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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월요일

글쓰기는 현대인의 권리이자 의무

올해 출판시장에서 이채로운 현상은 글쓰기 관련 서적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예년에 비해 출간 종수도 늘었을 뿐만 아니라 판매실적도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2014년 2월에 출간된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는 출간 두 달 만에 28쇄를 돌파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연설문과 글쓰기 철학을 살펴 볼 수 있는 이 책은 글쓰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독자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4월에 토트 출판사에서 출간된 <힘있는 글쓰기>는 1981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 된 것으로 독자들에게 실용적인 글쓰기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초보자들에게 호응을 받으면서 출간초기부터 글쓰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이처럼 글쓰기 책이 2~3개월 사이를 두고 빠른 판매고를 보이면서 다른 출판사에서도 속속 관련 책을 출간하고 있거나 준비 중이다.

사실 2013년까지만 하더라도 출판시장에서는 독서 에세이 분야가 주류였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사람들의 가장 큰 화두였다. 그래서 소위 “지식인의 서재”처럼 명사들이 추천하는 책이나 그들이 전하는 지식과 정보를 독자와 공유하는 책들이 인기를 얻었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장정일의 <빌린 책, 산책, 버린 책>,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글쓰기의 전략>이나 <유혹하는 글쓰기>,<논문 잘 쓰는 법>처럼 글쓰기 분야의 스테디셀러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글쓰기는 독서의 하위구조로 받아들여졌고 특정 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는 전문화된 영역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올해 글쓰기 책이 독자들에게 갑자기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스마트폰 보급율이 높아지고 SNS가 확산되면서 글쓰기의 대중화가 이뤄졌기 때문이 아닐까?이전에도 블로그로 대표되는 온라인 글쓰기가 화제가 되긴 했었지만 IT 기술의 빠른 발전만큼이나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기호도 급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사람들은 하루 종일 문자 메시지를 비롯해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등 여러 모바일 플랫폼에서 글을 읽고 쓰기를 반복한다.

글쓰기는 전문 작가나 지식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지만 지금은 누구나 글을 쓰고 수많은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공유한다.이제 글쓰기는 일상화 되었고 대중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갈구하기 시작했다. 글쓰기가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도구가 되면서 그 중요성도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정확한 의사전달, 객관성, 진정성, 설득력, 감동과 즐거움 등 글에 담겨야 할 여러 요소들을 생각해보면 글쓰기 책을 왜 독자들이 찾는지를 알 수 있다.

2014년부터 고등학교 정규과목에 논술이 적용되면서 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글쓰기 수요는 꾸준히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논술시장을 두고 교육계에서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가지만 비단 입시를 위한 논술이 아니라 교양으로서의 글쓰기 교육이 학교현장에서 필요하다.스마트 환경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2030세대에게는 소통의 글쓰기가 활발히 이뤄질 전망이다.이들은 어느 세대보다 능동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나가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만큼 글쓰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또한 4,50대 중장년층의 사회적 글쓰기도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있고 시니어 세대로 갈수록 회고적 글쓰기에 대한 수요가 큰 편이다.최근 아카넷에서 출간한 <글쓰기는 주제다>가 눈에 띈다.저자 남영신은 1998년 국어문화운동본부를 설립한 이래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국어문화운동을 펼쳐 온 대표적인 시민 국어학자이다.

그가 2002년에 낸 <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는 2만여 권 이상 판매되었고 지금까지 글쓰기 스테디셀러로 독자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글쓰기는 주제다>는 복잡한 맞춤법이나 형식에 얽매여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글쓰기의 핵심은 주제화와 뒷받침 문장이며 누구나 쉽고 좋은 글을 쓸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여러 책의 본문과 신문사설을 예문으로 들면서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더 나아가 독자들이 연습문제로 쓴 글을 메일로 보내면 저자가 직접 글을 지도해주는 친절함이 돋보인다.


논술 공부하는 학생, 자기소개서, 강의리포트, 논문을 써야하는 대학생, 보고서, 기획서 작성하는 직장인, 주부, 은퇴자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유용할 실용 글쓰기 책이다.글쓰기를 또 하나의 국어문화운동으로 풀고자 하는 저자의 의지는 이 책의 부록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가 운영하는 “동그라미 글쓰기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이다. 전국 어디든 일정 인원이 모여 글쓰기 모둠을 만들고자 한다면 국어문화운동본부 홈페이지(http://www.barunmal.com)에 들어와 강좌신청을 하면 된다.

이 책 외에도 알마에서 나온 <고종석의 문장>도 관심이 가는 책이다.숭실대학교에서 있었던 강의를 토대로 펴 낸 책인데 저자는 글쓰기에 앞서 교양지식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이처럼 다양한 글쓰기 책들이 출간되면서 글쓰기 영역이 보다 풍성해진 느낌이다.하지만 이런 글쓰기 시장의 호황에 편승한 수준 이하의 글쓰기 지도서도 많으니 좋은 책을 선별하는 독자들의 혜안이 필요하리라 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이처럼 사회적 행위라는 점에서 지금의 글쓰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반가울 수 밖 에 없다.

"현대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지는 권한과 책임에 부응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특히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삼는 민주사회에서는 몇명의 천재나 소수의 지도자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고 지도자로 하여금 자신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도록 요구하고 감시하며 견제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그러려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기업 등 모든 단위의 사회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그 결과에 따른 이익과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글쓰기는 현대인이 참여를 통한 권한과 책임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조율하는데 사용 할 수 있는 가장 품위 있는 연장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글쓰기를 해야한다. 글쓰기는 현대인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남영신 <글쓰기는 주제다> 中에서



 출처 : 인사이트 (http://www.insight.co.kr)  
글쓴이 : 천정한 (출판마케팅 프로젝트 매니저)

2014년 8월 24일 일요일

속물들을 위한 레미제라블 속의 돈 이야기

마리우스는 가난한 청년이지만, 그의 외할아버지는 부자로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외할아버지도 대단한 부자는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Look down - Paris" 부분에서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있을 때 외할아버지가 그 광경을 마차 안에서 지켜보면서 통탄하고 있는 모습이 잠깐 나오지요 ?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이 외할아버지는 마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2인승 작은 마차라도 소유하려면 1달 유지비만도 500프랑 정도로서 엄청나게 비쌌거든요.  이 외할아버지가 마차를 탔다면 현재의 택시 같은 삯마차를 탄 것입니다.  과연 이 외할아버지 질노르망(Gillenormand) 씨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



