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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12일 목요일

[역사] 역사상에서 나오는 백련교도에 대한 오해








『중국 근대 민간종교와 권회에 관한 연구』 이은자



 혹여 청나라 말기에 발생한 '백련교도의 난' 등에 대해서, 이 '백련교' 라는 이름의 주체가 마치 동학난의 동학교도들이나 태평천국 전쟁 당시 태평천국의 군사들, 황건적의 난 등에서 황건적 등 마치 '어느 단일한 특정 종교의 교도들' 을 가르키는 늬앙스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적인 사서의 서술에서 이 백련교라는 것은 '당시 있던 거의 모든 사교(邪敎) 집단에 대한 통칭' 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사서의 서술 차원' 이 아니라 '연구자 차원' 의 문제로 (예를 들어 사서에는 대충 "이놈들도 저놈들다 다 튀르크 계통 임." 이라는 식으로 써져 있는데 이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던지)  사서를 서술하던 사람들은 대충 "이 놈들도 사교네? 백련교네?" 이랬다는 식.


 또 그 반발의 의견도, 물론 '무수한 사교 집단 중에 백련교라는 특별한 존재' 를 부각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역으로 '백련교라는 무수한 집단 속에 사실 백련교라고 볼 수 없는 특정한 존재' 를 부각 시키는 식의 의견도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말하자면, 백련교라는건 약간의 이설은 있을지언정 사서의 전통적인 서술과 대체적인 시각은 '당시 무수히 많던 사교 집단에 대한 통칭 비스무리' 라는 이야기 입니다. 따라서 '백련교도' 라는 언급은 태평천국이나 동학 교도 와는 약간 늬앙스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와 조금 비슷한 경우라면 만주 정권 시기 만주인들의 소속 집단인 팔기에 대해 마치 '특별한 정예 기병 집단인 팔기군' 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국의 몰락, 오대의 폭풍 (6) 난세 속의 영웅들


 대북행영초토사 제갈상은 고민하고 있었다.


 황소의 60만 대군이 장안에 입성하고 희종이 서쪽으로 도망갔을 무렵, 제갈상은 대북행영(代北行营)을 이끌고 장안과 지척인 역양(櫟陽) 땅에 주둔하고 있었다. 대북행영이란 본래 사타족 이국창의 아버지이자 이극용의 할아버지인 주사집의가 당나라의 북변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을때 이끌던 부대 이름이다. 이씨 부자가 반란으로 축출되었으므로, 이국창의 뒤를 이어 잠시 진무 절도사가 되기도 했던 제갈상이 이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단을 이끌고 장안의 문턱에 와 있지만, 제갈상은 자신이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소의 군단이 장안을 점령하기 전에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은 황소를 토벌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고, 당나라 황제는 계속해서 서쪽으로 행군하고 있는 처지다. 역양에 들려오는 장안의 소식이란 흉흉하기 그지 없었다. 한동안 장안에서 평온을 유지하는듯 했던 황소군은, 이내 눈 앞의 보물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못하고 대약탈을 벌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본래 가진 것 없이 떠돌던 유민들의 집단이다. 그런 무리가 재물을 눈 앞에 두자 통제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심지어 총지휘관인 황소 조차 이들의 만행을 통제하기 어려워 한다고 전해졌다.


 장안에서는 계속해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소는 당나라 종실 가운데 미처 희종을 따라가지 못하고 장안에 남은 사람들을 모두 다 찾아내 죽였다. 흑식 비단 위에 용을 그려넣은 곤의(衮衣)를 걸쳐입은 황소는 함원전(含元殿)에 들어서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고 정했는데, 측근이었던 상양은 태위 · 겸중서령이 되었다.


 이 새로운 국가, 대제의 인사조치 중 가운데 이색적인 것은 피일휴(皮日休)의 이름이다. 그는 당나라 말기의 시인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글재주를 인정받아 대제의 한림학사로 임명되었다. 대혼란이 일어난 당나라 말기의 기록은 여러가지로 불안정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 유명한 시인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더러는 그가 황소에게 불손한 표현을 사용하여 살해되었다고 하고, 황소가 패한 후에 당나라 조정에 의해 척결되었다고도 하며, 혹은 오월(吳越)로 가 전류(錢鏐)를 섬겼다고도 한다.


 어찌되었건, 새로운 인물들이 조정에 자리를 잡는 동안 구체제의 일원들은 참담한 결과를 당하고 만다. 황소는 백관들 중에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대제에 복종을 맹세한 자들은 관직을 복구시킨다고 선언했지만, 이전까지 당나라의 재상으로 지내던 사람들 모두가 난데없이 황소에게 머리를 숙이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두로전, 최항, 태자소사 배심, 어사중승 조몽, 형부시랑 이부, 경조윤 이탕 등은 모두 전령자와 함께 이동한 희종을 따라잡지 못해 장안에 머물고 말았고, 백성들 사이에서 숨어 살며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황소에게 색출당한 그들은 모두 척살되고 말았다.


 이때, 당나라 선종의 딸이었던 광덕공주(廣德公主)는 우복야 우종과 결혼한 사이였다. 황소 군단의 참극은 우종에게까지 미쳤다. 그러자 광덕공주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도적들의 칼날을 맨손으로 붙잡고 소리쳤다.


 "나는 당나라 황실의 공주니라! 맹세컨대, 우복야와 더불어 같이 죽을 것이다!"


 그렇게 공주가 소리치며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도적들은 공주부터 죽인 후 이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우종이 살해되자 공주가 "나 역시 죽여달라." 며 도적 무리에게 애걸했으나, 죽이지 않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할 동안, 이미 죽은 재상이었던 노휴는 무덤에서 시체가 파 내어져 저자에서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황소의 장안 입성을 맞이했던 좌금오대장군 장직방은 비록 겉으로는 황소에게 신하를 칭하였지만, 내심 장안에서 갈 곳을 잃은 망명자들을 자신의 집안에 몰려 숨겨 이중담장으로 감추어 놓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사실은 밖으로 흘러나가고 말았고, 황소는 장직방 역시 참살했다.


 장안에서 역양으로 들려오는 소식들이라곤 모두 이렇게 음울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제갈상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도망간 황제의 어명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황명을 거역해야 하는가? 그때, 제갈상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주온, 훗날 후량 황제 주전충.




 제갈상을 찾아온 인물은 주온이라는 이름이었다. 안휘 탕산 출신의 이 사내는 이름은 아직 중원 천하에 잘 알려지진 않았다. 그러나 황소 군단의 부장으로서, 다른 이들보다 힘껏 싸우고 이겨 대장에 보충된 인물이었다. 다른 제장들처럼 장안에 입성하지 않고 장안 근교 동북쪽의 동위교(東渭橋)에 주둔하던 그에게, 황소가 명령을 내려 제갈상을 만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후량(後梁) 태조가 역사적 행보를 보인 첫 사례다. 황소 군단에 들어서기 전까지 주온은 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집안의 셋째 아들로서 남의 집 머슴을 하던 처지였다. 늘 자신의 주인에게 모욕과 매질을 당하던 그를 가련하게 생각한 사람은, 악덕 주인인 유숭의 어머니 뿐이었다. 늙은 그녀는 주온을 볼때마다 안쓰러워 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저 아이, 주삼(朱三)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저 아이를 잘 대해주어야 할 것이다."


 제갈상을 만난 주온이 무슨 말로 그를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나, 대화가 마무리 될 무렵 제갈상은 황소에게 항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황소는 기뻐하며 제갈상을 하양 절도사로 임명하여 이동시켰는데, 당시에 하양 절도사 자리에는 나원고라는 인물이 자리를 잡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제갈상이 그 지역에 나타나자 병사들은 모두 갑옷을 버리고 제갈상을 영접했고, 나원고는 서쪽으로 몽진한 황제를 찾아 도주했다.






봉상 절도사, 정전(鄭畋)



 그 무렵, 당나라 황제는 터벅터벅 낙곡(駱谷)을 지나가고 있었다. 조정의 대신들도 버리고 황실의 종친들도 버린 채 몇백명의 인원만 움직인 이동이었다. 낙곡의 길에서는 한 남자가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봉상 절도사 정전(鄭畋)으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작금 대당제국의 끝이 약간 뒤로 물려지게 되는데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형편없는 몰골의 황제을 보고 봉상에 머물기를 권했다. 하지만 희종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짐은 저 거대한 도적과 가까이 있기를 바라지 않소이다. 짐은 한중으로 행차하여 수복을 도모하려 하오. 경은 동쪽으로 가서 적의 칼날을 막고, 서쪽으로 여러 오랑캐들을 어루만지고 이웃하는 도를 규합하여 큰 공훈을 세우시오."


