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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3일 수요일

독일통일-8 (외교전쟁 中)

일단 외교전을 설명하기 전에 베를린장벽 붕괴(1989.11.9) 이후 진행된 각국의 만남과 협상, 그리고 그 와중에 진행되었던 동독 내부의 격변적 상황을 알아보는게 독일통일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이 남북의 통일 과정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통철력도 제공해준다고 본다. 그래서 대강의 사건만 연표로 제시하겠다.

○ [89/11/13] 동독 ‘모드로우’ 총리 취임.
   – 서독에 ‘조약공동체’ 구성을 제의.
○ [89/11/20] 시위 격화. 라이프치히에서 50만 명 시위. 처음으로 ‘독일통일 구호’ 등장
○ [89/11/28] 콜,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목’ 발표
   – “동독에 민주제도 도입해서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물어라”고 요구
○ [89/12/01] 동독, 콜의 ’10개항목’ 수용
   - 동독헌법 개정. 공산당 1당독재 조항 삭제

○ [89/12/07] 동독, 당 간부 및 재야세력으로 구성된 ‘중앙 원탁회의’
   - ”1990.5.6 에 ‘자유선거’를 실시한다”고 합의
○ [89/12/12] 미국 베이커 국무장관 발표
   -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조건으로 독일통일을 지지한다.”
○ [89/12/19] ‘콜-모드로우’ 회동.
   – ‘조약공동체’ 구성에 합의.
   – 콜은 동독에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동독 군중들에게 ‘나의 목표는 통일’이라고 연설

○ [90/01/30] ’모드로우- 고르바초프’ 회동
   – 고르바초프,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표
○ [90/02/01] 모드로우, ’4단계 통일방안’과 통일독일의 ‘중립화’ 계획 발표.
   – ‘콜’은 통일독일의 ‘중립화’에 반대
○ [90/02/05] 동독 제 정당, 선거제휴를 위해 ‘독일연맹’ 결성
   – 독일연맹은 서독 기민당의 후원아래 결성되었으며, 신속한 통일을 공약
○ [90/02/06] 콜, ‘화폐통합’ 제안
○ [90/02/10] ‘콜-고르바초프’ 회동
○ [90/02/13] ‘콜-모드로우’ 회동.
   – 모드로우 : ‘조약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안하면서 100~150억 마르크 지원 요구
   – 콜 : (야당과 언론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모드로우 요청 거절.
   - 그러나 양측은 ‘화폐공동체’ 도입을 위한 협상개시에는 합의

○ [90/02/14] ’2+4회담’ 원칙에 합의
   – ’2+4′는 미,영,프, 소 및 동서독을 의미함
○ [90/02/15] 콜, 다시 한 번 “나의 목표는 가능한한 조속한 통일”이라고 발표
○ [90/02/21] 서독 내무장관-베이커 미국무장관 회동
   - “통일후 다른 영토의 독일편입은 없다”고 약속
○ [90/02/24] ‘콜-부시’ 회동
   – “통일독일의 ‘NATO 잔류’에 합의했다”
○ [90/03/18] 동독 ‘인민의회 선거’ 실시
   – 신속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48.1% 획득하여 승리(공산당 후신 ‘민주사회당’ 대패)
   – ‘바르샤바 조약기구’ 외무부장관들, 독일통일 인정
○ [90/03/20] 서독정부 발표.
   – “통화, 경제, 사회통합을 1990년 여름까지 완료하겠다”
○ [90/03/29] ‘콜-대처’ 회동

○ [90/04/05] 선출된 동독 의원들, 동독 “인민회의” 결성
   - 반공 변호사 ‘로타 드메지어’를 총리로 선출
○ [90/04/06]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 발표.
   – “통일독일의 NATO잔류에 반대한다.”
○ [90/04/20] ‘부시-미테랑’ 회동 및 발표
   - ”미국과 프랑스는 독일통일에 합의했다.”
○ [90/04/29] 동서독 총리 발표.
   – “7/1부로 양국은 화폐, 경제, 사회를 통합한다”
○ [90/04/29] ’드메지어-고르바초프’ 회동
○ [90/05/02] 동서독 정부, ‘화폐통합’에 합의
○ [90/05/05] 제1차 ’2+4 회담’ 개최
○ [90/05/16] 베이커 미국무장관 모스크바 방문, 통일독일의 ‘NATO 가입’ 협의
○ [90/05/30] 미소 정상회담. 통일독일의 ‘NATO 잔류 문제’ 합의 실패
○ [90/06/08] ‘콜-부시’ 회동
○ [90/06/11] ’드메지어-부시’ 회동

○ [90/06/17] 동독의회 안건채택.
   – “동독국가를 해체하고 통일한다”
○ [90/06/20] 동서독 의회 결의.
   – “2+4합의에 따라 오더-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한다”
○ [90/07/01] ‘화폐, 경제, 사회통합조약’ 발효. 동서독간 분계선 폐지
○ [90/07/15] ‘콜-고르바초프’ 회동.
   – 통일독일의 ‘NATO잔류’에 합의
○ [90/08/22] 동독 인민회의 결정.
   – “10월 3일부로 서독으로 통합한다”
○ [90/08/31] 동서독, ’통일조약’ 가서명, 동서독 ‘국무회의’ 인준, 양독 ‘통일조약’에 서명
   – 서독기본법 제23조에 의거, 동독 6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하는 형식
○ [90/09/12] 제4차 ’2+4회담’.'독일문제 최종해결 조약’ 승인

○ [90/09/20] 동서독 의회.
   – ‘통일조약 비준안’ 가결
○ [90/09/24] 동독, ‘바르샤바 조약기구’ 공식 탈퇴
○ [90/10/01] 4대전승국 외무장관 회동 및 서명.
   – “10/3부터 ‘베를린과 전체독일에 대한 전승국의 권한과 책임의 효력을 정지한다”
○ [90/10/03] 독일통일 선포
○ [90/10/12] 독일 외무장관-소련대사. “소련군 기한부 주둔에 관한 조약” 서명
   – “소련군은 1994 말까지 철수한다.”
○ [90/11/14] 독일-폴란드. ’국경조약’ 서명
   – “‘오더-나이세 선’이 양국의 국경선이다.”

이는 하나하나가 대단히 복잡하고 중요한 사건과 협상과 결정이라고 할 정도로 격변의 연속이었다. 하나하나마다 치밀한 준비가 산더미같이 필요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위에서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간단한 ’화폐통합’이란 단어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협상과 준비가 필요했을까?

저런 격변의 연속 속에 각국은 외교전쟁을 했다.

나는 독일통일과 관련하여 각국의 무수한 만남과 전략과 배신과 협력, 그리고 콜이 얼마나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했는지를 기술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당시 각국의 이해관계와 대략적인 전략, 그리고 그 결과만 기술하겠다.

먼저 프랑스.

프랑스는 독일통일을 가장 바라지 않는 나라일 것이다. 과거 100년 동안 독일로부터 세 번이나 침공을 당해(프로이센 전쟁 및 1,2차세계대전) 개피를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베르린장벽 붕괴 후 콜이 “독일인은 자결권을 가졌다”고 선언하자,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은  “고르바초프 입지를 약화시키고 복잡한 영토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며 콜을 비난했다. 콜이 ’10개항목’을 발표하자 또 다시 “경솔한 기습공격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테랑은 1989.12.6. 고르바초프와 만나서는 ”유럽의 안정과 평화는 동서독이 존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의견일치를 보았고, 12.21. 동독 ‘모드로우’ 총리와 만나서는 ”경제발전을 위해 프랑스가 적극 투자하겠다(그러니 서독에 병합되지 마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미테랑은 또한 콜에게 ”대처 영국 총리를 조심하라”고 이간질을 하면서도, ‘대처’에게는 “독일의 부활을 경고”하는 등 2중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다음은 영국.

영국은 통일독일이 유럽통합을 촉진시켜,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영국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에서 큰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을 견제하는 입장이었으니, 속으로는 프랑스보다 독일통일을 더 반대했다.

영국의 기본입장은 ‘가능한 한 독일통일을 늦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를린장벽 붕괴 전후 시기부터 독일통일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한편으로는 독일통일이 급속히 진행된다면 NATO, EC, 헬싱키선언 서명국(35개국) 등 온갖 나라들을 끌어들여 독일통일을 논의하게 만듦으로써,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는 전략도 수립했다.(이는 소련의 전략이기도 했다).

‘대처’는 고르바초프와 만나 “독일통일에는 독일 주변국들의 희망과 이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어느 서방국가도 동독 내정에 개입하거나 동독과 소련의 안보를 위협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심지어 대처는 소련군의 동독 주둔을 원하기도 했다.

2017년 5월 1일 월요일

독일통일-7 (외교전쟁 上)

1989.11.9.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이 때부터 통일을 선언하는 이듬해 10월 3일까지 약 11개월 동안 동서독을 비롯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수반들과 관리들은 각자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가 무수히 만났고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이 6개국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6각 줄다리기’를 했다. 각자 합종연횡을 했고, 교묘한 전략을 썼으며, 겉과 속이 다른 말로 상대를 속였다. 그 와중에 동독에서는 데모와 체제 급변이 진행되었으니, 그야말로 카오스의 연속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잡은 사람이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이었다.
콜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된지 20일도 안된 1989년 11월 28일 “유럽과 독일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10개 항목(이하 ’10개항목’)”이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통일방안’을 발표함으로써 통일의지를 분명히 했다.

콜의 제안은 ‘서독기본법’에 엄연히 살아있는 통일관련 조항에 근거했다. 서독기본법은 통일을 헌법상의 명제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서독의 정치인들은 이전 회에서 밝혔듯이, 독일민족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 등 여러가지 이유로 통일을 입에 담지 않았었다. 그런데 콜이 ’10개항목’을 발표함으로써 통일의 이니시어티브를 쥐었다.

’10개항목’은 동독 ‘모드로우’ 총리의 조약공동체(이게 ‘연방제 통일안’인 것 같다) 제의와 지원요청을 거절하는 형식이었지만, 콜은 통일과 관련해 양독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동독에 ‘민주적인 합법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절대적인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다. 콜은 이렇게 요구했다.

○ 동독에 대한 지원은, ’동독 정치,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전환이 동독에 의하여 확정적으로 수락되고, 불가역적으로 시행되는 경우’에 한정된다.
○ 여기서 불가역적이란 동독 지도부가 동독의 ‘헌법개정’과 새로운 ‘선거법의 제정에  합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 동독은, 무소속은 물론 ‘비사회주의적’ 정당들의 참가가 보장되는 ‘자유·평등·비밀선거’를 실시하라.
○ 동독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해야 하며, 우리가 요구하는 ‘헌법적 조건’은, 무엇보다도 ‘정치범죄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고, 그 결과 ‘모든 정치범을 즉각적으로 석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동독에 민주제도를 도입해서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물어라”는 요구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말이다.

풍전등화의 동독은 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독이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통일에 대해 주민투표를 실시했던 것이고, 그 최종결과가 독일통일인 것이다.

사실 난마처럼 얼킨 주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고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콜’은 회고록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1989년 통일의 길에 나섰을 때만 해도 우리는 마치 늪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무릎까지 물속에 빠져 있었고 시야는 안개에 가로막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은 오직 하나, 그런 상황에서도 어딘가에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독일 ‘슈피겔지’는 이 때의 외교전쟁을 포커게임이나 체스게임에 비유했다. 이 게임의 대표 선수는 각국 정상들이었지만 외교관, 법률가, 정치인, 군인 등 수백 명의 전문가들도 자국의 이익을 위한 외교전에 투입되었다.

이 전쟁에서의 최대 승자는 ‘헬무트 콜’이었다. 그는 미국만이 독일통일을 찬성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콜은 처음부터 미국의 요구조건(통일독일의 NATO 잔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미국을 이용하여 주변국을 설득했다.

나중에 버티다 못한 소련이 “NATO를 탈퇴(중립화)하면 독일통일에 동의하겠다”는 제안까지 했지만 콜은 거부했다. 그는 통일 전 10개월 동안에만 부시와 8번, 미테랑과 10번, 고르바초프와 4번을 만났다.

2017년 4월 21일 금요일

독일통일-6 (인권 기반 교류)

동서독 간의 교류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부분 얘기했으므로 몇 가지 중요한 분야만 추가한다.

서독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서독기본법’의 3대 명제는 “자유, 평화, 통일”이었다.(여기서 자유란 동서독 주민들의 자유 즉 ‘인권’을 뜻함). 이 3대 명제 중에 ‘자유’가 ‘통일’보다 우선이라는 점에서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 중에 무엇이 우선인지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동독과의 교류를 통해 ’평화’를 확보하는 문제가 과연 동독주민들의 ‘자유’보다 우선인가 하는 점은 정권마다 달랐다. 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대북관계에서 항상 갈등요인이 된다. 쉽게 말해 휴전선 평화유지냐 북한주민 자유냐 하는 문제다.

사민당의 ‘신동방정책’은 ’자유’보다는 ’평화’를 중시하는 정책이었다. 그래도 ’평화’를 이유로 ‘자유’의 중요성이 경시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정신은 전술했듯이 “인권을 저해하는 어떠한 합의도 해서는 안된다”는 최고법원 판결에서도 나타난다. 이게 통일정책을 추진하는 우리 입장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서독은 1)동서독 주민간의 이주, 왕래, 가족상봉, 2)국경탈출자에 대한 사살 중지 및 탈출기도자에 대한 형량 경감, 3) 정치범 박해 금지, 4)동서독 주민간의 정보교환 확대 등 동독주민들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 목표를 달성하는데는 일관성이 있었다.

그런 정신에서 ’정치범 거래’가 성사되었고, ‘중앙기록보존소’가 설치, 운영되었으며, ‘탈출민 수용 정책’이 펼쳐졌다. 그럼 정치범 거래 내역부터 보자.

서독은 1962년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시까지, 동독 정치범 34,000명과 그 가족 25만 명을 구입하였다. 거래의 대가는 앞서 얘기했듯이 정치범 1인당 10만 마르크(5,300만원)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정치범 거래에 대해서는 ‘철저한 비밀’을 유지했고, 관련 예산도 ‘비공개 항목’이었으며, 정치인과 언론도 이를 ‘흥미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치범 거래의 득실에 대해서는 통일후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검토결과 ”동서독 주민간의 유대와 정신적,사회학적 결합에 기여한 점, 동독주민들로 하여금 미래의 희망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점, 다수의 지식인과 기능인들이 동독을 탈출하여 동독의 붕괴에 기여한 점” 등이 이득으로 판명되었다.

반면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점, 몸값이 동독 집권층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되었다는 점, 몸값 때문에 정치범이 양산되었다는 점” 등이 손해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독일통일에 기여했다고 결론지어졌다.

다음은 중앙기록보존소.

‘중앙기록보존소’는 우리나라의 ‘북한인권센터’와 유사하다. 즉 “동독주민들의 인권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통일 후 법치국가적 질서 확립을 위해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근거가 필요하며, 통일에 대비하여 가해자들의 폭력을 자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 하에 설치되었다.

‘중앙기록보존소’는 기민당 집권 때인 1961. 11월, ’나치만행기록소’ 등을 모델로 하여 국경지역인 ‘잘츠기터’에 설치되었다.(한 때 사민당과 동독정부가 집요하게 폐지를 요구했지만 계속 유지됨). 운영인력은 총 7명이었다.(검사2, 주법무성 공무원 1, 계약직 공무원 4).

동독의 인권침해 관련 정보는 주로 석방된 동독 정치범, 탈출한 동독군, 동독발행 각종 간행물, 서독 친지에게 보낸 동독주민들의 서신 및 통화, 동독 방문 서독인, 동독으로부터의 이주자, 정보기관 등을 이용하여 수집되었다.

중앙기록보존소는 설치 후 통일 때까지 30여 년간, 인권침해 관련 인사 약 80,000 명을 기록했다. 이 중 10,000 명은 통일 후 형사소추가 가능한 피의자들이었고, 나머지 70,000 명은 증인 및 피해자들이었다. 동독 판검사 6,500 명도 등재되었다.

이 기록은 통일 후, 동독 내 ‘사법제도 정착’과 판검사 및 공직자 임용시 심사 자료, 피해자들에 대한 ‘복권 및 보상 심사자료’, 범죄행위 가담자에 대한 ‘형사처벌 근거 자료’ 등으로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통일 후 평가에 의하면, 형사사건의 경우는 처벌 대상감만을, 민사사건의 경우는 정치적 박해로 재산이 몰수된 사건만을 기록했기 때문에, 좀 더 광범위한 기록을 유지했어야 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다음은 탈출민 수용 정책.

1949 ~ 1990.6월 까지 총 52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했다.(특히 1989.5월 ~ 1990.6월까지 격변의 시기에는 1년만에 62만여 명이 서독으로 넘어 옴).

서독정부는 ”1939.12.31 현재 독일 영토에 거주하던 독일인은 서독 국적자로 인정한다”는 ‘서독기본법’에 근거하여, 분단 이후 탈출한 동독인들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였고, 동독 탈출민들에게 여러가지 지원을 했다.

이 블로그에서는 탈북자에 대한 지원과 관련해서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서독의 선례가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서는 지원금을 위주로 살펴보자.

탈출한 동독인들은 우선 ‘베를린’과 ‘기센’에 소재한 ‘긴급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 후 각 주정부 대표와의 협의를 거쳐 각 주로 배분되어, 주에 있는 ‘임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사회로 나갔다. 따라서 각종 지원도 ‘긴급수용소’와 ‘임시수용소’에 있을 때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긴급수용소’에 있는 동안에는, 1인당 200 마르크의 연방정부 보조금이 지급되었고, 주정부 보조금이 가장에게는 30 마르크, 가족에게는 15마르크가, 용돈은 가장에게는 15 마르크, 가족에게는 10 마르크가 지원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숙식비, 건강진단비, 종교단체 제공 의류, 각 주에 있는 ’임시수용소’까지의 교통권 및 이삿짐 운송비 등이 지원되었다.

지방정부가 관리하는 ’임시수용소’에 있는 동안에는, 주택알선 또는 주택입주 우선권과 최고 1만 마르크까지의 저리융자, 학자금, 의료, 연금, 실업, 산재보험, 실업수당 및 생계비 보조금 등이 지원되었다. 하지만 이런건 모두 최소생계유지에 필요한 정도에 국한되어, 탈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노력으로 직장을 구하게끔 유도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4인가족이 수령하는 현금지원액은 총 920 마르크 (약 55만원. 통독당시 환율 1마르크 = 600원) 정도였다.

이 역시 통일 후 철저한 분석이 있었는데, 동독 이주민을 제한 없이 수용하고 정착을 지원한 것은 “동독주민의 인권개선과 통일여건 조성, 서독사회에 대한 고급인력 공급역할까지 하여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다음은 경제교류(대동독 경제지원).

