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게중에 주로 언급되는 이야기 중에 하나는 자연과학 등에 대한 적은 관심 등이기도 하는데, 17세기 서구의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 성과 등이 같은 시기 동아시아에 비해 앞서 있었음은 그다지 이론의 여지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는 강희제의 경우라고 해서, 그런 한계성 때문에 당시 서구의 기준으로 보자면 썩 자연과학 등에 밝은 편은 못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속에서도, 강희제는 자연과학에 대해서 꽤 관심이 많았다. 무슨 강희제가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가 서구 지식인들을 압도했다던지 현대인 같았다거나 청나라의 개화를 이끌만한 수준이었다고 하면 허무맹랑한 이야기겠지만, 17세기 동아시아의 봉건적 군주라는 한계 속에서는 유례를 보기 힘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강희제의 성격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호기심이 많았던 측면도 있을 것이다. 지식에 대한 강희제의 욕구는 대략 이러하다. 어떠한 지식을 통해 들으니, 어떤 지방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기억해 둔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지식 습득이다 그런데 강희제의 호기심의 경우는 이렇다. "어떠한 지식을 통해 들으니, 그 지역은 이러하다고 한다. 그럼 정말로 그러한가? 한번 가서 보면 어떤 모습 일 것인가?"
강희제 시기 편찬된 『강희기가격물편』 에는 여러 자연과학적 현상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게중 '뇌성은 100리를 넘지 않는다.' 는 부분에서 강희제는 소리와 속도를 이용한 거리의 측정, 즉 뇌성벽력의 소리가 몇초 뒤에 울려퍼지는 것인가를 통해 거리를 측정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러한 지식은 강희제가 처음에 생각한 것이 아니고, 유명한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국 조정에 알렸던 이야기였다.
강희제의 호기심의 일면을 볼 수 있는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강희제는 자신이 어렸을때 죽은 아담 샬의 일화를 통해 뇌성벙력을 통해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강희제는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진짜? 신기한데! 한번 진짜로 그런지 볼까?" 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관련된 부분에 대한 강희제 본인의 언급은 이러하다.
"짐은 산법으로 으로 그것을 비교해보았다."
"짐이 매번 측량해 보니 100리를 넘으면 비록 우레는 있어도 소리는 이르지 않았다."
"짐이 하공을 위해 천진에 이르러 길을 멈추었다."
이러한 언급등은 강희제가 실제로 실험을 통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았음을 의미한다.
다른 이야기의 경우라면 조석 간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강희제는 평소에 여러곳을 다녀보았는데 산해관, 천진, 장강, 전당강 등 여러 해변 역시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발생하는 조석 간만에 대해, 강희제는 꾸준히 기록을 하면서 조석이 오가는 시간등을 물어보고, 그 차이가 있다는 사실 등을 확인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조석 간만의 차가 발생한다고? 그렇구만." 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강희제는 그렇지 않았다. 왜? 궁금하니까! 강희제는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그 대상이 중국인이건 서양인이건 계속 캐물어 보기도 했다.
"잠아 해변에 이르러 산해, 천진, 대강, 전당 등지에서 매번 조석이 오가는 시간을 관찰함에, 본토인에게 자문해 보면 대게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처의 사람에게 시각을 기재하도록 해도 역시 같지 않았다. 후에 샘과 우물에도 미세한 조수가 있지만 역시 시간이 정확하지 않았다. 서양인과 바다의 선박 운행자에게 물어보아도 또한 같지 않았다."
궁금한 부분을 못 참는 강희제의 집요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강희제가 품종 개량을 했다고 해서 유명한 '어도'의 경우에도 강희제의 열렬한 호기심이 작용한 결과였다. 6월 하순의 논밭을 오가던 강희제는, 우연히 여러 벼 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하나의 벼를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깟 벼 따위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이겠지만, 묘하게 생긴 벼가 있자 강희제는 신기함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또 확인해 보았고, 따로 종자를 보관하여 개량에 힘쓰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강희제의 실험 정신은 가히 끝이 없었다. 심지어 온천의 효능에 대한 부분 등에서조차 강희제는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온천이 질병 치료에 좋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연장자에게도 미치는 것인가?" 라고 말이다. 강희제는 온천을 만날 때마다 일부러 퇴적물을 확인하여 그 온천의 성분을 알아내려고 하기도 했다.
"매번 온천을 만나면 은제 그릇에 온천수를 넣고 흔들어 낮은 불로 가열한 뒤 그릇의 물이 마르기를 기다려 물에 남아 있는 것이 혹은 반석, 혹은 소금, 혹은 유황이 되는지를 보면 분명히 판별된다."
그 외에도 황제는 궁금한것이 있으면 발품을 파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북순을 나서게 된 강희제는 '바이룽두이' 즉, 백룡퇴(白龍堆)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막의 모래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강희제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백룡퇴를 찾아가서 모양을 구경하며 "정말 그렇다." 고 기록했으며, 굳이 모래 형태를 살피면서 다음 날이면 형태가 계속 해서 바뀐다는 사실도 관찰했다. 이런 부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중요하건 중요하지 않건 어찌되었건 궁금하니 알아보겠다는 황제의 성미가 나타난다.