(이 분이 마리우스의 외할아버지 질노르망 씨입니다.  그는 결코 귀족이 아니라, 그냥 Grand Bourgeois, 즉 앙시앵 레짐 (구 체제)를 지지하는 부유한 시민입니다.  현대어로 하면 수구꼴통 우익 노친네정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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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내, 두 번째 아내는 그의 재산을 하도 잘 관리해서, 어느 날 그가 홀아비가 되었을 때, 질노르망 씨에게는 꼭 먹고살 만한 재산이 남아 있었는데, 즉 거의 전부를 종신 연금으로 예금함으로써 연수입이 1만 5천 프랑쯤 되었는데, 그 중 3/4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게 되어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유산을 남기려는 배려는 별로 염두에 없었으니까.  더구나 그는 상속 재산에는 뜻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예컨대 그것이 '국가 재산'이 되는 것을 보았고, 제3 정리 공채의 변화를 목격했으며, 원장은 별로 믿지 않았다.  "캥캉푸아 거리의 은행 밖에 없지 않은가 !" 라고 그는 말했다.  피유 뒤 칼베르 거리의 집은 앞서 말했 듯이 그의 소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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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 민음사 번역의 문제가 나옵니다.  아마 저 번역은 구글이 나오기 전인 수십년 전에 해놓은 번역 같아요.  저 제3 정리 공채 (tiers consolidé) 라는 것은 불어를 직역하면 그런 번역이 나오는데, 다른 영문판을 보면 이를 'consolidated three per cents'로 번역했더군요.  즉 원금 상환없이 영구적으로 3%의 이자를 주는 3% 통합 영구 채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Consol'에 해당하는 채권인데, 아마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지요 ?  (영국의 consol 영구채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의 토지와 유가증권 http://blog.daum.net/nasica/6862316 참조)  또 원장(grand-livre)이라는 것은 Great Book of the Public Debt 로서, 국채 원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캥캉푸아 거리 (Rue Quincampois)라는 것은 은행이 아니라, 나폴레옹 이전 시대에 파리 증권 거래소 (Bourse)가 있던 거리 이름입니다.  즉, 국채 원장이라고 해봐야 증권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유가 증권에 불과하다, 즉 못 믿을 물건이다 라고 비꼬는 것입니다.




(현대의 캥캉푸와 거리입니다.  현대의 파리 증권 거래소는 이곳이 아니라  Palais Brongniart에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노르망 씨가 작은 2인승 마차라도 소유했다면, 1년에 6천 프랑을 그 유지비로 써야 했는데 (세금, 말 사료 값, 마차 수리비, 마부 임금 등등) 그건 자신의 1년 연금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니까, 당연히 질노르망 씨는 마차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500프랑이면 어느 정도의 액수이고, 1만 5천 프랑이면 또 어느 정도의 금액이었을까요 ?  현재 우리나라 원화 가치로 따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저는 확실히 속물이겠지요 ?

일단 당시 프랑 화의 가치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구절을 레미제라블 속에서 모아보았습니다.  가령 가정에 숙식하는 요리사의 월급은 50 프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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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지기 족속 같은 키다리로 거만한 요리사 하나가, 요리의 명수가 나타났다.  "월급은 얼마를 받고 싶은고 ?" 하고 질노르망 씨는 물었다.  "30프랑입니다."  "이름은 무엇인고 ?"  "올랭피라고 합니다."  "50프랑 주겠다.  그리고 이름은 니콜레트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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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가 외할아버지 몰래 자기 아버지 퐁메르시 중령의 무덤에 가서 슬퍼하는 장면의 삽화입니다.  마리우스는 결국 생전의 아버지는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죽은 아버지를 도서관에 가서 신문 및 정부 보고서를 통해 찾아보고, 결국 보나파르트주의자가 되어 버리지요.  할아버지는 왕당파, 손자는 보나파르트주의자 내지는 공화주의자라... 요즘 한국 사회와 많이 비슷합니다.)


아버지 퐁메르시 중령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급작스럽게 보나르파트주의자가 된 마리우스는, 보나파르트나 혁명이라면 질색을 하던 보호자이자 외할아버지인 질노르망 씨와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마리우스의 변화에 분노한 외할아버지는 마리우스를 집에서 내쫓는데, 그러면서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외손자에 대한 정이 남아 있어서, 마리우스의 이모이자 자신의 딸인 질노르망 양에게 6개월에 60 피스톨을 보내주라고 하지요.  1 피스톨 (pistole)은 10 프랑에 해당하는 옛 스페인 금화입니다.  그러니까 한달에 100 프랑, 1년에 1200 프랑을 보내주는 셈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생활비일까요 ?




(제가 좋아하는 앙졸라도 알고 보면 부르조아 계급 출신입니다.)


마리우스가 집을 나와서 사귀게 되는 ABC의 벗들은 경제적으로 어떤지 살펴보면 그 답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일단 제 개인적인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앙졸라(Enjolras)는 그냥 부자집 외아들이라는 것 말고는 자세한 신상에 대해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 앙졸라만 멋진 빨간 자켓 입고 나오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대충 먹고 살만 한 중산층 집안의 자제인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문제로 궁핍한 흔적이 보이지 않거든요.  그 중 바오렐(Bahorel)의 부모는 농부인데,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자작농인 모양입니다.  그 부모는 '법률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바오렐에게 1년에 3천 프랑의 생활비를 보내주었는데,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이에 대해 '꽤 넉넉한 액수'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마리우스와 앙졸라, 그리고 앙졸라와 마주 보고 있는 그랑테르를 빼면 누가 푀이고 누가 쿠르페이락인지 전혀 못 알아보겠어요.)


다만 ABC의 벗들 중 유일한 노동자 계층인 푀이(Feuilly)가 1프랑의 가치를 말해줍니다.  그는 부채를 만드는 노동자인데, 원래 고아 출신으로서 일을 하면서도 독학을 해서 읽고 쓰는 것 뿐만 아니라 역사를 공부한 지식인입니다.  그는 하루에 간신히 3프랑을 벌었습니다.  노동자라고 해도 일요일은 놀았을테니, 기껏해야 한달에 75프랑을 벌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1년이면 900프랑입니다.  놀고 먹는 바오렐의 3000프랑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액수이지요.