경제교류는 무역, 용역거래, 공공부문의 이전지출, 금융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연간 교류규모는 75억 불에 달했고, 1975 ~ 1988까지 서독에서 동독으로 흘러 들어간 공식, 비공식 지원액은 연간 23억 불에 달했다.

참고로 비공식 지원이란, 예를 들면 “서독인의 동독 방문시 동독화폐로의 의무환전, 서독교회의 동독교회 지원, 정치범 석방대가 지원” 등이 있다.

경제교류도 몇 가지 원칙 하에 했다. 앞서 ’지원 3원칙’ 등을 말했지만 구체적인 절차와 관련해서는 ”수지균형을 맞춘다, 허가와 공고절차를 거친다, 원산지가 독일인 상품만 거래한다, 지불은 중앙은행 간의 청산계좌로 한다(뒷돈 거래 차단 목적)” 등이 적용되었다.

경제교류 역시 통일 후 철저한 득실계산을 했는데, “민족의 결속을 유지하고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을 완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2017년 3월 16일 목요일

독일통일-5 (베를린장벽 붕괴 下)

베를린장벽 붕괴의 물꼬를 튼 나라는 역시 동구권 민주화의 첫 깃발을 잡았던 헝가리였다.

(참고로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북방정책)도 1989.2월 헝가리와 첫 수교를 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이어 한국은 유고, 소련, 폴란드, 불가리아, 중국 등과 수교하게 된다. 이런 북방외교시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이 이 책의 저자 염돈재 박사다).

1989.6.28.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제거하자 헝가리에 와있던 동독주민들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동독주민들의 베를린 서독대표부 점거(8/3), 몰려드는 동독주민들을 차단하기 위한 동베를린 주재 서독 상주대표부 폐쇄(8/8), 헝가리 ‘부다페스트’ 서독대사관 폐쇄(8/11)조치가 잇달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주민들의 탈출은 계속되었다. 헝가리 ‘범유럽 피크닉’에 참가했던 동독청년 600여 명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고(8/19), 이어 체코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이 폐쇄되었다(8/22).  

서독의 ‘헬무트 콜’은 발빠르게 헝가리 ‘네메트’ 총리와 비밀교섭하여, 5억 마르크를 주는 대가로 헝가리가 동독과 맺은 여행협정을 파기하도록 유도했다(8/25). 헝가리 정부의 여행협정 파기로 국경이 개방되자 콜 정부는 동독주민 57,000여 명을 서독으로 데리고 왔다(9/11). 그 와중에 ‘라이프치히’에서 첫 월요시위가 개최되어 1,200명이 연행되었다(9/4).

이어 체코정부도 ‘프라하’에 체류 중이던 동독인 4,500명의 출국을 허용했다(10/3). ‘라이프치히’ 시위대는 7만명으로 늘었다가(10/9) 12만명까지 증가되었다(10/16).

격변의 와중인 10월 6일 고르바초프는 ”소련군은 일체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무력진압에 반대한다”라고 말했고, 10월 7일 동독 공산정권 수립 4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늦게 오는 자는 인생의 벌을 받는다”라는 소련속담을 인용하면서 동독의 개혁을 촉구했다.(그 때까지만 해도 동독이 개혁만 하면 사태수습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유혈진압을 준비했다.

‘라이프치히’ 주둔군 부대에는 “필요하면 발포해도 좋다”는 ‘인민군 명령’이 하달되었고 실탄도 지급되었다. 시위대에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병사들은 출동부대에서 제외되었고, 사상자 발생에 대비한 수송계획, 혈액, 시체 담을 자루까지 준비되었다.

하지만 10월7일 ~ 8일,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적 구타와 대규모 검거는 있었지만 끝내 발포명령은 내려지지 않았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발포명령을 내린 지휘관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발포명령을 내리면 군인들의 총부리가 자신을 향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던 것이다.

그러자 동독 정치국원들이 분열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책임을 ‘호네커’에게 지우고 루마니아처럼 그를 제거하면(차우세스코 제거 방식), 사태수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련으로부터 ‘호네커’ 제거 승인까지 받아놓았다. 그런 일환으로 10월 18일, 19년 동안 집권했던 ‘호네커’ 서기장이 퇴진했고, ’에곤 크렌츠’가 취임했다.

‘크렌츠’ 취임 후에도 동독주민들의 탈출과 시위는 계속되었다.

11월 1일에는 동독주민 5만 명이 체코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고,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 개최된 문화예술 집회에서는 동독 역사상 최대 규모인 1백만 명이 운집하여 “개혁, 언론 및 집회의 자유, 자유선거 실시, 공산당 일당독재 폐지”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동독정부는 ‘여행법’을 개정하여 보다 폭넓은 여행자유를 주기로 했다.

‘새 여행법’은 여행허가 범위를 확대하여 주민불만과 불법탈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개정된 내용도 “개인적인 해외여행의 ‘신청’은 지금부터 특별한 ‘전제조건 없이’ 할 수 있다” 였다.

이것은 여권과 비자발급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겠다는 뜻이지, 출국비자 없이도 해외여행을 완전히 자유화한다는 뜻은 아니었다.(동독에서는 여권을 받아도 별도의 출국비자를 받아야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동독정부는 비자발급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독 공보담당 정치국원 ‘권터 샤보프스키’의 ‘위대한 거짓말’이 터져 나왔다.

1989.11.9. 오후 6:55.

매일 열리는 기자회견이 끝날 때쯤, ‘샤보프스키’는 ‘여행법 개정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 여행법을 당 서기장 ‘크렌츠’로부터 기자회견 직전에서야 건네받아 아직 그 내용도 읽어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물론 새 여행법에 대한 사전정보나 설명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샤보프스키’는 반은 읽고 반은 대충 해석하면서, “누구나 개인여행을 신청할 수 있고, 즉시 허가가 내려질 것이며, 각 지방 경찰에게는 신청서 없이도 영구이주 비자를 즉석에서 발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발표했다.

엉성한 브리핑에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다. “그 규정이 언제부터 발효되느냐”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샤보프스키’는 “즉시, 지체 없이”라고 멋대로 대답했다. 어떤 기자가 “그것이 서베를린에도 해당되느냐”고 보충질문을 하자 ‘샤보프스키’는 “그렇다. 동서독, 동독과 서벨를린의 모든 국경 검문소가 다 해당된다”고 또 멋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 새 여행법은 해외여행의 ‘신청’이 간소화된다는 내용일 뿐이었다. 더구나 베를린장벽에도 적용된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베를린장벽은 4대전승국의 관리 하에 있었기 때문에 동독정부가 결정할 사항도 아니었다.

새 여행법은 그날 중앙위원회에서 초안이 승인되었었는데, 12월 중순에 예정되어 있던 당 특별회의 준비에 골몰해 있던 ‘크렌츠’가 자기의 업적을 홍보하기 위해 이를 ‘샤보프스키’에게 미리 건네준 것이었다. 더구나 기자회견 직전에 말이다. 말하자면 평소 경솔하고 다변인 ‘샤보프스키’가 말실수를 한 것이다.

추가질문이 이어졌지만 더 이상의 답변은 없었고, 많은 의문점을 남긴 채 기자회견이 끝났다. 기자들은 워낙 의외의 일이라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공식 발표문이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다시피 하면서 기사를 작성했고, 그 바람에 보도내용도 서로 달랐다.

그날 저녁 7시 5분. AP통신이 가장 먼저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서독 공영방송(ARD)이 8시 뉴스에서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많은 동서독 주민들이 ‘샤보프스키’의 회견과 TV뉴스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이어서 사실여부 확인을 위해 국경초소로 몰려가 군인들에게 질문했다. 금시초문인 군인들이 시원한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수천, 수만 명이 국경에서 국경개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주민들과의 시비 끝에 겁에 질린 군인들은 상부의 지침도 받지 못한 채 10시 30분 경, 국경 바리케이트를 열어주었다. 이어서 동서독 주민들이 함께 장벽에 올라가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국경수비대의 보고를 받은 동독 내무장관도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국경수비대의 결정을 추인했다.

이렇게 해서 1989.11.9. 자정 경에는 거의 모든 국경 통로가 열렸고, 베를린은 나팔 불고 춤추고 환호하는 파티장 같이 되어 버렸다. 여기 저기서 또 다른 구멍까지 뚫렸고, 불과 2주 만에 300만 명의 동독주민이 서베를린이나 서독으로 넘어갔다.

서독정부는 전에 하던대로(법대로) 이들에게 100 마르크(6만원)의 환영금을 주었고, 환영금을 받기 위해 더 많은 동독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10일 동안 서방여행을 위한 비자 1,030만 건이 발급되었고, 국경지역 50 곳에 통행로가 만들어졌다. 베를린장벽은 그렇게 무너졌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크렌츠’는 장벽개방이 동독정부의 사전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데다가 취임한지 얼마 안된 개혁가로서의 인기하락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튿날인 11월 10일, 크렌츠가 동독주재 소련대사에게 전화했을 때 둘은 꽤 다투었다. 소련대사는 “2차대전 4대전승국의 문제인 베를린장벽을 왜 당신 마음대로 개방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참고로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서독정부의 지도자들은 앞 다투어 장벽으로 몰려갔지만, 동독정부 지도자들은 한 사람도 장벽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동독 공산정권의 무능함을 백일 하에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아직 통일은 멀었고, 통일 구호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천안문 사태가 유혈진압된 지도 얼마 안되었고, 동독에는 소련군까지 버티고 있었기에, 누구도 통일이 현실화되리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헬무트 콜’ 총리 빼고는 말이다.

2017년 2월 24일 금요일

독일통일-1 (통일의 일등공신)

한 10년쯤 전에 ‘서울대행정대학원 통일정책연구팀’이 발간한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남과 북은 한 민족이 아니다’라는 도발적인 말로 시작되는 그 책은 독일통일과 그 부작용을 강조한 책이었다.

그 책의 주장을 간단히 표현하면 ‘민족이라는 허상에 몰두하여 급속하게 하는 통일은 재앙이다’는 것이다. 그 책은 그런 증거을 상당히 많이 제시했다.

나는 그 책의 주장에 설득되기도 했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책은 지식인 특유의 비판적 시각 - 부작용만을 과장하는 형편 없는 책이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 책의 저자들은, 경부고속도로, 인천공항, KTX 터널, 4대강에 반대했거나 천안함, 광우뻥 루머에 일조한 지식인들처럼, 뭐든지 삐딱한 반대만 하는 사이비에 불과했다.

그 후 여러가지 글과 책을 읽으면서, 나는 독일통일이 그 책이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로 ‘대단히 성공한 역작’이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통일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통일이다. 전혀 피를 흘리지 않았고, 강대국들의 동의 하에 매우 단기간에, 매우 스무스하게 진행되었으며, 통일 후 독일은 더욱 강대, 부강해졌기 때문이다. 동독주민들도, 서독주민들도 행복해 한다. 역사상 어느 통일도 이처럼 완벽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다!

물론 독일은 통일 후 한때 헤매기는 했었다. 하지만 통일이라는 거대한 과업에서 그 정도는 새발의 피다. 그런데도 한국에는 독일통일의 부작용이 굉장히 과장되어 퍼졌다. 그런 인식 때문에 ’남과 북, 뭉치면 죽는다’라는 책이 나왔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집단인식의 오류에 빠졌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동안 한국을 방문했던 독일 정치인과 독일 학자들이, 독일통일 당시 독일통일을 반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당시 독일통일 주역들은 통일과정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너무 바빠 한국에 내방할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 햇볓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 붕괴 = 남한 재앙’이라는 관념을 심어주었던 사람들의 이미지 조작 때문이다.

나는 여러 번 말했듯이 책임 없이 마음껏 떠들 수 있는 “기자, 교수, 시민단체” (나는 이들을 ‘무책임3총사’라고 부른다)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책임을 느끼는 공무원들의 더듬거리는 말을 더욱 믿는다. 공무원들은 커다란 조직의 의견을 모아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할 줄 안다.

마침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이라는 독일통일 관련 최고의(?) 책을 읽었다.

저자 염돈재 박사는 공무원 출신이다. 국정원 해외담당인 1차장 출신에, 노태우 정부 때는 북방정책을 입안했으며(북방정책은 노태우의 큰 업적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숨가쁘게 통일이 진행 중인 1990.8월부터 3년간 주독일대사관 공사로 근무했던 전문가다.

직업과 전공의 특성상 그는 독일 현지에서 많은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런 흔적은 이 책 곳곳에 녹아있고, 저자의 직업, 경험, 통찰력, 성실함에 힘입어 그 내용과 주장에 신뢰가 갔다.

그의 책은 또한 중요한 주제별로 독일통일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천천히 관심 있는 주제별로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통일에 대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오늘은 일단 독일통일의 가장 큰 공로자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만 소개한다. 누가 가장 큰 공로자인가? 우선 후보들을 보자.

1.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 동유럽의 개혁개방을 선도. 동유럽 주민봉기시 무력진압의 근거였던 ‘브레즈네프 독트린’ 포기 및 무력진압 반대의사 표명. 2차대전 4대 전승국의 일원으로 독일통일 승인.

2. 동독주민 : 촛불혁명으로 동독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자유선거 때는 동독을 버리고 서독과의 통일을 선택.

3.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 신동방정책 추진. 동서독 관계 정상화 및 교류협력 증진하여 동서독간의 이질화 방지에 기여.

4.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 동독주민 시위 초반부터 독일통일 가능성을 예견하고 ‘헬무트 콜’ 서독총리의 통일정책 적극 지지. 영국, 소련, 프랑스 등 2차대전 4대 전승국에게 독일통일을 승인하도록 압박하여 성공시킴.

5.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 : 통일 가능성이 거의 예견되지 않았던 동독주민 시위 초반부터 ‘통일의 기회’라고 판단, 신속 정확한 정책과 외교를 적극적 선제적으로 시행, 동독주민들의 환심을 사고 4대강국의 동의를 얻어 독일통일로 연결.

저자는 단연 ‘헬무트 콜’이 1등공신이라는 의견이다. 이제 독일통일의 과정을 하나 하나 살펴보자.

2016년 10월 16일 일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피부색으로 보는)

일단 사람들을 혈통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하면, 그것은 형질 인류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분야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형질 인류학적 관점에서 모색해 보겠습니다.  형질 인류학적으로 본다고 하면, 두개골의 장단 비율을 조사하거나 팔다리 길이, 몸통의 형태, 눈의 깊이, 코의 높이 등등을 따져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장두형 두개골은 아프리카 인들의 경우에 아주 심하고, 그리고 백인들이 그 다음입니다.  한국인 단두형으로 분류됩니다. 팔다리가 짧고 몸통이 둥그런 형태는 아주 추운 지방에서 적응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형질 인류학으로는 뭔가 찾을 듯하지만 그 이상 별로 나온 것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중에서 피부색에 관한 연구는 뭔가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조금 소개해야 될 것 같습니다.

“스킨”이라는 책을 쓴 니나 자블론스키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인종들을 피부색으로 (순전히 학구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녀에 의하면 피부 색은 자외선을 방어하기 위한 멜라니 색소때문인데, 자외선을 너무 많이 막아 버리면 비타민 D 결핍으로 오히려 구루 병에 걸립니다.  자외선은 장파와 단파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파 자외선은 피부 중 표피 밑의 진피 부분에서 손상을 가하게 됩니다. 손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 거기에서 암을 유발시키죠.  호주 백인들은 그들의 강렬한 햇빛으로 결국 35 %가 피부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입니다.  강렬한 자외선으로 피부가 손상을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천연 자외선 차단제를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은 멜라닌 색소입니다.

그런데 피부에서는 또 다른 작용도 하게 되는 데, 비타민 D 합성입니다.  비타민 D를 포함한 식품이라는 것은 제한적이어서 그런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문화권에서는 자외선이 피부에 닿으면서 비타민 D가 합성되는 것입니다. 이 자외선은 단파이긴 하지만 멜라닌 색소는 자외선 자체를 막아 버릴 수 있지요.  비타민 D가 결핍이 되면 구루 병에 걸리게 됩니다.  위도가 높은 지역, 햇빛이 별로 없는 지역은 햇빛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멜라닌 색소를 거의 잃게 됩니다.  그래서 백인이 되는 겁니다. 햇빛이 강렬한 지역에 살게 되면 멜라닌 색소가 강력하게 만들어져 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피부 색은 타협점을 찾는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한 곳에 오래 살면 그 위도에 관련한 햇빛 노출에 알맞은 양의 멜라니 색소를 분비하도록 진화합니다.  백인들에게는 두 종류가 있는데, 아예 멜라닌 색소가 없어서 햇빛을 받으면 빨갛게 익었다가 다시 하얗게 되는 사람들이 있고요, 약간의 멜라닌 색소가 있어서 햇빛을 받으면 약간 검게 타는(태닝)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인이나 북 유럽인들이 청백형 백인이지요.  반면에 일반적으로 라틴 계(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백인들은 태닝이 잘 되는 약간 갈색이 감도는 백인들입니다. 그들이 사는 위도를 보면 48~50 도 정도가 경계선인 듯 합니다. 이탈리아만 하더라도 로마의 위도는 42 도입니다.

백인마다 약간 더 갈색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약간 연갈색 피부를 갖고 있다가 피부가 그을리면 더 검게 타는 사람도 있지요. 그리고 아주 짙은 피부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완전 까만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한국인을 분류하면 의외로 태닝이 되는 백인으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의외입니다.  학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인종적으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종적으로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코카소이드, 몽골로이드, 니글로이드 입니다.  그러나 이 구분은 피부 색을 기준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니글로이드들도 옅은 갈색이 있으며 (니제르, 이디오피아 등), 알고 보면 코카소이드 중에서도 흑인에 가까운 사람도 있습니다. (주로 인도에) 동북아 인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옅은 갈색 백인으로 구분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

자블론스키는 자신의 남편(나사에 근무)의 도움을 받아 전 세계 인종들의 피부색과 위도의 관련성을 연구했습니다. 한국은 위도 상 유럽이 아니라 튀니지, 이집트, 이라크 와 비슷한 위도이며, 피부 색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엄밀히 코카소이드 (백인) 이지요.

연갈 색 인들은 동남아 사람들을 보면 되는데, 여기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그 북쪽인 미얀마 사람들보다 더 하얗습니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쯤 되면 거의 적도 선상에서 왔다갔다 하는 나라들입니다.  ’스킨’의 저자 자블론스키에 의하면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완전 흑인어야 하죠. 태국이나 이런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그 지역의 자외선 지수를 생각해 보면 매우 하얀 편에 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조금 더 있는데, 마야 역시 비슷합니다.  맥시코 유카탄 반도의 마야 인들은 23 도 정도의 위도에 살고 있지만, 그 정도 위도에 사는 다른 인종에 비해서 하얗습니다.  마야는 유카탄 반도에 정착한지 3000 년이 되지 않았지요. 아직 까맣게 되기 이전인 셈입니다.  말레이사아도 이런 논리가 적용될까요?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도시가 아닌 정글 속에는 원시 부족으로 살아가는 원주민들 중에는 완전 까만 사람들이 있는데, 아프리카에서 온 종족으로 믿어졌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완전 흑인처럼 검은 피부를 가진 원시 종족이 말레이시아의 원주민들이었던 것이죠.  말레이시아에 오래 살면 완전 까만 흑인으로 진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까만 흑인들은 아닙니다. DNA를 정밀 분석해 보니 말레이시아에 사는 99% 사람은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중국 남부 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이었지요.  동남아에 사는 사람들의 거의 전부는 불과 1 만년전에서 최근까지 계속 중국 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원주민은 없어졌거나 중국 도래인들에 의해 멸종된 것이지요.  이 지역은 화교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분란이 많지만 그 전부터 살던 사람들도 수 천년전에는 화교였던 셈입니다.