 황제 자신은 좀 더 서쪽으로 도주하겠으니 정전은 60만 대군이 있는 동쪽으로 가 적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이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만, 정전은 이를 거부하는 대신 자신에게 여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재량권을 요구했다. 관중 서쪽의 도로망은 좋지 못하여일일히 결제를 받으려고 한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이유였다. 희종은 이를 승낙했고, 한중에 도착하고 나서는 다시 성도(成都)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막중한, 어쩌면 불가능한 임무를 맡은 정전은 우선 자신의 치소인 봉상으로 돌아갔다. 그는 측근들을 불러 모아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려고 했는데, 대부분은 임무의 내용을 듣자 경악하여 소리치는 판이었다.


 "도적의 기세가 막강하니, 의당 조용히 군사들을 모으다가 반격을 노려야 합니다."


 말은 그럴듯 하지만, 적의 대군이 코 앞에 있는 상황에서 조용히 있자는 이야기는 적에게 항복하자는 소리나 진배 없었다. 정전은 그 말을 듣자 분노로 몸을 떨었다.


 "여러분은 나 정전이, 저 도적 무리에게 칭신(稱臣)하라고 권하는 것인가? 나 정전이!"


 너무나 격분하여 이성을 상실한 정전은 결국 졸도해버리고 말았다. 기절을 하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찍은 정전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으나, 다음날 아침까지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 했다. 문제는 바로 이때부터다. 절도사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바로 그때, 봉상을 회유하기 위한 황소의 사자가 도착한 것이다.


 싸워서 이길 수 있을리 없다. 승산 없는 항쟁보다는 타협이 낫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절도사가 부재 중인 동안 봉상의 주요 관계자들은 별도로 칭신의 편지에 서명하고 황소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경축할 만한 일이 벌어졌으니 술 자리가 치뤄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서로 잔이 오고가는 가운데 흥을 돋구기 위한 음악 또한 연주되었다.


 그러나, 분명히 흥을 위한 음악일 터인데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무언가 중요한 하나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시리는 느낌을 참지 못해 결국 눈물을 흘렸다.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자 다른 사람도 눈물을 흘렸고, 곧 연희장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황소의 사자는 이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연유를 물었지만, 사람들은 눈물을 닦으며"절도사께서 풍병으로 몸이 마비되어 슬퍼하는 것 뿐이다." 라고 둘러대었다.


 황소의 사자가 돌아간 후에도 상실감이 가득한 분위기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물의 연회 이야기를 들은 봉상 사람들은 저마다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가 전해 들은 이 이야기는 병상에 누워 있던 정전의 귀에도 들어갔다. 정전은 감격해 마지 않았다.


 "나는 진실로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당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도적이 그 수급을 줄 날이 얼마 멀지 않았구나!"


 정전은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찔러 피로 표문을 써 황제에게 보내고 주위 측근들을 불러모아 충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이전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이 이에 동의했다. 봉상의 장수들은 서로 피로 함께 맹세를 나누었고, 성과 해자를 보수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으며 병장기를 모으고 이웃의 도와 군사를 모아 도적을 물리치자는 약속을 했다. 이에 주변의 모든 도에서 호응을 하여 모일 수 있는 군웅들은 모두 봉상에 모여 황소 토벌 대책을 논의했다.


 희종이 급하게 촉으로 도주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도적에 맞서 싸우고 싶다 하더라도 어디로 가서 모여 싸워야 할지 조차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혼란이었다. 그러나 봉상의 정전은 일일히 사람을 시켜 이러한 무리들을 한데 모았다. 갑자기 사람이 많아진다면 이를 유지하는것도 부담이 큰 일이지만, 정전은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군대의 유지비로 사용했다.


 황소에게 있어 실책이 있다면, 장안에 입성한 바로 그 순간 희종을 쫒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황소의 군대가 너무나 대규모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동안 황소의 군단은 끊임없이 이동했고, 설사 이탈자가 나오더라도 현지에서 바로 충원이 되었기 때문에 보급이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한 곳에 거점을 마련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대군을 이끌고 좁은 관중에 들어선 황소는 이들을 움직이기는 커녕 먹이는 것 조차 힘에 겨운 판이었다.


 황폐해진 땅을 아무리 파 봐야 군대에 필요한 물건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자 황소는 자신에게 호응했던 주변 절도사들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특히 황소의 군대에 패배하여 항복한 하중 유후 왕중영의 부담이 가장 극심했다. 하루에도 수백명이 하중에서 물건을 징발했기 때문에 하중 사람들은 크나큰 고통에 직면한 것이다. 왕중영은 무리들을 불러 말했다.


 "애초에 내가 절개를 굽히고 항복한 것은 군부의 걱정거리를 늦추고자 함이었다. 헌데 지금 재물을 조달하는 일이 그치지 않고, 또 곧 있으면 군사마저 징발 당할 것이니 이제 내가 죽는 것은 며칠 남지도 않았다. 차라리,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미 황소의 막대한 요구에 질린 무리들은 이에 동의했다. 이에 왕중영은 황소의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고, 의무 절도사 왕처존과 연계를 꿰했다. 왕처존은 장안이 함락되자 며칠동안 눈물을 흘리다 황소에 대항하기로 한 절도사였다. 황소는 이를 막기 위하여 대장 주온과 자신의 동생 황업을 보내 싸우게 했지만, 왕중영은 이를 모두 격파하고 왕처존과 맹약을 맺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실질적으로 황소 군단이 움직인것은 장안 함락으로부터 3개월 뒤인 881년 3월이었다. 황소는 두 갈래 방향으로 공격을 전개했다. 하남 방향으로 진군한 것은 대장 주온이다. 비록 주온은 왕중영에게 한 차례 패배했지만 그 수완은 여전히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또한 골칫거리인 봉상 주변으로는 최측근 상양이 무려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게 했다. 이곳을 무너뜨린 다면 곧 한중으로 진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터이다.


 5만 대병을 이끄는 상양은 봉상 함락이라는 임무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비록 지난 3개월간의 시간 동안 정전이 꽤나 많은 전력을 끌어모았다고 해도, 정전이라는 인물은 본래 서생이 아닌가? 쟁쟁한 무장들의 공격도 버텨낸 자신들이 일개 서생의 졸렬한 지휘 따위를 당해내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정전은 놀랍게도 직접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나와 5만 군대에 도전하였다. 정전의 병사들은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진을 쳐 황소 군단을 기다렸는데, 압도적 숫적 우위에 신이 난 황소군은 무질서하게 진격해오느라 모든 전열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미리 준비해놓았던 복병이 나타나 적을 치니, 황소군은 무려 2만이 참수되는 대패를 당하고 만다. 이는 큰 의미가 있는 승리였다.


 한편, 그 무렵 북방에서는 이극용을 배신했던 이우금이 황소 토벌을 위한 병사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시기라 이우금은 그리 어렵지 않게 3만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북방의 사나운 병사들이라 이우금은 이들을 통제하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느꼈다. 이민족 부대란 잘못 다루면 지휘관의 목숨 마저 앗아갈 수 있는 법이다. 고민하던 이우금은, 결국 조정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지금 비록 수만의 무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위엄과 신의를 갖지 않은 장수가 통솔한다면 끝내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형님 부자는 용기와 지략이 보통사람을 뛰어넘어 무리들이 복종하는데, 부디 천자께서 그들의 죄를 사면하여 통수로 삼는다면, 북방 사람들은 한 깃발로 호응할 것이니 미친 도적들을 평정하는 것은 실로 쉬울 터입니다."


 이우금이 말하는 형님 부자란 바로 이국창과 이극용이다. 비록 한때 자신이 배신했던 이들이지만, 그들의 능력과 이름 값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황소 토벌을 위해 여기저기에 손을 벌리던 당나라 조정에서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이우금은 500명의 기병을 사막으로 보내 이극용에게 소식을 전했다.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이극용은 무슨 기분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그 즉시 이극용이 타타르의 부족 1만여명을 규합하여 바람과 같은 속도로 남하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늑대 무리들의 시간이 점차 무르익고 있었다.

제국의 몰락, 오대의 폭풍 (7) 동상이몽의 군웅들


 '썩어도 준치' 라는 표현이 있다. 황소의 난 당시 당나라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비록 당나라의 힘은 극도로 허약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최후의 저력은 남아 있었다. 그 정도로 거대한 나라가 된다면 무너지는것 조차 쉽지 않았다. 황소의 60만 대군이 동관을 무너뜨리고 장안에 입성하던 시점에서는 도저히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지만, 오히려 이 형세가 길어지게 되자 불리한 쪽은 황소가 되었다. 비록 황소에게 한번 항복했던 절도사라고 할지라도 황소 군단의 무리한 요구와 수탈에 질린 나머지 점점 그를 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하동 유후 왕중영이 그렇고, 주온이 설득하여 항복시켰던 제갈상이 그러했다.


