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6일 화요일

제국의 몰락, 오대의 폭풍 (12) 몰락하는 고변과 움직이는 양행밀

이극용, 주전충, 양행밀, 전류. 여러 호걸들은 난세라는 거름 위에 야망의 불길을 던지고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었다. 중국 대륙의 각지에서 많은 군웅들은 일일히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움직이며 착실하게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눈이 멀어져 가고 있는 세력도 있었으니, 이는 바로 고변의 세력이었다.

 여용지 등의 도사들에게 미혹되어 눈이 먼 고변은 별다른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변의 조카인 좌 교위대장군 고우는 여용지의 죄상을 20여 폭에 써서 비밀리에 고변에게 바치면서 눈물로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여용지는 안으로는 신선의 설을 빌려 높으신 분의 보고 듣는 것을 미혹하였고, 밖으로는 권력을 도둑질하여 백성들을 헤치고 상하게 하였는데, 장좌들은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합니다. 세월이 조금씩 깊어져 갈수록 어린 새의 날개는 점차 커져가고 있는 판인데, 만약에 이를 어서 제거하지 않으면 고씨의 아름다운 공로와 공훈은 하루아침에 업성질까 걱정입니다."

 울먹이며 말을 한 고우는 결국 격정을 참지 못하고 크게 울고 말았다. 그러나, 얼떨떨한 기분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던 고변은 그저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너, 혹시 술에 취했니?"


 충언으로 올린 말을 술주정으로 받아들인 고변은 고우를 부축해서 나가게 했는데, 다음날 여용지를 불러 고우가 말한 여용지의 죄상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잠시 간담이 서늘해졌을 여용지겠지만, 곧바로 평온을 가장한 그는 여유있게 대답했다.

 "그 분은 일찍이 자신의 재산이 텅 비게 되자 저에게 도움을 구했는데, 제가 돈을 빌려주지 않았으니 이러한 일로 저에게 유감을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면서 고우가 쓴 편지를 몇개 꺼내어 고변에게 바쳤다. 이 편지들을 본 고변은 틀림없이 고우가 단지 돈문제 때문에 여용지를 욕한 것이라 여겨, 심하게 부끄럽게 생각해서 고우를 만나려 하지도 않아고 몇달이 지난 후 멀리 다른곳에 자리를 만들어 그 곳으로 고우를 보내버리고 말았다.

 이 사이에 도사 여용지는 고변의 휘하에서 자신의 막부를 열었고, 그 위세는 고변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고변의 수하 중에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이제 여용지가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판국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고변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나, 이미 권력의 대다수는 여용지가 장악한 후 였다. 그러나 고변의 이러한 행동은 여용지에게는 위험했기에, 여용지는 측근들인 정기, 동근 등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를 논의했다.

 "고변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늦습니다."

 고변은 이해가 느리니 당장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여용지는 자신이 그 사이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고, 이에 측근 정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과거에 조맹덕이 이런을 말을 했다고 하지요. '차라리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질지 언정, 다른 사람이 내게 빚을 지게 하지 않겠다.' 라고 말입니다."

 이후 마침내 이들은 고변을 독살하자는 무서운 흉계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고변의 수하 장수 중에는 황소 군단에서 항복한 필사탁이 있었다. 이미 고변 휘하의 오래된 장수들은 대부분 여용지에게 처단된 상태에서, 항장 출신이라 입지가 불안한 필사탁은 곧 여용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라 생각해 늘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필사탁에게는 아름다운 첩이 한 명 있었는데, 탐욕스러운 여용지는 늘 이 첩을 탐내고 있었던 처지였다.

 아무리 여용지가 두렵기로서니, 필사탁으로서도 자기 여자를 남에게 빼앗길 순 없었기에, 그는 내심 속내를 비치는 여용지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필사탁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여용지는 몰래 필사탁의 집에 들어가 아름다운 첩을 만났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필사탁은 여용지에 대해 극도의 분노를 가지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것인지, 여용지는 내심 필사탁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지만 이는 되려 의심을 더욱 불러 일으킬 뿐이었다. 또한 진중에서는 이미 노골적으로 필사탁이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때 필사탁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한명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장신검(張神劍)으로, 사실 장신검의 본명은 장웅이었지만 칼을 잘 쓴다 하여 사람들이 그를 신검(神劍)이라 부른 탓에 장신검으로 부른 사내였다.