즉, 현재 사는 동남아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시 이주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역사는 1 만 년도 되지 않습니다.  극소수 동남아 원주민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등의 내륙에서 진화한 사람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동남아로 간 사람들은 원래 중국 남부 지역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기는 어쩐 일로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만주나 시베리아로도 한반도로도 일본으로도 퍼져 나가고, 동남아로 간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단 가설이지만 현재까지의 모든 조사를 통해서 가장 잘 맞는 가설이지요.

즉 한국인을 포함한 동북아 인들이 현재 동남아 사람들과 근연성이 있다고 해서 동남아를 통해서 온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를 벗어나서 동남아 루트를 개척한 사람들은 동남아에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외 지역을 확산된 사람들이 다시 재 점령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 중의 일단입니다.

2016년 10월 14일 금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10,000 BC)

몇 년전에 10,000 BC 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원래 영화 제목은 심상치 않는 대단한 것이었으나 영화 내용은 그냥 만화 수준에 불과해서 실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10,000 BC 는 정말 대단 한 것이었습니다.

전편에서 보인 지구 기온 표를 보면 12,000 년전부터 따뜻해지다가 10,000 년전 부터는 엄청 더운 날이 지속되죠. 인류는 그 전 6 만년동안 동물 수준이나 그 보다 쫌 나은 생활을 하다 갑자기 문명이 폭발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시 신석기 사람들은 바닷가나 강가에만 살았고, 침수되자 갑자기 다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없어지고 극소수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번성하는 듯 보입니다.

수위가 100 ~ 200 미터 올라가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수위가 서서히 올라갔을까요?  1 년에 10 센티 씩 한 1000 년간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수위가 올라갔을까요?  그런 일은 오히려 희박한 일입니다. 수위는 순식간에 쓰나미처럼 몰려와서 한번에 몇 미터를 올린 적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수시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만8000 년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빙하 시대 중에서 가장 추운 시기라고 생각되지만 빙하시대가 끝나는 1만 5000 년 전은 가장 따뜻한 시기입니다.  지금보다 더 따뜻해졌지요.  북반구의 빙상들이 녹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북반구에는 거대한 빙상이 2 개 쯤 있었습니다. 하나는 시베리아 빙상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북미 빙상이지요.  이중에서 북미 빙상은 북극부터 미국 중부까지 걸치는 빙상인데, 두께가 수 킬로미터나 되고 면적은 수 백만 평방킬로미터나 되어 있었지요. 1 만 5 천년전 날씨가 더워졌는데, 이 빙상들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이 빙상이 어떻게 녹았을까요? 이미 상당히 녹아 있는데, 빙상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빙상의 마지막 외곽은 Ice Dam 형식으로 막혀있었지만 빙상 가운데 하부는 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물을 가둔 댐이 어느 날 터졌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이 담수가 단 3 일 만에 거의 모두 태평양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이 물의 양이 전 세계의 바다의 수위를 몇 미터 또는 10 미터 이상 높일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다 수위는 차츰 올라간 것이 아니라 쓰나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죠. 이 쓰나미는 태평양을 건너서 아시아에 닥쳤을 겁니다. 그 높이는 아마 수 백미터에 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1 만 5 천년전 에서 1 만 년 전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때 순식간에 서해 바다가 생겼을 지도 모릅니다.  단 하루만에 바닷가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멸종했을 겁니다.

이는 동남아시아 중국 해안 한국, 일본에 닥친 일일 겁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멸종했을 겁니다. 극소수만 피했거나 내륙에 있는 그보다 더 극소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았을 겁니다. 높은 고도였던 내륙이 해안가를 바로 변했을 겁니다.  이 사건이 10,000 년전에서 약간 더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북미 빙상만 녹은 것은 아니죠.  시베리아 빙상도 녹아서 스칸디나비아 북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만, 이 동네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바이칼 호수도 이 때 생겼습니다. 바이칼 호수는 시베리아 빙상이 녹으면서 생깁니다.  바이칼 호수는 우리와 약간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극소수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도래합니다.  날씨가 온화하다 못해 엄청나게 더워진 것이었습니다.  인류는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문명화의 길을 걸어 갑니다. 한반도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2016년 10월 12일 수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지형과 기후 변화)

역사는 놀랍게도 질병에 의해서 또는 기후에 의해서 바뀐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관점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그러므로 지질학자와 기후 학자들의 이야기도 좀 들어 보아야 할 것같습니다.

일단 역사적 사실만 보더라도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령 예를 왕건과 견훤이 나주 근처 영산강에서 치열한 수상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산강을 가 보면 나룻배 정도 이상 띄울 수 없음을 알게 되죠. 수 백년전만 하더라도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를 나주에 보내는 것은 나룻배가 아닌 제법 큰 배였는데, 가는 동안 홍오가 썩는 바람에 삭힌 홍어가 만들어졌다는 홍어 기원 설이 있지요.  분명 수 백년전 또는 수 천년전에 영산강의 수심은 지금보다 깊었습니다.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잡이 그림은 그것이 바다에서 일어난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태화강 상류(나 다름없는)의 개울같은 모습의 반구대는 실제 포구에서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반구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수십킬로나 걸어가서 바다에서 고래 사냥을 하던 것일까요? 가장 멋진 추론은 반구대 앞의 태화강이 바다가 들어오는 길고 긴 포구였다는 것이죠. 이 길고 긴 포구로 들어 온 재수 없는 덩치 큰 고래가 180 도 회전을 할 수 없는 곳까지 들어 와서 꼼짝 못할 때 카누같은 배를 타고 들어가서 잡은 것입니다. 반구대 고래 잡이는 아마 6000 ~ 7000 년 전일 겁니다.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탄소 동위원소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산소 동위 원소를 잠시 거론해 보겠습니다.  산소는 8 번 원소이므로 양성자가 8개이죠. 따라서 일반 산소는 중성자도 8 개라서 산소의 무게는 16이 됩니다.  그런데 아주 극미량의 산소 중에는 중성자가 10개 짜리가 있는데, 이런 무거운 산소는 일정하게 존재한다고 봅니다. 산소는 수소와 결합해서 물이 됩니다. 물 속에도 일정한 비율로 산소-18 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기 온도에 따라서 산소-16 짜리의 증발율과 산소-18짜리의 증발율이 다릅니다.  증발된 수증기는 구름이 되어 비나 눈이 되어 내립니다.  비나 눈 속에 있는 물의 산소-18의 비율을 알면 대기 온도가 높았느지 낮았는지 알 수 있지요.

그린랜드에 가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빙상이 깔려있는데, 상태가 좋은 것은 수백만년 동안의 눈이 쌓여 있는 것입니다.  수십년전 부터 과학자들은 보링 기계로 원통형 시편을 채취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린랜드도 사계절이 있어서 눈이 쌓인 얼음층이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이테만 세면 몇 년전인 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시편 수천개로 과거 지구의 평균 기온을 추적했습니다.

결과는 다음 그림과 같습니다.




그림을 잘 보면 12000 년 전에는 엄청나게 춥거나 급격한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쪽에 보면 Liitle Ice Age 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소 빙하기라고 부르며 대략 서기1300 년~ 1900 년 사이를 말합니다. 즉, 소 빙하기는 600 년간 지속되어 1900 년 쯤에서 끝나가고 있어서 지구 온난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온도 2~3 도 올라간다고 해도 과거 수천년전 온도 정도도 되지 않을 정도이지요.  지구 온난화를 주장하는 사라들은 정식 학자들이 아니죠. 정치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림을 잠깐 설명 드리면, 15000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났습니다.  북극의 엄청난 얼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바다 위의 수위는 엄청나게 올라갑니다.  그런데 빙하기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지구의 대기 온도는 급전직하 떨어집니다. 떨어진 온도 수준은 빙히기와 다를 바가 없지요.  이 시기를 Younger Dryas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빙하가 녹으면서 전 세계 바다 위에 우리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유빙이 떠 다니고 상상을 초월하는 빙하 녹은 물이 바다에 유입되면서 대기 온도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다 수위는 계속 올라갑니다.  12000 년 전 이제 바다 유빙들이 정리되고 온도가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10000 년전 부터 지구 온도는 안정적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에 비하면 대략 5도가 더 높습니다. 아시다 시피 인류는 10,000 년전부터 문명이 폭발합니다.

우리 한 반도는 어땠을까요?  불행히도 한중일 과학자들은 서양 과학자들에 비하여 게을러터져서 많은 규명이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충 거론되는 추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반도라고할 것도 없습니다. 홍적세라고 하는 것은 빙하기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수십만년 동안일어난 일이죠.  아주 극심한 때에는 동해가 호수였다는 것입니다. 가장 해수면이 낮을 때에는 지금보다 100 ~ 200 미터 정도 더 낮았습니다.  서해보다는 수심이 80 미터 정도이죠. 다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은 적어도 15000 년 전 정도라면 이 그림과 그리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15000 년 전에는 한반도라는 것도 없는 그냥 대륙일 뿐이며 일본도 대륙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거대 호수인 동해를 둘러싸고 있지요. 사람들은 지역구분이라는 것을 하고 있을 수도 없으며 바다에 의한 고립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신석기 유물은 어디에서 발견이 되었을까요? 거의다 (거의 100%) 패총입니다. 바닷가를 끼고 있습니다.  시대는 1 만년전에서 그 안 쪽입니다. 1 만 년전 보다 더 벗어나는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 이전의 바닷가는 이미 바다 속에 잠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전편에서 왜 1 만년전 에서 3 만년전 사이의 신석기 (또는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이행되는 시점)의 윰물이 없어졌을까하는 의문에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석기 유물은 반드시 강가나 해안가입니다.  내륙에 인간의 발자취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 서해 바다 한 가운데, 남해 다도해 바다 속에 뻘 속에 엄청난 토기들이 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석기 유물이 10,000 년 전 이전의 것이 없는 것은 동남아 한국 일본에 보이는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 전으로 가면 아주 간간히 3만 5 천년전 또는 그 이전의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살던 지역이 바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사라진 것들이죠.

그러다가 10,000 년전 부터 세상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mt DNA 추적으로)

우리의 세포는 동물 세포입니다.  동물 세포를 단면으로 보면 가운데에 핵이 하나 있고, 그 핵에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설계도인 유전자가 염색체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포핵이 아니라 세포질을 보면 벌레같이 생긴 것들이 수 백 개에서 수 천 개쯤 분포하는데, 이들을 미토콘드리아라고 합니다. 이 미토콘드리아는 쉽게 말해서 연료를 태워서 열과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기관입니다. 혈액을 통해서 공급되는 산소와 영양분을 받으면 바로 이 미토콘드리아가 ATP를 생성하고 연료를 태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열과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이 미토콘드리아는 놀랍게도 자체 DNA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미트콘드리아가 자체 DNA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몸이 아니라는 뜻 일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분야이므로 이 소개는 일단 건녀 뛰겠습니다. 그러면 미토콘드리아 설계도는 세포 핵 속의 염색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 세포 결합에 의해서 후대로 전해지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수정란이후로 계속 세포 분열하면서 생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맨 처음에는 단 하나짜리 수정란 세포였습니다. 수정란 세포가 뭔가요?  정자의 핵이 난자에 들어가서 정자의 핵과 난자의 핵이 결합한 핵을 가진 난자가 바로 수정란인 것입니다. 수정란이라는 세포의 세포의 질에 이미 미토콘드리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미토콘드리아는 엄마의 것이죠. 아빠의 몸에도 미토콘드리아가 있지만 그 미토콘드리아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나의 몸의 세포 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엄마의 미토콘드리아가 계속 증식해 오고 있는 중인 것이죠.  그래서 미토콘드리아를 분석하면 그 사람의 모계로만 죽 추적이 가능합니다.

변이라는 것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지구 상에서 변이가 일정 비율로 일어나는 이유는 자연 방사능때문이라는 설이 유럭한데, 이 정도의 파괴력으로는 변이 율이 많이 느립니다. 그런데 미토콘드리아는 변이율이 아주 놓습니다.  그 이유는 미토콘드리아가 산소를 다루기 때문인데, 산소를 다루다 몇 개의 산소가 탈출하면 이를 활성 산소라고 부릅니다. 탈영해서 돌아다니는 활성 산소는 우리의 몸의 조직을 파괴하기 때문에 해로운데, 미토콘드리아가 이 위험물질을 다루기때문에 변이율이 매우 높아집니다.  가령 엄마와 외할머니 그의 엄마, 한 3~4 대 정도 올라가도 몇 개의 염기서열의 변이가 발견될 정도입니다.  Y 염색체 변이와는 비교 불가입니다.

미토콘드리아는 mt DNA라고 부르는데, mtDNA를 추적하면 매우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인류 이동을 설명하는데 훨씬 신뢰성이 높습니다.

가령 5000 년 전 쯤 한반도 남자들이 배를 타고 일본에 가서 노략질을 하고 거기 살던 조몬인 여자들에게 씨만 뿌렸다면, mtDNA 상으로는 조몬인 유전자만 검출될 일입니다. 그리고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일본인 (야오이인)들의 유전자에서 mtDNA가 한반도 사람과 동일한 것이 나오기 때문에 5000 년 전에 남자들이 해적질하러 간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이주한 것이다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죠.

아주 다양한 mtDNA 표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과 남자들처럼 값싸게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는 여자들의기 때문에 이는 가족, 씨족, 부족의 이동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mtDNA 친연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일본, 한국,북방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신기하게 빗살무늬 토기 경로와 좀 비슷합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Y 염색체 경로와 반대 성향이 짙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자 사람들, 가족 들, 기존 구성 사회는 북방계 사람들이며, 일부 거친 남자들 (동남아 계열)이 많은 씨를 뿌리고 다녔다는 좀 이상한 결론이 내려질 수 있습니다.

Y 염색체와 mtDNA 분석은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같지만 실은 숙제만 더 만들어 내고 있지요.

유전자 분석으로 우리가 반드시 거기에 끼워 놓아야 하는 것은 편년입니다.  그런데 현재 살아남은 사람들의 유전자로만 분석을 하기때문에 편년 서술이 불가능해집니다. 즉 언제 그랬다는 거야 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루트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것은 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인류의 이동에서 관찰해 보려 합니다.

2016년 10월 6일 목요일

한 민족은 누구인가? – (Y 염색체 추적)

사람들은 아주 예전에는 각기 조상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떨어진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 조상의 후손이 아니면 그것은 종이 다른 동물을 보듯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전 세계 어느 지역의 과거의 기록도 조상은 하늘의 후손이거나 동물의 알로 태어났거나 옥수수로 만들어졌지. 그 조상이 디른 동네에서 살다가 이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의 인식체계는 묘한 부분이 있어서 사람들은 인류가 진화의 결과이며 아프리카 같은 먼 곳에서 이동하여 왔음을 알면서도, 인식체계 상 이질적인 인간에 대해서 살의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적대적일 수 있다.

우리 조상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디선가 왔을 것이다.  그것을 추적하는데 DNA 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DNA로 추적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대략 다시 한번 그 원리를 삺펴 보면 이렇다.

사람의 유전자라고 하는 것은 염색체라고 하는 곳에 들어 있는데, 염색체는 모든 세포의 핵 속에 들어 있다. 핵 속에는 무거운 단백질이나 탄수화물같은 것이 아니라 싸구려 핵산이 들어 있었는데, 여기에 특정한 잉크를 발라 놓으면 그 모습이 드러난 존재가 있었다.  염색하면 보인다고 해서 염색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염색체들을 연구한 결과 그것들이 유전자들임이 밝혀 진 것이다.  염색체는 디옥시 리보 핵산 (DNA) 라고 한다.  인간의 경우 염색체를 분리해 보면 23 개로 분리 해 낼 수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23 개 염색체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냥 가장 큰 것부터 1,2,3,….  이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염색체는 23 번이 아니다.  마지막 염색체는 특별히 성 염색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모두 알겠지만, 각 염색체는 두 개의 쌍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엄마에게서 또 하나는 아빠에게서 온 것이다. 그레서 사실은 46 개의 염색체가 있는 것이다.  1~22 까지 염색체 쌍은 그 쌍이 같은 것이지만, 유독 23 번 째 염색체를 이루는 쌍은 둘이 다를 때가 있다. 그 쌍이 같은 사람은 여자이고 그 쌍이 다르면 남자이다. 이후 쌍을 이루는 것을 X,Y 로 명명했다. 아버지 어머니로 부터 하나씩 받을 때 XX가 되면 여자가 되고 XY가 되면 남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므로 이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남자의 경우) 아버지에게서 받은 Y 염색체는 어머니에게 온 그 어떤 유전자들과도 섞이지 않고 그대로 있다. Y 염색체의 정체는 완벽하게 아버지의 것과 똑같다. 그대로 복사해서 아들로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Y 염색체 하나에도 사실은 수 천만개의 염기 서열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번 복사하다 보면 복사본이 약간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는 데 우리는 이를 변이라고 부른다. 이 변이는 아주 서서히 아주 작은 부분 일어난다. 그 미세한 차이를 파악하면 친연성을 알 수 있다. 거기서 한 번 더 일어나면 거리도 알 수 있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시간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된다.

Y 염색체의 변이 형태를 각 국민들 별로 채취해서 분포도를 만들어 보면, 대개 이런 결론이 나온다. 아프리카에서 7 만 년전 정도에 근원이 수렴되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건너서 중동으로 갔다가 인도로 가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있으며, 인도에서 계속 동남아 루트를 타고 해안을 타고 간 사람들이 있다.

이 Y 염색체 변이에 의한 추적의 결과로 해석하면 인도 북북 어디에선가 사람들은 백인도 나오고, 북 아시아인도 출현한다.  북 아시아 인은 북 동쪽을 향해서 진행하다 베링 평원(당시는 평원이었다)을 넘어 간다.

동남아 루트로 해안을 장악한 일단의 사람들은 한국 일본 캄차카 까지 도착하고 다시 내륙으로 들어간다.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북 아시아 인은 동남아로 올라 오는 남 아시아 인처럼 같은 몽골로이드이나 이 둘의 유전자는 매우 거리가 멀다.  북 아시아 인은 유럽인에서 보이는 마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마크를 가진 사람들은 동 아시아 사람들 중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Y 염색체 추적으로 보면 한국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동남아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다.