더 자세히 보시지요.  마리우스가 출판사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 때, 그의 가계부를 작성해보았습니다.



(마리우스는 결국 집을 나가서 변호사가 되는데, 정작 변호사로서의 수입은 없고 출판사에 글을 써주면서 돈을 법니다.   애초에 친구인 쿠르페이락이 이 출판사 일을 소개해줄 때 '영어하고 독일어를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인데' 라고 하자, 마리우스는 겁도 없이 '배워서 하지 뭐' 하면서 도전해서, 결국 그 일을 따냅니다.)


대충 이러면 푀이의 생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혼자서는 그럭저럭 먹고 살아도,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이지요.  참고로 마리우스가 저녁 식사를 루이 식당이라는 곳에 가서 매일 외식을 했다고 해서 그가 아직도 부자 시절을 못 잊고 된장남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집은 수도는 커녕 (당시 파리에 그런 거 없었습니다) 난로조차 없는 곳이라서 취사가 아예 불가능했거든요.  마리우스가 그 식당에서 어느 정도의 절약을 했는가 하면 '수프는 먹지 않고, 포도주 대신 항상 물을 마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우스가 원작에서도 미남으로 나오냐고요 ?  예, 앙졸라 만큼은 아니지만 지나가는 여자들이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의 아름다운 흑발 청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는 여자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이유가 자신의 구멍난 셔츠와 팔꿈치가 헤어진 자켓 때문인줄 알고 부끄러워하지요.)


자, 저런 액수가 과연 현재 가치로 어느 정도에 해당할까요 ?  당시 1프랑의 현재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금리며 인플레며 구매력 산업 생산성 등등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냥 금의 가치는 영원하다고 가정하고 계산해보면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옵니다.  전에 왜 마리우스는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 ( http://blog.daum.net/nasica/6862532 참조) 편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당시 루이 금화 (Louis d'Or)는 20프랑 짜리였는데, 당시 원칙은 그 금화를 녹였을 때 나오는 금의 양이 실제 그 금화 액면가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국가에서 주조한 금화는 그 신뢰성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해주었습니다만, 여기서는 계산상의 편의를 위해 그냥 생략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자의 금화, 2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입니다.)


전에 영국군과 프랑스군, 누가 더 봉급이 많았을까 ? ( http://blog.daum.net/nasica/6862363 참조) 편에서 나폴레옹 시대의 영국 파운드(pound)와 실링(shilling), 프랑스의 리브르(livre)니 프랑(franc)이니 수(sou)니 하는 화폐 가치에 대해 쓴 바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도 일단 당시 프랑스 화폐 단위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화폐 단위는 크게 리브르 (livre = 20 sous), 수 (sou = 12 derniers), 데르니에 (dernier)로 나뉘었습니다.   프랑스어로 livre라고 하면 책이라는 뜻도 있지만 원래 영어의 pound에 해당하는 무게 단위입니다.  즉 1파운드 무게의 은에 해당하는 가치를 1 리브르로 정했던 것이지요.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 파운드화의 기호가 P가 아니라 L 모양인 것입니다.)




(설마 이 표시가 영국 파운드 스털링 화의 심볼이라는 거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그러다가 혁명 정부 들어서서 과거의 도량형을 바꾸면서 공식 화폐도 1795년에 프랑 (franc = 100 centimes)과 상팀 (centime)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라는 것이 정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지라, 여전히 리브르나 수 라는 단위도 여전히 혼용되어 쓰였는데, 특히 리브르는 원래 프랑보다는 약간 더 큰 단위였습니다만, 그에 상관없이 1리브르 = 1프랑이라는 약간 부정확한 개념이 그대로 통용되었던 모양입니다.  원본에서는 어떤 경우에는 리브르, 어떤 경우에는 프랑이라는 단위를 썼는데, 제가 산 민음사 레미제라블에서는 그런 구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원본에서는 리브르라고 쓴 경우에도 그냥 무조건 프랑으로 번역을 해버리는 바람에, 1프랑=20수의 개념이 계속 나옵니다.  실제로도 리브르나 프랑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니까, 여기서도 그냥 그렇게 1리브르=1프랑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흔히 나폴레옹을 군사적 천재로만 받아들입니다만, 사실 나폴레옹은 오늘날 프랑스, 더 나아가 유럽 전체의 기틀을 닦은 사람으로서, 오늘날 위인전에 올라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진짜 위인입니다.  아우스터를리츠나 예나, 마렝고 등의 승전보다도 오히려 더 프랑스를 빛낸 나폴레옹의 업적은 바로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 고등학교인 리세(lycee) 제도의 확립 (나폴레옹, 교육을 논하다 http://blog.daum.net/nasica/6862438 참조), 그리고 프랑스 중앙은행의 설립입니다.  그 중 프랑스 중앙은행은 영국의 영란은행을 본 뜬 것이라서 비록 창의성 면에서는 떨어지므로, 나폴레옹의 2대 업적에서는 빠집니다만 (자본에겐 조국이 없다 - 나폴레옹과 중앙은행 이야기 http://blog.daum.net/nasica/6862506 참조)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가가 복위한 이후에도 나폴레옹이 이룩한 이 제도들은 그대로 이어졌던 것을 보더라도, 그의 위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총재 정부 시절 아시냐 지폐의 실패로 인해 하이퍼 인플레를 겪던 프랑스의 재정난은 안정을 되찾았고, 프랑스의 인플레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즉, 1810년 경인 나폴레옹 당시의 물가나 1832년 경인 레미제라블 시대의 물가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위 표가 연도별 금 1 온스의 가격입니다.  지금은 16XX 달러 정도합니다.  금 가격이 이렇게 상상을 초월하게 뛰게 된 것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대공황 때부터 좀 이상하더니 1970년 경에 미국이 금태환 제도를 포기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때 이후 금값은 그야말로 폭등을 거듭했는데, 사실 금값이 올랐다가 보다는 화폐가치가 떨어진 것이지요.)


