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종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종교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7년 2월 14일 화요일

현존하는 신약성경은 믿을만 한가?

현존하는 신약성경은 믿을만 한가?

현재 신약성경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원본에서 복사된 사본들만 남아있다고 알고 있는데그 사본들이 원래 처음 쓰여진 원본들과 일치한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사실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어떤 반기독교 웹사이트에 보면, “성경의 원본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복사된 것들은 원래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다그래서 신약성경은 믿지 못할 책이다라고 주장하는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이런 잘못된 주장은 고대 문서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무슨 말이냐 하면지금까지 알려진 고대문서들은 거의 모두가 다 원본이 없습니다모두가 다 원본을 베껴 적은 필사본에 의존하고 있습니다그래서 문제는 신약성경의 기록이 다른 고대 문서들의 기록들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더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그리고 신약 성경 필사본끼리 서로 비교해봐서 얼마나 상호 일치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의 신뢰성을 알기 위해서는 고대 희랍 세계에서 전해 내려오는 다른 고대 역사 기록물과 비교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여러분다른 고대 역사 기록물들은 얼마나 풍부한 신뢰성을 갖고 있을까요우리가 고대문서들의 신뢰성을 비교 검토하기 위해서는 그 저작물의 저술 연대최초 필사본의 기록 시기원본과의 시간 간격그리고 현재 보존되고 있는 사본의 갯수 등을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시이저의 갈리아 전쟁(Gallic War)은 B.C. 58년에서 50년 사이에 쓰였는데 아홉 권 또는 열 권의 사본만이 온전히 현존하며가장 오래된 사본이 시이저의 시대보다 900년 후에 복사된 사본입니다. B.C. 59에서 A.D. 17년까지 살았던 리비(Livy)의 로마 역사서들은 20개의 사본이 남아있고 이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에 필사된 것입니다. A.D. 100년경에 쓰여진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역사서 14권은 20개의 사본이 남아있고, B.C. 460년에서 400년까지 생존했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as)의 책은 8편의 원고만 남아있고 최고로 오래된 사본은 A.D. 900년의 것입니다. B.C. 488년에서 428년까지 생존했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따라서투키디데스와 헤로도투스의 저작물들은 약 1,300년 후에 필사된 사본이 현 시대에 남아있습니다여기에 대해서저명한 학자 F. F. 부루스(Bruce)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그들의 역사서들이 원본보다 1,300년 후대의 것이라고 해서 헤로도투스나 투키디데스의 저서들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고전학자들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이렇게 원본과 사본의 시간 차이가 심하게 벌어지는 경우는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보통 일반 역사의 저작물들은 적게는 몇백년에서 많게는 천 몇백년 이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보편적 현상입니다그래도 역사가들은 그 저작물들의 역사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아래의 표를 보면 더욱 자세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자
쓰여진 시기
(원본)
최고(사본
시간 간격
현존 사본 수
시이저(Caesar)
B.C. 100-44
A.D. 900
1000
10
리비(Livy)
B.C.17-A.D. 59


20
플라톤(4부극)
B.C. 427-347
A.D. 900
1200
7
타키투스(연대기)
A.D. 100
A.D. 1100
1000
20(-)
타키투스(소품들)
A.D. 100
A.D. 1000
900
1
플리니 2(역사)
A.D. 61-113
A.D. 850
750
7
투시디드스(역사)
B.C. 460-400
A.D. 900
1300
8
수에토니우스
(시저의 생애)
A.D. 75-160
A.D. 950
800
8
헤로도투스(역사)
B.C. 480-425
A.D. 900
1300
8
호레이스 소포클레스
B.C. 496-406
A.D. 1000
1400
193
루크레티우스
BC. 55또는 53사망

1100
2
카룰루스
B.C. 54
A.D. 1550
1600
3
유리피데스
B.C. 480-406
A.D. 1100
1500
9
데모스테네스
B.C. 383-322
A.D. 1100
1300
200*
아리스토텔레스
B.C. 384-322
A.D. 1100
1400
49^
아리스토텔레스
B.C. 450-385
A.D. 900
1200
10
호머의 일리아드
B.C. 900
B.C.400(일부분)
A.D.100(단편전체)
500
1000
643
신약성경
A.D. 60-90
A.D.130(요한복음 일부분)
A.D.350(신약전체)
40
290
24,000여개
(희랍어 5,664)
(라틴어 10,000)
(기타언어 9,300)
모두 한 사본에서 전해짐
한 작품의 것임
(죠쉬 맥도웰기독교의 역사적 증거들 (서울여운사, 1989), 107-108의 도표 참조)

위의 표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듯이 다른 고대 문서들의 경우 원본과 필사본의 시간차가 엄청납니다또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사본의 수도 너무나 적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전연 다릅니다. 복음서가 대체로 A.D. 60년경에서 90년경 사이에 쓰여 졌다고 보면요한복음의 일부가 기록된 최초의 사본은 130(좀 더 정확히는 100에서 150년 사이)경에 필사된 사본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요한복음이 90년경에 쓰였다면 우리는 불과 몇십년 이내에 필사된 사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또한 복음서의 일부와 사도행전이 포함되어 있는 3세기경의 사본도 있고요바울의 8개 편지 가운데 많은 부분과 히브리서의 일부가 담겨져 있는 200년경의 사본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A.D. 350년에 쓰여진 사본에는 신약성경 전체가 완전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이것은 최초의 원본과 필사된 사본의 시간 간격이 300년 이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합니다이러한 사실은 신약성경이 다른 고대의 문서들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신뢰성을 가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신약성경은 다른 고대 문서들보다도 원본과 필사본의 시간 간격이 엄청나게 짧을 뿐만 아니라손으로 베껴 적은 필사본의 숫자도 실로 엄청납니다희랍어로 된 사본이 5,664라틴어로 된 사본이 약 10,000그리고 그 외 다른 나라의 언어로 쓰여진 사본들이 약 8,000개 정도 됩니다그래서 모두 합쳐서 대략 24,000개 이상의 사본이 현존하고 있습니다이것은 고대의 다른 문서들과 도저히 비교가 안될만한 숫자입니다예를 들어 다른 고대 문서들은 역사의 사막에 흐르는 강의 물줄기가 실오라기같이 가늘다고 한다면신약성경은 그 역사의 강의 물줄기가 한강수처럼 넓고 풍부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부르스(F.F. Bruce) 박사는 세상의 문서들 중에서 신약성경만큼 훌륭한 필사본의 부()를 누리고 있는 고대 문헌이 없다.”고 했습니다사본이 이렇게 풍부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거룩하게 여겼으며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말해 줌과 동시에 신약성경의 신뢰성을 높여줍니다또한풍부한 사본들은 상호 교차 검증을 통해서 어느 것이 원본에 가까운 내용인가를 찾아내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2016년 7월 12일 화요일

교회, 평화로운 공동체?

'평화'를 선언하면 평화가 이뤄지는가?
지난 주말 교회청소년들에게 평화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사들을 훈련하는 워크숍을 했다. 거기서 얘기한 것을 조금 더 정리해 쓰기로 했다. 워크숍의 목적에 맞지 않아서 현장에서 다루지 못한 얘기를 좀 더 해보기 위해서다. 내가 평화학자, 평화교육자임과 동시에 기독교인인 관계로 종교공동체인 교회와 평화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사실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이 이슈에 제법 관심이 있다. 종교인들의 집합체인 교회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뒤섞이는 경험을 시시때때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와 평화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은 기독교적 관심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내 하나의 구성 영역 내지 주체인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평화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당연히 '평화가 이뤄져야 하는 곳'으로 생각한다. 또는 교회가 곧 '평화의 공동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평화를 선언하면 평화는 자동적으로 이뤄지고 교회 안에서 평화는 보장되는가? 다시 말해 구성원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와 그것을 지원하는 평화로운 구조와 문화가 형성되는가? 답은 한 마디로 'NO!'다. 평화는 결코 선언을 통해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언은 자기 합리화를 강화하고 비평화의 상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평화를 왜곡하거나 평화적 성찰과 행동을 도외시하는 심각한 부작용도 낳는다. 평화를 이루는 과정은 지난하고 치열하고, 때로 갈등이 불가피한데 그 과정을 모두 거부해도 된다는 오만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 대부분의 교회는 평화와는 거리가 있다. 평화가 이뤄지려면 폭력이 없어야 하는데 교회의 구조와 문화가 폭력성을 내포하는 근본적 한계가 있음에도 대부분의 교회가 그것을 묵인 또는 부인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변하지 않고 여전히 수직적 구조와 위계질서가 실질적으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집단 중 하나가 교회다. 가장 큰 이유는 종교공동체라는 것, 그리고 공동체의 핵심에 여전히 절대 권한을 행사하는 성직자, 그리고 소수의 결정권자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구조는 외적으로는 선명한 피라미드 구조, 내적으로는 소수의 상층(성직자 집단이나 당회)과 중간층(집사, 여신도회/남신도회 임원 등), 그리고 하층(직책이 없는 평신도, 청년, 청소년 등) 사이에 평등한 관계와 소통이 아니라 힘에 의한 명령과 복종이 이뤄지는 수직문화가 형성돼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일은 거의 다 하향식이다. 그런데 피라미드 구조와 수직문화에 근거한 이런 하향식 접근은 성직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섬겨야 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은혜롭게' 운영하기 위한 핑계로 정당화되고 어떤 문제 제기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구조와 문화는 억압적인 공공기관이나 기업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더 견고하게 유지된다. 어떤 집단의 것이든 이런 구조와 문화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선언'하는 교회의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구조와 문화가 소수의 일방적 결정과 다수의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고, 소수가 공동체를 움직이고 다수를 결정에서 소외시키며, 문제 제기를 '믿음이 없는 행동'으로 비난하며 억압한다면 말이다.