보통 Y 염색체 표지의 분포를 이용해서 인류의 이동을 추측하는 것은 신뢰성이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첫 째.
Y 염색체는 변이가 제한 적이고 너무 느려서 많은 부분이 건너 뛰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하나이며,둘 째는 남자의 속성상 가족이나 부족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남자 혼자서 여행갔다고 눌러 앉아서 씨를 뿌리는 경우에 마치 그 부족이 이동한 것과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자.  로마 시대 흑인 검투사가 백인 여자와 아이를 만들었다. 그는 흑인이었지만 그 후손은 계속 백인들과만 결혼해서 지금은 완전 백인이 되었지만, 그 Y 염색체는 흑인의 그것인 상태.

또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한 백인이 난파를 당해서 홀로 아프리카 부족 속에 남아 거기서 여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살았다. 그런데 딸만 낳았거나 해서 Y 염색체가 전달되지 못한 경우,  Y 염색체 상으로는 놓치는 것이 많다. 그래서 학자들은 미토콘드리아 추적을 생각해 냈다

2016년 9월 27일 화요일

다시 생각해보는 위안부 문제

언젠가 위안부 얘기를 하겠다고 했었기에 내가 아는 범위에서 쓰고자 한다. 몇 가지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미심쩍어 책도 한 권 사서 읽었다.

이 방에서도 위안부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마이크류님이 첫 발제를 했었고, 내가 두 번째 발제를 했었다. 그 때 나를 친일파라고 욕하며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는 여성도 있었고, 친일파 논리를 그대로 사용한다면서 내게 절교를 선언한 사장님까지 있었다. 그래도 난 상관 없다. 내가 쓴 글이 진실(팩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진실이 어떤 가치나 확신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안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가치나 확신의 포로가 되어 그것이 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다. 확신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 건방진 말이지만 위안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위안부 문제는 민감하고 그만큼 성역화되어 있다. 나는 그 성역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위안부는 정신대와 다르다. 위안부는 성노예 생활을 했던 가난하고 무학(無學)의 여성이었지만, 정신대는 공장에서 일했던 교육 받은 여학생들이었다. 위안부는 제법 나이가 들었지만(평균 25세), 정신대는 중학교 재학생이거나 중학교를 갓졸업한 소녀였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위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추론을 포함하여 위안부에 대한 진실과 우리들의 오해를 열거해보겠다.

1. ’위안부소녀상’은 잘못 만들었다. 위안부는 소녀가 아니었다. 당시 위안부들은 지금의 윤락여성들처럼 제법 나이가 들었던 것이다.(예외는 있지만 이를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논지를 흐리게 하므로 앞으로도 예외는 무시하겠다.)

2. 위안부 문제를 좌지우지하는 권력기관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이름도 그래서 잘못 만들어졌다. 참고로 전쟁이 터지면 일손이 부족해지므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한다. 일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 정신대도 사실은 대부분 일본 여학생들이었고 조선인 여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위안부는 불법적이었지만 정신대는 합법적이었다. 위안부도 조선인 여성들만 있었던게 아니었다. 초기에는 주로 일본여성들이었고, 전선이 넓어지면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조선인 여성들의 비중이 커졌다. 위안부와 정신대가 다르다는 것은 이제 ‘정대협’조차 인정하고 있다.

3. 위안부 숫자가 20만명이라는 설도 거짓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실 20만명이라면 위안부 문제가 1990년대에 와서야 공론화되었을 리가 없다. 일제시대라고는 하지만 20만명이 끌려가는 동안 사회문제화된 적도 없었고, 또 일제패망 후 20만명이나 귀국했는데도 사회문제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추가] 위안부 할머니로 등록된 숫자가 234명 뿐일 리도 없다(2012년 기준). 정신대 숫자를, 그것도 일본인 정신대까지 포함한 숫자를 위안부 숫자로 둔갑시켜 우리들의 집단기억으로 남은 것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

4. 일본정부는 위안부 모집에 관여하지 않았다. 증거도 없다.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광범위하게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이게 핵심이다. 만약 20만명이나 되는 우리 자매나 딸을 강제로 끌고 갔다면, 그 여성들의 가족들이 아무 저항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을 리도 없다. 우리 조상들이 항의하거나 저항했다는 기록도 정황도 없다. 그러므로 일본정부에게 위안부 배상을 하라는 주장은 잘못이다.

5. 심지어 위안부 모집에 일본군이 개입했다는 증거도 없다.(이 부분은 삭제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개입을 한 것 같습니다.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만.)  물론 위안소가 군부대 내외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나 행정기관에서 위안소를 관리하기는 했다. 예를 들면 위생검진을 한다거나 위안소를 장교용과 사병용으로 구분했던 사례가 그것이다. 때로는 포주가 위안부들을 과도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일본군 부대장이 관리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 역시 대부분의 나라에서 나타났던 현상이다. 6.25 때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매춘여성들도 올라갔었고, 종전 후에도 군부대나 동두천 기지촌 같은 곳은 위생증(맞나?)을 가진 여성들만 매춘에 종사하도록 행정지도까지 했다. 이런 유곽이 자영업이었던 것처럼 일제시대 위안소 역시 기본적으로는 자영업이었다. 위안소 역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업자들과 군(軍)의 현실이 접목되어 나타난 자본주의적 사업이었던 것이다.

6. 시골 여성들을 속여 끌고갔던 사람들은 일본정부나 일본군인이 아니라 조선인 인신매매범이나 조선인 윤락업소 포주였다. 그들이 배움의 기회가 없어 무지하거나 쌀밥을 그리워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골 여성들을 속여서 끌고 갔다. 이건 60, 70년대 우리나라 매춘여성들의 경우와 같다. 지금도 스마트폰과 예쁜 옷 때문에 속아서 매춘여성이 되는 여자들이 많다.

7. 따라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오도 일본정부나 일본군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의 증오는 순진하고 무지하고 가난했던 자기를 속여 지옥으로 끌고갔거나 지옥에서 성노예로 부려먹은 인신매매범 및 윤락업소 포주들을 향해 있다. 물론 일제 공무원이나 일본군이 와서 데리고 갔다는 증언은 있지만, 아마도 그건 인신매매범들의 위장술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위안부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일제가 아니라도 지금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나 매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8.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소설이나 영화에서 일부 다루기는 했지만 전국 규모의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식의 서술은 없었다. 기껏해야 위안부들의 비참했던 생활이나 사랑 이야기였다. 1990년대에 위안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도 일본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위안부에 대한 연구는 일본이 훨씬 광범위하고 깊이있게 다뤘다.

9. 뒤늦게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문제가 되자 일본정부도 책임을 느끼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위안부 배상(보상인가?)에 대한 법을 만들려고 했지만 일본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국회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할 수 없이 일본정부가 꺼낸 카드가 국민들 성금을 모으고 거기에 정부예산을 보탠다는 것이었다. 그게 한일이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묘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일본국민들이 동참해서 만든 기금이 ‘아시아여성기금’이었다.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수상의 사과편지와 함께 위로금을 주는 것을 시도했다.

그런데 강성 일변도의 정대협이 전면에 나서면서 수령거부 운동을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사실 상당수 할머니들이(60명인가? 30명인가?) 위로금과 수상의 사과편지를 받기도 했다. 참고로 2012년 현재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 수는 234명이었다.

10. 정대협이 설치면서 위안부할머니들이 정대협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강성이 아니면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위로금을 받은 할머니들조차 침묵하고 ’수요집회’에 나서야 했다. 게다가 일본대사관이나 외국에 톡 쏘는 눈을 가진 ‘위안부 소녀상’까지 세웠다(정말 치졸한 대응이다).

그러자 ‘언제까지 사과해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인식이 일본인들에게 퍼졌다. 대유행했던 한류가 사라지고 혐한류가 판을 채웠다. 아시아여성기금에 성금냈던 일본인들까지 혐한류로 돌아섰다. 일본은 군국주의자들이 설치는 세상이 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한국에서도 대일적개심이 널리 퍼졌다. 한일이 서로를 증오하는 지금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그 사이에 정대협에서 활동했던 리더들은 장관, 국회의원, 심지어 총리까지 되었다.

결국 누가 이익을 보았고 누가 손해를 보았나? 이게 도대체 정상인가? 참으로 안타깝고 원망스럽다.        

11. 기타 몇 가지 사실 : 위안부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하루에도 수 십명의 군인을 받아야 했고, 죽음의 전투를 앞둔 일본군의 폭력적, 변태적 성행위에 시달리기도 했다. 포주나 일본군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일본군과 막장의 인생이 상호 연민으로 작용하여 일본군과 같이 울고 사랑에 빠진 위안부도 있었다.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일본군 장교의 현지처 같은 생활을 즐기며 함께 말탔던 추억을 그리는 위안부도 있었다.  반면 악착같이 돈을 모은 사람도 있었다. 빌린 돈을 다 갚고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도 남아 있으려는 위안부도 있었다. 이상은 지금도 흔히 있는 윤락녀들의 모습이다.

일본군은 점령지의 여성들을 약탈물로 간주하여 강간을 하고 죽이기도 했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약탈물이 아니었기에 동료 또는 군수품같이 생각하여 적국 여성들처럼 대우받지는 않았다. 일본군이 전투에 나가면 반드시 이기라며 일본군을 응원하는 위안부도 있었다. 아니 많았다.

12.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배상할 일이 아니다. 당시 위안부 모집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그러므로 돈벌이에 눈이 멀어 불법에다가 비도덕적 상행위를 했던 인신매매범이나 포주가 비난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도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바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착취, 즉 페미니즘적 시각 또는 사회안전망 시각에서 접근해야 맞다.

2016년 8월 26일 금요일

히틀러를 초대한 평화론자들-4

이제 ‘가짜 전쟁(Phony War)’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도 서유럽국의 ‘평화 지상주의’가 만든 작품이다. (그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기세 좋게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폴란드를 보호해 주겠다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번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니, 하긴 했다. 시늉만 내서 그렇지. (그래서 ‘포니 워’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국은 1939.9.30 까지 14만 명의 병력을 프랑스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공세로 나설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다. 프랑스군은 1939.9.7 독일로 진격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지그프리트 선’ 너머로 철수하자 8 km 정도 들어간 지점에서 정지했다. 프랑스군은 발만 겨우 걸친 상태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폴란드가 항복하자 곧장 다시 프랑스로 철수했다. 이게 ‘포니 워’의 전말이다.

만약 연합군이 그 때라도 전면공격을 했다면’ 폴란드군과 싸우고 있는 독일은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 50 개 사단은 사실상 당시 독일이 가동할 수 있는 전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유럽 쪽에는 11개 사단만이 남아 지키고 있었다. (전쟁 말기 독일군 사단은 300 개에 달했다.)

반면 독일 쪽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던 연합군은, 프랑스군만 하더라도 그 10 배에 달했다(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육군이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유리해도 뭐하나? ‘전쟁공포증’에 빠진 나라가 공격을 할 리 없었다. 실제로 전쟁 후 독일의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 초반, 우리는 ‘지그프리트 선’과 ‘마지노 선’ 사이에서 국지적인 소규모 교전 외에는 별다른 군사행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우리는 왜 프랑스가 이 소중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서방 열강이 우리와는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던 ’폴 레노’ 수상과 정쟁(政爭) 했던 ’가므랑’ 원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 출산율은 매우 낮다. 1차대전 때처럼 피를 흘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없다. (그 때 20대의 40%를 포함하여 프랑스 젊은이 160만 명이 죽었음). 인명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과학전쟁을 해야 한다.”

(출산율이 걱정되니 과학전쟁을 하잔다. ㅋㅋㅋ “핑계의 샘은 마르는 법이 없다”는 명언 – 이거 내가 만든 말 – 이 생각난다!)

한편 이 무렵(1939.11.30~1940.3.13)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겨울 전쟁(Winter War)’이란게 있었다.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소련군은 핀란드를 얕잡아 보고 무질서하게 쳐들어 갔다. 핀란드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소련군은 크게 고전했다. (유명한 핀란드 스나이퍼 ‘시모 해위헤’도 이 때 활약했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군은 25,000 명이 죽었는데 위대한 ‘붉은 군대’는 20만 명이 죽었다. 이를 본 히틀러는 ‘소련을 쳐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결국 핀란드는 ‘겨울 전쟁’에서 패하여 땅을 뺏기고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대신 소련에게 원한을 가졌다. 그래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때, 독일과 함께 소련을 쳐들어가서(계속전쟁ㆍContinuation War) 빼앗겼던 땅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이후 독일의 패배가 명백해지자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또 다시 소련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그 땅을 또 뺏겼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핀란드는 종전 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아마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을 혼내준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제 히틀러는 대서양과 북극해를 장악하고 자원도 더 확보해야 했다. 그래야 소련을 쳐들어가도 서유럽의 소련지원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다음 먹이는 노르웨이였다. 독일은 노르웨이 철광에 의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치기 위해 경유지인 ‘덴마크’로 쳐들어갔고(1940.4.9), 덴마크 정부는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당일에 항복했다. 독일군은 곧장 노르웨이까지 쳐들어가, 뒤늦게 노르웨이에 들어온 영국군에게 개피를 발라주면서 노르웨이까지 점령했다.

이제 유럽 대륙에는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만 남았다.
1940.5.10 히틀러는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를 동시에 쳐들어갔다. 이 날 영국의 ‘바보벌린’은 사임했고 ‘윈스턴 처칠’이 새 총리가  되었다.

1차대전 때처럼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들어오고 있다’고 확신한 프랑스군은 벨기에 쪽에 전력을 투입했지만  그건 히틀러의 양동작전이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바보들이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아르덴’ 숲을 지나 ‘마지노 방어선’을 우회하여, 프랑스군을 남북으로 가르며 파리로 쾌속 진격, 프랑스의 항복을 받았다.(1940.6.22).

세계는 경악했다.
1차대전 때 독일은 4년 여의 기간 동안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200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면서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패했었다. 그 때문에 반란까지 일어나 카이저(빌헬름 2세)는 쫒겨났고, 독일 땅과 국민들을 잔뜩 뺏기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히틀러의 군대는 겨우 13,000 명의 전사자만 내면서 두 달도 안돼 프랑스를 정복한 것이다.

한편 프랑스로 들어간 독일의 다른 전차부대는 프랑스 서부 ’뒹케르크’ 해변으로 달렸다.
지원군도 없고 병참선도 끊기고 철수할 항구들까지 점령당한 영국과 프랑스군 36만 6천 명이, 좁고 엄폐물도 없는 ‘뒹케르크’ 해안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라는 철수작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거리다가는 몰살 당하거나 전원 포로가 될 위기였다.

다행스럽게도 평년과 다른 기적같은 날씨가 계속되어 ‘다이나모 작전’을 도왔다. 비가 오면서 독일군 탱크부대는 15 km 전방에서 진창에 빠졌고, 낮은 구름은 독일공군의 시야를 방해했으며, 잔잔한 바다는 작은 배까지도 운항 가능하게 했다. 연합군은 온갖 크고 작은 배 약 900 척을 징발, 독일공군의 폭격을 받으면서 1주일간에 걸쳐 철수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에서 영국은 항공기 177대, 호위함 10척을 잃었다.

날씨 덕에 성공했지만(사실 날씨가 영향을 준 전쟁은 많다), 대부분의 장비를 ‘뒹케르크’ 해변에 버려두고 왔기에, 이후 영국은 미국이 참전할 때까지 내내 장비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곧 이어 영국에서는 ’다이나모 작전’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바보벌린 등 대(對)독일 유화론자들이 이 대재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의 ‘죄인들(Guilty Men)’이란 책이 나와 영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윈스턴 처칠’도 이 책에 동조적이었다.

프랑스가 항복하자 프랑스 함대에 대한 처리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막강한 전력의 프랑스 함대가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양측의 전력이 좌우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항복문서에는 ‘추축국 감시 하에 무장을 해제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다를랑’ 제독은 프랑스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알제리 항구에 함대를 집결시켰다.

영국정부와 런던으로 망명한 ‘자유 프랑스군’은 프랑스 함대를 연합국에 합류시키거나, 최소한 프랑스 해군이 자침시켜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협상이 실패하면서 결국 영국해군이 프랑스 함대를 포격해 몽땅 침몰시켰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해군 1,200 명이 죽었다. 이런 비극도 발생하는게 전쟁이다.


이제 남은건 영국 뿐이었다.
독일의 영국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a Lion)’이 성공하여 독일군이 상륙하면, 육군이 약한 영국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영국은 패닉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영국주재 미국대사 ‘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는 미국정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이제 영국은 끝이다.”

이번에도 히틀러가 평화공세를 폈다.
“나는 영국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지 않으며 대영제국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1940.7.19 에는 이렇게 말하며 평화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성과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 나의 양심에 관한 문제이기 이전에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다 …… 앞으로 지속될 전쟁에 희생될 사람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나는 독일국민들을 위해서라도 그러한 희생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 눈물나게 아름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또 ‘평화 지상주의자’들이 등장한다. 일부 영국인들이 히틀러와의 협상을 통해 평화를 달성한다는 생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는 이랬다.

“영국이 고개를 숙이면(평화협상 제안을 받으면),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중립에서 벗어나 독일에게 대항할 것이다. 그러면 소련도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의 협력을 재고할 것이다.” (평화만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핑계의 샘이 마를 리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항전을 지지했고, 이후 치열한 항공전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을 몇 차례 연기하다가 결국 취소했다. 여기에는 ‘런던 공습’을 결정한 히틀러의 전략적 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독일공군은 영국 공군기지에 대한 폭격에 전념했었다.
그런데 독일 폭격기 1대가 실수로 ‘런던’에 폭탄을 떨어뜨렸고, 그 보복으로 영국 공군은 ‘베를린’을 폭격했다. 그 바람에 머리가 돌아버린 히틀러가 ”영국인들이 우리 도시에 폭탄을 떨구었으니 우리는 그들의 도시를 완전히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연설한 후, 독일공군에게 “영국도시를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그 덕에 빈사상태에 몰렸던 영국공군이 재편성되어 독일공군과 항공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히틀러는 이듬 해 ‘독ㆍ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붉은 수염 작전)’을 승인하며, 1941.6.22 소련으로 쳐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영국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여담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도덕적으로도 인류에게 엄청난 딜레마를 안겨 주었다. 나중에 소련이 연합군에 합류하면서 연합군은, 히틀러 못지 않게 사람을 학살한 스탈린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련은 부인하지만 소련이 독일군을 몰아낸 데에는 이런 막대한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독일과 싸우는 소련에게 미국이 제공한 트럭만 해도 44만대였다.)

전쟁 중에 수 많은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거나 이용당한 ‘착한 사람들’(예를 들면 각국의 망명 정부와 그 군인들, 유태인 및 집시들, 제3국가들)이 눈물을 삼켜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한 전후에는 동구라파 여러 나라가 공산화되면서 소련의 위성국가로 편입되어, 국가가 수 십년 간 정체되거나 국민들은 압제에 신음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천만다행으로 독립하여 오늘의 한국이 되었다.

