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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1일 금요일

북한 시절 경험했던 ‘나의 평양 과외 체험기’

인터뷰 날짜 : 2012년 11월
장소 : 북한개혁방송 사무실
증언자 : 김청솔(가명/함경북도 청진시 거주)
탈북일자 : 2011년 7월
출처 북한개혁방송 : 홈페이지 바로가기

나는 2008년 청진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평양을 오가며 공부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약 3년 6개월 정도 평양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2005년 10월, 처음 평양에 가게 되었을 때가 중학교 6학년 나이인 17살이었다. 그때는 대학 입학을 위한 공부(과외) 때문에 평양을 가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공개적으로 대입 공부 때문에 평양에 간다고 할 수가 없어서 당시에는 엄마 친구 딸로 위장해서 가게 되었다. 엄마 친구를 따라 평양에 도착했는데, 그 집 세대주가 김책공대 직원이었다. 그를 통해 (과외)선생을 소개받았고, 그 집에서 하숙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 “요새 대학 가려면 지방에서 공부하면 절대로 안 돼”

북한에서는 일반중학교 3학년 때 1고등중학교 시험을 친다. 나는 1고등중학교 시험에 떨어졌는데 그 이유가 나이가 많아서였다. 당시 청진만 특별하게 그런 규정이 있었다. 그때는 1고등중학교를 못 가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방황도 했고 다시는 공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4학년을 보내고 나니까 남는 것이 없었다.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2005년 3월에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도저히 공부할 수가 없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일하고 청소하고 집에 온다. 집에 오면 힘들어서 공부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를 관두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2005년 4월, 해운대학을 졸업한 학생에게 처음 과외를 받았는데, 그는 8월에 군대에 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우리 집으로 찾아와 과외를 해주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모두 수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1고등중학교 교재를 가지고 공부했는데, 해운대학 출신 과외 선생이 1고등중학교 교재를 못 풀더라(1고등중학교 교재는 일반 중학교 교재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다른 과외 선생을 구했다. 새로 구한 선생은 도 1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산대학을 나온 후 은행 직원으로 있는 사람이었는데, 수재인 것은 알겠는데 가르칠 줄은 몰랐다. 수학 문제를 모르겠다고 하면 내가 이해하게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풀이한 것을 보고 하라는 식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 과외 하는데 5만원(15달러) 정도 주었다. 나로서는 시간은 가는데 실력이 늘지 않으니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원산경제대학을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평양에 있는 대학에 가라고 했다. 그러던 중에 우리 엄마가 평양에 있는 친구가 생각이 나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우리가 청진에 살고 있다고 하니까 잘 산다고 생각했는지 대학을 가려면 지방에서 공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며 요새는 다 (평양에) 올라와서 대학을 직접 체험해야지만 붙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2005년 10월 평양으로 가게 된 것이다.

나처럼 대학 입학을 위해 지방에서 평양으로 공부하러 오는 사람이 몇백 명은 될 것이다. 일반중학교는 100명 중 1명 정도, 1고등중학교는 100명 중 2명 정도는 될 것이다. 나 역시도 평양에서 공부할 때 나 같은 학생들을 꽤 많이 보았다.

■ 평양서 하숙하며 과외 시작, 한 달에 100달러 소비

엄마 친구 집은 3칸짜리 집으로 사는 수준이나 환경은 깨끗했다. 한 달에 30달러씩 숙식비를 내고 살았는데 평양에서도 비싼 편에 속한다. 당시 평양에서 하숙한다면 평균 20달러 정도선이었다. 그런데 내가 머물던 집은 먹는 것도 괜찮았고 과외 선생도 소개해주어서 30달러를 달라고 했다. 하숙비에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이 포함되고 기타 간식은 내 돈으로 사 먹었다.

나처럼 공부하러 올라온 사람들은 대체로 생활이 비슷하다. 대게 평양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돈 있고 잘 사는 사람들이다. 하숙비가 20~30달러 정도인데, 그것을 제외하고 돈 쓰는 것을 보면 꽤나 돈이 있는 아이들만 올라오는구나 생각했다.

당시 평양에서 과외공부를 하면서 소비한 액수가 80~100달러는 될 것이다. 30달러는 하숙비를 냈고, 20달러는 과외비에 사용했다. 나머지 30달러는 먹을 것을 사서먹거나 참고서, 책을 사는 데 사용했다. 집에 있다면 간식이나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지만 남의 집에 있으니까 배가 더 고팠던 것 같다.

책이나 참고서, 연필 등을 사는데 만도 한 달에 10달러씩 나갔다. 장마당이나 책방에 가면 대학 입학 참고서가 있다.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시험 문제가 그 범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만 보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장마당에 나온 책 중에 중고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았다. 내가 본 것은 다 새것이었다. 그 책을 합법적으로 내놓고 팔지 못하기 때문에, 학습장 매장에 가서 “참고서 없어요?”하고 물어봐야 했다. 참고서는 한 권에 만원 아래였던 것 같다. 책뿐만 아니라 필기도구, 학습장(노트)도 비싼 편이다.

■ 김책공대 박사원생 기숙사로 찾아가 수학, 물리, 영어 등 배워

대체로 대학교수들은 과외를 잘 안 하고 대학생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박사원생들이 주로 했다. 내가 과외받던 선생도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김책공대 기숙사로 매일 과외를 받으러 다녔다. 박사원들에게 과외받는 것이 어쨌든 비법이기 때문에 김책공대 건물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로 찾아가야 했는데, 내가 수업받던 곳은 여자 박사원생들만 이용하는 기숙사로 5층에 따로 몰아 있었다. 10명 정도가 같이 생활하는데 깨끗한 편이었다.

북한에서 박사원들은 논문을 쓰면 할 일이 없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은 남포 사람으로 논문을 내고 배치만 기다리고 있어서 남는 시간에 과외를 한 것이다. 24세 여자 선생님으로 그녀에게 수학, 물리, 영어, 화학을 과외받았다.

나를 가르친 선생은 석사과정이었지만 북한에서는 다 박사과정이라고 말한다. 거의 8달 동안 매일 가서 배웠는데, 나는 시간이 무한대였기 때문에 오라고 할 때 갔고, 한번 가면 보통 2시간씩 수업을 받았다. 토요일, 일요일도 매일 공부하러 간다고, 했지만 선생이 일이 있거나 명절에는 가지 않았다. 과외비로 20달러를 줬는데, 그녀는 나 말고도 3명 정도 과외를 했기 때문에 부수입이 좋은 편이었다.

박사과정은 3년이다. 박사과정을 하는 이유는 평양에 거주하기 위해서다. 학사 학위를 받아서 평양에 있는 연구소에 배치를 받으면 평양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에 박사과정을 하는 것이다. 내가 과외를 받던 당시 박사원생 여자 10명 모두 지방 사람이었다. 평양 출신 중에도 박사원(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있기야 하겠지만 20~30명 중 1명꼴이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공부 아니면 안 되는 수재들이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박사원을 다닐 이유가 없다.

■ 배식용 500원짜리 빵 팔아 용돈 쓰는 박사원생도 있어

박사원생들은 기숙사에서 스스로 식사를 해결한다. 기숙사는 전기가 잘 들어오는 편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 켜놓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수돗물은 공동위생실에서 받아서 사용했다.

그렇지만 박사원 학생들의 생활상은 악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방이 작다. 5평 남짓한 곳에서 두 명이 함께 밥도 해먹고 공부도 하고 잠도 자야 한다. 방이란 것이 아무것도 없고 방만 있는 식이다. 방이 작아 침대도 하나 놔두고 사용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물 한 번 쓰려고 하면 위생실에서 길어다 사용해야 하고 버릴 때도 가져다 버려야 한다.

김책공대 대학생들 사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잘 사는 집 아이들은 나처럼 하숙하거나 아니면 동거 식으로 집만 빌리고 나머지는 자기가 해서 먹는다고 한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기숙사 생활을 버틸 수가 없다. 돈이 없는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사는데 김책공대와 종합대학은 매일 빵을 준다. 그 빵이 500원인가 하는데, 적은 돈임에도 그것을 먹지 않고 팔아서 용돈 쓰는 학생도 있었다.

2005년에 100달러면 20~30만원 정도였다. 20달러면 5~6만원 정도인데, 박사원생들은 대체로 10만원 이하로 사용한다고 보면 된다. 박사원생들이 기본적으로 생활하려면 30달러만 있으면 되겠지만, 옷도 사 입으려면 50달러는 있어야 한다. 대학생활도 잘 사는 아이들은 괜찮지만, 지방에서 공부 잘해서 오거나 돈이 없는 아이들, 농장에서 운 좋게 폰트(자금)를 받아서 온 학생들은 힘들 수밖에 없다.

나를 가르친 과외 선생은 엄한 편이어서 별다른 대화는 없었는데, 어떤 선생들은 아이들이 공부 안 해 와도 상관 안 하는 사람도 있고, 학생들이 성적이 떨어지거나 하면 속상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평양에서 8개월간 과외공부를 하다가 2006년 6월 다시 청진으로 내려왔다. 왜냐면 대학시험을 치려면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추천을 받으려면 다시 학교에 들어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반중학교에서 대학시험 추천을 받으려면 715최우등상을 받아야 한다.

715최우등상은 김정일이 7월 15일 졸업했는데, 그때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해서 만들어진 상이다. 715최우등상 시험은 11월에 실시하는데, 이 상을 받아야만 대학 추천을 해주었다. 715우등상을 받자면 미리 들어가 명단도 넣어야 하므로 9월에 입학할 예정으로 청진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동창생들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다. 친구들은 91년생이지만 나는 90년생이다. 운이 나빴던 것이, 당시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대학시험을 칠 수 없다는 규정이 생겼다. 때문에 공부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고 중학교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청진에는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손풍금 치는 사람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손풍금과 피아노는 주법이 다르다. 2004년 중학교 2학년 때인가, 평양사람이 와서 말하는 것이 내가 치는 피아노 주법이 틀렸다고 하더라.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피아노를 배우러 평양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는 학생한테 배웠는데 주법 고친다면서 8개월 동안 음계훈련만 했다.

2006년 8월에 대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청진에 왔는데, 시험을 못 친다고 하니까 좀 쉬자 하고 있던 와중에 다시 피아노를 쳐봤다. 그런데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 엄마 친구가 청진에 음악대학을 졸업한 할아버지가 있다고 해서 그 할아버지한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분은 작곡학부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피아노가 서툴고 몇 달 동안 배우니까 기술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 혼자 평양에서 하숙하며 공부한 경험도 있고 또 역시 모든 것은 평양에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2008년 2월, 다시 평양으로 올라왔다.

2007년 평양으로 올라올 때는 숭암으로 전학 가는 것처럼 전학증을 떼었다. 그리고는 전학증을 부치지 않으니까 청진에서는 나를 보지 못하고 숭암에서는 나를 받지 못하니까 내 거처에 대해 관여할 그 무엇이 없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 평양에서 피아노를 배운 것이다.

평양에 올라와 처음에는 엄마 친구 누나네 집에 있었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김원균명칭음악대학 교수한테서 피아노 수업을 두 달 동안(2008년 4월까지) 받았다. 당시에도 30달러씩 내고 하숙을 했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은 2005년에 생긴 것으로, 원래는 ‘김정일음악대학’이라고 간판까지 붙였는데, 김정일이 싫어해서 그랬는지 김원균명칭음악대학으로 바뀌었다.

평양음악무용대학이 있었는데, 이것이 음악대학과 무용대학으로 분리되면서 음악대학은 김원균명칭음악대학이라고 이름 짓고 동대원구역 문수거리에 건물을 새로 지어 만들었다. 무용대학은 본래 음악대학이 있던 자리에서 이름만 평양무용학원으로 바뀌었다. ‘김원균’은 김일성 또는 김정일 찬가를 지은 사람으로 알고 있다.

나를 가르친 사람은 30대 후반 여자 교수로, 피아노를 배울 때는 음악대학에 들어가서 배웠다. 내가 청진에서 피아노 배울 때 과외를 해준 할아버지 선생의 친척이 김원균명칭음악대학 학장이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편지를 써주었다. 이 편지를 가지고 가면 학장이 반가워할 것이고 선생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배우라고 했다.

그래서 편지를 들고 찾아갔는데 학장이 나 같은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그 편지만 주고 결론 없이 나온 상태였다. 다음날 학장을 찾아갔는데 학장이 없었다. 그래서 학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했는데, 어떤 여자가 있길래 그 여자한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음악대학 음악당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었다. 이야기가 잘 되어서 그녀를 통해 과외 선생도 소개받고 음악대학을 드나들 수가 있었다.

원래 김원균명칭음악대학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그녀는 아침 일찍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나를 데리고 들어갔고 나올 때도 같이 나오곤 했다. 그런 것도 모두 보위대하고 짜고 하는 것이다. 당시 그녀에게 한번에 15달러 이상 줬는데, 처음부터 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힘들다며 돈을 달라고 할 때마다 줬고 옷도 달라면 줬다.

그렇게 두 달 정도 과외를 받았는데 당시 내가 음악당에서 피아노를 치면 교수가 와서 봐주는 식이었다. 음악당에는 피아노 전공이 아닌 방에도 피아노가 있었다. 그 방에서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점심 도시락을 싸가며 두 달 동안 피아노를 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문이 났고 그 일로 나를 봐주던 교수가 문제가 될 뻔하여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다.

나를 가르쳤던 교수는 잘 가르치는 편이었고 나 말고 다른 사람 과외 하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교수들이 대학에서는 가르치지 못하지만 퇴근해서 외부에서는 많이 가르친다. 음악대학 교수들도 2~3개씩 과외를 하므로 먹고사는 것은 괜찮다.

북한에서 피아노 과외를 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좀 사는 집에 속한다. 만약에 피아노는 있는데 과외는 안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왜 그러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북한에서 유통되는 피아노는 주로 러시아제와 일본제다. 러시아제는 700~1,200달러, 일본제는 1,800~8,000달러까지 했고 중국산이나 한국산은 없었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 있는 피아노는 일본 ‘야마하’ 피아노였다.

■ 북한 고위층 피아노 과외 선호, 과외비 30∼50달러선

김원균명칭음악대학 교수들은 과외를 많이 한다기보다, 적게 하면서 돈 많이 버는 과외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일단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김원균명칭음악대학으로 갈라지면서 수재 양성 기관으로 급이 높아졌고 특히 피아노는 북한에서는 알아주는 악기다.

예술학원이나 음악당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김정일 현지지도를 동행한 사람들의 손자나 손녀, 무역회사 사장 딸 등 최고위층만 다닌다. 내가 만난 아이들 중 굉장히 높은 간부집 손녀가 있었는데, 예술학원에 다니면서 자기 과목 선생한테 따로 과외도 받았다. 대체로 과외비가 30~50달러로 정해져 있는데, 이들은 선생한테 고맙다며 더 대우해서 쳐주기도 하고 혹은 집을 전부 꾸며준다거나 하므로 교수들도 고위층 과외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 직원들이나 연주자들 생활 수준을 이야기하면 한심하다. 최고 대학이지만 기관에서 주는 것 하나 없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 있는 사람 중에 60~70%는 힘들다고 봐야 한다. 잘 사는 사람들은 교사(과외)해서 잘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당 연주자들 중에 소해금 연주자가 있다. 그런데 소해금 같은 것은 아무도 개인 교습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 부모들이 간부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런 악기 연주자들은 힘들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은 밥을 싸오지 않고 300원짜리 국수가 있는데 그것을 먹는다. 먹어 보지는 못했지만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떻게 맛이 없으면 저렇게까지 없을 수 있나?” “한 달만 먹으면 허약해진다”고들 한다.

악기도 고위층 자제들이 찾는 악기를 전공하면 과외를 많이 해서 잘 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들다. 만약에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돈이 많은 것이다. 과외로 버는 것이 아니더라도 돈이 있는 사람만이 피아노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했고 또 시집도 잘 간다. 또 이런 사람들은 버는 것이 많으니까 옷도 잘 입고 다니고 비싼 물건만 산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뒤처지는 것이 싫으니까 버는 족족 옷 사 입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남는 것도 없고 먹지도 못한다.

대체로 예체능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무역부문 사장 또는 간부집 자제들이다. 평범하게 사는 집 자녀들도 있지만 그런 아이들은 피아노를 전공하기 어렵다. 해금이나 손풍금 정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돈은 없지만, 실력은 뛰어난 사람들이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거나 돈이 많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실력이 있으면 과외를 하겠지만 돈 있는 아이들은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다.

2007년 4월까지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배우다 소문이 나서 그만두고, 그 해 5월부터 12월까지 평양예술학원 피아노 선생 집에 있었다. 그곳에서 지내다가 2009년 3월에(북한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해 청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4월에 평양으로 올라왔다.

평양예술학원 선생 집에 한 달 정도 있었는데, 그녀가 임시 중이어서 많이 예민해 있었다. 그래서 더 머무를 수가 없어 평양의 사촌 언니네 집에다가 800달러짜리 러시아제 피아노를 사다 놓고 평양교향악단 피아노 연주자에게 1주일에 2~3회씩, 2009년 2월까지 과외 수업을 받았다. 평양교향악단 단원은 사촌 언니가 소개해주었는데, 평양교향악단이라고 하면 북한에서는 최고로 쳐준다.

원래 지방 사람이 오면 숙박등록을 해야 하고, 또 피아노를 치면 옆집에서 항의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사촌언니가 인민반장과 잘 상의해서 처리했다. 돈을 얼마나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평양교향악단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창광유치원, 예술학원, 음악대학 피아노 전공을 거쳐서 국립교향악단 연주자가 된 사람들이다. 내가 음악대학에 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예술학원 졸업장이 있어야만 시험을 칠 수가 있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은 31세 여성으로 그때 당시 7~8년 경력을 가지고 각종 행사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과외비로 30달러를 지급했다. 평양교향악단 피아노 연주자들은 대부분 과외를 한다. 바이올린도 과외를 하지만 피아노만큼은 아니다. 악기 중에 과외를 제일 많이 하는 것은 피아노, 손풍금(아코디언), 바이올린 정도다. 다른 악기들은 과외를 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악기 과외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대체로 공부하면서 악기를 더 한다든가 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정도 경제력이 되고 악기가 집에 있으면 80%는 과외를 받는다. 그런데 인기 있는 악기가 아닌 다른 악기들은 전문성을 띄거나 학교에서 음악소조를 하면서 배우기 때문에 과외를 할 필요가 없다. 학교에서도 전과(전공)가 있고 부과(부전공)가 있는데, 만약에 성악을 한다면 전과가 성악이고 부과로 피아노를 하는 식이다. 부과로는 피아노나 손풍금 정도는 해야 한다.

처음 피아노를 배우려고 한 것은 그저 시간이 있어서였는데, 하다 보니까 흥미가 생겼고 그래서 대학도 안 가고 배웠다. 그런데 중국을 오가는 친척이나 사람들을 통해서 중국에서 피아노 배우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청진에서 한 달 동안 피아노를 배웠을 때 과외비가 인민폐 100원(15달러)이었는데, 중국에서는 한 시간에 인민폐 200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북한에서 공부도 할 수 없고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살 바에는 차라리 중국에 가서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피아노만 잘해도 중국에서 피아노 가르치며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 라디오를 듣게 되었고 탈북자들이 한국에 정착해서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에 가면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하고 싶었던 경영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 좋은 대학 가려면 1만 달러 필요, 그것도 운 따라야

평양 시내에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사람들은 100% 과외를 받는다. 평양에서 과외를 받지 않고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지역 대학도 50%는 과외를 받아야 갈 수 있다. 1고등중학교에 다녀도 졸업하기 6개월 전부터는 모두 과외를 받는다. 과외비용은 20~50달러이고 대체로 저녁 시간에 과외가 이루어진다. 선생이 방문하거나 학생이 찾아가는 식이다.

평양 시내 일반중학교 한 학급 학생 수가 40~50명 정도 된다. 그들 중에 2명이 대학 갔다고 하면 잘 가는 것이다. 1고등중학교의 경우에는 40명 중 20명 정도가 대학을 가는데, 만약에 과외를 하지 않고 뇌물로 대학을 간다면 1만 달러 정도는 필요하다.

물론 대학입학 시험을 쳐야지 대학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점수가 낙제 수준이라면 학장이나 그 주변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으면 가기 어렵다. 만약에 나에게 돈이 있다면 대학 학장에게 다가갈 수 있는 주변인들을 찾을 것이다. 주변에 운전사나 다른 사람들에게 줄을 놔서 부탁하는 것이다. 학장이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없서 학장 밑에 관리하는 여러 사람에게 청탁하는 것이다.

제일 좋은 대학에 가려면 1만 달러는 필요할 것인데 좋은 대학이라도 학과마다 차이가 있다. 김책공대는 1만 달러 내고도 못 들어가는 학생도 있고 500달러만으로도 들어가는 학생이 있는 등 운에 달렸다. 과외를 받는 이유는 돈을 적게 들여서 대학에 가기 위함이다. 대학 합격 점수 안에 들기 위해서 대학 시험을 잘 아는 박사 선생이나 교수들한테 붙는 것이다.

평양에서 가장 일러주는 대학은 김책공대다. 예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최고로 쳤는데 최근 들어서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몇 년 전 김정일이 김책공대를 몇 번 방문한 일이 있었다. 김정일이 김책공대를 인재양성 기지라고 치켜세우니까 가고 싶은 대학 1위가 김책공대가 되어버렸다.

북한에서는 보도할 때 어느 사람이 나와서 “이 기계는 어쩌고저쩌고”하며 설명하는 것이 많다. 그런데 그 설명하는 사람에 대해 ‘김책공대 졸업’이라고 자막 처리를 해주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어디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김책공대라고 말한다. 만약에 외국어대학 졸업생과 김책공대 졸업생이 있다면 김책공대 졸업생을 더 쳐주는 분위기다. 만약에 외국어대학 졸업생과 김책공대 졸업생이 있다면 김책공대 졸업생을 더 쳐주는 분위기다.

김책공대나,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대학이 인기가 있고 상업대학은 내림세다. 상업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면 지방에서는 좋은데 평양에서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가기는 어려운 반면 졸업하고 나서는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이다.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학과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법학부와 김책공대 공업경영학부, 정보학과, 재료학부다.

2006년 12월에 평양에 올라갔을 때 그 이듬해 2월에 대학 시험이 있었다. 내가 하숙하던 집에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아이가 있었는데, 당시 김책공대를 시험 봐서 붙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커닝을 해서 합격했다. 시중에 나가면 커닝 자료를 따로 판다. 그런데 커닝 자료만 사면 누구나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혁명시험 시간에 A방 시험감독이 누구인지 간부들은 알 수가 있다. 그러면 그 간부에게 뇌물을 주어 감독으로 들어가는 선생한테 “수험번호 00번 학생 좀 봐주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학생은 대놓고 보고 써도 선생들이 아무 제지를 하지 않는다. 2007년까지만 해도 커닝 하는 것이 굉장했다. 공부 못하던 아이가 시험 보면 1등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커닝 하면 무조건 시험장에서 내보낸다고 해서 커닝 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부정하게 시험을 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할 것이다. 시험지를 바꾸거나 하지는 않지만, 점수를 바꿀 수도 있고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불가능한 것이 없다.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학생들은 공부할 시간이 없다. 기본으로 공부해야 할 것이 전공 외에도 영어, 컴퓨터 등이 있는데 노작 발췌(김일성 또는 김정일의 연설이나 발언을 학습하는 것) 점수가 높게 나와야지 대학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것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한번 하려고 하면 새벽 5시까지 해도 다 못한다. 다른 사람 시켜서 하기도 하지만 글씨체가 비슷해야 하니까 대체로 자기가 직접 한다.

■ 평양시 빈부격차 심해, 중구역은 분위기부터 달라

평양은 빈부격차가 대단히 심하다. 평양 시내 여자들 옷차림을 보면 굉장히 잘 입는다. 내가 평양에서 지냈던 곳은 만경대구역이었는데 중구역에 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만경대구역에서는 10명 중 1명이 옷 잘 입는 사람이라면, 중구역에서는 10명 중 9명이 옷을 잘 입고 다녔다.