평화로운 공동체, 왜 만들어야 하나?
어떤 기독교인들은 교회는 원래 그렇다고 말한다. 성직자를 중심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움직이고 다수는 '믿음'을 가지고 따라가는 것이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미덕이고 그렇게 해야 교회공동체가 별 탈 없이 유지된다고 말한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폭력적인 구조와 문화로 보여도 문제를 제기할 명분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구조와 문화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고 변화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거나 꾸역꾸역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 자체가 교회 안의 강요와 억압의 폭력을 보여준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와 문화의 폭력성을 규명하고 제거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신앙에 근거해 생각해도 그런 구조와 문화를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수용하는 자신이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 그래서 교회에 가는 것이 힘들고 끊임없이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폭력의 문제를 지적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폭력에 의한 피해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폭력에 희생당하면서 비통해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교회 구조와 문화에 내포된 폭력성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편안하고 밝아야 할 교회공동체 안에서 하찮은 자신의 존재를 억지로 자각하게 되고, 용기를 내어보려다 다시 엎어지고, 결국 신앙에 대한 회의 때문에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고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힘든 사람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나이가 어리고, 직책이 없거나 낮고, 결정권이 없는 상대적 약자들이다. 그들은 세상 갖가지 폭력의 희생자들과 놀랍도록 닮은 모습이다. 약자의 희생 때문에 평화를 얘기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의 평화도 그렇게 약해서 말도 행동도 할 수 없는 사람들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교회와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껄끄러워 한다. 마치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할 집단에게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교회가 '평화'를 선언하면서도 교회를 진정한 평화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제대로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고 당연히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희망은 있다. 교회는 결코 평화를 포기할 수 없다는 당위성이다. 비록 아직 걸맞은 변화와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아도, 그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폭력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도 평화를 얘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앙꼬 없는 찐빵처럼 될 것이고 장기적으로 교회의 건강한 생존이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평화롭지 못한 교회공동체'라는 껄끄러운 문제를 다루는 아주 사적인 이유는 교회 안의 폭력적인 구조와 문화 때문에 힘들어하고 상처를 입는 기독교인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절망감과 무기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에도 같은 일을 겪었다. 사실 나는 그런 문제를 너무나 잘 분석하고 있고 현실적 도전이 있지만 최소한 돌파할 이론과 방법까지 나름 정리해 가지고 있다. 이런 나도 힘든데 문제를 제기하는 자신이 '정상'인지부터 점검해야 하는 그 사람들은 얼마나 절망적이고 막막하겠나. 교회가 진짜 평화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이다. 뭐 더 할 말이 있겠나.

출처: http://peaceconflict.or.kr/187 

2016년 7월 6일 수요일

이슬람 문명은 왜 자유주의 문명에 비해 미개한가?



http://wspaper.org/article/17336?utm_source=dlvr.it&utm_medium=facebook

링크한 노동자연대의 해당글은 전형적인 <이슬람 대 서구제국주의>라는 진부한 진보주의적인 대립구도 하에서 작성된 글이다.

물론 (레닌과 트로츠키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식민지 분할전쟁이 그 본질인 1, 2차 세계대전과 그것의 결과물인 전후세계질서는 그와 같은 대립구도 아래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올랜도 학살사건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이슬람과 서구문명의 충돌 및 대립은 그런 도식 아래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예전에 사무엘 헌팅턴은 9.11 사건을 도화선으로 한 '테러와의 전쟁"을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의 충돌로 진단한 바 있다. 이것은 두고두고 까였고 특히 좌파들이 나서서 비판했다. 확실히 사무엘 헌팅턴의 진단은 잘못된 진단이다. 왜나하면 진짜 충돌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 아닌 <자유주의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양심과 선택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서구식 자유주의 문명은 어디서 왔는가? 기독교에서 왔는가? 아니다. 자유주의  이념은 기독교 문명권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나 기독교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유럽 기독교 문명이 좁아터진 땅덩어리에서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서 서로를 학살한 "30년 전쟁"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학살로 독일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끔찍한 전쟁이었다. 그 끔찍한 참사를 겪은 이후에야 저 야만적인 유럽 오랑캐들 사이에서 정치적 권력을 (종교전쟁이나 일삼는 교회가 아닌) '주권자'에게 몰빵하자는 홉스의 논리와 더불어 그 주권자는 '교회'도 '국왕'도 아닌 '인민'이라는 미국/프랑스 혁명 이후의 로크와 루소식 인민주권설이 도래한 것이다. 그 이후 서구문명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과 더불어 개인의 권리가 종교적 공동체보다 우선한다는 사상이 우여곡절 끝에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근대적 상식은 오히려 유럽인들이 서로 싸움박질이나 쳐 하던 애미 애비도 없는 근본 없는 오랑캐들이었기 때문에 더 일찍 도래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멸밖에 없다는 것을 (쌈박질 밖에 모르던 야만인 오랑캐들답게) 몸으로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유럽놈들과 똑같이 서로 간에 칼질이나 하던 별 볼일 없는 동쪽의 쪽바리들도 비슷한 내전인 '세이난 전쟁'을 겪고서야 비로소 일본인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한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조선인들을 침략할 힘을 갖추었다. 수백 수천년 동안 쪽바리들보다 더 우월한 문화를 갖춘 조선인들은 현재의 전후 일본인들과 그 격차를 지금도 메우지 못하고 있다.

수백 수천년간 있었던 문명의 오랜 우위와 열위는 현재의 사태를 설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한편 저 유럽의 오랑캐들과 달랐던 이슬람 문명의 사정은 어떤가? 이슬람 문명은 평화와 관용의 종교라고 혹자는 말한다. 확실히 그렇다. 20세기 전까지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를 일삼았던 유럽의 야만인 놈들과 달리 이슬람 문명은 그와 같은 대량학살을 피했다. 이슬람에도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만큼 성격이 다른 시아파와 수니파 등 교리상의 차이가 있었지만 이들 종교 내의 파벌의 공존공영을 지역적으로 모색했기 때문이다. 종교가 달라도 상대의 지역적인 지배권을 인정하고 자기 지역의 소수종교도 세금만 내면 거주권을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근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페르시아 반도는 유럽보다 더 선진적이었다. 그러한 여건 속에서 이슬람 문명은 과학기술과 학문의 꽃을 피우고 중세의 문화적 단절을 겪은 유럽 오랑캐놈들에게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유럽 고전문화의 원류를 전달해 주었다.

한편 이슬람 내의 갈등과 테러가 격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물론 서구 제국주의 때문이다. 그들이 이슬람 문명의 지역적인 질서를 어지럽히고 열강의 이해에 따라 공존공생을 추구한 기존의 이슬람 문명의 민족적 생활권을 무시한 채 국경선을 제 멋대로 구획했고 그 덕분에 이슬람 내에서 테러와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그 때문에 터키의 아르메니아 쿠르드 대학살이 유발된 것이다. 그 이후 제멋대로 국경선이 정해진 이슬람 문명은 군사독재 아니면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더 빡센 종교이념에 의해 부족과 종파간 갈등을 억누르고 비로소 평화를 찾았다. 물론 소련이 붕괴한 이후 이슬람은 다시 1, 2차 세계대전 못지 않은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다.

하지만 일단 민족적 경계가 획정되고 주권재민의 원칙이 확립된 이후 쟁점은 더 이상 서구 제국주의와 이슬람 문화의 갈등이 아니다. 나는 노동자연대의 활동가들에게 되묻고 싶다. 과거 제멋대로 식민지 사이의 경계를 분할한 서구 제국주의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다시 지금의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의 국경을 재분할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일단 국가의 경계 내부에서 갈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때 이슬람 문화는 갈등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슬람 인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슬람이 아닌 서구 자유주의 문명이다.

