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너희들이 바로 열린사회의 적들이야."
역사는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가? 이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있었고 여전히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이에 대한 가장 직설적인 대답이 바로 '역사주의'입니다.
* 역사주의란 역사는 일정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며, 따라서 이 법칙을 찾아내면 역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역사는 불가피하게 어떤 원리나 규칙에 따라 결정된 '목적'을 향해 발전한다는 것이죠. 매우 쉽고 간단하게 말하면 '역사란 정해진 법칙대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포퍼는 역사주의를 전체주의 사고의 뿌리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전체주의라는 닫힌사회의 주창자로서 플라톤, 헤겔 및 마르크르슬 주목합니다. 그야말로 열린사회의 적들로서 말이죠.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엘리트주의의 시초입니다. 대중에게 실망한 플라톤은 소수의 집권을 주장했지만 권력의 집중은 독재의 위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플라톤은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지배층의 사유 재산 폐지라거나 부인 공유제 등의 의견을 내놨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욕심을 과소평가한 감이 있네요. 소크라스테스의 진정으로 안다면 할 수 있다는 지나친 낙관에 영향을 받은 걸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도 역사 또한 그 목적을 가진다고 할 때 역사주의의 틀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특히 그가 알렉산더와 연결되는 순간 엘레트주의보다 좁은 영웅주의란 비판까지 받을 수 있죠. 당시의 시대를 생각해봐도 대중을 지배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몰아 버린 점에서 전체주의의 뿌리리가 아니라고 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닫힌사회. 최선을 기대하며 닫을 것인가, 최악을 통제하며 자유할 것인가. 독재의 결말은 법치와 함께한 민주의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플라톤은 대중의 자유의지를 놓쳤습니다. 그리고 이 실수는 마르크스에 의해 바로 잡히죠.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욕심에 대해 낙관적이었던 점이 여전히 문제였습니다. 그는 만인의 평등을 꿈꿨지만 만인이 평범하진 않았습니다. 잃을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세상이라지만 세상을 얻을 수 없다면 쇠사슬도 잃을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세상을 얻기 전에 타인이 잃었어야 할 쇠사슬을 얻어 그들을 이끌려고 했습니다. 스탈린이라거나. 공산주의의 결말은 자유와 함께한 자본주의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영원히 승리자의 논리로 남을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가요. 정正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했고 결국 터진 반反, 그리고 역사는 그 모든 것이 극복된 합合으로 나아갑니다. 모순이 해결된 아름다움. 하지만 변증법은 어느 시기를 분석하는 위한 어설픈 막대기가 아니라 순환의 고리입니다. 즉, 완전해 보이는 결과는 곧 여전히 모순을 품고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일 뿐입니다.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극복된다면 진보가 아니냐가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패러다임이란 늘 나아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때로는 지극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죠. 새로운 단계로의 진전이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의 교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 기존의 상식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닙니다. 반증주의에 기초하여 끝없이 탐구하고 연구하여 모순을 찾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변증법이라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발자취를 보려면 멀어진 저편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지금 이 자리에 와있으니 지난 방황은 다 필요했던 과정이다? 인생이든 역사든 떠밀린 후에 의미를 부여해선 그 멋이 살지 않습니다. 방황일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에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역사주의는 말합니다. 흐름을 따르라고. 전체주의는 말합니다. 다 그 흐름을 따른다고. 닫힌사회는 말합니다. 그러니까 입을 다물라고. 낚시 바늘을 피해도 세상은 그물인가요? 물살에 저항해도 세상은 어항인가요? 낚시 바늘을 피하는 것, 물살에 저항하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오직 죽은 물고기만이 물에 떠내려 갑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처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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