평양사람들은 못 먹고 못 써도 입는 것은 잘 입고 다니려는 경향이 강하다. 청진 사람들도 옷을 잘 입는다. 내가 한국에서 입고 다니던 옷보다 더 예쁜 것을 입고 다녔다. 그런 것 보면 잘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옷 입는 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평양 시내 아파트라도 수돗물이 잘 나오는 편이 아니어서 아침이나 저녁에 40분 정도 시간물 나오는 것을 매일매일 받아서 사용했다. 전기는 하루에 5시간 정도 들어왔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전지를 켜놓고 있을 때도 가끔 있었다. 아파트는 중앙난방 시설이 다 되어 있었지만 사용할 수가 없어 구멍탄(연탄)을 이용했다. 평양에서 남한 TV를 본 적은 없었지만, 남한 DVD나 대북라디오를 들었다.

■ 대북 라디오에서 나오는 탈북자 이야기에 신뢰감 갖게 돼

평양에 있을 때 대북라디오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기간에 화폐교환을 했는데, 화폐교환 실정도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평일에는 남남북녀라는 소설도 했고 탈북자 수기도 나왔다. 토요일에는 소설이나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보도가 끝나면 북한 정치에 대해서 알아보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가장 흥미가 있었던 것은 탈북자들이 직접 나와서 읽는 것이었다.

내가 청진에 있을 때 많은 중국인들이 청진을 오가곤 했다. 그때 중국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한국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와서 그런지 남한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100% 신뢰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80%는 옳다고 생각했다.

물론 재미가 있으니까 많이 듣게 되었는데, 거짓말일 수 있다고 생각해도 몇 달 동안 듣다 보면 믿음이 생기게 된다.

라디오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탈북자들 말 중에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나는 원래 조직 생활을 싫어한다. 생활총화 할 때도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이야기에 많이 유혹을 느꼈다.

북한에서는 남한으로 갔다고 하면 반역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라디오를 통해서 말하는 탈북자들은 진짜 자유를 말했고, 그 자유를 당신들보다 앞서서 체험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것인지 모를 것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2015년 7월 9일 목요일

노인복지 논란에 생각난 북한 장마당 김노인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인 겨울이 이젠 제법 자기 본성을 드러내 보인다. 쌀쌀한 칼바람에 목을 움츠리고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을 보느라니 고향의 겨울은 얼만큼 추울까, 어떻게 이 추위를 이길까 찹찹한 생각이 든다.

내가 새롭게 둥지를 튼 대한민국의 겨울은 북한에 비하면 추위라고 말할 수 없다.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은 덜 추워도 함경도, 특히 양강도 날씨는 장난 아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린다.

모든 게 부족한 북한은 겨울이라는 계절이 제일 넘기기 힘든 시련의 시기이다.

아침 일찍 마대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장마당으로 향하는 사람들, 그 장마당에서 온종일 추위와 싸우며 물건을 팔아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회사나 자기직장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북한은 운영되는 직장이 없다보니 장마당이 거의 모든 가정의 생명 줄이고 직장이 되어버렸다.

나의 고향에 있는 ‘농민시장’이라 불리는 장마당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물건을 팔기도 하고 넘겨주기도 하고, 암튼 장마당 안은 크고 작은 소음으로 귀가 멍 할 정도다.

우리 동네에 마누라도 없이 혼자 외롭게 살 있는 칠순을 넘기신 김 씨 성을 가진 노인이 한 분이 있었다.

먹고 살자니 김 씨 노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마당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여기선 혼자 사시는 분들은 임대아파트에 기초 생활비도 보장해주지만, 북한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아침 일찍 담배(데초)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고 장마당에 갔다가, 어두운 밤길에 하늘에 별을 동무해서 집으로 오는 게 노인의 하루였다.

하루 종일 추위에 꽁꽁 얼어가면서 담배를 판돈으로 저녁에 집에서 만든 밀주인 ‘농태기’를 반쯤이 마시고 돌아오는 것이 그의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게 돌아와 봤자 아무도 없는, 컴컴한 빈집이 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와서 석유 등잔 밑에서 신문지를 가위로 오려서 잎초를 담을 고깔봉투를 만들어야 했다. 차곡차곡 봉투에 잎초를 밀어 넣고 밥알로 흩어 안지게 봉합하고, 그렇게 수십 번을 되풀이해야 내일장사 준비가 완료된다.

노인들은 대체로 운신하기 힘드니까 농촌에서 팔려 오는 물건을 도매 받아 판다. 열흘에 한번 열리는 시골장에 직접 찾아다니면 좀 싸게 구입할 수 있겠지만, 나이가 원수라 돌아다닐 수도 없어 시골에서 큰 배낭을 메고 와서 시간이 없어 급히 넘겨주고 가는 사람들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오랜 장사꾼의 노하우가 있는지라 좋은 물건과 좋지 못한 물건을 섞어서 가공만 잘하면 그럭저럭 이익이 난다.

그 노하우는 사실 알고 보면 별게 없다. 햇볕이 제일 좋은 시간에 싼 잎초를 마당 한가운데 펴고 식초와 소다를 섞은 물을 골고루 뿌린다. 시간간격으로 입초가 해를 볼 수 있게 뒤집어주면, 한참 후에 누르끼르한 색깔의 보기 좋은 담배로 변신된다.

하지만 색깔만 좋다고 잘 팔리는 것은 아니다. 장마당의 모든 담배 장사꾼들은 맛보기 담배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제공한다. 한국은 그냥 브랜드 별로 담배맛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냥 곽으로 사면 되지만 북한은 장마당에서 파는 담배가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북한 장마당에도 곽 담배를 파는 장사꾼들이 많다. 그런데 곽 담배는 비싸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사기 힘들다. 그래서 대다수 서민들은 잎초를 찾는다. 집에서 노동신문 종이에 말아 피우는 게 그냥 싸고 최고이기 때문이다.

담배 장사꾼들에겐 다행스러운 점은 북한 남자들은 대다수가 흡연자이기 때문에 담배 수요가 많다는 점이다. 하긴 북한 남자들에게 하루의 고단함을 연기로 날려 보내는 담배라는 위안마저 없다면 그들의 삶은 더욱 고단하고 힘들 것이리라.

장마당에 가면 사람들이 “맛 좀 보기오”하고 한대 청하고, 그러면 장사꾼들은 “아이구, 맛을 보나 마나, 내 담배가 최고지”하면서도 담배를 말아 건네는 것이 아주 일상적인 일이다.

장마당 담배 매대의 모습, 파는 엽초 위에 맛보기로 미리 담배 3대를 노동신문에 말아놓은 것이 눈에 띈다.
돈이 없는 사람은 급할 때 맛만 보는 척 하면서 하루 피울 담배 대여섯 대를 다 피우고 돌아가는 일도 다반사다. 그래도 그런 것 가지고 신경 쓰다간 장사를 못한다. 흡연자가 다음날 담배를 끊는 것은 아니니, 오늘 돈이 없어도 내일은 있을 수도 있으니 그때는 돈을 들고 찾아오지 않을 수가 없다.

장마당 입담배도 천편일률적인 맛은 아니다. 어떤 담배는 독한 것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어떤 담배는 구수함을 장점으로 내세우며, 어떤 담배는 저렴함을 내세운다.

담배를 사는 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1킬로그람씩 사는 사람도 있고 반킬로, 혹은 도시락만한 크기의 나무로 만든 되로도 산다.

북한의 판매는 키로를 떠서 파고 산다. 예전에는 되로 팔았지만, 오랫동안 장마당이 운영되면서 그램이 애매하게 나오는 되보다는 그래도 정확히 무게를 달아 사고 파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2010년에 잎초 1킬로에는 1만원에서~1만 2천정도였다. 이 돈이면 입쌀 4키로, 옥수수쌀은 7키로를 살 수 있다.

4인 가족이 한주일은 죽을 써먹으면서 살 수 있는 양이다. 이러니 담배 값이 결코 싸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담배에 인이 박힌 사람들이 그걸 끊기는 너무 어렵다.

담배도 그냥 담배라고 광고해도 잘 팔리지 않는다. 성천담배, 회령담배, 독한 담배, 연한 담배 이렇게 브랜드와 종류별로 마대를 펴놓고 앉아있어야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한국의 편의점에 한 가지 브랜드의 담배만 놓고 판다면 그 매점에 사람들의 발길이 곧 끊기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런데 북한의 장마당이라고 그냥 마음 놓고 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을 좀 번 사람들은 장마당 안에 매대 사용료를 내고 들어가 마음 놓고 팔 수 있지만, 노인처럼 매대 사용료 한 푼이 아까운 사람들은 그것도 여의치 않다. 그런 사람들은 장 밖에 돚자리 하나 펴놓고 입초를 판다

시장사용료는 파는 상품에 따라 다르다. 중국 전자제품, 공업품, 화장품 매대 등 돈이 좀 나오는 매대는 장세를 비싸게 받는다. 농부산물과 축산물, 국산양말, 빨래방치, 빗자루 등 값이 싼 매대는 비싼 매대의 절반 정도의 장세를 받는다.

장마당 밖에 있는 임시 자리도 장세를 받는데, 보통 장마당 안의 절반 값이다. 하지만 그 자리도 승인되는 날이 있다. 그렇지 않은 날에 판매하다가 단속되면 벌금도내고 경우에 따라 무상몰수도 당할 수 있다.

장마당에서 제일 매점료가 비싼 공업품 매대는 1인당 차지할 수 있는 자리의 너비가 40센치밖에 안된다. 그냥 사람이 빼곡히 앉을 수 있는 너비에 불과하다.

매대가 너무 좁다보니 여름엔 땀이 비오듯 내린다.
그 좁은 공간에서 물건을 빼곡히 내놓고 걸고, 메고 파느라 상인들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차별화된 세련된 노하우로 고객을 끄느라 여념이 없다.

장안은 그야말로 물건을 팔기위한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든 팔아야 살 수 있다는 필사의 에너지가 넘치는 전투장을 방불케 한다.

장마당 밖의 자리는 고정자리가 아니다. 오늘은 먼저 온 사람이 차지하고, 내일은 늦으면 다른 사람에게 떼우고, 단속하다 지친 장마당관리원들이 어떤 날에는 일단 승인을 한다. 그런 날에는 장세를 밖에서도 받는다.

밥 먹구 사는 사람은 다 장사를 하니 장마당에 사람들로 넘쳐나 잘하지 못하면 장세도 벌기 힘들다. 사람들은 장세가 싼 바깥자리에서 쫒기더라도 악을 쓰고 물건을 판다.

그래도 매대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수준이 있는 장사꾼이다. 매대 밖에서 팔다가 ‘인민보안원’(경찰)들의 집중 단속에 걸리면 정말 큰일이다. 보안원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갖은 구실을 대고 단속을 해서 물건을 빼앗는다. 빼앗는 구실도 가지각색이다. 농민시장 같은 경우엔 농산물 외에 다른 것은 못 판다는 것이 가장 큰 구실이다.

또 장마당 밖에서 팔았다는 것도 중요한 구실이다. 보안원들은 이렇게 많이 뺏어야 벌금을 받아 자기 주머니에 챙겨 넣을 수 있다. 벌금 못 무는 사람이라면 물건을 뺏는다. 뺏은 물건은 자기가 믿을 수 있는 다른 장사꾼에게 다시 빼돌려 팔게 하고 또 돈을 챙긴다.

노인이라고 봐주는 일은 없다. 추운 겨울에 돌돌 떨면서 고깔봉투에 잎초를 파느라 온몸이 얼음덩이다. 그래도 단속원이 오면 피했다가 돌아가면 다시 그 자리에 오는 그런 긴장이라도 없으면 그만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아, 그래도 당사자들의 심정은 마음 놓고 앉아만 있어도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진눈깨비 내리는 으스스한 날에 김 씨 노인은 이날만큼은 단속원이 안 오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 놓고 앉았다. 그런데 보안원이라고 노하우가 없을 리 없다. 피하고 쫒는 사람의 심리는 늘 상대방의 약점을 공약하려 한다.

그래도 보안원이라고 진눈까비 내리는 날에 단속을 나서긴 싫다. 하지만 갑자기 돈이 필요한 때가 있다. 가령 보안원의 상급 기관에서 검열을 내려왔는데, 먹이고 뇌물을 주고 하는 등의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다 그러면 보안원의 상관은 다시 “오늘 뭘 좀 채워와”하고 말단 보안원을 내몬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한다.

그날도 그랬는지, 갑자기 골목길 입구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보안원들이 한 무리 밀려왔다. 순간 물건을 팔던 사람들이 갑자기 폭풍을 피하는 듯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때는 필사적이다. 그날의 수입은 물론, 장사밑천, 나아가 가족의 생계까지 걸려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아서 남한에서 방영했다면 참으로 놀라울 것이다.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쓰러질 것만 같던 사람들이 호루라기 소리 하나에 어쩌면 저리도 빠르고 기동성 있는 훈련된 특수부대원들처럼 변할 수 있을지 이해가 되지 않을 듯 하다.

그날 불행히도 김 씨 노인은 피하지 못했다. 손자뻘도 안 되는 어린 보안원이 오더니 다짜고짜 물건을 꾸겨지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정이 먹히지 않을 줄 알면서도 김 씨 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정밖에 없었다. 그래도 장마당에서 늘 그런 사정을 듣고 사는, 얼굴과 귓구멍에 철판 깔린 보안원의 귀에 그 사정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한번만 사정 봐주시요, 안 팔겠습니다. 이걸 다 회수하면 난 뭘 먹구 삽니까.”

“팔지 말라면 말을 들어야지 왜 자꾸 말 안들어.”

이렇게 큰소리칠 때는 뭣인가 고이라는 암시다. 북한은 보안원이 돈을 받으면 후에 신소가 들어가 문제가 제기되였을 때 경우에 따라 정복을 벗을 수도 있다.

물론 술이나 담배 정도를 뇌물 받으면 정상참작이 돼서 자기비판과 검토사업 등 정도로 약하게 처리된다.

북한에서 담배는 곧 돈이다. 돈으로 뇌물 주기 눈치 보이기 때문에 돈보다는 담배 막대기로 뇌물 주는 경우가 태반이다. 북한에서 돈보다 더 잘 통하는 고급담배는 ‘고양이담배’이다. 재작년에 한 갑에 1500원, 한 보루에 1만5000원을 했다.

한 보루 정도 고여야 몇 번은 눈감아주고 지나간다. 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담배도 보루로 통하지만 바스락 장사군은 갑으로 통한다.

그 한 갑 한보루가 돈이고 식량이다, 보통 입초 장사꾼이 단속돼 걸리면 담배 한 갑을 주어야 되는데 그 값은 하루 종일 벌벌 떨며 버는 금액의 전부와도 같다. 뇌물 고이게 되는 날이면 노인의 하루 벌이는 공탕인 것이다.

노인에게 나올 돈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 보안원은 담배 배낭을 나꿔채서 관리실로 들어갔다. 노인도 기를 쓰고 쫒아 들어갔다.

일단 관리실로 들어간 물건은 찾는다고 해도 절반도 못 찾는다는 사실은 장마당에서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저 보안원이 쥔 입초 한 배낭에 생명줄이 다 달려있으니 기를 쓰고 따라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김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린 보안원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일 뿐. 한쪽 배낭끈은 보안원이, 다른 한쪽은 어르신이 쥐고 몸싸움이 벌어진다. 밀고 당기고 강자와 약자간의 눈물나는 싸움….

“이놈의 영감태기. 공무 집행을 방해해, 한번 혼나봐라”

목덜미가 벌거우리하게 상기된 어린 보안원이 씨벌인다. 김 노인은 맥없이 배낭끈에 끌려가면서도, 어린 녀석한테 쌍욕을 먹으면서도 한마디 대꾸도 못한다.

그렇게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있던 배낭이 끝내 실랑이를 이기지 못하고 ‘쫘악’ 하는 소리와 함께 찢겨져 버렸다. 그 순간 배낭안의 담배가 순간에 눈 내리는 땅 위에 휙 뿌려졌다.

“어이구, 내 담배…”

김 노인은 흩어진 담배 위에 허둥지둥 자신의 몸을 덮었다. 구부정한 손으로 담배를 끌어 모으는데 갑자기 검은 구두발이 노인의 곁으로 다가 왔다.

뇌물도 못 받고, 담배도 뺏지 못한 보안원은 악에 차서, 분을 삭일 수 없었는지 담배를 두발로 마구 뭉개 버렸다. 김 노인이 꽁꽁 언 두 팔을 들어 보안원 다리를 끌어안아도 그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에 ‘저리 비켜’ 피줄이 튈 정도로 고아대는 보안원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혀를 찼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보안원의 발길에 채워 맥없이 눈 위에 주저앉았던 김 노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야, 이 왜놈순사보다 더 한 놈아, 일제 때두 지금 같지는 않았어. 네 놈은 부모두 할애비두 없냐, 그걸 팔아서 먹구 사는 게 죄냐, 배급두 안주는데 이 늙은 게 굶어 죽을 순 없지 않느냐.”

“뭐라고, 이 영감태기가 당의 보안원을 일제 순사에 비해? 이런 반동 영감태기 봤나.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교화소에 갖다 놓으면 하루 이틀이면 너 같은 건 죽어. 이게 어디다 대고…”

김 노인의 기세에 잠시 밀려있던 보안원이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침을 튀긴다. 여기서 밀리면 앞으로 장마당에서 자기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대들면 진짜로 교화소에 잡아갔지만, 요즘엔 하도 인민들의 분노가 커서 함부로 잡아가진 않는다.

대신 노인은 분노를 폭발한 대가로 내일부터 장마당에서 집중 요시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삶의 유일한 터전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하긴 유일한 본전인 담배를 다 잃었으니 내일 나오라고 해도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김 노인이 다시 담배장사를 시작하기까지는 몇 달 남짓 걸렸다. 그럭저럭 담배장사를 오래 하다나니, 고정 거레하던 도매군의 물건을 외상으로 팔고, 그렇게 좋아하던 농태기양도 줄였다.

김 노인은 다시 장마당에 나갔다. 보안원에게 다시 짓밟혀도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보안원이 단속해도 그저 묵묵히 항변도 안한다. 해봤댔자 맨발로 바위 차기니까, 소용없음을 이미 경험한 것이다.

지금 북한 어느 장마당에서나 김 노인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장사꾼들, 뺏어야 가족을 먹여 살 수 있는 보안원들…그들은 모두 배급이 없어진 북한 체제가 만들어낸 자화상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추위가 심하다고 한다. 김 노인은 오늘도 장마당에서 떨면서 “이 담배 정말 맛있습니다. 한 봉투만 사세요”라며 꺼멓게 언 손을 내밀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한국에 온 뒤 굶어 돌아가시진 않았을까.

따뜻한 난방이 오는 방에 앉아 눈 내리는 밖을 내다보니 갑자기 김 노인이 생각난다…

2015년 3월 4일 수요일

탈북자 출신 하나원 선생의 수기

수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이 대한민국 입국 후 사회에 첫 발을 내딛기 전까지 생활하는 곳, 하루도 조용한 날 없는 이곳 ‘하나원’은 나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다. 하나원에는 이곳 직원들과 전국 각지에서 초빙된 강사와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나원은 같은 민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이탈주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곳은 체제와 문화가 상이한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우리는 한민족이자 함께 나가야 할 동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나의 일터 「하나원

 이 소중한 집에서 생활지도사로 일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4년째 접어든다. 보람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에 앞만 보고 뛰었지만 간간이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다지 순탄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비록 능력은 미천하지만 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밤낮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우리 북한이탈주민들을 이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아닌 대한민국의 성숙한 시민으로 거듭 태어나 사랑 받을 수 있는 이웃으로 이끌고자 하는 욕심에 한시도 마음 편히 지낸 날이 없었다.

사실 난 꿈에도 내가 이렇게까지 중요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 없는 나를 인정해 준 대한민국 정부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험난한 입국과정에서 생긴 거칠어진 성품과 말못할 상처들만 안고 온 동료들에게 먼저 입국한 선배로서 후배들을 보듬어 주며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과 이탈주민의 상처를 체험해 보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탈주민을 이해시키는 남과 북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경험이 축적되면서 노하우가 쌓이고 그 과정에 나의 인생관도 차츰 변화하였다. 후배들에 대한 실망만큼이나 사랑도 커져갔고 나 자신도 많이 성장한 듯 하다. 생활지도 과정에 잊을 수 없었던 일들을 비롯한 지난 이야기 몇 가지 나누어 볼까한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나는 월 90만원의 월급을 받기로 하고 서울시내 한 모텔에서 첫 직장을 구하였다. 막연하게나마 청소만 하겠지 생각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다양한 일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침대 시트를 갈아야하는 일은 나에게 생소했다.

침대 시트를 서툴게 갈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사장님은 “아니 그 나이에 시트도 제대로 못 갈아요. 이름 석자나 제대로 쓸 줄은 아세요”라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면박을 주더니만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날랜 손동작으로 침대시트를 반듯하게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닌가.

무능한 탈북자라 깔보는 듯한 모멸감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꾹 참고 마음을 다 잡으며 “사장님, 저는 남한에 온지 얼마 안되어 부족하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차근차근 가르쳐 주세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시간만 있으면 짬짬이 시트 가는 연습을 했다. 삼일만에 침대 시트를 갈아 끼우는데 성공했더니 사장님께서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듯 “남한 사람보다 훨씬 낫네요. 눈썰미도 있고 성실히 일해주니 너무 고마워요. 북한 여자들 다 아줌마처럼 성실해요? 다음달부터 월급을 더 드릴 테니 열심히 일해주세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을 보는 순간 ‘내가 인내심을 갖고 참고 잘 견디었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나의 열매는 인내심만큼이나 달콤했다.

일당 4만 5천원을 위하여

나는 일당 4만 5천원을 받기로 계약하고 70대 중반의 괴팍한 성품을 지닌 치매 노인을 간병하였다. 우선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또한 무더운 여름철이라 자주 씻겨주고 옷도 깨끗하게 갈아 입혀야 했다.

그런데 워낙 괴팍한 할머니라 정성을 다해 간병을 해도 “이 가시나야 좀 살살 못 할꼬 등신 같은 가시나야”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아닌가. 오죽하면 주위 사람들마저 “저 할머니 비위 맞출 사람 세상에 어데 있담. 아줌마 그 성격을 어떻게 견디겠다고 할 일 없어 그 일을 하세요? 벌써 아줌마가 다섯 사람 째구먼. 다른 간병인들도 이틀을 못 넘기고 나갔어요”라며 나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는 순간 이 괴팍한 할머니를 어떻게 간병해야 하나 막막했다. 하지만 옆에서 누가 뭐라 말해도 나는 꾹 참고 이겨내리라는 신념이 있었기에 할머니의 온갖 투정과 불평불만을 참아내며 정성을 다해 간병했다.

그렇게 괴팍하던 할머니도 퇴원하는 날 “북한 아줌마 그동안 수고 많았다. 니 내 딸 보다 낫다. 북한 여자들은 다 너같이 성실하고 이뻐? 정말 수고했다”라며 두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할머니는 두툼한 돈 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 눈물이 앞을 가렸다.

무엇보다 “북한 여자들은 다 너같이 성실하고 이뻐?”라는 말 한마디가 왜 그리도 마음을 설레게 하였던지… 나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당당하게 이 이야기를 교육생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야, 네가 뭐야? 너도 같은 탈북잔데

2003년 겨울, 점호하던 중 김미영 교육생의 방순서가 되어 총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만취가 되어 머리를 푹 숙이며 “선생님 안녕하심까? 저 한잔 했슴다”라고 말하며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모습을 보였다.

순간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김미영씨 하나원에서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사실 아시죠. 지금 무슨 행동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네게 “야, 네가 뭐야? 너도 나와 같은 처지의 탈북자인데 탈북자 심정도 몰라 줘”라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그녀에게 할 말을 잃었다. 이미 만취가 된 상태라 같은 방의 동료들에게 “김미영씨가 많이 취했으니 우선 자리에 눕혀주세요”라고 말하고는 방을 나왔다. 점호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김미영씨는 대인관계도 좋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생활한 사람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그래도 여자가 저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오늘 있었던 일은 다음 날 그녀를 만나 따끔한 충고와 함께 다독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이 채 지나지도 않아 또다시 술을 마신 그녀를 엄하게 나무란 탓인지 그녀는 말 한마디도 없이 하나원을 떠났다.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교육생들에 대한 원망과 함께 실망감은 커져만 갔다.

