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0일 일요일

제국의 몰락, 오대의 폭풍 (2) 늑대들의 우두머리


 876년 12월. 왕선지의 군대는 신주, 광주, 여주, 수주, 서주, 그리고 기주를 폭풍처럼 휩쓸고 있었다.


 이는 당나라 조정이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그들의 계획대로라면, 이 간악한 반적들은 5개월 전에 기주에서 뼈를 묻어야만 했다. 조정에서는 평로절도사 송위(宋威)가 기주의 전투에서 왕선지를 패퇴시켰고, 최종적으로 왕선지의 목을 베었다고 알고 있었다. 송위가 그렇게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다.


 기주의 전투에서 송위가 왕선지를 격파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조정에 승리의 보고를 올린 송위는 이미 모인 군대를 모두 돌려보내고 자신은 청주로 돌아갔다. 이는 송위가 다른 마음을 품고, 허위로 보고를 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백관들은 간적들이 섬멸당한 사실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사흘 뒤, 놀라운 보고가 들려왔다. '왕선지는 살아있다.'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하고 약탈하는것이 예전과 같다.'


 송위가 거둔 승리는 왕선지 세력을 격멸시키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기실 왕선지는 그리 큰 피해를 입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찌된 사태인가? 승리 직후 송위가 군대를 해산시킨 부분을 보면, 송위는 무언가 확신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왕선지의 죽음에 대해 무언가 들은 것이 있었을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는 왕선지 측의 계략일수도 있다. 일부러 패전을 연출하고 정보를 교랸하여 군대의 맹공을 피했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도된 상황이었건 우발적인 상황이었건, 이는 곧 왕선지에게 있어 유리한 형세가 되었다. 왕선지는 송위의 군단에 그리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더러, 이미 소집이 해제되어 쉬고 있던 관군들은 다시 내려온 조서로 인해 재소집되자 모두가 분통해 했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킬 생각까지 하였다. 병사들의 마음은 이미 전쟁터를 떠나 있었던 것이다.


 늙고 병든 송위는 결과적으로 거짓된 보고를 올린 이후 웅크리고만 있고, 또다른 토벌 사령관인 초토부사(招討副使) 증원유(曾元裕) 역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여러 도에서는 재소집 명령에 항거하여 불만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 사이 왕선지는 낙양에서 동남쪽으로 80km 지점에 있는 여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왕료를 포로로 붙잡았다. 왕료는 재상 왕탁(王鐸)의 사촌 형제였다.


 그러한 파죽의 형세가 12월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들의 군대는 이 시점에 이르러 호북 기주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때까지 왕선지의 군대는 밀물처럼 한 곳을 습격한다음 썰물처럼 빠지는 전술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기주 역시 맹공으로 함락시킨 후, 약탈을 하고 빠질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때 포로였던 왕료가 나섰다. 왕료는 일신의 안전과 더불어 공로를 세우기 위해, 황소에게 나아가 자신이 기주의 자사 배악에게 유세하겠다고 말했다. 배악과 왕선지가 서로 싸우지 않고, 왕선지는 왕료와 배악을 통해 당나라 조정과 연결되며, 이를 통해 반역자의 오명을 씻고 제대로 된 벼슬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왕료의 계략이었다.


 배악과 왕선지가 이에 동의함에 따라 닫혔던 기주의 성문은 열렸고, 이를 통해 왕선지와 황소, 그 무리들 30여명이 성으로 들어와 술자리를 가졌다. 그 사이 조정에서는 이들의 투항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예전 방훈이 반란을 일으켰을때, 돌아가신 선제께서는 방훈을 용서하지 않다가 1년이 지나 끝내 그를 주살하셨다. 지금 왕선지는 작은 도적일 뿐이니, 방훈에게 비할 바가 안 된다. 그런 왕선지의 죄를 용서하면 앞으로 더욱 도적들의 악행을 조장할 것이다."


 몇년 전 일어난 방훈의 난은 제국을 발칵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868년 계림(桂林)에서 일어난 방훈의 난은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兵亂)으로, '당나라는 황소에 의해 사실상 멸망했지만, 화근은 계림에서 시작되었다.' 고 평가될 정도의 거대한 난리였다. 조정의 관료들은 그렇게 제국을 뒤흔든 방훈의 난에 비해 왕선지의 무리는 별반 대단한 위협도 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왕선지를 토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란의 싹을 조기에 꺾어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왕선지의 반란이 방훈의 난보다 덜 위험한 종류의 것이라는 생각은 문제가 있었다. 조정 관료들의 눈에 방훈의 반란은 군인들이 일으킨 지극히 위험한 사건이었지만, 왕선지의 난은 그저 도적 무리의 폭주에 지나지 않았다. 관존민천(官尊民賤)의 사고방식이라고 할만 하다. 그러나 민란(民亂)의 성격을 뛴 이 반란은 훨씬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었다.


