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2일 목요일

제국의 몰락, 오대의 폭풍 (7) 동상이몽의 군웅들


 '썩어도 준치' 라는 표현이 있다. 황소의 난 당시 당나라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비록 당나라의 힘은 극도로 허약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최후의 저력은 남아 있었다. 그 정도로 거대한 나라가 된다면 무너지는것 조차 쉽지 않았다. 황소의 60만 대군이 동관을 무너뜨리고 장안에 입성하던 시점에서는 도저히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지만, 오히려 이 형세가 길어지게 되자 불리한 쪽은 황소가 되었다. 비록 황소에게 한번 항복했던 절도사라고 할지라도 황소 군단의 무리한 요구와 수탈에 질린 나머지 점점 그를 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하동 유후 왕중영이 그렇고, 주온이 설득하여 항복시켰던 제갈상이 그러했다.


 장안에서는 유혈극이 계속되고 있었다. 황소를 비방하는 시문이 성에 내걸어지자, 격분한 상양은 상서성의 관리와 문을 지키는 병졸들을 모두 잡아 눈을 뽑고 그들을 매달았고, 성 안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죽였는데 그 숫자가 3천여명에 이르렀다. 장안에서 풍겨나오는 피 냄새가 진해질수록, 황소 무리의 형세도 점차 악화되어만 갔다.




서하왕릉(西夏王陵)



 황소의 편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을때, 당나라의 편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내몽고 악탁극전기 지역에서 자사 노릇을 하던 탁발사공(拓跋思恭)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래 당항(黨項)의 무리로, 부주(鄜州) 지역의 절도사 이창효(李昌孝)와 손을 잡은 탁발사공은 황소 토벌을 위해 노력하자고 소리 높였다. 이 탁발사공이라는 사람은 잠깐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이 인물이 내린 결정이 훗날 역사에 미친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황소 토벌을 위해 종군한 그에게 당나라는 하국공(夏國公)의 작위를 내리고 국성인 이씨 성을 내려주었다.


 하국공의 이름을 내건 이씨 성의 당항족이라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가 있다. 이원호(李元昊)로 유명한 서북의 신비 국가, 서하(西夏)를 말함이다. 말하자면 이 황소의 난에서 탁발사공의 활동이야말로 서하 왕계(王系)의 근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나라 조정은 탁발사공의 뜻을 받아들여 그를 권지하수 절도사로 삼았는데, 호삼성(胡三省)은 탁발씨가 강성해져 서하를 지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평가했다.


 이극용을 불러들인 이우금이나 황소를 배신한 왕중영, 제갈상. 그리고 내몽고에서부터 군사를 이끌고 황소를 막기 위해 출전한 탁발사공과 이창효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들 모두가 충심을 위해 움직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 모두는 각기 자신들의 계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멸망하기 직전의 나라치고는 호화스러운 위용이었다. 이 당시 제국의 황제는 촉에 있어서 그 조령은 천하에 통하지 않았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오직 봉상 절도사 정전의 힘이었다.


 황제가 촉으로 피난했을때, 천하 사람들은 이제 당나라 조정이 빛을 발하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정전은 천하 번진에 군사를 합쳐 도적을 토벌하자는 격문(檄文)을 보냈다. 이는 당조의 명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것을 알려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조와 황소 양측의 기량을 재던 야심가들은 어느 줄을 타야할지 확신을 얻었으며, 지킬 나라의 희망을 목도한 충신들은 앞 다투어 군사를 발동하고 이에 호응하였다. 이제 황소 무리는 함부로 서쪽으로 진군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진군은 커녕, 관중 바깥의 동쪽이 상황 조차 짐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지의 절도사들은 이전까지는 불가능해 보였던 장안 회복 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대전략의 축은 여러 군사 세력이 장안을 압박하는 것이다. 장수 당홍부는 위수 북쪽에 주둔하고, 왕처존은 위교(渭橋)에 주둔했으며, 왕중영은 사원(沙苑)에 주둔하고, 정전은 주질(盩厔)에 머물렀다. 여기에 탁발사공은 무공(武功)에 주둔하여 포위망을 옥죄었다.