인사 한마디도 없이 떠나버린 후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기억을 잊으려는 순간 그녀에게서 편지가 한 통 왔다.

“선생님, 저에게 실망 많으셨죠. 저도 제 자신이 실망스럽습니다. 짧은 하나원 생활도 제대로 못해 술을 마시며 추태까지 보였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사회에 나오면 자유롭고 주머니에 돈도 있으니 마냥 행복할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원에 있을 때 저에게 하신 말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쓴 편지를 읽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니꼬운 선생님

선생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남녀간의 도리를 지켜가며 성실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실 때면 일부 교육생들은 뒤에서 “흥, 자유 세상에 와서 누가 힘들게 일하겠냐. 돈 많은 사람 만나서 살면 인생이 활짝 펼 텐데…”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셨죠. 저 또한 하나원 시절 비록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였지만 속으로는 너무 사사건건 통제한다며 선생님을 아니꼽게 생각했어요.

선생님 저의 짧은 생각을 용서해 주세요. 하나원 생활동안 선생님과의 만남은 적었지만 하나원을 떠나고 보니 선생님의 위치, 그 자리가 저에게는 너무 소중한 자리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이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라고 교육생들에게 말씀하셨죠. 무엇보다도 일부 이탈주민들의 불성실로 인하여 우리가 아직까지 이방인으로 맴돌고 있다는 느낌에 마음이 아픕니다.

선생님, 무식한 저들과 우리가 같습니까

“우리는 평양에서 내노라 하며 살다 왔는데 정말 무식한 저들과 함께 하나원에 있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백씨가 저들보다도 더 무식해 보입니다. 나보다 배운것 없고, 평양에서 좋은 신분으로 살다 왔다고 해서 서민으로 살다온 동료들을 업신여기는 백씨가 더 가련하고 무식해 보이니 앞으로 그런 말 꼭 삼가 해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다시금 생각합니다.

“선생님 분해 죽겠슴다. 저따위들이 여기까지 와서 행세를 합니까? 글쎄 저보고 꽃제비로 살다온 거지같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 가만있어야 합니까? 분해 죽겠슴다”라며 한 교육생이 찾아와 분을 못 참아 씩씩대며 울분을 토해낸다.

“박씨 그런 말 듣고도 상대와 싸우지 않고 참고 저한데 찾아 온 것이 참 잘하셨어요. 박씨는 그 사람보다 훨씬 현명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하지 않도록 꼭 잘 타이를게요”

“그럼 어쩌겄슴까. 싸움하면 벌점 받고 정착금도 삭감되는데 그것보다도 탈북자들의 이미지가 나빠진다고 선생님께서 말하지 않았슴까? 저 정말 겨우 참았씀다”

이렇게 신분의 차이로 교육생 사이에 갈등이 자주 일어난다. 계급과 신분, 이성, 입국비용, 부부간의 갈등 등 수시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을 다소나마 해소하기 위하여 밤낮없이 뛰어다닌다.

지난날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것을 감수하며 가치 있고 보람있는 열매도 많이 수확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능한 내가 이 사회와 우리 이탈주민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의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그날까지 끝없이 정진할 것이다.

2015년 2월 24일 화요일

목숨건 탈북 후 처음 만난 한국 외교관 여권 없으니 돌아가라고?

러시아에서 탈북해 한국까지 오기까지

이국 땅에 흘린 피

저녁 7시쯤 되었을까. 감방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간수가 나더러 나오라고 한다. 웬일일까. 저녁에는 찾을 수 없는데 ….

나가보니 웬 낯선 조선인 한 명과 러시아인 한 명, 그리고 감옥소 경찰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낯선 조선 사람이 조선말로 나에게 물었다.

『앉으시오. 북조선공민 김영권지요?』

말투를 보니 조선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하바로프스크 경찰서 상급 지도원 김와실리요, 내가 당신을 호송하려고 왔소.』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축인데 말투는 건방지고 어딘가 모르게 틀을 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서 그를 본 기억이 났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하바로프스크 체크도민 러시아 경찰서 수사과 책임지도원이었다. 그는 사할린에서 태어난 조선인 교포다.

들리는 말이 그의 부모들은 남조선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체크도민 경찰서에서 근무하면서 북조선 안전부 사업을 잘 도와주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선물도 받고 명절 때면 초청도 받는다는 말들이, 많이 돌아 벌목장 우리 노동자들은 은근히 그를 피하였다. 바로 그러한 사람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나를 언제 호송하게 됩니까?』

『내일 아침 7시 비행기로 가게 되었어요.』

『그럼 당신에게 두 가지 요구 조건을 제기하겠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뭐요?』

『첫째는 오늘 저녁에 마야를 만나는 것이고, 둘째는 여기 경찰들에게 내가 법에 어긋나는 아무러한 죄도 없다는 것을 당신이 법관으로서 증인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잡혀가면 끝인데 그런 게 필요 있어? 그리고 나는 좀 자야겠어.』

나는 그의 거만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참기 어려웠다.

『당신이 만약 그 요구 조건을 들어 주지 않으면 나를 순조롭게 데리고 가기가 힘들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는 나를 한참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순조롭지 못하면 어쩔 셈이야.』

『뛰던가, 아니면 최후 발악이라도 해야지요.』

『흥, 총으로 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아?』

『알지요, 내가 바라던대로 되지요.』

그러자 그는 나를 무사히 데리고 가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했던지 얼르기 시작했다.

『김선생은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방법은 있지요. 당신이 러시아법을 위반한 것으로 하고 러시아 재판을 받고 러시아 감옥으로 가면 되지요.』

그의 말이 맞았다. 북조선 벌목장에서 그러한 사건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야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하고 카자흐스탄 경찰들이 나를 큰 죄인으로 생각하는데 그들에게 옳은 인식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옥소 경찰들도 역시 나에 대하여 알고 싶었던지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아깝다고 혀를 차고 나와 마야를 두고 사랑을 주제로 한 인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묘사하면서 떠나기 전에 마야를 만나게 하자고 하였다.

이렇게되자 김와실리는 자기가 직접 마야를 데려오겠다고 나갔고 나는 감방으로 돌아와 소지품을 정리하고 칼을 몸에 깊숙이 감추었다. 그 칼은 나와 한 감방에 있던 러시아인이 흘레브(러시아 빵), 칼바스(러시아소시지)를 썰어 먹으려고 몰래 가지고 들어온 것인데 내가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나는 그 칼을 거의 한달 동안 몸에 깊숙이 감추고 있었고 그 러시아인은 칼이 없어진 것으로 하여 은근히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들이 그가 칼을 가지고 감방에 들어 왔다는 것을 알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그 칼을 다시 꺼내어 만지고 또 만졌다. (내가 혹시 실수하면 어쩌나…. 대담해야 해. 북조선으로 절대로 끌려가면 안 돼. 두 손으로 힘껏 찌르고 위로 쭉 올려 째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간수가 와서 소지품을 다 준비해 가지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아침에 떠나는데 왜 벌써 다 준비하고 나 가느냐고 하자 그는 나와 마야를 생각해서 아침까지 사무실 한 칸을 내줄테니 마야와 같이 있으라는 것이었다.

면회실에 들어서자 기다리던 마야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내며 울었다. 나는 쾌활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아니 잡혀가면 죽는다면서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요.』
『운다고 풀릴 문제도 아닌데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우는 것보다 웃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자 마야는 정색해 가지고 모스크바 남조선 대사관에 연락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나는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아침 6시가 되었다. 경찰들이 와서 시간이 되었으니 비행장으로 나가자고 하였다.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김와실리가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야가 가슴 아파할 것 같아 수갑은 채우지 않겠는데 비행장까지 조용히 나갑시다.』

우리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서면서 곧 바로 나가면 현관 출입문이고 양옆으로 긴 복도로 되어 있다. 현관 출입문 앞에는 호송차가 발동을 걸어 놓은 채 세워져 있었다.

나는 1층에 내려서면서 현관 출입문으로가 아니라 옆으로 돌아서 복도로 뚜벅뚜벅 걸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경찰들도 알았던지 부러 말리지 않았다.

약 3~4m 복도를 따라 걸었다. 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하나- 두울- 세엣! 실패다. 온 몸에 식은땀이 쭉 내뱄다. 뒤에서 김와실리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김 선생, 이젠 시간이 되었어요. 늦으면 비행기를 못 타요. 그만하고 나갑시다.』

나는 그냥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시 한 번, 하나- 둘 – 셋! 아 또 실수다. 내가 왜 이럴까. 눈을 딱 감았다. 다시 한 번, 하나- 두울- 셋! 제기랄 또 실수다. 이상한 생각 이 들었던지 김와실리가 급히 따라왔다.

바로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손이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악- 하고 소리쳤다.

퍽- 칼이 뱃가죽을 뚫고 들이 박혔다. 그 순간 또 다시 그 무엇에 놀란 것처럼 아-악 하며 칼을 위로 쭉 올려 당겼다. 어느 정도 뱃가죽이 찢어지면서 칼이 쭉 빠져 나왔다. 비틀거 리다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예상 못 했던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경찰들의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마야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나에게로 다가오다가 내 손에 쥐여져 있는 피묻은 칼을 보더니 악 소리치며 쓰러진 내 위에 푹 고꾸라졌다.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마야를 흔들었다.

『마야, 마야, 아니, 왜 이래.』

마야는 정신이 좀 들었던지 급히 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짓을 했어요. 빨리 말해요. 예, 빨리.』
나는 마야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마야, 고마워.』

너무도 당황한 경찰들은 어쩔바를 모르고 온통 뛰어다닌다. 나는 김와실리를 찾았다. 구급차를 부르려고 달려갔던 김와실리가 급히 달려왔다.

『김와실리, 미안해요. 나는 아무래도 갈 것 같지 못해요. 후 – 그러니 돌아가면 김일성에게- 내- 인사를 전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김일성이 죽으면 한 달 동안 큰 잔치를 차리고 싶어했다고 전해주세요.』

나는 그를 보며 더없이 만족한 사람처럼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생각했던 바와 같이 아프지 않았고 다만 잠자고 싶었다. 구급차가 달려왔고 나는 경찰들과 마야, 의사들과 함께 담가(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태워졌다. 차가 한참 달릴 때 나는 잠들어 버렸다.

누군가 자꾸 흔들어 깨운다. 갑자기 콧마루가 찡해지며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화가 났다. (이것들은 왜 자지 못하게 할까.) 자지 못하게 알코올 솜뭉치를 코에 가져다 댄 것 같았다. 차가 멈춰서고 나는 담가에 실려 내리면서 잠들어 버렸다. 꿈을 꾸었다.

나는 그때 그 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꿈이었다. 처음 내가 탈출하였을 때 하바로프스크에서 나를 도와준 할머니의 집에서 한국방송공사에서 보내온 책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꿈속에 나타났다.

그 책은 미국의 의학박사가 쓴 책을 국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사람이 육체에서 영혼으로, 영혼에서 다시 육체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내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이 영혼에서 아무런 장애도, 구속도 받지 않고 공중으로 떠다니다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들을 내려다보고 웃고 있었다는 책의 내용이었다.

『기분이 참 좋은데. 저 사람들은 바로 그 책에서처럼 수술하고 치료를 하는 거야. 야! 좋구나. 내가 이렇게 좋아하다 죽지 않을까. 응, 그래. 알만해. 책에서 죽은 사람이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다녔다고 했지. 나도 그렇게 안될까?』

나는 그때 꿈속에서 본 책의 내용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꿈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온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을 차린 후에 울고 있는 마야에게 처음으로 한 꿈 이야기였다. 그럼 내가 왜, 무엇 때문에 할복이라는 끔찍한 짓을 하게 되었는지 한 번 돌이켜 보기로 하자.

벌목장 탈출

내가 북조선의 독재정치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여름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자유 외출하여 하바로프스크에 와서 정시하라고 하는 조선인 교포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 그의 집에서 이틀 동안 유숙하면서 그를 통하여 북조선의 김일성은 자기의 본명이 아니며 원래 진짜 김일성은 1930년대 초에 조선 사람들 속에 널리 알려진 공산주의 투사라고 하면서 원래 김일성이 죽은 다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김일성의 이름을 가로채어 자기를 김일성이라고 자처하였으며, 그의 아들 김정일이도 북조선에서 는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고향은 소련의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아무르스크 강변이고 당시 그의 소련 이름을 유라라고 불렀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이 소련에 많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이도 많으신 분이 젊은 사람 앞에서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가?』고 하면서 그 집에서 하룻밤 더 자려고 계획하였던 일정을 바꾸어 여관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 후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나는 북조선은 독재정치이며 인간의 초보적인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 신격화된 사회, 폐쇄화된 사회라는 것을 알았어도 김일성이 자기의 독재를 위해 희생된 투사의 이름까지 가로채어 인민을 기만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라는 것은 몰랐다.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도 북조선에서는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 백두산 일대를 대로천 박물관을 건설하였는데 거기에 소비된 자금은 아마 내 키를 넘을 것이다. 나는 김정일의 고향이 소련의 아무르스크 강변이라는 말을 들은지는 오래됐으나 그것은 남조선에서 북조선을 헐뜯기 위한 악선전이라고 생각했다.

백두산 일대에 가보면 김정일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나의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 같다. 마치도 온실에서 곱게 피어난 한 떨기의 꽃송이가 찬바람 부는 들가에서 당장 시들어 버리듯이….

1991. 8. 23. 일이다. 나는 저녁에 친구들과 함께 3년간 처와 가족을 떠나 징용살이를 하다보니 고이고 쌓인 가족에 대한 달콤한 정, 냉동기와 텔레비전 몇 대를 사가지고 조국에 돌아가 야매 가격으로 팔면 돈벌이가 잘 될 것이라는 야릇한 생각, 친구들 호상간 오는정, 가는정 찰찰 넘치게 술 몇 잔 맛있게 마시고 있었다.

친구들은 술 몇 잔씩 마시고 기분들이 좋아지자 돌아가는 정세를 놓고 말을 주고받았는데 기본은 소련방의 민주화 노선에 따라 변화된 세계적 흐름이었다.

나는 그때 기분도 좋은 김에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이번 8월 군사정변은 세계정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실시되느냐, 아니면 공산독재가 실시되느냐하는 중요한 계기였는데 인민들의 거센 항거로 하여 쿠테타는 실패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개방, 개혁 정치를 해야하며 민주주의가 실시돼야만 한다.』
라고 말했다. 그 날 술판이 끝난 다음 나는 자기의 실수를 크게 느꼈고 어딘가 모르게 무서운 생각에 사로 잡혔다.

아닌게 아니라 다음날 아침에 벌써 당위원회의 호출을 받았다. 나는 당위원회에 가서 아무 말도 한 것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나 당위원회 종합 지도원은 시간을 줄테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돈을 가져다 바치라는 소리나 같았다. 내가 만약 조국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 즉시로 어떻게 처형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시베리아 벌목장에서는 간부들이 돈을 받아먹고 소위 죄인들에 대한 문건을 작성하는데 성한 사람을 정신병자로도 만들고 충실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도 만든다. 나는 많은 생각을 하였으나 비굴하게 돈을 먹이고 살아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때 나는 더 지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단호한 결심을 내렸다. 뛰자. 탈출하자. 그리하여 바로 그날(8월 24일) 체크도민-하바로프스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마치 금방 누군가 뒷덜미를 잡는 듯한 조바심으로 오돌오돌 떨면서….

8월 25일 6시 30분, 하바로크스크 역에 도착한 나는 난처하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탈출할 생각만 하였지 구체적인 목표도 계획도 없이 떠나고 보니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이기만 하였다. 나는 두 시간 가량 역 주변을 돌면서 생각을 정리하였다. 우선 목표를 설정해야 했는데 그 목표란 뚜렷한 것이었다.

남조선, 남조선 밖에 더 갈 곳이 없었다. 남조선으로 정치 망명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이미 고르바쵸프 대통령의 개방 개혁 정치로하여 아득하게 멀어 보이던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간 냉전의 종말은 일시에 태풍마냥 세계를 휩쓸고 마치도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소련의 수도이며 세계적인 대도시인 모스크바에 남조선 대사관이 자리를 척 잡고 있는 때다.

그런데 모스크바는 어떻게 가고 남조선 대사관은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일전에 만나 본 일이 있는 조선인 교포 정시하 할아버지가 남조선에 친척 방문으로 갔다 온 일이 있다고 하던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그 노인의 집으로 찾아 갔다.

당시 노인은 꽃장사를 하면서 살았는데 장마당으로 막 나서려 던 찰나에 내가 들어섰다. 내가 인사를 하자 노인은 들어오라고 하면서도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였다. 아마 전번에(1년 전) 좋지 않은 말 몇 마디 한 것으로 하여 노여움을 사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든 노인의 도움으로 남조선 대사관으로 가야 했다.

『자네 어떻게 되어 다시 왔나?』

나는 양해부터 구했다.

『할아버지, 작년에 있었던 일은 양해하여 주십시오. 저는 할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였고 또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김일성의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여 연구해 보았는데 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정말 북조선의 독재자들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우리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얼마나 무참히 짓밟고 있는가를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조선으로 망명하려고 뛰쳐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새삼스럽게 나를 다시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남조선으로 가면야 좋기야 좋지, 그런데 그게 헐한 일이 아니야. 자네 이제 잡히기만 하면 끝이야. 그리고 북조선에 있는 자네 부모 형제들은 어떻게 하나? 들리는 말이 그들도 모두 잘못된다는데…』

그 말을 들은 나는 내가 그렇게도 고심하던 문제가 현실로 닥쳐왔음을 피부로 느꼈다. 이젠 정말 온 가족 친척들의 불행과 고통의 장본인으로 된 것이다. 열차를 타고 오면서도 줄창 그 생각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는데 처음으로 남에게서 그 말을 직접 듣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할아버지, 됐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성공 할 수 없어요.』

그러자 노인은 『됐네, 진정하라구. 밤잠도 제대로 못자고 쉬지도 못했을텐데 좀 쉬라구. 내 이제 시장에 나가 뭘 좀 알아보고 꽃도 좀 팔고 점심시간이면 돌아오겠네.』하고는 노친을 불러 식사도 시키고 잠자리도 깔아 주라고 당부하고 나갔다.

한국대사관을 찾아가는 길

할아버지는 그 날 오후 2시경에 돌아왔는데 자기가 잘 아는 교포 할머니 한 분이 친척 방문으로 일시 남조선으로 가게 된다고 하며 그 수속 때문에 모스크바 남조선 대사관에 일시 떠난다는 것이다. 그 날 저녁 나는 노인과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갔다.

할머니는 나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북조선 사람들이 불쌍하다느니 김일성이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느니 하면서 한참 말하고 나서, 자기는 모스크바에 못 가고 자기 사위가 자기 여권 수속 때문에 일시 모스크 바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집에서 자고 아침에 사위를 만나 토론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사위(오쎄르게이)를 만났는데 그는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어떻게 가겠느냐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증명서 없이 가자면 열차로 가야 하는데 열차는 7일간 가야 해요. 그런데 나는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낼 수 없어요.』

할머니가 옆에서 어떻게 잘 생각해보고 도와주라고 하자 쎄르게이는 한 가지 방법은 남의 신분증을 빌려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인데 이건 위험하고 또 신분증을 빌리자면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담하게 한 번 해보리라 마음먹고 신분증을 빌리는데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다. 2~3천 루블이 면 된다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미화 100달러와 소련돈 4,500루블이 있었는데 100달러를 내주면서(당시 1달러는 40루블 정도) 신분증도 빌리고 비행기표도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쎄르게이는 내일 당장 떠나자고 하면서 잠간 나갔다 들어오더니 신분증을 빌리려고 했던 친구가 출장가고 없으니 며칠 후에 떠나자고 하였다.

며칠 후인 9월 6일 저녁 쎄르게이는 나를 찾아와 신분증과 비행기표를 다 준비했으니 내일 아침 11시 비행기로 떠나자고 하면서 신분증의 이름과 생년월일 같은 것을 외우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오쎄르게이와 그의 처 오따찌야나와 같이 비행장으로 나갔다. 우리는 혹시 북조선 안전원들이라도 있을까봐 으슥한 곳에서 약 15분가량 기다리는데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실 분들은 개찰구로 나오라는 안내 방송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극도의 긴장으로하여 쿵쿵 울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귓가에까지 울렸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경찰은 신분증을 대조하지도 않고 그냥 통과 시켰다. 후- 하나님! 그때 시간은 하바로프스크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경이었는데 7시간만에 모스크바로 날아오니 모스크바 시간으로 아침 10시 40분이었다.

모스크바 공항에 내린 후 나는 『후- 이젠 됐구나.』하고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날씨는 안개가 꼈는지, 구름이 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음침하고 안개같은 가는 이슬방울들이 쌀쌀한 바람에 실려 온 몸을 감싸며 우수수 떨려났다.

그때 음침한 모스크바의 날씨와는 달리 나의 가슴은 성공하였다는 기쁨으로 가볍게 설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의 앞길에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의 언덕과 간고한 시련의 가시 덤불길이 놓여 있었다. 파란 곡절이 놓여 있는 자기의 운명을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우리는 공항에서 모스크바 안내 약도를 하나 사들고 대사관을 향하여 떠났다. 달리는 차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노라니 생각했던 모스크바와는 너무도 달랐다. 어둠에 잠긴 듯한 음침한 날씨에 건물들도 대체로 구식 건물, 말 한 마디 없이 차를 모는 운전수 역시 무뚝뚝한 표정이다. 그러나 여기가 바로 세계적인 대도시라고 생각하니 잠자고 있는 크나큰 괴물과도 같았다.

한국대사관에서 일어난 일

대사관에 도착한 나는 오쎄르게이에게 대사관의 대사님을 좀 찾아보라고 하였다. 한참 후 오쎄르게이는 대사관 관원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그 관원은 나를 보더니 『안녕하세요, 북한에서 오셨다지요. 이 방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대사님은 안 계시구요. 참사님을 찾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회의실 같은 방을 가리 켰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바로 이 사람이 북한에서 타협할 수 없는 원수로 알고 있던 남조선 사람이로구나. 하 고 생각하니 등골로 식은땀이 쭉 흐르는 것 같았다.

그가 가르키는 방에 들어가니 대사관 가족인 듯한 중년 여인과 처녀 한 명이 포도를 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들은 앉으라고 의자를 권하였다.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한 쪽 벽에는 남조선 대통령 노태우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앞에는 남조선 국기가 세워져 있고 맞은편에는 세계 지도와 책장이 놓여 있었다. 처녀가 우리에게 포도를 먹으라고 권하면서 소련에서 사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처녀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아마 소련에서 산다고 하니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예, 친척 방문으로 남조선에 가려고 여권 수속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처녀는『아이, 한국말을 참 잘하시네요.』하면서 뭔가 더 물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며 키가 후리후리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면서 여자들에게 옆방에 가 있으라고 일렀다. 그들이 나가자 그 사람은 자기는 대사관의 최 선생이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자기 소개를 하였고 나 역시 내소개를 하였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왔느냐는 최선생님의 물음에 남조선으로 망명하려는 나의 결심을 이야기하고 오쎄르게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쎄르게이 말을 듣던 최 선생은 순간에 낯색이 달라지면서 쎄르게이더러 밖에 나가 좀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가 나가자 최 선생은『김 선생이 망명하겠다면서 저 사람을 믿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가. 이런 일은 그런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하면서 미안하지만 몸을 좀 볼 수 있는가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좀 불쾌하였다. 몸수색을 하다니…. 그러나 나는 남북간의 대립상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필요하다면 보십시오.』하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고 절대로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며 말했다.