사람들은 이슬람이 전통적으로 평화와 관용의 종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의 관용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말해야 한다. 이슬람이 관용하는 것은 공동체 내부의 종교적/문화적 관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 문명은 유럽과 달리 중세와 근세시기 종교전쟁과 내전 및 제노사이드 같은 야만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군 전쟁에서는 유럽인들이 불관용의 가해자들이었다. 반면 서구 자유주의 문명에서 관용의 대상은 '공동체'가 아닌 '개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이 공동체의 문화를 따르지 않아도 공동체가 개인의 생사여탈권을 쥐는 것(ex명예살인, 투석형, 등등)을 법이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자유주의 문명의 사상은 종교의 차이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극단의 후진성과 야만을 오히려 역사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반면 이슬람 문명은 그 같은 일을 정작 역사적으로 심각하게 겪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서구보다 더 후진적인 것이다.

나는 좌파들이 오히려 이슬람의 문명적 후진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으면 좋겠다. 이것은 절대 이슬람 대상의 인종주의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구약성경에서도 현재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도) 저질렀던 여성에 대한 '명예살인'을 전통적으로 저질러왔다는 증거를 <장화홍련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조선인들이 공동체=가족 내의 여성이 순결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하거나 살해에 동조하는 야만적인 짓을 그만 둔 것은 개인의 권리가 공동체의 종교적/문화적 관습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법으로 천명한 이후부터이다. 아무리 늦어도 6.25 전쟁 이후부터이다.

이슬람 문명은 교리상으로 공동체의 문화적 차이를 전통적으로 보장했을지는 몰라도, 공동체 내부에서 개인의 권리와 선택권을 보장하는 데 인색했다. 물론 근대 이전의 기독교는 더 심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19세기 말까지 마녀사냥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미국에는 아직도 도널드 트럼프 같은 불한당을 지지하는 야만인 오랑캐들이 많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기독교도들간의 피의 내전을 통해 비로소 자유주의와 개인우선의 세속주의를 터득했다.

다시 말해, 개인우선과 세속주의 문화를 수용하지 않는 이슬람은 자유주의 세속국가의 보호 및 관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무슬림은 정교분리의 세속국가의 법을 따르는 무슬림이다. 나쁜 무슬림은 그것을 따르지 않는 무슬림이며 난민이라 해도 수용해서는 안된다. 유럽은 시리아 난민들에게도 그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유럽인들은 지젝의 말대로 위선자들이다. 무슬림들이 그것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은 그 공동체와 가족 내부에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소리이다. 나는 좌파들이 그런 위선적인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가 아들 딸을 때리고, 선생님이 학생을 때리는 것이 인권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들이 이슬람 문화 내지는 전통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관용적이라고 생각된다. 평범한 무슬림 교도라면 당연히 아들 딸을 무슨 이유에서건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평범한 무슬림 교도라면 국가가 가족=공동체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해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저들과 우리 사이의 문명적인 차이이다.

[출처] 이슬람 문명은 왜 자유주의 문명에 비해 미개한가?|작성자 박가분http://blog.naver.com/paxwonik

2014년 9월 5일 금요일

‘동방정교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독교세계의 현재의 분단을 야기한 분열들은 대략 500년 간격으로 세가지 주된 단계들 속에서 일어났다. 분열에 있어서 첫번째 단계는 오늘날 오리엔트 동방정교회들(the Oriental Orthodox Churches)로 알려진 교회들이 기독교의 주된 몸으로부터 나누어졌을때인 5, 6세기에 일어났다. 이 교회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즉 동방교회(the Church of the East:주로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에 있고, 종종 ‘앗시리안’, ‘네스토리안’, ‘칼디안(Chaldean)’, ‘동방 시리안’ 교회로 불린다)와 5 개의 비칼세도니안 교회들(자주 ‘단성론자’라 불린다: 안디옥의 시리아 교회(소위 야곱교회), 인도의 시리아 교회, 이집트의 콥틱교회, 아르메니아와 에디오피아교회) 오늘날 동방교회는(The Church of the East) 비록 한때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550,000만명 정도이다. 비칼세도니안 교인들은 모두 약 27만정도이다.

이 두 그룹들은 종종 함께 ‘작고(lesser) 분리된(seperated)’ 동방교회(Eastern Churches)라 불려진다. 그러나 그들이 가치있는 판단을 행하였음을 나타내는 이러한 명칭들은 가장 잘 회피된다.

복잡하게 동방 기독교인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는 이 책은 비록 때때로 그들을 언급해야 할지라도 직접적으로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주제는 ‘오리엔트(Oriental)’가 아니라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라 불리는 기독교인, 다시말하면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칼 총주교와 연합속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될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동방정교회’를 언급할때, 우리가 지니는 관점은 ‘오리엔트’가 아니라 ‘동방 정교회’이다. 다행히 우리 시대에 이 두 기독교 가족들- 오리엔트와 동방정교회-간의 충만한 화해를 위한 큰 희망들이 있다.

이 첫번째 분열의 결과로서 동방정교회는 동쪽으로는 주로 그리스어를 말하는 세계로 제한되었다. 그후 두번째 분열이 1054년에 형식상으로 일어났다. 이제 기독교인들의 주된 몸은 두단체, 즉 서유럽에서는 로마 교황아래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비잔틴 제국에서는 동방 정교회로 나누어졌다. 동방은 이제 서쪽까지도 제한되었다. 16세기에 로마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일어난 세번째 분열은 여기에서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은 아니다.

문화적이고 교회적인 분열이 어떻게 동시에 일어났는가를 지적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기독교는 선교에 있어서는 보편적(혹은 우주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세 문화들-셈, 그리스, 라틴-과 연합하였다. 첫번째 분열의 결과 시리아의 셈족적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학자들과 저술가들의 번영하는 학교와 더불어 기독교세계의 나머지로부터 벗어났다. 그후 2차 분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은 기독교세계에 있어서 그리스와 라틴전통 사이를 이간시켰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내에서 기본적인 문화적 영향은 그리스의 문화적 영향이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와 라틴교부들이 또한 동방정교회의 풍요함안에 하나의 위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방정교회는 배타적인 그리스 교회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해서는 안된다.

동방정교회는 먼저 동쪽으로 그다음에 서쪽으로 제한되는 동안, 북쪽으로 확장하였다. 863년 슬라브족의 사도들인 성 시릴과 성 메토디우스는 선교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의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여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의 개종으로 인도하였다. 비잔틴의 힘이 쇠약해지자, 북쪽의 이 새로운 교회들은 중요성이 증가하였고, 1453년 터키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모스코바의 지위는 동방세계의 수호자인 비잔틴의 위치를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최근 2세기동안 이러한 상황에 부분적 역전이 있어 왔다. 콘스탄티노플 자체는 아직도 터키인들의 손에 옛 영화의 창백한 그림자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의 동방기독교인들은 1821년 그들의 자유를 다시 얻기 시작했다. 한편 러시아 교회는 20세기에 호전적인 반 기독교 정부의 통치아래 70년동안 고통을 당하였다.

이것이 동방정교회의 외적 발전을 결정 지은 주된 단계들이다. 지리학적으로 동방정교회의 기본적 지역분포는 동부유럽, 러시아 그리고 동부지중해 연안을 따라 놓여있다. 동방정교회는 현재 다음과 같은 자치 혹은 독립적인(autocephalous)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1) 4개의 고대 총대주교관구
                          콘스탄티노플 (6백만명)
                          알렉산드리아 (350,000)
                          안디옥       (750,000)
                          예루살렘     (60,000)

크기에 있어서 상당히 줄었을지라도 역사적 이유들 때문에 이 4개의 교회들은 동방정교회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명예에 있어서 첫번째 위치에 있다. 이 교회들의 수장들은 총대주교(Patriarch)명칭을 지닌다.

                      (2) 9개의 다른 독립적인 교회들
                         러시아       (5000-8500만명)
                         세르비아     (800만명)
                         루마니아     (1700만명)
                         불가리아     (800만명)
                         게오르기아   (500만명)
                         키프러스     (450,000)
                         그리스       (900만명)
                         폴란드       (750.000)
                         알바니아     (210,000, 1944년)

이 9개 교회들중 2개-폴란드와 알바니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독교인의 인구가 완전히 혹은 현저하게 동방정교회인 나라들이다. 그리스와 키프러스의 교회들은 그리스인들이고, 나머지중 네개-러시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폴란드-는 슬라브인들이다. 러시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교회들의 수장들은 총대주교(Pariarch)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게오르기아 교회의 수장은 Catholicos-총대주교로 불려지고, 다른교회들의 수장들은 대주교(Archbishop) 또는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라 불려진다.

(3) 여기에 더하여 대부분의 측면에서 자치적이나 완전한 독립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하는 몇개의 교회들이 있다. 이들은 ‘자치’(autonomous)이나 ‘독립’(autocephalous)이라 불려지지는 않는다.

