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먼저 자원을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이극용의 아버지, 이국창이다. 이국창은 이번 사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조정에 전했다.
"바라옵건대 조정에서 신속하게 대동 방어사를 다시 임명하는데, 만약에 이극용이 명령을 어긴다면 청컨대 신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를 토벌하겠으니, 한 명의 아들을 아껴서 국가에 죄를 짓지는 않게 하도록 해 주십시오."
조정에서 새로운 대동 방어사를 임명해 보내는데, 만일 이극용이 이에 따르지 않고 조정과 반목을 계속한다면 역전의 장수인 이국창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아들을 토벌 하겠다는 것이다. 이극용이 지금 조정을 기만하고 있지만 굳이 군사를 내어 승패를 보는것은 현 제국의 상황을 보자면 좋은 계책은 못된다. 때문에 조정에서도 이국창을 이용해 이극용을 설득할 의사는 있었는데, 마침 이국창 역시 이렇게 나오자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이국창의 제안을 접수하여 사농경 지상을 대동군선위사로, 태복경 노간방을 대동 방어사로 새로 임명하고 이국창으로 하여금 이극용을 설득하게 했다. 만일 이극용이 이 인사조치를 순순히 따른다면, 흡족한 관직을 제수하겠다는 당근 역시 내걸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이극용은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조정은 대동 방어사로 임명했던 노간방을 이국창의 관할이었던 진무 절도사로 임명하고, 대신 진무 절도사 이국창을 대동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 인사조치가 무슨 뜻인가? 현재 대동을 점거하고 있는 것은 이극용의 세력이다. 이국창을 진무 절도사에서 대동 절도사로 임명했다는것은, 아비 이국창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아들 이극용을 죽이라는 것이다. 이국창과 이극용의 부자관계를 생각하면 이는 위험한 인사조치였지만, 이미 이국창이 직접 토벌 의사를 밝힌 적도 있으니 조정에서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너무 유치한 계략이 지나지 않았다.
이국창이 이극용 토벌을 직접 운운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국창은 당나라 조정이 기대했던, 조국을 위하여 혈육도 돌보지 않는 그런 충신이 못 되었다. 사타의 무리를 이끌며 수 차례 당나라 군대에 동원되어 싸운 그로써는, 어차피 자신과 당나라의 관계란 서로 '주고' '받는' 관계에 불과했을 수 있다. 이국창은 실제로 이극용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다른 욕심이 생겼다. 진무 절도사인 자신이 대동으로 갈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버지가 진무를, 아들이 대동을 차지하여 부자가 2개 번진(藩鎭)을 장악한다면, 천하에 사타 늑대 무리들을 위협할 세력이 몇이나 있을 것인가?
이국창은 당나라 황제가 자신에게 내린, 대동으로 가라는 제서(制書)를 잠시 붙잡고 바라보더니, 결국 그것을 찢어버렸다. 그는 즉시 자신을 감시하러 온 감군(監軍)을 죽이고, 이어 진무 절도사가 되기 위해 온 노방간을 쫓아버리고는, 결국은 이극용과 군사 세력을 합쳤다. 이씨 부자는 차로군, 녕무, 가람군 등 산서성의 주요 지역을 공격하며 노골적으로 당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타의 무리가 당림, 곽현을 불태우며 산서성에서의 활동을 계속 이어가자, 조정에서도 결국 이씨 부자 토벌의 군대를 출전시켰다. 이때가 878년 10월로, 이극용이 대동에서 제장들의 추대를 받은지 꼬박 9개월 만이다. 훨씬 더 빨리 이극용을 처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이국창의 제안 하나만을 믿고 그대로 손을 놓고 있다가 이제서야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당초에 황소나 왕선지의 반란은 무지렁이들의 행패로 여기며 무시했던 조정이지만, 이씨 부자의 반란에 대처하는 조정의 태도는 대응이 늦은것과는 별개로 꽤나 신중했다. 이는 사타 무리들의 강력한 전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이씨 부자 토벌군은 상당한 전력으로 이루어졌다. 소의절도사 이균, 유주 절도사 이가거가 토벌군의 사령관을 맡음과 동시에 토욕혼의 추장이었던 혁련탁(赫連鐸), 사타 추장 중 한 사람이었던 안경, 살갈 추장이었던 미해만 등이 토벌군에 합류했다. 뒤이어 하동선위사 최계강 역시 하동절도사 · 대북행영초토사로 임명되어 이씨 부자 토벌의 임무를 맡았다.
양군은 2개월에 걸쳐 대립을 이어갔다. 석주(石州)가 사타 군대에게 포위 당하자 최계강이 이를 구원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등 관군에게도 좋은 상황은 있었으나, 12월에 벌어진 홍곡의 전투에서 최계강과 이균은 이극용에게 대패했고 이균은 전사하고 만다. 소의절도사였던 이균이 이끌고 온 병력은 이후 도주하여 대주(代州)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며 약탈을 하다가 현지 백성들에게 습격을 받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참담한 꼴을 당했다.
북방에서 참극이 계속되는 동안, 중원 천하는 황소와 왕선지를 잡기 위한 관군의 추격과, 이를 뿌리치려는 반란군의 연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876년 12월 기주에서 흩어진 왕선지와 황소, 양 군대는 끊임없이 이동하며 한 지역을 약탈하고 힘을 얻은 후, 다시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는 대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뒤를 관군은 지리하게 쫓았고, 877년 10월에는 이 중 황소 군단의 뒤를 잡은 초토부사 증원유의 공격에 황소가 4천명의 전사자를 내고 줄행랑을 놓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무리는 끈질기게 세력을 이어나갔다.