덕분에 당시 나폴레옹 금화로부터 쉽게 당시 1프랑의 가치를 현재 대한민국 원화로 환산이 가능합니다.  4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 1개 속에 들어있는 금의 양은 11.614g, 2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 1개 속에 들어있는 금의 양은 5.801g 이었습니다.  현재 금 1g의 가치는 원화로 대략 56,000원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레미제라블 시대의 1프랑은 현재 우리 원화로 약 16,000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3년전 영국군과 프랑스군 급료 이야기 쓸 때만 해도 1g에 4만2천원 정도였는데, 그때 사둔 이 골드 리슈 상품을 그냥 유지하고 있을 걸 그랬어요...)


그러니까, ABC의 벗들 중 푀이의 한달 월급은 약 120만원이고, 바오렐이 넉넉하게 써대던 1년 생활비는 약 4,800만원이었던 것이지요.  더불어, 질노르망 씨가 외손자 마리우스에게 '최저 생계비'로 주려고 했던 돈은 대략 연간 1,920만원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졸지에 이름이 니콜레트로 바뀌어야 했던 질노르망 씨 요리사의 월급은 80만원인 것이었지요.  (하긴 니콜레트는 그 외에 숙식 제공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마리우스가 가난하게 살 시절 매일 저녁 루이 식당에서 먹었던 조촐하지만 푸짐했던 저녁 식사의 가격은 1만2천8백원 정도였습니다.  조촐했던 빵과 날계란 점심값은 3200원 꼴이었고요.  그러니까 1년에 식비로 584만원을 쓴 것이고, 그에 비해 1년 피복비는 겉옷 속옷 다 합해서 240만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사정과 비교했을 때 대략 어떤가요 ?



자, 그럼 여기서 좀더 속물스러운 분들께서 솔깃해하실 이야기를 해보지요.  질노르망 씨는 살고 있는 집을 제외한 남은 재산 전부를 종신 연금으로, 그것도 본인 사망시 3/4이 소멸되는 '일부 상속형' 연금 상품으로 다 가입해 놓았고, 그래서 연간 15,000 프랑의 수입이 있다고 했습니다.  원화로 따지면 2억 4천만원입니다 !  충분히 부자집인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풍족한 연금이 나오려면 대체 원금은 얼마였을까요 ?




(종신 연금에도 거치형 즉시형 상속형 절세형 등등 종류가 엄청나게 많더군요.)


그에 대한 설명이, 놀랍게도 레미제라블 본문에서 어느 정도 나옵니다 !  바리케이드 사건이 끝나고, 모두가 화해를 한 뒤에, 질노르망 씨에게 코제트가 장발장과 함께 와서 인사를 하지요.  질노르망 씨는 코제트의 아름다움과 천진함에 반해서 참으로 예쁜 아이라고 칭찬을 하다가, 문득 그녀의 손을 잡고 우울해 합니다.

"참으로 유감이구나 !  내가 그것을 생각하니 !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반 이상은 종신연금이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래도 아직 괜찮겠지만, 내가 죽은 뒤에는, 지금부터 이십 년쯤 후에는, 아 ! 내 가엾은 아이들아, 너희들은 무일푼이 될 것이다 !  당신의 아름다운 흰 손도, 남작 부인, 생활이 궁하여 일을 해야 할 거요."

이때 장발장이 마들렌 시장으로 일하면서 모아두었던 돈 58만4천 프랑을 코제트의 지참금으로 내놓습니다.  현재 가치로 93억4천만원 정도입니다 !!!




(자기야, 이제 우린 폈어 !  우리 아버지가 나 몰래 감춰두신 재산이 90억이 넘는대 !)


아마도 마리우스는 이 돈으로 자기 외할아버지처럼 종신연금을 넣은 모양이에요.  나중에 장발장이 자신이 사실은 전과자이며, 그래서 떠나겠다고 하자, 마리우스는 못 이기는 척 허락하면서도, 장발장이 준 그 지참금에 대해서도 꺼림직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리우스와 코제트와 한 대화가 코제트의 입을 통해서 나옵니다.

"코제트, 우리는 3만 리브르의 연금을 가지고 있어.  2만7천은 네가 갖고 있는 것이고, 3천은 할아버지가 주시는 거야.  너는 그 중 3천 리브르만으로 살아갈 용기가 있겠니 ?"

(민음사 레미제라블 제5편 424페이지에는 '너는 이 3만 프랑으로 살아갈 용기가...' 라고 되어 있는데, 이거 오타입니다.  원본을 확인했는데, 3천이 맞습니다.  단위도 리브르이고요.)




(마리우스가 코제트에게 '그 중 3천 리브르만으로 살아갈 용기가 있겠니 ?' 라고 물었을 때 코제트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  "물론.  난 너만 있으면 돼.")


즉 마리우스는 장발장이 준 지참금은 범죄에 연관된 돈이라고 의심하여, 가급적 그 돈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무튼 여기서 실마리가 나옵니다.  즉, 58만4천 프랑으로 연 2만7천 프랑의 연금이 나오는 것이지요.  원금이 워낙 컸으므로, 아마도 원금은 그대로 보존하는 상품에 가입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연 수익률이 4.62%에 해당하는 연금 상품에 가입한 것입니다.  실제로 1830년대의 프랑스 금리는 대략 4% 정도였으니까, 연금 상품에 가입했다면 저 정도의 금액이 나오는 것이 맞습니다.

저처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40대 가장의 입장에서는 3만 프랑은 고사하고 1년에 3천 프랑, 그러니까 연간 4800만원의 연금만 있다고 해도 목구멍에서 수건 짜는 소리가 들릴 만큼 부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도 항상 어떻게 돈을 모으고 어떻게 돈을 굴려야 제 가족이 생활비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고 고민합니다.  물론 그런 고민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크게 나누면 수익형 부동산에 투자하느냐 연금을 택하느냐 펀드 같은 것에 투자하느냐 그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질노르망 씨나 마리우스 부부는 종신 연금을 택한 것 같아요.




(근데 자기야... 이거 연 4.6%가 과연 최선일까 ?  인플레 헷지는 어떻게 하려고 ?)


그런데 종신 연금이 답일까요 ?  글쎄요,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질노르망 씨가 살던 시대에는 금본위제도 덕분에 장기적인 측면에서의 인플레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즉, 금리보다 물가인상률이 훨씬 낮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10년 20년 후에도 동일한 금액의 연금이 나온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없지요.  그러나, 지금 받는 100만원의 돈 가치가, 10년 20년 후에는 지금 가치의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하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지금 우리나라 금리가 매우 낮은데, 물가는 원유나 곡물 등 원자재 가격 인상으로 인해서 계속 오르고 있지요.  실질적인 마이너스 금리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연금은 아무래도 답이 아닌 것 같아요.  연금이 물가 인상율과 맞물려 계속 증액되는 구조라면 모를까...  그런데 그런 상품은 아직 못 본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욕을 먹는 국민연금 빼고는요.