                         체코슬로바키아(100,000)
                         시나이        (900)
                         핀란드        (52,000)
                         일본          (25,000)
                         중국          (? 10,000-20,000)


(4) 여기에 더하여 서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커다란 동방정교회 디아스포라들이 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이 동방정교회인들의 대부분은 법적으로 총대주교관구(Patriarchates)나 독립(autocephalous)교회들 가운데 하나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의 지역들내에서 자치를 향한 운동이 있다. 특별히 아메리카(1,000,000)에서 독립적인 동방정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발걸음이 취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공식적으로 다른 대다수 동방정교회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는 자치적인 교회들의 하나의 모임(family)이다. 동방정교회는 중앙집권화된 조직이나 전체 몸위에 한사람의 고위성직자가 휘두르는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안에서 일치와 성례전들 속에서 교제라는 이중적 결합에 의해 함께 모인다. 각각의 총대주교관구와 독립교회들은 독립적이지만, 모든 교리의 문제들에 있어서 나머지 교회들과 충분한 동의 가운데 있으며, 그들 모두간에는 원칙적으로 충만한 성례전적 교제 가운데 있다.( 사실 교제에 있어서 특별한 불화는 있으나 -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교회 가운데- 이러한 상황은 예외적이며, 사람들은 특성상 일시적이기를 희망한다.) 동방정교회 안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내의 교황과 동등한 위치를 지닌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에큐메니칼적(보편적) 총대주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동방과 서방 사이의 분열 때문에, 그는 모든 동방정교회 공동체들 가운데 특별한 명예를 지닌 위치를 지녀왔다. 그러나 그는 다른 교회들의 내적인 사건들을 간섭할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그의 위치는 세계 도처에 있는 성공회 연합내에 캔터베리 대주교와 유사하다.

독립된 지역교회들의 지방분권화된 체계는 고도로 유연한 이점을 지니고 있으며, 쉽게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였다. 지역교회들은 만들어질수도 있고, 억압받을수도 있다. 그리고 후에 교회의 전체적인 삶에 약간의 저해요소를 동반하여 다시 회복될수 있다. 과거 동방국가들내에 있는 교회와 국가는 일반적으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이지역교회들은 또한 민족교회들 이었다. 그러나 특정한 독립국가가 자주 자신의 독립적인 교회를 소유하고 있지만, 교회의 분열은 필수적으로 국가의 경계선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4개의 고대 총대주교관구지역은 정치적으로 몇개의 상이한 국가들안에 나누어져 있다. 동방정교회는 지역교회들의 연합체이지, 모든 경우에 민족적 교회들의 연합체는 아니다. 동방정교회는 자신의 근거로서 국가교회의 정치적 원리를 지니지는 않는다.

이미 본것처럼, 다양한 교회들 가운데에는 크기에 있어서 러시아와 시나이 교회 사이에 있는것과 같은 거대한 편차가 있다. 다른 교회들 또한 나이에 있어서 다르다. 몇몇은 사도시대까지 올라가고, 한편 일부는 1세대에 불과한 것들도 있다. 예를들어, 알바니아 교회는 1937년에서야 독립교회가 되었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이라고 주장한다.-색다르고 오리엔탈적인 것이 아니고, 단일한 기독교이다. 인간의 실패와 역사의 사건들 때문에, 동방정교회는 대부분 과거에 특정한 지리적 구역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인 자신들에게 그들의 교회는 지역적 몸들의 집단(a group of local bodies) 이상의 것이 되었다.

 ‘동방정교회(Orthodoxy)’라는 단어는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영광’(혹은 올바른 예배)라는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동방정교회는 우선 놀라운 주장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교회로서 간주하며 올바른 예배로 그를 영화롭게 하는 즉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간주한다. 이러한 주장이 어떻게 이해되며 동방은 그들의 교회에 속하지 않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이책의 목적이다.
     



동방정교회 소개- 서문

무명한것 같으나 유명한.(고린도후서 6장 9절)

 러시아 신학자 알렉시스 콤미아코프는 1846년 한 영국인 친구에게 보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든 개신교도들은 숨어 있는 교황주의자이다.’ ‘ .... 정확한 대수학언어를 사용하면, 모든 서구인들은 단지 하나의 기지수인 a만을 알고 있다.

whether it be preceded by the positive sign+, as with the Romanists, or with the negative-, as with the Protestants, the a remains the same. Now a passage to Orthodoxy seems indeed like an apostasy from the past, from its science, creed, and life.(로마 가톨릭주의자들에 의해서 처럼 긍정적인 표시+(플러스)에 의해 선행되든지, 개신교들에 의해서 처럼 부정적인 표시-(마이너스)에 선행되든지, 이 a는 동일하게 존속한다. 이제 동방정교회에 대한 논쟁은 진실로 과거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과학, 신조 그리고 삶으로부터 하나의 배교처럼 보인다.)

 동방정교회는 새롭고 잘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  콤미아코프가 기지수 a를 이야기 했을때, 그는 자유교회(Free Church:개신교(역자주)), 성공회 혹은 로마 가톨릭이든지 서방기독교인들은 과거에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였다. 그들이 항상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로 똑같이 동일한 사건들, 예를 들면 중세시대의 교황 중심주의와 스콜라주의, 인문주의,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등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의 회원들-그리스인, 러시아인 그리고 그 나머지-뒤에는 매우 상이한 배경들이 놓여져있다. 그들은 서방적 의미의 중세를 알지 못하며,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단지 16, 17세기 서유럽을 변형시킨 문화적 종교적 격변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서방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은 비록 그 대답에 있어서는 불일치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동일한 문제들을 질문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에서는 그 대답들이 다를 뿐만아니라, 그 문제들 자체도 서방처럼 동일하지 않다. 동방정교회인들은 역사를 다른 전망에서 본다. 예를들어 서방의 종교적 논쟁에 대한 동방정교회인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서방에서는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주의와 개신교주의를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인에게 그들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으로 나타난다. 콤미아코프는 교황을 ‘첫번째 개신교도’, ‘독일 합리주의의 아버지’로 부른다. 그리고 그는 동일한 동전으로 인하여 의심할 바 없이 기독교 학자를 괴짜의 로마 카톨릭교인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1847년 옥스포드를 방문하여 한 고교회 성공회원으로부터 ‘어떻게 우리가 개신교주의의 유해한 영향들을 저지할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당신의 로마 가톨릭주의를 떨어버리시요’ 러시아 신학자의 눈에 이 둘은 손을 맞잡고 가고 있었다. 개신교주의는 로마 가톨릭이 낳은 달걀로부터 부화하였기 때문에, 양자는 똑같이 동일한 전제들을 공유하였다.

‘새롭고 잘알려지지 않은 세계’ 콤미아코프가 이런 방식으로 동방을 말한 것은 옳았다. 동방은 교황없는 일종의 로마 가톨릭주의가 아니라, 서방에 있는 종교적 체계와 상당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가까이 서 보는 사람들은 그 안에 다양하지만 이상하게 친밀한 많은 것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항상 믿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분적으로 정당하다. 이러한 말은 동방정교회와 그들의 가르침에 관하여 보다 충분히 배우자 마자 나타난 여러사람들의 반응이다. 900년 이상 동방의 그리스와 서방의 라틴은 각자 자신의 방식을 따라, 서로 떨어져서 착실하게 성장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세계(Christendom)의 처음 세기들 속에서 양측은 공통의 배경을 발견할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와 바질은 동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서방에 속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에서 산 동방정교회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 땅의 민족적 성자들-알반(Alban)과 패트릭(Patrick), 쿠트베르트(Cuthbert)와 베드(Bede), 파리의 제네비에브(Genevieve)와 캔터베리의 어거스틴(Augustine)-을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교회의 구성원들로서 볼수 있다. 모든 유럽은 오늘날 그리스와 러시아가 그런것 처럼 옛날에는 많은 부분이 동방이었다.

콤미아코프가 1846년 그의 편지를 썼을때, 사실상 양측에는 개인적 접촉으로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싼 가격에 구입할수 있는 원고들을 찾아서 1830년대에 레반트를 걸쳐 여행하고 있던 로버트 쿠르존(R. Curzon)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캔터베리의 대주교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황하였다. 상황들은 확실히 그때 이후로 변화하였다. 여행은 비교가 안되게 쉬어졌고, 물리적 장애들은 제거되었다. 그리고 여행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서방세계의 시민은 직접 동방정교회를 관찰하기 위하여 더이상 자신의 나라를 떠날 필요가 없다. 특선품과 경제적 필요로 서방쪽으로 여행하는 그리스인들과 박해에 의해 서방쪽으로 내몰린 슬라브인들은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교회를 가져왔고, 전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 걸쳐 주교관구와 교구망, 신학대학과 수도원들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시적 일치를 위한 강력하고도 전례없는 열망이 현 세대의 수많은 여러 기독교단체들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방정교회내에서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서방 기독교인들이 재연합을 위한 그들의 관심속에서 동방의 적절성을 의식하게 되고, 그것에 관해 더 배우기를 갈망하는 순간에, 그리스-러시아 디아스포라들은 전세계에 흩어졌다. 연합을 위한 논의에서 동방정교회의 기여는 종종 예기치 않게 밝게 빛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정확히 동방은 서방과는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신선한 사고의 지평을 열수가 있고, 오래된 어려움들에 대하여 오랫동안 잊혀진 해결책들을 제안할수 있다.

