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인문학의 미래
"간디가 라다크에 갔더라면, 그의 마음이 갈망한 거의 모든 것을 거기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우리가 개처럼 버는 것은 정승처럼 쓰기 위해서죠. 하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승처럼 쓰지 않아도 좋으니 개처럼 벌고 싶진 않다고 말합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덧붙이면서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뭘까요?
제가 고도의 하이 테크를 열렬히 환호하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제 주변이 이미 문명의 첨단으로 가득하단 사실입니다. 그 지나친 뾰족함이 가끔은 거슬리지만, 그 벽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네요. 그래서 사실 라다크의 삶을 무조건 긍정할 순 없습니다. 당장에 모든 조건이 갖춰진다해도 그렇게 살 자신이 없으니까요. 거기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의 삶이 무조건 옳은 것이며 최선의 방식이라면 문명이 왔다고 그들이 그들의 방식을 버렸겠나 싶어요. 하지만 라다크'스러운' 삶이라면 생각해 볼 만하지 않나요? 서두르지 않되 서툴지 않게, 숨 가쁘지도 몸 바쁘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 아니, 그 이전에 타인의 실수와 실패를 감싸주는 마음을 기본적으로 갖춰야겠죠. 노인의 나약함이 경험자의 노련함으로, 젊은이의 엉성함이 엄청난 성공으로의 첫걸음으로 받아들여질 때 이 사회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문명은 인간 자체가 가지는 능력의 확장이자 증폭입니다. 즉, 제 아무리 테크놀로지가 발달해도 그 축은 여전히 두근두근 뛰는 심장이죠. 인간다움은 여행에 있어 풍경 같은 것입니다. 과거 걸어서 다닐 땐 주변을 즐기마 거닐었고, 뛰기 시작하고선 정신 없다가도 지치면 옆을 볼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사나운 모터 소리에 잡아먹힌 고막은 눈에게 앞만 보길 강요합니다 .매연은 시야를 가리고, 창문은 나날이 두꺼워져갑니다. 이미 다져진 고속도로에서 홀로 뭔가 깨달았다고 문을 열고 나올 순 없는 노릇입니다. 사회는 공장의 벨트처럼 돌아가고, 그 흐름을 끊으려다간 내 밥줄이 끊깁니다. 이제와서 자동차를 버릴 순 없습니다. 냉장고도 버릴 수 없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동차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개발'을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충분히 충분한 자동차는 늘 그랬듯 앞으로 가도록 두되, 매연을 줄여 옆을 볼 수 있게 할 수 있는 기술의 향상과 신호등과 휴게소 등으로 실질적인 질서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제조의 개선에 힘을 기울여야죠. 또한 고속도로 뿐만이 아니라 걸음 걷고자 하는 이에게 인도를, 자전거를 타고 싶은 이에게 자전거 도로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들은 당연히 자동차보단 느리겠죠. 국가가 그 속도까지 책임 질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선택을 오직 고속도로에만 허락하여 1분 1초 두려움에 떨도록 나둬선 안되지 않겠습니까? 러닝 슈즈를 달라는 것도, 자전거를 사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기회의 평등을 달라는 거죠.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인기와 그 노선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여러 인문학자들이 이름을 얻으면서, 멘토라거나 힐링이거나 하는 단어를 근두운 삼아 날라 다닙니다. 아무도 인문학에 관심이 없던 시절에 순수하게 학업적 성취, 성찰 등이라 불리던 것들이 대중 위에 군림하는 권위로서 일어서려 합니다. '여전히' 모르는 무지한 대주을 향한 21세기 계몽주의가 인문학의 가면을 썼습니다. 글쎄요, 인문학이 원래 그런 것이었던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다만 인문학이라면 개인의 욕망이 아닌 각자의 신념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 인문학에 대한 신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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