 받는 시간당 임금(생산성 임금)이 거의 비슷해질 전망이다. 이는 산자부의 의뢰를 받은 회계컨설팅업체 삼정KPMG가 중국에 1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한 국내 439개 기업을 대상으로 10년간(2008~2017년) 양국의 인건비 상승 추이를 분석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한국으로 유턴하는 기업들도 최근 급증했다. 중국 칭다오에 진출한 국내 주얼리업체 18개는 지난해 8월 전북 익산으로 생산공장을 이전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신발·전자부품·자동차부품 등 제조업체 10곳이 국내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보다 인건비가 훨씬 저렴한 동남아 국가들이 새로운 생산기지로서 급부상하고 있는 상황이다
출처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832

2017년 3월 16일 목요일

독일통일-5 (베를린장벽 붕괴 下)

베를린장벽 붕괴의 물꼬를 튼 나라는 역시 동구권 민주화의 첫 깃발을 잡았던 헝가리였다.

(참고로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북방정책)도 1989.2월 헝가리와 첫 수교를 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이어 한국은 유고, 소련, 폴란드, 불가리아, 중국 등과 수교하게 된다. 이런 북방외교시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이 이 책의 저자 염돈재 박사다).

1989.6.28.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제거하자 헝가리에 와있던 동독주민들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동독주민들의 베를린 서독대표부 점거(8/3), 몰려드는 동독주민들을 차단하기 위한 동베를린 주재 서독 상주대표부 폐쇄(8/8), 헝가리 ‘부다페스트’ 서독대사관 폐쇄(8/11)조치가 잇달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주민들의 탈출은 계속되었다. 헝가리 ‘범유럽 피크닉’에 참가했던 동독청년 600여 명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고(8/19), 이어 체코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이 폐쇄되었다(8/22).  

서독의 ‘헬무트 콜’은 발빠르게 헝가리 ‘네메트’ 총리와 비밀교섭하여, 5억 마르크를 주는 대가로 헝가리가 동독과 맺은 여행협정을 파기하도록 유도했다(8/25). 헝가리 정부의 여행협정 파기로 국경이 개방되자 콜 정부는 동독주민 57,000여 명을 서독으로 데리고 왔다(9/11). 그 와중에 ‘라이프치히’에서 첫 월요시위가 개최되어 1,200명이 연행되었다(9/4).

이어 체코정부도 ‘프라하’에 체류 중이던 동독인 4,500명의 출국을 허용했다(10/3). ‘라이프치히’ 시위대는 7만명으로 늘었다가(10/9) 12만명까지 증가되었다(10/16).

격변의 와중인 10월 6일 고르바초프는 ”소련군은 일체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무력진압에 반대한다”라고 말했고, 10월 7일 동독 공산정권 수립 4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늦게 오는 자는 인생의 벌을 받는다”라는 소련속담을 인용하면서 동독의 개혁을 촉구했다.(그 때까지만 해도 동독이 개혁만 하면 사태수습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유혈진압을 준비했다.

‘라이프치히’ 주둔군 부대에는 “필요하면 발포해도 좋다”는 ‘인민군 명령’이 하달되었고 실탄도 지급되었다. 시위대에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병사들은 출동부대에서 제외되었고, 사상자 발생에 대비한 수송계획, 혈액, 시체 담을 자루까지 준비되었다.

하지만 10월7일 ~ 8일,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적 구타와 대규모 검거는 있었지만 끝내 발포명령은 내려지지 않았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발포명령을 내린 지휘관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발포명령을 내리면 군인들의 총부리가 자신을 향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던 것이다.

그러자 동독 정치국원들이 분열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책임을 ‘호네커’에게 지우고 루마니아처럼 그를 제거하면(차우세스코 제거 방식), 사태수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련으로부터 ‘호네커’ 제거 승인까지 받아놓았다. 그런 일환으로 10월 18일, 19년 동안 집권했던 ‘호네커’ 서기장이 퇴진했고, ’에곤 크렌츠’가 취임했다.

‘크렌츠’ 취임 후에도 동독주민들의 탈출과 시위는 계속되었다.

11월 1일에는 동독주민 5만 명이 체코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고,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 개최된 문화예술 집회에서는 동독 역사상 최대 규모인 1백만 명이 운집하여 “개혁, 언론 및 집회의 자유, 자유선거 실시, 공산당 일당독재 폐지”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동독정부는 ‘여행법’을 개정하여 보다 폭넓은 여행자유를 주기로 했다.