기독교세계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캔터베리, 제네바 그리고 로마에 제한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을 서방은 결코 결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과거에 이러한 인물들은 광야에서 우는 소리였다. 서방은 이제 더이상 그렇지 않다. 9세기 이상 지속된 소외의 결과들은 빠르게 풀려질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작은 이루어졌다.


2014년 9월 4일 목요일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사이에서


사람은 자기 생존/보호 본능 때문에라도 모험보다는 안전을 택하는 일이 많다. 종교나 교회의 선택에서도, 좀 더 크고 안정된 곳을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할 것이다. 이 때문인지 종교 현황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크기로 따지자면, 대익대 소익소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치 지향이니 그 대세를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대형 할인 매장을 두고 좀 더 비싼 동네 구멍가게를 이용하라는 말도 서민들에겐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선택 속에서 정작 작은 이들은 그 작은 것마저도 잃는다.

큰 종교 단체, 큰 교회를 선택하는 것의 속내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이유를 후려쳐서 그 교회의 구성원들을 싸잡아 비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대형화를 통한 종교의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라는 분들에게는 좀 더 구체적인 선택을 요구할 수 있다고 본다. 비판은 그에 따른 행동의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비판적인 이들은 주류의 대형 교회, 혹은 단체의 조건을 활용하여 전략적인 변화를 모색한다고 하며, 그 안에 남아 있기를 원한다. 그럴 수 있겠다. 그 수고를 응원한다. 다만, 이런 의구심도 가능하다. 그 편만한 대형 교회의 논리와 신학, 행태 안에서 실제로 비판적인 목소리가 힘을 얻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내 주위의 많은 경험을 듣건대, 거의 불가능했다. 대체로, 지배하는 힘은 그 작은 목소리를 자기 내부 다양성의 표지라는 식으로 역이용한다. 그 작은 목소리 자체는 점차 힘을 잃거나, 그 교회에 남아 있는 유일한 비판의 목소리라 자위하면서 자기변명을 삼기도 한다. 너무 단순화해서 부정적으로 그렸을 수도 있다.

대형 교회 혹은 규모 있는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는 아주 많다. 부정적인 것 말고, 긍정적인 여러 사례를 들 수도 있다. 좋은 의미에서 ‘몰아주기를 통한 효율성’이 그 밑을 흐르는 경우가 많다. 큰 교회의 자원에는 고급 인력의 네트워크, 그리고 모아진 힘으로 선한 일을 할 실제 능력이 있다. 그 선한 행동을 헐뜯지 않는다. 다만, 내 편견은 그것들마저 큰 교회의 지배 논리에 종속되어 이용되는 되는데 머문다.

좀 더 비판적인 이들은 이런 교회를 떠난다. 아니, 교회에 진저리를 친지라 교회를 멀리한다. 마음에 종교의 가치를 품고 그리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믿되 교회는 안 다니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매우 어려운 결단이다. 이들의 판단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내 아쉬움은 이것으로는 부족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잃은 종교나 교회는 그 지배적인 논리와 행태를 더욱 강고히 한다. 쓴소리가 빠져나가니 자신의 지배적인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극우 대형 교회들이 신자를 늘리게 된 것은 이런 비판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제거된 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 와중에 정말 믿고 싶은 예수와 복음마저도 그 대형 교회에 의해 조각되어 유포된다.

그렇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그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나? 아니면 떠나야 하나? 이 고민 속에서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잣대로 삼을 이유를 찾는다. 어떤 종교 혹은 교회라도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지향이 주된 곳이라면, 남아 있어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깨끗하게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소수자인 작은 교회에 참여해야 한다.

2014년 8월 31일 일요일

세례자 성 요한의 참수


목을 잘라서 사람을 죽이는 참수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처형 방법입니다.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주고, 당하는 사람을 지독히 경멸하는 방법입니다. 20세기 초에야 거의 없어진 이 흉악한 일이 지금도 극단적인 이슬람 국가 몇 나라에 남아 있습니다.

참수는 우리 역사 안에 크고 깊이 새겨진 상처와 아픔을 되새기게 합니다. 조선 말기의 폭정과 수탈에 시달리다 못해 일어섰던 동학농민전쟁의 전봉준 장군과 지도자들이 참수를 당했습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한국 독립군들의 목이 일본 군인의 무자비한 칼부림과 작두질로 땅에 뒹굴어야 했습니다. 권력자에게는 처형이지만, 힘없는 이가 보기에는 살인입니다. 이 몸서리쳐지는 살인이 세례자 요한에게 일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뱃속 시절부터 예수님의 친구였고, 커서도 깊은 우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꿈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꿈은 다양한 권력으로 사람을 억압하며 짐짓 거룩한 체하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위선과 악행을 회개하며 물 속에 들어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이 세례 사건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이 더욱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에서 계속되는 억압과 불의와 위선을 비판하고 저항하라는 사명을 받고 기름 부음(크리스토스)을 받은 새사람, 작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 사건의 전면에 섰습니다. 불의하고 부도덕한 왕에 맞섰습니다. 그 결과, 그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헤로데 왕은 먹고 놀며 춤추는 연회장에서 내기의 노리갯감으로 세례자 요한의 생명을 앗았습니다. 낙타 털옷과 들꿀로 살던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의 화려한 옷과 기름진 잔칫상이 큰 대조를 이룹니다. 쟁반에 올려진 세례자 요한의 마르고 차가운 얼굴과 낄낄거리며 만족하는 왕의 반지르한 얼굴 차이가 선연합니다.

오늘 우리 세계에도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나누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근본주의 종교 집단은 선량한 사람을 붙잡아다 참수하는 잔혹한 일을 벌입니다. 참수는 아니더라도, 더 교묘한 방식으로 생살(生殺)여탈(與奪)권을 쥐고 흔드는 다양한 권력자들이 우리 일상에 숱합니다. 이들은 가진 지위와 힘으로 약한 사람을 겁주고 경멸하고 모욕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이 여전하다면, 우리는 무례하고 악독한 헤로데 시대를 사는 셈입니다.

이콘이 비추는 대로,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들고 우뚝 선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못된 권력과 힘부림에 맞서라고 촉구합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세례자 요한 참수 축일에 단식하며 그의 죽음을 기리거나, 음식을 먹더라도 칼을 쓰지 않고 둥근 쟁반을 쓰지 않았습니다. 일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세상의 억압과 폭력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선언입니다.

2014년 8월 19일 화요일

교황청, 엘살바도르 군정에 피살된 로메로 대주교 ‘시복’ 추진  

중남미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가톨릭 해방신학의 상징,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복권’되는 것일까. ‘좌파 신부’라는 의혹 때문에 가톨릭 내에서 사회적 영향력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했던 엘살바도르의 전 대주교 로메로가 성인 아랫단계인 ‘복자’로 추대될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8일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나에게 로메로는 ‘하느님의 사람’이다”라면서 “그를 복자로 선포하는 것(시복)을 막던 교리 상의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순교’는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는 경우에 한정돼 왔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목활동 과정에서 숨지는 것도 순교로 인정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힐 것을 신앙교리성에 요청했다. 신앙교리성이 이를 받아들였고, 성인·복자 추대를 관장하는 시성성에서 시복절차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사진 로메로트러스트(www.romerotrust.org.uk)

로메로는 1970년대 엘살바도르를 통치한 우익 군사정권의 인권탄압과 학살에 맞서 싸웠던 인물이다. 1977년 산살바도르 교구의 대주교가 된 뒤 군사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1980년 미사 도중 군정의 사주를 받은 괴한들의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장례식에는 25만명이 모여들었지만 군정의 학살 현장으로 돌변,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다.


로메로가 숨진 뒤 엘살바도르는 12년간 내전을 겪었다. 1993년 그의 삶을 다룬 영화가 개봉돼 전세계에 이름이 알려졌다. 2010년 엘살바도르 정부는 로메로 서거 30주년을 맞아 대주교의 죽음에 과거 정부가 관여했음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정작 바티칸은 그의 이름을 지우기에 급급했다. 로메로의 사회적 발언의 배경이 된 해방신학을 ‘좌파적’이라고 낙인찍어왔기 때문이다. 로메로를 시복해야 한다는 얘기는 몇년 전부터 나왔으나, 로메로가 피살된 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정치적 행동’이었다는 가톨릭 내 보수파들의 주장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했다. 특히 베네딕토16세 전임 교황이 해방신학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프란치스코는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의 피해자들을 도왔던 사람이다. 프란치스코는 지난해 5월 엘살바도르 대통령과 만나 로메로 시복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로메로 시복이 이뤄진다면 군정에 신음하던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가졌던 의미와 사회적 역할을 바티칸이 마침내 인정하는 셈이 된다. BBC방송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빈민을 대변하다가 숨진 인물(로메로)을 왜 바티칸이 그렇게 오랫동안 무시해왔는지 지금도 의아해한다”면서 프란치스코의 시복 언급이 비록 해방신학에 대한 완전한 공인은 아니더라도 신자들의 환영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http://ttalgi21.tistory.com/4833

“이라크든 중국이든, 어디든 가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비행기 회견’

“내 죄와 내 실수를 생각하려 애쓴다. 2~3년이 지나면 나도 아버지의 집으로 떠나지 않겠느냐.”
 