 이 연합작전은 굉장한 힘을 발휘하여, 한때나마 황소는 무리를 인솔하여 잠시 장안을 비우고 동쪽으로 물러나기까지 하였다. 이에 정종초, 당홍부, 왕처존은 정예 병력 5천을 이끌고 옛 수도, 장안에 입성하였다. 그러자 거리와 저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몰려나와 이 '해방군' 을 환영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왓장을 던져 남아있던 황소 무리를 쳤으며, 어떤 사람은 화살 등의 보급품을 관군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 막상 장안에 입성하고 나자, 공적에 대한 욕심에 서로 눈이 멀어버렸던 것이다. 정종초 등은 장안 수복의 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지 않아 이 소식을 봉상의 정전과 탁발사공, 이효창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들을 환영하는 장안 백성들을 약탈하며 금과 비단, 그리고 여자들을 노략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황소 무리의 화를 피했다고 여긴 장안 백성들은, 되려 또다른 도적을 마주했을 뿐이다.


 비록 잠시 기세에 밀려 장안을 내준 황소였지만, 아주 멀리 떠난 것은 아니었다. 장안의 상황이 엉망이라는것을 알게 된 황소는 다시 한번 전방위적인 공세를 퍼부었고, 승리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던 정종초, 당홍부 등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이후의 양상은 처참한 살육전에 지나지 않았다. 장안 곳곳에서 황소 군단은 관군을 살해했는데, 약탈품을 잔뜩 등에 짊어진 관군 등은 차마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뒤뚱거리다가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열에 아홉이었으며, 왕처존은 그나마 남은 생존자들을 수습하여 군영으로 간신히 귀환하였다.


 해방군으로써 관군을 맞이한 장안 백성들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다시 나타난 황소를 맞이해야 했다. 이미 관군의 약탈로 넝마가 된 그들에게, 황소는 관군을 도운 책임을 물어 대학살을 저질렀고, 그 흐르는 피는 강을 이룰 정도였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사이, 당나라 황제 희종은 한중을 지나 성도에 도착했다. 수도 장안에서 지내던 궁궐 사람들은 성도에 오자 이렇게 이죽거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서천은 야만인들 땅이라고 하더니, 오늘 이를 보니 썩 나쁘지는 않구만!"


 장안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탁발사공과 이효창은 황소군 대장 주온과 동위교 부근에서 치열하게 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전 등의 활약으로 그 화가 촉에 닿지 않자, 조정은 다시 배를 불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재물들이 풍부하게 당도하여 망명 정권은 다시 배고품을 잊고 헛기침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망명 정권의 실력자는 바로 환관 전령자였다. 행제도지휘처치사가 된 전령자는 매번 사방에서 공물로 들어온 비단과 금을 얻어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이는 모두 장안 부근에서 쫓겨온 병사들에게 국한될 뿐이었다. 대신 촉 지방의 병사들은 소외가 되다보니 토착 지역의 병사들은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하루는 전령자가 촉 지방 토착 지역의 군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베풀고, 금으로 된 술잔을 하사했다. 모두가 이를 받는 가운데, 유독 서천의 황두군사 곽기라는 인물만은 홀로 이를 받지 않고 일어서서 발언했다.


 "제장들은 매월 봉료를 받아 풍족하여 여유가 있으니, 항상 보답하기 어려움을 생각하는데 만족함이 없겠습니까. 다만, 현지의 촉군과 폐하를 쫒아온 제군은 똑같이 숙위하며 똑같이 어려움을 겪는데, 유독 상으로 주는 것은 현격하게 다르니 원망함이 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때문에 혹시 변고가 있을까 두려우니, 바라건대 관군용사께서 제장들에게 사여하는것을 줄여 촉군에게 고르게 준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촉 지방의 병사로써, 패전하고 쫒겨 들어온 주제에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은 외지 병사들에 대한 불만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자 전령자는 잠자코 있더니, 대뜸 질문을 했다.