 장안에서는 유혈극이 계속되고 있었다. 황소를 비방하는 시문이 성에 내걸어지자, 격분한 상양은 상서성의 관리와 문을 지키는 병졸들을 모두 잡아 눈을 뽑고 그들을 매달았고, 성 안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죽였는데 그 숫자가 3천여명에 이르렀다. 장안에서 풍겨나오는 피 냄새가 진해질수록, 황소 무리의 형세도 점차 악화되어만 갔다.




서하왕릉(西夏王陵)



 황소의 편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을때, 당나라의 편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내몽고 악탁극전기 지역에서 자사 노릇을 하던 탁발사공(拓跋思恭)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래 당항(黨項)의 무리로, 부주(鄜州) 지역의 절도사 이창효(李昌孝)와 손을 잡은 탁발사공은 황소 토벌을 위해 노력하자고 소리 높였다. 이 탁발사공이라는 사람은 잠깐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이 인물이 내린 결정이 훗날 역사에 미친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황소 토벌을 위해 종군한 그에게 당나라는 하국공(夏國公)의 작위를 내리고 국성인 이씨 성을 내려주었다.


 하국공의 이름을 내건 이씨 성의 당항족이라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가 있다. 이원호(李元昊)로 유명한 서북의 신비 국가, 서하(西夏)를 말함이다. 말하자면 이 황소의 난에서 탁발사공의 활동이야말로 서하 왕계(王系)의 근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나라 조정은 탁발사공의 뜻을 받아들여 그를 권지하수 절도사로 삼았는데, 호삼성(胡三省)은 탁발씨가 강성해져 서하를 지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평가했다.


 이극용을 불러들인 이우금이나 황소를 배신한 왕중영, 제갈상. 그리고 내몽고에서부터 군사를 이끌고 황소를 막기 위해 출전한 탁발사공과 이창효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들 모두가 충심을 위해 움직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 모두는 각기 자신들의 계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멸망하기 직전의 나라치고는 호화스러운 위용이었다. 이 당시 제국의 황제는 촉에 있어서 그 조령은 천하에 통하지 않았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오직 봉상 절도사 정전의 힘이었다.


 황제가 촉으로 피난했을때, 천하 사람들은 이제 당나라 조정이 빛을 발하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정전은 천하 번진에 군사를 합쳐 도적을 토벌하자는 격문(檄文)을 보냈다. 이는 당조의 명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것을 알려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조와 황소 양측의 기량을 재던 야심가들은 어느 줄을 타야할지 확신을 얻었으며, 지킬 나라의 희망을 목도한 충신들은 앞 다투어 군사를 발동하고 이에 호응하였다. 이제 황소 무리는 함부로 서쪽으로 진군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진군은 커녕, 관중 바깥의 동쪽이 상황 조차 짐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지의 절도사들은 이전까지는 불가능해 보였던 장안 회복 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대전략의 축은 여러 군사 세력이 장안을 압박하는 것이다. 장수 당홍부는 위수 북쪽에 주둔하고, 왕처존은 위교(渭橋)에 주둔했으며, 왕중영은 사원(沙苑)에 주둔하고, 정전은 주질(盩厔)에 머물렀다. 여기에 탁발사공은 무공(武功)에 주둔하여 포위망을 옥죄었다.


 이 연합작전은 굉장한 힘을 발휘하여, 한때나마 황소는 무리를 인솔하여 잠시 장안을 비우고 동쪽으로 물러나기까지 하였다. 이에 정종초, 당홍부, 왕처존은 정예 병력 5천을 이끌고 옛 수도, 장안에 입성하였다. 그러자 거리와 저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몰려나와 이 '해방군' 을 환영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왓장을 던져 남아있던 황소 무리를 쳤으며, 어떤 사람은 화살 등의 보급품을 관군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 막상 장안에 입성하고 나자, 공적에 대한 욕심에 서로 눈이 멀어버렸던 것이다. 정종초 등은 장안 수복의 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지 않아 이 소식을 봉상의 정전과 탁발사공, 이효창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들을 환영하는 장안 백성들을 약탈하며 금과 비단, 그리고 여자들을 노략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황소 무리의 화를 피했다고 여긴 장안 백성들은, 되려 또다른 도적을 마주했을 뿐이다.


 비록 잠시 기세에 밀려 장안을 내준 황소였지만, 아주 멀리 떠난 것은 아니었다. 장안의 상황이 엉망이라는것을 알게 된 황소는 다시 한번 전방위적인 공세를 퍼부었고, 승리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던 정종초, 당홍부 등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이후의 양상은 처참한 살육전에 지나지 않았다. 장안 곳곳에서 황소 군단은 관군을 살해했는데, 약탈품을 잔뜩 등에 짊어진 관군 등은 차마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뒤뚱거리다가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열에 아홉이었으며, 왕처존은 그나마 남은 생존자들을 수습하여 군영으로 간신히 귀환하였다.


 해방군으로써 관군을 맞이한 장안 백성들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다시 나타난 황소를 맞이해야 했다. 이미 관군의 약탈로 넝마가 된 그들에게, 황소는 관군을 도운 책임을 물어 대학살을 저질렀고, 그 흐르는 피는 강을 이룰 정도였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사이, 당나라 황제 희종은 한중을 지나 성도에 도착했다. 수도 장안에서 지내던 궁궐 사람들은 성도에 오자 이렇게 이죽거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서천은 야만인들 땅이라고 하더니, 오늘 이를 보니 썩 나쁘지는 않구만!"


 장안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탁발사공과 이효창은 황소군 대장 주온과 동위교 부근에서 치열하게 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전 등의 활약으로 그 화가 촉에 닿지 않자, 조정은 다시 배를 불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재물들이 풍부하게 당도하여 망명 정권은 다시 배고품을 잊고 헛기침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망명 정권의 실력자는 바로 환관 전령자였다. 행제도지휘처치사가 된 전령자는 매번 사방에서 공물로 들어온 비단과 금을 얻어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이는 모두 장안 부근에서 쫓겨온 병사들에게 국한될 뿐이었다. 대신 촉 지방의 병사들은 소외가 되다보니 토착 지역의 병사들은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하루는 전령자가 촉 지방 토착 지역의 군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베풀고, 금으로 된 술잔을 하사했다. 모두가 이를 받는 가운데, 유독 서천의 황두군사 곽기라는 인물만은 홀로 이를 받지 않고 일어서서 발언했다.


 "제장들은 매월 봉료를 받아 풍족하여 여유가 있으니, 항상 보답하기 어려움을 생각하는데 만족함이 없겠습니까. 다만, 현지의 촉군과 폐하를 쫒아온 제군은 똑같이 숙위하며 똑같이 어려움을 겪는데, 유독 상으로 주는 것은 현격하게 다르니 원망함이 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때문에 혹시 변고가 있을까 두려우니, 바라건대 관군용사께서 제장들에게 사여하는것을 줄여 촉군에게 고르게 준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촉 지방의 병사로써, 패전하고 쫒겨 들어온 주제에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은 외지 병사들에 대한 불만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자 전령자는 잠자코 있더니, 대뜸 질문을 했다.


 "묻겠다. 너는 일찍이 무슨 공로를 세웠는가?"


 야만인들 땅의 병사 주제에 건방지게 군다는 의미였지만, 곽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 곽기는 본래 산동에서 자라 정벌하고 변방을 수비하여 일생동안 당항의 무리와는 17번을 싸웠고, 거란과는 10여번을 싸웠습니다. 쇠붙이에 다친 상처는 온 몸에 있으며, 일찍이 토욕혼을 정벌하는데 옆구리를 다쳐 창자가 나오자 실로 꿰매고 다시 싸웠습니다."


 그러자 전령자는 스스로 술통에 술을 따라 곽기에게 권하였다. 곽기는 직감적으로 전령자가 주는 이 것이 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감히 마시지 않을 수 없어 두번 절하고 이를 마셨다. 독을 마시고 돌아온 곽기는 그 즉시 한 비녀를 죽여 그 피를 바르고, 구역질을 해서 검은 피를 몇 되나 토하고 정신을 차렸다. 분노로 치를 떤 곽기는 이후 병사들을 이끌고 불을 지르며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가 반란을 피해 온 성도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은 명망있던 진경선(陳敬瑄)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곽기는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모든 휘하 군사 세력을 잃어버렸고, 단지 자신을 계속 따르던 하급 관리 한 사람만을 대동했을 뿐이다. 곽기는 이 하급 관리에게 말했다.


