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7일 화요일

제국의 몰락, 오대의 폭풍 (4) 60만의 진군



 왕선지의 남은 무리들이 황소에게 합류하여 드디어 반란군이 다시 힘을 합쳤을 무렵, 황소는 안휘성 박주(亳州)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힘에 부침을 느끼던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양이 이끌고 온 무리가 그에게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황소는 다시 기력을 회복하여 충천대장군(衝天大將軍)을 칭하며 왕패(王覇)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사실상 왕위를 참칭하였으면서도 끝내 황제를 칭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나라 조정과 협상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 때문이다. 비록 복주와 기주를 함락하며 계속해서 군단을 움직이고 있었던 황소였지만 전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사방에서 추격하고 있는 관군들이 끊임없이 황소의 목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황소는 상황이 어려워 보이자 조정과의 연계를 꿰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를 칭한다면, 협상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이에 따라 황소는 천평절도사 장양에게 편지를 보내어 주문을 올려 달라 청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종3품 우위장군(右衛將軍)에 봉해줄 테니 군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황소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군사력이 사라진다면 조정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황소의 군단은 점차 서쪽 하남성으로 나아가며 낙양을 압박했다. 그러나 낙양은 대도시인만큼 그 주변으로 다가갈수록 방어선은 단단해졌고,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제국의 원군이 도착하고 있었다. 한계를 느낀 황소는 서쪽으로의 진군을 포기하고 군단의 방향을 바꾸었다. 장강(長江)을 건너 강남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당나라 말기, 제국의 무게추는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때 비옥하던 관중 지역은 계속된 전란과 황폐화로 인하여 예전의 영광을 잃은지 오래였다. 이미 관중은 운하를 통한 물길로 강남의 생산력에 의존하고 있던 참이었다. 황소의 반란군이 강남을 장악한다면, 제국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은 자명해 보였다.


 또한 황소가 강남으로 이동한 이유는 나름의 형세 판단도 있었다. 왕선지의 남은 무리들은 상양이 수습하여 황소에게 데리고 왔지만 모든 무리가 전부 황소에게 온 것은 아니다. 왕중은 등이 이끌던 별도의 세력은 이미 강남으로 들어가 각지의 절도사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던 참이다. 또한 절서 · 호남 군사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중국 남부는 시국 자체가 뒤숭숭 했다. 이에 황소는 878년 3월, 마침내 강남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강남으로의 이동은 훗날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사용했던 전략이기도 하다.


 3월에 강남에 들어선 황소군은 한동안 이동을 계속하다가 8월이 되서야 선주(宣州)를 공격했다. 그 사이 조정에서는 북쪽에서 벌어진 이극용의 반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참이다. 그러나 선주가 쉬이 함락되지 않자 황소는 미련없이 이동했다. 이렇게 요충지를 함락시키지 않고, 공격이 무리일 것 같으면 일단 이동하는것은 천년 후 태평천국(太平天國) 역시 구사했던 방법이다. 황소는 여기에 더해 본래 길이 없던 산길에서 인해전술로 700여리의 길을 열고 복건 지방으로 이동했다.


 황소의 입장에서는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느 장소에서건 관군의 추격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진해절도사 고변(高騈)은 그의 부장인 장린, 양찬 등을 파견하여 황소를 연파했고, 황소의 핵심적인 부장이었던 진언, 필사탁, 허경, 이한지(李罕之) 등 수십여명을 항복시켰다.


 비록 기록상 이 당시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했지만, 훗날의 주전충(朱全忠)인 주온은 이 당시 황소의 군단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당시 황소가 입은 지휘관 급의 큰 손해를 발판으로, 말단 병사였던 주온은 순식간에 반란군 내에서 입지가 높아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주, 공격, 도주, 패배, 도주, 공격, 도주, 패배. 황소는 정처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소의 세력이 유지되었다는것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발생한 유민들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했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안된다. 계속해서 사방을 떠돌던 황소는 다시 한번 조정에 자신을 천평 절도사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정이 이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광주 절도사를 부탁했다. 황소의 요구에 대해 당나라 대신들은 다음과 같은 의견이었다.


 "광주는 시박(市舶)하는 보화가 모이는 곳이다. 어찌 도적으로 하여금 이곳을 얻게 하겠는가?"


 광주에는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어 있었다. 국내외의 무역을 담당하는 관서를 말함이다. 외국과의 교역이 빈번하던 당나라, 특히 광주 지역은 자원이 풍부한 땅이다. 그런 지역을 좀도둑 따위에게는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이다.


 요구 조건이 거부되자 황소는 격분했다. 황소는 크게 욕설을 내뱉고는 그날로 광주를 함락시킨 후 절도사 이초를 포로로 잡아 황소의 대의를 위한 표문을 짓도록 했다. 그러나 이초는 이를 거부했다.


 "나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은데다, 조정에는 친척들이 가득하오. 팔을 자를 수는 있지만 표문을 지을 수는 없소이다."