『지금 북한 대사관에서 자주 도발을 걸어옵니다. 얼마전에도 몸에 녹음기를 감춰가지고 망명을 신청하는 것처럼 하면서 대사관 관원들의 말을 녹음하여 가지고 러시아측에다 대고 한국에서 북한 사람들을 납치해 간다고 제기하여 러시아측 경찰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시베리아 벌목장 노동자 한 명이 남조선으로 가려고 남조선 대사관에 찾아 왔다가 성공 못하고 서구라파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소련 경찰에 체포되어 북조선 대사관에 잡혀갔다.

그는 심문에서 자기는 남조선 대사관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북조선 대사관으로 알고 찾아갔는데 들어가 보니 남조선 대사관이었다면서 남조선 대사관에서는 자기를 남조선으로 망명하라고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남조선 대사관에서 겨우 빠져나와 열차를 탔는데 잘못 타서 헝가리 국경까지 가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북조선 대사관에서는 그를 이용하여 남조선 대사관을 비방 중상하는 데 써먹은 것 같다.

북조선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남조선으로 망명하는 것이다. 북조선 사람들이 탈출하여 러시아에서 사는 것과 남조선으로 가는 것은 그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르게 취급되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처벌한다.

그 외에도 최 선생은 여러 가지 실례를 들면서 북조선 대사관에서는 사람이 없어지면 남조선 대사관 주변에서 감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더러 이름과 생년월일, 간단한 경력을 쓰고 망명하겠다는 전향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이름 김 영권
생년월일 1955. 1. 13
출생지 양강도
사는 곳 양강도
경력
재소임업대표부 제8사업소 노동자
전향서

나는 북조선의 독재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남조선으로 망명할 것을 원하면서 한국 정부에서 받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1991. 9. 7 김 영권

내가 다 쓰고 펜을 놓자 그는 여권은 무슨 여권을 가지고 있는 가고 물었다. 나에게는 여권이 없었다. 북조선에서는 도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최 선생 은 자기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여권이 없이는 못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 귀를 의심했다. 여권이 없이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한 개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관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는가 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재차 물었다.

『아니 그래 갈 수 없습니까?』

『여권이 없이 어떻게 가겠습니까. 다른 서방국가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 러시아는 아직 공산권내에 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은 외교관계를 맺은지 얼마 안 되지만 북한은 40여년간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자칫 잘못 하여 외교상 문제가 크게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정부는 한 민족으로서 당신과 같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김 선생이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너무 안타까와 또 물었다.

『다른 무슨 방법은 없겠습니까?』

『방법은 이제 당신이 우즈백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가서 살면서 잘하면 소련 여권을 만들 수 있는데 소련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서 초청장을 받아 가지고 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출한지 며칠 안되는데 다시 북한으로 돌아 가든가.』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가. 남조선에 못가면 못 갔지 다시 돌아설 사람 같은가.) 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좀 어렵기는 하나 당신이 헝가리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헝가리와 대단히 관계가 좋으므로 여권 없이도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헝가리로 가는 것도 신통치 못한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면 서도 도와주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고, 비로서 한국에로의 망명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뛰쳐나온 나 자신을 뼈저리게 뉘우쳤다.

어디로 갈 것인가?

대사관을 나선 나는 허탈감으로 하여 머리가 띵하고 도무지 무슨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까. 나에게는 갈 데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쎄르게이는 옆에서 보기가 안됐던지 넓고 넓은 소련땅에 살 데는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말고 여관에서 쉬자고 하였다.

엎친데 덮친다고 그날따라 찾아가는 여관마다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온 거리를 헤매며 자리를 찾던 우리는 밤 12시나 되어 개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여관에서 목욕을 한 다음 식사하자고 하였으나 나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침대에 드러누었다. 그러자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꼬냑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속이 답답할 때는 한 잔 하면 좋다고 잡아끌었다. 나는 혼자서 그 한 병을 거의 다 마시다시피 하고 거나하게 취한 김에 정신없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8시경에 일어난 나는 세수를 하고 자리에 드러누었다. 쎄르게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도리어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그러자 쎄르게이는 타쉬켄트나 알마티아에 조선인 교포들이 많은데 거기에 가서 좀 살면서 증명서를 해가지고 남조선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고 물었다. 그러나 그쪽으로 가서 아는 사람도 없이 어떻게 살며 여권은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생각하던 끝에 말했다.

『쎄르게이 아무래도 내친 걸음인데 헝가리로 가는 것이 어때. 국경까지 열차로 가고 국경을 넘을 때는 걸어서 넘으면 되지 않을까?』

쎄르게이는 아무튼 잘 생각해 보고 결심하라고 하며 오늘은 모스크바 구경이나 하고 저녁에 다시 토론하자는 것이다.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크레믈린으로 갔다. 크레믈린 앞거리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파편에 맞은 듯 창유리가 깨지고 타이어가 터지고 충돌하여 찌그러진 승용차들과 대형 짐차들 이 거리에 꽉 차있고 바리케이트를 쌓았던 자리들로 하여 엉망진창이다.

나는 쎄르게이에게 여기가 왜 이렇게 지저분한가고 묻자 여기가 바로 지난 8월 쿠데타가 일어났던 자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새로운 기분으로 그 자리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때 공산당 집권자들이 승리하였다면 세계 정세가 어떻게 변했을까?) 크레믈린을 다 돌아 본 다음 우리는 레닌사적관, 백화점까지 다 돌아보고 여관으로 돌아 왔다.

다음날 아침 나는 헝가리로 가려고 모스크바의 키예브쓰카야 역으로 나왔다. 그때 우리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모스크바-부다페스트행 열차를 타고 키예브까지 가면서 국경 통과 질서를 알아보고 열차에 몸을 숨겨 가지고 국경을 통과할 수 있으면 열차원을 돈으로 매수한다.

다음은 국경까지 열차로 가고 국경을 넘을 때는 산을 외돌아 걸어서 넘으면 되는데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걸어서 국경을 넘는 것은 자신이 있었지만 넘어선 다음이 문제였다. 국경에서 부다페스트까지 가자면 헝가리 돈이나 달러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4,000루블 밖에 없었다. 쎄르게이가 나에게서 받은 100달러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해결 방도가 서지 않았다. 무작정 열차에 올라탄 우리는 열차원을 만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탄 방통은 헝가리로 넘어가지 않고 앞으로부터 3방통 만이 헝가리로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쎄르게이가 자기 혼자서 헝가리행 방통에 가보겠다며 나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와서 안될 것 같다고 머리를 저었다. 열차원은 쎄르게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왜 증명서가 없는가고 오히려 따지려는 것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일은 자꾸만 꼬이기만 했다.

어쩌면 좋은가. 어디로 갈까. 헝가리 국경을 넘다가 잡히면 끝이야. 그렇다고 타슈켄트나 알마타아에 가면 누가 여권도 없는 사람을 믿고 도와주겠는가. 생각할수록 기막힌 노릇이었다.

되든 안되든, 죽든 살든 타슈켄트나 알마타아 밖에 더 갈데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다음날 아침 키에브에서 내려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나는 타슈켄트에 가 보기로 결심하고 열차 시간을 알아보니 다음날 아침 7시에 열차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표를 사고 역에서 자기로 했다.

쎄르게이의 우정

역에서 기다리노라니 또다시 머리가 복잡했다. 이젠 날짜도 퍽 지났음으로 쎄르게이는 빨리 돌아가야 했고, 나는 혼자서 행동해야 했다. 쎄르게이는 내 앞길을 두고 자꾸 걱정하면서 뭐든지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애를 썼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 없어. 괜찮아. 젊은놈이 아무렴 제구실을 못할까. 내 이제 타슈켄트에 가서 기어이 성공하고야 말겠어.』
『꼭 성공하라구. 그리고 조심해야 해. 자네 잡히기만 하면 끝이야. 타슈켄트에 갔다가 정 바쁜 일이 생기면 나에게 전보를 보내라고.』

그는 주소를 적어주고 아침이면 헤어지겠는데 다시 못 만날지 모르니 헤어지기 전에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자면 카페로 이끌었다. 그런데 밤 12시경에 김일성의 초상 휘장을 단 사람 몇 명이 카페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극도로 긴장하여 눈짓으로 쎄르게이더러 밖으로 나가자고 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한참 후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그들도 역시 대합실에서 밤을 새울 작정인지 오래도록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일어설 줄 몰랐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생각할수록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제 사람들을 무서워 피해다니며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밤을 새우자니 한심하기만 했다.

작 별

김일성. 김일성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뭐길래 사람들을 이렇게 만드는지 저절로 화가 치밀어 올라 쎄르게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김일성이 죽으면 돈을 주어서라도 한달 동안 잔치를 차리겠네.』

쎄르게이는 웃으며 그때 자기도 잊지말고 꼭 청해 달라고 하면서 북조선 사람들은 왜 김일성 김정일을 그냥 놔두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북조선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옹호, 보위하자는 술어가 하나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는데 이따금 방송에서 방송원이 그 구호를 목청껏 외치면 영리한 강아지들까지 덩달아 꼬리를 흔들며 같이 곡조를 맞추어 짖어댄다고 말했다.

쎄르게이는 좋다고 웃어대면서 자기가 총으로 그들을 쏘아 죽이면 훈장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에게 훈장뿐 아니라 김일성 대신 북조선의 대통령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말하자 그는 당장 가겠다고 덤벼서 또 다시 웃어댔다.

그러노라니 어느덧 차시간이 되어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뱃심을 든든히 가지라고, 맥을 놓으면 안 돼. 그리고 돈이 떨어지면 굶지말고 어디서 도적질해서라도 먹어야해. 나는 며칠 안되었지만 자네 배짱이 마음에 들어. 우리 꼭 다시 만나자구.』

그리고는 러시아식대로 굳게 포옹하고 살뜰히 입을 맞추어 주는 것이었다.

『고맙네. 돌아가기 전에 자네 장모와 처에게 일이 모두 잘 되었다고 말하라구. 여자들이 걱정하면 일이 잘 안되는 법이야.』

나는 돌아서 열차로 돌아갔다. 밖에서 쎄르게이가 주먹을 쳐들어 보인다. 나 역시… 건투를… 하고 주먹을 쳐들었다. 기적소리 울린다.

열차는 출발하였다. 마치도 새로운 운명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나의 첫 출발을 알리는 듯 기적소리는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질 줄 몰랐다.

사랑하는 어머니
집 떠난 이 아들 걱정으로
사립문 가에서 울지 마시고 마음 좋게 가지세요.
오늘은 내 비록 그대들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실었어도
내일은 그 집에 날개가 돋혀
아늑한 꽃밭으로 그대들을 싣고 가리.
그대들이여.
들어 보시라.
세계는 민주의 함성 요란타.
대지는 민주의 아침 노을 불탄다.
기다려다오.
조금만 참아다오.
나도 그 영광의 대오, 민주의 함성과 함께…
사랑하는 아들 청석아.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너의 어린 가슴에
불행과 고통을 안겨주는 한이 있어도
정의로운 그 영광의 대오.
민주의 함성과 더불어 나는 영생하리!

군부가 관리하고 있는 평양 지하철의 비밀

인터뷰 날짜 : 2012년 7월 24일
장 소 : 북한개혁방송 사무실
증언자 : 강철용(평양시 지하철도 시설관리대 복무)
탈북일자 : 2011년 10월
평양지하철 근무 : 2005년 ~ 2010년 2월
출처 북한개혁방송 http://www.nkreform.com/common/news/news.asp?c_idx=43

지하철 운영관리 군부대

평양지하철 관리는 군인들이 한다. 북한은 군대 초모사업으로 군 입대자들에게 신병훈련을 시키고 평양지하철에 배치한다. 나는 군대 초모사업으로 군대에 입대하여 신병 훈련 받고 지하철도에 2관리소 7대대로 받았다.

평양지하철 관리 부대의 명칭은 ‘내각 보안성 제23국 지하철도 운영관리국’이다. 운영관리국 책임자의 군사칭호는 중장(준장)이다.

제23국에는 제1관리소에서 제8관리소까지 있다. 관리소 책임자의 군사칭호는 중좌(중령) 또는 상좌이다. 2008년 8총국 참모장이 23국 국장으로 오면서 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8관리소를 추가하여 총 8개 관리소가 되었다. 한 개 관리소 인원은 500∼600명 정도 된다.

관리소에는 ‘대’가 있고 그 밑에 ‘관리’가 있다. ‘대’의 책임자 군사 칭호는 소좌이고 ‘관리’ 책임자는 상위다. 부를 때는 관리소는 ‘1관리소’(대대급) 또는 ‘2관리소’라고 하며 그 밑에는 ‘대’(중대급 규모), 그 밑에는 ‘관리’(소대급 규모)라고 부른다.

지하철도 운영관리국(본부) 건물은 평양시 서성구역 붉은별역에 있다. ‘전우역’에 4관리소가 있고 ‘부흥역’에 3관리소, ‘건국역’에 5, 6관리소, 붉은별역에 1, 2관리소가 있다. 붉은별역에서 서포구역으로 넘어가는 산등성이에 신병훈련소가 있고 지하철 운영관리국 병원도 함께 있다. 지하철 운영관리국 수리관리소(공장)는 용성구역 입구에 있으며 이곳에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지하철 연결철로가 있다.

1, 2관리소는 전동차만 관리하는 관리소(대대)이다. 각 관리소(대대급)에는 1대에서 5대까지 있다. 관리소 산하 1대(중대급)는 에스컬레이터를 담당하고 2대는 통신설비 관리, 3대는 전쟁설비 관리, 4대는 노선 및 갱도 관리, 5대는 지하철 운영시 표를 팔거나 열차 안내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여성 부대이다.

지하철 안의 벽화 등 그림 관리는 붉은별역에 있는 지하철 운영관리국(본부)에서 한다. 본부에 5개 ‘대’가 있는데 1대가 지하철 내 오염 공기를 여과하는 설비(전쟁설비)를 관리하고, 2대가 개선역, 광복역, 락원역 등지에 있는 김일성 동상 경비를 서는 임무를 한다. 3대는 예술선전대이고 4대는 운수대대, 5대는 보초를 담당한다. 지하철 운영관리국은 군대체계로 되어 있지만 일반 군인들은 총기를 휴대하지 않고 신병훈련소에만 총이 있다.

■지하철 운행 및 이용 실태

평양 지하철은 첫차가 오전 6시에 운행을 시작해 막차는 오후 9시 40분까지 운행한다. 오전 5시 50분이면 지하철 역 문이 열리고 출입할 수 있다. 열차 배차 간격은 8분~15분 정도이다. 김일성 말씀 중에 ‘최대한 5분에 한 대씩 뛰도록’이란 것이 있지만 대체로 8분 정도 간격이다.

평양 지하철의 운송능력은 1시간에 약 3,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평양 지하철 열차 1편성 당 객차는 4개 정도이다. 지상의 여객열차 차량보다 작고 한 차량에 많이 타면 약 70명 정도 탈 수 있다. 남한의 지하철은 양 끝에 노인석이 있지만 북한의 지하철은 노인석이 없고 남한의 지하철 보다 차량이 적은 편이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대라고 해서 열차 배차 간격이 변동되지는 않는다. 평양시 출근시간은 아침 7시부터 8시, 9시고 퇴근시간은 오후 6시부터 8시 사이인데 출근 때보다 퇴근 때 지하철에 사람이 많이 붐빈다. 지하철에 사람이 제일 적을 때는 출근 시간이 끝나고 1시간 정도 지난 후와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2시~4시 사이다.

■ ‘지하철 통근카드’ 발급과 뇌물

지하철 승차 요금은 2009년 이전에는 북한 돈 10원이었으나 현재는 교통카드를 사용한다. 2007년부터 자기가 다니는 기업소(회사)에 1,600원을 내고 신청하면 기업소에서 6개월치 ‘지하철 통근카드’를 발급해준다.

어느 누구나 카드를 발급받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다니는 사람에 한해서 발급해준다. 때문에 교통카드 발급과 관련해서 뇌물이 오고가기도 한다. 교통카드 한번 발급 받으려면 담배 한 보루(10곽)는 쥐어줘야 한다. 정책상으로는 기업소에 다니는 사람이 탈 수 있지만 표만 구하면 평양시민 누구나 탈 수 있다.

지하철에서 표를 관리하는 것은 지하철도 운영관리국 관리소에 있는 각 대의 여성들이다. 이들은 정복을 입고 표를 받는 등의 일을 할 뿐, 뇌물을 받아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군관들이다.

지하철은 제시간에 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버스보다 편리하다. 버스의 경우 버스의 정시도착 여부를 알 수 없어 불안하나 지하철은 그렇지 않다. 출퇴근 시간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50m씩 서는 곳도 있다. 동평양 쪽에는 지하철이 워낙 없으니까 버스를 사용한다. 평양시 운송수단 중 궤도 전차도 사용할 만하다.

2. 평양 지하철 군인들의 근무 및 생활 실태

■ 지하철 근무자 선발 및 근무 환경

평양지하철도 운영국은 본부까지 모두 합쳐 3,500명 정도이다. 신병 훈련 대대가 봄과 가을에 초모(군입대) 사업을 하는데, 봄에 200명, 가을에 150명 정도를 뽑는다. 이 중에 여성은 1/5정도로 전체 인원 중 600~700명 정도이다.

지하철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다. 평양 지하철에서 근무하는 여성 역시 전국에서 초모해 오는데 대체로 힘 있는 집안 자제들이다. 2006년부터 평양에 사는 사람은 평양시에서 군사 복무를 하지 못한다는 방침이 떨어졌다.

사는 곳과 군 복무지가 같으면 너무 편하고 군율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평양시에 집을 두고 있는 사람은 모두 지방으로 보냈는데 평양시 지하철도 운영국 만은 제의서를 올려 평양 거주자를 뽑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전체 부대 군인의 10~20%는 평양에 거주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평양지하철 복무자들은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되는 사람들이다.

평양지하철 운영국 병사 중 약 70%는 부모가 돈 또는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일반인이다. 70%의 사람들도 부류가 나뉜다. 굉장히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돈을 잘 쓸 수 있는 사람들이 20%, 괜찮게 사는 사람이 30%, 상류급이 20%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지하철 관리 부대 중 가장 근무하기 좋은 곳은 에스컬레이터를 관리하는 부대이다. 근무지는 지하철이고 부대는 지상에 있다. 또 관리소 본부에 속해 있는 경리소대라는 것이 있는데 식량, 기름 등 먹는 것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가려면 뇌물을 바쳐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여기에서 하는 일들은 사무보조 같은 일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군사 복무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평양시에서는 군인들이 외출할 때 군복을 입지 못한다. 2005년 경에 유엔 등에서 인도지원 관계로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당시 외국인 눈에는 평양에 군인들이 너무 많아 보였고 그런 것이 이미지상 문제가 있어 외출시 군복을 금지시켰다.

지하철 부대 군복은 일반 군대 군복과 같고 경비대 연장을 단다. 지하철에 내려가 근무 할 때에는 검은색의 근무복을 입고 지상에서 훈련할 때는 일반 군복을 입는다. 2년에 한 번씩 군복을 주고 3년 마다 근무복을 주는데 제때에 공급되지는 않는다. 외출 시에는 사복을 입어야 하는데 별도로 사복을 지급하지 않으며 남의 옷을 빌려 입거나 근무복을 입고 나가기도 한다.

외출은 한 달에 한 번도 못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한달에 5일 정도 외출했다. 내 경우는 평양에 대학 친구, 친척 등이 있어서 갈 데가 많았다. 2007년에 1년 간 평양시 평천구역에 내각 육해운성과 함께 아파트를 건설하는 일에 동원된 적이 있었다.

당시 철근 가공 작업을 했는데 굉장히 힘들었으나 사회에 나와 있어서 좋았다. 근무시간 외에 외출을 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거나 식량이나 물자 등 무엇인가 가지고 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말하고 나갈 수 있다. 근무를 서다 보면 지하에서 술도 먹고 싶고 하니까 밖에 나가서 그런 것을 갖고 올 수 있다고 하면 무조건 내보낸다.

군 복무 중에 군관학교를 가려면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문제는 시험이 아니라 돈이다. 시험으로는 한 사람도 안 붙는 것 같다. 일단 제일 높은 보안성 정치군관학교는 대학 경력으로 쳐 준다. 보안성 정치대학이 제일 인기가 높다. 아니면 보안성 산하 군관학교를 가는 식이다. 힘 있으면 보위대학도 갈 수 있다.

■병사들의 연애 문제

지하철 운영국 병사들 중에서도 분대장들이 연애 문제가 아주 활발하다. 지하철 부대라서 밤 근무가 많다. 지하철은 오후 10시 전에 운행을 마감하지만 그 다음 날 운행 준비로 인해 야간 근무를 많이 한다.

지하철 부대는 3교대로 일한다. 야간근무(오후 10시~다음날), 낮근무(오전 8시~오후 3시), 오후근무(오후 3시~오후 10시)로 나뉜다. 야간 근무일 때는 그 다음 날까지 무조건 지하에 있어야 한다. 야간 근무 때는 지하철 청소나 설비점검을 한다. 1대, 2대, 3대, 3, 4관리, 5대는 지하에 고정근무가 있다. 5대는 여자부대니까 이들과의 연애 문제가 많이 생긴다.

연애 과정에서 임신을 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의사들에게 은밀하게 돈이나 뇌물을 주고 소파(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식이다. 이성관계가 많은 병사들은 대체로 평양시에 거주하면서 군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신병훈련 받을 때 여자 신병을 도로 집에 보낸 일도 있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임신했는데 모르고 군대에 입대해 왔다가 임신 사실이 밝혀져 돌려보낸 것이었다. 여성군인들도 입대할 당시 나이가 17살이었다.



지하철 부대에서 연애 문제에 관심이 많은 병사들은 주로 집에 돈이 있고 평양에서 살다가 군에 입대한 병사들이다. 군대 복무하는 여성이 10명이라면 7명 정도가 남성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성관계가 빠르게 시작되는 병사는 한 줄 달고(상등병)도 이성관계를 갖게 되는데 나이는 20살 미만이다. 주로 초급병(상등병이나 하사관)들이 그런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군대 내에서 연애 문제는 각자가 관리를 하기 때문에 생활제대 된 사람은 없었다. 내가 근무할 당시 한 여성 부분대장이 외상거래와 사기를 치다가 빚이 100만원 정도로 늘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제대한 일은 있었다.

3. 평양 지하철 구조와 설비·보수

■평양 지하철 구조 및 주요 시설

평양시 지하철은 1973년도에 개통됐다. 지하철 개통 당시 1단계, 2단계, 3단계로 나눠서 개통했는데 그때마다 김일성, 김정일이 모두 방문했었다. 부흥역, 영광역, 승리역, 개선역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왔다갔고, 봉화역은 김정일이, 붉은별역은 김일성이 왔다 갔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방문하는 지하철 역은 고정되어 있는데 대체로 영광역부터 붉은별역을 많이 방문했었다.

평양 지하철 깊이는 가장 얕은 곳이 80m 이상, 가장 깊은 곳은 100m이다. 에스컬레이터 길이는 120m로 경사는 45도~50도 정도다. 역 간 거리는 약 10분 정도로 제일 짧은 구간이 건국역부터 황금벌역 사이다. 그 외에는 비슷하다. 평양 지하철도 평상시에는 한국과 똑같이 교통 편리를 보장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남한의 지하철의 경우 수입과 지출을 따지지만 북한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평양 지하철은 유사시 주민대피용으로 사용한다. 이를 위해 지상에서 핵폭발 등으로 공기가 오염됐을 경우 지상의 공기를 차단하는 방호문을 운영한다. 지하철역마다 환기갱(환기 터널)이 있다. 양쪽으로 역마다 환기 터널이 있으며 가운데에도 환기터널을 꼭 만들어 놓는다. 모두 지상과 통하는 것으로 깊이가 80m이고 경사가 50도 정도다.