 조정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왕선지의 투항 자체는 인정되었다. 이는 인척인 왕료를 구하기 위해 재상 왕탁이 여러모로 손을 쓴 결과다. 결국 조정에서는 왕선지에게 좌신책군(左神策軍) 압아(押衙) 겸 감찰어사의 직위를 내려주기로 했다. 압아(押衙)는 번진의 군인으로 절도사를 대신하는 자가 나올 정도의 관직이었지만, 감철어사는 정8품의 직위로 그렇게 대단한 직위는 못 되었다.


 하지만 관직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왕선지는 조정의 칙사를 만나자 크게 기뻐했고, 왕료와 배악 역시 옆에서 바람을 넣으며 왕선지를 축하했다. 이 시점에서 왕선지의 난은 마무리 될 수도 있었다.


 바로 그때, 한 남자가 왕선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왕선지를 때려눕혔다. 이 역사를 바꾼 주먹질을 날린 사람은, 다름 아닌 왕선지의 동료 황소였다. 황소는 쓰러진 왕선지에게 결연하게 소리쳤다.


 "시작할 때에는 같이 크게 맹세하고는, 함께 천하를 가로질러 돌아다녔는데, 지금 그대 홀로 관직을 얻어 부임한다면, 이 5천여 무리들로 하여금 어디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인가?"


 사서에서는 왕선지에게 황소가 화를 낸 이유에 대하여, 조정에서 내린 관직이 왕선지에게만 닿고 황소 자신에게는 닿지 않아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반란의 무리들 중에 오직 왕선지 홀로 포상을 받았으니 분통이 터지는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어쩌면, 황소는 이를 떠나 정8품의 관직을 받고 시시덕 거리는 왕선지의 뜻이 너무나 시시하여 화를 내었을 수도 있다.


 황소에게 얻어맞은 왕선지는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왕선지만 관직을 받았다는 사실, 황소가 왕선지를 때려눕혔다는 사실이 알려져 반란군은 크게 동요했다. 지금의 왕선지로서는, 함부로 행동을 벌였다간 동료들에게 척살당할 우려가 있었다. 또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 왕선지조차 미래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조정의 부름을 받은 자는 어디까지나 왕선지 한 사람 뿐이므로, 조정을 위협하던 군대를 버려둔 채 혼자가 된 과거의 도적이 어떤 꼴을 당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왕선지는 관직을 포기하고 군대를 움직였다. 조정과의 협상이 결렬된 반란군은 무혈입성한 기주를 마음껏 불태우고 노략질했으며, 성 안의 사람들 절반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웠다. 자사 배악은 악주로 달아났고, 황제의 칙사는 양주로 달아났으며, 미처 달아나지 못한 왕료는 그대로 구금되었다. 이제 조정과 반란군은 서로가 끝을 보기 전까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앞으로의 진로다. 비록 왕선지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곤 하더라도 황소는 노골적으로 왕선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또한 잠시나마 무리를 버리려 했던 왕선지에게 혐오감을 느낀 병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무리는 두 패로 나뉘게 되었다. 3천여명은 왕선지를 따라, 2천여명은 황소를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두 패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다시 힘을 합치기도 했다. 877년 7월에는 그들이 힘을 합쳐 전날 기주에서 반란군을 격파했던 송위룰 포위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작전은 토벌군 사령관 중 한 사람이었던 장자면이 지원병을 이끌고 오자 반란군이 물러섬으로써 실패하였다. 그러나 토벌군의 장수들은 자기들끼리도 반목하였다. 또한, 그들의 기량에도 문제가 있었다. 왕선지의 군대가 형남을 공격할 당시, 절도사 양지온은 적군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도 거짓말로 생각하여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형남 지역은 무참하게 노략질 당해야만 했다. 이는 양지온이 본래 문학으로 승진한 사람이라 군사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는데도 토벌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기 때문이었다.


 천하에 대란이 벌어지자 왕선지와 황소 외에도 군사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절서의 장교 왕영은 병란을 일으켜 1만이 넘는 군대를 이루었고, 절강성을 돌며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막강한 무리는 왕영의 부하였던 주실이 배반하는 바람에 싱겁게 무너져 내렸는데, 무너지는것도 재빨랐지만 세력을 일으키는 것도 재빨랐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단순한 병란이 눈깜짝할 사이에 민란의 성격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878년, 아직 눈이 내리던 정월.


 하남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오는 가운데, 중국의 북방인 대동(大同)에서는 눈길을 밞으며 온 몇몇 사람들의 무리가 눈에 띠였다. 사타병마사 이진충, 그리고 이진충의 아장(牙將)이었던 흥당 사람 강군립(康君立), 봉성 사람 설지근, 정회신, 운주 사람 이존장(李存璋) 등이었다. 자리에 모인 그들은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입을 연 사람은 이진충이었다.