 그러자 황소는 이초를 살해했다. 또한 영남 각지를 약탈하였다. 이때 당나라에 와 있던 아라비아인 아브 자이드(Abu Zaid)는 황소가 광주의 외국인 12만명을 찾아내 죽였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황소의 악행을 빼놓을 필요가 없는 중국 사서에 관련된 언급이 없는것을 보면, 이는 심하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건, 대학살을 벌이지는 않았다곤 해도 광주를 함락시키고 주변을 약탈하던 황소는 분풀이를 제대로 했다. 하지만 이제 또다른 문제가 있었다. 강북에서 건너온 황소의 병사들은 강남의 이질적인 풍토에 익숙해지지 못했고, 전염병이 들어 열에 서넛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군단의 피해가 극심해지자 황소의 부장들은 이동을 권했다. 이에 황소 역시 동의하여, 그들의 군대는 뗏목을 타고 호남으로 이동했다.


 강남에서 실력을 키운 것일까? 황소의 군대는 눈깜짝할 사이에 담주(潭州)를 함락했고, 황소의 부장 상양은 이긴 기세를 타고 엄청난 군세를 이끌고 강릉을 공격해다. 당시 상양은 자신의 무리가 50여만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황소측의 과장이 있겠지만, 그 군세가 어마어마했음은 분명할 것이다. 당시 강릉에는 재상 왕탁이 있었다. 황제가 반란군을 근심하자, 왕탁이 직접 적을 토벌하겠다고 나서 치소를 강릉으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황소군의 기세가 너무나 막강하자, 왕탁은 우선 자신은 강릉을 떠나 양양에 있는 또다른 토벌군 유거용(劉巨容)과 합류하기로 한 대신에 부하 유한굉을 강릉에 남겨 두었다.


 허나 왕탁도 막지 못할 것이라 여긴 황소 군대를 유한굉이 막을 수 있을리는 없었다. 유한굉은 승산 없는 전투를 하느니 오히려 자신이 도적이 되어 강릉을 크게 약탈하고 불을 지른 후, 멀리 북쪽으로 달아나 도적 집단이 되었다. 어제까지의 관군이 바로 도적으로 변모하는 세상이었다.


 강릉에 무혈입성한 황소군은 그대로 양양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너무 기분을 내었을까? 이곳에서 황소군은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양양의 유거용은 강서 초토사 조전정(曹全晸)과 힘을 합쳤다. 유거용은 군사를 몰래 숲속에 숨겨 두었고 조전정은 기병을 통해 황소군을 꿰어내어 복병으로 공격을 가했다. 이에 황소군은 열에 일고여덞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황소는 상양과 함께 간신히 동쪽으로 달아났다.


 생각해보자면 이때야말로 황소의 반란을 끝장내기에 적절한 순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유거용에게 황소를 끝까지 추격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유거용은 놀라운 말을 하며 이를 거절했다.


 "국가는 위급해지면 장사들을 위무하며 관직과 상을 주지만, 반대로 편안해지면 이를 버리고 혹은 죄를 묻는다. 차라리 도적을 남겨 두어 부귀하게 되는 밑천이 되는 것만 못하다."


 토벌군 장수의 입장에서 반란군을 완전 소탕하면 오히려 자신들에게 불리해지고, 반란군의 목숨줄을 연명시켜 놓으면 자신에게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나라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작금의 당나라는 이러한 소리가 버젓이 통용되는 난세였다. 결국 유거용의 무리는 황소를 뒤쫒지 않았다. 대신 조전정만 황소를 뒤쫒았는데, 그나마도 조정에서 다른 사람을 초토사로 파견하는 바람에 추격을 중지하게 되었다. 결국 황소는 최악의 시기를 견뎌내고, 다시 유민들을 모아 20만명이라는 대세력을 일구었다.


 황소는 끊임없이 패전했다. 일전에 황소를 격파했던 절도사 고변과 그의 부장 장린은 계속해서 황소를 공격하며 패배시켰다. 만일 황소 토벌에 나선 절도사들이 힘을 합칠 수 있었다면 황소의 토벌 자체는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모두가 각자 다른 세력이나 마찬가지였고, 자기들끼리 황소를 토벌했다고 거짓보고를 올리는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황소는 계속 패배를 당하면서도 결정타는 모조리 피할 수 있었다. 황소에게 걱정이 되는것은 마무리가 어설픈 관군보다도 오히려 돌림병이었다. 황소의 군단은 계속해서 돌림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황소는 자신을 추격하던 장린에게 사람을 보내, 그에게 뇌물을 줌과 동시에 고변에게 항복을 받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장린을 통해 이 제안을 들은 고변은 이를 기회로 삼아 황소를 유인하기 위해 제안을 받아들이는 채 했다.


 그러나 여기서 고변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황소를 잡는것이 눈 앞에 다가왔다고 여긴 고변은 다른 부대가 자신의 공적을 가로챌까 염려하여 각지에서 온 병력을 모조리 흩어지게 했다. "도적은 며칠 지나지 않아 이 고변이 모두 토벌할 터이니, 마땅히 여러 도의 병사를 번거롭게 하지 말아라." 이것이 바로 고변이 올린 주문의 내용이다. 조정에서 고변의 호언장담을 들어줌에 따라 황소군을 압박하던 관군의 포위망은 갑자기 얆아지게 디었다.