이 전쟁에는 56개국이 참전했다. 그리고 독일군 280만 명과 민간인 200만 명이, 소련군 630만 명과 민간인 1,700만 명이, 서유럽 연합군 180만 명과 민간인 1,050만 명이… 총 5,500만 명이 죽었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나는 2 개의 어이없는 현상이 히틀러를 초대했다고 말했다.
첫째, 힘도 없는 주제에 ’평화 지상주의’에 물들었던 것, 둘째, 힘도 없는 주제에 ’평화조약이니 불가침조약’이니 하는 ‘종이 쪼가리’에 목을 맸다는 것.

긴 얘기를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평화? 그거 말로 되는게 아니다. 조약? 그거 언제든지 쓰레기로 변한다.”

2016년 8월 24일 수요일

히틀러를 초대한 평화론자들-3

이제 히틀러의 침공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서유럽의 어이 없는 대응을 보자.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과정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히틀러의 계속적인 위협 ㆍ회유ㆍ도발과 서유럽의 거듭되는 양보와 합리화다. 서유럽은 왜 그랬을까? 그 때문에 독일군은 이웃 나라를 합병하면서 더욱 강해지지 않았는가?

히틀러를 과격분자로만 생각했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히틀러의 지도력으로 독일이 안정될 것”이라며 히틀러의 집권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1차대전 때 영국총리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데이빗 로이드 조지’는 “히틀러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준 것에 찬사”를 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독일이 소련의 공산주의로부터 서유럽을 막아줄 것이므로(독일 방파제론!), 그건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구나 당시 유럽은 경제위기로 인해 대부분의 국가가 전쟁은커녕 기존 군사력을 유지할 돈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서유럽식 양보ㆍ합리화의 기저에 깔려있던 심리는 ’평화 지상주의’ 였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평화!”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 서유럽 정치인들과 국민들에게 먹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전쟁을 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무조건 전쟁을 피했고 비현실적인 희망에 목을 맸다. 이걸 눈치챈 히틀러는 적어도 1938. 8월까지는 위협과 호전적인 외교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야욕을 실현해 나갔고, 서유럽이 수수방관 하는 사이에 이웃 나라들을 합병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서유럽은, 엄청나게 커진 독일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진 자신들을 보게 되었다. 서유럽은 히틀러를 제어할 여런 번의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그 과정을 보자.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무효’를 주장하더니 국제연맹을 탈퇴했다(1933.10). 이어 교묘한 외교술을 펼치며 폴란드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어(1934.1.26) 폴란드를 안심시켰다.(이것도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다음 해에는 징병제를 실시했고(1935.3), 상비군을 50만 명으로 증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육군항공대의 형태로 숨겨놓았던 공군의 존재를 공개하기도 했다. 대부분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라인란트(Rheinland)’에 눈독을 들였다.

‘라인란트’란 독일과 벨기에-룩셈부르크 사이 라인강 유역으로 ‘베르사유 조약’으로 만들어진 영구 비무장지대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의지를 시험해보기 위해 ‘라인란트’를 점령했다(1936.3.7). 역시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었지만, 이번에도 영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영국 눈치만 보았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두려워 한다고 간주했다. (이 때의 영국과 프랑스의 무대응은 아직도 최악의 실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라인란트’를 점령하자 히틀러는 고향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였다. ‘오스트리아’의 나치 당원인 ’잉쾨르트’ 총리가 독일군을 초대하는 형식으로, 독일군은 ‘오스트리아’에 진주하여 두 나라를 합병시켰다(1938.3). 역시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지식인들은 ‘한 민족이나 다름 없는 두 나라의 합병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자신들의 무대응을 합리화했다.(핑계는 언제나 있다!)

다음은 ‘체코’였다.
체코의 ’주데텐란트(Sudetenland)‘는 체코와의 국경선 지역으로 300만 명의 독일계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자치권을 요구하며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있었다. 히틀러는 ‘체코’에게 ‘주데텐란트’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서유럽은 고민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저는 단지 체코에 있는 350만 명의 독일인들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서유럽 지식인들은 히틀러의 말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맞다고 생각했다. (핑계는 언제나 있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도 히틀러의 말을 믿고 히틀러를 달래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체코 총리를 설득하기로 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히틀러가 ‘주데텐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더라도, 폴란드와 루마니아 영토를 지나 체코를 지원할 수도 없다는 현실인식도 있었다. 프랑스 입장에서도 체코와 ‘상호 방위조약’이 체결되어 있었지만, 프랑스는 체코를 위해 전쟁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두 나라 모두 전쟁공포증에 빠졌음을 기억하시라.)

드디어 당사국 체코는 초대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이태리가 참석한 가운데 ‘뮌헨회담’이 개최되었고(1938.9.29), 독일에게 ’주데텐란트’를 넘겨준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잠깐! 당사국이 배제된 채 이루어진 조약이라면… 그렇다. 앞에서 기술한 ‘로카르노’ 조약도 그랬다. 폴란드의 운명이 걸린 회담이었는데도 폴란드는 그 조약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되었었다. 이게 국제질서다. 국제적으로 왕따 당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끼리 우물 안에 모여 삿대질하며 남의 나라 암만 욕해봐야 국제적인 지지가 없으면 이렇게 당한다.)

‘뮌헨회담’에서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받으면 이후 체코와의 국경선을 존중하겠다”고 서명했다.(아시다시피 이것도 나중에는 휴지조각!). 뮌헨에서 돌아온 ‘체임벌린’은 영국 공항에서 히틀러가 서명한 합의문을 흔들어 보이며, “이 시대의 평화를 보장 받았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다음 해에 체코를 침공하며 프라하에 입성했다.(1939.3.15). 당연히 뮌헨회담은 ‘실패한 유화책의 대명사’가 되었고, 체임벌린은 ‘바보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그를 ‘바보벌린’이라고 호칭하겠다.).

이제 폴란드 차례다.
체코가 점령당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그제서야 전쟁이 불가피 하다고 보았다. (정말 둔하리만큼 늦었다!) 영국국민들도 분노했고, 이런 분노를 반영하여 영국은 폴란드에게 군사적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바보벌린은 1939.3.31 하원 연설에서 ”폴란드 독립을 명백하게 위협하는 어떤 행동이 발생할 경우 …….. 영국정부는 온 힘을 다 해 폴란드 정부를 도와야 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영국정부는 이를 위해 폴란드 정부에게 보증을 했다. 나는 프랑스 정부도 이 문제에 관해 영국정부와 입장이 같다는 것을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라고 말했다.(바보라 그런지 말도 배배 꼬아서 한다!).

이어서 바보벌린은 1939.4.6  폴란드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것도 나중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국가 간 협정은 국익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걸 느끼자는게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다!) 이태리가 발칸반도의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바보벌린은 ’루마니아’ 및 ‘그리스’와도 군사동맹을 체결했다(1939.4.13). 징병제도 도입했다. (이제 와서 뭐하겠다는건지…?)

과연 히틀러는 폴란드에게 ‘단치히’가 있는 ‘동프로이센’으로 가는 길(‘폴란드 회랑’)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당시 독일에서 동프로이센으로 가기 위해서는 ‘폴란드 회랑’을 지나야 했다. ‘폴란드 회랑’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에게 뺏긴 독일 땅이다. 바다로 가는 유일한 길을 폴란드가 내놓을 리 없었다.

히틀러에게는 폴란드가 말을 듣던 안듣던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치기로 했지 않은가? 히틀러는 사기로 체결했던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1934.1.26)의 무효화를 선언했다.(1939.3.28). 이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치기 전에 소련의 ‘스탈린’을 꼬셨다. 그래서 양국 외무장관의 이름을 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 일명 ‘독ㆍ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폴란드를 둘이서 나눠먹자’는 조항도 있었지만 비밀로 했다. (이 조약 역시 2년 후 히틀러가 소련을 치면서 쓰레기가 되었다).

물과 불 같은 존재의 두 나라가 조약을 체결하자 세계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독ㆍ소 불가침 조약’은 두 놈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히틀러로서는 나중에 서쪽(프랑스와 벨기에)을 치기 위해 동쪽(폴란드와 러시아)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스탈린으로서는 히틀러의 공격을 늦추고 폴란드까지 먹고 싶었던 것이다.

동쪽을 정리한 히틀러는 드디어 50 개 사단을 동원하여 폴란드를 치고 들어갔고(1939.9.1), 이 날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일이 되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 ‘작전명령서’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독일 동부 국경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소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가능성이 무산되었기에, 마침내 무력에 의지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멋진 문장이지만 원래 사기꾼의 문장은 아름답다.)

바보벌린은 독일군이 1939.9.3. 09:00 까지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에 돌입한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히틀러는 바보는 그만 벌리라며 무시했다. 철수기한이 지나자 바보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은 최후통첩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영국은 독일과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말을 간단하게 하는군!)

프랑스도 비슷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역시 마감기한(17:00) 까지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도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래봐야 프랑스는 나중에 개박살이 난다. 영국은 개박살 나지는 않았지만 개박살 나기 직전까지 몰린다. 모두 자신들 탓이다. 그렇지 않은가?)

폴란드는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멋있고 고풍스러운 기마부대로 최신예 독일탱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까지 덮쳤다. 1939.9.17 스탈린이 “소련 정부는 더 이상 ‘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1932.7.25)의 구속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하더니 동쪽에서 소련군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조약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한 자가 바로 스탈린이다.)

이건 폴란드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았다. 폴란드는, ‘동서 양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안드로메다 같은 계획 따위는 아예 세워놓지도 않았었다.

결국 한 달도 못 버티고 1939.9.27 ‘바르샤바’는 독일군에게 함락되었고,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이 나누어 잡쉈다. 폴란드 정부는 바르샤바를 탈출하여 프랑스에서 망명정부를 세웠다가 나중에 프랑스마저 무너지자 런던에 자리를 잡았다. 폴란드군 병사 9만 여명도 탈출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폴란드는 ‘카틴 숲 대학살 사건’도 겪는다.
이는 1940년 소련 비밀경찰이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장교, 교수, 경찰, 의사 등 폴란드 지도층 인사 22,000여 명을 처형한 다음 ‘카틴 숲’에 암매장한 사건이다. 꼭 그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그 후 똘똘한 지도자들이 사라진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이 대량 학살됐던 1921년 ‘자유시(알렉셰프스크) 참변’과 유사하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이렇게 당한다.

2016년 8월 22일 월요일

히틀러를 초대한 평화론자들-2

앞에서 2차대전 전(前) 독일의 사정을 살펴 보았다. 이제 서유럽의 사정을 보자.

1차대전 초기에 행진하는 각국 군인들의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대부분 웃거나 떠들면서 마치 소풍가는 기분으로 참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몇 개월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4년 4개월이나 끌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1차대전은 ’산업화’와 ‘과학화’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전쟁무기에 활용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적군을 가능한 한 뻘리 죽이는 무기가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그러자 인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로 사람들이 죽었다. 군인과 민간인이 각각 700만 명씩 총 1,400만 명이 죽었다.

너무나 참혹한 전쟁이 문명세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게다가 2차대전 직전 각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대부분 1차대전의 참호 속에서 비참한 전쟁의 현실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반전(反戰)ㆍ염전(厭戰) 의식이 온 유럽을 지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반성했다. 그래서 ‘평화 지상주의’, ‘협상 우선주의’가 절대선(善)으로 등장했고, 사람들은 1차대전이야말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믿었으며 또 희망했다. 그런데 불과 20년 만에 1차대전보다 훨씬 더 큰 인적ㆍ물적ㆍ도덕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 2차대전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평화 지상주의’다.
 
영국을 보자.

영국의 문학계는 반전(反戰)ㆍ염전(厭戰) 서적이 압도적이었다. 영국군 병사들의 참전기가 봇물을 이루었지만, 대부분 1차대전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했을 뿐이었다. 빛나는 승리로 간주한 책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무조건 평화를 원했다.

질문 형태의 평화투표(Peace Ballot)가 있었고 압도적인 숫자가 평화를 주장했다. 예를 들어 ‘국제협정에 의한 전면적인 군축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1,000만 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77만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옥스퍼드 대학생들은 ‘옥스퍼드 유니언 토론회(Oxford Union Debate)’를 통해 “우리 학생들은 더 이상 왕과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의했다.

1차대전 발발 전, 영국에게 빚을 지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로 유수의 채권국 가운데 하나였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대공황까지 몰려오자 국방예산은 대폭 삭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위한 무기나 전략ㆍ전술 개발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히틀러의 독일에 대항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요약한다면 반전ㆍ염전 의식에서 비롯된 ‘평화 지상주의’와 빈약한 국방 투자, 이게 영국의 사정이었다..

지정학적으로 영국보다 불리한 프랑스는 어땠을까? 

프랑스는 1차대전 때’ 진지방어전’의 성과, 즉 ‘결국 이겼다!’는 생각에 만족하여 생각이 진지방어전에 꽂혔다. 그래서 독일이 공격해오면, 1차대전 때처럼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하여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방어주의’ 전략을 세웠다. 그 전략의 절정이 ’마지노 방어선’이고, 그런 정신이 ‘마지노 정신’이다.

하지만 ‘어떠한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는 ‘마지노 정신’은 오히려 전략선택의 폭을 크게 제한했다. 막대한 비용(70억 프랑)을 들여 건설한 ‘마지노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공격전ㆍ기동전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드 골’이 기동전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프랑스 국방장관은 “수 십 억 프랑을 들여 구축한 요새 방어선을 버려두고 어떻게 공세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마지노 방어선’에는 병영ㆍ병원ㆍ탄약고ㆍ연료창고ㆍ환기시스템까지 있어, 설사 적에게 포위되더라도 항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프랑스가 히틀러에게 항복한 후에도 ‘마지노 방어선’에 남아 저항하던 병사들이 있었다.) ‘페텡’ 원수는 “전쟁이 터졌을 때 전사하게 될 병사들의 목숨과 맞바꾼 강철과 돈”이라고 자랑했다. 유지비도 엄청 들었다. 당연히 다른 쪽 국방예산은 삭감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지노 방어선’에도 약점이 있었다. ‘아르덴’ 숲 쪽과 ‘벨기에’ 쪽에는 건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산문제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

먼저 ‘아르덴’ 숲에는 소로(小路) 밖에 없어 독일군 전차가 일렬로 길게 들어와야 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그 숲이 독일군의 침공로로는 사용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벨기에’ 쪽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건설되지 않았다.

“독일이 공격한다면 (1차대전 때처럼) 벨기에를 경유하려고 할 것이고, 그러면 벨기에는 (1차대전 때처럼) 즉시 중립을 선언할 것이다. 벨기에가 중립을 선언하면 프랑스군은 벨기에로 진입할 수 없다. 따라서 벨기에를 중립국이 아닌 연합국으로 만들어 놔야 한다. 그러면 독일이 벨기에를 칠 때, 프랑스군은 동맹국인 벨기에로 들어가, 거기에서 독일군을 막을 수 있다.”

이 개념은 유일한 공격전략이었지만 막상 히틀러가 벨기에를 쳐들어가자 실행되지 못했다.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 치중하는 ‘전쟁 공포증’에 빠진 나라가 그런 공격전략을 실행할 리 없었다. 나중에 히틀러는 ‘벨기에’를 치면서 주력은 ‘아르덴’ 숲을 통과하게 하여 ‘마지노 선’을 우회, 프랑스를 점령한다.

게다가 프랑스에는 하나의 약점이 더 있었다. 비판을 능사로 여기고,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며, 평화 만을 외치는 프랑스 특유의 좌파들이 득세했던 것이다. 독일의 천재 선전상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괴벨스는 프랑스의 좌우 대결을 부추기고 영국과 프랑스 간의 동맹을 이간질시키는 심리 공작을 했다.

독일 선전부는 “영국의 대(對)독일 강경책 때문에 프랑스마저 전쟁에 휘말릴 것”이라며 반전(反戰)ㆍ반영(反英) 사상을 선동했고 결국 프랑스는 분열되었다. 이런 분열은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는 독일이 침공해 왔을 때 항전파였던 ‘폴 레노’ 수상과 온건파였던 ‘가므랑’ 총사령관의 정쟁(政爭)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폴 레노’도 그렇게 강단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일 얘기지만 ‘폴 네노’는 영국수상 ‘처칠’의 항전 설득에 동의했다가. 이내 정부(情婦) ‘포르트’ 백작부인의 설득에 다시 뒤집곤 했다. 그래서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여자는 내가 낮 동안 열심히 해놓은 일을 밤에 다 돌려 놓는다. 나는 그녀를 설득할 수 있지만 그녀와 잠을 잘 수가 없다.”

프랑스 우파는 좌파들의 분열책동과 쌈박질만 하는 정치권에 신물이 났다. 어느 정도냐 하면 공산주의의 씨를 말린 나치 독일에 은근히 호감을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쳐들어 왔을 때도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프랑스 지도부가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일부 국민들은 “패전은 안된 일이지만 저런 놈들이 당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미 좌우로 분열되어 정신적으로 패배한 상태였던 것이다.

벨기에는 어땠을까?
1차대전 때 혼쭐이 난 벨기에는 전쟁이 끝나자, 영국ㆍ프랑스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징병제까지 실시했다. 하지만 1926년 무렵이 되자 벨기에 정부에는 “독일이 쳐들어오면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텐데 뭐하러 강력한 상비군을 유지하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그러다가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자 다시 국방에 투자하여 60만 명의 육군을 보유했다. 하지만 벨기에 역시 침범당할 경우에만 방어전을 한다는 수비 위주의 전략을 유지했다.

폴란드는 어땠을까?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폴란드는 지정학적 영향으로 역사 자체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1차대전 중에는 많은 폴란드인들이 독일군ㆍ러시아군ㆍ오스트리아군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비극까지 연출했다. 그래서 1921년 프랑스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게다가 독일ㆍ영국ㆍ프랑스ㆍ이태리ㆍ벨기에가 모여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자(1925.10.16)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과 독일 주변국인 프랑스ㆍ벨기에ㆍ체코 사이의 현 국경선을 존중하며 침범하지 않겠다는 조약이었다. (물론 이 조약도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로카르노’ 조약으로 서부 쪽의 국경선이 안정되면, 히틀러는 동부에서 잃었던 영토 회복에 전념할 것이다. 동부란 바로 폴란드다. 더구나 폴란드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 땅(폴란드 회랑)을 차지하고 있었다. 폴란드는 그 ‘회랑’ 덕분에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이란 ’베르사유 조약’으로 떨어져 나간 독일 영토인데, 그 때문에 독일은 동프로이센으로 가기 위해 폴란드 영토를 지나야 했다. 그 끝에는 국제연맹의 보호를 받는 자유도시 ‘단치히’가 있다.