‘새 여행법’은 여행허가 범위를 확대하여 주민불만과 불법탈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개정된 내용도 “개인적인 해외여행의 ‘신청’은 지금부터 특별한 ‘전제조건 없이’ 할 수 있다” 였다.

이것은 여권과 비자발급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겠다는 뜻이지, 출국비자 없이도 해외여행을 완전히 자유화한다는 뜻은 아니었다.(동독에서는 여권을 받아도 별도의 출국비자를 받아야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동독정부는 비자발급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독 공보담당 정치국원 ‘권터 샤보프스키’의 ‘위대한 거짓말’이 터져 나왔다.

1989.11.9. 오후 6:55.

매일 열리는 기자회견이 끝날 때쯤, ‘샤보프스키’는 ‘여행법 개정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 여행법을 당 서기장 ‘크렌츠’로부터 기자회견 직전에서야 건네받아 아직 그 내용도 읽어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물론 새 여행법에 대한 사전정보나 설명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샤보프스키’는 반은 읽고 반은 대충 해석하면서, “누구나 개인여행을 신청할 수 있고, 즉시 허가가 내려질 것이며, 각 지방 경찰에게는 신청서 없이도 영구이주 비자를 즉석에서 발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발표했다.

엉성한 브리핑에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다. “그 규정이 언제부터 발효되느냐”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샤보프스키’는 “즉시, 지체 없이”라고 멋대로 대답했다. 어떤 기자가 “그것이 서베를린에도 해당되느냐”고 보충질문을 하자 ‘샤보프스키’는 “그렇다. 동서독, 동독과 서벨를린의 모든 국경 검문소가 다 해당된다”고 또 멋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 새 여행법은 해외여행의 ‘신청’이 간소화된다는 내용일 뿐이었다. 더구나 베를린장벽에도 적용된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베를린장벽은 4대전승국의 관리 하에 있었기 때문에 동독정부가 결정할 사항도 아니었다.

새 여행법은 그날 중앙위원회에서 초안이 승인되었었는데, 12월 중순에 예정되어 있던 당 특별회의 준비에 골몰해 있던 ‘크렌츠’가 자기의 업적을 홍보하기 위해 이를 ‘샤보프스키’에게 미리 건네준 것이었다. 더구나 기자회견 직전에 말이다. 말하자면 평소 경솔하고 다변인 ‘샤보프스키’가 말실수를 한 것이다.

추가질문이 이어졌지만 더 이상의 답변은 없었고, 많은 의문점을 남긴 채 기자회견이 끝났다. 기자들은 워낙 의외의 일이라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공식 발표문이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다시피 하면서 기사를 작성했고, 그 바람에 보도내용도 서로 달랐다.

그날 저녁 7시 5분. AP통신이 가장 먼저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서독 공영방송(ARD)이 8시 뉴스에서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많은 동서독 주민들이 ‘샤보프스키’의 회견과 TV뉴스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이어서 사실여부 확인을 위해 국경초소로 몰려가 군인들에게 질문했다. 금시초문인 군인들이 시원한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수천, 수만 명이 국경에서 국경개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주민들과의 시비 끝에 겁에 질린 군인들은 상부의 지침도 받지 못한 채 10시 30분 경, 국경 바리케이트를 열어주었다. 이어서 동서독 주민들이 함께 장벽에 올라가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국경수비대의 보고를 받은 동독 내무장관도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국경수비대의 결정을 추인했다.

이렇게 해서 1989.11.9. 자정 경에는 거의 모든 국경 통로가 열렸고, 베를린은 나팔 불고 춤추고 환호하는 파티장 같이 되어 버렸다. 여기 저기서 또 다른 구멍까지 뚫렸고, 불과 2주 만에 300만 명의 동독주민이 서베를린이나 서독으로 넘어갔다.

서독정부는 전에 하던대로(법대로) 이들에게 100 마르크(6만원)의 환영금을 주었고, 환영금을 받기 위해 더 많은 동독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10일 동안 서방여행을 위한 비자 1,030만 건이 발급되었고, 국경지역 50 곳에 통행로가 만들어졌다. 베를린장벽은 그렇게 무너졌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크렌츠’는 장벽개방이 동독정부의 사전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데다가 취임한지 얼마 안된 개혁가로서의 인기하락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튿날인 11월 10일, 크렌츠가 동독주재 소련대사에게 전화했을 때 둘은 꽤 다투었다. 소련대사는 “2차대전 4대전승국의 문제인 베를린장벽을 왜 당신 마음대로 개방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참고로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서독정부의 지도자들은 앞 다투어 장벽으로 몰려갔지만, 동독정부 지도자들은 한 사람도 장벽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동독 공산정권의 무능함을 백일 하에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아직 통일은 멀었고, 통일 구호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천안문 사태가 유혈진압된 지도 얼마 안되었고, 동독에는 소련군까지 버티고 있었기에, 누구도 통일이 현실화되리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헬무트 콜’ 총리 빼고는 말이다.