프란치스코 교황이 18일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동승한 기자들로부터 교황의 ‘글로벌한 인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교황은 “하느님의 사람들이 그만큼 관대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내 죄와 내 실수들을 생각하면서, 오만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교황은 슈퍼스타급 인기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요즘에는 “좀 더 자연스럽게” 처신할 수 있게 됐다고 자평하면서 “하지만 최근에는 (그 인기가) 처음으로 조금 두려워졌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인기는) 짧은 시간만 지속될 뿐임을 알기 때문”이라며 “2~3년이 지나면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떠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교황은 올 12월이면 만 78세가 된다. 고령인 교황이 평소 측근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해왔지만, 공개 석상에서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처음이라고 AFP통신은 전했다. 교황은 전임 베네딕토16세가 건강 문제로 물러난 것을 들며 자신도 건강이 받쳐주지 않을 경우 전임자를 따를 의사가 있다고 말해왔다.
 
지난해 3월 즉위 이래 숨가쁜 일정을 소화했던 프란치스코는 지난 5월 중동방문 뒤 처음으로 이틀간 휴식을 취했다. 이후 건강에 대한 우려가 나왔으나 교황청은 “사소한 잔병치레 때문에 쉰 것일 뿐”이라 밝힌 바 있다. 이번에도 교황의 ‘너무 바쁜 스케줄’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교황은 “내 노이로제 중의 하나는 집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휴가 대신 집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것이 내게는 휴식이 된다”고 말했다.



교황은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그랬듯, 돌아가는 길에도 지구촌의 여러 이슈에 대해 언급했다. 이라크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가 나서야 한다며 “그들을 중단시키는 것은 어느 한 나라(미국)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IS를 ‘중단시킨다’는 것의 의미가 “폭격을 하거나 전쟁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외신들은 국제사회, 특히 유엔 중심으로 논의를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교황은 필요하다면 이라크에 가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한국에 올 때 중국 상공을 지나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인사 메시지를 전했던 교황은 “내일이라도 당장 중국에 갈 생각이 있다”며 다시 한번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 또 내년 9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가정대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공식 확인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교황의 방미 계획을 전했다. 교황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워싱턴·뉴욕에도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방문 일정이 정해진 알바니아(올 9월), 스리랑카·필리핀(내년 1월), 미국(내년 9월) 외에 중동의 이슬람국가인 요르단과 일본으로부터도 초대를 받았으나 아직 확정짓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18일 오후(현지시간) 로마에 도착한 교황은 치암피노 공항에서 바티칸으로 가는 길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들러 성모상 앞에 꽃다발을 올렸다. 이 꽃다발은 교황이 서울의 명동성당 미사를 집전하러 가는 길에 7세 소녀에게서 받은 것이다. 교황은 이 소녀에게 “로마로 가져가 성모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고,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이 바로 이 소녀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고 교황청 신문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전했다.


출처: http://ttalgi21.tistory.com/4832

2014년 8월 15일 금요일

복음의 기쁨을 향한 기대 – 교황의 한국 방문


비 내리는 남도 땅. 비에 갇혀 빗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긴다. 휴가 차 이십 여 년 만에 다시 들른 남도 기행 일정을 다듬으며, 천주교 교황 한국 방문 생중계를 본다. 여러 생각이 겹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 훌륭한 분이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줄 안다. 게다가 그의 시선이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향할 때, 그의 입이 권세 부리는 자를 향해 비판을 토로할 때, 그것이 복음의 정신에 따른 언행일 때, 그는 참된 권위를 얻는다. 참된 권위에 따른 권력은 ‘함께하며 보호하는 권력’이다.

한편, 그의 한국 방문(사목적 방문)에 관한 사람의 기대는 참 크다. 한국 사회의 상황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언행에 따라, 세계 최대 종교 지도자, 그것도 중앙집권적 조직의 지도자가 던지는 발언은 여러모로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탓이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 그리고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 교황의 관심과 발언에 기대하는 바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그는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정치적 ‘힘’에 대한 기대의 방향은 대체로 동상이몽이다. 정부는 교황을 국빈 이상의 예우를 갖춰 환대한다. 교황은 바티칸 시국의 원수이니 국빈 자격을 받을 만하다. 이번 방문이 ‘사목적 방문’이라 하더라도 국빈 자격을 잃지 않는다. 정부는 오히려 국빈이 다른 목적으로 온다고 해서, 통상적인 국빈 예우 이상으로 대접할 여유까지 얻은 듯하다. 대통령 박씨가 서울공항까지 영접을 나간 것이 그 예이다. 공교롭게도, 80년 이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을 방문하러 공항까지 나간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이다. (이들의 집권 시절에만 교황이 한국에 방문했다.) 이 영접에는 독재의 피가 흐르는가?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참으로 인간적인 희망과 기대를 품는다. 교황이 지난 1년 반 동안 보여준 행보에서 나온 기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세월호의 비극과 관련하여 ‘교황이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으면 한다’고 기대한다. 이 기대는 이해할 만하고 정말 그래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그 기대가 그의 대중적 인기와 그가 지닌 권력에 기대는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가 그런 기대에 따라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교황이 세월호 가족이 단식하는 곳에 그저 찾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상징적인 영향력이 될 것이다.

이미 교황의 한국 방문 일정에 관하여 여러 염려가 천주교 내부에서도 나왔다. 장애인 방문을 위한 단체에 관한 뒷이야기가 있고, ‘태아 동산’ 방문이라는 천주교 교리의 상징적 시위도 마련됐다. 그가 검소하게 작은 한국산 차를 탄다지만, 나머지 일정은 대체로 헬리콥터로 이동한다고 한다. (추고: 이 계획을 뒤로 미루고 실제로는 KTX로 이동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정작 기대와 희망과 염려가 겹치는 부분은, 교황 방문으로 한국 천주교와 천주교인들이 실제로 어떤 도전과 변화를 가질까 하는 점이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천주교의 성장은 놀랍다. 그러나 천주교 예수회 박문수 신부님의 지적대로, 천주교가 성장하면서 천주교 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 천주교가 하나의 ‘중산층 이상 계층을 위한 문화적 상징 권력’으로 작동하려 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처지와 활동은 이래저래 위축되는 현실이다. ‘부와 권력을 지닌 어떤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을 사제로도 바라보지 않는다고 듣는다.

여전히 교황 방한의 초점은 어떤 권력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향한 하느님의 우선적 선택”을 확인하는 사건이어야 한다. 불편부당한 하느님이 아니라, 약한 자를 편드는 ’하느님의 당파성’을 확인하고 이에 기반을 두어서라야 참다운 화해와 평화가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이 점에서 형제교회의 보잘것없는 사제로서, 그리스도교 신앙 안의 한 작은 형제로서, 그리고 불의와 불신이 분열이 가득한 가련한 한국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교황의 한국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고 축하한다. 그가 보여줄 복음적인 도전을 기대한다. 거기서 우리 모두 나누는 “복음의 기쁨”을 기대한다.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종교] 근본주의 기독교계가 과학을 무시하는 이유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많은 인사들을 본 저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문제점을 나름대로 볼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학교가 해당될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을 위해, 과학과 타 학문을 배우는것을 경시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신학교들은 학생 채우기에도 버겁거든요. 몇몇 대학들은 그냥 점수만 높으면, 3만 불 정도의 높은 장학금을 쥐어주면서 오라고 합니다. 디민과정을 수료할때는 생활비까지 주면서 공부를 시킨다는군요. 하지만 이렇게 양성된 성직자, 학문이라는 것을 한 적이 없는 성직자, 기본적인 정보의 분별 능력조차도 없는 목사가 청빙을 받고, 젊을때부터 부목사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 기독교계나, 아니면 이름없는 교단들이거나 소규모 교단일 경우, 목회학 수업과 성서학 수업만 들어도, 목사 안수를 주는 행위들을 목격했습니다. 단순이 믿음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은 목사가 될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모든 종교계가 사실 그렇듯이, 이들 성직자에 대한, 자연과학이나, 수학, 아니면 철학및 역사 부분에 대해서도 무지한 경향을 보입니다.  역사 부분이나 자연 과학 부분에서 많은 지식을 아는 분이라도, 기독교 특유의 전제로 인해 많은 문제를 빛습니다.

적어도 중세에서는 교회가 지식의 근간이었습니다. (그 시대 내에서는요) 교회 내에서의 과학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도서관부터 시작하여, 모든 지식을 교회가 독점하고 있었다는 거죠. 대학교도 종교의 입김을 짙게 받고 있었고, 그 종교라는게 당시 지식을 후퇴시켰는지 아니면 진보시켰는지는 여러분이 판단해야 할 사안이지만, 그 시대의 교회는 적어도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전당이자, 수많은 기술들이 공유되고 있었던 곳이라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도원과는 달리, 수도원에서는 많은 학문적 연구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교회와는 다른 점이죠.