 "진경선 공은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군부가 놀라고 시끄러워졌으니 안정시키지 않을 수는 없을 터이다. 너는 나를 끝까지 섬겼는데 보답할 길이 없구나. 너는 나의 인수와 검을 가지고 가서 '내가 곽기를 칼로 치니 곽기는 강물에 빠졌고, 시체는 소용돌이를 타고 아래로 떨어졌기에 인수와 검만을 얻어 바칩니다.' 라고 하거라. 내 인수와 검이 저자에 걸어지면 남은 무리들은 안정될 것이고, 너는 후한 상을 타게 될 것이다. 우리 집도 보전되어 가솔들은 다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변에게 가서 의탁하겠다. 다만 너는 사태가 진정되면 우리 가족들에게 조용히 사정을 알려다오."


 곽기를 따르던 하급 관리는 그 말을 따랐는데, 과연 곽기의 생각대로 상황은 흘러갔다. 이렇게 사방에서 불만이 터져나오는 판이었지만 희종은 전령자등의 환관들만을 가까이 하며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만나지도 않았다. 환관들의 손에서 놀아나는 희종이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은 회남절도사 고변이었다. 비록 고변은 황소가 장안을 함락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기는 하나, 그 세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희종은 끊임없이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뒤에 보낸 사신이 앞에 보낸 사신을 보게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가서 고변을 독촉했지만 고변은 끝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던 고변을 움직인것은 황제의 칙사도 아닌, 점쟁이의 점술이었다. 점술을 신봉하던 고변은 점쟁이가 '들새의 모습을 보니, 공의 성읍은 텅 비게 될 것' 이라고 말하자 크게 우려하였다. 성읍이 비게 된다는것은 고변의 군사세력이 무슨 일을 당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러자 고변은 정전처럼 사방에 황소 토벌의 격문을 내걸었다. 자신이 군단을 이끌고 장안으로 가 황소를 토벌하겠다는 이야기였는데, 이를 통해 관할 내에서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그 숫자는 무려 병력 8만에 전함 2천척으로, 당장 황소 토벌에 나선다면 황소를 거의 끝장낼 수도 있었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제장들은 사기가 크게 고무되어 고변을 볼때마다 언제 출진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고변은 그때마나 날씨가 좋지 않다, 파도가 높다, 혹은 시일이 좋지 않다면서 이를 거부하다가, 결국 군대를 출발시키지도 않았다. 황소의 세력을 유지하게 해주는것은 황소 자신이 아닌 관군의 이합진산이었던 것이다.

제국의 몰락, 오대의 폭풍 (5) 사막의 망명자





 880년 11월 25일. 제국의 수도 장안에서는 황소를 막기 위한 황국의 마지막 군단이 출전하고 있었다.


 최후의 군단이라고 하면 무언가 시적인 비장미를 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목전까지 당도한 황소의 60만 군대를 막기 위한 이 마지막 부대엔 비장미라고는 없었다. 군단의 이름은 신책군(神策軍)으로 그 지휘관은 장승범(張承范) 이었다. 신책군은 안록산의 난 이후 창설된 근위군단이다. 그러나 이 부대의 실체란 환관들이 장악한 군단으로, 신책군에 소속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각종 특혜를 받을 수 있는, 군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투 자리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이 신책군의 병사들은 모두 수도 장안에 사는 고관대작들의 자식이었다. 그들은 부모의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신책군에 소속되어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화려한 의복을 입고 뽐내며 거리에서 말을 달리고 성을 내는 시정잡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작자들이 각지의 쟁쟁한 절도사들과 치열하게 싸운 황소군과의 전투에 나서 싸울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난데없는 출전소식을 들은 신책군의 도련님들은 자신들의 아버지들에게 눈물로 애원했고, 그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들을 뒤로 빼돌렸다. 빼돌린다 해도, 황제가 출전 명령을 내린 이상 출전하는 사람은 있어야 한다. 이 부유한 도련님들의 아버지들은 귀한 자식들 대신 나설 소모품들을 병방(病坊)에서 구했다.


 절정기의 당나라는 그 시대를 살던 인간들의 인식 아래 있던 세상의 3분의 1에 영향을 미치던 대제국으로, 수도 장안은 끝없는 영광이 가득한 위대한 대도시였다. 그러나, 이 화려한 빛 속에는 병방과 같은 어두운 시궁창도 존재했다. 의지할데 없는 거지들과 병에 찌든 빈민들은 이 병방에 수용되어 있었다. 수용소라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지옥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병방의 주민들은 조금의 돈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려 했을 것이다.


 결국, 신책군의 이름을 달고 출전하는 이들은 병방의 주민들이었다. 돌림병이 창궐하는 최악의 삶을 보내다가 갑자기 출전한 병사들의 상태가 온전할리 만무하다. 눈은 퀭하고, 몸은 비쩍 마르고, 피부는 반쯤 썩어 문들어진 사실상의 송장 무리들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억지로 창대를 밀며 움직이는 것이다. 하물며 그 병력은 겨우 2천에 지나지 않았다.


 장안의 신민들은 이 마지막 군단을 지켜보았다. 황소는 이미 동도(東都)라 불린 낙양을 함락시킨 참이다. 8일 전, 낙양에 있던 유수 유윤장(劉允章)은 백관을 인솔하고 황소를 맞이했다. 승리자로서 당도한 황소는 유윤장에게 간단한 안부와 위로하는 말만 물을 뿐, 일체의 약탈을 벌이지 않고 평화롭게 입성했다. 낙양을 점령한 황소는 선봉 부대를 보내 동관을 공략토록 했다. 동관을 지키는 인물은 제극양(齊克讓)으로, 그에게는 일만 가량의 병력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굶주리고 있는 약졸이었다.


 부대를 지켜보는 신민들의 눈에도, 미래는 명약관화 해 보였을 것이다. 당나라의 운명은 이제 끝이 난 셈이나 다름 없었다. 황제 희종은 이러한 신책군을 친히 독려하여 내보냈지만, 사령관 장승범은 황제의 독려보다도 원병을 요구했다.


 "듣건대 황소는 수십만 명의 무리를 가지고 북을 치며 서쪽으로 진군한다 하는데, 제극양은 주린 병졸 1만명으로 동관에 의지하고 있고, 신이 이를 지원하러 가지만 병력은 2천에 불과하니 이것으로 적을 대적한다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여러 도의 정예 병사들을 재촉하여 서둘러 원조하여 주십시오."


 희종은 그저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내가 곧 군사들을 보내겠으니, 경들은 차례대로 가시구려."


 그렇게 신책군이 떠난 며칠 후, 장승범은 현지의 상황을 장안에 보고했다. 보고라기보다는 차라리 시국에 대한 조롱과 자조에 가까웠다.


 "신이 경사를 떠난 지 엿새가 되었는데, 병력은 이후 한 명도 늘지 않았고 군량의 공급은 그림자나 소리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신이 관문에 도착한 바로 그 날 거대한 군세의 도적들이 몰려오니, 2천명으로 60만을 막는 형국이 되었고, 병사들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신에게 동관을 지키지 못한 죄를 물으신다면 팽형도 달게 받겠지만은, 조정에서 꾀를 내던 신하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얼굴을 어디에 기댈 것입니까? 제가 가만히 듣건대 폐하께서 벌써 서쪽으로 순행하는 일을 논의하셨다고도 하는데, 폐하의 수레가 한번 움직인다면 진실로 나라의 위아래는 흙덩이처럼 무너질 것입니다."


 장승범의 군대가 동관에 도착한 것은 12월 초하루다. 그는 동관을 지키던 제극양의 병력과 합류했지만 이미 병사들의 군량은 떨어진 상황이었고, 군기 따윌 기대할 수 없었던 신책군의 병력들은 밥 마저 먹을 수 없게 되자 명령조차 듣지 않았다. 황소의 대군단이 도착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이 울리더니, 이후 저 지평선 멀리에서 거대한 흰 깃발의 물결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황소가 가진 전력의 일부인 선봉대에 지나지 않았다.


 제극양은 형편없는 전력으로도 어떻게든 이 대군에 맞서 싸웠다. 한참동안의 전투 끝에 황소 군단은 잠시 밀려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내 전황은 다시 요동치게 된다. 선봉대만으로도 들판을 집어삼킬 만한 전력이었던 황소 군의 후미에서 다름 아닌 총사령관 황소 본인이 본대의 군사들을 이끌고 도착한 것이다.


 황소는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물결처럼 진격하는 60만 병력의 이동에는 어떠한 전술이나 전략도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황소의 군단은 사령관의 도착에 맞춰 크게 소리를 질렀을 뿐이다. 60만 대군의 외침이다. 사서에서는 이를,


 "황하(黄河)가 뒤집혔고, 화산(華山)이 뒤집혔다."