2017년 3월 14일 화요일

독일통일-4 (베를린장벽 붕괴 上)

섬처럼 동독 내에 떨어져 있던 베를린은 4대전승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1948.6월~1949.5월, 11개월 동안에는 소련이 베를린행 육로와 수로를 봉쇄하여, 미국과 영국의 군용기가 하루 4,000 회, 총 27만 8천 회나 날아가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물품을 공급하기도 했었다(베를린 봉쇄).

베를린을 둘로 나눈 베를린장벽은 동서냉전과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한창 때인 1961. 8월에 구축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철조망이었으나 몇 차례 증축해서 담이 되었다.

베를린장벽 붕괴와 관련해서는 1987.6월,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했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벽을 부수시오.(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라는 연설이 유명하다. 그 2년 5개월 후 베를린 장벽은 거짓말같이 붕괴된다.

베를린장벽 붕괴에 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그걸 포함하여 그 붕괴 과정을 시간 순으로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동독 정부는 여행자유의 수준을 점차 높여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동독인들이 같은 공산국가인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으로 여행을 갔다. 1980년대 말쯤에는 이들 나라에 갔던 여행객들이 동구 공산국가의 민주화 시위에 영향을 받아,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며 그 나라에서 시위를 하곤 했다.

(그 이전인 1985.1월에는 체코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에서 시위하던 동독 여행객들이 처벌면제와 조속한 출국허가 약속을 받고 동독으로 귀국한 사례도 있었다.)

1985.3월, 소련에서 ‘체르넨코’ 서기장이 사망하고 ‘고르바초프’가 취임했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폈고, 동구 공산국가 주민시위시 소련군 무력진압의 근거였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그가 이런 정책을 편 배경 중의 하나는 미국과의 무제한적 무기경쟁이 소련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만큼 소련 경제는 이미 개판이었다. 실제 고르바초프는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소련의 중거리미사일 유럽배치에 대응하여, NATO가 유럽에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한 것과 1983년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 소위 ‘별들의 전쟁’ 계획)이 소련의 정책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소련의 개혁, 개방 분위기에 편승하여 동구 공산국가에서 주민시위가 시작되었다.

헝가리가 첫 깃발을 잡았다. 1988.5월 개혁파인 ‘그로스’ 서기장이 집권한 것이다. 이어 폴란드가 2번 타자로 나섰다. 1989.4월 ’자유노조’가 합법화되었고, 6월 총선에서는 비공산당 주도의 연립내각이 수립된 것이다.(이때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도 발생함).

이어 체코에서는 그 해 11월, 공산당 권력독점이 폐지되었고, 12월에는 반체제 인권운동가인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 루마니아에서는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차우세스크’ 부부가 처형되었다.

동독은 가장 늦게 출발했다.

그 이유는 앞서 얘기했듯이, 동서독 주민 모두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가 물샐 틈 없이 감시하고 있었으며, 동독 내의 반체제 인사는 대부분 서독으로 수출되어 ‘반란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그래서 돈 주고 정치범을 데리고 온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렇게 봇물 터지듯 터져나온 동구 공산국가 주민들의 민주화 시위가 ‘고르바초프’ 만의 영향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 동안 쌓인 공산주의의 적폐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88서울올림픽’이다. 우리와 관련되어 있으니 잠시 그 부분을 살펴보자.

’88서울올림픽’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12년만에 전지구촌 국가가 참가한 최대 올림픽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들은 1984년 ‘LA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로써 2회 연속 반쪽 올림픽이 열렸다.

마침 1985년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동서 데탕트가 조성되었다. 그러자 국민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소련과 동구권 공산국가의 집권층은 더 이상 올림픽에 불참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1988년 서울에서 12년 만에 전 국가가 참가하는 진정한 지구촌 올림픽이 열렸던 것이다.(물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도 한 몫 했다).

소련과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참가결정 이면에는, 서울의 못 사는 모습을 자국민들에게 생중계하여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보여줌으로써, 점증하는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때까지 한국에 대한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의 인식은 ’6.25의 폐허’ 그대로였다.

그래서 소련과 동구권 공산국가들은, 관례와 다르게 TV 중계 내용을 사전에 체크하거나 검열하지 않았고, 자국민들에게 그대로 방영하게 했다.