제 글에서도 나올 말이지만, 적어도 중세교회가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이랑 논쟁을 벌일 당시에는, 천동설이 단지 성경에 기반한 것이 아닌, 학계에서 천동설이 당시 지동설보다 더 많은 과학적 근거가 있었다는 점에서, 중세 교회는 그리 꽉 막힌 집단은 아니었습니다.즉 자칭 계몽주의자나 무신론자들이 "암흑 시대"라고 펌훼할 시기는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오히려 과학이 엄청난 진보를 했음에도 창조과학이 판치는 꼬라지를 두고보고 있는 현대가 더 펌훼할 시기죠.

여튼 기독교는 과학 문명과 많은 충돌을 했습니다. 그런 만큼, 과학 교육은 신학교 내에서 강화되어야 하죠. 종교인으로서 과학을 편견없이 바라보는 것, 그리고 신학교가 적어도 신학생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만큼은 학문에서 신을 배제할수 있어야 합니다. 학문은 신을 떠나서, 만인에게 공평해야 하거든요. 다행이도, 많은 천주교 관련 학교에서는 종교를 배제하고 과학을 가르치더군요. 천주교의 공정함은 역사학도 마찬가지이지요. 꽉막힌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보다는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고학 계열에서도 말이죠.

이러한 풍조는 기독교도로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특수형이상학 부분에서 아직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기독교의 경우, 서구 인문학과 서구 역사학의 중심 논제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인문학이나 역사학 입장에서는 기독교는 절대 무시할수 없는 존재입니다. 앞으로 현대 종교는 과학에 간섭하는 부분이 아니라, 형이상학 중심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기도 합니다.

2014년 6월 18일 수요일

[정교회] 정교회의 시작




제 1장 정교회의 시작

마을의 땅아래 깊숙히 예배당이 있고, 그 입구는 조심스럽게 위장되어 있었다. 이곳은 사제가 은밀히 그 마을을 방문 하였을 때, 성만찬(Liturgy)과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다. 수상한자가 나타나면 이를 알려주기 위해 밖에 남아 있는 파수군을 제외하고, 마을 사람들은 일단 자신들이 경찰의 감시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으면, 전체주민들이 이 예배당에 모였다. 다른때에는 예배가 이동하면서 행해졌다.

부활절 예배는 공식적 국가 기관의 한 방에서 드려졌다. 출입은 내가 나와 나의 작은 딸을 위하여 얻은 특별한 통로로만 가능했다. 약 30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늙은 사제는 내가 결코 잊을수 없는 예배를 집례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를 부드럽게 찬송하였지만, 기쁨으로 충만하였다....내가 이 카타쿰 교회의 예배에서 느꼈던 기쁨은 오늘날 까지도 나에게 살아갈 힘을 제공해 주고 있다.

위의 인용문들은  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러시아에서의 교회의 삶에 관한 두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만약 약간의 변화들이 있어났다면, 그 변화들은 네로나 디오클레티안의 통치 아래에서의 기독교인의 예배에 관한 묘사들로 쉽게 생각될 수 있다. 그 변화들은 19세기에 기독교의 역사가 충만한 집단을 통해 어떻게 전달 되었는가 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조부모들 보다 훨씬 더 초대교회와 가까이에 서 있다. 기독교는 유력한 비기독교사회 속에서 실존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종교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한번 이러한 경향이 도래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 초기에 국가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러나라에서 교회와 국가의 전통적인 동맹은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a religio illicta이다, 즉 정부에 의해 금지되고 박해받는 종교이다. 오늘날 박해는 더 이상 과거의 사실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따른 3백년 보다 1918년과 1948년 사이의 30년 동안 더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특별히 동방정교회의 회원들은 그들 가운데 다수가 아주 최근까지 반-기독교 공산주의 정부의 통치 아래 살아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잘알고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일로 부터 콘스탄틴의 회심에 이르는 기독교 역사의 처음 기간은 오늘날의 동방정교회인들과 특별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2-4)  그래서 기독교회의 역사는 오순절 기간중 예루살렘에서 사도들 위에 성령이 강림함으로, 첫번째 성령강림주일을 시작하였다. 같은날 성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삼천명의 남녀가 세례를 받았고, 예루살렘에서 처음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오래지 않아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들은 성 스테판의 죽음후에 일어난 박해로 흩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제자를 삼으라.’(마 28:19)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은 어디를 가나, 먼저 유대인에게, 또한 곧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러한 사도적 여행에 관한 몇개의 이야기가 성 누가에 의해 사도행전에 기록되었다. 다른 이야기들은 교회의 전통속에 보존되었다. 놀라웁게 짧은 시간안에 작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로마제국의 모든 주요 지역들과 심지어 로마의 국경선을 넘어서 있는 장소들에서도 자라났다.

이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여행한 제국은 특별히 동부에 있는 제국 도시들이었다. 이것은 원시 교회의 행정적 구조를 결정하였다. 기본적 단위는 각 도시에 있는 공동체였으며, 그들 자신의 감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감독을 돕기 위해서 장로들, 사제들 그리고 집사들이 있었다. 도시주변 사람들은 도시의 교회에 의존하였다. 감독, 사제 그리고 집사의 삼중적 교역직을 지닌 이러한 패턴은 이미 1세기 말경 일부의 장소들에서 확립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안디옥의 감독 성, 이그나티우스가 A.D.107년경 순교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고 있을 때에 기록한 7개의 편지에서 볼수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특별히 감독과 성만찬(Eucharist)라는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교회를 계층질서적이고 성례전적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개교회 내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위치에서 주재한다.’ ‘감독없이는 어느누구도 교회와 관계된 그 어떤 일도 할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보편 교회가 존재하듯이, 감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불멸의 약인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감독의 기본적이고 구별되는 직무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를 각지역의 지체가 크고 좀더 포괄적인 전체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하나의 세계적인 조직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보지 않았다. 그에게 지역공동체는 교회이다. 그는 교회를 성만찬 속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받고 주의 만찬을 기념할때, 오로지 그것의 참된 본성을 실현하는 성만찬적 사회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만찬은 감독을 중심으로 모인 각각의 특수한 공동체안에서 지역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지역적 성만찬에 단지 그의 한부분이 아니라 전체적 그리스도가 현존한다. 그러므로 주일마다 성만찬을 거행할때 각 지역공동체는 완전한 상태의 교회이다.
이그나티우스의 가르침은 동방전통에서 영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방정교회는 아직도 교회를 성만찬적 사회로 생각한다. 교회의 외적인 조직은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내적이고 성례전적인 삶보다는 이차적이다. 그리고 동방정교회는 아직도 교회의 구조에서 지역 공동체의 기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감독이 그의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교회의 중앙에서 예배의 초기에 서 있을때, 지역공동체내에서 감독을 일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의 사상은 동방정교회의 성만찬(Pontifical Liturgy) 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독특한 생동감을 일으킬것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 이외에 또한 교회의 광범위한 일치가 있다. 이 두번째 측면은 또 다른 순교자 감독인 카르타고의 성, 키프리안(258년 사망)의 저술들에 나타나 있다. 키프리안은 모든 감독들이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각자는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감독직은 단일한 전체성(a single whole)이며, 이 단일한 전체성 속에서 각 감독은 충만한 소유권을 향유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것의 번식력이 증대함에 따라 다수의 교회로 멀리 광범위하게 퍼져 나갈지라도, 단일한 전체성이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단지 하나의 교회가 있다.; 많은 감독들이 있지만 단지 하나의 감독직이 있다.

교회의 처음 3세기는 키프리안과 이그나티우스와 같이 그들의 삶을 순교로 마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박해는 종종 지역적 특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지속성에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당국자들이 오랜기간동안 기독교에 커다란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의 위협은 항상 존재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항상 이 위협이 현실이 될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순교사상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영적 전망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지녔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뿐 아니라, 다른 작은 그리스도들의 피 위에 설립된 것으로 보았다. 교회가 확립되고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는 이후의 세기들 속에서도 순교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순교의 사상은 다른 형태를 취하였다. 예를들면 수도사적 삶은 종종 그리스 작가들에 의해 순교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접근은 또한 서방에서도 발견되어 진다. 예를들면 한 켙트족 본문은 -7세기 한 아일랜드인의 설교- 순교의 길을 심미적 삶과 비교하였다.

이제 한 사람에게 하나의 십자가로 여겨지는 세 종류의 순교가 있다. 흰색의 순교,녹색의 순교 그리고 붉은 색의 순교이다. 흰색의 순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녹색의 순교는 순교자가 금식과 노동으로 자신을 그의 악한 열정으로부터 자유케 하거나 혹은 형벌과 회개속에서 고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붉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나 죽음을 견디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동방정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많은 기간동안 붉은 순교의 가능성은 꽤 거리가 멀었고, 녹색과 흰순교의 형태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시대에 동방정교회와 다른 기독교인들이 다시 한번 피의 순교를 경험하도록 불려졌을 때, 또한 몇번 경험하였다.

