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펭귄과 지적설계론
2005년 9월 13일 The New York Times는 ‘March of the Conservatives: Penguin Film as Political Fodder’라는 기사에서 황제펭귄을 다룬 ‘펭귄 - 위대한 모험(March Of The Penguins, La Marche De L'Empereur, 2005)’이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미국 일부 보수층에서 어떠한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논했다. 기독교계 뉴스 잡지인 World Magazine 평론가는 깨지기 쉬운 펭귄 알이 남극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가 ‘지적설계론의 흔들릴 수 없는 증거’라고 했다. 보수파 평론가 Michael Medved는 이 영화가 일부일처제나 희생정신, 아이를 키우는 전통규범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자연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어떤 아름다움이나 위대함, 숭고함을 느끼고 그것을 우리의 교훈으로 삼는 것은 좋지만, 여기서는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들이 전부 드러났다. 대개 어떤 종교관이나 정치관, 도덕성 등을 강조하면서 어떤 사실을 억지로 자신들에게 편하게만 갖다 맞추는, 그리고 그 사실조차 비전문적이고 잘못된 엉터리 관찰과 착각으로 만들어진 경우이다.
황제펭귄이 왜 지적설계론의 흔들릴 수 없는 증거일까? 황제펭귄이 혹독한 남극 환경에서 잘 살아간다는 사실이 증거라고 한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자식을 낳고 키워서 번성할 수 있는 몸 구조와 생활습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론에서도 펭귄이 그러한 환경에 적응해 몸의 구조와 생활환경이 바뀌어 왔다고 하며 마찬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즉, 남극환경에서 잘 사는 펭귄은 얼핏 보기엔 지적설계론과 진화론 양쪽 모두의 좋은 ‘증거’이다. 다짜고짜 황제펭귄이 지적설계론의 흔들릴 수 없는 증거라는 주장은 ‘진화론’이 뭔지 모른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실은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진화론에서는 혹독한 남극환경에 어느 날 갑자기 펭귄이 짠 나타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원래는 다른 조상인 조류가 있고 그 일부가 남극으로 점차 이동하며 거기에 맞게 진화되었을 거라고 여긴다. 즉 조류로서 원래 하늘을 날기까지 했던 몸 구조와 생활습관을 가지면서 그걸 근본부터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고 기본구조 위에 여러 가지 변형과 추가옵션을 달면서 남극 환경에 적응했다는 게 진화론이다. 즉, 진화론에서는 남극 환경에 정말 잘 적응된 펭귄의 모습(나중에 추가되고 변형된 부분)이 있고 또한 불합리적이고 잘 이해가 안 되는 기본 모습(원래 조상에서 이어져 온)이 함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지적설계론은 완전히 다르다. 지적설계자가 남극 환경에 맞게 펭귄을 처음부터 분자단위로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균 편모 모터까지 지적으로 설계할 정도니까) 완벽하게 설계한다. 따라서 모든 것 또는 대부분이 남극 환경에 적합하게 지적으로 되었지 일부러 다른 조류와 무슨 연관성을 가진 특징을 남길 필요가 없다.
자, 다시 황제펭귄을 살펴보자. 펭귄이 하늘을 날지도 않으면서 다른 새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속이 빈 뼈 구조를 가졌다는 건 지적설계론에서 어떻게 설명할까? 펭귄은 알을 품을 때 발 위에서 힘들게 균형을 맞추며 따뜻한 몸으로 눌러서 덥힌다. 만약 알이 몇 초만이라도 얼음 위에 굴러 떨어지면 얼어서 깨지기 때문이다. 지적인 설계라면 몸 안에서 발육시키거나 알 껍데기을 더 두껍게 하거나, 아니면 따뜻한 곳에서 살게 하면 되지 않나? 그리고 왜 황제펭귄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암수 교대로 100km 이상이나 걸어서 바다까지 갔다 올까?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지만, ‘지적설계론’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새답게 날아서 금방 갔다 오면 될 걸 왜 걸을 수밖에 없는지 지적설계론에서는 어떻게 대답할까?
즉, 지적설계론자들은 늘 자기들이 종교적이 아니고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며, 구체적으로 황제펭귄을 강력한 증거라고까지 내세우면서도 위와 같은 문제점들을 전혀 고민하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어설픈 관찰과 착각으로 엉뚱한 (과학적?) 결론을 내린다.
비슷한 예로, National Geographic 2006년 7월호의 ‘직립 보행, 그 허와 실’을 읽어보자. 인류의 조상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래, 민첩해지고 지능도 얻었고 섬세한 동작이 가능한 손을 가지게 되었다. 지적설계의 증거일까?