 라고 표현하였다.


 제극양은 오전의 끝자락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미친듯이 싸웠다. 밤이 어두워지자 황소의 군단도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 그러나 잠깐 한숨을 돌린다고 생각했을 무렵, 장승범과 제극양은 관문의 밖이 아닌 안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깜짝 놀라야 했다. 굶주림에 지치고 황소 군단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질린 병사들은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영채에 불을 지른 후 대규모 탈주를 일으켰다. 황소 군단이 몰려올 당시에야 두려움에 움직이기도 힘들고 당장 죽지 않기 위해 싸웠지만, 잠깐 틈이 생기자 오히려 도주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혼란에 정신이 없는 사이에, 황소 군단은 다시 한번 습격해왔다. 단 하루를 넘기는 것만도 생사를 걸어야 했다. 장승범이 보고를 보낸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그가 지평선을 가득 채운 채 끝없이 몰려드는 적을 상대하며 보낸 보고는 이렇게 마무리 되어 있다.


 "신이 감히 아직도 살아 있는 몸뚱이를 가지고 분발하여 죽기를 무릎쓰고 말씀을 드리옵나이다. 바라건대, 친밀한 사람과 재신(宰臣)들과 더불어 깊이 논의하시어서 급히 군사를 징집, 관문의 방어를 도와주신다면 저 고조(高祖)와 태종(太宗)의 위대한 위업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황소는 안록산이 망한 뒤를 잇게 될 것이며, 보잘것없는 신은 가서한의 죽음을 넘어서겠나이다."


 그 다음날,  장승범은 아침부터 몰려드는 적을 상대로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맞서 싸웠다. 동관의 밖에는 본래부터 있었던 긴 참호가 있었다. 그러나 황소 군은 백성들 천여명을 시켜 흙을 파서 이를 메꾸게 하니, 잠깐의 사이에 참호는 모두 평지로 변하였다. 낮과 밤을 버틴 장승범이었지만 결국 지원병은 오지 않았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결국 동관은 함락되고 말았다.


 장승범은 천신만고 끝에 도주하여 물러나는 와중, 봉천(奉天)에서 온 2천여 병력이 오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너희들이 온 것이, 이미 늦고 말았다."


 이제 황소의 군단은 낙양에 이어 동관마저 함락했다. 이 와중에 봉상(鳳翔)의 군대 등은 새로 모집하는 병력들이 옷이 깨끗하고 따뜻한 재질인 것을 보자 부아가 치밀어 이들을 죽이고 약탈하고는, 되려 황소 군단의 길잡이 노릇을 자처하기도 했다. 황소 군단은 이를 따라 장안으로 진격하며, 하중 유후 왕중영(王重盈)의 항복을 받았다.


 이 시점에 이르자 당나라 조정은 패닉에 빠졌다. 동관이 함락된 다음날, 조정에서는 황소에게 제서를 내려 그를 천평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는 황소가 강남 등지를 떠돌때 요구한 자리다. 조정으로서는 무슨 수라도 써본다고 한 행위겠지만, 장안 지척에 60만 대군이 몰려온 상황에서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씁쓸한 웃음만을 짓게 해줄 뿐이다. 이것이 웃음거리임은 당사자들도 잘 알았을 것이다. 황소에게 천평 절도사 자리를 내준 다음날, 황제 희종은 환관 전령자(田令孜)의 인도 아래 말을 달려 성 밖으로 도주했다. 이는 몇 명의 왕공들과 소수의 비빈들, 그리고 전령자가 이끄는 오백의 신책군 만이 알았던 것으로, 대다수 백관들은 황제가 갑작스레 떠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후 황제의 피난 소식이 전해지자 장안은 아비규환의 장으로 변하고 만다. 병사들과 군사들은 황실과 관청의 부고(府庫)를 털어 금과 비단을 훔치기에 바빴다.


 이렇게 약탈의 장이 되어버린 장안에 드디어 황소의 군대가 나타났다. 선봉장 시존(柴存)은 오후 4시에 성에 입성했고, 금오 대장군 장직방(張直方)은 문무관원 수십명을 이끌고 이끌고 나아가 뒤이어 등장한 황소를 영접했다. 황소는 금으로 장식한 가마를 탔고, 황소 주변의 장수들은 모두 머리를 풀어헤치고 붉은 비단 옷을 입었으며, 그 주변의 기병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물 흐르듯 움직였다. 60만 대군의 치중병들 역시 속속 도착하였는데 그 길이 천리에 다다를 정도였다.


 장안에 남아있던 백성들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몰려들어 황소의 입성을 지켜보았다. 황소의 옆에서 행군하고 있던 상양은 그런 백성들에게 소리쳤다.


 "우리 황왕께서는 군사를 일으킨 것이 본래 백성을 위한 것이어서, 당나라 이씨가 너희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다. 다만 편안히 살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과연 황소의 군단은 당분간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동정하여 물건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세가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다.






Seljukid Turk Archer



 황소의 군대가 장안에 입성하고 있을때, 독안룡 이극용은 북방에서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충돌을 삭히고 있었다.


 878년 2월에 시작된 이씨 부자의 반란은 880년 중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이씨 부자는 사타 무리를 이끌고 지속적으로 중국 북방을 압박했으며,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대 규모는 2만에 달하였다. 이 당시에는 황소가 강남을 휘젓고 다니며 북상할 틈을 노리던 형편이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타 무리들 모두가 이씨 부자를 따른 것은 아니다. 당나라는 이씨 부자의 통제하에 있지 않는 사타 추장들을 포섭하여 이를 상대하도록 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이씨 부자의 세력 자체도 흔드는 시도를 했다. 일종의 이간질을 시도한 것이다.


 880년 6월 경, 이극용은 자신의 관할 아래 있던 삭주 지역을 휘하 대장인 고문집과 친족 아버지 뻘인 이우금(李友金)에게 맡기고 자신은 병사를 이끌고 웅무군(雄武軍)으로 이동했다. 울삭등주도통 이탁, 노룡 절도사 이가거, 토욕혼 도독 혁련탁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는데, 게중 이탁의 경우 수천에 이르는 사타 무리를 항복시킨 참이었기 때문에 사타 무리에 대한 영향력 측면에서도 껄끄러운 측면이 있었다. 이극용은 이탁, 이가거, 혁련탁을 직접 상대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헌데 토욕혼 도독 혁련탁은 이극용이 떠난 삭주에 사람을 보냈다. 대장 고문집을 대상으로 하여 당나라에 귀국하도록 설득한 것이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고문집은 이극용의 장수인 부문달을 포박하고, 이우금 등과 함께 모두 이탁에게 항복하여 성문을 열고 관군을 받아들였다.


 이 배신행위에 이극용이 분개한 것은 당연하다. 웅무군에 주둔하던 이극용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군하여 삭주로 귀환, 고문집을 쳤다. 그러나 노룡 절도사 이가거는 행군사마 한현소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게 했다. 갑작스레 군대를 움직이다 공격을 받은 이극용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병력 7천을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한번 패배를 당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삭주로 귀환하던 병력이 패배한 동시에 웅무군 쪽에서도 공격이 들어와 또다시 1만이 넘는 병력이 죽었으며, 이극용의 부장이었던 이진충, 정회신등도 모두 참살되고 말았다.


 이가거가 이극용을 물리치는 동안 이탁과 혁련탁은 울주로 나아가 이국창을 무찔렀다. 이렇게 되자 단번에 모든 영향력을 상실한 이씨 부자는 자신의 종족들만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 한해사막 남쪽까지 도주해야 했다. 당시 이곳은 타타르의 영역이었다.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던 이극용은 졸지에 타타르의 무리들이 있는 사막을 정처없이 배외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 전투 이후, 혁련탁은 운주 자사 · 대동군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북방을 관할하게 된 혁련탁에게 있어 눈엣가시는 아직까지 이씨 부자가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한동안 상황을 지켜보던 혁련탁은 몇달 뒤 타타르의 무리들에게 몰래 뇌물을 주며 이씨 부자를 사로잡아오도록 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망명자만큼 주변의 기류를 잘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극용은 자신의 주변의 낌새가 이상해지자, 일부러 타타르의 높은 추장들이나 지휘관들과 어울리며 사냥을 다녔다. 이극용은 사냥을 하며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여주었는데, 이 모습을 본 타타르의 추장들은 크게 감탄을 하게 된다. 한껏 그들과 어울린 이극용은 이후 술자리를 가졌다. 술을 마신 이극용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천자에게 죄를 지어 충성을 다할 수 없다. 지금 듣건대, 황소라는 자가 중국의 남부에서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한다. 그자는 반드시 곧 중원에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어느 날 천자가 나의 죄를 사면하게 된다면, 공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함께 큰 공로를 세우지 않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몹시 유쾌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인생, 얼마를 살겠는가?"


