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30일 수요일

현대 중국은 어느 독일을 모방해야 할까?

중국은 분명하게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독일 역사는 비스마르크와 빌헬름2세라는 두 가지 가능성있는 행로를 제시한다. 베이징은 어느 쪽을 택할까?

오늘날의 중국은 거대한 지리정치적 야망을 즐기며 파멸에 이를때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행진하던 산업발전소였던 독일제국의 부활일까? 중국은 한 세기전 독일이 해양강국이 되어 얻으려다가 실패한 “진정한 재해권”에 성공할수 있을까?

만약 헤더 마리 스투르의 조언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알수 없을 것이다. 스투르 교수는 우리에게 베트남과 이라크를 비교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어떤 서로 다른 두 사례들의 비교도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것은 너무 지나치다. 그녀가 정말로 반대한 것은 이라크는 베트남이라는 너무나 일반적인 습관이다.-역사적인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오만과 실패를 약칭인 “베트남”이 되어왔다. 다른 사례를 베트남이라 부르는 건 지적인 경쟁자들과 즐기기 쉬운 길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스투르가 지적했듯히 이러한 형태를 슬로건화 하는 것은 역사를 엉성하게 만든다.

그러나 역사적 비교가 되지 않은 사례를 발견하는 것의 목적은 이것과는 또 다르지 않겠는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회정치학적인 맥락에서 분리된 사례들 말이다.

이제 인정하자면, 두 사례들은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는 닮아 있어야 한다. 과거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교가 될 만큼 크게 공명해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적 모험의 목표는 유사성을 찾아내며, 다른점을 드러내고, 이 기획을 통해 배울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짐작하는-, 전문가들과 학자들은 그들의 예견을 길러낸다.

이라크와 베트남은 중요한 점에서 유사하다. 그 외의 점에서는 다르다.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해내는 과정은 전략적 지혜를 전해준다. 지혜는 좋은 것이다.

다시 독일 제국과 공산 중국으로 돌아가보자. 부상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강대국의 유사성은 -적어도 피상적인 면에서는-충격적이다. 새롭게 통일된 독일처럼, 중국은 산업적 강대국이 되어가고 있다. 독일처럼, 중국은 오랜 분열의 시기와 취약함, 외부세력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부상했다. 그리고 독일처럼, 중국은 판돈을 짊어지고 있는 젊은 체제에 의해 통치받고 있다.

더군다나 바다는 한때 빌헬름 2세와 그의 부하들에게 그랬던것처럼, 중국공산당에게 매혹적으로 손짓하고 있다. 바다는 대륙국가가 스스로를 번영시키고 정치적힘을 밖으로 과시하며,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빛내는 목표 사이에 놓여있다. 베이징은 19세기말의 독일처럼 해외 무역, 상인과 군함, 그리고 해외 항구에 대한 접근을 해양강국의 특징으로 보고 있다. 두 독재정은 상업적, 그리고 해상에서의 위력을 –침착하게 축적하기 시작했다.

두 (해상강국) 지향국가들의 유사점은 많으며, 또 충격적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차이점이 많고, 또 동등하게 비교된다. 생각해보자. 몇 년전 중국중앙방송은 대국굴기라는 제목의 TV시리즈와 책을 편찬했다. 이것은 과거에 부상하는 강대국들의 성공과 실패에서 배우려는 중국 지도부에게 유용한 열정적인 지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역사가들은 특별히 분명하게도 독일의 경험을 폄하했다. 정책을 가다듬고 외국시청자들을 위해 병용할 때, 베이징은 카이저 보다는 비스마르크를 모방해야한다고 암시했다.

왜일까? 사실, 제2제국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통일을 덴마크,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와의 연달은 제한적 전쟁으로 조정했다. 그러나 이후, 평시의 수상으로서 그는 이웃국가에게 통일 독일이 힘을 비축하는데 “질렸”으며, 그들 영토에 대한 추가적인 구상이 없다고 확신시키는데, 놀라울 정도로 공헌했다. 그리고 그는 식민지와 대 함대에 대해 아주 작은 관심만을 피력했다. 그러한 독일의 해군력 증대 신호는 당대 최고의 대양해군이자, 바다의 지배자인 대영제국의 해군과 싸울 준비를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불필요한 경쟁과 분투를 불러올수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겸손한 대외정책은 그가 베를린에서 임기에 있는 동안 독일을 안전하게 지켰다. 그러한 평시의 국가통치술은 모방할 가치가 있었고-따라서 CCTV의 제작진들은 그에게 찬사를 퍼부었다. 아직 1890년에는 빌헬름2세가 비스마르크를 해임하지 않았다. 이후의 그 어떤 수상도 변덕스러운 왕정을 조정할수 없던 반면, 빌헬름2세에게는 철의 수상의 자기인내심이 결핍되어 있었다. 대신에 카이저와 그의 해군장관 알프레드 폰 틸피츠는 단거리, 중장갑, 중무장 전함과 순양전함의 함대를 건조했다. 당시 대양을 지배하는 것에 의존하던 해상제국인 영국은 이 해군력을 오직 영국의 해군력 우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수 있었다.