키프리안이 강조했던 것처럼, 하나의 감독직을 공유하고 있는 감독들이 그들의 공통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공의회에서 함께 만나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방정교회는 항상 교회의 삶에 있어서 공의회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동방정교회는 공의회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선택한 주요한 기구라 믿으며, 보편 교회를 본질적으로 협의회(conciliar)적 교회로 생각한다. (사실 러시아에서 형용사인 소보르니(soborny)는 ‘보편적(가톨릭)’과 ‘협의회’(conciliar)의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편 이에 상응하는 명사 소보르(sobor)는 ‘교회’와 ‘공의회’(council) 양자를 의미한다.) 교회내에서 독재나 개인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조화와 만장일치가 존재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유롭지만 고립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 믿음, 그리고 성만찬적 교제 속에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에서 조화와 자유로운 만장일치의 사상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참된 공의회에서 한회원이 자의적으로 그의 뜻을 나머지 회원들에게 강요할수 없으나, 다른회원들과의 대화 와 그들 모두가 자유롭게 ‘공동의 마음’을 만들어 내는 방식속에서 그의 뜻을 강요할수 있다. 공의회는 교회의 본질적 본성의 살아있는 구현체이다.

교회사에서 첫번째 공의회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들이 참석한 그 공의회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어느정도 모세의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그들이 마침내 그들의 결정에 도달하였을때, 사도들은 다른 상황들에서는 주제넘을 것으로 보이는 말투로 말하였다. ‘이것은 성령과 우리에게 올바르게 보인다...’(행 15:28) 이후의 공의회들은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위험을 무릎쓰고 말하였다. 소외된 개인은 ‘이것은 성령과 나에게 올바르게 보인다.’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로 모일때, 교회의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그들중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함께 주장할수 있었다.

전체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였던 예루살렘 공의회는 하나의 예외적인 모임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때까지 필적할만한 모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프리안 시대까지 로마제국의 특별한 시민지역내에 있는 감독들이 참석하는 지역 공의회들은 흔하게 개최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지역공의회는 통상 지방의 수도에서, 메트로폴리탄이란 이름이 주어지는 그 수도의 감독의 주재 아래 모였다. 제 3세기가 지남에 따라 공의회들은 규모가 확장되었고, 하나가 아니라 여러 시민지역으로부터 온 감독들을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모임들이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같은 제국의 주요한 도시들에서 모이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대도시들의 감독들은 지방적 메트로폴리탄들보다 더 큰 중요성을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동안 이 커다란 교구들의 정확한 지위에 관하여 어떠한 결정도 없었다.

공의회들의 이러한 계속적인 팽창은 3세기에도 그것의 논리적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아직은 (사도적 공의회로부터 떠나) 단지 작거나 좀더 큰 정도의 지역적 공의회들이 있었으며, 전체 기독교 세계로 부터 감독들을 형성하고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보편적’공의회는 없었다. 312년에 교회의 외적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의 군대와 더불어 프랑스를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을때,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태양 앞에 있는 십자가 빛을 보았다. 십자가와 함께 거기에 비문이 있었다. 이 표시 속에서 정복하라(In this sign conquer). 이 환상의 결과 콘스탄틴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첫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날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의 연속은 교회사의 첫번째 주요한 시기를 끝내고, 비잔틴 기독교 제국의 창조로 움직이게 하였다.








2014년 6월 10일 화요일

[종교] 도덕이 신 없이 만들어져도, 신이 없다는 결정적 증거가 될수 없는 이유.




신이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신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르쳤나 "도덕"을 가르쳤는가. 많은 회의론자들은 이 부분에서 신이 인간의 도덕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도 가르핀다. 난 이 부분에서도 회의론자들에게 양보할수 있다고본다. 내가 교회를 비판하는 이유도, 교회가 자신의 도덕관념을 신을 이용하여 교묘히 사회에 강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의 "독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기독교의 교의를 가린다는 역설로부터 시작한다. 성경이 텍스트가 19금이든 그것이 설화에 불과하던, 그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그 성경이 주장하는 핵심, 그리고 그 신앙고백에서 그 구원이 나온다. 도덕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신약에서 구약에서 선포된 율법이 보완되거나 지킬 필요가 없어지는 것을 볼수 있다.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고, 오리고기와 닭발을 먹는다. 심지어 내가 먹는 오야코동역시 성경에서는 금지된거다. 엄연히보면. 그러나 그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문화적 측면이다.

내가 좋아하는 손가락 ok사인은 그리스에서는 fu*k *ou라고 한다. 그럼 내가 "Okay"라는 뜻으로 그리스인에게 그 사인을 날리면, 그 그리스인은 내 머리에 당장이라도 칼을 겨누려 할 것이다. 그럼 난 "지인에게 "라가"라고 하지 말라는 예수의 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럼 나는 죄인인가?

결국 이 문제는 회의론자들이 교회의 도덕(사회교리적 부분)을 물어늘어트린다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절대적 핵심은 구원이며, 도덕률은 문화와 민족에 따라, 구분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전하라고 하셨다. 신이 준 도덕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양심이라는 것이 있을뿐. 양심을 우리에게 주시어서 우리 도덕률을 구성하게 하신 것일수도 있다. 즉 신이 도덕을 가리키 건 바로 그 문화를 통해서 생성된 "양심"일 것이다.

성경이 영감을 받아 그 문화에 맞게 쓰여졌듯이 말이다. 자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가톨릭 교회가 왜 도덕률과 교리가 변화하고 변동되는지 알아보자. 즉 이 부분은 "교리"와 "교의"를 착각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이 부분에서 회의론자들과 자유사상가들은 공부가 필요한것 같다. 기독교의 보이는 부분만 보고 공격할 것이 아닌, 이러한 사회교리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바로 "양심"을 중요시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형식적인 도덕을 요구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 의거하여, 가톨릭 교회, 즉 정교회와 (특히)천주교회는 최대한 이 사회적 도덕률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은 우리에게 사회를 주셨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도덕률을 만들게 하셨고, 교회는 최대한 자신들의 전통과 사도들의 전승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 뿐이며, 이 역시 언제든지 변동될수 있는 교리다. 하지만 이 것이, 과연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의 구원관을 방해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톨릭교회는 충분히 오류를 저지르며, 특히 정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정하고 넘어가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사회 교리의 출발점이자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개신교가 사회교리를 무시한다는 것에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로마 총대주교 프란치스코가 "무신론자도 양심에 맟추어 살면 구원받을수 있다"라고 발언한 것은 이 부분에서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다.

바티칸 공의회가 바로 "복음"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수도 있는것이다.

2014년 6월 3일 화요일

[정교회 교리/칼럼] 이단 식별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단 문제는 그 분별의 기준과 방법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쓰여서 사람을 괴롭힙니다.이단이라는 말은 원래 "선택"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하이레시스"에서 나왔습니다. 더 풀어보면 자기 멋대로 선택해서 진리라고 주장하는 가르침과 행동을 일컽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특히나 이단 논쟁이 많고 실제로 이단의 행태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는 한국 교회의 업보입니다. 늘 자신만을 정통이라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하는 일이야말로, 실은 교회 역사에서 나타난 이단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면 대경실색할 것입니다.

정교회의 전통은 다른 사람의 주장과 신앙 행태를 함부로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를 정통이라 주장하며, 구원은 오직 천주교회만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천주교와 다른 점입니다. 정교회는 국제 기독교 총회 가입교단입니다. 정교회는 개신교에 대해서 그들이 비록 전통이 없는 곳이라 할 지라도, 그들이 일치되지 않았다 할 지언정 "교회"가 아니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은 타 교단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며, 그러므로 정교회는 타 교단과 충분히 교류할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정교회는 일치되지 않은 교단이 "교회"인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일치되지 않았다"와 "교회가 아니다" 라는 결론이 다른 것입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위치에서, 그들의 일치를 바라며, "오케스트라"와 같은 협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바로, 자신만이 유일한 교회라며 ,WCC에 참여하지 않는 천주교회와 원칙적으로 다른 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론 이외에도, 성서는 우리에게 이단 식별의 기준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단은 "탐욕을 채우려고 감언이설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합니다 베드로 2:3) 그러니 정통이든 아니든, 해당 교단이 이런 형태를 벌이면 그들은 이단이라고 의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단은 어리석을 논쟁을 하고 족보를 캐거나 말다툼을  하거나 족보를 가지고 싸우는 이들(디도 3:9) 입니다. 사소한 일을 트집잡아 서로 갈라지고 교단을 만듭니다. 장로회 교단만도 서로 갈라진 교파가 250개가 넘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태가 이단의 온상이 되어 "구원파"라는 이단의 종류도 나왔지요.

이단의 구별은 분명합니다. 자신들만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 특별한 가르침을 가지고 선전하는 교단으로, 이들은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집단의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유일무이한 지도자를 세우는 특성이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들과는 멀리하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