 그렇게 속내를 털어놓은 이극용은 비감이 오른듯 소리쳤다.


 "누가 사막에서 늙어 죽을 수 있으랴!"


 타타르의 무리들이 혁련탁에게 뇌물을 받고 이씨 부자를 해칠 생각을 했던 것은, 이씨 부자가 자신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타타르를 장악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타르의 추장들은 술에 취한 이극용의 말에서, 중원에 뜻을 둔 야심가의 모습을 보았다. 이극용의 뜻이 중국에 있는 한, 그가 사막에서 타타르의 추장 노릇을 할 우려는 없어 보였다. 결국 타타르 무리들은 이씨 부자를 습격하려는 계획을 중단했다.


 그 자신의 말처럼, 이극용의 뜻은 중원에 있었다. 그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하 난세가 더욱더 깊어질 그 때를……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동양이 서양에 비해 밀린 이유는 뭡니까?

"동양에 서양에 비해 밀린 이유는 뭡니까?" 라는 이야기는 19세기 이래 아마도 1억번은 나왔을 법한 주제이며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라 언급하기도 지치는 주제이다. 정치, 철학, 사회, 경제, 과학적으로 수 많은 분야에서 수 많은 이유가 제시되곤 하기에 기실 풀자면 끝도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튼 게중에 주로 언급되는 이야기 중에 하나는 자연과학 등에 대한 적은 관심 등이기도 하는데, 17세기 서구의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 성과 등이 같은 시기 동아시아에 비해 앞서 있었음은 그다지 이론의 여지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는 강희제의 경우라고 해서, 그런 한계성 때문에 당시 서구의 기준으로 보자면 썩 자연과학 등에 밝은 편은 못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속에서도, 강희제는 자연과학에 대해서 꽤 관심이 많았다. 무슨 강희제가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가 서구 지식인들을 압도했다던지 현대인 같았다거나 청나라의 개화를 이끌만한 수준이었다고 하면 허무맹랑한 이야기겠지만, 17세기 동아시아의 봉건적 군주라는 한계 속에서는 유례를 보기 힘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강희제의 성격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호기심이 많았던 측면도 있을 것이다. 지식에 대한 강희제의 욕구는 대략 이러하다. 어떠한 지식을 통해 들으니, 어떤 지방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기억해 둔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지식 습득이다 그런데 강희제의 호기심의 경우는 이렇다. "어떠한 지식을 통해 들으니, 그 지역은 이러하다고 한다. 그럼 정말로 그러한가? 한번 가서 보면 어떤 모습 일 것인가?"




강희제 시기 편찬된 『강희기가격물편』 에는 여러 자연과학적 현상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게중 '뇌성은 100리를 넘지 않는다.' 는 부분에서 강희제는 소리와 속도를 이용한 거리의 측정, 즉 뇌성벽력의 소리가 몇초 뒤에 울려퍼지는 것인가를 통해 거리를 측정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러한 지식은 강희제가 처음에 생각한 것이 아니고, 유명한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국 조정에 알렸던 이야기였다.


강희제의 호기심의 일면을 볼 수 있는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강희제는 자신이 어렸을때 죽은 아담 샬의 일화를 통해 뇌성벙력을 통해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강희제는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진짜? 신기한데! 한번 진짜로 그런지 볼까?" 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관련된 부분에 대한 강희제 본인의 언급은 이러하다.


 "짐은 산법으로 으로 그것을 비교해보았다."


 "짐이 매번 측량해 보니 100리를 넘으면 비록 우레는 있어도 소리는 이르지 않았다."


 "짐이 하공을 위해 천진에 이르러 길을 멈추었다."


 이러한 언급등은 강희제가 실제로 실험을 통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았음을 의미한다.


 다른 이야기의 경우라면 조석 간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강희제는 평소에 여러곳을 다녀보았는데 산해관, 천진, 장강, 전당강 등 여러 해변 역시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발생하는 조석 간만에 대해, 강희제는 꾸준히 기록을 하면서 조석이 오가는 시간등을 물어보고, 그 차이가 있다는 사실 등을 확인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조석 간만의 차가 발생한다고? 그렇구만." 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강희제는 그렇지 않았다. 왜? 궁금하니까! 강희제는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그 대상이 중국인이건 서양인이건 계속 캐물어 보기도 했다.


 "잠아 해변에 이르러 산해, 천진, 대강, 전당 등지에서 매번 조석이 오가는 시간을 관찰함에, 본토인에게 자문해 보면 대게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처의 사람에게 시각을 기재하도록 해도 역시 같지 않았다. 후에 샘과 우물에도 미세한 조수가 있지만 역시 시간이 정확하지 않았다. 서양인과 바다의 선박 운행자에게 물어보아도 또한 같지 않았다."


 궁금한 부분을 못 참는 강희제의 집요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강희제가 품종 개량을 했다고 해서 유명한 '어도'의 경우에도 강희제의 열렬한 호기심이 작용한 결과였다. 6월 하순의 논밭을 오가던 강희제는, 우연히 여러 벼 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하나의 벼를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깟 벼 따위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이겠지만, 묘하게 생긴 벼가 있자 강희제는 신기함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또 확인해 보았고, 따로 종자를 보관하여 개량에 힘쓰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강희제의 실험 정신은 가히 끝이 없었다. 심지어 온천의 효능에 대한 부분 등에서조차 강희제는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온천이 질병 치료에 좋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연장자에게도 미치는 것인가?" 라고 말이다. 강희제는 온천을 만날 때마다 일부러 퇴적물을 확인하여 그 온천의 성분을 알아내려고 하기도 했다.


 "매번 온천을 만나면 은제 그릇에 온천수를 넣고 흔들어 낮은 불로 가열한 뒤 그릇의 물이 마르기를 기다려 물에 남아 있는 것이 혹은 반석, 혹은 소금, 혹은 유황이 되는지를 보면 분명히 판별된다."


 그 외에도 황제는 궁금한것이 있으면 발품을 파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북순을 나서게 된 강희제는 '바이룽두이' 즉, 백룡퇴(白龍堆)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막의 모래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강희제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백룡퇴를 찾아가서 모양을 구경하며 "정말 그렇다." 고 기록했으며, 굳이 모래 형태를 살피면서 다음 날이면 형태가 계속 해서 바뀐다는 사실도 관찰했다. 이런 부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중요하건 중요하지 않건 어찌되었건 궁금하니 알아보겠다는 황제의 성미가 나타난다.


 이러한 관찰도 기본적으로 독서 등으로 지식을 습득하려는 노력 다음에 벌어지는 일이다. 1702년, 강희제는 남순을 하던 중 이광지로부터 청나라 시기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인 매문정의 『역학의문』 이라는 책을 선물 받게 되었다. 강희는 이에 감사하다는 태도를 취했고, 얼마 뒤에 다시 책을 돌려 주었다. 이광지가 책을 열어보니 책에는 여러 군데마다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그런 부분마다 비평의 말들이 써 있어 황제가 책을 열심히 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광지는 혹시 몰라서 책에 착오가 있느냐를 물었고, 강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류는 없는듯 하다. 다만 산법이 미비하다."


 산법이 미비하다니? 이 책의 저자인 매문정은 수학자가 아닌가? 수학자가 쓴 책이 산법이 미비하다니? 사실 이 책은 아직 매문정이 완성을 덜 시킨 자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건성으로 읽어본게 아니라 책을 꼼꼼히 읽어본 강희제는 채에서 뭔가 미비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희제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집요했다. 그는 측량에 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아예 직접 측량술을 배웠으며, 수하에게 치수 사업을 지시하면서 아예 본인도 치수에 대한 고금의 책을 읽어보며 공부했다. 메뚜기에 대한 대책에 관련해서는 아예 메뚜끼의 생태에 대한 저술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런 강희제의 호기심으로 인한  끊임없는 관찰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차오모드 전투 직전, 가르단을 물리치기 위한 원정 중이었다. 당시 강희제는 가르단의 도주 가능성, 식량의 부족, 사막을 건너는 원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상당히 심리적으로 몰려 밀었다. 원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치닿았을 때는, 심지어 강희제 본인 조차 양고기 외에는 아무것도 엄ㄱ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작성된 강희제의 편지 등에는 주변 풍경등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 묘사 되어 있다. 물론 군대가 통과하고 나가는 부분에 대한 관심이야 총사령관으로 서 당연한 부분이다. 하지만 강희제는 그 상황에서 조차 풀의 종류, 여러 수원, 서로 다른 종류의 사막 등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기록을 했다. 게중에는 심지어 마멋 굴의 수에 대한 기록도 있다.