이러한 관찰도 기본적으로 독서 등으로 지식을 습득하려는 노력 다음에 벌어지는 일이다. 1702년, 강희제는 남순을 하던 중 이광지로부터 청나라 시기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인 매문정의 『역학의문』 이라는 책을 선물 받게 되었다. 강희는 이에 감사하다는 태도를 취했고, 얼마 뒤에 다시 책을 돌려 주었다. 이광지가 책을 열어보니 책에는 여러 군데마다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그런 부분마다 비평의 말들이 써 있어 황제가 책을 열심히 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광지는 혹시 몰라서 책에 착오가 있느냐를 물었고, 강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류는 없는듯 하다. 다만 산법이 미비하다."
산법이 미비하다니? 이 책의 저자인 매문정은 수학자가 아닌가? 수학자가 쓴 책이 산법이 미비하다니? 사실 이 책은 아직 매문정이 완성을 덜 시킨 자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건성으로 읽어본게 아니라 책을 꼼꼼히 읽어본 강희제는 채에서 뭔가 미비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희제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집요했다. 그는 측량에 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아예 직접 측량술을 배웠으며, 수하에게 치수 사업을 지시하면서 아예 본인도 치수에 대한 고금의 책을 읽어보며 공부했다. 메뚜기에 대한 대책에 관련해서는 아예 메뚜끼의 생태에 대한 저술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런 강희제의 호기심으로 인한 끊임없는 관찰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차오모드 전투 직전, 가르단을 물리치기 위한 원정 중이었다. 당시 강희제는 가르단의 도주 가능성, 식량의 부족, 사막을 건너는 원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상당히 심리적으로 몰려 밀었다. 원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치닿았을 때는, 심지어 강희제 본인 조차 양고기 외에는 아무것도 엄ㄱ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작성된 강희제의 편지 등에는 주변 풍경등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 묘사 되어 있다. 물론 군대가 통과하고 나가는 부분에 대한 관심이야 총사령관으로 서 당연한 부분이다. 하지만 강희제는 그 상황에서 조차 풀의 종류, 여러 수원, 서로 다른 종류의 사막 등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기록을 했다. 게중에는 심지어 마멋 굴의 수에 대한 기록도 있다.
1697년은 강희제와 가르단의 지리한 대립이 마무리 된 역사적인 해였고, 이해 3월 강희제는 하미의 이슬람 교도로부터 가르단의 가족들을 압송 받게 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것은 대 준가르 전쟁에 있어 강희제의 성공을 과시할 수 있는 굉장한 성과 중에 하나 였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성과를 베이징에 이야기 하면서 강희제가 언급한 내용의 일부를 보면, 정말 걸작이라는 말 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하미의 이슬람교도들이 가르단 반역도들을 압송하면서 함께 보내준 토산물 중에서 태양볕에 말린 참외가 제일 맛있었다. 지금 답신과 함께 보내주는데, 그 먹는 방법을 모를까 염려되어 특별히 적어 보낸다. 먼저 말린 참외를 찬 물이나 뜨거운 물로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잠깐 담그면 참외가 말랑말랑 해진다. 식혀서 먹어도 되지만, 뜨거운 채로 먹어도 되는데 그 맛이 아주 신선하고 참외가 우러난 물은 꿀물에 말린 복숭아를 탄 것과 비슷하다. 참외가 차지하고 남은 빈 곳에는 포도를 넣으면 된다. 이 사실을 여러 비들에게 알려 주어라. 물건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마음은 먼 곳에서 전하는 것이니 비웃지는 말아달라."
천하의 가르단에 가족을 압송받으려고 하는 그런 중요한 상황에서, 저쪽에서 가져온 참외를 먹어 보니 인상에 깊게 남자 황제가 참외를 보내면서 직접 그 조리법을 상세히 작성해서 베이징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런 내용을 쓴 강희제 조차 쓰고 나니 무안한지 마지막에 비웃지는 말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물론 강희제의 여러 관심은 물론 한계가 있었다. 그의 지식에 대한 욕구나 수학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나 '취미생활' 으로서 개인의 '흥취' 였기 때문에, 무슨 국가 전체의 지식을 증대 시킨다던가 하는 부분은 별로 없었고, 또 강희제 본인도 여러 선교사들의 말에 따라 일종의 '잡지식' 처럼 지식을 쌓아 올렸기에 '계통적' 이다고 할만한 이해는 부족한 편이었다.
또한 이러한 박식함을 추구하고 드러낸 강희제의 태도는 어느정도 과시적인 면도 있었다. 신하들의 앞에서 자신의 박식을 드러내보이면서 권위를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강희제는 진후요, 하국중, 명안도 등 몇몇 신하들에게는 아예 본인이 직접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신하들에게 직접 학문을 가르치는 입장이라고 한다면 군주로서의 위신이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강희제는 종종 신하들에게 수학이나 측량 등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해서 골탕을 먹이는 괴이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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