[여기서 잠시 강조하고 싶은게 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자기나라 군사력만으로 전쟁하는게 아니다. 어느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무기와 자원 뿐 아니라 국민들까지 자국의 군대에 편입시킨다. 이런 식으로 전력을 확충해 가면서 전쟁을 계속한다. 칭키스칸도 그랬고 히틀러도 그랬고 모두가 그랬다.

전쟁의 속성이 그러하므로, 만약 최초의 정복국이 어느 나라를 지나갔다가, 전황이 역전되어 후퇴하면서 또 그 나라를 지나가게 되면, 그 나라 국민들은 불가피하게 양쪽으로 나뉘어 싸운 전과(前科)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국민들 간에 갈등이 야기된다.

이런 피해를 본 대표적인 나라가 폴란드다. 2차대전 때 독일은 폴란드를 거쳐 소련을 침공했고, 후퇴하면서 다시 독일군과 소련군이 지나갔다. 사실 폴란드 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이 그런 비극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워낙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지역이라 그런지, 유럽은  별로 그런 갈등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의 친일파 논란과 관련해서 음미해 볼 일이다.]

이제 히틀러의 침공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서유럽의 어이 없는 대응을 보자.

2016년 8월 20일 토요일

히틀러를 초대한 평화론자들-1

전에 읽었던 2차대전 책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초반 부분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그 부분만 다시 보았는데, 내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개다.

첫째, 당시 유럽에 넓게 퍼진 ‘평화 지상주의’가 양보를 거듭하게 하여 히틀러의 간땡이를 붓게 만들었다는 점과 둘째, 그 많던 국가 간의 ‘조약’이 모두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조금 길어지겠만 내가 이해한 부분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와 곁들여 설명해 보겠다.

내가 읽은 책은 가볍지 않다. 부록까지 포함하면 950 페이지나 되고 9명의 전문가가 저술했다. 그래서 그런지 서문을 쓴 사람은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리 재능이 있는 역사가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생 동안 세계대전의 정치적ㆍ군사적ㆍ인간적 복잡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세계대전의 다른 부분은 포기하는 대신 특정 부분의 전문가가 되는 쪽을 선택한다.”

나는 2차대전의 그 복잡한 배경과 수 많은 전투를 자세히 기술할 생각이 없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2 개의 어이 없던 현상에 대해서만 쓰고자 한다. 이건 남북이 정전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 자세’와 평화협정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평화 지상주의’에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제1차세계대전’의 최종 산물인 ‘베르사유 조약’부터 보아야 한다. ‘베르사유 조약’(1919.6.28)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 31개 연합국과 패전국인 독일이 맺은 조약으로,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체결. (1871년 ‘프로이센’이 ’독일제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한 곳이 그 방이었음을 감안하면, 독일 국민들은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
-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승전국들의 땅 따먹기에 불과. (그 때는 그게 당연한 시대니까…)
-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이태리ㆍ일본이 ‘연합국 이사국’으로서 협상을 주도. (이 조약으로 일본은 ‘산동반도’를 먹었고 태평양 ‘저먼 군도’를 영국과 나눠가졌다. 일본이 이 정도였으니 당시 국제질서에 까막눈이었던 조선의 독립 열망이 얼마나 허망한 몸부림이었던가?)
- 1차대전이 몽땅 독일의 책임임을 명시. (이게 말이 되나?)
- 독일에게 엄청난 전쟁배상금(66억 파운드)을 물리고 독일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박탈. (그 땅을 영국ㆍ프랑스ㆍ남아공 등이 나눠 가짐)
-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 (오스트리아와의 합병 금지!)
- ‘라인란트’ 지대를 비무장지대화 하는 등 독일 국토와 국민을 각각 13%, 10% 씩 박탈 (그 땅과 국민을 프랑스ㆍ벨기에ㆍ덴마크ㆍ폴란드ㆍ리투아니아가 나눠 가짐)
- 독일의 육군병력을 10만 명 이내로 제한(1차대전 말 독일 육군은 400만 명이었음), 군함 보유량은 10만 톤 이내로 제한, 징병제 금지, 전차ㆍ중포ㆍ잠수함의 건조 및 보유 금지, 항공기나 공군의 보유 금지. (이건 최약체 군사소국으로 만들겠다는 심뽀)
- 그 밖에 연합국 이사국들 최혜국 대우, 연합국 상품 불공정 규제 철폐, 주요 산업시설과 탄광 양도 의무화 등.
- 이상의 내용을 보고 열 받지 않는다면 독일국민이 아닐 것임. 물론 그 후 ‘도스 안’(Daws Plan, 1923)과 ‘영 안’(Young Plan, 1929)이 비준되어 독일의 배상금은 상당히 경감되었지만, 이미 울화통이 터진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늦음.

다음엔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배경을 알아야 한다.

- 1차대전 패배에 따른 독일국민들의 상실감과 무력감. (엄청난 땅과 인구를 뺏김)
-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 (1차대전 때의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 “이 조약은 평화조약이 아니라 20년 기한의 휴전조약에 불과하다.”)
-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독일국민들의 배신감. (공산주의자들이 등에 칼을 꽂아 패배했다는 의식. 히틀러는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탄압)
- 1차대전 후 등장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 (국민들은 자유를 만끽했지만 그만큼 무정부 상태에 가까워 빈번한 좌우 충돌과 반란)
- 전쟁배상금을 물지 못하는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독한 대응. (마지막 한 푼까지 받아내겠다는 의지로 배상금 지급이 지연되자 1923년 독일의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
- 이상에 추가하여, 미국 ‘월 스트리트’ 발 대공황(1929.10.29)으로 인한 경제 불황. (미국이 돈을 회수하자 세계경제는 엄청난 타격. 1 파운드 = 100억 마르크)

열 받은 독일국민들은 하도 절치부심해서 이빨이 아플 지경이 되었다. 독일국민들은 독일국민 답게 ’한스 폰 젝트’라는 유능한 상급대장의 지도 아래, 1차대전 패인을 연구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들였고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혁신적인 전쟁 교리(敎理)를 개발했다.

대표적인게 보병ㆍ기갑병ㆍ공병ㆍ해병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제병합동전술’, 전문 기갑사단을 운영하고 이를 이용한 ‘기동전(전격전)’ 전술, 그리고 일선 지휘관들에게 자율성과 유연성을 부여한 ‘임무형지휘체계’를 들 수 있다.

그 때까지만해도 전차는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만 했었다. 전차는 보병의 행군속도에 맞추어야 했으며, 그나마 전선을 돌파하는데만 쓰였기에 필요에 따라 찔끔찔끔 투입되었다.

독일은 고정관념에서 탈피했다.

전차와 장갑차로만 구성된 사단을 만들고, 모든 전차에 무전기를 부착하여 유기적 협조체계를 갖추었으며, 보병을 전차의 속도에 맞추게 함으로써 순식간에 주요 거점을 확보하는 기동전술을 창안했다. ’전차의 아버지’라는 ‘하인츠 구데리안’의 작품이었다.

‘임무형지휘체계’도 혁신적이었다. 그 때까지 전투는 최고 지휘관의 돌격명령에 따라 일제히 진군하여 서로 부딪히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현장 하급 지휘관에게까지 상황에 맞추어 임기응변할 수 있는 자율성과 유연성을 주었다. 독일 제3기갑사단의 어느 보고서에 있는 ‘기갑부대가 원하는 장교상’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기동부대의 지휘에 있어 고정된 공식을 원하는 학자 타입의 장교는 즉시 기갑부대의 상징인 검은 전투복을 벗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장교는 기갑부대의 정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새로 개발한 교리를 열심히 연습했다.

연습 때는 ’베르사유 조약’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모형 전차를 이용하기도 했고, 소련과 ‘라팔로 조약’을 맺어(1922.4) 소련에서 유능한 장교와 항공기 조종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실제 2차대전 때 독일의 유명한 지휘관들은 이 때 양성된 경우가 많았다.(소련 역시 똑같이 유능한 지휘관들을 배출했지만 1936~8년 스탈린의 대숙청 때 모조리 숙청되어, 독ㆍ소 전쟁 초기에 소련군이 호되게 당한 원인이 되었다.)

이상이 당시 독일의 사정인데 연합국은 어땠을까?

2016년 8월 16일 화요일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글을 쓰려다 보니, 이 것이 마치 조선시대의 예송논쟁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질적 기대효과는 거의 없고 명분론적으로 친일이냐 하니냐를 그냥 구분하는 도구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예송논쟁도 왕의 정통성이 있냐 없냐 하는 것 이었으니까 일맥상통 하는 것이죠. 어떤 정책, 비젼 또는 사고체계가 국가나 사회에 이로울 것인가 하는 실질적은 부분은 전혀 없는 논쟁이지요.

식민지 근대화론은 1950 – 60년대 서구의 학자들에게서 시작된 이론입니다. 러너와 셔만이 대표적인 학자 입니다. 이 이론이 도입되던 당시 식민지 운영 경험이 있는 서구 국가들로서는 자신들의 식민지 경영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론이 전개 되었습니다. 이 이론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기 보다 식민지 발전론이란 명칭 규정이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 운영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식민지를 근대화 시켰고 이런 근대화를 통해 식민지가 발전되었다는 발전론을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자신들 조상들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정당화 하게 된 것이겠지요.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항마로 개발 된 이론은 아니지만, 1960년대 남미를 중심으로 개발된 종속이론은 1970년대까지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항마 역할을 하다가 1990년 초 그 수명을 다하게 되었지요. 종속이론의 연장선상에서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수탈론 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서구 강대국의 식민지 시대 이루어진 근대화에 대하여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분석하게 된 것입니다. 즉, 근대화를 어떤 방향성을 갖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근대화 진행의 프로세스를 중심으로 분석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근대화를 발전과 진보라는 관점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식민지에서 기존의 사회체제로 부터 식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진행경과를 거쳐서 어떤 모습으로 사회체제가 변화했느냐를 분석하는 것으로 그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는 인간의 선의 같은 요소는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김기협의 글에 대하여 몇개의 문단만 간단하게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분석 대상이 되는 김기협의 글은 가가님이 댓글로 올린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입니다.  

<전략> ….. 191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3.6%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30년간 그만한 성장률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내세우는 것은 한국경제가 그 기간에 꽤 활기찬 발전을 이뤘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 성장의 출발점이 어디인가? 거의 아무런 산업화도 이뤄지지 않고 있던 1910년도다. 오늘날처럼 산업화가 이뤄질 만큼 이뤄진 상황에서도 연 5% 이하로 성장률 목표 낮추는 것을 놓고 온 국민이 서운해 하는 판인데, 아무것 없던 출발점에서 연 3.6%가 높은 성장률이라고? 1960년대 이후 20여 년간 한국경제가 이룩하던 연평균 7~8%보다도 높은 성장률이 근대화 출범 시점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인의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근대 기술은 어떻게든 들어오게 되어있었고 근대화는 진행되게 되어있었다.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산업화가 수십 년간 연 4% 미만의 성장률에 머물렀다는 것은 일제 통치가 도와준 결과라고 볼 수 없다. 억누르고 가로막은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임난 이후 감소되었던 농업생산은 점진적으로 상승하여 17세기 중반 최고점을 기록한 이후 주로 수리시설에 대한 개발과 보수가 거의 수행되지 않아서 19세기 후반이 되면 17세기 중반에 비하여 농업생산력이 거의 60% 수준으로 하락하게 됩니다. 이 의미는 한반도에서 산업 생산은 지속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런 추세를 바꾸려면 노동이든 자본이든 대규모적인 투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런 대량의 생산요소 추가 투입이 없는 한 기존에 진행되던 마이너스 성장 Trend를 바꿀 수 없습니다. 따라서, 김기협이 이야기한 베이스가 제로 이므로 성장 초기 단계에서는 고도 성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 것 입니다.

1910년 이후 한반도에서 산업생산이 다시 플러스 성장으로 변곡점이 형성된 것은 일제로부터의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한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고도 성장을 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경우 입니다. 얼마전에 중국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15년 연속 7% 이상 성장을 지속한 유일한 국가였습니다. 또한 근대기술은 공짜가 아닙니다. 돈을 주고 사오던지 아니면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는 돈도 없었고 식민지란 댓가를 치루고 근대기술이 유입이 된 것 입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들이 …. <중략> …. 연 3.6% 성장률을 밝혀낸 것은 훌륭한 연구 업적이지만, 이것이 마치 높은 성장률이었던 것처럼 들이대는 데 정략적 의도가 엿보인다는 말이다. 안병직·이영훈 대담집 144쪽에 이영훈의 말로 “결론을 말씀드리면 연간 2.3%의 실질 성장률에 따라 식민지기에 1910~1940년간 한반도의 총소득이 2.7배나 커졌습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연간 2.3% 성장률로는 30년간 170%의 성장을 이룰 수 없다. 총소득이 170% 성장했다고 하는데, ‘인구’ 조에 따르면 그 기간 중 한반도 인구는 1313만 명에서 2439만 명으로 86% 증가했으므로 실질 성장률은 30년간 총 45%로 연평균 1.3%에 미치지 못한다. 현금 지출이 늘어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총체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틀림없다. 이영훈은 같은 책 142쪽에서 “1910~1940년간 연간 평균 3.6% 정도의 성장이 있었습니다. 동기간 인구 증가율은 연간 1.3%였습니다. 이를 빼면 1인당 실질소득은 연간 2.3%의 수준으로 증가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영훈의 88~89쪽에도 거의 같은 내용을 적었다. 총생산이나 총소득의 근거 자료는 필자가 확인하지 못했으나 같은 기간의 인구증가율은 에 나타난 연평균 2.3%가 틀림없다고 본다. 이영훈이 인구 증가율과 실질소득 증가율을 뒤바꾼 것으로 보인다.

100을 기준으로 30년간 3.6% 성장을 하면 278%가 나옵니다. 2.7배 성장을 한 것이죠. 년 1인당 평균 소득 성장율이 2.3% 이란 것은 연평균 인구 성장율 1.3%를 경제 성장율 3.6%에서 뺀 것입니다. 조금 거친 계산 방식이기는 한데 평균값들 이기 때문에 1인당 소득 성장율 추세를 추정하는 방법으로는 틀린 것은 아닙니다. 위의 인구 Data는 김기협이 별도로 입수한 자료인 것 같습니다. 이영훈 교수가 제시한 자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위의 인구 숫자에 따라서 인구 증가율을 계산해 보면 CAGR로 2.1%가 나옵니다. 경제사학자인 이영훈 교수가 CAGR 계산에서 실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김기협은 경제성장율과 1인당 소득 성장율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전략> ….. 뉴라이트 측은 수탈론에 반대하면서 일본 식민 통치는 16~17세기에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있었던 것처럼 악랄한 착취 체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다수 수탈론자들도 그런 맹목적 착취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성장의 수준과 방향을 결정하는 데 수탈 의도가 중점적으로 작용한, ‘합리적’ 수탈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허수열 씨가 근대화론 비판서를 “개발 없는 개발”이라는 제목으로 냈지만, 식민지 경제체제와 관련해 더 널리 쓰이는 말은 “발전 없는 성장(growth without development)”이다. 식민지 경제가 성장한다고는 해도 덩치가 클 뿐이지, 발전의 주체로 자라날 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본국 경제체제의 부속품으로 식민지의 역할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 부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 근대화론도 같은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합병 이전부터 대량의 한국 쌀을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쌀 공급은 극히 예민한 과제였다. 일본의 한국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 쌀 증산이었다. 해방 무렵까지 논의 70% 이상을 소수 지주가 소유하게 된 기형적 토지 소유 구조도 이 정책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농지 소유를 집중하고 농업 노동을 저임금에 묶어놓는 것이 쌀의 대량 반출에 편리했기 때문에 조세를 비롯한 모든 정책을 꾸준히 지주층에 유리하게 펼친 결과였다. 쌀의 생산도 수출도 늘어났다. 그러나 그 이익을 거둔 것은 상당수 일본인을 포함하는 소수 지주층이었고 그들은 일본제 공산품을 수입해서 썼다. 민중의 소비 수준은 별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내의 공업 생산에 큰 자극을 주지 못했다.

식민지 기간 동안 발생하는 근대화에 참 기대하는 것이 많군요. 김기협씨는….  일제가 구한말 이래 조선 정부도 별 관심이 없었던 소득분배까지 개선해 주어야 합니까? 일본 식민지 지배기구는 천사들이 운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하는 기관이죠. 식민지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죠. 그리고 공업 생산에 영향을 주는 것은 투자 입니다. 민중의 소비 수준이 아니고요. 소비 수준이 공업 생산에 영향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것 입니다. 김기협씨는 경제를 너무 모릅니다. 이 것이 우리나라 역사학자란 사람들의 수준입니다.

1930년대 들어 북한 지역에 중공업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대동아’ 건설에 나서면서 세운 입체적 개발 전략의 일환이었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주요 시설을 중국과의 분쟁 소지가 있고 통치 전망이 아직 불안정한 만주 땅보다 식민지 체제를 확립해 놓은 한국 땅에 배치한 것이다. 여러 개 대형 공장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한국의 공업 인구와 공업 생산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제국의 산업 구조 안에서 부속적 역할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내적 재생산 구조를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소득 증대는 하급 인력의 노임에 그쳤고, 연관 산업의 발전 여지도 극히 적었다.

그렇죠. 그런데 김기협씨가 부정확 하게 알고 있는 것을 보충하면 한반도 동북부에 대규모 산업 단지가 개발된 것은 첫째, 압록강과 두만강의 낙차를 이용해서 전력 생산 시설을 건설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했기 때문이고요 둘째, 1940년대에 중화학 공업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가 이루어 지는데 이는 미군의 폭격으로 부터 비교적 안전한 곳이 한반도 동북부였기 때문입니다.  (문장 일부 수정)

식민지 시대 한국에 근대화 현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고, 일본의 통치가 이 근대화에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일본이 꾸준히 노력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시기에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수탈론이라 해서 근대화의 사실을 일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을 수탈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의, 건전하지 못한 근대화였다고 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기본적으로 선의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한국에서 실제로 진행된 근대화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길이었다는 인상을 주려 한다. 식민 통치자를 ‘악마’에 가깝게 그리는 극단적 수탈론과 반대로 근대화론자들이 ‘천사’의 모습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이 그 까닭이다. 이런 대목에서는 ‘실증’이 실종되어버린다. …… <후략>

김기협씨는 50년대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90년대 이후 제기된 새로운 식민지 근대화론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케이를 비롯한 일본 우익에 의하여 남용이 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50년대식의 식민지 발전론 입니다.  또한 김기협씨는 낙성대연구소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일본 우익의 식민지 발전론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죠. 오히려 양자를 동일시 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양자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여기에 일본 우익은 식민지 발전론의 통치의 효율성 향상 같은 부분을 천사같은 일본인의 선의라는 감성적인 부분으로 치환시키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것이죠. 그런데 김기협씨는 전혀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외곡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김기협씨도 식민지 기간중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것이면 충분한 것이죠.  