 "묻겠다. 너는 일찍이 무슨 공로를 세웠는가?"


 야만인들 땅의 병사 주제에 건방지게 군다는 의미였지만, 곽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 곽기는 본래 산동에서 자라 정벌하고 변방을 수비하여 일생동안 당항의 무리와는 17번을 싸웠고, 거란과는 10여번을 싸웠습니다. 쇠붙이에 다친 상처는 온 몸에 있으며, 일찍이 토욕혼을 정벌하는데 옆구리를 다쳐 창자가 나오자 실로 꿰매고 다시 싸웠습니다."


 그러자 전령자는 스스로 술통에 술을 따라 곽기에게 권하였다. 곽기는 직감적으로 전령자가 주는 이 것이 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감히 마시지 않을 수 없어 두번 절하고 이를 마셨다. 독을 마시고 돌아온 곽기는 그 즉시 한 비녀를 죽여 그 피를 바르고, 구역질을 해서 검은 피를 몇 되나 토하고 정신을 차렸다. 분노로 치를 떤 곽기는 이후 병사들을 이끌고 불을 지르며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가 반란을 피해 온 성도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은 명망있던 진경선(陳敬瑄)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곽기는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모든 휘하 군사 세력을 잃어버렸고, 단지 자신을 계속 따르던 하급 관리 한 사람만을 대동했을 뿐이다. 곽기는 이 하급 관리에게 말했다.


 "진경선 공은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군부가 놀라고 시끄러워졌으니 안정시키지 않을 수는 없을 터이다. 너는 나를 끝까지 섬겼는데 보답할 길이 없구나. 너는 나의 인수와 검을 가지고 가서 '내가 곽기를 칼로 치니 곽기는 강물에 빠졌고, 시체는 소용돌이를 타고 아래로 떨어졌기에 인수와 검만을 얻어 바칩니다.' 라고 하거라. 내 인수와 검이 저자에 걸어지면 남은 무리들은 안정될 것이고, 너는 후한 상을 타게 될 것이다. 우리 집도 보전되어 가솔들은 다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변에게 가서 의탁하겠다. 다만 너는 사태가 진정되면 우리 가족들에게 조용히 사정을 알려다오."


 곽기를 따르던 하급 관리는 그 말을 따랐는데, 과연 곽기의 생각대로 상황은 흘러갔다. 이렇게 사방에서 불만이 터져나오는 판이었지만 희종은 전령자등의 환관들만을 가까이 하며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만나지도 않았다. 환관들의 손에서 놀아나는 희종이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은 회남절도사 고변이었다. 비록 고변은 황소가 장안을 함락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기는 하나, 그 세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희종은 끊임없이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뒤에 보낸 사신이 앞에 보낸 사신을 보게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가서 고변을 독촉했지만 고변은 끝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던 고변을 움직인것은 황제의 칙사도 아닌, 점쟁이의 점술이었다. 점술을 신봉하던 고변은 점쟁이가 '들새의 모습을 보니, 공의 성읍은 텅 비게 될 것' 이라고 말하자 크게 우려하였다. 성읍이 비게 된다는것은 고변의 군사세력이 무슨 일을 당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러자 고변은 정전처럼 사방에 황소 토벌의 격문을 내걸었다. 자신이 군단을 이끌고 장안으로 가 황소를 토벌하겠다는 이야기였는데, 이를 통해 관할 내에서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그 숫자는 무려 병력 8만에 전함 2천척으로, 당장 황소 토벌에 나선다면 황소를 거의 끝장낼 수도 있었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제장들은 사기가 크게 고무되어 고변을 볼때마다 언제 출진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고변은 그때마나 날씨가 좋지 않다, 파도가 높다, 혹은 시일이 좋지 않다면서 이를 거부하다가, 결국 군대를 출발시키지도 않았다. 황소의 세력을 유지하게 해주는것은 황소 자신이 아닌 관군의 이합진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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