 이 장신검은 당시에 고우 진알사 자리에 있었는데, 장신검의 딸이 필사탁의 아들과 결혼하여 두 사람이 인척 관계가 되자 두 명은 조용히 여러 계획을 논의했다. 필사탁에게 있어 남은 걱정은 가족 문제였는데, 소문을 들은 필사탁의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늙은 어미와 어린자식들로 인하여 걱정하지 말아라!"

 그래도 워낙 큰 일이기에 필사탁은 한동안 조용히 있었지만, 결국 고향 사람인 정한장, 그리고 장신검 등과 함께 거병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놀라운 소식은 곧 고변이 있는 곳으로도 전해졌지만, 중간에 있던 여용지는 고변이 이를 보면 무슨 난리가 날까 싶어 중간에서 그 일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감출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는데, 이런 일을 어떻게 끝까지 감출 수 있었겠는가? 마침내 필사탁의 군대는 광릉성 아래까지 이르러 결국 성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고변은 필사탁의 모반 자체를 알지 못하였기에 군사를 동원해 전투를 벌인것은 바로 여용지였던 것이다.

 당시 고변은 자신이 건립한 높이 8장의 화려한 건축물, 연화각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떠들석한 소리가 들려오자 크게 놀랐으며, 사태를 알아보니 드디어 필사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알 수 있었다. 당황한 고변은 즉시 여용지를 불러 어찌된 일이냐고 크게 꾸짖었는데, 여용지는 안절부절 하다가 대답했다.

 "필사탁의 무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저러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계산해보건대 저들은 곧 물러나 흩어질 것이고, 설사 그렇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제가 구천현녀(九天玄女)의 용사 중에 한 사람을 시켜 막을 것이니 공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동안 여용지의 이런 이야기에는 질리도록 휘둘렸던 고변이지만, 성 앞에서 적군이 움직이는 상황에서까지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올리 없었다. 고변은 일단 여용지를 어쩌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경고를 내렸다.

 "근래에 그대가 하는 말이 허망함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는 일을 알아서 잘 처리하시오!"

 그렇게 말을 하고는 혼자 울적한 기분으로 있으니, 여용지는 고변의 마음속에 이미 큰 의심이 싹튼 것을 알고 두려워하며 물러났다.

 이때 성 밖의 필사탁은 생각보다 광릉성이 견고하자 자신이 너무 서둘러 거병한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던 판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무렵, 고변은 여용지를 다시 불러 사태의 자초지종을 캐 물었다. 결국 여용지가 모든 일을 순순히 불자, 고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병력을 출동시켜 서로 공격하고 싶지는 않소. 그대는 온화하고 믿을만한 대장 한 사람을 뽑아, 나의 친필 편지를 가지고 필사탁을 설득시키시오. 만일 필사탁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별도로 처리해야 할 것이오."

 일단 여용지는 그 자리에서는 알았다며 물러났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믿을 만한 장수' 라고 해도 성 내의 장수들은 모두가 여용지 자신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런 인물들을 성 밖의 필사탁과 접촉시켰다가는 자신에 대한 탄핵이 더 들어올지 모른다고 생각해, 고변 휘하의 유명한 장수들 대신 자신의 측근을 보내 필사탁을 위로하게 했다.

 모반을 일으킨 필사탁은 필사탁대로, 고변 휘하의 오래되고 유명한 장수들이 와서 자신을 위로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또한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동안 속으로 참고 있었던 여용지에 대한 분노를 사방에 터뜨리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고변의 측근 장수가 아닌 여용지의 측근이 오자 마침내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양찬은 어디 있느냐! 한문은 어디 있느냐! 어찌 그들은 안 오고 이따위 더러운 작자로 하여금 이리 오게 하였는가!"

 필사탁은 사신이 뭐라고 말을 해보기도 전에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화살에 편지를 써서 성 안으로 쏘아 보내 고변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하게 하려 했는데, 미리 그것을 채간 여용지는 중간에서 이를 불태워 버리고 만다.

 필사탁의 공격이 펼쳐지고 있는 동안, 여용지는 불안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아직 고변이 여용지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같아서는 언제 자신을 해꼬지 하려 들지도 모를 일어었던 것이다. 그런 걱정때문이었는지 여용지는 고변을 만날 때에도 수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다녔는데, 갑옷을 입은 병사 100여명을 데리고 온 여용지가 고변을 알현하려 하자 놀란 고변은 잠시 침실로 숨어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나와 고변을 꾸짖었다.