사실상, 독일 지도부가 런던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독일 해군력 앞에 길을 비키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영-독 건함경쟁은 1914년 1차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적대감이 증대되도록 도왔다. 중국 역사가들은 이것을 끔찍한 전략적 실수로 보았다. 그들은 중국 당국에게 오늘날 해상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 중국의 전략이 빌헬름2세를 닮아보이지 않게하도록 충고했다. 비스마르크의 사례는 보다 신뢰할수 있는 지침이었다.

현명한 조언이었다. 아직 오늘날까지는 베이징의 해군력에 대한 야망과 그 외교적 이행은 카이저보다는 비스마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비교는 불안을 불러온다. 중국은 딱 독일제국만큼 활달한 지도부를 두고 있으면서 그당시 보다 더 가공할만한 해양국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적 자원, 인력, 조선소등, 좌우간 더 거대한 해양잠재력을 자랑한다. 더욱이 베이징의 아시아연안의 제도들에 대한 안달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해상지리는 독일에 비해 훨씬 관대하다. 독일의 경쟁자는 북쪽과 남쪽의 좁은 회랑을 제외하고는 대서양 외양을 가로질러 접근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의 군함들은 이 해로들을 봉쇄해 영국 제도의 모함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도 독일 대양함대를 차단할수 있었다.

어느 독일 전문가는 북해를 애석하게도 북해를 카스피해와 같은 “사해”라고 불렀다. 베를린은 그렇게 인식해왔었다-그러나 왜 애를 썻을까?

상대적으로 말해, 지리는 중국에게 우호적이다. 중국 함선들은 태평양과 인도양의 대양으로 나가는 수많은 진입로를 누린다. 인민해방군은 지상주둔 공군과 미사일전력을 잠수함과 미사일 경비정 집단에 덧붙혀 베이징이 원하는 해상과 하늘을 통제할수 있다. 한편 인민해방군의 주된 경쟁자으로 서 태평양에 요새를 둔 미 해군은 대부분의 함대를 호노룰루나 샌디에고같은 수천마일 떨어진 기지에 두고 있다. 아시아 해양에서의 현장 작전을 해군기지에서 지휘하는 것은 어렵게 비싸며, 위험하다. 이점은 중국에게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국은 해군력에 대해 매우 상이한 지성적 행로를 걸어왔다. 독일은 주력함들의 대등한 함대간의 전투에 대한 미국의 예언자인 알프레드 타이어 마한의 추종자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카이저는 마한의 걸작인 ‘1660∼1783년까지의 역사에 미친 해군력의 영향’을 암기하려했다.

여기에 고무된 베를린은 힘에는 힘으로 주력함대력의 이상적 기준인 영국해군과 군비경쟁에 몰입했다. 신참자가 이미 자리 잡은 강대국을 상대로 전함에는 전함식의 경쟁을 벌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시도했다. 1차세계대전이 임박한 수년전이 돼서야 독일이 전함경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베를린은 잠수함이나 어뢰정같은 비대칭함정으로 자원을 옮겼다. 소 함선들은 1차세계대전 동안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오늘날 아시아에서는 다르다. 중국이 마한의 해군력에 대한 일반적인 논리를 받아들이는 한편, -사실상 이 오래전에 죽은 미국의 해군주의자는 중국에서 록스타적인 지위에 있다-동시에 해군력 발전에 대한 독일의 행태를 수정했다. 인민해방군의 장교와 무기 개발자들은 처음엔 비대칭적 무기에 관심을 두었다가, 항공모함, 미사일구축함, 그리고 상륙정같은 대양함대의 대칭전력으로 에너지를 돌렸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왜냐하면 중국의 해군력 지지자들은 어떻게 해상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가에 대한 그들 전통이 지닌 큰 문제-교역, 기지, 그리고 함선들-에 대한 실질적인 통찰로 인해 마한을 지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능동방어”라는 그의 독트린을 통해 전통적인 해상전략을 지지했다. 마오의 군사저술은 거의 대부분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상대로 전세를 뒤집을 것인가에 관해서이다. 연안에서 이것은 비대칭 전력을 배치해-현대적으로 말하면 접근차단력- 중국의 해안에서 작전을 펼치는 것이 고비용에 위험한 것으로 만들어, 적대국이 이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만 되면 중국의 부전승이다.

인민해방군은 접근차단에 대한 장비와 전략을 대양의 틀에 맞추는 실험에 시간과 여유를 할애했다. 이것은 또한 영국-독일 건함경쟁을 연상시키는 함 대 함 경쟁에도 할애되었다. 열리하다고 할수 있다. 만약 당신이 연안인근을 해안기지의 항공기와 대함미사일로 어느 정도 통제할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근해에 대규모의 잠수함과 소해정을 배치할수 있다면 왜 그렇게 못하겠는가? 왜 마오주의적인 장비와 수단들로 마한주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공산주의 중국과 독일제국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통찰을 제공한다. 결론?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유럽 국가였던 독일은 두 지도적인 해군강국 중에서 깨지기 쉬운 쪽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켜볼 진지한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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