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언어학과의 제 2 외국어 요구 조항
(한국 대학의 각종 어문학과 박사 과정도 비슷하지만) 미국 대학의 언어학과 박사 과정을 보면, 대개 '제 2 외국어'와 관련된 요구 조항을 두고 있다 - 학교에 따라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대개의 경우, '제 2 외국어'란, 영어와 자신의 모국어를 제외한 제 3 의 언어를 뜻한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면, 한국어와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 예를 들어, 일본어나 중국어 실력을 검증 받아야 하는데, 그 검증 방법 역시 학교별로 조금씩 차이가 난다:
외국어와 관련된 시험을 쳐서 통과하거나,
요구되는 기간 이상 해당 외국어 관련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거나,
해당 외국어로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실력을 보이거나.
근데, 이 '외국어' 관련 요구 조항은, 근래에 들어 새로이 추가된 그런 조항이 아니라, 실은, 예전의 언어학과 규정에서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구시대의) 유물? 혹은 잔재? 뭐, 그와 같은 조항인데, 그도 그럴듯이, 불과 4-50 년 전만 하더라도, 언어학자들의 주된 업무는, 말 그대로 각종 '언어들(languages)'를 연구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을 기록/분석하는 현장 조사가 그들의 주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국어에 대한 (적당한) 지식/구사력이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었고, 따라서, 제 2 외국어라는 요구 조항이 등장한 것.
하지만, 내 블로그에서도 여러차례 말했듯이, 현대 언어학의 주 관심사는, '현장 조사'를 필요로 하는 '언어들(languages)'가 아니라, 인간이 지닌 '언어 능력(Language Faculty)', 즉, 우리 '밖'의 언어들이 아니라, 우리 '안'의 인지체계에 있다. 물론, 현장 조사를 통해 언어를 기록/분석하는 그런 연구가 사라진 건 아니요, 그런 연구가 무가치하단 말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the point is, 언어 능력을 연구하는 박사생들 역시, 위와 같은 제 2 외국어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도록, 그렇게 제도화 돼 있다는 게 문제란 것이다.
언어학과 내에는 보통 여러 분야의 언어학자들이 공존한다 - '언어 능력'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전통적인 틀 안에서 '언어 자료들'을 기록/분석하는 학자들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쪽에서 불필요하니 없애자고 하더라도, 다른 한 쪽이 꼭 필요하다며 (극구) 반대를 한다면, 함부로 없애기 힘든 게 바로 외국어 관련 조항이다. 해서, 근자에는 아래와 같은 절충안을 두는 학과들도 많이 있다:
해당 외국어와 관련해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할 것.
즉, 해당 외국어를 주제로 하는 페이퍼를 쓰면, 외국어 관련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 현대 언어학의 주 관심사가 '언어' 분석이 아닌 이상, 제 2 외국어 관련 요구 조항은 폐지하는 게 맞다. 학과 내부 사정상 그게 힘들다면, 현장 조사를 전공으로 하는, 따라서, 어느 정도의 외국어 실력이 요구되는, 그런 박사생들에게만 부과되도록 수정은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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