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8일 수요일

[정교회] 정교회의 시작




제 1장 정교회의 시작

마을의 땅아래 깊숙히 예배당이 있고, 그 입구는 조심스럽게 위장되어 있었다. 이곳은 사제가 은밀히 그 마을을 방문 하였을 때, 성만찬(Liturgy)과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다. 수상한자가 나타나면 이를 알려주기 위해 밖에 남아 있는 파수군을 제외하고, 마을 사람들은 일단 자신들이 경찰의 감시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으면, 전체주민들이 이 예배당에 모였다. 다른때에는 예배가 이동하면서 행해졌다.

부활절 예배는 공식적 국가 기관의 한 방에서 드려졌다. 출입은 내가 나와 나의 작은 딸을 위하여 얻은 특별한 통로로만 가능했다. 약 30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늙은 사제는 내가 결코 잊을수 없는 예배를 집례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를 부드럽게 찬송하였지만, 기쁨으로 충만하였다....내가 이 카타쿰 교회의 예배에서 느꼈던 기쁨은 오늘날 까지도 나에게 살아갈 힘을 제공해 주고 있다.

위의 인용문들은  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러시아에서의 교회의 삶에 관한 두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만약 약간의 변화들이 있어났다면, 그 변화들은 네로나 디오클레티안의 통치 아래에서의 기독교인의 예배에 관한 묘사들로 쉽게 생각될 수 있다. 그 변화들은 19세기에 기독교의 역사가 충만한 집단을 통해 어떻게 전달 되었는가 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조부모들 보다 훨씬 더 초대교회와 가까이에 서 있다. 기독교는 유력한 비기독교사회 속에서 실존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종교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한번 이러한 경향이 도래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 초기에 국가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러나라에서 교회와 국가의 전통적인 동맹은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a religio illicta이다, 즉 정부에 의해 금지되고 박해받는 종교이다. 오늘날 박해는 더 이상 과거의 사실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따른 3백년 보다 1918년과 1948년 사이의 30년 동안 더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특별히 동방정교회의 회원들은 그들 가운데 다수가 아주 최근까지 반-기독교 공산주의 정부의 통치 아래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잘알고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일로 부터 콘스탄틴의 회심에 이르는 기독교 역사의 처음 기간은 오늘날의 동방정교회인들과 특별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2-4)  그래서 기독교회의 역사는 오순절 기간중 예루살렘에서 사도들 위에 성령이 강림함으로, 첫번째 성령강림주일을 시작하였다. 같은날 성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삼천명의 남녀가 세례를 받았고, 예루살렘에서 처음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오래지 않아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들은 성 스테판의 죽음후에 일어난 박해로 흩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제자를 삼으라.’(마 28:19)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은 어디를 가나, 먼저 유대인에게, 또한 곧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러한 사도적 여행에 관한 몇개의 이야기가 성 누가에 의해 사도행전에 기록되었다. 다른 이야기들은 교회의 전통속에 보존되었다. 놀라웁게 짧은 시간안에 작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로마제국의 모든 주요 지역들과 심지어 로마의 국경선을 넘어서 있는 장소들에서도 자라났다.

이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여행한 제국은 특별히 동부에 있는 제국 도시들이었다. 이것은 원시 교회의 행정적 구조를 결정하였다. 기본적 단위는 각 도시에 있는 공동체였으며, 그들 자신의 감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감독을 돕기 위해서 장로들, 사제들 그리고 집사들이 있었다. 도시주변 사람들은 도시의 교회에 의존하였다. 감독, 사제 그리고 집사의 삼중적 교역직을 지닌 이러한 패턴은 이미 1세기 말경 일부의 장소들에서 확립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안디옥의 감독 성, 이그나티우스가 A.D.107년경 순교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고 있을 때에 기록한 7개의 편지에서 볼수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특별히 감독과 성만찬(Eucharist)라는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회를 계층질서적이고 성례전적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개교회 내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위치에서 주재한다.’ ‘감독없이는 어느누구도 교회와 관계된 그 어떤 일도 할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보편 교회가 존재하듯이, 감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불멸의 약인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감독의 기본적이고 구별되는 직무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를 각지역의 지체가 크고 좀더 포괄적인 전체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하나의 세계적인 조직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보지 않았다. 그에게 지역공동체는 교회이다. 그는 교회를 성만찬 속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받고 주의 만찬을 기념할때, 오로지 그것의 참된 본성을 실현하는 성만찬적 사회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만찬은 감독을 중심으로 모인 각각의 특수한 공동체안에서 지역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지역적 성만찬에 단지 그의 한부분이 아니라 전체적 그리스도가 현존한다. 그러므로 주일마다 성만찬을 거행할때 각 지역공동체는 완전한 상태의 교회이다.
이그나티우스의 가르침은 동방전통에서 영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방정교회는 아직도 교회를 성만찬적 사회로 생각한다. 교회의 외적인 조직은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내적이고 성례전적인 삶보다는 이차적이다. 그리고 동방정교회는 아직도 교회의 구조에서 지역 공동체의 기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감독이 그의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교회의 중앙에서 예배의 초기에 서 있을때, 지역공동체내에서 감독을 일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의 사상은 동방정교회의 성만찬(Pontifical Liturgy) 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독특한 생동감을 일으킬것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 이외에 또한 교회의 광범위한 일치가 있다. 이 두번째 측면은 또 다른 순교자 감독인 카르타고의 성, 키프리안(258년 사망)의 저술들에 나타나 있다. 키프리안은 모든 감독들이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각자는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감독직은 단일한 전체성(a single whole)이며, 이 단일한 전체성 속에서 각 감독은 충만한 소유권을 향유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것의 번식력이 증대함에 따라 다수의 교회로 멀리 광범위하게 퍼져 나갈지라도, 단일한 전체성이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단지 하나의 교회가 있다.; 많은 감독들이 있지만 단지 하나의 감독직이 있다.