1697년은 강희제와 가르단의 지리한 대립이 마무리 된 역사적인 해였고, 이해 3월 강희제는 하미의 이슬람 교도로부터 가르단의 가족들을 압송 받게 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것은 대 준가르 전쟁에 있어 강희제의 성공을 과시할 수 있는 굉장한 성과 중에 하나 였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성과를 베이징에 이야기 하면서 강희제가 언급한 내용의 일부를 보면, 정말 걸작이라는 말 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하미의 이슬람교도들이 가르단 반역도들을 압송하면서 함께 보내준 토산물 중에서 태양볕에 말린 참외가 제일 맛있었다. 지금 답신과 함께 보내주는데, 그 먹는 방법을 모를까 염려되어 특별히 적어 보낸다. 먼저 말린 참외를 찬 물이나 뜨거운 물로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잠깐 담그면 참외가 말랑말랑 해진다. 식혀서 먹어도 되지만, 뜨거운 채로 먹어도 되는데 그 맛이 아주 신선하고 참외가 우러난 물은 꿀물에 말린 복숭아를 탄 것과 비슷하다. 참외가 차지하고 남은 빈 곳에는 포도를 넣으면 된다. 이 사실을 여러 비들에게 알려 주어라. 물건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마음은 먼 곳에서 전하는 것이니 비웃지는 말아달라."


 천하의 가르단에 가족을 압송받으려고 하는 그런 중요한 상황에서, 저쪽에서 가져온 참외를 먹어 보니 인상에 깊게 남자 황제가 참외를 보내면서 직접 그 조리법을 상세히 작성해서 베이징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런 내용을 쓴 강희제 조차 쓰고 나니 무안한지 마지막에 비웃지는 말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물론 강희제의 여러 관심은 물론 한계가 있었다. 그의 지식에 대한 욕구나 수학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나 '취미생활' 으로서 개인의 '흥취' 였기 때문에, 무슨 국가 전체의 지식을 증대 시킨다던가 하는 부분은 별로 없었고, 또 강희제 본인도 여러 선교사들의 말에 따라 일종의 '잡지식' 처럼 지식을 쌓아 올렸기에 '계통적' 이다고 할만한 이해는 부족한 편이었다.


또한 이러한 박식함을 추구하고 드러낸 강희제의 태도는 어느정도 과시적인 면도 있었다. 신하들의 앞에서 자신의 박식을 드러내보이면서 권위를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강희제는 진후요, 하국중, 명안도 등 몇몇 신하들에게는 아예 본인이 직접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신하들에게 직접 학문을 가르치는 입장이라고 한다면 군주로서의 위신이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강희제는 종종 신하들에게 수학이나 측량 등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해서 골탕을 먹이는 괴이한 경우도 있었다.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제국의 몰락, 오대의 폭풍 (2) 늑대들의 우두머리


 876년 12월. 왕선지의 군대는 신주, 광주, 여주, 수주, 서주, 그리고 기주를 폭풍처럼 휩쓸고 있었다.


 이는 당나라 조정이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그들의 계획대로라면, 이 간악한 반적들은 5개월 전에 기주에서 뼈를 묻어야만 했다. 조정에서는 평로절도사 송위(宋威)가 기주의 전투에서 왕선지를 패퇴시켰고, 최종적으로 왕선지의 목을 베었다고 알고 있었다. 송위가 그렇게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다.


 기주의 전투에서 송위가 왕선지를 격파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조정에 승리의 보고를 올린 송위는 이미 모인 군대를 모두 돌려보내고 자신은 청주로 돌아갔다. 이는 송위가 다른 마음을 품고, 허위로 보고를 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백관들은 간적들이 섬멸당한 사실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사흘 뒤, 놀라운 보고가 들려왔다. '왕선지는 살아있다.'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하고 약탈하는것이 예전과 같다.'


 송위가 거둔 승리는 왕선지 세력을 격멸시키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기실 왕선지는 그리 큰 피해를 입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찌된 사태인가? 승리 직후 송위가 군대를 해산시킨 부분을 보면, 송위는 무언가 확신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왕선지의 죽음에 대해 무언가 들은 것이 있었을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는 왕선지 측의 계략일수도 있다. 일부러 패전을 연출하고 정보를 교랸하여 군대의 맹공을 피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도된 상황이었건 우발적인 상황이었건, 이는 곧 왕선지에게 있어 유리한 형세가 되었다. 왕선지는 송위의 군단에 그리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더러, 이미 소집이 해제되어 쉬고 있던 관군들은 다시 내려온 조서로 인해 재소집되자 모두가 분통해 했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킬 생각까지 하였다. 병사들의 마음은 이미 전쟁터를 떠나 있었던 것이다.


 늙고 병든 송위는 결과적으로 거짓된 보고를 올린 이후 웅크리고만 있고, 또다른 토벌 사령관인 초토부사(招討副使) 증원유(曾元裕) 역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여러 도에서는 재소집 명령에 항거하여 불만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 사이 왕선지는 낙양에서 동남쪽으로 80km 지점에 있는 여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왕료를 포로로 붙잡았다. 왕료는 재상 왕탁(王鐸)의 사촌 형제였다.


 그러한 파죽의 형세가 12월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들의 군대는 이 시점에 이르러 호북 기주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때까지 왕선지의 군대는 밀물처럼 한 곳을 습격한다음 썰물처럼 빠지는 전술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기주 역시 맹공으로 함락시킨 후, 약탈을 하고 빠질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때 포로였던 왕료가 나섰다. 왕료는 일신의 안전과 더불어 공로를 세우기 위해, 황소에게 나아가 자신이 기주의 자사 배악에게 유세하겠다고 말했다. 배악과 왕선지가 서로 싸우지 않고, 왕선지는 왕료와 배악을 통해 당나라 조정과 연결되며, 이를 통해 반역자의 오명을 씻고 제대로 된 벼슬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왕료의 계략이었다.


 배악과 왕선지가 이에 동의함에 따라 닫혔던 기주의 성문은 열렸고, 이를 통해 왕선지와 황소, 그 무리들 30여명이 성으로 들어와 술자리를 가졌다. 그 사이 조정에서는 이들의 투항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예전 방훈이 반란을 일으켰을때, 돌아가신 선제께서는 방훈을 용서하지 않다가 1년이 지나 끝내 그를 주살하셨다. 지금 왕선지는 작은 도적일 뿐이니, 방훈에게 비할 바가 안 된다. 그런 왕선지의 죄를 용서하면 앞으로 더욱 도적들의 악행을 조장할 것이다."


 몇년 전 일어난 방훈의 난은 제국을 발칵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868년 계림(桂林)에서 일어난 방훈의 난은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兵亂)으로, '당나라는 황소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지만, 화근은 계림에서 시작되었다.' 고 평가될 정도의 거대한 난리였다. 조정의 관료들은 그렇게 제국을 뒤흔든 방훈의 난에 비해 왕선지의 무리는 별반 대단한 위협도 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왕선지를 토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란의 싹을 조기에 꺾어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왕선지의 반란이 방훈의 난보다 덜 위험한 종류의 것이라는 생각은 문제가 있었다. 조정 관료들의 눈에 방훈의 반란은 군인들이 일으킨 지극히 위험한 사건이었지만, 왕선지의 난은 그저 도적 무리의 폭주에 지나지 않았다. 관존민천(官尊民賤)의 사고방식이라고 할만 하다. 그러나 민란(民亂)의 성격을 뛴 이 반란은 훨씬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었다.


 조정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왕선지의 투항 자체는 인정되었다. 이는 인척인 왕료를 구하기 위해 재상 왕탁이 여러모로 손을 쓴 결과다. 결국 조정에서는 왕선지에게 좌신책군(左神策軍) 압아(押衙) 겸 감찰어사의 직위를 내려주기로 했다. 압아(押衙)는 번진의 군인으로 절도사를 대신하는 자가 나올 정도의 관직이었지만, 감철어사는 정8품의 직위로 그렇게 대단한 직위는 못 되었다.


 하지만 관직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왕선지는 조정의 칙사를 만나자 크게 기뻐했고, 왕료와 배악 역시 옆에서 바람을 넣으며 왕선지를 축하했다. 이 시점에서 왕선지의 난은 마무리 될 수도 있었다.


 바로 그때, 한 남자가 왕선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왕선지를 때려눕혔다. 이 역사를 바꾼 주먹질을 날린 사람은, 다름 아닌 왕선지의 동료 황소였다. 황소는 쓰러진 왕선지에게 결연하게 소리쳤다.