그런데 동구권 공산국가 국민들이 TV에서 본 서울의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전쟁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시민들은 자유로웠으며, 환경은 풍요로웠다. 개막식을 포함하여 서울올림픽 전체가 엄청난 성공이었다.

(참고로 서울올림픽은 진행, 기록, 보안 등에서도 뛰어났고, LA올림픽을 제외하고는 그 전 몇 개의 올림픽에서 보여줬던 적자행진을 끝장낸,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올림픽이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소련 및 동구 공산국가 주민들의 마음 속에는 ‘도대체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한 것인가?’라는 자괴감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감이 자리 잡았다.

이런 국민의식의 변화가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0년대 종반 동구권 국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폭발시켰다는 얘기다. 실제로 동구권 공산국가 주민들이 민주화 시위를 할 때 합창했던 노래가 서울올림픽의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hand in hands)’였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기여한 드문 사례 중 하나가 ’88서울올림픽’이다. 우리는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2017년 3월 12일 일요일

독일통일-3 (서독 정책)

서독의 통일정책은 양대 정당인 기독교민주당(기민당)과 사회민주당(사민당)의 정책을 보면 개괄될 수 있을 것이다. 당명에서 알 수 있듯이 기민당은 보수당, 사민당은 진보당이다. 하지만 어느 당의 통일정책이라도 기본적으로 커다란 제약 내에서만 통일정책을 수립해야 했다. 그 제약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독일은 2차대전 패전으로 인해 미,영,프,소 등 4대 전승국에 의해 분할되었고, 그 바람에 1990.10.3. 통일될 때까지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독일은 1952년 ‘독일조약’에 따라 ’4대 전승국’의 동의를 받아야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그 때문에 베를린장벽 붕괴 후 통일 때까지 약 11개월 동안 ‘헬무트 콜’ 정부는 정신 없이 바빴다).

독일조약에는 ”전체로서의 독일과 베를린에 대해서는 2차대전 전승국가들이 책임과 권리를 갖는다”라는 규정이 있었고, 이에 따라 서베를린 지역에는 미,영,프 군대가 총 12,500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동독에는 소련군이 38만명이나 주둔하고 있었으니 더했다.

따라서 동서독이 통일에 합의한다고 하더라도 4대 전승국 중 어느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통일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통일에 찬성할 리가 없었다.(다행히 남북한은 그럴 필요가 없다). 실제로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에도 미국을 제외한 3국은 통일을 극력 반대했다.

그래서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가능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고, 이는 동서독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의 제약은 전회에서 얘기했듯이 ”인권문제를 양보하는 어떠한 합의도 해서는 안된다”는 ‘서독연방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었다. 어느 당의 통일정책이든 이 ‘인권의 틀’ 안에서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마지막 제약은 통일에 대한 서독국민들의 ‘체념’이었는데, 그 체념의 배경에는 위에서 말한 4대 전승국의 승인을 받을 수 없다는 무력감도 있었지만, 그것 못지않게 통일의지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서독 국민들은 2차대전의 트라우마로 인해, 통일을 들먹이는 자체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이고, 이는 곧 2차대전을 반성하지 않고 ‘나치로의 회귀’를 원하는 정신나간 주장으로 간주하였다. 민족을 들먹이는 것이야말로 죄악처럼 간주되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서독 학자 ‘에버하르트’는, “우리는 독일인임을 더 이상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자랑해야 한다”고 말했고, 작가 ‘패트릭 쥐스킨’은 “동독과 서독만큼 무관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신동방정책’의 전도사 ‘빌리 브란트’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에도 ”(독일) 통일은 반세기 이후에나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고, 독일통일에 가장 많은 악담을 했던 ‘권터 그라스’는 독일통일 이후에도 “독일은 통일과정에서 잘못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모두 잘못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까지도 서독국민들의 통일 의지는 매우 낮았고, 붕괴 후에도 통일을 진정으로 환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얘기다.

동독인을 동포로 생각한다는 서독인의 비율은 1970년 68%에서 1987년 52%로 줄어들었으며, 특히 29세까지의 젊은 층에서는 동독인을 ‘오스트리아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동포로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많았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인 1989.12월의 여론조사에서도 절반의 응답자만이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독일의 정당들은 이런 여러가지 제약 속에서 통일정책을 수립, 시행해야만 했다. 그럼 기민당과 사민당의 통일정책을 보자.

기민당은 전후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었던 친미보수 정당이다. 기민당 출신 총리로는 ‘콘라드 아데나워’(1949~1963), ’루드비히 에르하르트(1963~1966), ‘헬무트 콜’(1982~1998)이 있다.