 군단을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지자 황소는 역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황소는 고변과의 관계를 끊고 오히려 호기롭게 승부를 청했다. 이에 분노한 고변이 수하 장린을 보내어 치게 했지만, 다른 관군의 압력을 받지 않는 황소군은 그 숫자만으로도 대단한 위협이었다. 결국 장린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잃게 된다. 또한 이 승리로 황소는 다시 한번 기세를 크게 떨치는데 성공했다.


 이제 황소의 기세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승리를 거둔 황소의 군단은 수십만이 넘는 괴물이 되었지만, 당장 이를 토벌할 병력은 고변의 주문으로 인하여 모두 흩어진 참이었다. 본래 황소의 장수였다가 항복하여 고변의 부장이 된 필사탁은 이렇게 충고했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국가의 안위를 걸고 있습니다. 지금 도적 수십만 무리가 기세를 타고서 멀리까지 달려 왔으니, 아무 사람도 없는것처럼 이곳을 지나가게 된다면, 다시는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원의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제까지의 황소는 어디까지나 다룰 수 있었던 작은 도적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황소는 절도사들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났다. 필사탁의 말처럼 여기서 저지하지 못한다면 황소의 기세가 어디까지 커질지 알 수 없었지만, 고변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병력은 흩어졌고, 믿고 있던 부장은 죽었으며, 자신의 군사력으로는 저 열기에 찌든 수십만 백성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고변은 급하게 "도적 60여만이 50여리 밖에서 주둔중이다." 라는 보고를 올리고, 자신은 풍병을 핑계로 싸움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고 만다.


 고변이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조전정은 홀로 6,0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황소의 수십만 대군에 달려들었다. 조전정의 병력은 황소군을 상대로 분전하며 수 많은 적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으나, 압도적인 숫적 열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밀려나고 만다. 그렇지만 조전정은 다시 세력을 정비하여 싸울 준비를 하고, 각지로 흩어진 병사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고변은 결국 끝까지 조전정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 결국 황소군은 최후로 저항하는 조전정마저 무너뜨리게 된다.


 이 무렵, 황소의 행동에 대해 사서에서는 '지나는 곳에서는 노략질을 하지 않고, 오직 장정을 붙잡아서 군사를 늘렸을 뿐'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적어도 이 당시에 기세가 오른 황소는 해방군과 같은 성격으로 절도사들의 지역을 분쇄하고 규율을 유지하여 병력을 모집, 군세를 키우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세가 풍주에 도달했을 때의 일화다. 당시 풍주에는 자사 이순과 판관 황보진이 있었다. 황보진은 진사 시험을 무려 스물 세번이나 쳤으나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이순은 그를 불러들여서 중히 써주었다. 그러나 이순이라고 해서 수십만 황소군을 마을 수는 없었던 일이었고, 결국 풍주는 함락되고 만다.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 황보진은 도주에 성공했는데, 뜻밖에도 이순은 보이지 않았다. 황보진은 같이 달아나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물었다.


 "자사는 어디에 계시는것인가? 위기는 모면하셨는가?"


 그러나 이순은 도주하지 못했다. 사람들 중에서 이순이 도적들에게 붙잡힌 것을 보았다는 자들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황보진은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결연하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이와 같이 알아줌을 받았다. 내가 이를 떠나 간다고 한들,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그리하여 황보진은 도적들의 소굴이 된 풍주로 다시 돌아왔고, 그곳에서 이순과 같이 죽었다.


 마침내 황소의 위협은 수도 장안에도 현실이 되었다. 수십만 대군이 성큼성큼 이 고대의 위대한 도시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황제, 희종은 어쩔줄을 몰라 울면서 재상들에게 대책을 애원했다. 환관 전령자(田令孜)는 황제를 안심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예전, 안록산이 반역하자 현종은 촉으로 행차하여 이를 피하셨습니다."


 안록산의 난. 작금의 형세에서부터 124년 전. 수만의 대군이 동관을 돌파하여 장안을 위협하고, 당나라 황제를 촉으로 몽진하게 만든 일대의 대사건이다. 그 후로 당나라는 성세를 잃어버렸다고 할만큼 제국에 있어서 뼈아픈 기억이었다. 전령자는 그런 안록산의 난때도 현종이 촉으로 몸을 피하여 이를 극복했으니, 희종 역시 그럴 수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상 최항(崔沆)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시에 동관을 위협하던 안록산의 무리는, 겨우 5만 입니다. 이를 황소의 무리에 비견할 수 있겠습니까?"


 좌중이 아무 대답도 못하는 가운데, 재상 두로전(豆盧瑑)도 바싹 마른 입을 열어, 절망적인 발언을 했다.


 "안사의 난 당시, 가서한(哥舒翰)은 15만의 무리를 가지고도 동관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금 황소의 무리는 60만 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동관에는 가서한만큼의 군사도 없습니다."


 모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던 희종이, 한참 후에야 간신히 탄식하듯 명령을 내렸을 뿐이다.


 "경들은 짐을 위하여 군사를 내어 동관을 지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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