<전략> ……. 일부 수탈론자들이 보여 온 지나친 편향성에 대한 뉴라이트의 지적에는 나도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식민 통치자를 짐승이나 악마보다 가능한 한 합리적 인간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의 ‘선의’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편향성의 보정이 아니라 더 심한 편향성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일본을 합리적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일본 우파에게 “우리가 남이가?” 식 추파를 던지다가 독도 문제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이 그런 사고방식의 문제점이다. 수탈론의 지엽적 문제들을 지적할 때는 그토록 떠받드는 ‘합리성’이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공헌, 그리고 그 공헌을 뒷받침한 일본의 선의를 강조할 때는 어디로 가버리는 것일까. 식민 통치자를 가능한 한 합리적 인간으로 보자는 당부가 일부 수탈론자들보다 뉴라이트 근대화론자들에게 더 절실한 것 같다. <중략>….. 대동아전쟁 당시 “민족의 활동 공간을 확보한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선전을 아직도 곧이듣고 있는 자칭 ‘역사학자’들을 21세기 한국에서 보는 것이 놀랍다. <후략>…….

김기협씨는 악의적으로 뉴라이트를 흡집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뉴라이트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전개하면서 일본의 선의 같은 요소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 우파에게 우리가 남이가하고 추파를 던지지도 않습니다. 김기협씨는 박헌영은 존경하고 여운형은 동정하며 이승만은 증오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쓴 “해방일기”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뉴라이트에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왜곡하는 것은 일도 아닌 사람이죠.

식민지 근대화론과 수탈론은 양립이 가능한 이론 입니다. 서구의 학자들이 그들 조상의 식민지 수탈과 근대화를 등가에 놓고 분석하기 위한 이론이었으니까요. 즉, 수탈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식민지 지역에 대한 근대화도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서구의 식민지 운영 방식과는 달리 일본은 식민지에 대한 자본 투입량이 식민지로 부터의 자원 유출량보다 많다는 것 입니다. 이 것이 식민지 시절 한반도에서 경제 성장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났던 이유라는 분석 입니다. 일본이 좋은 나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식근론은 역사적 사건을 보다 실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이론인 것이죠. 이 것이 바로 식근론의 가장 중요한 의미 입니다. 친일파이기 때문에 식근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을 통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오해가 아주 조금이라도 해소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2016년 7월 4일 월요일

한글, 훈민정음은 창조인가 모방인가? (3) 수난과 극복

한글의 수난

왕대비가 성종의 효성을 칭찬하는 글을 한글로 썼다. "왕대비가 행장수찬(行狀修撰)에서 언서(諺書)를 내렸는데, 한문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연산군 1년 1월 2일

그러다 연산군 10년7월19일에 한글로 된 익명서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한글은 대수난을 겪게 된다. 연산군은 다음날 20일에 한글 사용 금지령을 내리고 22일에는 일체의 언문이 적혀 있는 책을 불사르도록 했다.

전교하기를 "어제 예궐하였던 정부 금부의 당상을 부르라. 또 앞으로는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며, 모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5부로 하여금 적발하여 고하게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을 아울러 죄주라. 어제 죄인을 잡는 절목(節目)을 성 안에는 이미 통유(通諭)하였거니와, 성 밖 및 외방에도 통유하라." - 연산군 10년 7월20일

전교하기를 "언문을 쓰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알고도 고하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단하고, 조사(朝士)의 집에 있는 언문으로 구결을 단 책은 다 불사르되, 한어(漢語)를 언문으로 번역한 따위는 금하지 말라." - 연산군 10년 7월22일

전교하기를 "경외(京外)의 언문 및 한자를 아는 자로 하여금 각각 한자·언문 4통을 쓰게 하여 책을 만들어서, 그 하나는 의정부에, 하나는 사헌부에, 하나는 승정원에 두고, 하나는 대내에 들여서 뒷날의 상고에 갖추라." - 연산군 10년 7월25일

(연산군 10년7월25일의 조치는 한글기록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요즘 표현으로 하면 필적감정을 위한 지시였다. 아에 언문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글을 미리 받아 놓고 다시 언문서 사건같은 것이 발생하면 필적을 비교해서 색출하겠다는 것이었다.)

광종 1년 9월 4일에는 언문청이 해체되었다.

그래도 널리 쓰인 한글

대국민 교지와 공고문과 포고문 등은 한글과 한문으로 동시에 작성 했으며,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구황촬요 등 민간생활에 유용해서 직접 국민에게 전파해야 할 서적들은 한글로도 출판됐다.

이처럼 왕실을 비롯해 관리들 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꾸준히 한글을 사용했다. 아래는 왕실에서 보낸 한글 편지들이다.

"글을 보고도 더딘 것은 그 방이 [너의 역질 하던 방] 어둡고 날씨도 음[陰]하니 햇빛이 돌아 들거든 내 친히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의녀를 들여 대령하려 하노라. 분별 말라. 자연 아니 좋아지랴. 만력 31년(선조 36년) 11월19일 사시" - 선조가 정숙 옹주에게 보낸 편지

"명안공주방 전, 밤사이 평안 하옵시니잇가. 나가실제 내일 들어 오옵소서 하였삽더니 해창위를 만나 못떠나 하옵시니잇가. 아무리 섭하옵셔도 내일 부디 들어 오옵소서." - 숙종이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보내는 편지, 1680년경. 해창위:명안공주의 남편 오태주

"답상장. 장정승 댁. 신새해 기운이나 평안하옵신가 궁금하며 사신이 들어 오올제 쓰신 편지 보고 친히 뵙사오는듯 아무렇다 없사오며 청음은 저리 늙으시니 들어와 곤고 하시니 그런 (딱한) 일(이) 없사오이다. 행차 바쁘고 잠깐 적사오니다. 신사(인조 19년) 정월 초팔일 호" -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심양에 볼모로 가서 장모에게 쓴 답장. 청음: 김상헌

"글을 보니 무양하게 있으니 기뻐하며 보는듯 반가와 하노라. 사연도 보고 못내 웃으며 아무리 그만큼 하여 두면 쓰랴 한들 임자 없는 일에 뉘라서 애써 할리가 있으리. 옷감? 지금 못 얻었으니 그것이 되기가 어려울까 싶으니 하죄오지나 마라. - 숙경이는 내일 나가게 하였으니 그것조차 마저 나가면 더욱 적막할까 싶으니 가지.. 마음을 평치 못할까 싶구나. 언제 너희가 들어 올까 눈이 감기게 기다리고 있노라." - 인선왕후(효종의 비)가 결혼해 분가한 둘째 딸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 한글 편지가 70여편이나 된다. (- 표시와 .. 표시는 원문에 나오는 기호다. 그 시절에 벌써 - 기호와 .. 기호를 썼다는 것도 흥미롭다.)

"숙모님께. 상풍에 기후평안 하오신지 문안 알기를 바라오며, 뵌지 오래오니 섭하고 그립사와 하옵다가 어제 봉서 보옵고 반갑사와 하오며, 할아버님 께서도 평안하오시다 하오니 기쁘기 한없나이다. 손자" - 정조가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문안 편지. 8살 이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됨.

"그새 망극한 일을 어찌 만리 외에 짧은 편지로 말하오리까. 마누라 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돌아가셨거니와 나야 어찌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오리까. 날이 오래 되니 옥도가 엄정하시고 태평하시고, 상감과 자전의 안부 모두 태평하시고, 동궁마마 내외 편안히 지내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또 비옵니다. 나는 다시 살아 돌아가지는 못하고 만리 밖 고혼이 되니 우리 집안 대 잇는 일이야 양전에서 어련히 보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시 뵙지도 못하고 세상이 오래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으니 지필을 대하여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보정부 시월 십이일" - 흥선대원군이 청국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거년의 소식 들은 후 궁금하여 매양 말하고 있었더니 설 태평히 하오신가 싶으니 기쁘며 예서도 지내오던 생각이 지난 때에 미치면 이 몸이 없어지고자 하는 말씀을 한 붓으로 다하기 어렵사옵니다. 요사이는 성후(왕) 두루 평안하시고 예후(왕세자) 걸음걸이는 끝내 불편하시오나 (그 외) 세자들 평안하오시니 축하드리옵니다. 나는 신병이 성한 날이 없사오며 내내 지리하여 대강 적사옵나이다. 정월 이십삼일" - 깊은 병이 든 순명효 황후가 위관 김상덕에게 보낸 편지. 순명효는 이 편지 후 요절했다.
한글 창제의 가치론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말은 있으나 독자적인 글이 없는 민족은 국가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어 사라진 것을 수 없이 보아 왔다. 입으로 전해지는 지식전달의 한계성은 명확한 것이고, 독자적인 문자로 전달되는 정보에는 정보의 손실방지와 더불어 그 나라 말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서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문화적 부흥 뿐만 아니라 공통체 의식을 굳건히 해줌으로써 생존력까지 향상시켜 준다.

출처: http://blog.naver.com/qnwkkr/120062719071

2016년 7월 2일 토요일

한글, 훈민정음은 창조인가 모방인가? (2) 한글 창제의 목적

한글 창제는 사대주의인가 나라 사랑인가?

불행하게도 한글 창제의 목적은 한자 읽기에서 중국 본토 발음을 위한 발음기호적 의미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워낙 한글의 능력이 뛰어나 아에 독자적 글자로 자리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國귁之징語 音이
나라 말씀이
(國귁ㅇ 나라히라
국은 나라이라.)

異잉乎 中듕國귁ㅎ야
중국과 달라
(中ㄷ國귁ㅇ 皇 帝ㄷ 겨신 나라히니 우리나랏 常쌍談땀애 江ㄱ南남이라 ㅎㄴ니라.
중국은 황제가 계신 나라이니 우리 나라에서 늘 하는 말에 강남이라 하느니라.)

與영文문字ㅉ로 不ㅂ相ㅅ流ㅉ通통ㅎㅆ
이 문자로 서로 유통하지 못하므로
(文문字ㅉ와로 서르 ㅅㅁ디 아니ㅎㅆ
문자가 서로  사뭇지(같지) 아니 할쎄)

故고로 愚民민이 有 所송言 ㅎ야
고로 어리석은 백성이 아뢰고자 하는 말이 있을지라도
(이런 젼ㅊ로 어린 百ㅂ姓ㅅ이 니르고져 ㅎ 배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해도)

而 終ㅈ不ㅂ得득伸신其ㄲ情ㅉ者쟝 多당矣ㅇ라
끝내 뜻 펴기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ㅁㅊ내 제 들 시러 펴디 ㅁㅎ 노미 하니라
마침내 자기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느니라)

予영 爲윙此ㅊ憫민然 ㅎ야
내 이에 가여운듯 하여 위하여
(내 이ㄹ 爲윙ㅎ야 어엿비 너겨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新신制ㅈ 二十씹八ㅂ字ㅉㅎ노니
새로 만든 스물 여덟 글자라 하노니
(새로 스믈 여ㄷ 字ㅉㄹ ㅁㄱ노니
새롭게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欲욕使ㅅ人 ㅇ로 易잉習씹ㅎ야 便ㅃ於 日 用ㅇ耳니라
쓰기를 원하는 사람이 쉽게 익히게 하여 편하게 날마다 사용하게 할 뿐이니라
(사ㄹ마다 ㅎㅊ 수 니겨 날로 메 便ㅃ安 ㅋㅎ고져 ㅎㄹ미니라.
사람마다 하게하여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함 이니라.) - 월인석보

한음은 중국 소리라. 두는 머리라. 별(別)은 가리는 것이라. 중국 소리의 잇소리는 치두음과 정치음을 분별함이 있나니 이 소리는 우리나라의 소리보다 얇으니 혀의 끝이 윗니 끝에 닿느니라. ~ - 월인석보



보다시피 의미적으로 한글을 통해 누구나 쉽게 중국 정통 발음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글에 있어서는 중국 한자이지만 한자를 읽는 발음에 있어서는 원나라 때 붕괴되어 뒤죽박죽된 결과 중국 정통 발음이 아니라서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애초부터 한자를 둘러싸고 조선어와 중국어가 다르니 더욱 힘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세워지면서 중국어 정통발음 회복운동이 일어나자 조선도 이런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세종은 요동으로의 중국어 요원 파견교육을 논의 했으며(세종21년12월4일), 강이관과 별재학관을 증설하면서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며 중국어 교육을 독려했다(세종23년8월11일). 명나라 사신 예겸의 방문 때는 통역사 손수산이 운서로 중국어교육 논의를 하고, 정인지와 신숙주는 홍무정운으로 중국어에 대해 담론을 했다(세종32년1월3일).

"소방(小邦)이 멀리 해외에 있어서 바른 음을 질정(質定)하려 하여도 스승이 없어 배울 수 없고, 본국의 음은 처음에 쌍기학사(雙冀學士)에게서 배웠는데, 기(冀) 역시 복건주 사람입니다." (정인지)

"복건 땅의 음이 정히 이 나라(조선)와 같으니 이로써 하는 것이 좋겠소." (예겸) - 세종실록, 세종 32년 1월 3일

세종 26년 2월에 명나라 발음기호 정리 서적인 운회를 한글로 풀어 내고, 세종 29년 11월에는 조선 자체 중국어 발음서인 동국정운을 반포했다.

"옛사람이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려 음으로 고르고 종류로 가르며 정절과 회절로 함에 그 법이 심히 자상하매 배우는 이가 그래도 입을 어물거리고 더듬더듬하여 음을 고르고 운을 맞추기에 어두웠다.
훈민정음이 제작된 이후 만고의 소리가 한 소리처럼 되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음을 전하는 중심줄이라.
전하께서 전해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해 각각 고증과 빙거(憑據)를 두어 바른 음에 맞게 하시니, 옛날의 그릇된 습관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동국정운 서문)

(성종 12년에는 동국정운의 치두와 정치 구분이 취약하다는 단점이 지적됐다. "동국정운을 살펴보니, 사(私)와 사(思)는 치두음(齒頭音)이고, 사(師)와 사(獅)는 정치음(正齒音)이여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고, 비(卑)와 비(悲)는 순중음(脣重音)이고, 비(非)와 비(飛)는 순경음(脣輕音)이어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며, 방(芳)자는 전청음(全淸音)이고 방(滂)자는 차청음(次淸音)이지만 역시 혼돈되고 분별되지 않아서 권인의 말과 같습니다." 성종실록, 성종12년12월22일)

동국정운의 효과는 매우 뛰어 났다. 정인지가 훈민정음해례에 밝힌 "지혜로운 자는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라는 호언대로 였다.

최만리 일파는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면 누가 고심노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배우려 하겠습니까?"(세종26년)하고 반발했다. 실제로 세종 28년에는 이과와 이전의 과거시험 과목으로 훈민정음을 추가함으로써 최만리 일파의 우려는 현실화 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조에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 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해 뽑게 하되, 비록 의미와 이치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合字)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 - 세종 28년 12월26일

예조에서 정문에 의거해서 "일찍이 교지를 받들어서 과거에 있어서 동국정운을 쓰게 되었으나, 아직 인쇄 반포되지 않았으니, 청컨대 옛날에 쓰던 예부운(禮部韻)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단종 원년 12월24일

강제적 훈민정음 사용 확대 추진은 계속되지 못했지만 꾸준히 사용이 증가했다. 세종은 이러한 반발 때문인지 동국정운을 각 도와 성균관, 4부학당에 비치하면서 "본국의 인민들이 속된 운을 익혀서 익숙하게 된지가 오래 됐음으로 갑자기 고칠 수 없으니, 억지로 가르치지 말고 배우는 자로 하여금 의사에 따라 하게 하라"고 하교했다.(세종 30년 10월17일)

송사 문서의 개선

행정 사법 체계에 있어서 관리계층의 한자와 당시 글이 없던 민중이 쓰는 언어가 달라서 발생한 폐단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한자로 문서 작업을 하고 하위 관리직 문서 문자로 이두를 사용하고 있지만 심리과정과 판결에 대해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사또의 부조리한 판결이라도 억울해도 그대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판결을 내리는 관리조차도 사건의 곡절을 이해하지 못했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 훈민정음 서문, 정인지

재판 과정에서 이두문자를 통해 한자와 민중을 연결시키고 있었지만 이두의 비효율성은 사건의 핵심에 대한 이해는 커녕 이두문자로 작성한 서류마저 그 뜻을 알기 힘들었기에 개선책으로서 훈민정음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최만리 일파는 상소문에서 이러한 뜻이 부당하다고 했다.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고 있다.(세종26년2월20일)

이 부분에 있어서 최만리 일파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함에도 주장의 본래 목적이 한글의 폐지에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유교이념 충효의 전파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양반 사대부의 가장 마을대표 또는 가르칠 만한 사람들로 하여금 부녀자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고~" -경국대전

성종은 언문삼강행실도, 언문열녀도, 언문효경, 언문내훈 등을 통치이념의 확대를 위해 널리 펴냈다. 기존에는 이두문자를 사용하거나 관리를 현장에 동원해 말로 전달해서 통치이념을 전파 시키는 방식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어려운 한자를 공부할 수 있을만큼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일반인들에게 쉬운 한글을 가르쳐서 한글로 쓴 통치이념 서적들을 읽게 하여 자발적으로 받아 들이도록 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세종 13년에 발간된 삼강행실도는 한자어였지만, 한글 삼강행실도 발간을 둘러싸고도 최만리 일파와 세종간의 설전이 벌어 진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세종)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정창손)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세종) -세종실록, 세종26년2월20일

출처:  http://blog.naver.com/qnwkkr/120062719071

2016년 6월 30일 목요일

한글, 훈민정음은 창조인가 모방인가? (1) 창조와 모방


기본용어

언문(諺文): 일반적으로 한글을 지칭하나 한자 외의 다른 나라 문자들을 오랑캐 글이라 하면서 비하해서 부르는 말

전문(篆文): 옛글. 한자에서는 진나라 이전의 한자

운서(韻書): 한자의 중국 표준발음을 표시한 책

운회(韻會): 명나라의 운서

사성(四聲): 육조 수 당나라 시대의 중국어 성조. 고저(장단과 강약).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

칠음(七音):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의 다섯 음(音)과 반치(半徵) 반상(半商) -홍무정음 서문

운(韻): 모음부분 이하. 예)산- ㅅ를 뺀 안(an) 부분. 시조에서 중요시하며 중국본토 발음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

운의 예 - 삼(싼)자운
일접상과삼(日接常過三) - 명나라 사신 예겸이 뗀 운
세간과비자 이진덕이삼(世間퉫毘子 利盡德二三) - 정인지
의도별전철 입취사무삼(意到瞥電立就思無三) - 신숙주

반절법(半切法): 한 글자를 읽을 발음기호로 다른 두 글자를 선정해서 각각 절반씩 발음을 가져다 합쳐 읽는 방법. 예) '동', 도종절. 동을 읽을 발음기호로 도와 종을 적고 도에서 ㄷ(d) 발음을 가져오고 종에서 ㅗㅇ(ong) 발음을 가져와 합쳐서 동(dong)이라 읽음

용음(用音): 소리의 운용법. 반절법과 한글조합법

합자(合字): 반절법과 한글조합법(예:ㅇ+ㅗ+ㅏ+ㅇ) 같은 글 조합법

1. 한글, 창조인가 모방인가?