이 환기 터널은 전쟁이 나면 모두 차단해야 하는데 이 임무를 우리 부대가 담당했다. 우리 부대의 평상시 관리 임무는 기계조작으로 차단이 되는지, 밀폐가 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356일 매일 점검한다.
또한 평양지하철에는 ‘3방 설비’라는 것이 있는데 폐쇄된 지하철 내부로 들어가는 공기를 여과하는 시설을 말한다. 3방 설비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전쟁 등의 유사시에 독가스나 핵오염, 방사선을 방어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3방 설비는 락원역과 부흥역, 붉은별역에 하나씩 있다. 평양시 지하철은 X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각 노선의 한쪽 끝 역에 하나씩 있다. 3방 설비가 있는 시설에는 국장의 명령과 승인이 없이는 들어가지 못한다.

나는 신병 교육을 3방시설이 있는 곳에서 받았다. 3방 설비가 있는 내부 공간은 너비 100m, 길이 200m, 높이 3m로 아주 큰 편이었다. 층막이 있고 그 위에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 자체가 공기 통로이다. 이곳에는 근무실이 따로 있고, 유사시 정찰병들이 방사선탄이 떨어졌다고 관측되면 분석실에서 분석한 후에 여과기를 가동한다.

또한 지하철에는 유사시에 사용하는 지하 발전소가 있다. 공병국이 건설했는데 위치는 정확히 모르고 1973년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3방 설비는 러시아 산으로 재래식이다.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지 않고 계속해서 보수 정비해서 낡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

병원 시설은 지상에 있고 훈련을 할 때는 지하로 내려가서 한다. 훈련은 상반기와 하반기에 한다. 주민들을 대피시킨 후 3개의 방어문(방호문:防護門)을 닫는다. 3단계 방어문은 모두 폭풍을 방어하고 오염된 공기의 침투를 막는 것인데 첫 번째 방어문은 두께가 80cm이고, 두 번째는 50cm, 세 번째는 30cm 정도 된다. 첫 번째 방어문의 무게는 20톤 정도 된다. 콘크리트가 깨지는 일은 없는데 방호문이 철근 구조물이라 지하에 습기가 많아 1년 동안 녹이 2~3mm 정도 일어난다. 그것을 벗겨내기가 힘들다.

내가 있던 부대는 방어문을 관리했는데 지하철 관리의 기본은 3방 설비 관리다. 내가 복무한 3대 1소대(관리)는 부흥역부터 영광역까지 방호문을, 2소대는 봉화역부터 승리역까지 방호문을 책임졌고, 4관리소 3대 1소대가 통일역, 개선역, 2소대가 전우역하고 붉은별역을 관리했다. 전쟁이 나면 평양시민들은 지하철뿐만 아니라 산마다 파놓은 방공호에 대피하도록 하는데 대체로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한다.

■평양 지하철 설비 노후화와 보수 문제

각 관리소의 지하철에 석수가 굉장히 많이 차는데 3관리(소대)와 4관리(소대)는 지하철에 스며들거나 고이는 물을 퍼내는 일을 담당한다. 석수량이 대단해서 기계를 24시간 가동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2시간 가동 후 30분 쉬는 자동화 체계를 갖춘 곳도 있다.

지하철 갱도(터널)에서 물길이 흐르면 모이는 곳이 있다. 거기에 펌프를 설치해서 물을 푸는데 대체로 방호문 쪽에서 많이 나온다. 아니면 한 개 갱(터널) 뽑을 때 많이 나오고 지하철 자체에서 생기는 것도 있다.

만약 물을 퍼내는 펌프가 고장이 나면 지하철이 잠기게 된다. 때문에 관리소 1개 역사에 2~3대의 양수기를 가동하고 비상시에 사용할 예비 펌프를 설치하고 있다. 양수기는 북한에서 만든 것으로 크지만 잠수 펌프는 그에 비해 작다.

또한 이따금씩 지하철 전기 공급에 문제가 생겨 불이 꺼질 때가 있다. 그러나 10초 만에 다시 켜진다. 전동차가 가다가도 실내등만 꺼지는 경우도 있다. 하루에 적게는 한 번, 많으면 세 번 정도 정전이 되는데 대체로 오후에 정전 현상이 많다.

때로는 정전으로 인해 30분간 운행이 중지된 적도 있었는데 1년에 15~20일 정도는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 특히 겨울에는 전기가 많이 부족해서 정전이 되는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정전 된 때가 2007~2008년 사이였다.

통신은 유선망을 사용하고 각 관리소의 2대가 전문적으로 통신과 전기를 관리한다. 각 관리(소대) 근무실에 버튼식 전화기가 한 대 설치돼 있다. 2008년도 하반기에는 지하철에 카메라(CCTV)를 설치했다. 지하철 역전의 양 끝과 에스컬레이터 내려오는 계단에 한 개, 역사 동상 등에 설치했다. 한 개 지하철 역에 보통 5개 정도 된다. 카메라를 설치한 후 여성군인들과 잘 놀던 병사들이 곤란해 했다.

에스컬레이터는 모두 30년 이상 된 것들로 중국산이다. 봉화역 에스컬레이터는 북한산으로 아주 투박하다. 중국산은 처음 개통 할 때 설치된 것들로 시간이 지날수록 보수는 해야 하는데 자재가 비싸서 자체로 만들어보자고 해서 설치한 것이 봉화역에 있는 북한산 에스컬레이터이다.

영광역은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역 앞과 뒤에 두 개있다. 에스컬레이터 보수는 이번 달에는 붉은별역 한쪽(내려가거나 올라가거나 하는 한쪽) 에스컬레이터를 대보수했다고 하면 다음 달에는 영광역을 하는 식으로 순환식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한다. 에스컬레이터 대보수는 낮에도 한다.

그러면 그날은 지하철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를 보수하는 역에는 지하철 전동차가 서지 않고 지나가는 식으로 운영된다. 예를 들어 붉은별 역이 대보수에 들어간다고 하면 약 25일 동안은 운행을 안 한다.

전동차가 고장 나면 용성(평양시 용성구역 지명)에서 보수를 한다. 폐기할 것은 폐기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친다. 부품은 다 북한제이다. 아직도 운행 중인 평양 지하철 중에는 중국 전동차가 두 대가 있고 독일제 중고 전동차도 있다. 중국 전동차는 처음 들여올 때 김일성이 시운전에도 참여해서인지 아직도 남아있고 독일제 전동차는 70년대부터 계속 사용하고 있다.

각 역 역장실이 지령실, 종합실과 마찬가지 인데 이곳에 컴퓨터가 들어왔다. 그러나 컴퓨터로 하는 일은 지하철 내부에 설치한 카메라가 촬영하는 화면을 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용도는 없다.

북한에서 부흥역부터 영광역 까지가 외국인들 관광이 많이 진행되는 곳이다. 이곳 지상에 만수대 창작단이나 고려호텔(영광역 위) 등이 있고 영광역에는 외국인 전용 시설 건물도 있다. 때문에 평양시 지하철 중에서 제일 잘 관리되고 있는 역사가 바로 영광역과 부흥역이다. 이곳이 가장 화려하고 교통편도 좋다. 이 곳에 근무하는 여성도 예쁜 사람만 뽑는다. 외국인들에게는 다른 곳은 보여주지 않는다.

3. 평양 지하철 구조와 설비·보수

■평양 지하철 사건사고 외

2002년 여름, 건설역에 정차되어 있던 전동차에서 전기 합선으로 폭발사고가 있었다. 폭발로 큰 화재가 발생했고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에 전동차 마지막에는 감시를 담당하는 여성이 한명씩 탄다.

2007년에는 홍수로 지하철이 잠겨 약 보름동안 운행되지 못했다. 당시 건국역을 비롯해 대부분의 역전들이 물에 잠겼다. 지하철 내부의 설비 자체는 그 정도 양의 물을 감당 할 수 있는데, 평상시에 관리를 잘 안하니까 물이 많아지면서 입구로도 들어왔다. 사람들이 타는 곳과 지하철이 떨어져 있는데 그곳 까지 물이 찼다. 완전 잠기면 복구가 힘들다.

지하철 내 소매치기 등 범죄도 있다. 나와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던 사람 중에 소매치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근무 나가고 올 때마다 전동차를 타니까 그럴 확률이 높았고 그때는 전동차에 카메라도 없었다. 후에 카메라를 설치했지만 밖에만 설치했다.

지하철 관리국 군인으로 근무하면서도 부수입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지하철 내부의 전기선(동선)을 잘라서 파는 것이 그렇다. 밤 근무를 설 때 지하철 내부에 설치된 동선을 자르는데 꽤 비싸게 판매된다. 지하철 내부에 배선된 전기선들은 모두 전기가 흐르는데 4선 중에서 영선(접지선)은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이 영선을 잘라서 팔아 돈을 버는데 약 10~15m 정도 잘라서 피복은 벗겨 버리고 순수 동(구리)선을 잘라서 파는 것이다.

지하철에 5개 대대가 들어가 있는데 어느 대대에서 누가 잘라 팔아먹었는지를 알 수 없다. 이런 사건은 한 달에 한번 정도로 일어나는데 가장 많이 일어나는 역사는 부흥역, 혁신역 쪽이다.

지하철 근무 병사들은 다른 설비나 부속품도 팔아먹는데 지하철 내부의 비상용 잠수 펌프도 훔쳐 팔아먹는다. 군인들이 지상의 아파트 건설장에 동원 나갔을 때에는 철근, 시멘트, 자재 등 훔칠 수 있는 것은 다 훔친다.

지하철 내부에서 공사나 정비 등을 하다가 팔이 빠지거나 하는 등의 사고도 일어나고 그 중에 죽는 사람도 있다. 지하철 내부에서 1년에 약 5건 정도 사고가 일어난다. 지하철 이용 시민들이 사고 나는 일은 없다. 훈련 때마다 군인들이 점검하니까 그런 면은 괜찮은 편이다.

4. 기타

■김정은 외 고위층 관련

김정은 후계자에 대해서는 2008년 후반기부터 알았다. 2009년에 평양에서 축포축제를 조직한게 김정은이었다. 김정은이 김정일 아들이며 군부대 대장으로 있다는 말을 평양에 집을 두고 있는 분대장에게 들었다. 당시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고 어리다는 것은 알았다. 2009년에는 총정치국 부국장으로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북한에 있을 때는 김정은이 신병서부터 체계적으로 군사복무를 했고 모든 군사 과정을 밟았다고 들었다. 당시에는 정말 믿게끔 소문이 났었다.

2007년에 장성택 별장 문제가 제기되어 부대를 해산한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장성택 별장 자체가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2007년 가을 그 부대를 해산시키고 다른 부대들에서 하전사들을 뽑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2009년 대동강 과수농장 개간을 시작해 그해 가을에 과일을 먹게끔 하자는 방침이 있었다. 그때 장성택과 김정일이 함께 방문했고 사이가 좋아보였다.

내가 병원에 입원 했을 때 보안성 정치국 정치부 책임지도원과 같이 있었는데 그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장성택의 권력이 강해서 김정일이 견제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김경희가 가계를 중시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장성택은 말하자면 남이다. 그래서 김정일보다 김경희가 장성택을 더 경계한다고 들었다.

장성택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체제 자체를 크게 변화시킬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리영호도 무엇을 바꾸고 반대 한다기 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게 본인에게 더욱 이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평양시민들은 김정은에 대한 충성심이 여전하다고 본다. 다만 삶이 힘든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기타

평양시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에 왔을 때 우리 집 앞 강 건너가 중국 장백이어서 중국 방송을 많이 봤다. 때문에 처음 한국 영화를 볼 때 별다른 것은 없었지만 다만 한국말이 어감이 좋다고 느꼈다. 내가 한국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2005년에 해주에서였다.

아버지가 해주에서 돌아가셨는데 그때 아버지 곁에 있었다. 해주 배천 군곡리라는 곳은 서울 항공이 보이는 곳이다. 한 달 동안 있으면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 군복무 당시 평양에 있을 때는 아는 형들과 외국영화를 봤다. 지상에 올라가면 영화 관람 시간이 있으니까 토요일 일요일은 만수대에서 영화를 봤다.

2003년부터 2005년 까지는 한국 드라마가 인기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4년 11월부터 3달간 중앙당 과장급 이상에서 검열을 나왔다. 2003년도부터 중국에서 CD플레이어가 많이 들어왔다. 또 남한의 국정원에서 CD작업을 만들어 성공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렇게 대규모 국가적 검열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2,000명이 내려온다 했는데 범위가 작으니까 1,000명을 신의주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이런 검열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문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국경지대는 그런 매체가 돌면 인심이 험해진다. 당시에는 걸리면 모두 교화소에 갔다. 2004년 이후 중국에서 CD(DVD) 플레이어가 정말 많이 넘어왔다. 친구들도 보면 웬만한 영화는 다 봤다. 당시 기차를 자주 탔는데 기차 승무원들도 영화 CD를 밀수하는데 한국영화의 경우 마진이 3배가 떨어진다고 했다.

평양을 검열한 일은 없었고 기본적으로 국경을 검열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친구들끼리는 ‘살기 좋다’ ‘발전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겉으로는 한국을 대안으로 여기지 않는다. 친구들의 속생각은 모르겠다.
대학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는 정보가 빨리 돈다. 다들 MP3 플레이어를 갖고 있다. 군대 때 나도 갖고 있었다.

지휘관들에게 들키면 조금 곤란하지만 회수당하는 것뿐이다. 소대장은 괜찮은데 소장이나 그 위까지만 아니면 괜찮다. 군인들 중 MP3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내 친구는 MP3로 한국 노래를 많이 들었다. 그 친구 형님이 컴퓨터 센터에 있어서 한국 방송 라디오 주파수를 잘 잡아 생방송으로 나오는 노래를 따냈다고 했다.

사회주의체제를 떠난 이유는 그 체제 자체가 사람의 심리를 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당이 결론을 내면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은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수적인 충동으로 들고 일어나면 번지지 못하고 금방 진압된다. 나는 북한을 더욱 봉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와서 느끼는 것은 한국 정부는 통일에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정책으로 되어있다. 남한에 와서 보고 듣다보면 정치인들이 북한을 봉쇄하면 북한 주민들이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북한주민들은 늘 힘들게 살아왔다. 전화 통화를 해보면 저기 사람들은 항상 검열 속에서 살고 매번 복잡하다. 언제 편안하게 산 적이 없다.

2006년에 대한민국 쌀 포대가 없어졌다. 대한민국 쌀 포대는 질이 좋기 때문에 그것을 쓰고 싶은 사람은 돈을 주고 사서 쓰거나 이어서 방수포로 만들곤 했다. 그런데 2006년부터는 민간인에게 나오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 전에는 장마당에서 한국 호남쌀이라고 팔았었는데 그 자체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6.18돌격대나 고속청년돌격대가 그 쌀을 먹었는데 그때부터 없어졌다. 단속 때문이 아니라 북한당국이 내부적으로 민간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막은 것으로 본다.

좀 더 봉쇄하고 지원을 안 하면 정권 자체가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게 된다. 국내에서 쌀이 많이 돌지 못하면 주민들이 사먹는 쌀 값이 비싸진다. 농사가 잘되면 국민들에게 그 생산물이 돌아와서 삶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쌀이 국내 안에 있으니까 어찌됐든 간에 자연히 쌀값이 내려가니까 삶이 괜찮아지는 것이다. 북한에서 농사가 잘 된다고 했을 때 그 쌀이 인민들한테 분배되어서 괜찮아 지는 것이 아니다.

즉 외부에서 지원이 들어가면 인민 개개인에게 차려지는 것이 생겨서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국내 쌀 값이 내려가니까 사먹기 괜찮아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조금만 막으면 비싼 것을 사먹게 되니까 반감이 생길 것이다. 국가는 뭐하는 것인가라는 반감 말이다. 북한 체제는 백성 하나하나를 책임져서 먹여 살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평생을 복종해도 먹고 살기 힘들다면 조금씩 불만이 쌓이지 않겠나.

나는 노동자 가족이면 영원히 노동자로 살아야 하고 또 연좌제가 있는 사회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잘못을 해도 그것이 가정 전체로 확대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인데 왜 이런 시스템으로 운영 되는가가 이상했다. 군대 있을 때는 군사복무 자체가 힘드니까 생각의 여지가 없었고, 공부 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사회에 나와서 환경이 변화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정이 군대에서 사회로, 평양에서 지방으로 환경이 변해서 그런지 충격이 컸다. 내가 일생동안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내가 날 위해서 일생동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남한에 와서 사무보조나 택배 등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보았다. 사무직도 노가다도 해보았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교만한 사람들은 교만하게 사는 것 같더라.

25분 만에 뛰어온 남쪽에서 고난의 행군을 하다

주승현(33)은 스물두 살 때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비무장지대(DMZ)에서 남측의 심리전을 제압하는 방송요원으로 군 생활을 했다.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입국이 본격화한 2000년 이후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한 첫 사례이자 최연소 탈북자 박사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와 동양·금호석유화학·롯데그룹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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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어느 겨울 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휴전선 철조망에 부딪혀 웅~웅~ 울음을 토하던 그 밤에 비무장지대(DMZ) 내 북측 심리전 제압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나는 목숨을 건 귀순 길에 들어섰다.

북한군 GP(Guard Post)초소에서 한국군 GP초소는 뛰어서 5분,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그 길은 북한에서의 스무 해가 넘는 내 인생을 뒤로하고 내딛는 길이었고 내 손에 쥔 것이라고는 어제의 동료(추격조)로부터 나를 지키는 AK자동소총뿐이었다.

지난해 7월 18일 JSA 경비대대 대원들이 비무장지대(DMZ) 내 대성동마을 인근 밭에서 일하는 주민을 경호한다. 주승현 씨는 DMZ를 뚫고 25분 만에 탈북했다.

하나원에서부터 ‘왕따’

월남(越南)과 침투를 막으려고 DMZ에 설치한 1만 볼트의 고압 전기철조망과 지뢰를 비롯한 장애물, 촘촘한 매복호, 전방 탐지기기의 추적을 피해 마침내 MDL(Military Demarcation Line·군사분계선)을 넘었고 탈출 25분 만에 나는 한국 측 초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마도 한국에 들어온 2만7000명의 탈북자 중 최단 시간 내에 북한에서 한국으로 온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귀순은 사실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환경이 좋은 곳에서의 복무를 마다하고 DMZ를 선택한 것은 어린 나이였는데도 무력으로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북한 당국의 논리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출신성분이 우수하고 계급적 각성이 높은 자만 뽑혀오는 DMZ에서도 나는 심리전 제압 방송요원이라는 중요한 보직에서 근무했고, 적과 아군이 대치한 전초선이자 대북방송과 대남방송의 대결장에서 남북의 분단 상황을 6년간 목도했다.

사선을 넘어 한국에 귀순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귀순용사가 아닌 탈북자,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탈북이주민 등 수많은 용어가 난무하는 탈출 이방인 대열에 합류했다.

정체성의 혼란과 상대적 박탈감 탓에 심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다른 탈북자처럼 경제적 어려움 탓에 탈북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끝없는 후회와 절망이 찾아왔다.

탈북자 정착기관인 하나원에서부터 나는 이른바 ‘왕따’였다. 특히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고향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내가 DMZ에서 근무한 군인 출신이라는 사실이 소문나면서 탈북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트라우마가 반사적 분노로 표출돼 나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북한 주민의 탈북을 총으로 막는 국경 경비대원이 아니었는데도 북측의 DMZ를 지키던 군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공격하는 그들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탈북자 정착 교육시설 하나원. 정부는 개원 10돌이던 2009년 하나원의 모습을 국내외 언론에 최초로 공개했다.

하나원에서 퇴소해 먼지 가득하고 허름한 서울의 한 임대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지하철 타는 법도, 은행에서 돈 찾는 법도 모르던 터라 나는 차라리 외계인에 가까웠다.

어찌할 줄을 몰라 나를 담당한 형사에게 전화해 이것저것 물어보자 “혼자서 새로 온 탈북자 40명을 담당하는데 그중 절반이 어르신이다. 젊은 너는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이후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홀로 살아가야 했다.

10년 만에 학·석·박사

나는 북한에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다른 탈북자처럼 제3국에 체류하면서 시장경제를 터득한 것도 아니기에 한국 사회에 나온 지 두 달 만에 얼마 안 되는 정착금마저 사기를 당해 날렸다.

정착금을 빼앗아간 사람은 탈북자였고, 불량 휴대전화와 짝퉁 물건을 나에게 팔아 생계비를 빼앗은 이는 한국인이었다.

생활비라도 벌려고 주유소에 찾아가 면접을 봤지만 대학생과 휴학생 구직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중국 동포보다 더 어리바리했던 나를 뽑아줄 리 만무했다.

목숨을 걸고 DMZ를 넘어왔지만 잉여인간으로 전락한 채 북한도 아닌 남한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굶어보았고 몸서리칠 만큼 힘든 상황을 하릴없이 받아들기에는 깊은 내상으로 인한 통증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죄책감, 상대적 박탈감과 알 수 없는 분노로 하루하루 폐인이 돼갔으며 5개월 만에 체중이 10㎏이나 줄었다.

그즈음에 정신적 좌절이 행동으로 발현되면서 극단적 선택도 수차례 했지만 용케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벼룩시장’의 구인광고를 통해 종로에 있는 일식당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업무는 배달과 주방 일이었는데 한국인이 8시간 일할 때 나는 12시간 일했다.

그럼에도 월급은 그들보다 적었다. 그때 처음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유 사회에 온 것은 맞지만 이 사회를 배우지 않고서는 평생을 열등한 타자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듯하다.

나는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대입학원에 등록했고 일이 끝나면 학원으로 갔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탈북자가 무슨 대학이냐고 빈정댔지만 나는 하루 3시간을 자며 일하고 공부했고 마침내 그해 가을 대학시험을 치러 합격통지를 받았다.

나는 북한에서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었다. 직업군인이 꿈이었던 나는 어려서부터 국방체육을 전공했고 수업에 참가하는 날보다 경기 일정으로 학교와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더 많았다.

학교를 졸업하던 열일곱 살 나이에 곧바로 군에 입대해 6년간 DMZ 안에서 근무하다 한국으로 왔으니 학업의 공백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해야만 했다. 고려대 경영학과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동시에 합격한 나는 최종 선택에서 거주지에서 가까운 고려대가 아닌 연세대를 골랐다.

그 이유는, 얼마 안 되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가 ‘분단의 사생아’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경영학을 공부해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목표도 가질 수 있었지만 정치학을 통해 설움 가득한 삶을 강요케 한 한반도의 분단 구조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첫 탈북자 통일학 박사

입학 전 들떴던 마음과 달리 대학 생활은 최악이었다. 남북한의 서로 다른 교육과정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취미는커녕 요령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혈혈단신이다보니 얼마 안 되는 생계지원금으로 집세를 내고 나면 교통비나 밥값도 남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첫 학기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탈북 대학생의 경우 사립대학 등록금을 국가와 대학에서 절반씩 장학금으로 지급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둬야 수업료를 지원받을 수 있다.

성적이 나빠 장학금을 지원받지 못한 나는 스스로 등록금을 해결해야 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일식당과 건설 현장으로 일을 다녔다.

수업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일터로 가야 했던 대학 시절은 아직까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교재를 살 돈도 없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서 선 채로 책을 읽으면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부교재를 빌려보려고 6개의 도서관을 다닌 적도 있다. 책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닳고닳은 신발 밑창 값이 교재 값보다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험기간에는 일주일이나 열흘씩 아예 도서관 의자에서 자면서 공부했는데 군 시절에 체득한 인내심이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두 학기 등록금을 직접 내고서야 성적이 올라 장학금을 받았고 그제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친구를 사귀는 것만큼은 어려움이 없었던 나는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캠퍼스의 낭만도 만끽했다.

대학 3학년 때는 산악동아리를 맡아 이끌었고 학교 친구들과 민속문화반을 결성해 방방곡곡 돌아다녔다.생활은 어려웠지만 휴학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대학을 졸업한 탈북 학생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대학에 입학하고도 실제로 졸업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한 번도 휴학하지 않고 졸업한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졸업 후 나는 국회(국회의원 보좌관)와 두 곳의 대기업에 다니며 대학원에 진학했고 대학원에서도 한 번의 휴학 없이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22세 때 귀순해 10년 만에 탈북자 최초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아웃사이더의 정체성 찾기

나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던 듯하다. 앞서 밝힌 것처럼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DMZ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 온 나에게 한국은 머리나 가슴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냉정한 자본주의 경쟁 사회였다. 나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일러스트·김영민
어떤 사람들은 군인 출신이어서 국가적 대우나 보상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2000년 이후 군 귀순자에 대한 배려와 대우는 소멸됐고 오히려 군 출신 귀순자는 춥고 어두운 동면을 강요당했다.