(물론 단기적인 인플레야 꽤 있었습니다만, 레미제라블 시대인 저 1800 ~ 1840 사이에 실제 인플레는 매우 낮았습니다.  그에 비해 금리는 4~5% 수준이었지요.  저 시대에는 정말 종신 연금이라는 것이 안전한 투자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마들렌 시장, 그러니까 장발장에게로 관심을 되돌려보시지요.  장발장은 코제트와 함께 파리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적선을 하며 '착한 삶'을 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수양 딸인 코제트에게 무려 60만 프랑에 가까운, 즉 90억원이 넘는 거액을 증여해주었네요 !!  이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라는 레미제라블 정신에 좀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  생각해보면 팡틴느의 비참한 최후도 장발장의 탓이 될 수 있습니다.  애초에 팡틴느에게 충분한 급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팡틴느는 직장을 잃으면서 곧장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니까요.  결국 장발장은 우익 보수층이 더 좋아해야 할 인물 아닐까요 ?




(실제로도 팡틴느는 처음에 장발장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때 그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자기가 이 모양이 된 것이 장발장이 자기를 내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장발장이 그녀를 불미스러운 사생활을 이유로 내보내면서 규정에도 없는 퇴직금 조로 50프랑을 준 것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글쎄요.  우익이건 좌익이건 다 집어치우고, 이런 점을 생각해보시지요.  장발장은 그 유리 공장을 운영하면서, 라피트 은행에 자기 명의로 무려 63만 프랑의 금액을 예금했습니다.  이 돈이 결국 나중에 코제트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하지만 장발장은 63만 프랑을 예금하면서 동시에, 지역 사회인 몽트뢰유 시의 빈민들을 위해 무려 100만 프랑 이상을 썼습니다.  일단 빈민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빈민가 소년 소녀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당시 프랑스에는 아예 그 개념 자체가 희미했던 탁아소를 세우고, 무료 약국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난했던 그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바로 잡는 일 중에는 저렇게 정치 운동을 벌이고 바리케이드를 쌓는 것도 있겠지만, 공장을 세우고 사람을 고용하여 사람들이 누군가의 자선에 의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단, 부자라고 해도 별 고용 효과가 없는 부동산 투자나 주식 투자로 돈을 번 사람은 그다지... 비난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사회적 존경을 받을 자격은 없다고 봐요.)


특히 그런 일자리가 새로운 기술 혁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건 정말 인류 전체에 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영화에도 잠깐 나옵니다만, 장발장이 죽기 전에 코제트에게 읽어보라고 주는 편지가 나오지요.  영화 속에서는 그 편지가 '증오심으로 살다가 너를 맡게 되면서부터 사랑으로 살게 된 사람의 이야기'라고 나오지요.  뮤지컬의 대사는 '코제트 너를 항상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실제 원작에서는, 그 편지는 코제트에게 주어진 지참금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해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장발장이 어떤 기술 혁신을 이룩했고, 그로 인한 수익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그러니까 그 돈은 정직한 것이니 부디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그 돈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지요.  알고보면 장발장은 스티브 잡스였던 셈이지요.  이 정도 되는 인물이 자기 수양 딸에게 60만 프랑을 물려준다고 해서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보면 정말 장발장이야 말로 진정한 보수 진영의 영웅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줘야 서민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가짜 보수들 말고) 이런 진짜 보수 인사들로 가득 차있다면 정말 우리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되겠지요.




(장발장은 므슈 포슐르방으로서 코제트에게 베푼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마들렌 시장으로서 몽트뢰유 시의 빈민들을 위해 베풀었습니다.)


팡틴느의 몰락은 장발장이 박봉을 주었기 때문 아니냐고요 ?  애초에 팡틴느가 몰락했던 것은 사실 팡틴느가 고향 마을에 되돌아 왔을때, 시작부터 가구 등을 들이느라 빚을 지고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마들렌 시장, 그러니까 장발장의 공장에 취직했을 때 생각보다 급료가 괜찮았으므로, 팡틴느도 '이젠 살아갈 수 있겠다' 라고 판단하여 마음을 놓고 과감히 빚을 졌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덜컥 뜻하지 않게 직장을 잃게 되었는데, 빚이 있다보니 그 도시를 떠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 손바닥만한 도시에서 탕녀로 소문이 났으니 다른 일거리를 구하지도 못했지요.




(사실 팡틴느가 몰락한 것은 같이 일하던 동료 여자들의 시기심과 천박한 호기심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왠만하면 빚은 지지 마세요.  빚은 부모님이 자유인으로 낳아주신 여러분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못된 것입니다.   특히 갚을 수 없는 빚은 정말 그렇습니다.  요즘 자동차 살 때 할부로 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요 ?  글쎄요... 예전 노예제 시절 사회에서나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중 진정한 자유인이 몇이나 되겠어요 ?  할부금 남은 자동차를 모는 청년은 노예이고, 그냥 버스를 타고 다니는 청년은 자유인인가요 ?  판단은 여러분 각자가 내리셔야지요.





(저 돼지가 여러분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읽어보세요.)



출처: http://blog.daum.net/nasica

2014년 8월 18일 월요일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Understanding Power(2002))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언어의 오남용을 통해 반대의견을 잠재운다.


촘스키는 단순히 정부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을 보라.

“우리 사회에서 진짜 권력은 정치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간경제에 있습니다. 무엇을 생산하고, 얼마를 생산하고, 무엇을 소비하고, 투자를 어디에 하고, 누가 일자리를 가져가고, 누가 자원을 통제하는 등등의 중요한 결정을 민간경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진정한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은 다수가 아닌 소수의 손아귀에 있고 우리 사회의 중심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우리 경제가 곧 우리 사회이므로 사회는 ‘부유한 자들을 계속 행복하게 만들자’는 기조 아래 돌아간다.