일찍이 기주에서 왕선지는 조정의 귀순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황소에게 주먹질을 당했지만, 이 무렵이 되자 왕선지는 또다시 귀순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왕선지는 그때까지 무려 일곱 번이나 장계를 올려 항복을 받아달라고 권했다. 이 정도쯤 되면 왕선지는 귀순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보였던 귀순 제안은 877년 11월의 일이었다.
당시 초토부사로 나와있던 환관 양복광(楊復光)은 사람을 파견하여 왕선지에게 귀순을 권했고, 본래 귀순에 대해 생각이 있던 왕선지는 이에 자기 부대의 간부인 상군장(尙君長)을 보냈다. 상군장은 반란군에 있어 핵심적인 인물 중 한명으로, 왕선지와 황소가 서로 군대를 나누어 이동했을때도 왕선지의 부대는 '왕선지와 상군장의 무리' 로 일컫어졌다. 그러한 인물을 보냈다는것은 귀순에 대한 왕선지의 태도가 진지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상군장은 양복광에게 가지도 못했다. 양복광을 향해 가던 중간에, 계속해서 반란군을 쫒던 장군 송위에게 붙잡혀 버린 것이다. 송위는 상군장을 잡은 후에 조정에 '자신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의 간부 상군장을 잡았다.' 고 보고 했다. 그러자 공로를 모조리 빼앗기게 생긴 양복광도 펄쩍 뛰며 '상군장은 자신이 귀순시키려 한것.' 이라고 알렸다. 조정에서는 시인사 귀인소에게 조서를 내려 사건의 진상을 밝히게 했지만, 양측 모두의 체면을 손상시킬 수 없었던 귀인소는 이를 '명확하지 않다.' 고 처리했다.
이렇게 되자 곤란하게 된 것은 상군장이다. 어찌되었건, 상군장이 반란군의 수괴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임은 틀림없다. 결국 그는 관군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상군장의 이야기를 들은 왕선지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믿음이 배신당하고 조정에 기만당했다고 여긴 그는 군대를 이끌고 형남을 초토화했고, 878년 정월에는 강릉(江陵)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눈 내리던 강릉을 지키던 인물은 양지온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양지온은 본래 군사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고, 형남이 공격 당할 때에도 이를 방관하고만 있었던 인사다. 여러 지역을 지나며 이제 수십만을 일컫던 왕선지의 대군이 몰려올 당시 양지온은 신년 축하를 받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성 아래에 나타난 왕선지의 군대로 인해 신년 축하 자리가 엉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왕선지의 군대는 나성(羅城)을 격파하며 당장에라도 성을 뒤엎어버릴 듯한 기세였으나, 수비군의 적절한 대응탓에 쉬이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토벌군 사령관이었던 양지운은 전황을 살퍼보러 나오지도 않고 방안에서 두문불출 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양지운에게 부디 일선에 앞장서서 병사들을 독려, 사기 진작에 도움을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양지운은 밖으로 나왔는데, 그 와중에 사모(紗帽)를 쓰고 가죽 옷을 입고 전장에 나서려고 하니 제장들은 자신들이 직접 이 백면서생에게 투구와 갑옷을 입혀 유시(流矢)를 피하도록 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전장에 나타난 양지운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보더니 난데없이 시부(詩賦)를 지어 여러 제장들에게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양지운이 잘한 일이 있다면,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재빨리 지원군을 불렀다는 점이다. 산남동도 절도사 이복은 자신의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고, 이 와중에 용맹한 사타 기병 수백이 합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선지는 이곳에 더 머무르는것은 가망이 없다고 여겨 결국 물러났다. 그러나 물러나는 와중에서 불을 지르고 노략을 했는데, 이때 강릉의 성 아래에 있던 30만 호 중에 4할은 반란군의 칼날에 학살되었다.
그리하여 왕선지의 부대는 기세등등하게 상군장의 복수를 했다. 그러나 너무 요란을 떤 탓에 결국 꼬리가 붙잡혔을까? 토벌군 사령관 증원유는 신주(申州)에서 드디어 왕선지 군대의 뒤를 잡는데 성공했다. 신주 동쪽에서 벌어진 전투로 왕선지 군대는 포로가 된 사람만 1만이었으며, 전사자 역시 1만이 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에 고무된 조정에서는 병이 들어 지지부진한 송위를 파직시켜 돌아가게 하고 그 권한을 증원유에게 더해 줌으로써 왕선지 토벌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증원유는 왕선지의 뒤를 쫒아 신주 동남쪽을 향해 나아갔다. 호북성 동쪽 끝의 황매(黃梅)에서 결국 왕선지는 쫓아오는 증원유와 격전을 벌였고, 여기서 반란군은 무려 5만이 참살당했으며 왕선지 본인도 끝내 목이 베이고 말았다. 왕선지의 수급은 장안으로 옮겨졌고, 그의 세력은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광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왕선지의 군대가 연이은 패배로 7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어지로운 세상에서 몰려든 유민들은 아직 얼마든지 있었다. 패잔병들은 상군장의 동생, 상양(尙讓)의 인솔 아래 살아남기 위해 도주했다. 그들이 찾아간 인물은 반란군의 또다른 핵심, 바로 황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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