첨언하자면 가지고 온 무기의 보로금(報勞金·반국가 단체나 그 관련 구성원으로부터 금품을 취득해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 제공했을 경우 금품 가격에 따라 국가가 지급하는 돈)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는데,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내가 가지고 온 무기(AK자동소총)는 동대문시장에서 25만 원이면 구입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언젠가 나는 탈북 학생들이 안보 강연이나 특정 재단의 지원으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충당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정작 군인 출신인 나에게는 그러한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혼자 지내다보니 탈북자 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어 내적 모순과 외적 도전을 함께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비록 아웃사이더의 위치일지라도 그 위치가 품은 다양한 면을 건전하게 고찰하고 정신적 인내를 배운다면 훨씬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탈북자에 대한 고리타분한 편견이 사회적 주홍글씨로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국회의 별정직 공무원과 대기업 사원으로 일한 것은 귀순자에 대한 푸대접에 낙담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대학 진학과 관련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내심을 갖고 위기를 기회로, 단점을 강점으로 바꾸려고 힘을 다했다.

나는 국회에 들어갈 때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정치외교학 전공자 모집에 지원해 채용됐고 두 곳의 대기업도 공채에 응시해 스스로의 힘으로 입사했다. 다만 서류 전형 때 탈북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자기소개서, 이력서 등에서 탈북 사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채용 면접 과정에서는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면접 때는 탈북자라는 사실이 합격에 오히려 도움을 준 것 같다.

밝히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탈북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력과 포부가 회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호소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입사 면접 상황을 즐겼고 예외 없이 합격통지를 받았다.내가 여러 회사에서 일한 이유는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미친 등록금’과 생활비 등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북한에 있을 때 ‘남조선’ 대학생들이 학비 낼 돈이 없어 피를 뽑아 팔아 등록금을 낸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실제로 겪어보니 등록금을 낼 수만 있다면 피를 뽑는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겠다고 수백 번 생각했다. 문제는 내 몸 안의 피를 다 뽑아도 과연 등록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려운 형편이었어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위 과정을 빨리 마치고 기업에 취업해 돈을 번 후 상위 과정으로 나아가자고 마음먹었다. 남보다 일찍 석사 과정을 마치고 남은 기간에 돈을 벌어 박사 과정에 입학했고 박사 과정 역시 빨리 끝내고 취직해 돈을 벌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박사 논문을 준비했다. 물론 공부에만 집중하지 못했다는 게 아쉽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대기업 근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경력을 쌓은 것 역시 유익했다.

살아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

나는 한반도의 통일은 곧 분단의 극복이므로 분단을 사유하는 것이 통일을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정치학을 선택했다.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두 번 병원에 실려갔다.

극심한 스트레스 탓도 있겠지만 남북한의 잔인한 분단사를 들여다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통일 후 통합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나의 심신을 해치곤 했다.

남북한의 노력으로 70년 분단 상황을 끝장낼 수는 있지만 오랜 분단이 낳은 적대성과 이질성이 통일 이후에도 남북한 사람들의 통합을 심각하게 저해할 것이라는 생각에 못내 암울해진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후 과정 초청장이 왔지만 나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알고 지내던 지인이 부산에 대안학교를 세웠는데 사감 겸 교사로 일할 수 있겠느냐고 부탁해왔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어려워 월급도 없는 자원봉사라고 했다.

잠깐 고민했지만 흔쾌히 응했다. 이 땅에서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봉사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아이들을 통해 통일 후에 대한 희망을 찾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통일에 대한 당위적 의식이 높은 기성세대는 분단의 체험자이기도 하다. 분단의 수혜자이든 피해자이든 이들이 가진 분단 의식은 부정적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며 통일 후 갈등과 대립, 혼란의 본질적 요소다.

내가 통일 후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통일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의 경우 통일을 필요적 측면에서 접근하긴 하나 분단 의식만큼은 기성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만약 한반도의 통일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기성세대의 책임과 통일 세대의 역할을 조화롭게 융합해 새로운 통일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살아야 하겠다는 절박함이 DMZ를 통한 귀순 길에서 생존이라는 기적을 가져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간절함이 빈한한 처지에서도 내가 지금까지 버텨온 의지의 원천이자 자양분이었다.

나는 지금 또 다른 오기와 소망의 절박함과 간절함 앞에 서 있다. 그것은 통일이다.

다가오는 통일은 적대와 증오를 배태해온 70년 분단사(史)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을 형태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 통일이 남북한 주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승현 | 북한이탈주민·통일학 박사 joosy3050@naver.com : 출처 신동아 9월호

김정일 동창생의 곡절많은 탈북수기

필자 : 장영걸 (가명) 2008년 탈북, 2009년 남한 입국

나는 3년 전 한국에 와서야 ‘이런 세상이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가장 선진적이고 좋은 세상이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 자본주의 사회는 나쁘다고만 교양 받았다.

그런 내가 어떻게 어떤 모순점들을 깨닫고 여기 한국에까지 왔으며,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된 인간으로서 살게 됐는지 간단하게 적으려고 한다.

해방 이후 북한 

내가 태어났던 1940년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얄타회담에서 승전국의 3국 수반들이 모여서 영토를 나누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한반도는 38선으로 분할되어 북조선은 소련이, 남조선은 미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이 서로 세계를 나누어 가지는 첨예한 투쟁 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이 시기 스탈린은 해방된 북한을 사회주의 체하에 철저히 묶어두기 위해서 직접 자신이 키우고 충성을 다 해오던 당시 소련 붉은 군대 국제여단의 대대장이었던 김일성을 북한의 수반으로 보냈다. 그리고 소련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정한 직위에 있던 조선 사람들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당시 북한에는 젊고 싸움을 잘하는 항일빨치산들이 많았지만 이들에게는 나라를 세우거나 인민경제계획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소련에서 온 조선 사람들이 항일빨치산들을 대상으로 소련식의 교육을 실시했고, 북한을 사회주의 체제에 맞게 건설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많은 북한청년들을 소련으로 유학을 보내서 민족 간부 양성을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말이라면 그대로 복종했으며, 그의 정치를 그대로 계승하여 북한을 철저히 소련식으로 건설하였고, 남한까지 사회주의 진영에 끌어들이려고 스탈린과 공모하여 6.25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는 폐허가 되고 수백만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6.25전쟁은 이승만 정권이 미국과 결탁해서 일으킨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전쟁기념관을 참관하고, 거기에 전시된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의 비밀 회담들의 자료들과 스탈린이 크렘린에서 보낸 전쟁개시 날짜가 적힌 문건을 보고는 철저히 북조선이 먼저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0년대는 북한 내 계급투쟁이 매우 첨예했던 시기였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한 후, 흐루시초프가 소련의 수반이 되면서, 그는 스탈린의 독재체제를 전 세계에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든든한 배후였던 스탈린을 비판하는 흐루시초프를 수정주의분자로 낙인찍고, 자기와 항일빨치산을 내세우면서 소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소련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김일성을 없애기 위해 쿠데타까지 준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소련파를 다 숙청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항일빨치산들을 주축으로 수령 중심의 독재정치를 본격화하고 강화했다.

유복했던 유년 시절

김일성의 총애를 받으며 고위직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 덕에 나는 부러울 것도, 걱정도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때까지만해도 북한에는 제4인민학교, 후에는 남산중학교1)라고 불리는, ‘부상’급 이상, 한국으로 치면 차관 이상 급, 군대는 장성, 장령 이상 간부들의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가 따로 있었다.

나는 김정일, 김경희, 김평일, 김영일과 같은 김일성의 자제들과 함께 이 학교에 다녔고, 이들을 다 알았을 뿐 아니라, 교제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김정일의 초청으로 김일성의 저택인 5호 댁에 여러번 놀러 간 일도 있었다.

김정일은 우리에게 맛있는 간식도 먹였고, 직접 피아노도 쳤고, 개인 영사기까지 직접 돌리면서 우리에게 각종 영화도 보여주곤 하였다 (김정일은 어릴 때부터 음악도 잘하였고, 영사기와 자동차는 그의 취미였다).

내가 인민학교 1, 2학년이었을 때만 해도 소련 교원들이 와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나는 러시아어를 배웠고, 러시아 춤과 노래도 많이 배웠다.

그러나 김일성이 소련 수정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김정일은 남산학교에서 소련 교원들을 다 내보내고 소련의 춤과 노래를 금지시켰다. 또한 러시아어로 된 일체 도서들(전국적인 범위에서 정치, 경제, 과학 등 모든 서적과 유학을 가서 쓴 유학생의 노트까지)을 다 불태우게 하였다.

이렇게 엘리트 간부들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녔지만, 정작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북한에서 엘리트 학교에 다닌 사람이라고 해도 상식적인 것도 모른다.

가령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음악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누구인지, 차이코프스키와 쇼팽은 누구인지, 다 모른다. 현재 북한에서는 오로지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것, 그리고 김일성 일가를 위주로 왜곡된 조선역사와, 김일성이 일제의 100만 대군을 멸망시키고 조선반도를 해방시킨 것으로 꾸민 조선혁명역사를 유치원에서부터 가르친다.

김정일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아예 외국 유학이 사라졌다. 최근에는 소수의 수재들과 엘리트층의 몇몇 자제들만 특수학과에 보내고 있고, 외국에 주재한 북한의 외교관들을 자제들 중 한 명만을 데리고 가서 자기의 비용으로 공부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외국인으로부터 직접 ‘북한에서 외국으로 유학 간 대학생들은 그 나라의 중학생들보다도 일반 지식이 못하다’고 들은 적이 있다.

뇌물과 선군 정책

북쪽의 경제사정은 해방 초반까지는 괜찮았다. 해방직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이 북한을 상당부분 지원했고 남아있던 일본 공장들도 가동되어 생산량을 맞추고도 남았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농업상황도 좋아서 쌀도 남아돌았다.

비록 한국전쟁 이후에 남쪽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인프라도많이 파괴가 됐지만(북한은 그 때 남한의 자료를 가지고 “제일 못 사는 남조선” 이렇게 선전한다) 쎄브의 돈을 지원을 받아서 빠른 시간 안에 전후 복구를 이뤄냈다. 이러한 추세는 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소련의 의견에 따르지 않는 김일성에게 후르시쵸프는 소련의 쎄브에 들지 않으면 원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북한이 쎄브에 가입하게 되면 북한이 다른 나라들에 의존하게 되고, 소련 수정주의를 받아들여 혁명은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과 미국에게 점령당한다고 선전하였다.

이렇게 북한은 쎄브에 가입하지 않고, 항일의 혁명정신, 불굴의 자력갱생의 혁명정신 등의 구호들을 제시하며 “우리 식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내놓았다. 이때부터 북한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고, 정치, 경제, 과학과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하강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북한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고수해야만 사람들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양단 옷을 입고 기와집을 만들어 살 수 있게 된다며 사람들을 속였다. 따라서 그는 경공업보다 중공업을 우선시하고, 이를 기초로 군수공업을 발전시켜야 남한과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나라를 굳건히 지킬 수 있다고 선전하며, 모든 국가 자원을 중공업과 군수공업에 집중했다.

반면, 인민이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경공업은 가볍게 여긴 결과, 인민은 날이 갈수록 더 헐벗고 굶주리면서 거지처럼 사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또한 항일빨치산들이 당과 내각 복지관을 독식하면서 뇌물이 만연하게 되었고 이들이 당, 혁명 자금이다 하면서 자기 주머니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당, 특히 복지관들이 세도를 쓰게 되고, 인민들은 종이 되고 말았다.

특히 김정일이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김일성의 사돈의 팔촌 되는 사람까지도 다 한 자리씩을 차지했고, 인민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아마 북한만큼 뇌물 많은 데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실태는 김정일 대에 와서 더 심각해졌다. 김정일은 우선 자신의 권력을 튼튼히 다지기 위하여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 빛나는 태양으로 우상화 시키는데 모든 자원과 노력을 총동원하였다. 그러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자, 공산주의란 말을 다 빼고,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백방으로 강화하고 선군정치를 내놓았다.

이로써 나라의 경제와 중공업을 다 망하고 인민들이 다 굶어 죽어가도, 군수공업을 발전시키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모든 자원을 사용하였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북한의 일반 공장들은 자재와, 원료, 전기와 기름 난으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직 군수공장들만이 가동되고 있다.

뇌물에 대한 실례를 들겠다. 북한의 외화벌이 일꾼은 외국으로 나가기 전과 후에 중앙당, 내각, 외무성, 무역성, 국가안전보위부 등 관계기관의 간부들과 담당일군들, 자기단위의 간부들에게 무조건 뇌물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결함과 단서를 잡히어 다시는 외국으로 못 가게 된다. 이 상황이 오죽 부담스러우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포기하고 외국에 나가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에도 돈이 개입된다. 북한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은 뇌물을 가장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다음은 김책공업종합대학 그리고 평양외국어대학, 평양의학대학, 평양사범대학, 평성이과대학 등의 순이며, 뇌물도 다 각이하다.

오죽하면 2007년 대학입학시험이 끝난 후, 뇌물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보고된 김일성 종합대학보위부에 대하여 김정일은 보위부 전체를 해산시키고, 보위부장을 비롯한 보위원들을 철직, 제대, 출당, 혹은 지방으로 추방시켰다.

무역으로 외화벌이를 하던 내 친구도 교체가 시급한 김일성종합대학의 엘리베이터 와이어 1만 미터를 중국에서 구입해서 대학에 바쳤더니 아들이 입학시험도 없이 무사히 김일성종합대학에 합격했다고 자랑했다. 이러한 실례들은 너무나 많으니 더 언급을 하지 않겠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아무리 결함을 크더라도 돈을 바치면 그 어떤 문제도 제기 되지 않는다. 법이든 권력이든 돈으로 팔고, 살 수 있는 나라이다. 내가 아는 재일동포도 말하기를, 외화만 좀 있으면 북한에서 살기 제일 편하고 물가도 싸다는 것이다. 자기는 통행증이나 자동차 장거리운행증도 떼지 않고 평양에서 신의주, 원산, 함흥 등, 고급담배 한 막대기면 어디든 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북한에서는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만 고생하고,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을 비롯한 간첩들은 북한 땅 어느 곳이든 다 갈 수가 있다. 여기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 대다수가 국경경비대에 돈을 주고 중국으로 넘어 갔다가 온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돈이 있으면 국경을 넘을 수가 있고, 돈이 없는 자는 국경경비대원과 의논하여 두만강을 건너 이들을 중국에 직접 파는 행위들을 하는 것이다.

무너지는 북한의 경제: 어업, 농업, 전력

김일성과 김정일은 우리식 주체조선의 “사회주의건설정신”, “수령결사옹위의 혁명정신” 등 당과 수령의 지시대로 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하여 왔지만, 해방 후 60년 이상이 지난 지금, 노년층들의 이야기 들어보면, 지금이 오히려 일제 식민지 때보다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 실례를 들자면 끝이 없지만 몇 가지만 알려 드리려고 한다.

1. 어업

북한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의 90%는 다 중국의 어선이다. 총참모부에서는 매 해마다 ‘공동 어로’의 면목으로 중국 어선들에게 영해를 내 주며 그 대가로 외화를 벌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북한 어선들이 바다에 나가는 절차가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넣을 기름도 없고 수리를 할 수도 없어 수산물을 잡지 못한다. 그러니 평양을 비롯한 큰 도시들에 있던 수산물 전문상점들은 다 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2008년에 탈북할 때에도 수산물은 시장에서만 비싼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또한, 북한의 동해와 서해의 해안가는 매우 길지만, 고기잡이는 둘째 치고, 파도에 밀려오는 미역이나 곰포까지도 해안가에서 주워 먹지도 못한다. 이는 나라 해안을 미국과 남한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한다며, 철조망과 2-3m의 모래보호선으로 막아 놓아서 경비대 외에는 그 누구도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수력 및 화력

해방 직후 김일성은 레닌의 본을 따서 “전기는 곧 공산주의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수력과 화력 발전소들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건설된 수력발전소들은 물을 채우지 못하여 자기마력을 내지 못했으며, 압록강의 수풍수력 발전소는 중국의 투자로 정기적인 수리와 보수가 이뤄지기 때문에 생산된 전기의 대부분은 중국이 가져간다.

평양화력발전소와 북창화력발전소들은 소련의 50년대 방식으로 건설하여 낡은데다가, 가동을 시키기는 하지만 설비들을 제때에 보수·수리를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설비들의 수명이 다 지나서 가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인공위성으로 북한의 밤을 찍은 사진을 보면 이곳은 암흑의 지역이다. 지금은 평양에 있는 외교관 구역마저도 전기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정도이다.

3. 농업과 배급

김일성은 “쌀은 곧 사회주의이다!”, “전당, 전군, 전민이 농사 혁명에 총동원하자!”라는 구호를 내 걸었지만 주체농법의 도입으로 농경지는 황폐화되고 농업은 실패했다.

해방 직후부터 실시해 온 쌀 배급제는 오늘 날까지 존재하고 있으나 김정일 대에 와서 붕괴되어,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참상이 벌어졌다. 평양시만 배급하는데 10-15일분을 주면 이것으로 온 가족이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배급에 대하여 한 가지 더 언급 할 점은, 한국에 와 보니 돼지, 소, 오리, 닭 등 집짐승이나 가축에게 사료를 공급 해 주는 것이다. 나는 북한에서 60해 이상이나 살면서 배급을 받으며 살았으니, 60년 이상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야 인간대우를 받으면서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북한에 남은 나의 가족, 친척, 동료들은 아직까지도 사람이 아닌 짐승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하루 빨리 그들을 해방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박남기가 당중앙위원회비서직에 있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왜 당이 인민을 충분히 먹이지 못하며 원인은 무엇인가를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집에서 기르는 개를 잘 먹이고 호강시키면 주인 말을 잘 안 들으며, 잠만 자고 집도 잘 지키지 않는다. 반대로 개를 굶기면서 엄하게 다루면 그 개는 주인에게 아첨하면서 말을 잘 듣고 집도 잘 지킨다”라고 답했다.

더불어, 그는 “나라를 남한과 미국으로부터 지키자니 군수공업을 강화하고 핵무기도 개발해야 하는데 많은 외화가 들며 이 자금을 쌀을 팔아서 얻는다. 이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변함없는 노선이다. 만약에 군비를 1%만 줄여 인민들에게 돌리면 배급은 정상적으로 줄 수 있는데…”라고 말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으니 남포항에 출장 갔을 때 어느 한 나라에서 온 쌀을 부두에 정박해놓았다가, 며칠 후 우리 무역선박에 싣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쌀은 아프리카의 어느 한 나라에 수출된다는 것도 들었다. 인민은 쌀이 부족하여 배급을 타지 못하여 굶고 있고, 일부는 죽어가고 있는데도, 왜 우리는 들어오는 쌀을 수출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졌던 일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 해보면 김정일에게는 인민이 인간이 아니라 개였기 때문에 쌀도 주지 않으 면서 자기는 전용비행기를 띄워 뉴질랜드에서는 상어 지느러미, 프랑스에서는 고급 와인과 꼬냐크,러시아에서는 연어알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날라다 먹으면서 편히 잠을 잤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문제가 많이 있지만, 한국에는 적어도 사람사는 것이 기본은 되어 있다. 공산주의 사회는 구호만 요란스레 붙여놓았을 뿐, 실제로 사람을 위해서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내가 여기 와서 깨닫게 된 것은 북한에서는 모든 혜택이 위대한 수령, 지도자한테만 가지 인민들한테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경위를 보면 나는 빨갱이 중의 빨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빨갱이로서 남쪽에 와보니까 무엇이 허위였는지를 누구보다도 더 절감하고 알게 됐다.

정보 및 지식의 차단

북한의 TV 채널은 ‘평양채널’ 하나 밖에 없고, 다른 채널은 보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라디오도 평양 방송만 들을 수 있도록 라디오 파장을 고정시켜 놓았을 뿐 아니라, 반도체 라디오를 가지고 있으면 간첩으로 간주하여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컴퓨터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으며 인터넷 사용도 불가능하다. 핸드폰은 작년부터 보급이 시작되었지만, 군대에서는 소유하지 못하고, 당, 행정 등 간부들과 엘리트들만 가질 수 있다. 그마저도 국내의 제한된 지역에서의 통화만 가능하고, 국제 통화는 생각도 못하는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북한은 외국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철저히 ‘통조림화’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인민은 철저히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한 정부가 인민을 우롱하는 예로서 이런 일도 있었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쏴 올렸다고 TV에서 요란하게 뉴스를 내보낼 때, 나는 핵분야에서 과학자로 일하는 여러 명의 학교 동창들과 TV 앞에 앉아 있었다.

뉴스에서 아나운서는 “…철저히 우리의 과학자, 우리의 자체의 힘으로 인공위성을 성과적으로 쏴 올리는 데 성공하였으며, 우리 주체의 위성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노래를 온 우주에 소리 높이 울리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하자, 나의 동창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내가 왜냐고 물으니, 그들은 ‘러시아 과학자 12명이 주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명의 외국 과학자들이 이 사업에 참가하였으며, 기본적인 자재와 설비들은 다 배로 외국에서 실어 왔다’고 실토하였다. 또한 ‘이번에 발사한 것은 인공위성이 아니라 장거리 대륙 간 탄도 로켓이었는데 일본을 넘어 태평양에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로켓만 가지고도 남한과 일본은 물론이고 하와이에 있는 미군 기지들까지 타격할 수가 있으니 큰 성과라고 말하였다. 김정일은 이런 식으로 인민을 속이고 기만하면서 기반 유지를 위해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개발하는 등 북한을 군사강국으로 만드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제대와 재쏘임업대표부


북한군대에서 복무할 때, 보통의 항일투사 자제들이 그렇듯 고위직 아버지 덕택에 나의 진급도 상당히 빨랐던 편이다. 하전사 복무를 거쳐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중좌 직급의 직무에 배치되어 27살에 소령으로 근무하게 되었으니 아주 빠르게 진급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 당시에도 북한 군인들이 남한에 귀순하는 일이 많았기에, 김정일이 “외국 출신 아니면 계급적으로 높은 사람 자제들이 외국으로 달아난다. 그러니 그런 군인들을 다 검토 정리하여 제대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곳은 김정일 말이면 모든 것이 이뤄지는 곳이니, 나는 꿈이 꺾인 채 강제제대 되었다. 강제제대 된 후 나는 재쏘임업대표부로 가게 되었다.

당시 소련에 가보니 북한 재쏘임업대표부와 대표부당위원회 그리고 대표부보위부가 위장을 위하여 안전부의 이름으로 있었다. 그 산하에 2개의 임산연합기업소와 연합당위원회 그리고 연합안전부가 있었으며 그 아래 17개의 임산사업소, 사업소초급당과 임산사업소 안전부가 있었고 총 인원수는 2만 5천명이 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국내에서 죄를 지었거나, 교화 출소자, 기본 계급이 아닌 청산 계급을 비롯한 조선 혁명에 필요 없는 자들을 재쏘임업대표부 노동자로 보냈다. 나는 군대에서는 강제 제대되었지만 거기에는 지도원 급으로 파견되었다.