촘스키는 개인적으로 고전적 자유주의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며 자본주의 이전에 생겨난 고전적 자유주의가 다음에 초점을 두었음을 상기시킨다. “사람은 자신의 일을 통제할 권리를 가져야 하고 자신의 통제 하에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이 획득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 노동은 부도덕하다는 말이 된다. 스스로 자신의 일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임금 노예이기 때문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경제는 실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본 자체를 위한 최선의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그렇다고 촘스키가 단순히 권력을 국가 관료제의 손에 넘기는 산업 국유화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장 체제 안에서 실제 노동자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자본을 통제하는 방안을 지지한다. 그럴 경우에만 민주 제도가 경제권력으로까지 확대될 것이고 그때까지는 “국민을 대변하는 정치권력이 대단히 제한된 형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뉴욕 월가 ‘점령’ 시위보다 몇 년이나 앞질러 이렇게 말했다.

“미국 인구의 약 절반이 미국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몇몇 거대 이익 단체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사람들은 스스로 정책결정에 참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별 상관 없는 강력한 이익단체가 정책을 주무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촘스키는 또 환경에 관한 논의에서 생명을 지키고 삶을 향상시키려는 사람들의 욕구와 기업의 이윤 동기가 상충된다고 지적한다. “제너럴일렉트릭 CEO의 일은 이익을 올리고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것이지 환경보전이나 근로자의 복지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목표들은 분명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촘스키는 낙관할 근거를 찾는다. 언론이 진실을 은폐하고 기업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엘리트와 제도권의 상업 및 권력의 이해관계에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의 말대로 환멸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복음전도사, 환경운동가, 더 최근의 예로는 점령 시위대와 티파티 운동 등 대중을 동원하려는 어떤 대의나 집단도 이런 환멸을 활용할 수 있다.

[출처] 놈 촘스키,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Understanding Power(2002))|작성자 흐름

2014년 6월 21일 토요일

[교양] "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면"을 읽고



돈이 없는 사람이 돈이 필요해서 시장에 신장을 자유롭게 내놓고, 또 그 신장이 필요한 돈 많은 신장질환자가 자유롭게 사가도록 하면 어떻게 될까?

시장 원리상 이런 경우 양쪽 모두에게 거래의 이익이 발생한다. 신장이 필요한 돈 많은 부자는 신장을 사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돈이 필요한 돈 없는 사람은 신장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고 또, 신장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부터 순차적으로 양호한 신장이 공급되므로 자유시장·교환이 없을 때보다 신장제공자는 더 높은 가격, 제대로 된 가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이러한 자유주의적(리버태리언) 가치는 세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신장제공자들은 과연 자유로운가? 대부분의 신장제공자들은 자신의 건강을 훼손해가면서까지 돈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할 것이다. 이들의 제공행위는 그들의 절망적 가난 때문에 강제된 것으로서 자유로운 제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둘째, 자유시장 참여자들은 거래되는 목적물의 효용이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특히, 경제적으로 궁핍한 신장제공자들은 신장의 가치, 자기에게 신장이 하나 없어진다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때 어느 한 쪽은 부당하게 손해를 받고 어느 한 쪽은 부당하게 이익을 챙긴다. 자유시장경제에 이러한 효용 판단에 착오가 있어서 어느 정도 부당 이익 또는 손해가 날 수도 있겠지만 신장매매의 경우 그 이익 손해가 너무 막대하며 되돌릴 수가 없다.

부당 이익(손해)의 금지는 자유시장의 전제 조건이자 존재 이유다. 따라서 목적물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은 자유시장의 기본 전제, 존재 근거를 무너뜨린다.

셋째, 신장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없는 신장질환자는 어떻게 자신의 요구를 채울 수 있을까? 자유로운 시장에서 신장이 거래 교환된다면 신장에 일정한 높은 가격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 때 그 가격을 부담할 수 없는 가난한 신장질환자들은 어떻게 신장을 구할 수 있을까? 정부가 신장의 거래를 위한 자유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 가난한 신장질환자들은 그저 죽을 시간을 기다려야 할 뿐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특별한 예산을 투입해 가난한 신장질환자들 상당수를 구원해준다면 자유 시장은 이미 아닌 것이고 사회주의적 내지 사회국가주의적 수정 시장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자유 시장에서 돈 없는 신장질환자는 죽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 같은 자유주의(리버태리어니즘)의 모순때문에 시장에 도덕적 가치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경제학과 시장이 객관성과 과학성을 확보하면서 효율성을 추구하며 도외시한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 경제학과 시장은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급기야 샌델은 "incentivise"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싶다고 까지 말한다. 인센티브, 유인이 없는 시장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의 부정이다.

마이클 샌델의 이러한 주장은 집단주의 내지 도덕적 공리주의에 입각한 주장이다. 그런데 마이클 센델이 공격한 것은 시장자유를 옹호하는 리버태리언 의 많은 분파 중에서 보수적 리버태리언에 속하는 비계약론적 자생적질서 자유주의(하이에크 주의)일 뿐이다. 리버태리언 중에는 진보적 리버태리언도 있다. 계약론적 평등론적 자유주의(롤즈 주의)이나 비계약론적 평등론적 자유주의(비르크 주의)등이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다. 즉 샌델의 비판은 리버태리언 중 일부분에 한정된 것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마이클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의 문제는 그가 추구한다는 행위의 준칙이 행복이나 '善( good)'이고 그것이 곧 정의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측정되느냐이다.

이에 대해서 샌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효용을 기수적이 아닌 서수적(序數的)으로 측정할 뿐이라는 해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개인들 사이에서 선에 대해서 어떻게 순서를 지울 것인가에 대해서 과연 샌델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샌델은 모든 개인이 선에 대한 가치가 똑 같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집단주의자들은 모든 개인의 선에 대한 가치가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집단주의의 개인에 대한 폭력이 아닌가?