기민당 통일정책은 ‘자석이론(magnet theory)’이다. 자석이론이란 ‘힘의 우위’를 크게 유지할수록 자석에 쇠붙이가 딸려오듯 흡수통일이 된다는 주장이다. 기민당은 경제발전, 친미 친서방 및 대소련 강경외교, 서독의 주권회복, 서독의 유일대표권 확립. 통일보다는 자유 중시 등 ‘힘의 우위’를 추구했다.

하지만 변화도 있었다. 사민당에게 정권을 뺏겼다가 다시 찾은 후 기민당은 사민당이 추진했던 ’신동방정책’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추진했다. 그러나 통일의 기회 즉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자, 기민당(헬무트 콜)은 사민당과 주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국가연합 통일방안’과 ‘경제원조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여, 동독혁명을 흡수통일로 연결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룬 정당’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반면 사민당은 독일판 햇볓정책인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을 추진했던 진보정당이다. 사민당 출신 총리로는 ‘빌리 브란트’(1969~1974), ‘헬무트 슈미트’(1974~1982)가 있다. 신동방정책이란, 끊임 없는 대동독 지원과 동독과의 교류로 ‘접근을 통한 변화’를 일으키자는 ’작은 걸음 정책’이다.

사민당은 처음에는 진보정당답게 무조건적인 통일을 주장했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통일지상주의’나 ‘독일의 중립화’를 주장했고, 통일에 방해가 될 경우 “서구와의 동맹을 파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심지어 서독의 경제적 흡인력이 동독의 불안정과 붕괴를 야기하여 통일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 후 비현실적인 주장에 독일국민이 등을 돌리자, 대신 나온 정책이 ’빌리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이다. 신동방정책은, 실제로는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교류 협력을 통해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으로, 통일정책이라기보다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정책’이었다.

(독일 사민당의 통일정책 변화 과정은, 우리나라 진보정당의 통일정책이 ’통일지상주의’에서 ’햇볓정책’으로 변한 과정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사민당은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에도 ”동독 탈출자의 수용을 제한할 것”과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하는 바람에, 통일을 반대하는 당으로 낙인 찍혔고 ’통일의 최대 패배자’로 인식되었다.

이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당의 차이와 집권당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은 통일정책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당 모두 집권시의 대동독 정책은,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완화와 동독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으며, 인권문제에서는 양보하지 않았고, 기민당은 사민당의 신동방정책을 계속 추진했으며, 사민당은 기민당의 친미, 친서방 정책과 ’중앙기록보존소’(‘북한인권기록센터’와 유사함)를 계속 유지했다.

이런 일관성의 예는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 원칙의 준수가 그것이다. 그 원칙이란 ”1) 동독이 먼저 요청할 때, 2) 반드시 대가를 받은 후, 3) 동독주민들이 서독의 지원사실을 인지할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라는 3대원칙과 더불어 정경분리 원칙, 시장경제 원칙이 그것이다.

서독은 대가 없는 지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항상 정치범 석방 등 실제적인 인권신장을 대가로 ‘현금지원이 아닌 현물지원’을 했다(현금지원은 딱 3번 했다). 그리고 정치범 선정, 몸값 지불 등은 서독 ‘개신교연합회’에 전적으로 위임했다. 동독정부가 인신매매범이라는 인식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일관성 유지의 또 다른 예로는 사민당의 대소련 강경책을 들 수 있다.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조차 집권 중 ’NATO의 2중결정’을 실행했다. ‘NATO의 2중결정’이란 1979년 소련의 SS-20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에 대응하여, 상호 철거협상을 추진하되 소련이 응하지 않으면 ‘퍼싱2 미사일’과 ‘크루즈 미사일’ 570여기를 서독에 배치하기로 한 결정을 말한다(싸드 배치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상의 원칙 외에도 서독은 친서방 노선의 견지, 기본법의 영토조항 및 국적조항 유지, 동독 국가인정 거부 등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소련과 동독이 잘못된 기대를 갖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도록 유도했다.

이런 통일정책 일관성의 배경에는, ’한스 디트리히트 겐셔’라는 사람이, 몇 번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1974년부터 통일 때까지 무려 16년간이나 외무장관으로 재임했던 것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각 당은 자신들의 정책에 따라 통일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느 정당도 통일을 현실적인 정책목표로 설정하거나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양당 모두 여러가지 이유로 동서독의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유럽통합을 먼저 하고나서, 그 틀 내에서 동독과의 통일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