 "어찌 절도사가 머무는 곳에 아무 연고도 없는 병사가 들어오는가? 이것은 반란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말한 고변은 주위 사람들에게 여용지를 몰아내게 했는데, 이렇게 쫒겨난 여용지는 이를 갈면서 고변이 있는 곳을 향해 소리쳤다.

 "내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여용지를 없애려는 필사탁, 필사탁과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고변, 고변을 저주하면서도 필사탁을 막아야 하는 여용지 세 명의 이상한 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이미 고변과 여용지는 틈이 벌어진 상태였지만, 이 당시에 광릉성 내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여용지였다. 고변을 뒷방 늙은이로 둔 여용지는 직접 군사를 배치하여 성을 방비하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병사들이 한 곳을 오래 지키게 한다면 필사탁에게 항복할까 두려워 끊임없이 성내 병사들의 배치를 변경하고 있었다. 그러자 병사들의 가족들은 병사들의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들었고, 병사들 역시 대단히 피곤해 질 수 밖에 없어서 성 내에서는 필사탁의 진입을 바라는 분위기가 점점 번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변은 여용지 몰래 필사탁의 가족을 빼내어 필사탁에게 보내면서, 자신의 편지를 전해 그를 설득하려 했다. 필사탁은 자신의 가족을 다시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께서 다만 저 간악한 여용지와 장수일의 목을 베어 저 필사탁에게 보여주시기만 한다면, 저는 감히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바라건대 제 처자를 인질로 잡아 주십시오."

 그렇게 필사탁의 가족들이 다시 되돌아오자, 고변은 여용지가 이를 눈치채고 인질들을 죽일까 두려워 해 그들을 적당한 곳에 빼돌려 머무르게 했다.

 물밑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필사탁의 소수 병력만으로는 광릉성을 함락시키기 어려웠지만, 근처의 절도사 진언이 보낸 지원군이 더해지자 전황은 급박하였다. 여기에 더해 광릉성 내부에서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병사들이 있자 마침내 필사탁의 군단은 성내로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여용지는 남은 병력을 모아 반격을 감행하여 하마터면 필사탁의 군대를 거의 성 밖으로 몰아낼 뻔했다. 그러나 역시 내부에서 반란군이 나타나 여용지를 잡으려 하자, 결국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여용지는 달아났지만 그의 남은 세력들은 색출되어 죽임을 당했다. 여용지가 고변의 실권을 장악한 동안 그 일파 역시 여기저기에 원한을 많이 사두어 사람들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자 그 분노가 모두 표출되게 되었다. 제갈은은 몽둥이로 맞아 죽은 후 길바닥에 버려졌고, 분노한 사람들의 손으로 눈이 파내지고 혀가 잘라졌다. 정기 역시 몽둥이로 허리를 맞은 다음 팔과 다리가 모두 잘린 뒤, 눈을 도려고 혀를 끊은 다음에 목이 잘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광릉성을 장악한 필사탁은 고변의 가족을 남쪽에 있는 저택으로 이동하게 하면서 무장병력 100명으로 포위했는데, 그 실상은 고변을 가두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고변은 자신의 남은 재화를 무장병력에게 나눠 주면서 틈을 살폈는데, 필사탁은 이 소식을 듣고 고변이 세워 놓은 도사들의 사원에 고변의 자제들을 집어 넣어 사실상의 포로로 삼아 버렸다.

 이제 한때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군웅 중에 한 사람이었던 고변은 모든 실권을 잃고 감금된 처량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또다른 군웅이 움직이고 있었다.

 여용지는 필사탁의 공격을 받자 사방에 지원을 요청했다. 여용지가 구원을 요청한 사람들 중에서는 양행밀이 있었다. 고변의 제안으로 인해 양행민에서 양행밀로 이름을 바꾼 여주의 군웅 양행밀은, 근처의 대세력 고변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처지다. 그런데 이 무렵에 여용지가 보낸 출병 요청이 당도한 것이다.

 양행밀은 이를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의 주위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던 여강 출신 원습은 양행밀에게 유세 했다.

 "고변 공은 사리에 어둡고 분별이 없으며, 여용지는 간사합나다. 그리고 필사탁의 일은 도리에 어긋나니, 흉악한 사람 세 명이 모였는데 병력을 이끌고 오라는 것은 하늘이 회남을 밝으신 공에게 주려는 것입니다. 어서 그곳으로 출병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양행밀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여주의 모든 전군을 이끌고 혼란에 빠진 광릉으로 출격하기 시작했다. 대세력의 종말과 신진 세력의 성장과 함께, 천하의 형세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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