재쏘임업대표부로 보내지는 노동자들, 특히 장애를 가졌거나 중병을 지닌 자들은 혁명에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하루는 우리 임산사업소의 산지중대에서 산불이 일어나 모든 인원이 산불 진압에 동원 되었고 러시아 사람들도 헬기 2-3대를 타고 도우러 왔다.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중대부 옆 반토굴집이 있었는데 그곳은 벌목하다 사고로 팔과 다리를 못 쓰고 누워있는 사람, 그리고 중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 하는 사람이 12-13명이 있었다. 불이 그 반토굴까지 다가왔으므로 이들부터 빨리 대피시켜야 하는데 북한 사람들이나 소련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아니 저 사람들부터 구하는 게 기본이 아닙니까” 하니까 다들 그저 “됐어, 됐어” 하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보위지도원한테 “왜 저 사람들 헬기로 빨리 옮겨서 치료하여 살리지 않는가?”하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는 “됐어, 됐어. 모르면 가만있으라. 저것들은 다 죽어도 돼”라고 하기에, 내가 “왜요?”하고 물으니, “저것들은 계급적으로 다 청산 대상이야…….”라고 하였다. 이게 바로 북한이다.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평양에 있는 장애인들을 혁명에 불필요한 존재다 해서 내쫓은 적도 있었다. 외국인들이 와서 팔다리 없고 절뚝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평양 모습을 다 흐린다고, 장애인을 다 내보내라 해서 그 때는 다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학급에도 꼽추인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평양에서 쫓겨 나갔다.

그때, ‘꼭대기부터 이러니까 나라 전체가 안 되겠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장애를 가졌거나, 계급적으로 결함이 있으면, 즉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부모들이나 할아버지라도 일제시기에 흠이 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또 북한은 정책에 반대하는 인민들은 정치범수용소에 가두고, 그게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완전통제구역으로 보내버리거나, 숙청하고, 총살하고, 공개총살까지도 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못 봤지만 제대 뒤에는 나도 공개총살을 많이 보았다.

강제제대 되자마자 당국에서 한 번 모이라고 하더니 경기장 옆에 숱한 사람들을 앉혀놓고 다섯 명을 따로 세워 놓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삐라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사실은 삐라를 살포하지도 않은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온 것이었다. 당국은 김정일이 언제까지 혐의자를 잡으라고 날짜를 정해주면 그날까지 체포해야 되니까 다른 죄가 있는 사람들을 잡아서 공개총살로 해치운 것이다.

당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제일 앞에 앉아서 이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사형수는 말도 못하게 혀 안에 자갈을 물리고 묶어놓은 후 “삐라 뿌린 놈”이라고 하더니 쏴 갈겼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본 공개총살의 광경이었다.

충성의 대가: 체포와 사상검토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돈을 벌면 자기가 못 가지고 다 당에 바쳐야 된다. 그것으로 충성심을 평가 받고 훈장도 받고 직위도 올라간다. 나는 돈을 잘 벌어서 평가도 잘 받고 심지어 김일성・김정일과 사진도 여러 번 찍었고, 감사장과 표창장, 그리고 선물도 여러 번 받았고, 훈장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아무리 충성을 다해도 험한 꼴을 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는 충성을 다하고 돈 잘 버는 사람들도 때때로 사상검토를 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나도 이런 식으로 체포되어 사상검토를 당했다.

하루는 출근하는데 길옆에 차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앞 좌석에는 내가 잘 아는 보위원이 타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 하면서 뒷문을 열고 타라고 하여,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차에 탔다. 순간 양쪽에서 사람들과 운전수가 올라타더니 차가 출발했다. 보위부가 사람을 이렇게 잡아가니 집에서는 내가 체포된 줄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저 없어지고 말 뿐이다. 하지만 결국엔 다들 안다. ‘북한정권에서 또 체포해갔구나’ 라고. 그 후에 알았지만, 내가 체포된 원인은 이렇다.

국가안전보위부에는 외화벌이 또는 무역회사들에서 한 부서가 3년 동안 국가계획을 초과 수행하면 책임자를 사상검토를 해야 한다는 김정일의 방침이 있다. 사상 검토의 이유는 책임자가 “재외생활을 오래 했으니까 분명히 그 나라 특수기관들에 전향했다. 그래서 돈도 잘 번다”라는 것이다. 즉, 나는 돈을 잘 벌어서 당 혁명자금에 많이 기여했는데, 오히려 기여를 많이 할수록 사상검토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책임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집에 한 푼 남기지 않고 그저 돈을 버느라고 열심히 일했는데 말이다.

많은 외화벌이 일꾼들이 사상검토를 당하는 것처럼, 나도 사상검토를 당했다. 사상검토를 당하면 살아남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체포된 후 심문을 당하는 과정에 거의 다 죽거나,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정치범수용소 혁명화 구역에 가서 죽게 된다. 여기에서도 죽지 않으면 어느 산골에 추방되어 광산이나 탄광에 가서 죽을 때까지 일한다. 나도 8년간 국가안전보위부에 잡혀 가서 많은 것을 겪었다.

보위부 예심국에서의 고문

나를 체포한 곳은 국가안전보위부 제3국이라는 대외정보국이다. 처음에는 나를 초대소로 데려가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사상검토를 하게 되었으니, 이제 며칠 동안 사상검토에 잘 응해달라”고 선포하고 그곳의 계호원들에게 나를 넘겼다.

그들은 제일 먼저 내게 혁대부터 풀라고 했다. 혁대를 푼 다음에 옷을 하나하나 다 벗기더니 그 곳 옷을 주었다. 혁대도 없고 단추 하나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옷이었다. 신발은 사이즈가 큰 고무신인데, 그것도 뒤에는 째놓아서 감방에서는 맨발로 있어야 한다. 그 후, 아주 조그만 감방에 나를 가두어 놓았는데 감방의 한쪽 구석에는 변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앉혀놓고 재우지도 않고 굶겼다. 보통 사흘을 굶고 나면 다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일으켜 벽을 향하게 한 뒤 손이 발 끝에 닿는 자세로 구부리고 서 있게 하는데, 이 자세로는 아무래도 오래 서 있지 못하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때 보위부원이 뒤에 있다가 죄수가 조금만 움직이면 발로 성기를 차서 고꾸라뜨린다. 그게 아마 남자한테는 가장 심한 고문일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고문 방법들은 히틀러 시절 게슈타포나 스탈린의 KGB 들이 쓰던 고문 방법들을 보다 발전시킨 것들로, 가장 고통스럽고 야만적이다.보위부 지국을 여섯 군데 돌고 나서 예심국으로 가게 되었다. 예심국은 죄를 인정하도록 하고 재판을 하는 곳이다.

나는 러시아, 중국 그리고 남조선 안기부와 내통한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배신한 역적으로서 가장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 계호원들은 나와 같은 역적의 누명을 쓴 죄수들에게는 악질적으로 대하였으며, 보통 “야! 이 반동 놈의 새끼야” 라고 부르면서 갖은 만행을 아끼지 않았다.

예심은 원칙적으로 3개월 안에 끝내야 하지만 예심국은 재판도 없이 6개월 이상씩 마음대로 연장할 수도 있고, 죄를 증명하지 못해도 잡아둔다. 여기서는 사람이 고문과 영양실조 등의 고통을 못 이겨 저절로 죽을 때까지 잡아둘 수가 있지만, 나처럼 김정일이 알고 있는 인물들은 다른 죄수들과 차이가 났다. 다시 말해서 김정일이 나를 찾을 경우를 대비해 마음대로 죽이지 못했다. 때문에 내 예심 기간이 1년 8개월로 길어졌다.

이 기간에 나는 고문과 영양실조, 그리고 허약과 각종 병으로 두 번이나 보위부 병원에 입원했었다. 예심국에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나에게 뒤집어 씌운 간첩죄를 증명하지 못 하겠으니, 재판은 하지 못 하고 이러 저러한 결함을 잡아 걸어 혁명화, 노동계급화 시켜야 한다면서 나를 요덕 제 15호 정치범수용소의 대숙리 구역으로 보냈다.

예심국에서는 몇 명씩 모아서 혁명화 구역으로 보내기 때문에, 인원이 어느 정도 모이기 전까지 동안 내게 예심국 안에서 청소 등 여러 가지 일을 시켰다. 그 때, 재판실 청소를 한 적도 있다. 재판실은 영화에서 보던 조그만 방이었고 예심국장, 재판관, 죄인의 자리는 나무판자로 구분되어 있었다. 재판관이 앉는 자리 뒤쪽 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가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 사진이 걸려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앉는 의자도 있었는데 한 여덟 개 정도밖에 없었다.

청소하면서 누군가에게 슬쩍 이곳에 대해 물어보니까 사람들은 여기서 재판을 받고, 받은 형에 따라 다른 데로 이동된다고 하였다. 만약 사형이 선고되면 “반역자들한테는 총알이 아까워서 쏘지 않는다” 라며 복도를 걸어가다가 “서라, 앉으라” 해서 꿇어앉혀 놓고, 뒤에서 이마와 목을 쥔 후 순간적으로 비틀어 형을 집행한다고 했다.

또 다른 방에는 TV 화면이 세 줄로 배열되어 있었고 3-4명의 계호원이 앉아서 화면을 보는데, 내가 갇혀 있던 감방을 포함하여 예심국의 모든 방을 감시 하고 있었다. 이처럼 예심국에서는 감시카메라로 감시하고 계원들이 감방 주위를 늘 빙빙 돌며 지키고 있었다. 한 명이 한쪽을 도는 사이 다른 사람이 다른 쪽을 돌며 지켜보는 식으로 항상 죄수들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감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의 큰 방이 있으면, 그 방 한가운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 작은 방들의 바닥은 그 아래의 바닥에서 50cm정도 떨어져 있고, 그 때문에 감방의 문 앞에는 계단이 세 개 있었다. 각 방의 정면과 양 옆에는 벽이 있지만 뒤쪽은 동물원 우리처럼 쇠창살만 있었다. 마치 새 둥지 같았다.

 죄수는 그 살창을 등 져서 앉아 있으므로 계호원이 언제 뒤에 와서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한 자세를 늦출 수 없고,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졸면 어느새 쇠창살 사이로 계호원의 매가 들어왔다. 이렇게 계호원은 아무 예고도 없이 죄수를 마구 때릴 수 있었다.

정면의 벽에는 1m정도 되는 작은 문이 있는데, 아래쪽에는 밥이 들어오는 구멍이 있었고 위쪽에는 내 얼굴만 비치지만 반대쪽에서는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특수거울이 설치되어 있다. 죄수는 앉아 있는 내내 눈도 내리깔지 못하고 그 거울을 계속 마주 쳐다봐야 한다. 죄수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거울을 보며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하는데, 자의로 할 수 있는 한가지는 가끔씩 꼬고 앉아 있는 다리를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일절 움직이지 못한다. 손도 정확히 무릎 위에 올려놔야지 허벅지에 올려놓거나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간수들이 다 보고 있지만, 혹시라도 몰래 움직이면 감방이 천장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었다. 작은방의 바닥과 그 아래의 바닥 사이에는 도청기까지 설치가 되어 있어서 숨만 크게 쉬어도 앉아서 감시하는 자들이 다 들을 수가 있었다.

죄수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 아예 죽지도 못하게 사람을 감시하는 것이다. 소변을 보고 싶으면 팔을 올리고 손가락 하나를 세우도록 되어 있었다. 손가락 두 개는 대변, 세 개는 물을 달라는 신호였는데, 세 번째 신호(물 요청)의 경우 아무리 손가락을 올려봐도 물을 주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써본 기억이 없다.

소변을 보겠다고 요청을 하면 바깥에서 말도 안 하고 탕탕 소리를 낸다. 소리가 두 번 나면 요청을 승인한 것이다. 그러면 (서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벌벌 기어서 등 뒤의 변기로 가서 앉아서 소변을 본다. 소변을 볼 때도 서서 보지 못하게 했다.

감방문은 녹이 슬어서 열 때 요란한 소리가 났다. 혹시라도 죄수를 몰래 풀어주는 일이 없도록, 계호원들 마저 통제하는 것이다. 계호원이 수감자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는 우선 조그만 문을 열고 “00번, 나와!”(거긴 다 번호로만 부른다)하고 부른다. 수감자가 혹시라도 계호원들에게 덤빌까봐 절대로 마주 보고 서있지 못하게 하고, 족쇄를 채우도록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러면 “가자”라고 하고, 수감자는 밖으로 나간다. 이곳에 두 달 앉아 있으면 대체로 잘 걷지를 못하기 때문에 계호원 둘이 와서 수감자 팔을 끼고 간다.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도 험한 꼴을 당할 때가 있다. 감방 문 아래쪽의 음식 구멍에 얼굴을 들이대고 입을 크게 벌리라고 할 때가 있는데, 거기다 간수가 가래침을 뱉는다. 구타도 비일비재했는데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문밖으로 손을 내밀라고 하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요덕수용소의 생활

예심국에서 1년 8개월을 있던 어느 날 계호원이 나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더니 버스에 태워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후에 알게 된 바로는 거기가 관리소들을 총괄하는 제7국이었다. 울타리가 둘러진 마당에 내리니,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왔다. 잠시 후, 내 이름이 써져 있는 보따리 두 개 안에 수용소에서 쓸 이부자리와 옷을 넣어서 트럭에 실었다.

그리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당시 닫힌 트럭을 타고 들어갔기 때문에 어딘지도 몰랐고 내린 후에야 ‘산골에 왔구나’하고 생각하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곳이 바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요덕 제15호 정치범수용소였다. 관리부원들이 신참 수감자들을 소대배치 하더니 여기서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신입훈련을 한 달 하고 나면 중대에 배치를 한다. 집단생활이긴 하지만 자기가 자길 잘 챙겨야 되는 곳이었다.

요덕에서의 생활은 그나마 보위부보다 조금 나았다. 솔직히 둘을 비교하면 요덕은 요양소였다. 요덕 수용소에도 죄질의 경중에 따라 구역이 나누어져 있는데, 내가 간 곳은 가장 편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구타행위가 있기는 하지만 매 맞을 짓을 안 하면 달리 수감자를 고문하는 게 없다. 내가 재쏘임업에 있었다고 하니까 나에게 벌목을 시켰다.

나는 보위부원들이 살 집도 짓고, 울타리도 치는 데 사용될 나무를 채벌하고 제재해서 판자와 각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보위부원들은 나를 독립소대장을 시켰다.

거기서 먹는 것은 강냉이 밥도 아니고 아예 강냉이 죽이다. 소화가 안 되는 음식을 주면 안되니 멀건 죽 같은 강냉이를 주는 것이다. 그 외에 찌개라든가 다른 반찬은 없고 야채 잎사귀를 조금 넣은 국이 나온다. 그 안에서는 일년에 이밥(쌀밥)을 두 번 준다. 2월 16일 김정일 탄생일과 4월15일 김일성의 탄생일인 태양절 점심에 이밥을 주는데, 이밥 한 사발이 그저 살살 녹아 넘어간다.

요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설사다. 그곳에서 설사는 죽음을 의미했다. 내가 알고 있고 또한 남한에서 배운 바로는 설사할 때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데, 이곳에서는 반대로 영양실조가 너무 심하거나 설사를 심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에다가 기름을 조금 넣어준다. 그러면 변이 굳어져서 설사가 멎는다.

석방과 탈북

요덕수용소에서 석방될 때는 당국에서 무언가를 읽어준다. “위대한 장군님 배려로 몇 월 몇 일 말씀으로…….” 그러고 나면 서약서를 쓰게 하고 버스에 태워서 내가 일하던 곳에 가서 당위원회 당비서, 조직비서, 선정비서 세 명 앉혀놓고 방침전달을 했는데, 나는 김정일의 배려로 직위, 칭호, 당원증 등 모든 것이 다 원상회복되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보니 벌써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들이 다 와 있었다. 여기서도 가족들을 다 앉혀놓고는 또 방침전달을 했다. 그렇게 요덕에서 나와서 원래 직업에 종사하면서 평양에서 살고 있었는데, 친구 중 하나가 나에게 다시는 러시아에 나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유인 즉, 보위부는 한 번 잡았다 놓친 사람은 끝까지 추적해서 해코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잡으려 하는구나. 이제 내 나이가 벌써 60이 지났는데 다시 잡혀가면 우선 육체적으로 못 견딘다. 그러니 이 나라를 떠나는 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탈북을 감행했다.

북한을 나와서 간 곳은 재쏘임업소를 통해 좀 익숙해진 러시아였다. 러시아에서 모스크바 주재 유엔 난민대표부와 연락이 되었다. 난민대표부에서는 나를 전용차에 직접 태워서 모스크바 시내에서 멀지 않은 시골로 데려갔다. 가보니 북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흑인들도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 그 난민시설에서 살면서 다른 곳으로 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당시 열 명의 북한사람들이 있었는데 두 명은 미국으로, 또 다른 두 명은 독일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난민대표부는 나에게 “러시아에 있기는 어려우니 어디 가겠나”하고 물었는데, 내 나이가 62세였으니 나는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결국 ‘아무래도 말도 알고 풍속도 알고 같은 민족인데, 이때까지 철천지 원수로 교양 받았지만 가서 살다보면 다 같은 민족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서 “저는 미국이고 독일이고 갈 데가 없으므로 한국에 가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민시설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기다리다가 한국으로 2009년 4월에 오게 되었다.

자유세계와 무한한 발전성

한국에 대해서는 1990년 이후 러시아에 한국 목사들과 상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원래 한국 사람들과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나는 접촉했다.

이제 남한에 온지 3년이 되었다. 나는 60년 이상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북한과 소련에서 살면서 대한민국을 겨냥해서 무기를 손에 쥐고 군복무도 하였고, 혁명의 수뇌부인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나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격려해주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는 기회 및 집과 돈을 제공해 주고, 정착을 잘 할 수 있도록 교육도 해주고, 의료급여1종을 비롯한 많은 혜택을 주었다.

북한에서는 남조선 사람을 만나 접촉했다는 것으로도 벌을 주는데, 여기 한국에서는 오히려 포용·교육하여 살 수 있게 배려를 해주니, 이런 사회야 말로 사람을 위한 사회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동안 다닌 곳도 많고, 본 것도 많지만, 누구도 나한테 강요해서 돌아다녀본 것이 아니다. 북한이나 소련에 있을 때처럼 누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전하고 “이거 좋다, 저거 나쁘다” 정해주는 것도 없다. 남쪽에서는 직접 다 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좋고 나쁜지를 개인의 판단에 자유롭게 맡긴다.

이것이 사람이 살 자유세계이고 인간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게 하는 사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앞길을 열어주고 온갖 배려를 다 베풀어 준 고맙고 진정성 있는 사회와 제도에 보답하기 위하여 여기서 배운 그대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스로가 찾아서 나라에 보탬이 될 일을 할 것이며,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서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된다.

2015년 1월 31일 토요일

불쌍한 어머님

이광호/탈북자동지회

저의 어머님의 고향은 남한의 경상북도 입니다.

해방 전부터 가난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녔던 저의 어머님은 가난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6.25전쟁 때 북한 의용군에 입대하여 이북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인민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결혼해 저희 3남2녀를 낳아 키우셨습니다.

어머님께서 이북에 보금자리를 튼 내 고향은 함경북도 김책시(옛 성진시) 쌍암동 대동골이라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쌍포포구가 그리 멀지 않은 자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북한을 떠난 지 30년 가까이 되지만 지금도 고향의 아련한 추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여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방학숙제를 대충 해놓곤 곧바로 쌍바위가 오뚝 서있는 도래굽이 해수욕장에서 해지는 줄 모르고 물놀이에 정신이 팔리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아련한 그때의 추억을 잊을 수 없는 건 해수욕장에 인접한 포구에 가끔씩 돛단 고깃배가 닻을 내리고 성게 해삼을 비롯한 진귀한 어물을 부릴 때면 일시에 애들이 모여 저마다 시루속의 콩나물처럼 머리를 빼들고 구경하던 웃지 못 할 그 모습입니다.

그 통에도 햇볕과 해풍에 가맣게 그을린 애들이 빼곡히 서있는 사람들 다리 사이로 꼬물거리는 해산물을 날쌔게 가로채 해수욕장 저편으로 줄행랑을 놓으면 그 뒤를 따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쫓아가는 어부들의 모습에 백사장에 몸을 지져대던 어른들까지도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하던 그 광경, 이것이 아마도 1960년대 후반, 인정과 인간의 묘연한 정서가 함께 어우러졌던 아련한 고향의 추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0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고향을 찾았을 때에는 아늑한 보금자리로만 간직되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성진 고갯마루까지 다닥다닥 들어선 초라한 양철집들과 그 사이로 악취를 풍기며 흐르는 생활오수가 대동천의 작은 개울을 오물장으로 만들어 버렸더군요.

특히 아침 출근길은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이곳 한국의 출근길 교통체증인양 고향마을의 동구길은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뒤엉켜 마치 물목에 갇힌 미꾸라지 떼를 방불케 했습니다. 여름철에는 장마로 하천이 불어나 초라한 복토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산등성이를 에돌아 길 아닌 길로 등하교와 출퇴근을 하군 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성진 내화물공장에서 나오는 유해가스로 주변 산의 목초는 가을단풍처럼 발갛게 타죽고 살아있는 나무마저도 땔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난벌하여 이미 산은 벌거숭이가 된지 오랬습니다. 하기야 산이 공해에 타죽고 있는데 그 밑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은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티 없이 맑고 깨끗했던 도래굽이 해수욕장도 여과하지 않는 성진제강소의 산업폐기물과 생활오수로 급속히 썩어갔습니다. 아름답던 내 고향은 이렇게 40여 년 전부터 죽음도시, 죽음의 바다로 파멸돼 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처절하게 파멸돼 가는 북한의 실상 때문이었을까요?

그처럼 건강하시던 어머니도 향년 54세를 넘기지 못하시고 근무현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986년 3월 18일, 어머님이 떠나신 그날은 겨울을 마감 짓는 예년에 보기 드문 함박눈이 내려 온 강산에 하얀 이불을 깔아놓은 듯 했습니다.

그 밤에 누가 보기나 합니까? 누가 어머니의 충성심을 평가라도 해줍니까?

쇠뇌 된 충성심은 어머님을 그날 밤 늦게까지 제강소 구내에 군왕처럼 자리 잡은 김일성 현지지도 사적비 주변의 눈을 말끔히 치우게 했고 잠시 몰려오는 피곤을 피하려 휴게실에 들어오셨던 어머니는 결국 뇌출혈로 영원히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1986년이면 그래도 배급이 정상적으로 공급되고 사람살기가 지금보다 훨씬 낫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다 우리 집은 두 동생이 군대에 나가고 누이동생도 다 시집가고 아버님도 외국에 기술대표단으로 나갔다 오시군 해서 부모님 내외가 생활하시기 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급작스런 비보를 접하고 아버님 집으로 달려간 우리내외가 어머님을 맞을 준비와 조문객 받을 준비를 분주히 서두르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밥공기를 들고 오열합니다.

아내가 들고 있는 밥공기에는 전날 어머니가 드셨던 밥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쌀이 한 알도 섞이지 않은 노란 강냉이밥 한 숟가락이 전부였습니다. 자식들이 뒷바라지에 온갖 심혈을 기울여 오신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뒤에 돌아앉아서는 자식들 몰래 굳은 음식만 드셨던 것입니다.

더욱 원통한 것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의 노력으로 당원이 되고 파견간부가 되고, 어엿한 5남매의 어머니로 성장하였는데 이것마저도 ‘수령님’은덕으로 돌리며 우리 자식들 보고 수령님께 끝까지 충성 다하라고 항상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용광로 쇳물보다도 더 뜨거운 열정과 태산보다 더 높은 어머님과 같은 쇠뇌 된 충성심이 조선로동당을 받들고 있었기에 북한의 일당 독재체제가 아무런 거리낌도 3대를 세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일생을 충성심 하나로 김정일 체제를 받들어온 어머님이시건만 남기신 것은 싸늘한 시신과 입쌀 한 알 섞이지 않은 강냉이밥 한 숟가락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굶어죽는 사람의 시체가 버려진 장작처럼 길가를 메우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에 비하면 어머님의 돌아갈 당시는 그나마 강냉이밥이라도 먹을 수 있어 행운 이였습니다.

식량 기근과 함께 시작된 제1차 ‘고난의 행군’시기에는 내 고향 김책에서도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얼어 죽었으며 심지어 가족단위로 무리죽음을 당한 사람이 그 얼마인지 모릅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불과 3년도 안 되는 사이에 300만의 무고한 주민들이 무참히 굶어죽었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희생된 인명과 거의 맞먹는 수자입니다. 군대로 말하면 300개 사단의 유색역량이 굶어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인류역사에 언제 이런 비참한 역사가 기록된 적이 있습니까?
이는 전대미문의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오직 김정일 살인악마만이 저지를 수 있는 살육행위입니다.

