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역사는 정말 진보하는가? 오래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니다'란 대답이 귀납적이라면, '예'라는 대답은 연역적입니다. 19세기를 보죠.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 다윈의 진화론. 근대 이성의 발달, 자본주의 도약, 산업혁명의 폭발력 때문이었을까요? 19세기는 바야흐로 진보의 시대였습니다.
* 20세기에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은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이제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1차, 2차 세계대전, 그 이후 등장한 냉전의 심화와 경제 위기의 확산, 폭력과 테러리즘의 대두, 환경문제 등-인류의 미래가 안전할지 더 이상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역사는 정말 진보하는가?' 20세기의 사람들은 역사의 진보애 대해 회의를 품게 됩니다.
20세기에 들어 세계는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탕에 빠집니다. 여기서 카는 인류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념과 낙관을 결코 포기해선 안된다고 역설합니다.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전망을 부정하는 회의주의자는 변절되고 왜곡된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카가 말한 회의주의자들은 차가운 이성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을 보입니다. 19세기가 역사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 있었다면 20세기는 그에 대한 배신이었죠.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났습니다. 역사는 정말 진보하는가? 21세기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저는 역사가 진보한다는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진보라는 말의 의미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미리 적자면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진보되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현재의 우리가 알 수 있는 역사 진보의 단면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큽니다. 문명의 발전을 인류의 진보로 받아들이기 쉬운 환경이란 의미입니다. 문명의 발전을 책임지는 합리적 이성.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와 만나서 최소비용 최대효과를 미덕으로 삼지요. 지극히 유물론적입니다. 유물론적인 진보의 가장 큰 단점은 넓은 의미의 문화지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도 거들면서 물질에 기초하여 사고하는 유물론이 아닌, 물질만을 생각하는 유물론으로 변질되는거죠.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이 이론은 이상적이었지만 현실에선 종국에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다 고꾸라진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둘째로 역사 서술이 승자의 입장에서 쓰이기 쉽다는 점이 생각해야 합니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후술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해석도 중요하죠. 예를 들어 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상 다시 있어선 안 될 공포인 동시에 히틀러라는 희대의 악당에 대한 정의의 철퇴입니다. 냉전의 결과는 그야말로 역사의 종언입니다. 하지만 만약 히틀러가 이겼다면, 소비에트가 미국을 눌렀더라면 어떤 역사로 흘렀을까요? 나치가 지배하는 세상이 왔더라도 역사는 결과적으로 진보했을 것이며, 붉은 물결이 바다의 푸른 빛보다 넘실거릴지라도 역시 결과적으로 진보했을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존재하든 그 과정은 헤겔의 변증법에 의하면 모든 것이 필요한 과정이었고 합合으로 마무리 된 현재는 반反이 고개를 들 때까진 정正으로서의 위치를 지킬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승자의 논리인 동시에 결과적인 이야기입니다. 다윈의 진화론도 인류 역사의 관점에 대입하면 결과론입니다. 그의 진화론은 상황에 적합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고, 이는 유명한 말로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란 말로 연결되죠
역사는 현재에 있어 화려한 첨단 과학과 기술이란 착시로 인해 진보'되어'지고, 시간이 지난 후 승자의 렌즈 아래 진보'되어'집니다. 역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요.
첫째로 삐뚤어진 유물론을 극복해야 합니다. 물질만을 생각하는 유물론 탓에 인간이 소외되기 때문에 어디가 썩어서 곪아 가는지도 모른채 진보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겁니다. 둘째로 역사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역사가 단순한 기록 이상의 가치를 가지기 위해선 랑케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으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어진 해석이라는 피리부는 사나이만을 쫓아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공자를 읊고, 플라톤을 해석하는 것이 인문학의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를 돌아 볼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인문학입니다. 토인비의 영웅주의적 역사관도, 역사는 개인이 아니라 다수, 즉 민중이 이끌어 나간다고 본 카의 역사관도 우리는 완전 수용해선 안됩니다. 개인은 역사와 사회의 영향을 받되 집단을 맹신해선 안됩니다. 단순한 사람들의 총합에 집단 이성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미지에 속아 넘어가고, 프레임에 갇힌 이들의 변명일 뿐입니다. 개인의 이성이 더 중요하며 이 각 개인의 유기적 연결이야 말로 진정한 집단 이성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들이라고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열명 백명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하다보면 등잔 밑이 어두워지기도 하니까요.
역사는 필연적으로 진보'되어'집니다. 다시 최초의 질문, 역사는 정말 진보하는가? 숱한 의구심을 품고서 고개를 좌우가 아닌 앞뒤로 갸우뚱 하며 예라고 답할지, 확신을 가질지고서 예라고 답할지 생각해봅시다. 역사의 진보를 단순한 착각 혹은 포장이 아니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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