 "지금 천하는 크게 혼란하다. 조정의 호령은 다시는 서방에서 시행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바로 영웅이 공로를 세우고 이름을 날리며 부귀하게 되는 시기일 것이다. 우리들도 비록 각기 무리는 거느리고 있지만……"


 이진충의 말은 난세에 봉기를 일으키자는 것이다. 이진충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려는 것인가? 무리들은 침을 꼴깍 삼켰을 터이지만, 이진충은 그럴 뜻은 없었다.


 "그러나 이진무(李振武)는 공로도 크고, 관직도 높으며, 그 이름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또한, 그 아들은 용맹하기가 군대 가운데서도 으뜸이니, 만약에 이들을 보필하여 군대를 일으킨다면 산서 북부를 평정하는 것은 일도 아닐 듯 싶은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진무라는 말을 들은 무리들은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 대답했다. 이진무, 이는 바로 이국창(李國昌)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국창의 옛 이름은 주사적심(朱邪赤心)이었다. 사타 튀르크 무리의 족장으로서 음산부 절도사(陰山府兵馬使)에 임명되었던 족장 주사집의(朱邪執宜)의 아들이었던 그는, 40여년 전 회골을 공격하여 그들의 우두머리인 칭신가한(彰信可汗)을 죽였으며, 저 방훈의 난에서는 몇 차례나 선봉장으로 활약하며 조정에서 이씨 성을 받아 이국창으로 이름을 바꾼 명장이었다. 작금 당나라에서 기미(覊縻)의 일환과 같은 형태로 움직이는 이민족 출신 장수중에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가장 연배가 오래된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진충 등이 봉기의 계획을 꾸밀 당시, 대동의 방어사는 단문초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방에 기근이 들고 혼란으로 조운이 이어지지 않자, 군사들의 의복과 쌀을 줄였고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혼란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단문초의 노력은 막강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장교들에게는 원망을 들을 뿐이었다. 이진충은 이 참에 단문초를 제거하고 대동을 장악하여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것보다는 이름 높은 이국창의 명성을 빌릴 의도였다.


 그러나 지금 그 이국창이 있는 진무절도사 치소인 허린컬현은 대동에서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 서로 연락을 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고, 그렇게 시간을 끌다간 이 음모가 단문초에게 들킬 우려도 있을 터이다. 그런 이진충의 눈에 보인 사람은, 바로 울주의 사타 부병마사 이극용(李克用). 저 이국창의 '용맹하기가 이를 데 없다는' 아들이었다.


 이극용의 나이는 당시에 고작 23살이었다. 그는 눈 한쪽이 장애로 인하여 이상하게 작아 거의 잠겨 있어 애꾸나 다름없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젊은이를 독안룡(獨眼龍)이라고 불렀다. 눈 덮인 울주에서 병사들을 관할하고 있던 이 젊은이를 보기 위해, 이전충이 보낸 사람이 달려왔다. 강군립이었다.


 강군립으로부터 대략의 음모를 전해 들은 이극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아버지는 진무에 계시오. 내가 이를 알릴 때까지는 기다리시오."


 그러나 강군립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기밀 사항은 이미 누설될 것입니다. 늦추게 되면 변고만 일어나겠지요. 어느 겨를에 천 리를 달려 명령해 주기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바로 말을 달려 돌아온 강군립으로부터 대략의 상황을 전해 들은 이진충은, 먼저 자신이 손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밤이 되자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단문초를 습격해 사로잡고, 그 무리들을 감옥에 가둔채 반란을 성공시킨 연 후에 이극용을 불렀다. 반란이 기정사실이 되자 이극용 역시 군사를 이끌고 대동방어사의 치소인 운주를 향해 진군했다. 이미 그 당시부터 많은 군사를 동원한데다가, 진군을 하는 와중에 여러 군사를 거두어 2월 4일 무렵 운주에 도착할 때에는 1만에 가까웠다. 운주 근처에 주둔해 있는 이극용에게 이진충은 부절과 인새를 보내었고, 이극용에게 '방어유후' 의 직위를 겸하게 했다.


 어쩌면 중요한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23살의 젊은 이극용으로써는, 비록 협조적으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잔뼈가 굵은 무장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을 터이다. 중요한건 강렬한 인상을 주어 기선을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4일에 도착한 이극용은 5일, 6일, 7일이 지나도 입성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이진충은 단문초 등 반란 과정에서 포로가 된 다섯여명의 주요 인물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극용에게 처분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풋내기의 수완을 보려는 이때, 이극용은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23살의 젊은이는 단문초 등의 다섯여명의 살을 절여서 자신의 병사들에게 먹도록 했다. 그렇게 살점을 발라 이들을 죽인 이극용은, 마지막으로는 진군을 하며 기병으로 그 해골마저 짓밞아 깨부수게 했다.


 그 모습은 운주 성 내에서도 분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다음날인 8일, 이극용은 마침내 운주에 입성하여, 모든 성 내 업무를 장악했다. 사타 늑대들의 포효가 중원을 뒤흔드는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