 "시작할 때에는 같이 크게 맹세하고는, 함께 천하를 가로질러 돌아다녔는데, 지금 그대 홀로 관직을 얻어 부임한다면, 이 5천여 무리들로 하여금 어디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인가?"


 사서에서는 왕선지에게 황소가 화를 낸 이유에 대하여, 조정에서 내린 관직이 왕선지에게만 닿고 황소 자신에게는 닿지 않아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반란의 무리들 중에 오직 왕선지 홀로 포상을 받았으니 분통이 터지는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어쩌면, 황소는 이를 떠나 정8품의 관직을 받고 시시덕 거리는 왕선지의 뜻이 너무나 시시하여 화를 내었을 수도 있다.


 황소에게 얻어맞은 왕선지는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왕선지만 관직을 받았다는 사실, 황소가 왕선지를 때려눕혔다는 사실이 알려져 반란군은 크게 동요했다. 지금의 왕선지로서는, 함부로 행동을 벌였다간 동료들에게 척살당할 우려가 있었다. 또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 왕선지조차 미래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조정의 부름을 받은 자는 어디까지나 왕선지 한 사람 뿐이므로, 조정을 위협하던 군대를 버려둔 채 혼자가 된 과거의 도적이 어떤 꼴을 당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왕선지는 관직을 포기하고 군대를 움직였다. 조정과의 협상이 결렬된 반란군은 무혈입성한 기주를 마음껏 불태우고 노략질했으며, 성 안의 사람들 절반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웠다. 자사 배악은 악주로 달아났고, 황제의 칙사는 양주로 달아났으며, 미처 달아나지 못한 왕료는 그대로 구금되었다. 이제 조정과 반란군은 서로가 끝을 보기 전까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앞으로의 진로다. 비록 왕선지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곤 하더라도 황소는 노골적으로 왕선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또한 잠시나마 무리를 버리려 했던 왕선지에게 혐오감을 느낀 병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무리는 두 패로 나뉘게 되었다. 3천여명은 왕선지를 따라, 2천여명은 황소를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두 패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다시 힘을 합치기도 했다. 877년 7월에는 그들이 힘을 합쳐 전날 기주에서 반란군을 격파했던 송위룰 포위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작전은 토벌군 사령관 중 한 사람이었던 장자면이 지원병을 이끌고 오자 반란군이 물러섬으로써 실패하였다. 그러나 토벌군의 장수들은 자기들끼리도 반목하였다. 또한, 그들의 기량에도 문제가 있었다. 왕선지의 군대가 형남을 공격할 당시, 절도사 양지온은 적군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도 거짓말로 생각하여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형남 지역은 무참하게 노략질 당해야만 했다. 이는 양지온이 본래 문학으로 승진한 사람이라 군사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는데도 토벌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기 때문이었다.


 천하에 대란이 벌어지자 왕선지와 황소 외에도 군사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절서의 장교 왕영은 병란을 일으켜 1만이 넘는 군대를 이루었고, 절강성을 돌며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막강한 무리는 왕영의 부하였던 주실이 배반하는 바람에 싱겁게 무너져 내렸는데, 무너지는것도 재빨랐지만 세력을 일으키는 것도 재빨랐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단순한 병란이 눈깜짝할 사이에 민란의 성격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878년, 아직 눈이 내리던 정월.


 하남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오는 가운데, 중국의 북방인 대동(大同)에서는 눈길을 밞으며 온 몇몇 사람들의 무리가 눈에 띠였다. 사타병마사 이진충, 그리고 이진충의 아장(牙將)이었던 흥당 사람 강군립(康君立), 봉성 사람 설지근, 정회신, 운주 사람 이존장(李存璋) 등이었다. 자리에 모인 그들은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입을 연 사람은 이진충이었다.


 "지금 천하는 크게 혼란하다. 조정의 호령은 다시는 서방에서 시행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바로 영웅이 공로를 세우고 이름을 날리며 부귀하게 되는 시기일 것이다. 우리들도 비록 각기 무리는 거느리고 있지만……"


 이진충의 말은 난세에 봉기를 일으키자는 것이다. 이진충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려는 것인가? 무리들은 침을 꼴깍 삼켰을 터이지만, 이진충은 그럴 뜻은 없었다.


 "그러나 이진무(李振武)는 공로도 크고, 관직도 높으며, 그 이름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또한, 그 아들은 용맹하기가 군대 가운데서도 으뜸이니, 만약에 이들을 보필하여 군대를 일으킨다면 산서 북부를 평정하는 것은 일도 아닐 듯 싶은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진무라는 말을 들은 무리들은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 대답했다. 이진무, 이는 바로 이국창(李國昌)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국창의 옛 이름은 주사적심(朱邪赤心)이었다. 사타 튀르크 무리의 족장으로서 음산부 절도사(陰山府兵馬使)에 임명되었던 족장 주사집의(朱邪執宜)의 아들이었던 그는, 40여년 전 회골을 공격하여 그들의 우두머리인 칭신가한(彰信可汗)을 죽였으며, 저 방훈의 난에서는 몇 차례나 선봉장으로 활약하며 조정에서 이씨 성을 받아 이국창으로 이름을 바꾼 명장이었다. 작금 당나라에서 기미(覊縻)의 일환과 같은 형태로 움직이는 이민족 출신 장수중에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가장 연배가 오래된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진충 등이 봉기의 계획을 꾸밀 당시, 대동의 방어사는 단문초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방에 기근이 들고 혼란으로 조운이 이어지지 않자, 군사들의 의복과 쌀을 줄였고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혼란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단문초의 노력은 막강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장교들에게는 원망을 들을 뿐이었다. 이진충은 이 참에 단문초를 제거하고 대동을 장악하여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것보다는 이름 높은 이국창의 명성을 빌릴 의도였다.


 그러나 지금 그 이국창이 있는 진무절도사 치소인 허린컬현은 대동에서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 서로 연락을 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고, 그렇게 시간을 끌다간 이 음모가 단문초에게 들킬 우려도 있을 터이다. 그런 이진충의 눈에 보인 사람은, 바로 울주의 사타 부병마사 이극용(李克用). 저 이국창의 '용맹하기가 이를 데 없다는' 아들이었다.


 이극용의 나이는 당시에 고작 23살이었다. 그는 눈 한쪽이 장애로 인하여 이상하게 작아 거의 잠겨 있어 애꾸나 다름없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젊은이를 독안룡(獨眼龍)이라고 불렀다. 눈 덮인 울주에서 병사들을 관할하고 있던 이 젊은이를 보기 위해, 이전충이 보낸 사람이 달려왔다. 강군립이었다.


 강군립으로부터 대략의 음모를 전해 들은 이극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아버지는 진무에 계시오. 내가 이를 알릴 때까지는 기다리시오."


 그러나 강군립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기밀 사항은 이미 누설될 것입니다. 늦추게 되면 변고만 일어나겠지요. 어느 겨를에 천 리를 달려 명령해 주기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바로 말을 달려 돌아온 강군립으로부터 대략의 상황을 전해 들은 이진충은, 먼저 자신이 손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밤이 되자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단문초를 습격해 사로잡고, 그 무리들을 감옥에 가둔채 반란을 성공시킨 연 후에 이극용을 불렀다. 반란이 기정사실이 되자 이극용 역시 군사를 이끌고 대동방어사의 치소인 운주를 향해 진군했다. 이미 그 당시부터 많은 군사를 동원한데다가, 진군을 하는 와중에 여러 군사를 거두어 2월 4일 무렵 운주에 도착할 때에는 1만에 가까웠다. 운주 근처에 주둔해 있는 이극용에게 이진충은 부절과 인새를 보내었고, 이극용에게 '방어유후' 의 직위를 겸하게 했다.


 어쩌면 중요한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23살의 젊은 이극용으로써는, 비록 협조적으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잔뼈가 굵은 무장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을 터이다. 중요한건 강렬한 인상을 주어 기선을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4일에 도착한 이극용은 5일, 6일, 7일이 지나도 입성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이진충은 단문초 등 반란 과정에서 포로가 된 다섯여명의 주요 인물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극용에게 처분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풋내기의 수완을 보려는 이때, 이극용은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23살의 젊은이는 단문초 등의 다섯여명의 살을 절여서 자신의 병사들에게 먹도록 했다. 그렇게 살점을 발라 이들을 죽인 이극용은, 마지막으로는 진군을 하며 기병으로 그 해골마저 짓밞아 깨부수게 했다.


 그 모습은 운주 성 내에서도 분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다음날인 8일, 이극용은 마침내 운주에 입성하여, 모든 성 내 업무를 장악했다. 사타 늑대들의 포효가 중원을 뒤흔드는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