……

가난의 멍에를 벗어 보려고 ‘장군님’의 품을 찾아 3천리 북행길에 올랐던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그 아들이 6만 리 노정을 에돌아 어머님의 고향마을을 처음으로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6여 년 전인 1996년 봄이었습니다.

어머님을 낯선 이북땅 이름 없는 산언덕위에 모셔놓고 어머님의 영전도 없이 난생처음 외가집을 찾았을 때 저를 맞아주신 분은 90고령의 외할머님이시였습니다.

어머님을 김일성에게 빼앗기고 90평생 동안 딸을 기다리며 동구길을 지켜 오신 외할머님이시였건만 그 딸은 보이지 않고 얼굴도 모르는 40대 장정이 찾아왔으니 외할머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이 녀석아! 네 어미는 어디에다 팽개치고 너만 이렇게 혼자 온단 말이냐?”

밭고랑처럼 움푹 패인 양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흘리시며 외할머님께서는 50여 년 전에 헤어졌던 딸을 만난 것처럼 마지막 힘을 다해 저를 꼭 껴안아 주십니다.
그리고는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사랑하는 딸, 나의 어머니를 따라 하늘나라로 떠나셨지요.
저 들녘에서 바람에 실려 물씬 풍겨오는 신록의 봄향기가 시골마을을 가득 메워도 이제는 어머님의 고향마을을 찾아도 나를 다시 감싸줄 외할머님의 왜소한 품도 없습니다.

그러나 꿈에도 못 잊어 하시던 외할머님과 두고 온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낯설고 물설은 이름 없는 북녘의 산등성이에 누워계실 어머님, 그리고 김정일 압제 속에서 굶어죽은 300만의 무고한 주민들과 그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무참히 희생된 탈북자들에 비하면 저는 지금 너무도 행복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부강한 대한민국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인생을 바꿔준 극과 극의 두 사회

박명순/탈북자동지회

1997년 초.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어느덧 만물의 새싹이 움트는 이른 봄 어느 날, 사람들이 분주히 붐비는 작은 시장 통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핼쑥한 얼굴의 18살 처녀애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애걸의 시선을 보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쳐본다.

“떡 사세요, 떡이요. 쫄깃쫄깃하고 맛있는 떡이요”

엄마는 언니가 보내준 3kg도 채 안 되는 횐 쌀을 깡그리 털어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것으로 떡을 만드셨고 몸이 안 좋은 엄마를 대신하여 나는 장마당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몇 년 째 계속되는 ‘고난의 행군’이 가져다 준 불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굶주림과 함께 삶의 희망마저 빼앗아 갔다.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커다란 포부를 안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장래의 희망을 꿈꾸던 나는 모든 것이 변해버린 지금의 현실을 한탄하며 배움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시장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기름이 반지르르하게 도는 떡을 바라보는 나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는 사이 군침이 맴돌았지만 그 떡에는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떡 한 개를 팔아 얻은 수익은 겨우 50전, 그 떡을 다 팔아야 국수 반 사리, 또는 밀가루 500g을 사가지고 들어가 죽이라도 써서 가족의 끼니를 에울 수 있었다.

학교 동창이나 아는 사람의 시선을 피해 시장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나는 구루마를 끌고 여기저기 다니며 작은 통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팔고 있는 한 여인과 눈이 부딪쳤다.

그는 다름 아닌 중학시절 담임선생님이었고 교단이 아닌 시장을 누비며 1원짜리 얼음과자를 팔고계시는 그의 모습에는 그 옛날의 카리스마가 넘치고 다정하신 스승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에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60세이 넘으신 아버지는 영양실조로 누워계셨고 안 좋은 몸으로 밤낮 따로 없이 고생하시는 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어 나는 대학의 꿈을 접고 장사의 길에 나섰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아버지의 생신이지만 멀건 죽 세끼도 먹기 힘든 가정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는 나는 입던 운동복을 엄마 몰래 시장에 들고 나가 판 돈 으로 흰 쌀밥 한 그릇과 두부 한 모를 사드렸다.

부잣집 자식이나 간부 집 자식들이 매일 먹는 그 한 끼 식사, 하지만 오랜만에 막내가 차려준 평범한 생일상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가에는 딸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서러움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해 영양실조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시던 아버지는 한 많은 세상을 한탄하시면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고 그 충격에 앓던 엄마마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배움의 꿈을 접고 학교동창들과 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장마당에서 생계유지에 나섰던 나는 이 세상에 단 혼자뿐인 불우한 인생을 한탄하며 아무런 삶의 희망도 미련도 없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대신 평생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아픈 상처만 남긴 채 나는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중국 공안당국은 북한정권과 협력하여 탈북자 색출에 나섰고 그것이 두려워 신분을 숨긴 채 여기 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던 나는 세계 여러 나라 정보를 접하게 되었고 대한민국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북한의 독제정권의 발판아래 속으며 살아온 그 세월. 나 혼자뿐이 아닌 북한 인민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북한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대하여 알 수 없었고 대한민국에 대하여서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나는 위험을 무릎 쓰고 8년간의 기나긴 이국땅에서의 고생 끝에 꿈에도 그리던 자유의 땅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내가 알고 있었던 한국은 사람 못살 사회였지만 내가 보고 느낀 한국은 그야말로 지상천국이었다.

혈육 하나 없는 나를 처음으로 맞이해주신 분은 다름 아닌 담당형사님이었고 그 분을 비롯하여 수많은 분들이 한국정착의 첫 걸음을 내딛는 나를 도와주셨다.

맑은 햇살이 밝게 비치는 아담한 집에서 하루 세끼 흰쌀밥에 먹고 싶은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자신의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쳐 갈 수 있는 사회, 여기가 바로 내가 태여 난 제2의 고향이다.

내가 선택한 길, 내가 택한 대한민국, 나는 지금 여기서 너무 너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여기서는 누구나 평범하게 접할 수 있는 한 끼 식사,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그 시절의 북한에서는 그 한 끼 식사를 마련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품을 팔아야 했고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을 버리고 이국땅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길거리에 하나둘 늘어나는 꽃제비들, 시장의 음식 매대 앞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은 국물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제발 국물만이라도 남겨 주세요” 속으로 몇 백번 외쳐보는 듯한 10대 이하의 어린이들, 점점 형태 없는 벌거숭이로 변해가는 산과 들...

그러나 더 가슴 아픈 현실은 10여년이 지난 오늘도 북한 땅은 아직도 변함없이 독재정권의 통치하에 무고한 인민들은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과 관련된 가슴 아픈 소식들은 접할 때마다 한 하늘 아래에서 어떻게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비극을 하루빨리 없애고 북한 땅에 사는 우리 부모형제들도 빼앗겼던 꿈과 희망을 되찾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5년 1월 17일 토요일

한 납북 어부의 30년간의 북한 생존기




‘납북귀환자의 이야기’는 1975년 8월 동해 공해 상에서 어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납북되었던 어선 ‘천왕호’와 배에 탔던 선원 33명 중 한 사람인 최욱일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한의 가족과 납북자가족모임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북에 성공하여 2007년 1월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다.

납북된 33명중 22명은 모두 굶어 죽었다. 지난 3월 15일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제네바에서 열린 제99차 유엔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 미팅에서 최욱일 아버님이 북한에서 자신을 포함한 납북자들의 생활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가로지르며, 경기도 안산에 살고 계시는 최욱일 아버님 댁을 방문했다. 납북된 지 32년 만에 황혼의 나이가 돼서야 재회하여 새로 시작한 신혼 부부 마냥 행복에 젖어있는 이들 노부부에게 아팠던 두 인생의 지난날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프지만 행복한 오늘이 있어 즐겁게 추억할 수 있고, 힘들게 버티고 이겨낸 세월이 있어 최욱일 씨 부인이 구수하게 부쳐낸 메밀김치 지짐과 한 잔 술이 더 맛나게 느껴지는 듯 했다. 아픈 그들의 지난날들은 오늘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편집자)


꿈과 함께 만든 기계배

내 고향은 강원도 주문진읍 교향리이다. 이 고장 토박이로 시집간 누나도 같은 동네에 모여 살았고 온 가족이 그렇게 같이 살았다. 원래 바닷가에서 나서 자란 나는 일찍이 나무배를 타고 고기잡이 일을 해왔었다. 자연스럽게 어깨너머로 배 위에서 하는 일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배우게 되었다.

21살에 일찍 결혼하고 계속 뱃일을 했다. 그러던 중 큰 배를 하나 장만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기계 배로 고기잡이를 하면 속도도 빠르고 힘도 더 세고 해서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드디어 1974년 거금 3천 7백만 원(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0억 원 정도는 더 될 것임) 돈을 들여 39톤급 기계 배를 마련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희망과 꿈을 담아 아끼고 아껴서 장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배는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했고 모두가 기뻐했다. 그렇게 우리의 꿈이 담긴 “천왕호”가 만들어졌다.

나 또한 이 배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삼 남매와 네 번째로 태어난 8개월 된 막내아들의 장래도 이 한 척의 배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소중했고 가족 모두의 기대가 담긴 배였다.

결혼 14년 만에 장만한 배를 보면서 이제 잘살게 될 내일만을 꿈꾸면서 기대도 컸다. 이제 큰 배도 마련했으니 먼바다로 출항할 준비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 큰 배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에 가까운 바다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배로는 고기를 잡아 봤자 적은 량 밖에는 잡을 수 없었고 여섯 식구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큰 보탬이 안됐다. 그래서 한번 크게 배 사업을 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1975년 8월 9일 섭씨 30도가 넘는 찜통더위에도 우리는 출항준비를 마치고 출항했다.

한번 먼 바다에 나가면 며칠씩 바다 위에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 어구 손질, 디젤유 4드럼, 냉동 오징어, 얼음 5톤, 25Kw용 전구 15개, 배의 기관용 부속품, 생필품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33명이 “천왕호”에 탑승했다.

당시에 어획 목표량은 오징어 3만 6천 마리 정도였는데 당시 시가로는 3,4백만 원이 목표 수익이었다. 한번 항해를 떠나면 뭍에 있는 가족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험난한 바다에 나가 혹시라도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집에 있는 쌀을 다 털어서 배에 실었고 주머니에 돈을 두둑이 채워주었다.

배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셋째 딸애가 부둣가로 달려나왔다. “아버지 알사탕 사줘” 하면서 애원하며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때 내 윗옷 안주머니에는 돈이 얼마간 있었다. 항해 도중에 혹시나 경비대원들을 만나면 찔러줄 돈이었다.

형님은 배의 사무장이었던 나에게 요긴하게 쓸 비상금을 항상 챙기고 다니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딸애의 울음도 뒤로하고 무작정 배에 올랐다. 북에 있는 30년 동안 그때 딸애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들려와 늘 내 가슴을 후비며 괴롭힐 줄은 미처 알 수 없었고 예상도 못 했다.

북한군에 묶여 버린 ‘희망’

당시에 우리 배 규모는 제법 되었지만, 장비는 충분히 갖추지 못했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전기, 방향탐지기, 독도해역 지도와 컴퍼스 등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장 김익두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멀리 공해 상까지 나가 고기잡이를 하곤 했었다.

공해 상에는 중국 배, 일본 배들도 많이 어로작업을 하였는데 우리는 종종 일본 배를 따라다니곤 했었다. 왜냐하면 일본 배들은 기계 장비를 잘 갖추고 있어 고기떼를 잘 탐지했었기 때문에 우리도 쫒아 다니면서 눈치껏 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일본 해역 부근까지 나가서 고기를 잡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75년 8월 16일 조업 7일째 되는 날 우리는 그동안 잡아들인 오징어를 보며 돌아가서 좋아 할 처자식과 식솔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만선의 기쁨을 누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밤 11시 강릉 문화 방송에서 태풍경보가 있다는 것을 라디오로 듣고 서둘러 어구를 거두고 주문진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1975년 8월 17일 조업 8일째 되던 날 새벽 4시쯤 되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북한 경비정이 우리 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쏘아대며 추격해 오고 있었다.

우리배가 멈추면 위협 사격이 멈추고 움직이면 다시 사격하고 그렇게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총 한 자루 없었던 우리는 저항도 못하는 사이에 권총과 기관총을 소지한 북한군 군관 1명과 병사 1명이 우리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꼼짝 말아 움직이면 쏜다” 하고 엄포를 놓더니 우리 배를 북한경비정에 로프로 연결하여 북한해역으로 끌고 갔다. 우리 배 엔진 동력과 북한해군 배 엔진 동력을 포함하여 2척의 배가 함께 가동했는데도 6시간이나 걸려서 북한수역에 있는 어느 한 항구에 도착했다.

6시간의 거리는 우리배가 북한해군에 발견되던 당시 북한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북한군은 우리배가 북한해역에 있었다고 했다. 북한군에게 끌려가는 배위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는 동안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남한에서 들었던 소문들이 기억났다. 들었던 바대로 정말로 “북한에 도착하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마음은 너무 착잡하고, 막막하고 억울했다.

왜 끌려가야 하는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랑하는 가족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저 북한으로 가야한단 말인가? 배위에서 저항해 보고 싶었지만 북한군의 겨누고 있는 총부리를 보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북한의 원산항에 도착하다.

배위에 상황은 한 마디 말만 했다가는 당장 무슨 피해가 날아올지 몰라 조마조마했고 그 속에서 우리는 더 애간장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북한 강원도 원산항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어느새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항구에는 환영인파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마도 북한군이 우리가 북한으로 월북했다고 허위로 미리 상부에 보고를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있더니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다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초대소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건물 외형이나 시설들이 꽤 괸찮은 편이었던 것 같았다. 대우도 그만하면 괸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배를 만들어서 1년도 타보지 못하고 잡은 고기와 배를 모두 빼앗길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잠도 오지 않았다.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넘기는 것 같았다. 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시간만 보냈다.

한 주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사상교육이 시작되었다. 초대소에서 하루 일과는 아침 6시에 기상, 아침체조 하고, 그리고 다시 숙소로 들어와 세수하고 7시에 아침식사하고, 8시 반부터 집중 강습을 받고 12시까지 계속됐다. 이렇게 아침일과가 끝났다.

강습은 한 번에 90분 동안 들었고 10분 동안 잠깐 쉬고 다시 두 번째 강의를 들었다. 점심을 먹고 약 한 시간동안 오침을 하고 오후 강습이 시작 되었고 3시간 동안 두 강습을 듣고 오후 강습 일정이 끝났다.

강습이 끝난 후 체육운동도 하고 저녘 식사를 하고 북한체제 선전용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보통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도 두고 온 처자식들이 눈앞에 얼른얼른 거리는 것만 같아 눈을 감아도 잠도 않고 긴 한숨만 나왔다.

그러니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니, 혁명역사니,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듣고 있어도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우리가 가장 기다리는 소식은 우리를 과연 언제 돌려보낼까 이었다. 3개월이 지나고 6개월 지나도 돌려보낸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대답은 하지 않고 대신 계속 기다리라는 말뿐이고 “수령님의 교시가 있어야” 한다고 하니 어떤 동료들은 무의식적으로 불평을 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사회는 거짓말도 안한다고 하는데 왜 보내준다고 하고 보내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원산초대소에서 10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초대소에서는 구타나 고문 같은 행위는 없었으나 불평을 하면 요주 인물로 찍히고 나쁜 놈으로 취급을 하여 이런 말도 자주 할 수 없었다. 단지 하도 억울하고 답답하여 늘어놓은 푸념이었다.

동료들과 헤어지다

원산 초대소에서 생활한지 9개월쯤 되니 사회에 배치된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음으로 직감했다. 우리는 어쩌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지금까지 집에 돌려보낼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 바보 같았다.

우리는 큰 버스에 타고 기차역까지 함께 가게 되었는데 가기 전에 우리를 인솔하는 5과 지도원 이라는 사람이 각 사람에게 북한 돈 200원과 가방 그리고 속옷과 세면도구, 겉옷을 챙겨주었다. 보내달라는 고향에는 안 보내주면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안심시키려는 수작이었다.

그렇게 어찌할 방법 없이 30년 세월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다 배치 받은 곳은 함경북도 김책시의 어느 한 시골 농장이었다. 이제 아는 친구 하나 없이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으로는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의지할 사람도 말 친구를 해줄 사람도 없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나를 인솔해 간 5과 지도원과 함께 내가 일하게 될 농장 관리워원장과 초급당 비서를 비롯한 간부들과 만났다. 해당 협동농장에 배치 받은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 일도 열심히 하고 당과 수령을 위해 성실히 생활하면 좋은 일들이 있을 거라고 위로해 주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는 처음에 환영인사를 할 때와 전혀 달랐다. 처음 거처할 집이 없어 늙은 노부부가 사는 윗방에 곁방살이로 들어갔다. 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했고 정 붙이기가 너무 힘들어 잠이나 겨우 잘 수 있는 곳이었다.

잠만 그곳에 자고 밥은 합숙 식당에서 먹었다. 남쪽에서 왔다고 특별히 심한 노동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말을 조심해야 했다. 둘이서만 말한 얘기가 다른 사람을 통해 여러 번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나는 둘이 있을 때는 절대 속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았고 얘기 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나에게 돌아온다고 해도 나를 보호 할 수 있었다. 세 명이서 모여 이야기 할 때는 아예 말조차 하지 않았다. 둘 중 누가 어떻게 보고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이 북한 보다 좋은 점에 관하여 말을 하면 큰일이었다.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북한보다는 힘들고 어렵게 산다고 말을 해야 했다.

사실 내가 납북 되던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의 경제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한국이 항상 그렇게만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고향 한국이 언젠가는 더 발전하고 있을 거라고 근거도 없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 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것은 남한의 대학생들이 시위하고, 깡패들이 나오는 것만 보여주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소식과 8·28 도끼 사건도 한국이 도발을 했다고 북한주민들에게 역설하는 것도 들었다. 북한 사람들은 북한정부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었지만 점점 고향 한국이 더 발전할거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결혼과 계속되는 감시

시간이 지나면서 배치 받은 곳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내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호평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배치 받은 후에도 종종 나를 이곳까지 이송해 왔던 연락소 지도원이 가끔 찾아오곤 했다.

이 연락소 지도원이 나를 결혼 시키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내가 일하는 단위의 관리책임자들에게 귀띔을 해주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입당(북한의 조선노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함을 의미, 입당은 북한에서 성인남자라면 가정 이력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가입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입당 여부는 배후자를 만날 때도 중요한 문제이다.)도 하게 되었다.

당원이 되고 나서는 분조장(북한의 농촌에서 7~8명으로 구성된 조의 팀장을 이르는 말)과 기술지도원 일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나는 남보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주간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 공부하는 야간기술학교에도 다녔다.

당시에 북한에서는 농촌을 선진화 한다고 하여 농업전문학교가 생겼는데 강사들이 일주일에 세 번 직접 농촌 마을회관 같은 곳에 찾아와서 강의를 해주곤 했다. 그렇게 2년간을 열심히 다녀 농업 준기사 자격증을 받았다.

일을 잘 한다는 좋은 평가도 받았고 일정한 관리자로 그리고 기술자로 일 하게 되었지만 차별과 감시를 받는다는 생각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당한 것은 없었지만 뒤에서 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일도 잘하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노력한다고들 겉으로는 얘기하지만, 안전부나 보위부 같은 사람들은 항상 내 속내를 알아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당 일군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고 그들이 내 마음을 다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 놈들한테 속을 다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북에 있는 자식들은 아예 대학에 가는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북한에 있으면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사시사철 손에서 일을 놓기가 힘들었고 열흘에 한 번씩 쉬는 날이 있다고 해도 쉬는 날에는 텃밭 가꾸고, 김매고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여자들은 열흘 내내 흙 묻은 옷을 손빨래 하느라 온 하루를 보냈다.

가족들에게까지 감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도 내 마음 속 깊은 얘기를 솔직히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남한에 있는 가족들과 부모님 생각이 나 눈물을 흘리면 가족들은 고향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거들랑 내 뼈라도 내 고향에 묻어 다오…”라고 말하곤 했다.

고역과 아픔의 기억들

북한의 농촌에서는 아침 5시에 출근해서 해가 져야 일이 끝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동안 내내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농촌이긴 했지만 식량이 없어서 쥐꼬리만큼 먹기 때문에 서너시간만 삽질하고, 밭, 김을 매고 나면 금방 허기가 졌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중에 중참이나 간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우리집 형편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기차역마다 굶어 죽은 사람들이 널렸었고, 꽃제비(노숙자)들로 가득했다.

한 번은 회령이라는 곳에 가봤는데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누나가 힘없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홉 살 쯤으로 보이는 남동생위에 앉은 파리를 쫓아 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오고가는 중국 상인들이 먹을 것을 주길 바라고 앉아 있는 듯 했다. 정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우리 납북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원이라고 기관장 했던 사람도 굶어 죽었다. 장례식에 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부인이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굶어 죽었다고 했다. 식량난이 지속되면서 여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그런대로 묵인했지만 남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엄격히 통제했다. 그리하여 남성들이 여성의 경제활동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 친척과의 연락

우리 집도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노동연한이 다 되어 정년퇴임을 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집 주변에 텃밭을 가꾸고 거기서 나오는 채소를 팔아 쌀을 사오면서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94년도에 처음으로 부인이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였다.

부인은 돌아오는 길에 중고 옷이며 신발, 밀가루, 외화 등을 가져와서 중국 친척집 방문은 마른땅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우리 집 경제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98년에 부인이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중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내가 한국에 가족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중국친척들이 한국 가족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내가 편지를 쓰면 한국 가족에게 전달해 줄 것이라고 했다. 편지를 보내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고 나름의 작전이 필요했다. 나는 생각 끝에 부인 편에 편지를 보내지 않고 중국친척들을 만나는 대로 조카를 세관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세관 앞에서 3일간 조카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2일 만에 세관에 나온 중국친척에게 담배 대 모양으로 된 편지가 들어 있는 담배 곽을 주며 한국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편지에는 “처남한테 편지 받아 봐라, 간단히 내 소식을 전한다. 주문진 누나에게 소식을 알려주라. 소문은 내지 말아다오”라고 적었다.

중국의 조카가 한국과 연락을 한지 이틀 만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고 한국에 있는 우리 형님의 전화를 부인이 중국조카 집에서 받았다.부인은 한국 가족들의 집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현금 200달러를 받아 돌아왔다.

한국 가족과의 연락, 그리고 탈북

그렇게 한국가족들과 연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만에 하나 한국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이웃들이나 보위부원들이 알게 되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가족과 연락을 다시 주고받은 이후로 한국에서 보낸 편지도 받았다. 편지를 받자마자 읽어 볼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국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때가 2000년 이었다.

한국 가족은 그때부터 납북자 가족회와 함께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나를 한국으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급기야는 북한의 보위부원이 쌀을 가지고 아예 우리 집에 살림을 차리고 우리 가족과 함께 먹고 자기에 이르렀다. 나는 당 일군을 찾아 갔다. “나를 왜 감시하나? 탈북 안할 거다. 감시 시키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이후로는 보위부 감시원이 집을 떠났고 한동안 감시망도 주춤해 지는 듯 했다. 이때 한국에서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왔다. 나는 그 사람과 내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나와 함께 떠나면 분명 동네에 감시하는 눈이 많아 금방 보위부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가족들에게 “누가 물어 보면 내가 시장에 갔다고 해라. 만약에 내일에도 물어 보면 마찬가지로 시장에 갔다고 해라”라고 입단속을 시켰다.

나를 인도하러 온 사람은 국경경비대에 돈을 주면서 중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까지 약속 하고 나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 처음 도착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능한 빨리 한국영사관으로 가야했다.

국경 근처에서 몇 일간 숨어 지내다가 연길로 가던 중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한시가 급했다. 나는 급한 응급처치만 받고 병원을 나와 선양에 있는 한국총영사관으로 들어갔다. 2007년 1월 16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내 고향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재회하였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https://kor.nkhumanrights.or.kr/mai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