마이클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의 또다른 근본적인 문제는 선이라는 것은 의도에 의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대하고 하는 목적적행위의 결과물인데,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善을 정한다거나 선(善)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서는 기수적으로 측정하든 서수적으로 측정하든 결과로 나타난 것을 대상으로 측정하는데 있어서 과연 인간의 행위의 계획으로 그 결과를 완전히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허다하게 보아왔다. 신이 아닌 이상 행위의 결과를 완전히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동체는 장기기증을 자유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은 윤리도덕이나 공동체의 선, 정의관념에 위반된다고 하여 금지했다. 그리고 장기이식법을 제정했다. 결과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장기기증자는 줄어들었으며 법제정 이전보다 두배이상 수천명의 환자들이 고통을 받고 죽어갔다. 행위의 결과는 예상한 것과는 반대로 나오는 경우는 허다하다. 샌델의 주장에 따랐지만 공동체 구성원의 도덕적 행위와 고결함에 근거한 기증행위가 이전보다 줄어들고, 더 많은사람들이 고통받게 된 것에 대해서 샌델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은 특수한 예외적인 경우를 가지고 보다 일반적인 보다 많은 경우의 선을 외면하는 것이다. 선(good)을 앞세우며 시장의 인센티브나 유인을 제한한다면 사회전체적인 효용은 떨어진다. 경제는 위축되고 그로 인해 그 사회 구성원들은 전보다 더 낮은 수준의 경제적 효용을 얻게된다. 그렇다면 이것도 과연 공동체의 선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샌델의 선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공동체의 경제적 효용을 제한할 수 있을까? 공동체의 경제적 효용증가는 공동체의 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이상에서 샌델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을 쳐내면서 시장 자유를 전적으로 추구하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이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냈지만 나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입장에서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적 주장이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서 샌델의 사상과 이론체계가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냈다.

-우리 나라에서 샌델의 책 '정의론'이 수백만권 팔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좌파적 공동체주의 사상에 매우 호의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 걸 감안해도 엄청 많이 팔린 것이다. 그런데 샌델의 사상과 이론체계에 대해서 제대로 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못봤다. 과연 수백만 명의 우리 나라 독자들은 샌델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었을까?-

좌파적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샌델 사상과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많이 알려진)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 사상이 서로 서로 문제가 많음을 미봉해서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낫다고 생각의 전개를 여기서 끝낼 수도 있겠지만, 니노 막시무스 쏘냐도르처럼 죽지 않고 남은 사상이 있다. 즉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은 기본적으로 자유 일원론적인 사상이다. 즉 자유를 가지고 평등의 문제와 공공 선의 문제를 해결한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과 같이 자유시장을 원칙적으로 하되 소수자 약자 혹은 최소수혜자의 자유를 높여서 평등과 공공의 선을 보완, 즉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를 계약론적으로 전개할 수도 있고 비계약론적으로 전개할 수도 있다.

일단 논의의 효용을 추구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공격에 보다 더 취약한 계약론적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롤즈주의를 가지고 논증을 해보면, 계약론적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의 대표적인 사상인 롤즈 주의를 공격하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즉 구명보트 모델(Lifeboat model)이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명보트 모델을 가지고 롤즈 주의를 폐기하고 있다. ( http://jonjayray.comuv.com/rawls.html )

구명보트 모델은 다음과 같다. "폭풍이 몰아치고 배가 가라앉는데 탑승인원에 비해 구명보트는 작아서 모두가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다. 롤즈적 리버태리어니즘에 입각해 가장 공정한(fair) 해법은 무엇일까? 롤즈 비판자들인 공동체주의자 내지 도덕적 공리주의자들은 딱 하나의 공정한 해법 밖에 없다고 한다. 배안의 모든 사람이 죽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구명보트 모델상에서 롤즈적 리버태리어니즘에 이러한 문제점이 있어서 롤즈의 아이디어를 폐기하게 되었다고 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는데...

롤즈가 이미 죽은 마당에, 롤즈의 아이디어를 빌려 와서 처음부터 다시 논해보자, 과연 공리주의자들의 비판이 옳은지.

공리주의의 선(善,正義)이론에서 공리주의자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일부 약자들을 희생하는 사회에서 최대행복을 추구할 경우 예를 들어 소수의 희생으로 노예제를 허용하여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 등이 있다. 롤즈는 이것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결과 계약론적 가설을 도입해서 직관주의에 따른 정의론을 주장한다.
 
구명보트 모델에 제시된 문제의 상황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포류하는 사람들간에는 특수관계(모자관계라든지 연인관계라든지 원수관계라든지)또는 특수상태 (어느 누가 정신박약자라든지 하는)가 없다고 가정하자. 문제된 상황에서 공리주의에 따르면 두가지 해법이 가능하다.
 
1. 가장 생존력이 높은 사람들 (예 : 건강이 양호한 성인 남자)을 살리고 생존가능성이 낮은 어린이, 노약자를 희생시켜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2. 아니면 최대한 많은 수의 사람이 보트에 탈 수 있도록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 순으로 1명씩 바다에 던지는 것이다. (어른 한명 희생해서 아이 두명 살리는 식으로) 이렇게 해서 최대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한다.
 
최대행복의 측면은 생환했다는 점에서는 행복의 크기는 모두가 같다고 보고, 최대다수의 행복이 곧 최대의 행복이 되기 때문에 따로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리주의를 따를 때 희생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는 평등한 자유가 있다는 롤즈의 사상에 따르면 희생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것이고 불공평해서 롤즈의 사상에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롤즈의 정의론 (정의의 두 원칙 : 원칙1. 평등우선, 원칙 2. 차등은 필요한 경우에만 차등. 전제조건 : 필요한 경우란 차등이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잇는 경우, 기회는 균등해야)에 따르면,
 
일단, 평등을 우선적용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차등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평등하게 추구되어야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모두가 죽는다. 그러므로 롤스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차등대우가 필요한 경우이므로 차등대우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등대우를 해보려고 하는데... 롤스에 따르면 차등대우는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시키거나 적어도 그에 기여할 경우 허용된다. 또 롤스는 차등은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바다 위에서의 상황에서 차등대우는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고 그가 생명을 잃는 순간 그는 처지가 개선될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즉, 차등대우를 하려고 하지만 그 순간 차등대우 받는 당사자는 죽어버리므로 차등대우 받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차등대우를 적용한다는 것과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한다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기에 애초부터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롤즈의 사상에 따르면 구명보트에서 탑승인원 초과된 상황에서는 차등의 대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차등대우를 할 수 없게 되면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할 수 밖에 없는데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려면 결국 모두가 죽어야하는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자들은 롤스의 사상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롤스의 정의론,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을 버렸다. 여기까지 공리주의자들의 논리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롤즈가 전제한 것이 계약론적 가설이라는 점에서... 가설의 전제를 살펴볼 때, 롤즈의 정의론의 예외적인 경우로 봐야 할 것 같다.
 