한글창제에 세종을 빼고 누가 참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달에 상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제정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만 쓰여 있다.(세종실록-세종 25년 12월조)

한글창제 이후 편찬된 훈민정음예의본과 훈민정음해례본(모두 세종28년)에서 훈민정음해례본 집필에는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최항,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 참여했다. 석보상절(세종28년)과 월인천강지곡(세종31년)을 수양대군이 관장했다. 용비어천가(세종29년)를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쓰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을 달았다.

운회(韻會)의 번역작업(세종26년)에는 동궁, 진안대군, 안평대군이 관장하여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 등이 참여했다.

이로 보아 한글창제에는 정인지(대제학), 신숙주(부수찬), 최항(집현전 교리 정5품), 박팽년(집현전 부교리 종5품), 성삼문, 이선로, 안지, 권제, 이개(집현전 부수찬 종6품), 강희안(돈녕부 주부 종8품) 등이 참여했을 것이다.

언문청과 훈민정음 창제와는 전혀 무관하다. 훈민정음은 세종 25년에 창제되었지만 언문청은 세종 28년에야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글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창제되었다고 할 것이다.

"~드디어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사적(事迹)을 상고해서 용비시(龍飛詩)를 첨입(添入)하게 하니 ~" ~遂置諺文廳 考事迹 添入 龍飛詩~-세종 28년11월8일


 
전문(篆文)모방설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曰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언문 반대 상소문 중 일부- 세종26년2월20일)

한글 반대 상소문 서명자는 최만리(집현전 부제학:정3품), 신석조(집현전 직제학:종3품), 김문(집현전 직전:정4품), 정창손(집현전 응교:종4품), 하위지(집현전 부교리:종5품), 송처검(집현전 수찬:정6품), 조근(집현전 저작랑:정8품) 등이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조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曰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라는 대목을 가지고 중국의 전문을 모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상소문의 전체 흐름과 문맥들의 뜻을 살펴보면 오히려 '왜 중국의 한자를 따르거나 모방하지 않고 새로운 오랑캐 글자를 만드느냐?'라고 하고 있다.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 지방 문자는) 오랑캐의 일이므로 화하(한자)를 써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 하였는데 화하(한자)가 오랑캐로 변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따로 언문(오랑캐 글)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글자 만들어(어조)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하물며 언문(한글=오랑캐 글)은 문자(한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이렇듯 최만리 일파는 기본적으로는 한자를 중국발음으로 읽기 위한 발음기호 정비는 찬성했다. 막상 발음기호가 (최만리가 보기에는) 중국의 전문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성질의 문자임을 알고 반발했다.

당시에는 반절법을 이용한 한자음훈표기법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두 조차도 한자의 영역을 벗어 나지 않았지만 세종이 만든 발음기호는 한자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발음기호 수준을 뛰어 넘어 완전히 새로운 글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최만리 일파는 한글이 한자를 보조하는 한자를 모방한 발음기호 수준에 머물지 않고 한자의 영역을 벗어나 조선의 독자적인 글이 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상소문을 둘러싸고 정전에서 세종과 최만리 일파가 나눈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최만리 일파는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름과 해석에 있어서 글자 조합(語助)과 문자(한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이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세종26년2월20일)라고 한글이 한자와 닮지 않았기에 글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다는 뜻은 한글의 자모음의 모양이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이지 고대 한자인 전자(篆字)를 베끼거나 변조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글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세종실록 세종25년12월30일자 기록에는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라고 적고 있으나, 세종28년 9월29일의 훈민정음 어제 서문에서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라고 하면서 고전을 모방했다는 것은 물건의 형상을 본딴 것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근거는 없지만 다른 시각에서 몇 가지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자음과 모음의 구성에 있어서 중국에서 유입된 육서론(문자학), 운성학(발음과 발성), 주역(음양오행론)의 이론들도 살펴 봤을 거라는 점이다.

자음에 있어서는 한글 28자 중에서 9개가 입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고 있는데 육서론(6가지 글씨 구분) 가운데 상형문자론에서, 오행설에 따른 음운론에서 각각 이론적 틀을 얻었을 수도 있다. ("아음(牙音) ㄱ(기윽)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뜨다" "설음(舌音) ㄴ(니은)은 혀가 잇몸에 닿은 모습을 본뜨다" "치음(齒音잇소리) ㅅ(시읏)은 치아의 모습을 본뜨다" "후음(喉音목구멍소리) ㅇ(이응)은 목구멍의 모습을 본뜨다" - 훈민정음 제자해)

제자해에서 밝히고 있는대로 천지인의 삼재 도리를 따라  '  · '는 하늘을, 'ㅡ'는 땅을, 'ㅣ'는 인간을 본떳다고 적고 있다.(이 3개의 기본 모음을 바탕으로 초출자 재출자 등으로 모음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처럼 기본 모음 구성에 있어서는 주역의 음양오행에서 이론과 철학적 의의를 얻었을 것이다.

발음기관 분류에 있어도 오행의 원리에 따라 어금니 소리, 혀 소리, 입술 소리, 칫소리(앞니소리), 목구멍 소리로 다섯 부위로 나눴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음의 형태는 모음의 확대처럼 모양에 추가적인 모양이 더해지면서 발전했다.)

천지의 도는 음양오행일 뿐이다. ~ 그러므로 사람의 소리도 모두 음양의 이치를 가지고 있건만 사람이 듣고 살펴서 돌아보지 않는다.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 故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顧人不察耳 -훈민정음해례 제자해 서문

또한 세종이 운성학(음운론)에도 식견이 있었고, 4성7음을 기반으로 하고 소리의 맑고 탁함을 논한 것은 오행론적 관점에 더해서 운성학적 관점에서도 접근했다고 할 것이다. 즉 한글창제에 있어서도 중국의 운성학 이론도 참고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연히 중국의 것만을 참조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자(篆字)를 모방했다는 것은 당시에서의 고대 한자를 그대로 옮겨 쓰거나 흉내낸 것이 아니라 이론적 틀을 구성함에 있어서 중국에서 형성된 이론들(원나라 때의 파스파 문자 포함)도 다양한 참고자료로 활용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

"전하께서 전해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해 각각 고증과 빙거(憑據)를 두어 바른 음에 맞게 하시니, 옛날의 그릇된 습관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동국정운 서문)

한편으로 한글을 또 하나의 언문(오랑캐 글)으로 취급하며 거세게 반발하는 신하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중국의 고전 문자인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함으로써 무마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한글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부분에서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키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라고 말하고 있다.(세종실록 세종28년 9월29일의 훈민정음 어제 서문)

즉 '한글창제는 옛날 것을 모방하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이룬 것으로 새로운 이치를 깨달아 실제로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파스파 문자와 지구라트 문자 모방설

한글이 지구라트 문자와 유사하다는 주장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기에 생략한다. (자음과 모음의 구성에서 기본조차 갖추지 못하고 그저 자음과 모음에 상관없이 조금이라도 모양이 비슷하면 한글과 연관지었다.)

파스파문자(八思巴文字)와의 유사설에 있어서도 역시 자모음의 구성원리를 따지면 전혀 연관성이 없다. 모음과 자음에 있어서 한글의 자음모음과 상관없이 어쨌든 몇 개라도 모양새가 같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몽골이 중국 땅에 세운 원나라 초기에 쓰이던 파스파 문자는 저 멀리 티벳의 문자를 약간씩 변형시켜 수용한 것이다. 건국초기 티벳 승려 파스파가 명령에 따라 제작해 쿠빌라이가 1269년에 배포했으나 널리 쓰이지 않고 사장됐다.

파스파문자는 중국어를 중심으로한 티벳어, 산스크리트어, 투르크어를 발음기호로 표기하는 자음30자와 모음 8자, 9개의 기호로 구성됐다. 이렇듯 어느 정도 효과적인 발음기호 역할을 했지만 독립 문자로서의 역할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글의 파스파문자 모방설을 주장하는 콜롬비아대 명예교수 게리 레드야드는 1966년부터는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표절했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파스파 문자가 저 멀리 그리스 문자와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세종 당시 전서(篆書)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파스파 문자와 한글은 모두 전서(篆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예로 파스파 문자가 조선시대 1496년까지 통역교육기관인 사역원에서 교재로 사용됐다는 점도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했다는 증거로 삼고 있다.

흔히 말하는 전문(篆文)이라는 것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왕의 명령에 따라 진나라 이전의 고대한자를 수집 정리한 것이다. 사역원에서는 매월 전문(篆文) 시험을 봤다. 전문은 도장 비석 등에도 쓰였고, 전문으로 작성된 책도 인조 때 복원했으며, 연산군은 공사장 인부들의 통행패도 전문으로 새겼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이기는 하지만 사역원의 몽골어 교육에 주로 사용된 교재를 보면 몽골어 원문에 한글로 적어 발음을 익혔다.

하지만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원나라가 망하고 건국된 조선에서 쓰인 발음기호는 반절법이라는 한자음훈표기법이 주류였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원나라 멸망 후 사역원에서 일시적으로 파스파문자로 몽고어를 익혔다는 주장만으로 한글이 파스파문자를 모방했다는 단정은 설득력이 없다.

역시 몇 개의 한글 자음이 모양과 발음에서 비슷하다고 하여 한글의 파스파문자 모방 주장도 납득하기 힘들다.

함부르크 대학 출신 도멜스는 고금운회거요에서의 자모음이 몽고자모운음과 많이 일치한다는 면에서 명나라 초기에 발간한 홍무정운을 단종 3년에 역훈했다는 것을 들어 한글의 파스파 문자와의 연관설을 말했다.

고금운회거요는 원나라에서 발간됐다. 세종 16년(1434)에 경상도관찰출척사 신인손은 고금운회거요가 사라지고 없다면서 역사자료 확보차원에서 다시 발간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받아 들여져 경주부와 밀양부에서만 간행했다. 동국정운의 참고 자료가 됐다는 면에서 사료적 가치를 지니기는 하지만 중앙관청에서 발행한 것도 아니고 사역원 교재로 쓰인 것도 아니다.

몽골은 이미 멸망했고, 명나라는 중국어 발음 회복에 나선 때라서 세종도 역시 명나라 초기 간행 발음서인 운회를 들여 왔고, 단종은 홍무정운을 들여와 명나라가 정비한 중국어 발음 변화에 호흡을 같이 했다.

도멜스는 이런 상황에 대해 '명나라가 들어 선 이후에도 여전히 몽골식 중국어 발음 교재 때문에 부끄러웠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것을 벗어나기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라고 말했다.

분명하게 결론은 한글은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여 이론적 검색과정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한글 각 모음이나 자음의 모습에 있서서의 모방논란과 다르게 한글은 세계 문자 역사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계획되어 발명되고 활성화된 문자 창조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문자가 500년 넘게 이어져 민족의 중심 글자가 됐다.

자음과 모음의 분류에 대한 뚜렷한 체계와 그 자모음의 구성에 대한 철학을 처음부터 제시했다는 것은 역사상 모든 문자 발생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사건이다. 중성을 독립시켜 초성과 더불어 제자하는 원리로 인류 최초의 자모문자를 만든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qnwkkr/120062719071

2016년 4월 14일 목요일

조선통신사는 민페사절단이었다

 

[닭서리에 여념이 없으신 조선통신사 수행원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공식적으로 모두 12회 왕래되었다. 명칭상의 문제는 있지만 일본에 외교사절이 파견된 것은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일반적으로 통신사라 함은 조선후기에 에도막부 정권의 경조사를 챙기고, 국서를 전달할 목적으로 파견되던 사절을 의미한다. 에도 막부는 정권의 위세를 드높이고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이유로, 다이묘들은 막부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통신사를 경쟁적으로 융숭하고 호화롭게 대접했다.

James B. Lewis 교수는 당시의 일본측 외교문서인『通航一覽』연구자료를 인용하여 조선통신사를 호위하고 먹이고 재우고 에도까지 모시기 위해 약 100만냥의 비용이 들었다고 하는데, 1706년 에도 막부의 1년 소요예산이 76만냥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 셈이다.

이 비용은 막부가 전적으로 부담한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다이묘에게 할당을 했고, 다이묘는 다시 그 지역 농민들에게 비용과 노동력을 전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 행로는 한성-부산-쓰시마-이키-아이노시마-시모노세키까지 간 후 내해를 거쳐 강을 타고 교토를 지나 수도인 에도로 입성하게 된다. 이처럼 조선통신사가 머무는 중간중간 기착지마다 엄청난 물량이 동원되었는데, 만일 비바람이라도 불어 통신사 일행이 몇 십일이라도 머무르게 되면 그 지역 다이묘는 시밤 좆되는 셈이다.

중간 기착지의 하나인 이키(壱岐)의 향토사에 따르면, 조선통신사를 위한 연회 준비에 소요되는 물품리스트가 보이는데,  단지 2~3일 동안 이들이 먹고 마시는데 소요된 일부라고 한다.

① 참마: 1,500개 ② 달걀: 15,000개 ③ 전복: 2,000貫目(약 7,500kg) ④ 오징어: 5,000斤(약 3,000kg) ⑤ 쌀: 50석(약 7,500kg)) ⑥ 고급 사케: 15석(약 2,700리터)

이키에 도착한 뒤 원래는 하루만 묵을 계획이었는데, 이 단 하룻밤을 위해 후쿠오카에서는 1년 전부터 조선인들이 쓸 숙소와 연회장을 짓기 위해 건물을 지을 자재들을 섬으로 옮겼다. 도자기류와 그릇을 옮기기 위해 선박이 제조되었고, 부두가 건설되었다. 1년 동안 이 섬은 3,500명의 노동자들로 분주했다. 6개의 인근 섬과 육지에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봉화대도 세운다.

도착날이 다가오면, 통신사들에게 대접할 물고기들을 생포해 연회장 주변에 호수를 파서 풀어놓는다. 이 물고기들은 장기간 활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염도와 탁도를 유지할 수 있는 전문기술을 보유한 어부가 관리한다. 사슴을 잡고 막대하게 소요되는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수천마리의 닭을 모은다. 사절단은 쇼군을 위해 25마리의 매를 가지고 왔는데 이 매들만으로도 하루에 100마리의 닭이 필요했다. 값비싼 금과 은 그릇들은 에도, 오사카, 나가사키의 시장에서 각 지역 상인들이 구해온 것이다.

시모노세키를 지나 내해로 접어들면 교토까지 강을 타고 와야하는데, 배가 들어와야 하므로 수심이 낮은 강은 모두 인력을 동원하여 강바닥을 파내야 했다. 1711년에는 이처럼 강바닥을 치우는데, 20,644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노동력이 사용할 괭이, 횃불, 대나무 등 자재는 물론이고 품삯에 식대까지 감안하면 추가로 엄청난 비용이 든다.

당시 에도 막부는 안보상의 이유로 강에 교량을 설치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단 두가지 예외가 있었다. 하나는 쇼군이 여행을 할 때이고, 또하나는 조선에서 외교사절이 방문할 때다. 예컨대, 후지강의 부교는 125척의 배를 동원하여 등나무 덩굴을 써서 배를 교착시킨 다음 널판을 대서 배와 배사이를 잇고 그 위에 흙을 뿌린다. 그리고 소금을 뿌려 흙을 굳힌다. 덩굴을 모으기 위해 2,250명이 투입되었다.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6,781명이 동원되어 총 9,031명이 노역을 해야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막대한 물량과 인력을 동원하여 교량을 만들지만, 조선통신사가 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없애버리므로 통신사가 조선으로 귀환하는 날에 맞춰 이짓을 한번 더 해야 한다.

이렇게 융숭하고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으면, 기본적으로 대접받는 사람들도 거기에 걸맞는 예의와 답례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실은 그러지 못한듯 하다. 소중화 사상에 쩔어있던 예부터 우리는 일본을 하대하는 이상한 자부심으로 충만했는데, 문화적으로 미개한 쪽바리에게 이런 융숭한 대접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다이묘의 대접을 다른 곳과 품평하는가 하면, 접대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그릇을 훔치거나 종사자를 폭행하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일례로 통신사로 갔던 최천종은 자신의 거울을 칠칠 맞게 잃어버리자, 일본인 역관이 훔쳐갔다고 의심하다 짜증이 폭발하여 "미개한 왜놈들의 절도근성" 운운하며 역정을 냈는데, 이에 분개한 역관이 "그릇이나 훔쳐가는 조선인"이라며 반격을 하자, 그만 이성을 잃고 달려들어 자신의 지팡이로 역관을 마구 폭행하게 되었다. 무사 출신인 역관이 이에 앙심을 품고 최천종이 잠이 든 사이에 살해하고 달아나는데, 결국 자수하여 공개처형을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생겼다.

홍우재의『동사록』中 임술년 6월 29일자에  따르면, 대마도주가 친히 5조목으로 된 족자를 보내 단속을 요청한 사실을 적고 있다. 그 중 첫째로 지적한 내용을 보자면, 일행의 上官이하에 있어서 마땅히 정숙하고 조심해야 함이 요망되며, 술에 취하여 문이나 기둥에 흠집 내거나, 돗자리나 병풍을 베어 내거나, 벽에 침을 뱉거나 오줌을 계단에 누는 것이나, 말을 몰다가 사람을 치여 죽이거나, 여러 관속들이 심부름할 때 높은 곳에 앉아 오만하게 내려 보는 일들을 금한다는 것이다.

김지남의『동사일록』에서도 말을 탈 수 없는 下官이 멋대로 타고 가버려, 정작 말을 타야할 사람은 말이 없어 왜인에게 말을 내놓으라 하고, 우물쭈물하면 줜내 싸다구나 날리고 그러는 모양이니, 앞으로는 상, 중, 하 비표를 나눠줘서 소지자한테만 말을 내주도록 단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조선통신사는 한일 양국간의 소통창구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질지는 모르지만, 그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던 반면에 외형과 규모적인 과시에 집착하여 결과적으로는 일본 민중에게 과도한 부담과 민폐를 끼친 사례이기도 하다. 사실이 그러한데도, 우리 역사교과서나 매스컴에서는 원조 한류니 뭐니 하면서 마치 우리가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에 크나큰 문화적 시혜라도 준 것인냥 착각하게 만드는 왜곡을 일삼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오늘날 마트마다 넘쳐나는 형형색색의 고구마가 없었다면, 조선이란 나라는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기근으로 사라졌을 나라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 고구마나 수차시설은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하는데, 아직도 임란때 납치된 도공이 수십만명이라는 낭설이 버젓이 교과서에 실려있는 한, 이 나라에서 제대로 역사를 배울 길은 묘연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