교회의 처음 3세기는 키프리안과 이그나티우스와 같이 그들의 삶을 순교로 마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박해는 종종 지역적 특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지속성에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당국자들이 오랜기간동안 기독교에 커다란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항상 이 위협이 현실이 될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순교사상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영적 전망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지녔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뿐 아니라, 다른 작은 그리스도들의 피 위에 설립된 것으로 보았다. 교회가 확립되고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는 이후의 세기들 속에서도 순교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순교의 사상은 다른 형태를 취하였다. 예를들면 수도사적 삶은 종종 그리스 작가들에 의해 순교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접근은 또한 서방에서도 발견되어 진다. 예를들면 한 켙트족 본문은 -7세기 한 아일랜드인의 설교- 순교의 길을 심미적 삶과 비교하였다.

이제 한 사람에게 하나의 십자가로 여겨지는 세 종류의 순교가 있다. 흰색의 순교,녹색의 순교 그리고 붉은 색의 순교이다. 흰색의 순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녹색의 순교는 순교자가 금식과 노동으로 자신을 그의 악한 열정으로부터 자유케 하거나 혹은 형벌과 회개속에서 고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붉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나 죽음을 견디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동방정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많은 기간동안 붉은 순교의 가능성은 꽤 거리가 멀었고, 녹색과 흰순교의 형태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시대에 동방정교회와 다른 기독교인들이 다시 한번 피의 순교를 경험하도록 불려졌을 때, 또한 몇번 경험하였다.

키프리안이 강조했던 것처럼,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감독들이 그들의 공통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공의회에서 함께 만나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방정교회는 항상 교회의 삶에 있어서 공의회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동방정교회는 공의회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선택한 주요한 기구라 믿으며, 보편 교회를 본질적으로 협의회(conciliar)적 교회로 생각한다. (사실 러시아에서 형용사인 소보르니(soborny)는 ‘보편적(가톨릭)’과 ‘협의회’(conciliar)의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편 이에 상응하는 명사 소보르(sobor)는 ‘교회’와 ‘공의회’(council) 양자를 의미한다.) 교회내에서 독재나 개인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조화와 만장일치가 존재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유롭지만 고립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 믿음, 그리고 성만찬적 교제 속에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에서 조화와 자유로운 만장일치의 사상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참된 공의회에서 한회원이 자의적으로 그의 뜻을 나머지 회원들에게 강요할수 없으나, 다른회원들과의 대화 와 그들 모두가 자유롭게 ‘공동의 마음’을 만들어 내는 방식속에서 그의 뜻을 강요할수 있다. 공의회는 교회의 본질적 본성의 살아있는 구현체이다.

교회사에서 첫번째 공의회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들이 참석한 그 공의회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어느정도 모세의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그들이 마침내 그들의 결정에 도달하였을때, 사도들은 다른 상황들에서는 주제넘을 것으로 보이는 말투로 말하였다. ‘이것은 성령과 우리에게 올바르게 보인다...’(행 15:28) 이후의 공의회들은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위험을 무릎쓰고 말하였다. 소외된 개인은 ‘이것은 성령과 나에게 올바르게 보인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로 모일때, 교회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그들중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함께 주장할수 있었다.

전체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였던 예루살렘 공의회는 하나의 예외적인 모임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때까지 필적할만한 모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프리안 시대까지 로마제국의 특별한 시민지역내에 있는 감독들이 참석하는 지역 공의회들은 흔하게 개최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지역공의회는 통상 지방의 수도에서, 메트로폴리탄이란 이름이 주어지는 그 수도의 감독의 주재 아래 모였다. 제 3세기가 지남에 따라 공의회들은 규모가 확장되었고, 하나가 아니라 여러 시민지역으로부터 온 감독들을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모임들이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같은 제국의 주요한 도시들에서 모이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대도시들의 감독들은 지방적 메트로폴리탄들보다 더 큰 중요성을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동안 이 커다란 교구들의 정확한 지위에 관하여 어떠한 결정도 없었다.

공의회들의 이러한 계속적인 팽창은 3세기에도 그것의 논리적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아직은 (사도적 공의회로부터 떠나) 단지 작거나 좀더 큰 정도의 지역적 공의회들이 있었으며, 전체 기독교 세계로 부터 감독들을 형성하고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보편적’공의회는 없었다. 312년에 교회의 외적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의 군대와 더불어 프랑스를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을때,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태양 앞에 있는 십자가 빛을 보았다. 십자가와 함께 거기에 비문이 있었다. 이 표시 속에서 정복하라(In this sign conquer). 이 환상의 결과 콘스탄틴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첫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날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의 연속은 교회사의 첫번째 주요한 시기를 끝내고, 비잔틴 기독교 제국의 창조로 움직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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