롤즈의 이론을 적용함에 있어서 전제조건들에는, 여러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 조건 가운데 "구성원들의 상충되는 제 요구에는 서열이 매겨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런데, 구명보트에 탑승인원 과다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의 요구에 서열이 매겨질 수 없다.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자기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요구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즈의 정의론은 적용될 수 없다.
 
이런 특수한 상황의 경우 롤즈의 정의론이 모순이라고 말할 것 까지는 안되고 그냥 예외적인 경우로서 공리주의가 적용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들이 완전히 똑같으니까 이 특수한 경우에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자. 내가 위에서 샌델의 공리주의 이론을 비판했던 것 처럼 우리 사는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이나 선, 효용에 대한 가치판단 -기수적이든 서수적이든-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고 차등대우가 생명을 잃는 것처럼 차등을 허용할 때 장기적인 조정작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다. 이렇게 아주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해놓고서 롤즈의 정의론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롤즈의 정의론을 버렸다고 말하는 공동체주의,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현실감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공동체주의 내지 공리주의보다는 롤즈의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 더 타당하고 롤즈의 정의론이 여전히 존재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특히, 공리주의를 따를 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희생되는 소수자나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리주의만큼 나쁘고 가혹한 사상은 없다. 공리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인 나라, 특히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는 롤즈의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이론, 즉 평등론적 자유주의 세계관을 좀 더 많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사상은 사민주의자들에게도 자본주의를 신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로 수정된 자본주의를 요구할 때 유용한 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경우 차등, 즉 자본주의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롤스의 철학은 사민주의나 수정자본주의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할 것으로도 보인다.


내가 지금 이러한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 갑자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의 우리 나라 상황이 일자리가 부족한 장기 저성장 사회로서 (http://on.fb.me/1dsCMcI) 독일의 하르쯔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오래전 부터 직감했기 때문이다.

갑오년을 맞이해서 (http://on.fb.me/1dfhbkA) 이 같은 개혁이 본격화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데 우려되는 점은 자유주의적 개혁, 즉 리버태리언적 개혁으로 공공성을 추구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로 알려진 야권은 샌델의 공동체주의 내지 공리주의적 사상에 근거해 자유주의적 개혁을 부정할 것이 예상되고 또 우리 사회의 새로운 보수로 알려진 여권의 하이에크적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그 많은 문제와 한계점을 무시하고 시장 자유와 효율성 일변도로 강공 드라이브를 펼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우려하며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사상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는 것을 한 사람의 리버태리언으로서 알리고 싶다. 현실을 직시해서 모자라면 보태고 넘치면 제하시라.

2014년 6월 13일 금요일

[교양] 에스페란토가 영어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



1. 에스페란토 쓰자는 애들은 에스페란토가 문자 그대로 발음되니까 편하다고 하는데, 그건 영어도 마찬가지로 가지는 장점이다. 즉 지방마다 발음법이 다른게 영어다. 심지어 알파벳을 부르는 명칭도 다르다. 예를들면 호주는 z를 "제트"라고 하고, 영국과 미국은 "지" 라고 한다. 영어는 다인종이 쓰는 언어이기 때문에, 발음만 또박또박하면, 왠만하면 다 알아듣고, 다 각자의 발음이 있다는걸 모두 다가 알기 때문에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남부 캘리포니아는 THE를 "데"라고 발음한다. 그래도 전혀 문제없다.

2. 영어는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단어를 그대로 들여온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어휘를 가진게 영어이고, 지금도 엄청나게 단어가 늘어나는 것이 영어다. 애초에 영어의 생성 과정이, 게르만 언어에다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서 형성된 언어다. 즉 어휘는 독일어와 완벽하게 계통을 달리하지만, 어순은 독일어와 같다. 고대 앵글릭과 현대 영어를 비교해보면 정말 다르다. 이와 같이 영어는 해당 언어의 단어를 그대로 따오거나 자기 발음으로 변화시킨다.

3. 영어는 지방마다 약간 다른 어순을 가지는 경우도 있어서, 어순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doesn't have 던 have not이든 전혀 상관이 없음. 즉 문법상으로 보자면, 영어가 더 괜찮다. 각자 약간의 어순과 뉘앙스가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국경 지방에서는 그 현지 어순에 맟춘 영어가 돌아다닌다. 스팽글리시가 그중 하나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살면 알지만 스팽클리시 써도 듣는덴 전혀문제없다. 물론 처음 이민온 사람들은 알아듣기 힘들겠지만.

4.영어는 각자의 지방마다 다르고, 표준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공용어와 언어 기관이 공식적인 영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엄연히 영국 생각이고, 애초에 영어의 표준을 정하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 지방마다 영어사전이나 영어 문법 정리를 하는 기관이 있겠지만, 전체적인 표준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5. 지금까지의 수많은 기관들과 학자들이 영어를 사용해왔고, 근 현대에서 사용된건 영어였으며, 많은 학술 자료들이 영어로 축적되어 왔는데, 에스페란토가 영어를 대체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각 대륙마다 지방 공용어들이 있다. 남미는 당연히 스페인어가 꽉 잡고 있으며,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은 포루투갈어를 1달만에 마스터한다. 애초에 제주도 사투리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아시아 역시 중국어가 학술용어이자 전통 언어로 자리잡고 있으며, 중동은 당연히 아랍어가 전통적인 언어였으며, 아프리카는 영어나, 프랑스어가 주로 사용된다. 유럽은 말할것도없이, 라틴어가 공용어로 쓰이며, 학문 용어로도 쓰이는게 라틴어다.

즉 이러한 "전통적 학술용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게 영어인데, 에스페란토가 이러한 영어와 전통적 학술용어를 대체할수 있을지가 의심스럽다.

6. 또한 에스페란토 역시 서양 중심의 언어로서 알파벳을 채택하고 있다. 어원이 많은 곳에서 따왔지만 많은 부분이 서구 언어로서 작용해왔으며, 이것을 타 대륙, 한국을 포함한 전통 언어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방에서 사용될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이들은 영어를 배우고 있으며, 이미 전통 언어가 박힌 곳이라 에스페란토가 제 3 외국어라도 차지할수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결론: 에스페란토는 분쟁 지역에나 한정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언어이다. 즉 전면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언어가 될수 없으며, 학술적 용어는 사용이 절대적으로 불가하다.