인간은 네 발로 걷던 동물의 구조가 그 기본인 탓에 발에 통증을 느끼고 나이가 들면 대부분 무릎을 다치기 쉽고, 정말 많은 사람이 요통에 시달린다. 큰 뇌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지만 현대 의학을 총동원하면서도 아직 엄청난 위험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100년 전만 해도 가임 여성의 주 사망 원인은 출산이었다. 두 발로 걷는 데 필요한 골격 구조를 얻는 대신 큰 머리와 넓은 어깨를 가진 아기가 통과하기 어려운 골반을 갖게 된 것이다. 침팬지와 다른 영장류는 인간이 비해 출산이 훨씬 쉽다. 또한, 손목 관절의 특별한 진화는 섬세하고 교묘한 손 기술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수근관증 같은 손목 질환에 취약하게 되었다. 누군가 지적인 존재가 설계한다면 분명히 이렇게 만들지는 않는다. 진화는 명백하게 땜질을 할 뿐, 기술자 역할은 못한다는 게 National Geographic 의 요점이었다.
사실 지적설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자연을 좀 더 정확하게 관찰한다면, ‘완벽한 설계’를 내세우는 지적설계론과 ‘조금씩 땜질 방식으로 적응시킨 설계’를 내세우는 진화론 중에서 맞는 건 진화론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마치 성경처럼 숭상하며 늘 인용하는 베히의 ‘다윈의 블랙박스’는 필사적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10장에서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디자이너의 정신분석에 의존하는 게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한다. 설계자가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 이상 설계자가 뭘 어떻게 하든 말든 그 이유를 알아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식한테 늘 가장 비싸고 좋은 장난감만 사주지 않는다는 걸 비유라고 들어서 겨우 한 변명이다. 뛰어난 지적설계론 이론가라는 뎀스키도 너무 ‘완벽’을 요구하지는 말라고 주장한다. 정리해 보자.
1. 어떤 생물을 관찰하면서 완벽한 설계라는 식의 허풍은 떨지 말자. 어느 경우에서도 (황제펭귄, 인간의 눈, 인간의 직립 보행) 그런 관찰 결과는 없다. 지극히 편협하고 어설픈 관찰에 근거한 주장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설계론에서 가장 숭상하는 책에서조차 설계자가 꼭 모든 걸 완벽하게 설계하지 않는다는, 그건 설계자 맘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정도이다. (지적설계론을 주장할 때는 최소한 자기들 이론에 대해서라도 잘 알아보고 나서 하는 게 좋다고 여겨진다.)
2. 결국, 그렇다면 ‘(환원 불가능이 어쩌고저쩌고) 완벽한 설계’로부터 지적설계를 증명하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디자이너는 자기 맘 내키는 대로 불완전하고 지적이지 못한 설계를 여기저기 해 놓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뭘 어떻게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론을 세우겠다는 것일까? 지적설계론이 제대로 된 증거도 없고 과학논문도 못 내면서 빙빙 도는 말장난에 그치는 이유는 여기 있다고 여겨진다.
마지막에 황제펭귄으로 다시 돌아와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Michael Medved는 황제펭귄의 일부일처제를 찬양했다. 그런데 그가 인용한 바로 그 영화에서 황제펭귄의 일부일처제는 ‘계절 한정’이라고 가르쳐 준 것은 왜 무시했을까? 우리 인간이 매년 상대를 바꿔가면서 부부가 되는 게 옳다는 뜻인가? 펭귄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가?
그리고 지적설계론에 의지하려는 기독교인들에게 궁금한 점. 펭귄이 일부일처제가 아니면 일부일처제를 포기할 생각인가? 인간이 진화한 존재라는 게 밝혀지면 그 다음 날부터 인간의 존엄에 대한 모든 도덕성을 버리고 살인과 약탈,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갈 생각인가? 우리가 자연을 아끼고 서로 존중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을 스스로 못 하고 꼭 무슨 과학이론이 뒷받침되고 뭔가를 증명해 주어야만 하나? 곧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며 과학을 비난하고 진화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모든 걸 ‘머리’로 해결하고 ‘이론과 증거’가 없으면 자기는 ‘인간’을 포기하고 ‘신앙’을 버리겠다는 식으로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도대체 진화론자와 창조론자 어디가 더 과학맹신주의이고 과학과 증거에 매달려서 모든 걸 ‘머리’로만 해결하려 하는 걸까?
이건 기본적인 과학자의 태도도 아니고 기본적인 신앙인의 태도도 되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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